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부재
2021년 3월 14일 본문 말씀: 욥기 21:17-22
(21:17)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21:18)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 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느냐
(21:19)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21:20)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21:21) 그의 달 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21:22)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21:23) 어떤 사람은 죽도록 기운이 충실하여 평강하며 안일하고
(21:24) 그 그릇에는 젖이 가득하며 그 골수는 윤택하였고
(21:25) 어떤 사람은 죽도록 마음에 고통하고 복을 맛보지 못하였어도
(21:26) 이 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
욥의 입에서 거침없이 심판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당연히 욥의 친구들에게 퍼붓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그들끼리는 사는 게 너무 평화롭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이란 이 평화를 사정없이 깨는 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욥의 생각입니다. 즉 욥은 자신의 고통을 근거로 하나님의 심판론을 펼칩니다.
심판은 죄가 누적이 된 당사자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자신이 죄 지어놓고 아무런 고통없이 살다가 죽어버리고 그 죄의 징벌이 자식에게 가버리게 되면 이는 하나님의 올바른 심판적용이 되지 못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욥이 심판 대상자를 죄악된 자, 그 당사자를 꼭 찝어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님의 일관성이 의미있게 특정되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욥 자신을 배제하지 않는 채,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원칙을 발휘해서 죄지은 자에게 벌이 주어지고 있음을 생중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하나님의 심판받는 것이 정당할 경우에, 욥 자신이 고통받는 바로 이 사실 속에 욥 자신의 정당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점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맞기에 나의 심판 이론도 맞다는 겁니다. 지금 욥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아직 신약 시대가 아니기에 모든 진실이 다 마무리 되지 않는 상태를 기준으로 했을 때, 욥은 무엇이 누락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욥 자신도 자신이 말한 심판의 대상에 속해 있다는 점입니다. 욥의 친구나 욥 본인이나 모두 심판의 대상이 됨을 욥은 자기 주장 속에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는 곧 욥은 친구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란 타인의 부재가 나에게 고통이 되는 관계입니다. 즉 그대가 있다는 조건이 내가 여기 있어야 될 조건이 되는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이 이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창세기 3:10-11에 보면,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하신 말씀을 유념합시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인간들은 자아에서 출발해서 최종 관심이 자아에 도달합니다. 옷을 입지 않고 있어 부끄럽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관심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후속 사건에 관심있습니다.
아담의 자아성을 배제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실행에 옮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아에 치중하는 자에게는 낯설기 짝없는 고통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예상밖의 조치에 대해서 질려버립니다. 그것은 인간은 늘 자아를 최종 귀착점으로 두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어떻게든 꾸미고 싶어합니다. 젊은 이들이 옷을 가볍게 입는 것은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 자신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벌써 자아가 자아에게 호평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연세가 많은 분들은 자아의 신체를 드러내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차라리 자아를 위해 옷을 길게 입고 바깥에 나서게 됩니다. 자아를 보지 말고 옷을 보라는 겁니다. 옷에 연출된 바로 그것이 나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옷이 외부의 평가를 완화해준다고 믿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다른 기준을 들고 나오십니다. 이 기준에 의해 심판받지 않아도 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기준은 놀랍게도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자신의 시간성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의해서 무참하게 부정당한 그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의 관계에 들어선다는 것은 주님의 시간성으로 대체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어느 쥐 마을에 있는 쥐들이 신나게 파티를 엽니다.
그들 가운데서 재미나게 시간 보내면서 놀 수 있는 공통적인 놀이같은 것이 있습니다. 쥐들은 그 놀이에 몰두 한다고 바깥 사정을 모릅니다. 이 놀이가 재미있다는 것은 그 놀이를 통해서 자아성이 고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쥐들이 노는 것을 잠시 멈추고 진지한 대화를 나눕니다.
