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제물화된 성도

아빠와 함께 2021. 3. 29. 09:54

제물화된 성도 

2021년 3월 28일              본문 말씀: 욥기 22:1-5

(22: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22:2)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22:3)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22:4)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22:5)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욥의 친구는 여전히 욥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 과정에서 욥의 친구는 평소에 자기가 알고 있는 신에 관한 지식은 총동원되면서 그 최종적 수준을 노출하게 됩니다. 욥의 친구들의 문제점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선과 악, 혹은 악과 의로움의 지식이 그대로 연속적으로 신의 세계까지 통한다고 여깁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러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그 높은 도덕성과 정의감은 너무나도 고상해서 신께서는 군말없이 수용하리라고 짐작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의해서 일방적으로 고난받는 욥의 고난을 해석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가 연속적일 줄 알았던 세상 사람들은 욥을 통해서 불연속적임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는 여전히 고집이 셉니다. 그들이 이런 고집을 부리는 이유는, 선과 악 사이에서 자신을 선한 쪽의 인물이라고 선언하고 싶은 겁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중에서 좋은 놈이 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다른 존재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놈’입니다. 이 이상한 존재는 자신이 자신을 설명할 길이 없는 겁니다. 좋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좋은 의도, 좋은 목적, 좋은 삶의 태도가 갖추어진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삶은 일찍이 욥이 다 해온 겁니다.

욥은 결코 욥의 친구들이 이해하는 것처럼, 자기 의를 하나님에게 자랑하고 보이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욥이 하나님에게 잘해 보이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선방 날리신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욥으로 하여금 ‘제물화’시키기 위함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상을 욥의 인생속에 미리 집어넣으신 겁니다.

욥은 본인이 원하지 않는 ‘이상한 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욥의 의도적으로 ‘이상한 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일은 이처럼, 선과 악의 논리에 갇혀 있는 인간들로서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근거와 자리를 만들어내십니다.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생각하느갸가 아닙니다.

이상한 자리는 친히 하나님께서 마련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신의 자리와 자신의 세상관점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받아들어야 한다.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연속성’입니다. 중간이 끊어져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끝까지 선과 악의 체계를 고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을 수가 있습니다. “선과 악 사이를 구분하는 그 경계선에 무엇이 있을까?”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그 중립선은 어떻게 형성될까?”를 따져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경계선상에 인간은 필히 자신의 ‘잘났음’을 위치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점 사이를 그으놓은 것은 수학에서 ‘선분’이라고 합니다.

이 선분을 두 조각으로 나눈다고 생각해봐요. 그러면 그 경계선이 정해질 겁니다. 그런데 그 경계선 지점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그러면 그 좁디 좁은 경계선을 또 두 영역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선과 악으로 말이지요. 선과 악은 이런 겁니다. 선은 반대편에 악을 요청합니다. 악이 나타나야 선이 한시적으로 졍해집니다.

하지만 그 선하다고 자부하는 그 내부에서 ‘보다 더 한 선’과 ‘보다 덜한 선’이 상대적 악으로 정해지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인생이란 늘 이런 식입니다. 무조건 저것은 선하다고 확신하지만 약간의 시간을 흘러가면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모호해집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내게 납득이 가도록 그 순간 선과 악 사이를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식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는 겁니까? 그것은 무조건, 이유도 없이 나는 살아남을 가치가 있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를 향하여 지적할 자격이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너처럼 이상한 놈이 되기 싫고 확실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나를 제대로 다지고 다지는 존재이고 싶다는 겁니다.

욥의 고통이 중요한 이유는, 욥은 이상한 죽음을 통해 새롭게 선과 악을 규정하게끔 한다는 겁니다. 즉 ‘제물화된’ 존재가 개입이 없이는 근원적으로 선과 악의 판을 뒤집어버릴 수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불연속성을 연속성으로 바꾸시는 유일한 하나님쪽의 방식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이 세상을 선과 악의 지식 판으로 덮어버리는 작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저갱을 열어 악마의 용병인 귀신으로 세상쪽으로 퍼트리게 하는 작업입니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닙니다. 엄청나게 많이 유포되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8:30-31에 보면, “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귀신들은 인간들을 자기 쪽으로 포섭하는데 늘 성공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평소 마음과 귀신의 마음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죽음이라는 뚜껑의 지점으로 이끄십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선한 자로 자처하는 그 심성이 ’이상한 죽음‘을 유발하게 했음을 알려주는 지점입니다.

