화목 성사
2021년 4월 18일 본문 말씀: 욥기 22:21-30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22:22)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22:23)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22:24)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 가의 돌에 버리라
(22:25)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22:26)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22:27)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22:28)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22:29)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22:30)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개역한글)
30. 죄 없는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건지심을 받으리라(개역개정)
30. 그는 무죄한 사람을 풀어놓으시는 분, 그러니 자네도 손만 깨끗하다면 풀려날 것이 아닌가?(공동번역)
30. 그분은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신다. 너도 깨끗하게 되면, 그분께서 구해 주실 것이다.(표준새번역)
30. 그분은 죄 없는 사람을 풀어 주시니 자네 손이 깨끗하다면 풀려날 걸세.”(우리말 성경)
30. He shall deliver the island of the innocent: and it is delivered by the pureness of thine hands.(KJV)
30. He will deliver even one who is not innocent, who will be delivered through the cleanness of your hands."(NIV)
30. "He will deliver one who is not innocent, And he will be delivered through the cleanness of your hands."(NASB)
30. 彼は罪のない者を救われる。あなたはその手の潔いことによって、/救われるであろう」。(일 구어역)
30. 清くない者すら/あなたの手の潔白によって救われる。(일 신공동역)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모든 인간들이 선호하는 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들은 이런 하나님을 원합니다”를 대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가 제시하는 하나님상은 ‘자유 없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고유의 자기 권리를 갖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구상할 수 있는 완벽한 신을 인간들은 자신들이 제안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머리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신을 욥의 친구는 나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하나님 같으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성사하는데 있어 인간쪽에서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 내부에 지니고 있는 노림수를 그대로 다 노출한 바가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요청이 하나님의 자유를 가리는 가려버리는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의 아픔과 불편함과 아쉬움을 달래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자유를 옹호하거나 부추기시는 하나님 아닙니다.
그것은 욥이 지금 당한 처지를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인간이 스스로 발췌할 수 없는 근원을 들추어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화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그럴 자격이나 지혜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 5:10)
즉 인간들이 제안한 하나님상은 하나님의 원수이기에 나올 수 있는 가짜 하나님상입니다. 복을 놓고 인간들은 하나님과 흥정에 나설 수 있는 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분이다’는 식으로 높여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대단히 흐뭇하게 생각해서 하나님의 칭찬을 있을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상상력은 하나님의 일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제대로 된 하나님을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친구 곁에 있는 욥의 형편입니다. 욥의 친구는 말합니다. “네가 불의를 행하니까 하나님께서 너에게 복대신 저주를 주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욥이 당하는 고통은, 근원적으로 저주가 아니라 화목을 위한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제시하는 화목안을 거절하시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화목을 시도하십니다. 이로서 인간들이 이해하는 하나님과 정작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하나님이 완전히 대립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다 하나님과의 화목의 구체적인 사례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한 백성을 하나님의 화목을 위하여 어떻게 일하시는 예는 모세를 통해서도 알려집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진퇴양난에 처하게 만드십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모세는 자기 민족의 해방을 위해 뭔가 심각한 일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자신은 아무런 동조자를 얻지를 못합니다.
모세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는 쫓겨서 애굽 국경을 벗어나게 됩니다.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모세의 난관이 끝난게 아닙니다. 낯선 여자들 일곱명이 양떼를 먹이는데 그 동네 목자들이 방해를 놓습니다. 그럴 때 모세는 정의감으로 또다시 관여하여 무사히 양들에게 물을 먹이도록 조치합니다.
이처럼 모세의 입장은 결코 나쁜 짓을 한 징벌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난처한 지경으로 몰아세움을 당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4:11에서도 모세는 곤란한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퍼붓는 심한 원망을 홀로 당하게 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생각보다 현실적으로 더 권력이 센 쪽을 선호합니다. 결코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망칠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쌍방간에 다 좋게 되는 결과를 고대하게 됩니다. 광야에 들어서도 사정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21:5-6에 보면, “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백성들은 모세를 향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요청합니다. 오도가도 못하는 형편보다는 낫다는 겁니다. 비록 노예취급을 받는 시절이 애굽시절이었지만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서 납득이 되는 그 시절이 좋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뭔가 설명이 가능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기만 쳐다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이상적인 자아화를 그리워하고 모델로 삼습니다. 따라서 그 기대가 와해되면 그 대상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공격하게 마련입니다. 이러니 인간들이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떤 식으로 성사시킵니까?
