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28강 마태복음27장 49절-56절(자아와 십자가)20200222-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대속한다, 대역한다, 그것마저도 인간이 실시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이미 마련한 곳에, 마련한 그 대역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지점에 정위할 수 없다. 정위라는 말은 위치를 정위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이 말은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지점을 점유하거나 있을 수 없는 처지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겁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죽은 존재죠.
그 점을 마태복음 27장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7장 50절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그렇게 되어 있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뜻이에요. 46절에 보면 돌아가신 것이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근데 여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에 고통스럽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48절에 보면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일종의 마취제 같을 것이죠.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예수님이 그걸 마셨습니까? 안 마셨습니까? 마시는 대목에서 그걸 거부했죠.
이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인간들이 나름대로의 죽음에 대한 처방, 처리가 주님한테는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왜 필요치 않은가 하면은, 무엇의 처리 때문에 그러느냐, 인격적인 폭이 달라요. 깊이가 달라요. 인격적인 깊이.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인격적인 깊이를 인간들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어요.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은 49절에 보면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엘리야가. 엘리야가 등장해서 살려주나 보자.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의미를 엘리야 정도의 인격체가 과연 견줄 수 있는 사람이냐. 견주지를 못해요. 엘리야가 와서 도와주고 하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엘리야가 그 당시의 사람을 도와줄 때 개인적으로 난처하고 어려운 사람을, 이렇게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이 와서 도와주는 식으로, 그때그때 개인의 사정이나 어려운 것이 있을 때 도와줬거든요. 인간을 근원적으로 드러내는 일은 아니었다 이 말이죠. 인간을 근원적으로.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삽으로 완전히 이 땅에서 파내죠. 이 지상에 정위하는, 정해진 위치가 없도록 파내버리는 일을 해버려요. 그게 예수님의 인격적인 깊이입니다. 이 세상에 뿌리까지 걸치지 않도록 다 파내버린다 이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너무나 안 됐고 측은해서 거기에 동원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제대로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겁니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신비를 간파할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없다면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는 거죠. 예를 들면, 51절에 보면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죠. 찢어졌으니까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어요? 도로 기워 놓으면 되죠.
그 다음에 땅이 진동하고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이 일어나고. 잠자는 자들이 일어나 살아난다고 할지라도 또 늙어서 죽죠. 그러니까 휘장이 찢어지고 죽은 자가 살아나도,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형상도 예수님의 깊이를 다 설명해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도. 그 백부장이 함께 있는 사람들한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어도. 54절에 나와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이 있는 그 주위에서 여러 가지 일어났던 그러한 특이사항이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십자가 사건을 대신할 만한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겁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십자가사건이 이렇게 요란을 떨어도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그냥 한낱 지나간 에피소드로 끝나버려요. 역사적인 에피소드로. 그때는 그랬었었지. 요란한, 대단한 변화가 있었지. 하지만 뭐? 뭐? 내 일상이 더 중요한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에 홍해가 갈라지는 대단한 사건이죠. 그 선조들이 대대로 후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출애굽 때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했다. 그래서 그걸 지금 기념하기 위해서 유월절을 지낸다.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나라처럼 되는데 무슨 보탬이나 도움이 됐습니까? 전혀 안됐죠. 듣기는 백날 들어도 나중에는 다 잊어버립니다.
그만큼 죄의 힘이 인간의 힘을 장악하기 때문에, 어떤 이벤트라도 우리 죄를 벗어나게 하는 이벤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이냐, 차라리 우리 자신의 형편이 어디에 속했다는 것을 자기 자신이 바로 아는 게 중요한 문제에요. 오늘 두 번째 강의 제목을 시소라고 일단 해보겠습니다. 시소. 보다see, 보았다saw, 하는 거예요. 시소 타는 거예요. 어? 보이네! 어젠가 뒤에 있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갔는데, 아빠가 마스크를 쓰고 한 두 살이 안 된, 한 살 반 쯤 된 애를 시소에 태우고 놀아주는 거예요. 애는 재미나서 깔깔깔~~하죠. 아빠는 힘들어서 뒷짐 지고 팔 하나로 시소를 내렸다가 올렸다가 하고.
