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세상의 모순

아빠와 함께 2021. 3. 1. 09:11

세상의 모순 

2021년 2월 28일               본문 말씀: 욥기 21:7-13

(21:7)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21:8)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21:9)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21:10)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21:11)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21:12)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21:13)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욥이 또다시 반격에 나섭니다. 친구들에게 세상의 모순에 대해서 질의를 던집니다. 욥이 친구들로부터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는 욥이 내놓는 반격을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욥의 친구들이 주장에 어떤 모순점이 있음을 욥을 친구들에게 공격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모순이란 바로 악인이라는 작자가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것이 친구들의 논리에 의해서 선한 자이라야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모순을 친구들이 장착한 논리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 모순을 욥 본인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양쪽 다 지금 답답한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문제는 제시하면서 해답은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순점을 그대로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삶이란 실은 하나님쪽으로 막혀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요구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줄 의무나 책임이 없다는 것을 그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서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있는 인식이 강렬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정의롭다면 바르게 산 사람에게는 그 인간이 원하고 있는 것이 충족되어야 마땅하다고 그들은 생각한 겁니다. 욥의 친구나 욥에게만 이점은 마찬가지 기본 윤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세계로 흘러 들어온 하나님의 답변은 ‘고통’이었습니다.

고통의 양과 깊이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복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고통입니다. 문제는 인간들이 이 ‘하나님의 고통’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그저 자기 고통에만 신경쓰고 삽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죄라는 것은, ‘하나님에게 고통’을 야기하는 세력을 뜻합니다. 이 고통은 인간들의 전복된(거꾸로 된) 의식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정작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면 못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욥에게 비난을 하듯이 하나님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욥에게 난데없이 고통이 임하는 것은 죄를 관영하기 위함입니다. 죄를 숙성시키기 위함입니다. 창세기 15:16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좋은 땅은 결코 자신의 소유가 될 수없음을 모르고 삽니다.

이 은혜가 저 멀리 애굽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위함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히브리민족을 4대 동안 대기 상태에 놓이게 하신 이유는 이 히브리민족이 하나님의 의로움과 정당함으로 무장한 채 가나안 원주민을 박멸하기 위함입니다. 요즘 말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천국 갈 자들만 관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옥갈 자도 철저하게 관리하십니다.

이 지옥갈 자들은 죄인이 당해야 할 고통에 대해서 이 세상에서 알 길이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옥보내심의 정당성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시편 17:14에 보면,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 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눈에 보이는 이 생애가 그들에게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자기 삶의 정당성만 고수하는 자들입니다. 즉 “나는 이 세상에서 이 정도로 누릴만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결코 자신이 누릴 정도로 본인이 값어치가 없음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누리는 것으로 인해 자신의 죄가 더욱 누적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채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흠뻑 매료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만사가 형통하고 만족스럽고 자신이 욕망대로 다 이루어집니다. 비례해서 자신의 교만도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누릴 것은 다 누리는 바가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을 누려도 인간들에게 있어 지나간 일들은 그때 뿐이라는 점이 비극입니다.

마태복음 7:25-27에 보면, 두 종류의 집이 나옵니다. 외형만 땅 위에 표출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든지 조용할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홍수가 나면 판명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홍수날이 그럴 사한 외형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의 근원, 자신의 뿌리를 모르는 자는 그렇게 파탄납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면, 거기에 사회적으로 평이 좋지 않는 여자가 한 사람 등장합니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눅 7:47-48)

이 여인은 결코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많음을 압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들이 하지 못한 일을 예수님에게 행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알았던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그녀를 비난했던 자신들은 자신의 죄도 모를뿐더러 더욱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죄를 사해주시는 분을 인정 안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죄를 해결하려고 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태도를 ‘사랑’의 적용되는 현장으로 보셨습니다. 이는 곧 죄가 관영된 자는 결코 자신의 불행이나 고통을 주장할 가치나 권한 없음을 인정합니다. 인간의 죄가 관영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을 더욱 부각시키게 됨을 압니다.