그곳에서 성도는 줄곧 평소의 모든 태도가 ’나는 살만해서 산다‘를 자부했던 자이며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불평으로 자세임이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곧 성도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자이기에 제대로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가 됩니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필히 이 자신의 한계선을 경유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에서 남들이 나를 좋게 볼만한 상황들이 벌어질 때 경우라도 그것 속에서 자신의 한계선을 발견하는 것이 성도가 됩니다. “나는 이런 행복을 누릴만 해”라는 태도가 곧 죄이며 나의 한계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0에 보면,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하는 경우는, 너무 고된 일과에 보내면서 지쳐 쓰려졌을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서 ’그동안 모든 것이 내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아는 경계선 건너편의 영역이 보이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그 ’이상한 존재‘가 되게 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6강-욥기 22장 1~5절(제물화된 성도)2103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2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781페이지입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스스로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너를 책망하시며 너를 심문하심이 너의 경외함을 인함이냐,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

친구의 오해가 또다시 욥에게 아픔으로 타격을 가합니다. 친구가 욥을 보면서 자기 생각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것처럼 욥도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욥기 마지막에 보면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제물화 된 존재예요. 제물화 된 존재. 이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덮쳐버리면 내가 하나님을 상관한다든지 관계 맺을 수 있는 권한이 없이 일방적으로 덮쳐오지요.

덮쳐오게 되면 내가 예상하지 못하고 의도하지 못한 그런 인생으로 변환이 되게 되어있습니다.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욥이나 성도에게는 자기 책임이 없습니다. 이러한 관계는 인간 사회에서 인간이 남을 볼 때 상당히 특이하고 보이지 않을 수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책임져야 본인에게 만족스러운 인간상이 되기 때문에 나도 그렇듯이 너도 아마 그럴 거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내가 내 맘대로 일이 잘 안 될 때, 맨날 죄만 지을 때 ‘하나님 조금만 도와주세요’라는 양상으로 신을 요청하게 되어있죠. 자기를 여전히 나는 나에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나를 꼼쳐놓고 이것은 늘 쥐고 있으면서 ‘하나님, 제가 힘이 좀 모자라는데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에 나서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어떤 스님이, 제가 보통 중이라고 하는데 스님이라고 호칭하는 거 보면 뒤에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어떤 스님이 묵언 수행을 하고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마음을 다지면서 행동을 옮기지 않고 이 자리를 고수하면서 묵언 수행해서 도를 닦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자꾸 전화가 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안 받으려고 했는데 자꾸 전화가 오니까 이게 뭔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아무리 묵언 수행에 깊이 빠져있는 스님이라도 자리를 털고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전화가 왔어요. 그 전화가 뭐냐 하면 차를 빼달라는 전화입니다. 자기 원칙 박살 났어요. 세상에서는 나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폐쇄적인 영역을 고수해서 이건 어떤 타인도 나는 거부하겠다고 그래야 나다운 나, 절대화된 나를 고수하겠다고 하는데 세상이 가만두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태가 일어날지를 알 수가 없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마치 닭을 닭장에다 집어넣죠. 닭을 닭장에 집어넣으면 성도도 입장이 마찬가지인데 닭장에 들어간 닭을 한번 보세요. 자기가 닭장에 들어간 것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슬퍼하거나 고민하지 않습니다. 닭장에 있는 닭은 자기 할 거를 다 해요. 울 때 ‘꼬끼오~’하고 울고 파닥거릴 때 파닥거리고 자기 주어진 상황을 즐기는 거 같습니다. 갇힌들 안 갇힌 들 나의 할 일 다 하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목 조르듯이 윽박 하듯이 법으로 압력을 가해서 “똑바로 안 살아. 이렇게 해서 영광이 되겠어”라고 이렇게 압력을 가하시는 분이 아니고 “할 거 다 해. 할 거 다 하라고. 묵언 수행 같은 그런 거 하지 말고”라고 하십니다. 할 거 다 하면서 내가 원했던 목표가 아니라 내가 예상 못 한 목표로써 분명히 나 할 거를 다 하는데 고집스러운 나인데 한 고집하는데 나는 나 싫은 거 절대 안 하는 그런 대단한 성깔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정해나가시고 조절해 나가시고 구성해 나가시고 변화시키는 주님의 솜씨를 한 번 보세요. 대단합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되려면 주일학교 때도 이런 이야기 했지만 잠시 이야기하게 되면 시험을 쳤는데 백 점을 맞았어요. 가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나는 백 점 맞고 싶어서 환장했는데 주께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는 이거는 완벽하게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항상 불가능성 넘어서 오거든요. 인간의 불연속성, 끊어진 상태에서 저쪽 너머에서 오기 때문에 진짜 신앙 있는 학생 같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자칫 백 점 맞으면 얼마나 자만하고 교만해지고 할 건데 왜 문제에 하필이면 아는 것만 나왔습니까. 이렇게 제 뜻을 모르겠습니까, 주님. 왜 아는 것만 나와서 백 점 맞게 해서 마치 내가 남들 보기에 공부가 젤로 쉬운 사람인 줄 알고 머리가 똑똑한 천재처럼 자꾸 오해하게 만드십니까. 너무 힘듭니다. 이 백 점 맞는 생활이. 일등, 또 일등, 너무 힘듭니다’라고 하는 게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에요.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 욥은 자기가 착해서 복을 얻었다고 자부한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관여했습니다. 문제는 친구들은 이 관여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는 항상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연속적이에요. 이렇게 열심히 열심히 하게 되면 언젠가는 하나님을 기쁜 마음으로 만날 것이라고 계속 연속이지 중간에 불연속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가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욥은 정말 예상밖에 원치 않는 징벌을 받았고 본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죽인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욥은 수용합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죽음이 뭔지를 왜 죽어야 하는지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낯선 기도를 하게 돼요. 죽겠는데 이유는 알고 죽겠다고 기도를 해요. 어필코트(appeal court)라고 하는데 상소하는 법원이죠. 자기가 해결이 안 되니까 상소하는 거예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그분은 어떻게 해명해 주실 것이라는 거죠. 이 사태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내 인생은 내가 해명의 대상이 끝났다는 겁니다. 내가 설명할 대상이 아니다. 이게 신앙인이에요. 이게. 날마다 새롭죠. 날마다 낯설고 새로운 거예요. 그런데 욥의 친구 보세요. 선과 악이에요. 그러나 욥은 하나 더 있어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병헌 나오는 마적단이 말 타고 돌아다니는 영화거든요.