이게 뭐냐 하면은 시소는 다른 말로 반복이죠. 반복. 반복적인 삶. 봤다. 근데 본 적 있지. 어 보이네. 본 적이 있었어. 우리 육신을 갖고 있는 성도는 맨날 이런 식이에요. 반복이에요. 그래, 복음을 알아서 기뻤어. 근데 기뻐한 적은 있었어. 이렇다는 말이죠.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이걸 외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이 유발될 수밖에 없는 그런 터전에 우리 힘으로 못 벗어날 정도로 꽉 묶여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가운데서 십자가가 우리 삶속에 들어오는 겁니다. 십자가가. 십자가 목걸이 하고 유난떤다고 해서 십자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속에서 찾아야 돼요. 우리 일상 속에서. 아는 동생이랑 옛날에 함께 자취했는데..., 이거부터 해가지고. 갑자기 내가 겪지도 않는 이야기를 하려다보니 거짓말하는 것처럼 기침이 나오는데.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되돌아보니까, 그게 다 십자가와 다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십자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복음과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고 내가 어디에 푹 잠겨서 살아가는가, 진짜 거짓말하고 있는가 왜 자꾸 기침이 나오죠. 어디에 푹 잠겨있는가를 알라고 하는 거예요. 이걸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겠습니다. 섬이 있고 그 옆에 육지가 있는데 육지 사람들이 저녁이 되니까 자꾸 섬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종소리가. 그 종소리가 그냥 쇠로 만든 종소리가 아니고 황금으로 만든 종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날 마음먹고 그 마을 이장부터 해서 전부 다 동원해서 삽 들고 황금종을 캐기 위해서 온 섬 전체를 다 뒤집는 거예요.
그런데 날이 새도록 뒤집어도 황금종이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일 높은 사람이 “그만 치우자. 없다. 삽 같은 것 다 집어던져버리고 그냥 저녁이나 먹고 갑시다.” 삽 던지고 뭐 곡괭이 다 던지니까 그때서 댕~댕~댕~하고 황금종이 울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섬에 황금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섬 자체가 황금종이었어요. 섬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가 뭐 따로 악마 같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 전체가 황금종이었어요. 뭐 황금종이라고 하면 말이 좀 이상하지만. 마귀종이지만. 이 세상 전체가 예수님을 대적하는 세상이었던 겁니다. 평소에는 우리가 그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부정하기가 곤란해요.
왜?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의 적이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일으킨 원수라고 한다면, 그 원수에 누가 포함이 됩니까? 나 자체도 포함이 되거든요. 나 빼놓고 나쁜 놈이라고 하고 싶지만, 따지고 보니까 십자가 앞에서는 나 자체가 같이 공모를 일으켰어요. 같이 예수님 욕하는데 공모를 일으켜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사는 거예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하나 이야기해볼 테니까 얼마나 우리가 이 세상에 친화적인 것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초가삼간 집을 지은 내 고향 정든 땅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홍세민이라는 가수가 이 노래 하나가지고 50년을 우려먹은 노래, ‘흙에 살리라’에요.
자, 이 가사에 보게 되면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이래 되어 있어요. 그러면 이것을 보면서 제가 이 사람 소원대로, 이게 시거든요. 시를 노래로 만든 거예요. 초가삼간 집을 짓고 아기 염소를 목축하면서 논밭을 일구면서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사는 것이 왜 문제인가를, 나름대로 문제점을 한 열 가지를 끄집어내봤어요. 열 가지를. 첫 번째, 돈이 모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아기염소를 키워가지고는 고정된 수입이 안 된다는 사실. 왜냐하면 염소 값이 등락이 있어요. 어려울 때는 염소를 잘 안 찾아요. 건강원 잘 안 찾는다고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이게 여름이 되면 모기 파리 날파리, 땅에는 잡초가 생겨요. 이게 불편해요.
그리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런 생활을 하는데 제일 힘든 것은 바로 그렇게 염소새끼 키우고 젊은 사람이 이렇게 하게 되면 주위에 마을 전체에 있는 노인들의 뒷바라지를 해줘야 해요. 이거는 눈에 보고는 안 봐줄 수가 없거든요. 60이 제일 젊은 사람이니까. 만약에 염소 키운다고 차를 하나 샀으면 그 차는 자기 차가 아닙니다. 온 할머니 할아버지 전부 다 장날에 다 데려다줘야 해요. 이거는 뭐 자기 부모만 섬기는 것이 아니고 온 마을 전체가 시부모에요. 힘들어요. 한 열 가지가 되는데 대충하면, 그리고 말 할 친구 상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게 정신적으로 퇴보가 돼요. 점점 망가져요. 스타일 촌스러운 것은 뭐 말 할 것도 없고요. 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화장할 이유가 없으니까. 왜? 뭐 귀찮으니까 안 해요. 화장을 해봤자 누가 와야죠. 오지도 않으니까 화장할 필요가 없는데.
그리고 혼자 살면 수리할 때, 어디 뭐 컴퓨터 수리할 때나 수리할 때면 비용을 아끼려다가 더 들어요. 수리기사 부르려면 일당 십 만 원씩은 줘야 해요. 거기다가 섬 같으면 뱃삯까지 다 줘야 해요. 그리고 또 뭐냐 하면은 아까 퇴보한다고 이야기했죠. 퇴보하고 그리고 고정수입이 없기 때문에 만약에 병원에 가야되든지 마트에 가게 되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게 목돈이 들어요. 왜냐하면 이게 병원에 자주 안 가다보니까 고질병이 누적이 되니까 큰돈이 나간다고요. 나중에 수술할 큰돈이 나가요. 쉽게 말해서 일찍 죽는다는 거예요. 일찍 죽어요.