누가복음 14:12-14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누구로부터 되돌려받을 가치나 권한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들처럼 자신의 행함에 보상이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움이라고 우기지 않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예수님됨으로 드러난다고 그것으로 충분한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통해서 주님의 죄사함이 빛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72강-욥기 21장 7~13절(세상의 모순)202102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1장 7~13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살고 수를 누리고 세력이 강하냐, 씨가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하고 그 암소는 새끼를 낳고 낙태하지 않는구나,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 보냄이 양떼 같고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이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 간에 음부에 내려가느니라”

욥이 반격에 나섭니다. 욥의 반격 속에서 욥 친구의 문제점, 한계가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왜냐 하면 욥은 그 당시 친구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욥 친구의 한계를 아는 것과 욥이 친구에 대해서 평하는 것과 확연히 그러한 느낌의 차이가 있겠죠. 욥의 친구들이 뭐라고 욥에게 욕을 하고 반격했는지 우리 나름대로 알 수도 있습니다만 당사자 욥이 친구들에게 반격하고 대응하는 그 가운데서 욥 친구들의 기본 의식 바탕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바로 인간의 행복을 가지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행복은 뭐냐. 행복은 자신의 욕망이죠.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게 되면 이거는 하나님께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이고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욥의 친구가 그런 식으로 언급을 했다는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에 욥 친구들의 이야기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정죄 받는 이 주장들이 나오는 이유는 바로 욥 친구들 쪽에서 우리가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욥 쪽에서 시작하지 말고 욥 친구들 쪽에서 시작하게 되면 우리는 욥 친구의 말과 욥의 말의 차이점을 분간 못할 정도로 우리는 편안한 일상 속에서는 욥의 친구 말도 다 맞는 것 같고 욥 친구의 말도 다 맞는 것 같아요.

착하게 살면 보상받고 악하게 살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안 준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안 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하나님의 표현방식이 된다고 그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욥의 친구들이 어디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는가.

그런 살아가면서 자식과의 관계에서 자식이 뭐 달라고 할 때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떡을 아주 면상에 처먹으라고 던져버리겠죠. 아무리 동일하게 줘도 미운 자식에게는 몸짓이나 감정표현이 같을 수가 없어요. 글로 쓰면 똑같은 문장이 되지만 그 당시 현장감에 있어서 현장에서는 듣는 태도가 다른 거예요. 맏이가 좋고 둘째가 싫으면 똑같은 말을 합니다.

“아드님, 밥 먹으세요”라고 글로 쓰면 똑같아요. 둘째 아들에게도 “둘째 아드님, 밥 먹으세요”라고 하니 똑같지요? 그러나 현장에 있는 아들들은 차이가 확 나는 겁니다. “큰아들, 밥 먹으세요”라고 하면서 속으로는 “(100점 맞은) 큰아들, 밥 먹으세요”라고 되고 둘째 아들에게는 “(빵점 맞은) 아들아, 밥 먹어라”라고 하는데 이거는 밥 먹으라는 건지 먹지 말라는 건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힘주어서 이야기하죠.

똑같은 표정을 당사자는 압니다. 다른 사람들은 글로 알아서 잘 모르죠.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받는 고통도 있지만, 욥 친구로부터 받는 고통이 따로 있는 겁니다. 이 고통의 양, 전해지는 고통의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욥을 통해서 인간들의 체제, 선과 악의 체제 그 너머를 하나님께서는 설명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냐를 인간들이 아무리 따져봐야 소용없고요.

인간세계 너머로 오신 어떤 분이 인간세계에 들어오셔서 인간들로부터 받는 고통의 양, 고통의 질, 고통의 깊이, 그 깊이를 통해서 너희들은 모든 것을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물론 지금은 욥의 시대이기 때문에 본인도 그것을 몰라요. 그래서 욥을 통해서 욥을 보는 우리가 뭔가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막혀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자꾸 일어나는데 해답은 자꾸 안 나타나요. 욥에게. 그리고 그냥 주장만 있을 뿐이에요. 주장.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너는?”이라고 하면 욥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각각 주장들밖에 없어요. 그래서 욥은 막혀있으니까 그 막혀있는 상황이 절로 하나님께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그런 식으로 물꼬를 그렇게 틀 수밖에 없습니다.