좋은 놈과 나쁜 놈. 이 세상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중에 한 명이 더 쑥 들어가죠. 이상한 놈. 이상한 놈이니까 이상한 놈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좋은 놈과 나쁜 놈에게 다 공격받아요. 예수님 재판할 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예수님 처형하는 데서 의견일치가 된 겁니다.

만약에 우리나라에 대통령 선거에 윤석렬이 나오고 이재명이 나오고 좋은 놈이냐 나쁜 놈이냐 하려고 하는데 그 중간에 허경영이 나온다면 이건 이상한 놈이에요. 둘 다 공격할 거예요. 왜 저게 공중부양이나 하지 여기 나와. 이처럼 같이 공진화되지 않는 사이, 공진화 안 된다는 말은 같이 어울릴 수가 없는, 본인이 봐도 본인이 이상한 놈이 되는 겁니다.

자기 머리에서, 아이디어에서 나올 수 없는 그러한 현상으로 자기가 끌려 들어가고 말려 들어가죠. 그 말려 들어가는 가운데서 지금 욥은 몸부림칩니다. 그런데 그걸 향해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인간이 연속적으로 알 수 있는 자기의 한계성까지에 의견을 제시합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엘리바스가 이야기하는 한계가 뭐냐 하면 좋은 놈, 나쁜 놈, 그거 구분하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좋은 놈, 나쁜 놈,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할 때 그 구분의 잣대와 기준은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착하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착한 내가 평가하는 것이니 이것은 내 평가는 반드시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 오늘날 교회에 많습니다. 복음 좀 알고 유튜브 몇 개 보고 이렇게 해서 복음 다 마스터했다고 하는데 그거 복음 알고 놈팽이 됩니다.

