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웃음과 고통

아빠와 함께 2021. 3. 8. 08:05

웃음과 고통 

2021년 3월 7일              본문 말씀: 욥기 21:14-16

(21:14)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

(21:15)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21:16)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욥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친구들이 안 듣는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그들이 욥의 고통 속으로 자신들이 참여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원치 않습니다. 인간들은 ‘고통은 나와 상관없음’을 기정사실로 놓고 세상과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즉 나에게 고통이 있더라도 이 고통은 꼭 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요건을 토대로 자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욥의 말에 의하면, 욥의 친구들은 욥과 생각을 같이 하고 싶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신약 요한일서 2: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이처럼 욥과 욥의 친구의 갈라섬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욥에게만 고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은 뭘 원하는 겁니까? 그들은 고통 대신 행복을, 울음 대신 웃음을 원합니다. 즉 인간 대 인간의 집합에서 상호 바라고 원하는 것들로 뭉쳐지내고 싶은 겁니다. 웃음이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는 바람직한 분위기가 됩니다. 모든 인간들은 다같이 모여 함께 웃기를 원합니다.

웃음 분위기에 인간에 일부나마 참여가 되고 간섭 경험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고통은 참으로 개인적입니다. 고통은 그 누구도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고통만이 근원적입니다. 고통에 있는 사람에게 있어 이 세상의 그 어떤 신비감도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서로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고통과 슬픔을 제거하는데 힘을 합쳐보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러한 인간의 바람과는 반대로 나아갑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세상 경영을 인간들이 요구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추진하신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탐구해도 악마를 포착할 수 없는데 인간들이 원하는 바와 악마가 원하는 바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둘 다 ‘세상 긍정’을 사모합니다.

인간은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나름대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 없는 이가 없습니다. 참 예수님을 못 믿는 이유는 기존 믿음에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 믿음으로 꽉차 있습니다. 그 믿음은 오로지 자신을 믿는 겁니다. 자기 잘 되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온 세상이 고통 중에 있더라도 자신에게는 절대로 고통이 와서는 안되는 믿음이 인간 내부에 상주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원하는 예수님은 고통으로 앞장 세운 주님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주님이십니다. 고통을 제거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6:24-25를 보세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잃고자 하는 것은 그동안 나만을 위해 삶과 대체될 수 있는 명분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명분에 내가 동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듯이 이미 존치되는 있는 태양을 없애는 일에 기존의 태양의 허락이 있을 리가 없는 일입니다. 이것을 욥은 오늘 본문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나이다”고 표현합니다.

도리 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기도까지 동원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악마를 퇴치하지 못하는 이유도 추구하는 방향이 같은 방향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26:39-40에 보면,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모든 기도의 한계와 한계는 그들이 잠에 빠져버린다는 겁니다. 하늘의 아버지 뜻에 도달될 수가 없습니다. 결코 예수님께서 시도신 것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가장 싫어하고 기피하고픈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축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모르는 곳에 있습니다. 고통이 있는 곳에만 구원이 있고 복이 있습니다. 고통을 기피하고 외면하면 이는 구원도 외면하고 저주를 저처하는 바가 된다는 것이 욥이 친구에게 하고픈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친구와 자신과 연결점이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스토리가 천국과 연결되려면 인간쪽에서 다가설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서 시작된 스토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악마와 동행하고 동승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주의’에 대한 선망입니다.

가정도 공동체주의입니다. 교회도 공동체주의입니다. 직장이나 회사도 공동체주의입니다. 국가도 공동체주의입니다. 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개인은 아낌없이 희생하는 것이 개인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주의는 고통으로 묶는 것이 아니라 웃음으로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6:25에 보면, 거기에 유대공동체가 나옵니다. 이 공동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평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웃을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고통을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 내부에 요지부동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그 성향을 폐기하거나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살아 있어야 ‘왜 예수님께서는 홀로 고통 당하셔야 하는 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우리는 얼마나 어설프고 엉터리요 이기주의자인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한심스럽게 무의미한 존재인 것이 우리임을 알 때, 주님의 고통 앞에서 모든 공동체주의는 무너집니다.