욥의 친구 이야기를 우리가 들어봐도 다 하나같이 틀린 말을 하지 않고 전부 다 바른말을 정답을 이야기하는 거 같아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딩동~ 맞는 이야기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딩동~맞는 이야기고, ‘하나님은 나쁜 자에게 벌을 내리신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나쁜 자에게 벌을 내려야 선함이 선한 대로 정의가 정의대로 살아나니까 딩동~이것도 맞는 이야기고, 이야기 다 들어보면 전국 노래자랑 같아요. 딩동댕동~합격! 다 맞는 이야기예요.

하나님이 오시더라도 달리 여기에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달리 관여할 여지가 없게 완벽체제를 이룬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셔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그냥 고통이에요. 쏟아놓는 하나님이 당한 고통. 그 좋다 하고 잘나고 완벽하고 철저하고 선과 악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는 그 인간에게 당하시는 고통이 그게 정답입니다. 그 십자가에 고통이 정답입니다.

성도가 성도다운 것은 어떤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욥처럼 억울한 일을 당하는 그것이 정답이 돼요.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임의로 관리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인생이 아니구나. 내 손을 떠났다고 하죠. 내 인생인데 불구하고 내 손을 떠났어요. 떠났는데 그 떠난 인생이 가는 곳이 뭐냐 하면 알 수 없는 고통, 알 수 없는 이유, 계속 알 수 없고 알 수 없다가 되는 거죠.

그러면 왜 하나님은 현재 욥의 이런 입장에서 침묵하시고 알 수 없게 하느냐면 그건 욥이 그걸 알아야 합니다. 나름대로 안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아는 것에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지 않으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아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서 동의를 안 해 주니까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내 아는 그 너머에 뭐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 그게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침묵이시죠. 침묵하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 안에 갇힌 인간의 실존’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해답을 내세워도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 답변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게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요구에 대해서 응답할 의무와 책임이 없어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질문 자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자기를 비참하게 볼 권한과 그러한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비참하게 본다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보는 거죠? 남들처럼 못되어서.

지금 욥의 한계가 그거예요. 욥 친구의 한계도 그렇지만 욥의 한계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 아는 한계 내에서 모순된 것만 끄집어내요. 어떤 모순이냐 하면 악한 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 리스트를, 악한 자의 생활 리스트를 보여주는데요. 7절에 보면 앞에 “어찌하여”를 일단 빼고 그냥 “악인이 살고(잘 살고) 수를 누리고(오래 살고) 세력이 강하냐, 씨(악인의 자손)도 그들의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그리니까 아버지도 잘되었고 자식도 잘된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악인이에요. 그러면 이 점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나의 친구들)아, 이 모순점을 너희들이 답변해 보려면 답변해 보라는 겁니다.

일제에 붙어서 나까무라로 살았는데 망해야 하는데 이 나까무라가 너무너무 잘 살아요. 자손도 번창하고 잘 되고 모자람이 없어요. 서울 청담동에 살아요. 강남에 살고. 그런데 선한 사람은 강북에 산다든지 양천구에 산다든지 영등포 같은 이런 동네에 사는 거예요. 부천, 부평, 소사. 저는 ‘소사’라고 하면 이단 집단들이 모인 곳이라고 떠올라요.

우리나라 이단 집단들이 전부 소사, 부평, 부천 쪽에 있어요. 강남에서 밀려가지고 그쪽으로 가면서 빨리 자기 인생 만회해 달라고 아무 종교에나 막 비는 거예요. 영생교도 거기 있고, 박태선이도 거기서 출발했죠, 신천지도 거기 있죠. 지금은 작살나서 딴 곳으로 옮겼지만. 한 맺힌 곳에 자기 한풀이해달라고 그냥 비는 거예요. 아는 것도 없어요. 그냥 손바닥 불나듯이 빌면 뭐 복이 오겠지.

그런데 그런 자에게 욥은 말합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을 네가 납득이 가게 설명해보라고. 그다음에 계속 봅시다. “그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때리시는 매가 그 집안에 임하지 않아요. 우리교회가 이렇게 되면 안 되는데 전부 다 임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그때는 전부 다 목축을 했잖아요. “그 수소는 영락없이 새끼를 배게 하고” 어떻게 소가 소를 낳느냐 하면 영락없이.