복음 아는 놈팡이들 참 많이 있어요. 분명히 데살로니가후서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거든요. 제가 이 말씀을 좋아하긴 하지만 잘 언급을 안 하고 싶어요. 무슨 뜻이냐 하면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이걸 75세 된 노인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일할 데가 없어요. 주차장 관리도 끝났고 여기저기 아무도 안 써줘요. 도서관에서 일하는 것도 파트타임이고 아무도 안 써줘요. 그렇게 집에서 놀아요. 그러면 부인이 뭐라고 해야 합니까. ‘하루 한 끼만 먹어라. 먹지도 말라’라고 하면 이게 얼마나 서러운 말이겠어요. 이 말은 취직 안 하면 굶어 죽으라는 뜻이 아니고 하루하루 주시는 그 양식이 대가 없이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일하면서 알아야 해요.

왜냐 하면 일하게 되면 힘들잖아요. 피곤하잖아요. 정말 젊은 말에 20대 초반, 30대 초반에 자리 없다는 말은 핑계고, 자리가 없겠어요. 하루 15시간 이상 다 일을 해요. 그래야 돈이 되니까. 그냥 정상 근무는 돈이 안 돼요. 그리고 회사에서 그걸 유도하죠. 그러면 15시간 근무에 출퇴근까지 합쳐서 낮에 온종일 보내다가 집에 오면 손에 그대 사진 쥐고 쓰러져 잠을 잡니다. 존재의 의미가 뭐냐고 노래 부르면서.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누구는 땅 투기 해서 돈 번다는데 투기 할 돈도 없어요. 원룸 값도 아슬아슬한데 뭘 투기를 합니까.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얼~마나 자책이 나오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일 할 때 어떤 생각이 싹 가시냐 하면 주께서 은혜로 값없이 먹여주신다는 생각이 들 리가 없어요. 왜? 본인이 고생하기 때문에. 내가 힘들게 일했기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이 왜 튀어나오냐고 이렇게 반발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반발하는 그 모습, 이걸 욥은 죽음이라는 것을 가지고 표현한 거예요. 내가 이제껏 욥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모든 일에 악한 일을 한 적이 없는 나를 어떻게 해도 해석이 안 되는 이유로 날 죽이려고 할 때 비로소 그 경계선이 내가 아는 지식으로 해명 안 되는 그 경계선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체험이 되는 거예요. 그 체험을 해야 해요.

하나님 앞에 속았다는 그 체험, 하나님께 내 침을 당했다는 그 체험, 내쳐놓고 다시 시작하게 하시는 거죠. 네가 어쭙잖게 성경 공부해서 나에게 올 생각하지 마라. 가라. 네 본래 모습을 절실히 느껴봐라. 가거라. 네 본색대로 고백을 더 털어놓아라. 우리 그 자리에서 나를 만나자. 그러면 인간은 울그락불그락 하면서 하나님께 화내겠죠. 그 화내는 지점까지 주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거예요. 그 지점에. 너 나에게 욕했지? 네 잘남과 네 의로움과 네 우수함을 박살 낸다고 궁시렁궁시렁 욕하는 거 내가 안 들은 줄 알아?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는데 사채업자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하는 말이 “너 도망가면 내가 못 찾아낼 줄 알았지?”라고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게 ‘아이카’라는 러시아영화예요. 50석 있는 영화관에 손님 달랑 두 명 있는 영화예요. 제가 정말 보고 싶었던 영화입니다. 하루에 한 번만 상영하는 영화예요. 아이카.

평가 보면 별 달랑 한 개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주민이 모스크바라는 구조상 경제적 후진 구조에 와서 얼마나 시달리는지 얼마나 혹독하게 힘들게 살아가는지 나옵니다. 거기 여주인공이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은 사람인데요, 거기에 나온 결정적 장면이 뭐냐 하면 내가 살기 위해서 자식을 팔아먹어요.