나로 인하여 살다가 성도만이 주님의 고통만을 자랑하면서 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감히 십자가 앞을 가로막지 않는 생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3강-욥기 21장 14~16절(웃음과 고통)2103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1장 14~16절입니다. 구약성경 781페이지입니다.

“그러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나이다, 전능자가 누구기에 우리가 섬기며 우리가 그에게 기도한들 무슨 이익을 얻으랴 하는구나, 그들의 복록이 그들의 손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와 판이하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믿는다는 것은 고통이 없는 가운데서 믿는다는 것은 쉽죠. 그런데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자기가 고통당해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인정 못 하는 우리 내부에 저항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남은 고통 당해도 나는 고통 당해서는 안 돼.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아프면 안 돼.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망하면 안 돼’라고 외치는 내부 목소리가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에요. 고통 중에 있는 욥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고통 없는 욥의 친구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고통 없는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우리가 못 알아듣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거든요. 사람이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거짓말인지 이런 인식이 거짓말입니다. ‘나는 그동안 믿음이 없는데 이제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라고 그렇게 우깁니다.

그러나 인간은 믿음이 없는 게 아니에요. 믿는 구석이 있어요.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자기의 과거 역사와 기억을 믿고 있어요. 내 것과 관련된 모든 것을 인간은 믿고 있습니다. 계속 자기 설득하거든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나 잘되기를 믿습니다. 이미 자기 자신이 자기 믿음에 대상이고 주인공이에요. 내가 나를 섬기고 있는데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듯이 내가 이미 태양이에요.

내가 신이고 내가 하늘인데, 이미 내가 신자요 내가 나에게 교주입니다. 믿음이 없기는 뭘 믿음이 없어요. 믿지요. 벌써 듬직하게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다른 믿는 것이 차고 들어갈 여지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믿는 믿음은 나에게 항상 웃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이 아니에요. 반대말입니다. 웃음이에요. 아프지 않은 거예요. 아프지 말라고 하잖아요. 행복 하자. 아프지 말고. 아버지는 비록 택시 운전사지만.

사람들의 평소 소망이 바로 그 소망이고 그 소망 자체가 평소에 그렇게 되기를 계속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인생을 살면서 버티고 버티는 이유는 내가 믿는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으리라는 그 기대감 때문에 참고 또 참는 거예요. 인생은. 그냥 이유도 없이 참고 있습니다. 뭔가 좋은 날 되겠지. 쨍하고 볕 드는 날 되겠지. 그래도 사기당할 건 당하는데.

욥에게 있어서 욥이 우리에게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을뿐더러 정말 우리에게 믿으라고 한다면 딱 이거 하나입니다. 너는 고통 당해도 마땅함을 네가 받아들이겠느냐.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이미 나는 잘 되리라는 것의 기대로 가득 차 있는데 내가 망하고 그냥 망하는 것도 아니고 비참하게 망하는 그것이 내 자신인 것을 나에게 믿으라고 독촉한다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그딴 것은 안 믿는다”라고 우리가 분류를 하고 있어요.

이미 우리 내부에 있는 이 괴물, 악마가 신학을 갖고 있어요. 그 신학은 나는 무조건 좋은 쪽에 나는 무조건 천국에 보내놓고 나 싫어하는 인간은 전부 다 지옥 보내는 쪽으로 이미 신학 체제를 갖췄어요.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와 적이 된다는 그런 철학과 신학 체계를 이미 갖추고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뭐 역사적 사명까지 갈 것도 없어요. 우리는 이미 이 땅에 태어날 때 나의 사명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울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어요. 사람이 태어나서 이야기를 쏟아 놓더라도 천국과 연관된 스토리를 내놓아야지 천국과 끊어진 상태에서 자기가 교회 몇 년 다니고 헌금 얼마하고 충성 봉사하고 전도하고 이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내 쪽에서 끄집어낸 스토리가 그 천국에 도달되지 않아요.