민수기 21장에서 나오는 모세가 든 놋뱀은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건임을 분명히 하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칙과 질서는 하나님께서 지상에 일으킨 사건이 그 내용이 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놋뱀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원칙을 위한 사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놋뱀을 든 것이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요 3:14)
즉 광야에서 모세나 백성들이나 진퇴양난에 빠진 겁니다. 이와같은 예는 요한복음 8장에도 나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강제로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예수님 앞에 당도하게 됩니다. 분노한 바리새인들의 손으로 여인을 향해 던져 돌이 쥐어져 있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그애말로 진퇴양난입니다. 오도가도 못합니다.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땅에 글을 쓰니 분노해서 여긴을 향해 던질 돌을 돈을 움켜진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고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다 가버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화목이란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십니다.
이를 위해 여인은 ‘하나님께서 실시한 화목’의 전형적인 인물로 예수님에게 붙잡힌바 된 겁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요 8:11) 즉 여인은 하나님의 화목이 드러낸 대상입니다. 성도는 스스로 자신을 평가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최종적 운명이 곧 하나님과의 화목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9강-욥기 22장 21~30절(화목성사)21041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2장 21~30절입니다. 구약성경 782페이지입니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도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엘리바스가 방금 이야기한 것이 다 거짓됩니다. 이 거짓된 이야기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바로 세상에서 또는 교회에서 이런 하나님에게 인정받지 못한 엘리바스의 주장을 일요일마다 교회에서 강단에서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게 장사가 잘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말은 엘리바스가 이야기한 것은 범죄하고 저주받은 인간의 말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평소에 뭘 원하고 어떤 상황이 되기를 기대하는지. 그것은 바로 내가 잘되는 것을 내가 원하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나랑 가장 친한 자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와 헤어지기 싫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와 내가 이별을 고하기 싫습니다. 이왕 이만큼 산 거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려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거.
자기가 시골에서 태어났으면 그냥 시골에서 살지 왜 서울로 기어 올라오기는 올라옵니까. 경상북도 저쪽 시골에 가면 청년들 없어요. 청년회장이 65세예요. 이름은 청년회장인데 65세. 청년들 없습니다. 애들 안 낳았습니까? 다 어디 갔습니까? 손자 없어요? 다 갔어요. 어디로? 서울로. 서울로 왜 갑니까? 그것은 내가 되고 싶은 나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를 포기한 적 없어요. 죽을 때까지 포기한 적 없고, 성공한 내 모습을 보고 싶은 거예요. 과거에 뭔가 상실했다면 그걸 빨리 만회해서 내가 되고 싶은 나를 그리워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누가 개입되어야 하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이 개입되어야 하죠.
왜 그러냐 하면 그 하나님 앞에 어떤 형용사가 붙느냐 하면 26절에 보면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라고 여기 엘리바스가 모든 인간을 대표해서 인간의 속셈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에게 전능함, 전지전능함, 모르는 것이 없고 못 할 것이 없는 그분과 관계 맺어 가는 그것이 인간에게 유일한 희망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을 버리지 않으리라고 주장해요. 왜? 너보다 능력이 많으시니까. 이런 이야기는 참 이상하게 이야기하면 할수록 많이 듣던 이야기 같아요. 능력 많으신 하나님. 쉽게 말해서 ‘그 능력 어디 써먹을 겁니까? 저에게 주시지요’라는 뜻이거든요. 여러분 일가친척 가운데서 능력 많은 일가친척 있고 거기에다 마음까지 대자대비한 친척 있다면 여러분은 그냥 못 본 척하고 그냥 가만히 있겠습니까?