“바깥에 있는 고양이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오는 그 시점을 미리 알리기 위해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라줄 것이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드리어 아무나 쥐가 걸려들었고 그 쥐가 강제적으로 쥐의 파티장에서 벗어나야 했습니다. 어느날 그 바깥에 있는 쥐가 돌아옵니다. 털이란 털을 죄다 뽑혔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얼굴에는 폭력의 흔적까지 있습니다. 쥐 세계에서는 화들짝 놀라고 노는 분위기도 잠시 중지가 됩니다. 쥐들은 한결같이 묻습니다. “네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느냐?”고 말입니다. 고냥이 목에 방울 달라고 나간 간택된 쥐가 말합니다. “우리 바깥에 수천 수만 고양이들이 적의가 가지고 쳐들어오기 위해 포위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 쥐가 고양이 목에 방울같은 작용을 하는 쥐입니다. 욥의 고통은 바로 욥이 미처 모르는 고통 내의 시간성의 지향성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게 사람들에게 당하는 예수님의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곧 인간 세계 바깥에 언제라도 불심판으로 세상을 심판할 만반의 태세가 되어 있는 천사들의 관점을 세상 안에서 보여주는 징조입니다.
요한계시록 14:19-20에 보면,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밟는 행위’가 나옵니다. 사정없이 밟아버립니다.
냉혹하고 냉정하게 포도송이 하나하나를 터지라고 밟아버립니다. 세상에 대한 사정봐두지 않는 이런 하나님의 심판 행위는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 인간들이 무관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13:19에 보면,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시는 태도는 언제든지, 그리고 누구든지 죽일 태세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은 바로 이 심판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빼놓고 심판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4강-욥기 21장 17~22절(사랑의 부재)2103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1장 17~22절입니다. 구약성경 781페이지입니다.
“악인의 등불이 꺼짐이나 재앙이 그들에게 임함이나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케 하심이나,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같이 폭풍에 불려가는 겨같이 되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느냐,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쌓아 두셨다가 그 자손에게 갚으신다 하거니와 그 몸에 갚으셔서 그로 깨닫게 하셔야 할 것이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자기의 멸망을 자기의 눈으로 보게 하시며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 하셔야 할 것이니라, 그의 달 수가 진하면 자기 집에 대하여 무슨 관계가 있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자들을 심판하시나니 누가 능히 하나님께 지식을 가르치겠느냐”
욥은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그냥 지식이나 가르치는 분이 아니고 심판하는 실제성을 통해서 실제로 심판함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자신 됨을 드러낸다고 하는 겁니다. 욥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무 죄도 없는데 너희 친구들이 자꾸 자기를 심판하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자기 일을 적용시키는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나에게 너희들이 비난하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말로만 안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불신자 같은 모습이라고 규정을 하고요. 친구들을 악인이라고 감히 단언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나에게 온 이 고통을 너희들이 해석을 해보라는 겁니다. 설명해 보라는 겁니다.
제대로 설명 못 한다면 너희들은 도리어 나로 인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으로 들통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은 너희에게 주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주어지는가. 사람이 죄를 지어놓고 자기의 죄지은 벌을 자기 죽고 난 뒤에 후손들이 받으면 정작 당사자인 죄지은 사람은 아무 영향이 없으니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되 그 사람이 아직 여전히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벌이 주어지기를 욥은 지금 간곡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당사자가 아프다고 해야지 죽어서 사라졌는데 후손과 자기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자기는 죄짓고 발 쏙 뺐는데 현장에 엉뚱한 자식들이 벌을 받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공평한 하나님이겠냐고 언급을 하면서 심판은 죄지은 당사자가 필히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가장 하나님다운 심판이라고 욥은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심판하는 방법까지 욥은 자기 고통에 입각해서 친구들에게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해봐야겠죠. 욥이 선지자인데 감히 우리가 반박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게 구약이기 때문에 반박 가능합니다. 