그건 나를 믿는 믿음이기 때문에 나 잘났다는 믿음이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천국 간다고 거짓말해도 그 거짓말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거 사기입니다. 세상 사기야 돈이나 몇천만 원 날리고 보이스피싱으로 몇백 날리고 하면 그만이지만 교회라는 사기 단체는 인간의 영혼을 망치게 만들어요. 희망을 주는 거예요. 개뿔 인간은 희망의 대상이 안 되는데도 희망을 왜 주냔 말이죠.

망해야 하는 이 모습이 우리 본 모습 맞는데. 왜? 우리는 나를 믿기 때문에. 내가 교주이기 때문에. 하나님 믿기 전에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나를 믿는 입장에서 거기에 무슨 믿음의 틈이 들어갑니까. 안 들어가지요. 거기에 무슨 희망을 준다면 얼마나 사람들이 아무 깨춤을 추겠습니까. 긍정적 마인드를 주시는 분이라고. 고통이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이게 성경 이야기예요.

달리 이야기하면 축복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어요. 보이지 않는 곳에 축복이 있어요. 그런데 인간은 보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확인하려고 덤벼들고 검증하려고 덤벼들고 기도하고 돌아서서 복 얼마나 받았는지 계산하는 거예요. 자꾸 보고 확인하고 확인된 것은 내 것으로 잡아당기려고 합니다. 그것은 인간 내분에 저항체가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건 정신의학에서도 그렇게 이야기해요.

정신의학 이론은 이렇습니다. 인간 바깥에 에너지 체제가 있다. 물리적 에너지. 그 에너지가 인간 몸까지 들어오거든요. 마주쳐서 에너지가 들어옵니다. 들어온 것을 감각이라고 하고 그 에너지 체제가 그다음에 배출기능이 있어서 자기에게 유용하고 필요한 것은 챙기고 나머지는 배출하기 때문에 인간은 배설기관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반 동물이나 식물 같으면 들어오고 내 것 남기고 배출하고를 반복하는 기계죠. 일반 동물이나 식물은 기계체제가 되어서 단순한데 정신 분석을 공부하고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아무리 해도 손을 못 대는 대목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순하게 에너지가 들어오고 숨 쉬고 살고 배부르고 살고 그다음 나머지를 배출하면 아무 문제 없는데 인간 내부를 조사해보니까 에너지 전달 체제에서 저항하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이게 왜 저항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건 모르지요. 왜? 자아라고 하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아라는 것은 에너지가 우리 내부에서 배출되지 않고 따로 모아놓은 존치된 거예요. 존립 된 거. 그 두뇌 세포와 두뇌 세포 사이를 시냅스라고 하고 시냅스에서는 그냥 순하게 전기 신호가 와서 전달하고 전달하고 계속 전달하면 되는데 안에서 이상한 기류가 퍼지면서 저항이 오는 거예요. ‘나 그 신호 안 받는다’라고 딱 버텨버립니다.

왜 버티냐. 그 버티는 것이 뭐냐. 그게 자아예요. 순하게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거. 순하게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을 예로 들어보면 에너지 받아서 같이 웃는 거, 하하호호 웃는 거, 그걸 가지고 공동체주의라고 합니다. 공동체주의라는 것은 공동체가 있음으로 우리가 산다는 주의예요. 공동체주의. 교회는 공동체다. 국가는 공동체다. 가정은 공동체다. 그 공동체 말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고 그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는 희생되어야 하는 그것이 공동체 사회예요. 결혼할 때 옛날부터 결혼식이 그렇게 유난 떨고 그렇게 화려하게 하는 이유는 혼자 사는 사람을 공동체 주의자로 만들기 위해서 대환영을 하는 겁니다. 너는 너 혼자 살았지만 이제 우리 집안 사람이다. 이 집안 자체가 공동체예요. 공동체에 흡수되려면 대 연회 파티를 열어줘야 해요.

왜. 파티는 웃고 즐기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우리 공동체이고 우리 집안의 웃음에 너는 같이 동조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인간이니까 다 있다. 그래서 네가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 늘 웃고 즐기는 그런 일들이 아마 자주 생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어떤 저항선을 잠재우기 위해서 큰 환영을 해줘요. 우리 집안 사람이 너를 다 반긴다는 식으로. 시집오라는 거죠. 시집이 친정보다 낫다고 하면서 반긴단 말이죠.