딱딱 때를 맞춰서 새끼 낳을 때 되면 새끼 낳는데 병도 없어요. 낙태도 안 하고. 영락없이 만사가 형통해요. 사람들이 얼마나 구미가 당기겠습니까. 앞에 악인이라는 말 빼고 그 뒤만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 나오는 이런 경우를 딱 모아서 이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교회에서 이야기한다면 그 교회가 부흥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어요. 앞에 브랜드가 뭐냐 하면 악인인데.

그런데 브랜드를 감추고 뒤에 악인들이 살아가는 모양새를 그대로 이야기해서 이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전부 다 속아 넘어가죠. 원래 속고 싶었어요.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런 희망적인 이야기라도 해달라고 얼마나 그동안 갈구했겠습니까. “그들은 아이들을 내어 보냄이” 아이들도 많아요.

하나 낳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아이인데 그 아이들의 모양새가 꼭 양떼 같아요. 갑자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이 막 생각나요. 꼭 양떼 같아요. 양떼. 교회에서 축복받은 그 모양새를 악인이라는 그 브랜드, 그 상표 밑에 줄줄이 다 나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비실비실 아프다든지 상품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고 보면 “그 자녀들은 춤추는구나”라고 해요. 다복하고 화목하고.

하나님이 우리가 예상할 때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런 거 주실 거죠?’라는 내 욕망이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악인 쪽에서 다 실현되고 있었던 겁니다. 악인 쪽에서. 그러면 욥의 아픈 고통은 뭐냐 하면 제 때에 내 행한 대로 하나님이 보상 주시지 않는 데서 오는 억울함이에요. 그리고 짜증남 같은 거. 바르게 살았는데 아무것도 보상이 없는 거. 그러면 따지죠.

‘바르게 살았는데 왜 보상해주지 않습니까. 왜 인생이 이렇게 꼬이고 힘들고 되는 일이 없습니까’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죠.

“네가 바르게 살 때 뭔가 의도 없었나? 꼼수 없었나? 뭔가 노리는 거 없었어? 바르게 살면 이거 주실 거라는 이 결부된 그 결부가 악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라면 너 어떻게 할래. 그래도 네가 그것을 받을래”

그러면 이 악인에게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다 주시는 이유가 뭐냐. 시편 17편 13~14절에 보면 하나님 원수들의 모양새가 또 나와요.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그러니까 악인들은 이 땅에 살면서 재물로 배를 채우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욕망이 할 수 있는 만족의 최고 수위까지 다 하는 자가 악인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그들이 받을 것은 다 받은 거예요. 이 점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안 나올 수가 없죠.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일단 뒤에 펼쳐질 미래는 모른다고 블라인드치고 앞에 거지와 부자 놓고 어린아이에게 “너 커서 뭐 될래? 거지 될래? 부자 될래?”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해보세요. “어머니, 저 부자 될래요” 아니면 “저 거지 나사로 될래요. 죽을 때까지 계속 병 낫지 않고 아파서 죽고 싶어요. 왜? 천국이 있으니까”라고 이야기하는 아이 있습니까?

자기 아버지가 장로이고 권사이고 목사 집안이라도 그 자녀가 그것을 소망하던가요? 안 하지요. 그래서 아이가 교육시킨다고 달라지고 그런 거 없습니다. 인간의 악인, 죄악 됨은 타고 났어요. 죄를 짓는데 천재 같아요. 이걸 쉐도우(그림자)라고 해요. 이 세상은 하늘의 내막을 보여주는 그림자예요. 그림자 속에 주님이 뛰어들었거든요.

주님 가신 길, 그 길을 아무도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거예요. 아무도, 심지어 교인들도 주님 가신 길을 안 가는 것은 너무도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그런가. 왜 하나님께서는 왜 욥에게 이유 없는 고통을 주시고 악인들은 번창케 해서 헷갈리게 만드는가. 헷갈리지 말고 인간이 갖고 있는 심성 가지고 ‘하나님, 복 주실 거죠’라고 선하게 나오는 것이 왜 이게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왜 거지와 부자 이야기를 예수님이 자기에 빗대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는가. 그것은 이 세상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할 일이 뭐냐 하면 죄의 관영 함이에요. “집사님 가정은 왜 교회 안 나옵니까?, 목사님 우리 아이는 왜 복음을 안 받아들이죠?” 답변은 하나입니다. “아직 죄가 관영 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도 악인이 가는 그것을 선호해서 그래요. 악인이 누리고 있는 그 세상적인, 금생에 이 땅에서 누리는 그 축복이 탐이 나서 그렇습니다. 자기 욕망에 하자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창세기 15장 16절에 보게 되면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관영이라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숙성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죄가 숙성하지 않았어요. 내가 세상 것을, 세상 재물과 출세하는 것이 죄가 된다는 이 인식이 아직도 그만큼 높아지질 않은 겁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히브리인들을 애굽에 대기 상태로 있게 하신 거예요. 한 대? 아니 아직 멀었어. 두 대? 아니야. 세 대? 아니야. 사 대만에 나와야 해요.