신약의 어린아이라도 구약의 선지자보다 낫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 지혜가 있는 사람은 욥의 이러한 심판이 어디가 하자가 있는지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 결정적 하자가 뭐냐 하면 본인이 하나님 심판 대상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심판을 언급하는 본인이 그걸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남을 심판하면서 정작 당사자도 타인을 심판하는 심판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그걸 인정 안 하고있는 거예요. 자기는 이미 한쪽 편에 서서 상대를 향하여 심판하는데 나까지도 하나님의 심판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욥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구약 때라서 그래요. 구약 때는 인간의 선악 체계가 아직도 가동되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있고 악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은 자꾸 그런 쪽으로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심판자, 신약에 와서 심판자가 파괴하는 허락이 떨어지게 되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인간, 마치 유월절 같아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빼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없으면 작살나는 겁니다. 너 착하니까 의인이니까 빼주는 이런 것은 인간 세계에는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는 의인이 없어요. 이 사실을 욥이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욥 친구도 모르고 있고요. 그래서 욥기를 보면서 인간이 누구에게 말을 한다든지 무슨 이야기 할 때는 자기를 항상 쏙 빼고 자기는 의인이라는 자부심을 견지하면서 말을 한다는 사실을 구약을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예상하고 하나님은 내 편이라고 기대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일을 하시냐면 하나님은 내 편이 아니에요. 바로 이런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질려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내 편 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질려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뭔가 기존에 기도한다든지 하나님께 뭔가 잘해보려고 할 때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우호적인 태도가 있을 거라고 마중을 나와 줘야 신앙 생활할 보람이 되잖아요.
그런데 실컷 기도하고 헌금도 듬뿍하고 봉사 많이 했는데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언질을 주시는 겁니다. 성경을 네 중심으로 봤다는 것이 네가 오류가 있고 잘못이다. 성경은 예수님 중심이지 내 중심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 나도 예수님 하나님 심판의 대상 항목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걸 만약에 욥이 보게 되면, 그게 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대척 관계에 있는 욥과 욥 친구가 싸우니까 하나님이 해결자로서 투입하십니다. 투입하면서 욥에게 빠진 부분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욥은 친구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 다 잘났다고 이 코로나 시대에 침 튀기면서 논쟁이란 논쟁은 가진 무기, 가진 지혜를 다 끄집어내서 싸움을 벌이는데 정작 그사이에 사랑이 없어요.
신약에서는 사랑으로만 구원받거든요. 그러나 구약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잘났다는 것만 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미 사랑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기 포기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넘어오면서 하나님께서 없는 사랑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해요.
욥의 입장에서 사랑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또 하나는 욥의 친구 입장에서 사랑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먼저 욥의 친구 입장에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지금 평화로워요. 친구가 아픈 것은 맞지만 자기는 안 아파요. 되게 기분 좋아요. 평화롭고 인생이 아주 정돈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욥만 지금 길길이 뛰고 있어요. 너희들은 친구라면서 왜 내 아픔을 모르냐고 해도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 다급하지 않아요.
그냥 말로 위로하는 거예요. 네가 잘 생각해봐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회개하면 복 받을 거라고 하면 그걸로 끝이에요. 이러한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아무것도 연결점이 없다는 이것은 오늘날 욥 친구들을 통해서 우리의 실존 우리의 현 상태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떤 체코의 두 남녀가 사랑했어요. 여자는 항상 엄마에게 주눅 들어 살아가고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없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그런 여자인 반면에 남자는 굉장히 자기 의사를 앞세우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두 사람이 연애하다가 소련이 탱크를 밀고 들어와서 프라하의 봄 사태를 일으키고 체코가 완전히 공산주의로 압제 받으니까 그게 싫어서 둘 다 따로 체코를 떠나는데 남자는 덴마크로 가고 여자는 프랑스로 갔어요.
각각 그렇게 떠나면서 둘 다 무슨 병에 빠졌느냐 하면 향수병에 빠졌어요. 향수(nostalgia). 과거가 그리운 거예요. 그때 그 시절이 너무 좋았던 겁니다. 그렇게 20년 동안 하나는 덴마크, 하나는 프랑스에 살면서 옛날로 돌아가서 만나게 되면 옛날처럼 열렬히 사랑하리라 하는 그 희망 하나로 향수를 무기 삼아 버티고 있는 거예요.