그런데 이 웃음 공동체에서는 우리가 일부로 참여 되지만 아무리 해도 참여 될 수 없는 게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고통 공동체예요. 웃음은 더불어가 되지만 공동체주의가 되지만 고통은 내 옆에 있는 사람도 내 고통을 몰라요. 내 이가 아프면 아내가 압니까? 어느 정도 아픈데? 되게 아프다. ‘되게’가 어느 정도인데? 무지무지 아프다. 무지무지가 어느 정도인데? 대단히 아프다.

말을 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을 정확하게 끄집어내지 못하고 자꾸 교체하기 바빠요. 그걸 환유라고 하는데 계속 말 바꾸기에 나섭니다. 이걸로 대체하고 저걸로 대체하고 하다가 성질나서 “모르겠다. 난 너에게 말 안 한다”라고 이렇게 말 안 하면 공동체주의 깨지는 거죠. 어떻게 아내가 되어서 남편 아픈 것도 모르고. 그러면 아내는 “너 아픈 것을 내가 왜 아는데? 아픈 것을 모르는 게 당연하지. 왜 아픈데”

주님은 고통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몰라요.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웃음이에요. 행복입니다. 안 아픈 거예요. 늘 웃고 싶어요. 주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러 온 겁니다. 오늘 본문에 욥처럼. 누가 예수를 믿습니까. 아무도 못 믿습니다. 희희낙락하고 하나님 더불어 파티하고 춤추면 그게 하나님 나라인 줄 알아요? 인간이 자기가 신이 되는 이상은 노림수가 있어요. 그건 자아의 확장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더욱더 내 영역을 커지게 하는 거예요. 이건 내가 주인공이 된 그 공동체가 커지는 겁니다. 아이 낳으려면 열댓 명 낳고 교회 하면 교인 수백 명 되고 내가 사업하면 직원이 한 오천 명 되고 내가 손만 대면 무조건 커지고 커지고 또 커지고 부흥되고 발전되고 진화하고 내가 하면 무조건 유명하고 노벨상 타고 내가 속한 나라는 무조건 일 등하고 세계 최고되고 국민소득 제일 높은 나라 되고.

이런 믿음 외에 다른 믿음 있으면 이야기해 보세요. 그런 것이 왜 기분 좋으냐 하면 내가 커지기 때문에 기분 좋고 내가 커지는 것이 왜 기분 좋으냐 하면 어느 누구도 나에게 하자 없고 나는 문제성 없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증명하기 때문에 그게 나에게 만족스러운 거예요. 마귀처럼. 사람이 마귀를 못 찾아내는 이유가 마귀 가는 방향과 인간 속한 방향이 동일하기 때문에 같은 쪽을 바라보고 같은 사고방식을 하기 때문에 아무리 애써도 악마는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그냥 반대 방향으로가 아니고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 십자가 지고. “너 나처럼 고통당할 수 있어? 나처럼 죽을 수 있어? 그리고 나처럼 십자가 질 수 있어? 그러고 난 뒤에 나를 따르라”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예수님 가는 그 나라가 자기 나라인 줄 알고 착각해서 “준비 많이 했습니다. 주님. 하나님 말씀 지키면서 많이 했습니다”라고.

요새로 말하면 “교회 오래 다니면서 천당 갈라고 준비 많이 했습니다”라고 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는 너를 파괴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거예요. 네가 가진 재산이 부자인데 거지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 거예요. 부자에게서 돈이 많음은 자기 확장입니다. 내 돈이에요. 내 돈.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 했는데 내 돈이라니까요. 내 돈. 내 돈 마음대로 쓰는데 네가 왜 시비?