돈이 2만 루블이니까 한국 돈 29만 8천 원의 사채 빚을 갚기 위해서 내가 낳은 자식을 팔아먹는 이 대목은 열왕기상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람 나라에 포위되었을 때 자식을 고기처럼 삶아 먹는 그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지금 이야기예요. 마지막 팔려가기 전에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우는 장면이 끝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세상은 나의 정당함 나의 잘남을 위해서는 반드시 남을 속여야 한다는 겁니다. 남을 속인다는 것은 하나님을 속여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의 좋은 점은 하나님이 자기가 속이기 전에 먼저 선방 날려서 욥을 쳐버린 거예요. 왜 때리냐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욥에게 먼저 시비 걸어준 거예요. 먼저 맞는 인간이 구원받는 겁니다. 저희에게 선방 날린 거예요.

선방 날릴 때 내가 구성한 모든 현실체계는 무너지는 겁니다. 내 잘남을 위해서 구성해 놓은 그 현실, 나는 잘났기 때문에 이 정도 해서 자식 건사하고 집 하나 마련해서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겁니다. 왜? 잘났기 때문에, 나는 나쁜 일을 적게 했기 때문에, 그런 사고방식이거든요. 비례해서 여전히 나는 완벽한 자가 아니라 그래도 선한 쪽에 발 딛고 있다는 좋은 놈이라는 생각을 이상한 분이 와서 박살 내는 겁니다.

너는 선과 악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그러면 지옥 가. 내가 따먹지 말라고 했잖아. 네 조상에게. 왜 아직도 선과 악이야. 선과 악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죽는 것은 악이고 사는 것은 선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건 네가 아는 선과 악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고 욥이 아는 죽음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이상한 죽음이 욥에게 찾아온 겁니다. 이게 십자가예요.

착하게 살아서 오래 살려고 한다. 그건 선과 악의 테두리를 못 벗어난 거예요. 그 영역에서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겁니다. 그건 악마의 속임수에 불과한 겁니다. 어떤 분이 복음은 아는데 그동안 교회를 못 다녔답니다. 왜냐 하면 크게 사기당한 일이 있어서 옛날에 우리교회 두 번씩 오신 분이에요. 그 당시 저에게 받았던 테이프도 사기당해서 이사하는 통에 다 없어져 버려서 아직도 테이프 파냐는 이야기를 전화로 하셨어요.

그런데 사기당했다는 말은 사기 치려다가 실패했다는 뜻이에요. 그게. 세상에 가만히 있는데 엘리야처럼 까마귀가 먹을 거 물어다 주는 그런 세상 아닙니다. 이 세상은 선악에서 탈출하라고 성도에게 준비된 세상이에요. 이 지옥에서 벗어나라는 거예요. 이 지옥이 뭐냐. 착한 사람 복 받고 나쁜 사람 벌 받는다는 그 자체가 지옥이에요. 거기에 우리는 길들여있는 겁니다.

욥의 친구는 그게 한계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욥은 친구와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욥은 낯선 기운, 에너지에 휘말려서 친구들에게 이상한 놈 된 거예요. 본인에게도 본인이 이상하니까 남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겠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으로 자기가 제물화 된 거예요. 자기가 제물 되는, 어린양이 되는, 희생양이 되는, 그러한 인생 맨홀에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보게 되면 정말 설명한다는 것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겠죠. 그러면 선고 악을 무시하게 되면 악은 어디 있느냐. 악은 어디서 나타나느냐 하면 그 이상한 죽음을 뚜껑을 당기면 거기서 악이 나옵니다.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보다도 성경 말씀을 보는 게 좋겠죠. 누가복음 8장 30~31절에 보면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이라고 귀신에게 이름을 물으니까 “가로되 군대라 하니”라고 나와요. 영적 존재에게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고 어떤 움직임으로 표시해요. 움직임으로. 이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에게 해당 되는 겁니다. 아담에게 이름이 있고 아담은 이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을 경우에 다른 것의 이름을 지어주는 거예요. 왜 이름이 중요하냐 하면 이름을 짓는 자에게 이름 지음을 받은 것이 복속되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이름을 물으니 이름이 군대라 하는데 같이 집단으로 떼로 움직이니까 군대라고 했는데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귀신이 예수님께 요청한 것이 뭐냐 하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니” 이 무저갱이라 하는 것은 악마를 가둬놓는 밑바닥 없는 감옥이거든요. 허락 없이는 못 나와요.