체코에서 사랑에 대한 속담에 이런 게 있습니다. ‘나는 너에 대한 향수가 있다’라는 이게 사랑의 표현 중에 최고라는 겁니다. 이걸 풀이하면 ‘나는 너의 부재를 견디지 못하겠다’입니다. 나는 네가 없음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거죠. 사랑으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은 나의 부재가 아니라 너의 부재가 나를 더 이상 살지 못하게 한다.
그러며 나를 살리기 위해서는 없음이 아니라 있음으로 바꾸려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20년 만에 고국에 돌아갔는데 드디어 공항에서 둘이 만났습니다. 만났는데 딱 만나자 그들이 생각했던 그 사랑은 20년 전에 향수 속에 있던 기억 속에 있던 사랑일 뿐인 것을 알았습니다. 왜? 모든 시간성이 달라졌어요. 자기가 살아왔던 모든 시간성.
20년 동안 세월이 그냥 공으로 흐른 것이 아닙니다. 20년 동안 인간의 자아는 계속해서 벌써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그때 그 사랑을 못 잊어요. 남자는 다 잊었어요. 우연히 공항에서 만났는데 여자는 잊지를 못하는 겁니다. 남자는 현재를 가볍게 살기 때문에 존재의 가벼움이에요. 그런데 여자는 자꾸 과거에 좋았던 것을 생각하니까 존재가 무거워요.
그 무거운 여자를 누가 좋아합니까. 사정없이 걷어 차버리죠. 나는 너와 더 이상 관계 맺고 싶지 않다. 과거가 좋다고 사는 여자와 내가 어떻게 감당 못 하겠다. 가거라. 너의 갈 길로. 나는 너의 존재 무게를 감당 못 하겠다. 사정없이 밀어버렸습니다. 욥에서 고통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잖아요. 그러면 욥의 고통 안에는 분명히 사람의 시간성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성이 살아 있었던 거예요.
이건 욥도 몰랐고 욥의 친구도 몰랐던 겁니다. 성령을 받아서 오늘날 우리가 신자가 될 때 여전히 우리 육신 속에는 나의 기억과 나의 시간성이 살아 있어요. 예수 믿고 내가 원했던 내가 좋았던 그때 그 시절을 주께서 보상으로 만회해 주시기를 간절히 고대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에 얽매인 나의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존재의 무거움이에요.
제가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부부 사이라도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을 인정해 주려면 과거를 잘라야 해요. 과거에 네가 나에게 이런 약속 했다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해요. 부부가 부부 되려면 서로가 현재만 감사하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만나야 해요. 그런데 ‘과거에 내가 너에게 시집올 때 잘해준다고 했잖아. 당신은 남편이 되어서...’라고 과거에 매여있으면 둘 다 납처럼 무거워요. 둘 다. 무거우면 집구석 들어가기 싫죠. 가벼워야 하는데 과거를 털어버리고 만나서 대화해야 하는데.
제가 아까 사랑이라는 것은 상대의 부재를 못 견딘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러면 과거의 상대 말고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를 나의 부재를 채울 수 있는 주님의 현재로 받아들여야죠. 사랑 관계에 물질, 사물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진주 목걸이 사줄래?’ ‘아니요, 나는 돈을 돌로 보기 때문에’ 진주 목걸이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면 안 되거든요. ‘돈 아깝다고 해라. 솔직하게. 고상한 논리 대지 말고’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서로의 얼굴을 허락 없이 만질 수 있는 관계예요. 얼굴을. 사람의 얼굴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허락 없이 만진다고요. 부부는 스스럼없이 만집니다. 허락 없이 만질 수 있는 몸이라면 한 몸이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자기중심으로 유지해서는 이게 신약의 구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원인을 어디서 찾는가. 창세기 3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데요. 제가 한 번 보겠습니다. 범죄 후에 하나님이 아담 하와에게 찾아왔어요.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10절에 이야기하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기서부터 어려워요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네가 지금 벗었다는 것을 너는 관심을 갖는데 하나님인 나에게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벌써 관심사가 달라요. 시간성이 다르다고요. 하나님이 추구하는 시간 끝 지점의 목적과 아담과 하와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끝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는 계속 자기에게 쏠리고 있어요. 그 문제가 옷을 입는 문제입니다.