내 돈을 건드리면 나를 건드린 것이고 나를 건드린 것은 내가 신으로 있는 내 신전을 건드린 거예요. 아무리 펜트하우스 같은 고급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친하게 모여 살아도 내 새끼 건드리면 그다음부터는 눈 돌아갑니다. ‘감히 내 자식에게’라는 식으로. 인간은 고통을 못 받아드립니다. 내가 용서가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나 용서한다고 하지만 내가 그 예수님을 용서가 되지 않아요.

나는 그런 나를 용서하는 예수님 말고 내가 하는 방향대로 나를 잘되게 하는 예수만 나에게 필요한 거예요. 다른 하나님 다른 예수 필요 없습니다. 내 집안 망하게 하고 나를 웃음거리 만드는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그런 예수는 나에게 필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노골적으로 교회에서 말을 못 하죠. 주일날 공중기도에서 “주여, 망하게 하소서. 왜 아직도 안 망하게 합니까”라는 이런 기도에 아멘 하겠어요? 노멘이지.

그래서 기껏 교인들이 하는 처사가 뭐냐 하면 양들의 침묵입니다. 목사가 복음 전해도 교인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요. 이빨을 깨물면서 다물고 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고통까지는 안 넘어가고 잠시 내가 천방지축 하는 것을 잠시 멈춥니다. 그러나 예배 시간 끝나기만 해봐라. 이런 식이에요. 복음 듣는 시간 만큼은 아주 경건하고 고난받는 척이라도 하면서 교회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겠다는 마음으로 조금만 참자는 식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인간은 예수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드리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 고통이라는 것이 욥에게도 마찬가지로 욥이 고통을 요청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퍼부었기 때문에 욥도 고통을 받으니까 비로소 친구들의 한계가 다 보이는 겁니다. 교회에서는 말씀 말씀하면서 가르쳐 봐야 잠만 오고요. 사람들이 교회 와서 너무 간편하게 천국 가는 방법을 달라고 요청하죠.

말씀 이야기, 성경 이야기 하지말고 다 덮고 다만 ‘어떻게 기도하면 복 받습니까? 어떻게 기도하면 천당 갑니까?’라는 딱 그 이야기만 해달라는 거죠. 그 이야기만 하면 너무 심하다 싶으니까 목사는 “말씀과 기도 수레바퀴가 두 축으로 갑니다”라고 주장하거든요. 두 축이 어디 있어요. 하나는 귀히 여기면 하나는 천히 여기는데 무슨 두 축이 성립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디모데후서에 있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인간이 누가 기도 많이 해서 응답받았다. 기도라는 노동을 해서 노동의 대가를 받았다. 그런 이야기만 납득 하면서 술술 잘 들어오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마태복음 26장 46절에 보면 인간들이 그렇게 자기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것이 기도뿐인데 그 기도의 끝자락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기도할 때 그들은 졸았어요.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까지예요. 인간의 기도는 조는 것이 끝이에요. 처음에는 기도할 때 삼창하면서 주여~주여~주여 큰소리로 하다가 점점 소리가 작아지면서 방언인 듯 방언 아닌 방언 같은 방언을 랄랄랄라 ~하다가 다 자고 있어요. 이래자나 저래자나 기도하면서 자나 잠자는 것이 끝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일한 적이 없다.

오직 모든 일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일은 주님만 하신 거예요. 주님의 기도대로 움직였던 겁니다. 주님의 기도는 인간 안의 요물인 악귀의 저항을 의식해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인간은 그런 기도를 못 해요. 내 안에 악마 들었다는 기도를 의식하는 기도를 못 합니다. 그저 나 잘되기를 바랄 뿐이죠. ‘내 속에 있는 악귀와 더불어서 저는 지옥 가야 합니다. 주여. 지옥 보내소서’라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악귀와 함께 자폭하겠습니다’라는 그런 기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무슨 농사를 지을지 몰라서 지었다 하면 망하고 지었다 하면 망하고 감 농사하면 망하고 뭘 심어도 망하고 그런데 그것이 나의 과오가 나의 실수가 아니에요. 그게 주의 기도 응답입니다. 이래도 아직도 자아에게 미련 갖겠습니까. 망하지 않으면 축복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듯이 망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곧 복인 것을 알 수가 없어요.