완전히 거기에 가두면 영원히 빠져들어 가는 그 무저갱, 악마와 불신자들이 가는 곳이 이미 확정된 곳이고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이곳이 현실적으로는 어떻게 되어있느냐 하면 현실적으로는 이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꾸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인간들을 많이 유혹해서 같이 무저갱으로 자꾸 초청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자꾸 선과 악이 왜 이것이 인간을 힘들게 하고 인간의 유인책이 되느냐 하면 선분이 있잖아요. 어떤 점과 점 사이에 그 선을 수학에서 선분이라고 하는데 그 선분을 둘로 쪼개는 거예요. 쪼개는 중간 지점이 있을 거란 말이죠. 선과 악. 그러면 왜 쪼개느냐 하면 한 점에서 다른 한 점까지가 선이라면 선과 악 그 경계선에 뭐가 있는지를 사람들은 몰라요.

모르면서 이쪽 편은 선이고 이쪽 편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나서서 나에게 유리한 내가 나에게 마음에 드는 것은 선이고 아니면 악이잖아요. 그러면 그 선과 악이 그렇게 확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선과 악이 갈라지는 그 갈라진 대목에서 선과 악이 또 나와요. 이게 논리로 설명하기 힘든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택시가 손님 태운다고 빨리 들어와서 택시와 버스가 접촉했다면 나는 버스 타고 빨리 가야 하기때문에 지금 누구 편을 드느냐 하면 택시 운전사 편을 안 들고 내가 타고 있기 때문에 버스 운전사로 선과 악이 나뉘어요. 그런데 시비가 심해지고 멱살 잡고 하니까 내가 내려서 봤다는 거죠. 보니까 택시 운전사가 고등학교 동창생이에요. ‘네가 왜 거기서 나와’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버스가 차선 위반이라는 동창생 말에 버스가 잘못했다고 말을 바꾸는 거예요. 조금 전까지 선과 악이 택시 잘못이라고 하다가 내 친구라는 이유로 선과 악이 바뀌는 거예요. 그러니까 선과 악 경계선에서 계속 뭔가 막 분출돼요. 선과 악 사이에서 자꾸 뭔가 빠져나오는데 그게 어디서 나오느냐. 인간은 자기가 어쨌든 간에 무조건 선하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하려고 선과 악에서 자기 자신을 선한 쪽으로 계속 파고 들어가는 그것이 유인책입니다. 악마가 유인하는 거예요.

좋은 놈, 나쁜 놈 되지 말고 이상한 놈 되면 되는데 자꾸 자기가 좋은 쪽이 되려고 하니까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계속 내가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증명하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평생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어제 휴대폰 카톡으로 영상이 왔는데 자기가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 것이 왔어요. 뭐냐면 취미로 악기를 다루는데 왜 이 악기를 연주하느냐 하면 다른 악기보다 이 악기가 더 좋다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나 잘남을 즐길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다고 자부하면서 계속해서 쑤시고 온갖 것 다해요. 즐기고 싶은 거.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할 짓 못 할 짓 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자기는 그걸 즐길만한 권한이 있음을 스스로 자기에게 자꾸 설명하고 그걸 부추겨주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즐겨도 된다고 설득하는 거예요.

그 끝이 뭐냐. 선과 악입니다. 그게 사춘기 가치체계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가치체계. 인간의 자아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바로 질문부터 해요. 질문. 그래서 세 살, 네 살 말 트이자마자 시~작! 하고 하는 것이 “엄마 이거 뭐야? 이거는 뭐야?”라고 질문하는 거예요. 인간은 질문하면 안 돼요. 질문은 이상한 분, 주님만 해야 해요. 그래야 이상한 나라 천국에 가는 겁니다.

내가 질문하는 것은 선과 악의 가치체계 토대 위에서 질문하기 때문에 아무리 알아도 갈라짐의 유인책에, 그 늪에, 무저갱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 끝에 끌려들어 가는 겁니다. 이제는 질문보다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욥 친구의 잘못은 지금 욥에게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이 짜증이 나서 욥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이 욥 친구의 문제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감히 주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질문하겠습니까? 하지만 주님께서 먼저 나락에 빠진 우리를 찾아오셔서 질문하시고 네가 이곳에 빠졌음을 알려주시니 그러한 관계로 인하여 백성 되었음을 주님을 알게 되었음을 또다시 우리가 늘 찬송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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