왜? 주께서는 지금 히브리인들이 구원받는 것만 주의 일이 아닙니다. 아모리 족속이 그 약속의 땅에 토착민 아닙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그들은 맘껏 누리고 있으면서 애굽에 있는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주는 축복이라는 것을 아모리 족속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계속 자기가 누릴 만해서 누린다는 생각을 갖고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와서 일방적으로 처참하게 무너뜨려도 그들은 할 말이 없게, ‘은혜 주신 분을 우리가 몰랐었구나, 당해도 싸지’라는 그 정도 될 때까지 그들은 대기 상태에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가 언약을 경유해서 자기를 되 비춰 봐야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수한 약속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경유해서 봐야 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현장에서 배신했을 때 그래서 현장성이 중요한 거예요. 백날 예수님에게 목숨 바치겠다고 해도 막상 현장에 맞닥뜨릴 때 베드로 입에서는 여지없이 마귀적 발언이 나왔죠.

“나는 저 사람 저주한다”라고 저주의 말이 막 나와버렸어요. 그게 현장성이거든요.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처럼 닭이 세 번이나 울었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엉엉 통곡하고 울었죠. ‘스승님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하면서 울었단 말이죠. 그걸 우리가 생각하면서 우리도 닭 울 때 회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닭도 한두 번 울어야지 자꾸 울면 성질나서 백숙해 먹어 버립니다.

타이밍이에요. 타이밍. 남이 이렇게 해서, 뭐 찬송가 405장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가 은혜 된다는데 나도 불러볼까 해도 안 돼요. 모든 것이 우연이고 타이밍이라니까요. 때의 조종은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숙성하고 관영 해야 해요. 내 구원만 생각하지 말고 저들이 지옥 갈 생각도 해줘야 해요. 지옥 가더라도 그들이 입을 다물고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죄가 관영 되어야 해요. ‘참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할 정도로.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새 술은 새 부대거든요. 해석할 때 지난날부터 끌어온 해석 말고 또 다른 해석이 뭐냐 하면 끝부터 내려가는 해석도 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끝에서부터 이미 시작점이 출발했다는 거예요. 끝에 끝이 이미 시작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태복음 7장에 25~27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이죠.

두 종류의 집이 있는데 둘 다 외형적으로 멀쩡하단 말이죠. 누가 삽으로 그 사람의 뿌리를 안 보거든요. 멀쩡하단 말이죠. 그러면 언제 이게 들통나느냐 하면 홍수가 날 때 둘 다 동일한 집을 지어서 똑같은 집이에요. 그런데 한쪽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다. 이건 홍수가 나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처럼 “경각 간에” 순간에 그 악인은 그들이 누렸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예요.

참 안타까운 것이 참 좋았고 부유했고 잘 살았고 아이들은 양떼 같이 공부도 잘하고 건강하고 아픈 것도 없고 잘 뛰어놀고 노래도 잘하고 춤도 추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다 해도 아무리 좋아도 과거는 그 과거 현장에서 머문다는 거예요. 어제의 좋은 일 나쁜 일이, 아무리 안타까운 일 좋은 일이 있더라도 오늘 되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같은 겁니다. ‘있었어? 그런 일 있었어?’

시소(See-Saw)에서 ‘Saw’가 돼요. 이미 ‘보았다’가 돼요. ‘보다’가 아니고 ‘보았다’가 돼요. 이 말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은요 사람이 좋았던 기억이 현재의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거예요. 좋았던 기억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차라리 그 좋았던, 잘나갔던 그 시절이 없었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대중가요나 노래해서 욕도 많이 얻어먹는데요.