‘주님 자체가 복이에요. 주님만 있으면 오케이. 주님만 있으면 나는 없어져도 괜찮습니다’라는 그 복의 상태가 기쁨으로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이 고통 문제와 도대체 믿음이라곤 들어올 구석이 없는 이곳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어떻게 건지는가. 그건 성경에 나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을 주께서는 그거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저는 예수 안 믿고 나는 나만 믿습니다’라는 그거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그거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갑자기 슬픈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었죠.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라는 것은 사랑이 여기 있으니 행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사랑을 해봤자 나의 공동체주의의 확장이에요.

내가 너를 사랑했다는 그 자랑거리가 커지기 때문에 그건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두 배 세배의 대가를 요청하는 사랑이에요. 일종의 그것을 사랑이라고 안 하고 투자라고 하죠. 내가 그만큼 사랑했는데 너는 나에게 내놓은 게 뭐가 있느냐고 따질 수 있는 사랑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4장 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다”라고 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을 제대로 아는 사랑, 너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사랑, 너는 내 고통을 이해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사랑,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를 덮쳐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고통으로 덮쳐버린 거예요. 허허 웃는 것을 아픔과 울음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그때 내 웃음에 주님의 울음이, 내 이질적이고 대비되는 울음이 철딱서니 없는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안다는 거, 이거는 기적입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에 어떤 슬픈 일이 있는지 보세요.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자기 느긋함과 여유만만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가슴 치면서 애통한 거예요. 주님은 나와 다른 분이군요. 그 다른 분을 그다음부터 인정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게 되는 거예요. 웃는 나에 시답지 않은 거, 웃는 나의 허무성과 자기 자신의 가잖은 것을 한심스럽게 보는 거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는 것이 자유입니다.

구원입니다. 구원은 바로 그거예요. 주님 따라 고생하는 것이 구원 아니고 고통받는 나를 예수님처럼 고통받으면 그게 또 나의 우상이 되어 버려요. 그게 아니고 한심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거예요. 그동안 평생동안 너 뭐했나. 네가 너보고 했다고 했지. 이 한심스러운 인간아 다 이루었어. 다 이루어놨다고요.

새댁이 남편 기쁘게 한다고 할 줄도 모르는 잡채 하려고 한쪽은 휴대폰에 인터넷 틀어놓고 잡채 만드는 법 보면서 자기는 재료 듬뿍 사서 휴대폰 자판기에 음식물 다 묻혀가며 그거 보면서 한단 말이죠. 이게 처음 하는 새댁이 잡채가 됩니까. 나도 해보려고 했는데 못 하겠던데. 이게 안 되더란 말이죠. 그런데 딩동~하면서 친정엄마가 무슨 일인지 이 타이밍에 잡채를 한 그릇 해와서 “오늘 네 신랑이랑 같이 먹어라”라고 줄 때 비교 대상이 오니까, 잡채 달인이 오니까 얼마나 나 자신이 나름대로 고통스럽고 아파했고 한평생 고생만 했다는 이 말들이 참으로 현실을 모르고 한 어리석은 한계성 있는 철없는 생각인 거예요.

바로 욥이 오늘 본문에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네가 고통을 알아? 네가 아픔을 알아? 네가 철딱서니 없으면 그냥 입 다물고 있어.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을 너희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나이다,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하는 그런 결과밖에 너희는 낳지 않는다는 거예요.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면 대조하고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자랑만 해요.

그러나 정말 성령을 받아서 자기를 한심스럽게 보는 사람은 자기가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은 새삼스럽게 뭔가 큰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십자가 앞에서 나는 제대로 내가 허접스럽고 개뿔도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된 이 환희와 기쁨, 행복, 내가 더이상 내 인생에 손 안 대도 된다는 거, 망해도 상관없다는 거, 이것보다 더 큰 자유가 어디 있습니까.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이러한 결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웃는 것만 사모하고 웃는 일만 생기기를 매사에 형통하고 좋은 일만 있기를 학수고대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이 모습이 십자가 안목으로 볼 때 얼마나 한심스러운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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