늘 전화하고 늘 만나고 해서 잘 보이려고 하죠. 여러분들은 능력있어도 그렇게 치사하게 안 논다고 하시는 얼굴들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여러분들이 빌어먹고 있는 일가친척이 늘 찾아오면 좋겠습니까? ‘돈도 없는 것이 어디를 자꾸 들락거려. 뭘 노리고 빼 먹으려고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저리 가. 오지 마라. 20년 만에 한 번씩만 와라. 너 오면 나는 명절에도 안 간다’라고 하면서 그냥 내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엘리바스가 이야기한 요 이야기를 사실은 요 이야기를 매 주일 설교에서 되풀이하면
그 교회 부흥됩니다. 왜냐 하면 여기 21절에 보게 되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라고 나오는데 참 이 대목을 권사 임직식 할 때 딱 적합한 구절 아닙니까. “우리 집사님이 권사님 되고 난 뒤에 집안이 잘되는지 못 되는지 두고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주의 일 하게 되면 나머지 모든 복을 주십니다”라고 하죠.
그리고 22절에 보면 하여튼 뭐 반박할 여지가 없어요.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라는 이러한 이야기가 누가 이야기 한지를 모르고 그냥 이야기해버리면 참 은혜스럽지요. 참 이런 교회는 어째 이렇게 정답만 이야기하고 진리만 이야기하느냐고 참 내가 교회 잘 골랐다고 탄복하면서 전능자에게 능력을 빼먹기 위해서 무슨 수를 벌일 겁니다.
그런데 이 엘리바스가 주장하는 이 말씀이란 것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거예요. 불의를 행하지 않고 겸손하게 되면 네가 고대하고 고대한 복이 너에게 임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기를 원했던 겁니다. 그러나 복음을 아는 입장, 특히 욥의 입장에 서게 되면 ‘무슨 이런 말이. 하나님이 정말 그런 분 맞아? 하나님이 그런 분 맞느냐?’라고 되묻고 싶을 거예요.
그거는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원하고 좋아하는 하나님.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가씨인데 나중에 결혼하기 위해서 총각을 만날 때 소개팅 나가서 총각 만났는데 그 남자가 하는 말이 자기도 교회 다니면서 목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쭉 펼치죠.
“우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우리는 복을 받을 것이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불의를 안 하고 정의롭게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전능하심이 우리 가정에 임하니까 우리 가정은 얼마나 편하게 될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이런 정신하에 결혼합시다”라고 하면 복음을 아는 아가씨들은 뭐냐 하면 “당신이 아는 하나님이 그게 하나님 맞아요? 내가 아는 욥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다르네요”
이런 하나님 믿었다가 된통 당했던 사람이 욥이에요. 하나님과 화목하고 늘 말씀을 사모하면서 불의를 행하지 않는 그 욥이 망했습니다. 그게 망한 거예요. 이걸 로마서 9장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진짜 하나님이 이 땅에 펼친 뜻은 인간이 어떤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그들 앞에 무엇을 놓았느냐 하면 바로 부딪치는 걸림돌을 놓은 거예요. 부딪치는 걸림돌.
그러니까 십자가라는 걸림돌을 뺀 하나님과 장애요소인 십자가 걸림돌(scandle)을 집어넣는 하나님 중에 어느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냐를 묻는 것이 바로 신약에서 사도들이 외쳤던 복음입니다. 이 엘리바스에게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은 이점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인간이 갖고 싶은 자유로 대체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바스는 자유 없는 하나님을 지금 추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고 말고를 인간이 요청한 데로 하나님은 그냥 따라야 한다는 거예요. 실례지만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혹시 그런 하나님 아닙니까. 여러분의 표정들이 ‘택도 없습니다’라는 표정이신데. 인간은 인간이 주장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내세우는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에 엘리바스가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라고 하지만 인간과 하나님은 화목이 안됩니다. 이게 결정적인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할 수 없습니다. 화목할 수 없으면 인간이 고대하는 모든 복도 날아 가버린 겁니다. 오히려 화목한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를 알아야 해요. 내가 하나님과 원수지간인 것을 알아야 해요. 로마서 5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지간인 거예요. 원수지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악마가 가르쳐주고 집어넣은 엉터리 하나님을 계속 신봉하고 있으니까 원수지간 될 수밖에 없죠.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바치면서 결국 노리는 것이 뭐냐 하면 덕을 좀 보자는 겁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습니까. 덕을 좀 보자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나는 언제든지 겸손할 용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인간이. 가짜 겸손이죠. 얻을 수만 있다면 그까이꺼 겸손, 불의를 행하지 않는 거 충분히 나는 동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28절에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게 한다면 내가 기도뿐만 아니고 철야라도 하죠. 내가 서원한 것을 갚을 수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이건 흥정이고 거래입니다. 주님이 내가 주님에게 이 정도 했으면 주님도 양심의 가책이 있으면 이 정도는 내놓아야죠.