대중가요를 보고 듣고 하는 태도 자체가 얼마나 인간은 허무에 빠져 있는지를 대중가요가 보여줍니다. 사랑의 아픔, 그 사랑의 아픔이 왜 생깁니까?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왜 생겨요? 그건 사랑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가사에 보면 ‘차라리 너를 몰랐써써써써었으면’이라고 해요. 이미 알아버렸는데 ‘몰랐었으면’이 어디 있어요.

뭐 주사를 맞든지 해서 옛날에 너무 좋았던 상대를 주사 맞아서 기억이 없어져서 “누구세요”라고 할 정도로 기억이 없었더라면 덜 고통스러울 것이 아니냐는 거죠. 덜. 전에 그런 예를 들었는데 수학 50점 맞던 아이가 어느 날 80점을 맞은 거예요. “드디어 우리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구나. 너는 양떼 같은 내 자식이다”라고 하면서 좋아했는데 나중에 보니 자기반 아이들이 수학 다 100점인 거예요. 답도 알려줬는데 답도 못 써서 혼자 80점 되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기분이라는 것은 혼자 기분 좋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남이 좀 꼴아박아줘야해요. 남이 좀 망해줘야 해요. 영화배우 한혜진 좋아한 사람 얼마나 많았겠어요. 요즘 신났어요. 기성용이랑 별로 안 좋아졌다는 소문 있어서. 꼭 남의 집안이 불란 일어나고 망해줘야 인간은 약간의 보상이나 위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준비된 해답, 욥도 몰랐던 그 해답은 뭐냐 하면 누가복음 7장 47절에 보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사회적인 평가가 아주 나쁜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한꺼번에 다 부어버리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을 씻고 닦으니까 비난이 대단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 시대에 평이 좋지 않은 더러운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 편에 서시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46절부터 보면 “너는 내 머리에 감람 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면 마리아는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자기가 건사하던 자아를 주님 발 앞에 깨서 쏟아부은 거예요.

향유 깨지듯이 자아를, 그동안 고이 간직했던 자신의 평생을 향유 병 깨면서 함께 깨뜨려서 자신의 더러운 죄를 그냥 눈물과 더불어서 예수님 발에 적셔버린 거예요. 예수님은 사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누구? 예수님은 ( )이다. 예수님은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에요. 사랑을 했으면 결과는 뭐다. 용서받은 것이 사랑받은 증거라는 겁니다. 이것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에요.

출발을 내가 잘했는데 보상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왜 저를 사랑하십니까’가 욥이 몰랐던 해답이에요. 오늘날 신약 성도가 누리는 겁니다. 죄인이 뭘 누릴 자격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4장 12~14절에 보면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 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우리가 대접을 받았으니까 도로 대접을 해버리면 너가 대접한 그 상은 남지 않는다는 겁니다.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이게 뭐냐 하면 갚을 것이 없다는 그 가난한 자, 병든 자와 자기를 일치시키는 겁니다. ‘내가 주님 앞에 뭘 해도 이건 내 죄를 갚는 식이 아닙니다, 주님. 내 죄를 갚아주고 사해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주님. 우리는 그럴 쨉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저는 평생동안 죄를 숙성해 왔을 뿐이고 평생동안 죄지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왜? 나 위주였으니까. 주님은 주님 위주지만 나는 나 위주였단 말이죠. 그러니까 감히 나 위주로 살면서 어디 주님의 이름을 감히 거론하십니까. 말도 안 되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를 거론하지 않고 그냥 깨는데 소비했어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빛내기 위해서 그냥 주님 발 앞에 죄인으로 가담했을 뿐이고 합류될 뿐이라는 거.

욥은 아직 그 수준을 모릅니다. 물론 욥의 친구는 전혀 모르고요. 하지만 우리는 둘 다 욥의 친구와 욥과 그리고 신약 이 모든 것을 같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겨냥해 왔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인 만들었다는 이 비밀을 여러분,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알게 하옵소서. 죄인 주제에 무슨 그런 요구사항이 많은지요. 입을 다물고 감사만 해야 할 저희이지만 날마다 부딪치는 우리의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모순처럼 다가옵니다. 그럴 때마다 다시 십자가를 생각하고 피흘림을 생각하고 주님의 개입된 고통의 깊이를 저희 속까지 집어넣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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