젊은 남자들이 웃통 벗고 사진 찍고 하잖아요. 그걸 짐승돌이라고 하는데 똥배 나오고 그러면 안 되고 몸매를 돈 들이고 관리한 사람은 웃통 벗으면 짐승 같은 남성미가 비친다고 짐승돌 하거든요. 웃통 벗고 여자는 다리 내놓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자아에 자신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를 보는 시선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 거예요. 젊기때문에. 젊음 자체가 아름답잖아요.
그런데 나이 60 넘고 70 넘은 분에게 죄송합니다만 70 넘은 분이 다리 내놓고 웃통 벗고 그러면 민폐예요. 민폐. 뭐 보여줄 게 없잖아요. 보긴 뭘 봐. 볼 게 있어야 보지. 그러니까 볼 게 없다는 자아를 뭘로 감추느냐 하면 긴 드레스로 자기 발목까지 감추는 거예요. 옷에다가 자아를 입혀서 연출하는 겁니다. 내 옷을 봐라. 얼마나 멋있느냐.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아 성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동조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욥이 이야기하는 심판은 욥은 친구들이 이렇게 당할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욥까지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을 때 지금까지는 욥 친구들의 입장이에요. 자아 내세우기 위해서 평화롭게 하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더한다면 욥의 친구들에게 적당한 우리나라에 옛날 전래동화가 있어요. ‘장화홍련전’이라는 게 있어요. 어떤 선비가 여자와 결혼해서 장화라는 딸과 홍련이라는 둘째 딸을 낳았는데 엄마가 일찍 죽고 말았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그 두 딸을 너무너무 이뻐했어요. 어느 날 세월이 지나서 그 선비가 새엄마를 데려왔는데 새엄마가 아들 셋을 낳았어요. 제일 큰 아이 이름이 장쇠예요.
어느 날 자기 아들 세 명이나 낳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남편이 죽었던 전 여자의 두 딸인 장화 홍련을 너무너무 사랑하고 이뻐하니까 그걸 몰래 보았던 새엄마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이 두 딸에게 가는 것을 무서워해서 자기가 낳은 큰아들을 시켜서 장화 자는 방에다가 꼬리를 자르고 털을 다 밀어버린 쥐를 넣어놨어요. 그리고 장화가 행실이 나빠서 임신했다가 아기를 낙태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수습하기 위해서 장화를 자기 친엄마 집인 외가로 보내야 한다고 이야기해요.
그리고 보낼 때 나쁜 새엄마가 큰아들을 시켜서 가는 길에 장화를 물에 빠뜨려 죽이죠. 그리고 둘째 딸도 언니 찾아가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마을은 평화롭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욥의 친구 입장은 뭐냐 하면 억울한 두 귀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평화로워요. 욥의 친구들은 굉장히 평화로워요. 욥이 왜 그렇게 발작하는지는 모르겠어.
‘아프려면 혼자 아파라. 네가 아프다고 해서 우리가 불행할 이유는 없잖아’라고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욥의 친구입니다. 그런데 장화홍련전에서 보게 되면 두 자매가 귀신이 되어서 그 마을 원님에게 왔는데 오는 원님마다 다 죽어요. 마지막에 용감한 원님이 와서 그 사태 사실을 쭉 이야기 듣고 난 뒤에 그 원님이 새엄마와 아들들을 처벌하고 난 뒤에는 다시 마을에 평화가 돌아왔다는 것이 장화홍련전이에요. 복수를 제대로 했죠.