“무엇을 경영하든지 이루어질 것이고” 이건 전국 경영자 협회에서 제일 좋아하는 말씀일 거예요. 전국 경영자 협회. 여의도에 고층건물 지은 전경련 협회. 무엇을 경영해도 다 이루어진다. 29절에 보면 “네가 낮추면 높아질 것이다”라고 나오고요. 한 구절 한 구절이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겠고 다만 내 노림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나는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열정, 집착, 집념, 이거 빼놓고는 아무것도 여기서 나올 것은 없습니다.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 이건 뭐 전도까지 가능하다는 이야기죠. 23절에 보면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 욥은 말합니다. “다해봤다”라고. 다 해봤다는 거예요. 욥이 답답해 미치는 것이 욥은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지혜의 끄트머리에 와 있어요. 한계에 와 있다고요.
바둑 8급이 프로 9단에게 한 수 가르친다고 하니 지금 프로 9단 입장에서는 지금 당황스러운 거예요. 나보다 수도 적으면서. 네가 이야기하는 거 나도 다 안다는 겁니다. 글쎄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게. 나도 그런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그게 하나님이 아니라는 악마의 소행이었다는 거예요. 너를 포기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갑자기 ‘다 포기하지마’라는 성진우 노래가 나오려고 하네요. 너를 포기하지마라는 거예요.
욥은 “나 포기 안 했어. 주께서 포기하게 하신 거지. 내가 미쳤다고 왜 나를 포기해”라고 하죠. 욥은 주님에게 납치당한 거예요. 지금 체포당한 겁니다. 욥은 지금 자수한 것이 아니에요. 갑자기 들이닥쳐서 미란다 고지하고 붙잡아 간 거예요. 하늘나라로. 하늘나라는 그렇게 가는 겁니다. 체포당하는 식으로. 얼마나 철딱서니가 없는지 이런 이야기는 아담의 자손은 모든 인간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악마가 뭘 노리느냐 하면 자유 없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간이 부리는 대로, 인간이 기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얼빠진 아무 맥아지 없는 자기주장도 없는 그런 신, 인간이 제일 선호하는 신이 바로 그런 신입니다. 주님 소매 붙들고 간절히 하는 거예요. 주여 응답해 주옵소서. 우리 가정 행복하게 하옵소서. 주께서는 “이 털손 떼라. 놔라”라고 하시죠. “놓을 수 없습니다. 끝까지 붙들겠습니다”
야곱의 기도가 얼마나 잘못된 기도인지. 야곱이 생각한 복은 야곱의 복이고 하나님이 야곱을 사용할 때는 야곱의 복을 들어준 것이 아니고 인간 자체를 야곱을 없애버린 거예요. 그 현장에 예수님 튀어나오도록.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수님이 튀어나오도록 야곱을 죽여버린 겁니다. 야곱이 두 개의 자아가 있다는 것을 야곱은 생각도 못 했어요.
너를 죽일 때 주님이 생각하는 너를 껍데기로 삼고 그 진짜 야곱다운 약속다운 알맹이는 너를 죽일 때 비로소 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하나님 자기의 형상이고 자기의 이름이에요. 지금 엘리바스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모호한 협상, 타협안, 표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잘해주니까 주께서 잘해주시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게 좋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 번 제가 말씀드리지만 놓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은 인간과 화목하지 않으신다. 화목하지 않습니다. 이 점에서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자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인간이 자꾸 주님의 자유를 방해하니까 하나님의 자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그거는 인간의 자유의 고난 속에서 빠져나가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유가 드러납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구속하고 보복을 가한 거죠. 그런데 부활이 되어버리면 거기서 벗어난 거죠. 십자가와 부활. 따라서 인간이 잡을 수 있는 범주 바깥에서 주님은 마음껏 자유를 즐기고 있고 발휘하고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우리 자유가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속박시키고 있는가를 절감해야 해요. 이 과정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가 있어서 이 정답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해요. 그중에 하나가 바로 모세에게 일어난 상황입니다. 출애굽기 2장 17~18절에 보면 “목자들이 와서 그들을 쫓는지라 모세가 일어나 그들을 도와 그 양무리에게 먹이니라, 그들이 그 아비 르우엘에게 이를 때에 아비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라고 되어있는데 이 대목이 무슨 대목이냐 하면
모세가 자기 독립운동하기 위해서 모세가 애굽 사람과 히브리인을 자기 마음대로 구분을 했어요. ‘나는 애굽 사람이 아니고 히브리 사람이다. 따라서 히브리 사람의 입장에서 너무 압제를 당하니까 애굽 사람에게 적개심을 갖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적개심을 대신 내가 치워준다면 그 히브리 사람들은 나 모세를 지도자로 따르게 된다는 게 분명하다. 내가 총대를 멜게. 깃발 흔들게’라고 하면서 일을 벌였어요.
출애굽기 2장 11~12절에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추니라”라고 나오는데 여기에 히브리인들이 모세에 대해서 분기충천해서 같이 소요를 일으키고 내전을 벌였습니까? 모세 하는 일에 따랐습니까?
모세가 인간이 뭐냐를 전혀 지금 모르고 있어요. 인간은 그 시대의 권력이 만들어 내는 자아상이 인간이에요. 모세가 아무리 깨끗해도 왕궁과 관련되어 있지만 모세 자체는 아무리 봐도 힘이 없어요. 그런데 힘은 어디 있느냐. 바로가 힘이 있어요. 그렇다면 힘센 쪽에 기울어지는 것이 당연하죠.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켰지만, 베드로부터 해서 제자들 입장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이 이적을 일으켜도 기존에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권력보다는 이건 영 게임이 안 되는 거예요.
힘을 가진 편에 서는 것은 인간에게 당연한 거잖아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모세가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나님은 인간과 화목하지 않아요. 화목이라는 자리는 인간에게 없습니다. 없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만은 화목이 되어야 천국에 넣을 수가 있어요. 하나님 쪽에서 어떤 방식으로 없던 화목이 만들어지느냐는 것을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떤 특정한 인간이 자기 자력으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진퇴양난에 그런 질곡에 빠지는 그런 사건을 유발시킵니다. 구약성경에서 해석의 핵심은 이거예요. 율법이라는 것은 그 안에 사건이 담기는 것이 율법이에요. 무교절, 유월절이라 하는 것은 유월절이라는 법은 그 안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유월절 사건이 있었고 그 유월절 사건의 취지가 함축해서 요걸 담아놓은 보자기가 뭐냐 하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그 전에 사건에서 인간은 얼마나 무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거기에 담아놓은 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율법이 오는 순간에 우리는 과거에 무력했던 우리 모습을 재발견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거예요. 말을 이렇게 하면 어려운데요. 민수기 21장 보면 쉽습니다. 민수기 21장에 광야에서 백성들이 광야라 아무것도 없잖아요.
살 희망도 자기 솜씨를 부릴 수 있는 여지도 전혀 없어요. 그러면 자기 존재감도 없어요. 존재감이 없으면 사는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집사님, 아직도 일하십니까?” “노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낫죠”라는 이것이 존재감이잖아요. 존재감이라고요. 일로 떼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일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광야는 일체 이런 것이 없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리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걸 안 받아 줍니다. 천국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이건 자기 기분과 관련 있지 천국과 무슨 관련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존재감이 무시당하는 것 때문에 원망합니다. 나로 나답게 해달라. 나로 희망을 걸고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 것이 인생의 보람인데 이 광야에서는 아무것도 용납이 안 되니까 차라리 노예 생활했던 그때로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모세에게 집단적으로 대들었던 겁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이. 벌써 죽었다는 것을 몰랐어?”라고 하시면서 주님께서는 불뱀을 보냅니다. 불뱀을 보내면서 생긴 법이 뭐냐 하면 놋뱀을 만들어서 쳐다보는 자는 살고 쳐다보지 않는 사람은 그냥 불뱀 물려서 죽게 되는 그런 사건을 일으켰거든요. 그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3장에서 십자가라는 완성된 것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화목할 의사는 없고 오직 자기에게 미쳐가지고 자기를 신봉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그저 하나님에게 도와달래요. 자유를 가질 권한은 인간에게 있고 하나님은 시다바리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고유의 자유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동업자 정도만 되어 달라는 겁니다. 우리 의견 이야기하고 주님 의견 이야기해서 협상 타협하는 것을 그걸 사람들은 화목이라고 하거든요. 오늘 엘리바스가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과 흥정할 필요가 없어요. 흥정할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달라요. 지금 모세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도망을 쳤거든요. 도망을 쳐서 그다음에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어떤 집에 일곱 딸들이 양을 치고 있었는데 17절에 보면 “목. 자. 들. 이. 와. 서. 그들을 쫓는지라”라고 나와요.