자 그렇다면 이게 거짓된 평화에요.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욥은 뭐냐. 뭐냐 하면 하나 예를 들면 쥐들이 술 파티를 벌여서 자기들끼리 재미나게 놀아요. 그런데 밖에 고양이가 배회하는 것이 껄끄러우니 누가 방울을 달고 올 것인가 가위바위보로 정해서 어떤 쥐를 고양이가 있는 바깥으로 보냈어요. 보내고 나서 자기들은 술 파티하며 신나게 놀았습니다.
좀 있다가 바깥에 나간 쥐가 돌아왔는데 털은 털대로 다 뽑히고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왜냐 하면 파티하는 그 주변에 고양이가 수만 마리 수천 마리가 있었어요. 공격하려고. 욥이 받은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평화롭고 자기들끼리 인생 행복하고 아무 문제 없고 세상만사가 이렇게 고요하고 순수하게 정상적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그 와중에 완전히 털은 죄다 뽑히고 얻어맞아서 만신창이로 피 흘리는 쥐 한 마리가 쑥 들어왔을 때 그게 바로 욥의 모습이에요. 바깥 사정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바로 주님이죠. 만신창이.
요한계시록에 하나님이 심판을 언급할 때 요한계시록 14장 19~20절에 이런 말씀 있거든요.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일천육백 스다디온은 4*4*1000이죠. 이것은 이 세상 전체를 말하는 거예요.
바깥세상. 술 파티하는 인간들 자기들만의 세상 말고 바깥 전부 세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그 틀을 밟는다고 나와요. 그냥 짓이기는 거죠. 터지도록. 뭐가? 포도알과 알이 탁탁 터지도록 사정없이 짓밟아 버리는 거예요. 이게 우리 바깥 사정입니다. 그걸 욥이 고통 가운데 보여주는 거예요. 욥은 자기가 죄가 없다고 고통 중에 하나님에게 길길이 뛰며 하나님에게 원망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고통은 욥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고 하나님 복음을 모르는 욥부터 욥의 친구 모두가 심판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분명한 사실을 같은 구약시대에서는 어떻게 해서 미리 낌새를 주시는가. 에스겔 13장 1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그다음이 중요합니다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 도다”
반대로 반대로 가르치는 속임수가 있는 이 세상에서 평화로운 것이 정상인 줄 알고 고통은 벌 받은 것으로 알고 반대로 이해하는 이 왜곡되고 모순되는 이 세상, 이 사실은 우리가 바깥 사정을 아는 털 다 뽑히고 만신창이 된 그 쥐의 안목에서만 이 세상에서 쥐들끼리 모여있는 좁은 견해의 이 세상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랑이라는 것은 나도 심판받아 마땅하고 나도 그냥 쥐새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개에 불과하다는 것을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한 그 전제하에 비로소 사랑은 사랑으로 맺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욥은 기다려야 하겠죠. 만약 주위에 우울증 환자가 있다면 옆에 일가친척은 늘 마음이 조마조마하죠. 저거 언제 또 5층에서 뛰어내리지 않을까. 늘 걱정이고 조마조마 하지만 실제로 남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언제 불 심판 떨어질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처지를 조마조마해야 합니다. 천국은 이미 왔어요.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 천국은 온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그 안목이 진짜인지 아니면 남들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야기하는 이 안정되고 평화로운 세대가 영원히 계속된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이 옳은 것이지는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 안에 들어갔다가 나와봐야 서로의 시간성이 다르다는 것을 서로의 기억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과거의 향수병에 잠기면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럴 권한도 자격도 없습니다. 새로움이에요. 이건 지금껏 내가 느끼지 못한 새로움. 내가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조차도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히 그 일을 맡겼기 때문에 비로소 이제는 남 탓할 거 없이 저주받은 자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사랑하시는 주님으로 하여금 마음껏 우리의 얼굴도 만지고 눈도 만지고 다리에 무좀 생기게 만들고 마음껏 주께서 다룰 수 있도록 내맡길 수 있는 저희들 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은 몰랐습니다. 자기는 남을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우리도 또한 태어나면서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발견하고 난 뒤에 우리가 심판의 대상이었음을 우리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님의 심판마저 감당할 정도로 주님 사랑의 관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