여자들끼리 양 치고 있으니까 그 동네 노는 껄렁이들인 남자 목자들이 “야, 여기 우물 세금 냈어? 세금 안 내면 우물물 먹지마”라고 껄렁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한 정의감 하는 모세가 그걸 보고 그 목자들을 흩어 보내고 딸들이 무사히 양들에게 물을 먹게 했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어디를 가더라도 진퇴양난이에요.
늘 쫓기고 앞은 막혀있고 미래는 깜깜하고 보이지 않고 해결책 전혀 없습니다. 패널 건축자재처럼 꽉 끼어있어요. 샌드위치처럼 꽉 끼어있는 인생이에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오가도 못하는 그런 식으로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모세가 그런 입장이었어요. 백성들은 달려들고 하나님은 전진하라고 하고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게 만드는 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유를 엘리바스는 모르고 있어요. 끝으로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결정적인 사례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어떤 여인이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혔습니다. 그 여인의 입장을 생각해 봅시다. 여인에게 하나님의 뜻이 장착됩니다. 그 과정을 보세요. 여인이 간음한 현장에 잡혔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냥 여인을 좋게 대하는 것이 아니고 손에 짱돌 들고 옵니다. 그 여인을 끌고 예수님 앞에 데려갑니다.
데려가서 율법을 들이댑니다. 진퇴양난이죠. 다시 말해서 여인 쪽에서는 할 말이 없어요. 사람이 나에게 어떤 자유가 없음을 알 때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이 입을 다무는 겁니다. 전에 옛날에 주택가를 돌아다니면서 온 주택가에 빨래를 다 걷어갔던 나쁜 원숭이가 있었어요. 그 원숭이가 체포당했을 때 고개 푹 숙이고 있었어요. 그걸 신창원 원숭이라고 하는데.
고개 푹 숙이고 있는데 원숭이 고개 숙인 거 봤어요? 꼭 인간 같아요. 뭐 참회하듯이 고개 숙이고 원숭이는 수갑은 없지만 꽁꽁 묶여서 잡혀갑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이 여자는 꼼짝 못 하고 신창원 원숭이처럼 있습니다. 주님 앞에 데려갑니다. 주님은 무서운 심판주. 뒤에서는 율법이 밀고 앞에는 율법대로 심판하시는 심판주. 이 진퇴양난에 꼼짝도 못 하는 신세가 오늘날 우리들의 신세인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자유가 의미 없게 해주시는 거. 이 틈바구니가 양쪽에서 밀어붙이는 이 틈이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화목입니다. 왜? 하나님은 하나님과만 화목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인간과는 화목 안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이 여인에게 주님이 개입하십니다. 그래서 화목이 되면서 여인은 구원받는 거예요.
뭐라고 개입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글을 써요. 요한복음 8장 8~9절에 보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데 그 글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이 내용은 분명해요.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러니까 양심에 가책이 안 될 수 없는 글을 땅에 쓰신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누구도, 심지어 나 자신이라도, 내가 함부로 나를 평가해서 ‘나는 죽일 놈이다. 저주받을 놈이다’라는 그 평가도 하나님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나를 재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화목용으로 택함을 입었기 때문에 주님의 용서가 어떻게 나 있는 자리에 개입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내가 할 수 있는 내 평가가 손을 놔버려야 해요. 꼼짝없이 우리는 더 이상 나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것은 “나는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입니다. 그것이 성도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화목하심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에 보면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라고 나옵니다. 화목제물이 장착된 주께서 하나님과 주님께서 화목했던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그 모든 율법 완성의 증인으로서 이 땅을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유 외친다고 주님의 자유 다 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자유가 꺾일 때 손댈 수 없는 우리 자신인 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드러나고 계시 되는 주님의 자유를 우리가 맘껏 찬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