장점이 딱 하나밖에 없는데요. 혹시 잊어버렸을까봐 다시 할게요. “초가삼간 집을 지은내 고향 정든 땅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 길을 가노라면 이 세상 모두가 내 것인 것을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니가 바보라서 그렇지 뭐) 고향을 버릴까 나는야 흙에 살리라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흙에 살리라” 이 내용이 멋있어 보이는데 이렇게 단점이 열 가지도 넘어요. 다 추리면. 세계 경제시장도 제대로 분석 못하는데. 좋은 점은 뭐냐, 잠시, 정신건강을 잠시 챙길 수 있어요. 잠시 관광 왔다 치고. 휴양 왔다 치고. 잠시, 반짝 아이고,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런 것 있잖아요. 꼴 보기 싫은 사람 안 보고. 근데 그 다음부터는 내가 꼴 보기 싫어서 안 돼.
자,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은 인간은 근원적으로 반복을 싫어한다는 겁니다. 안정적인 것을 원해요. 근데 안정적이려면, 안정적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은 이미, 줄곧 살아왔던 대로 해야 그게 가장 안정적이에요. 살아왔던 대로. 고향을 왜 찾습니까? 어릴 때 기억이 있잖아요. 골치 아픈 것 없고, 부모가 물려준 논밭이 있겠다, 염소새끼 키우면서, 부모님 모시고, 유산 남겨줘서 고맙습니다, 하면서 잘 섬기고. 세상에 이런 배짱 편한 게 어딨나, 이래 생각하는 겁니다. 가보죠. 옆에서 축사에서 나는 그 냄새 어쩔 건데. 쓰레기는 어떻게 버릴 건데. 그래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반복을 싫어해요. 왜 반복이라는 것은 누가 흔들어대거든요. 어지러움증 생기지 말고,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지 말고 좀 고정되었으면 좋겠다. 한자리에 눌러앉았으면 좋겠다.
이게 무엇에 반대냐 하면은 이게 바로 그렇게 십자가 욕 안 해도, 십자가 관심이 없어도, 인간이 그냥 평소대로 사는 것 자체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십자가의 원수에요. 십자가라고 해가지고 뭐 입만 떼면 십자가, 이런다고 십자가를 아는 게 아니에요. 평소에 내가 지금 추구한 게 뭐냐, 뭘 바라보고 사느냐, 내 몸은 지금 뭘 요구하고 있느냐, 그걸 그대로 보여줄 때, 이게 십자가의 원수 된 모든 것들을 보여주는 그게 십자가에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사실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그 방식을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워요.
특이점. 인간은 평온한 것을 원합니다. 평온한 것. 평온하려면 신체적으로 건강해서 안정을 하지만 자기 환경도 평온해야 해요. 나만 평온하면 소용이 없고, 전쟁이 일어나면 소용이 없잖아요. 코로나 있으면 소용이 없잖아요. 환경 자체가 평온한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이 자연세계에 대해서 뭘 요청하느냐 하면은 평온하기를 기원합니다. 자연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신이 평온해주기를, 제발 태풍 같은 것이 안 불었으면, 내가 농사를 짓는데 태풍이 오지 말기를 그렇게 비는 거예요.
근데 이 특이점이라는 말이 있죠. 특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이 자연을 찢어버리는, 자연의 있음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그 특이점이 이 자연 안에 들어있어요. 이 자연 안에 특이점이 있어버리면, 이제부터 어려워요. 이게 내 안에, 나안에 특이점으로 이게 정착이 돼요. 자연 안에 특이점이 나안에 특이점이 됩니다. 예를 들면, 자연 안에서 태풍이 분다. 태풍이 불게 되면, 태풍이 불기 전에는 나는 자연이 안돈한 것처럼, 평온한 것처럼 나도 평온하게 살 수 있어요. 염소새끼나 키우면서 참기름 넣고 비빔밥 먹으면서 살은 이만큼 쪄서 평온해요.
근데 만약에 염소새끼가 태풍 때문에 병이 들었다. 먹을 게 없어서 다 말라 죽는다든지 재산이 날아간다든지 하면 갑자기 나한테 고민거리가 생기죠. 이게 바로 내 안정을 위배하는 특이점이 발생된 겁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에요. 자연의 일부로 사는 게 기본입니다. 괜히 성경 마태복음 보고 복음 본다고 해가지고, 아무리 봤자 그건 어디까지나 성경을 문자로서 도로 당겨서 문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려요. 어느 안에, 책안에 쏙 들어가 버리고 나하고는 별개문제에요.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현실이 아니다 이 말이죠. 현실은 뭐냐, 자연이 반겨주고 있어요. 자연이, 보통 아침에 해 뜨고 밤에 달뜨고 평온하잖아요. 자연이 평온하면 아무리 성경을 코앞에 들이대도 내 몸은 자연과 닮아가지고 어느새 나도 평온하게 축 쳐져 있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어디를 손대겠어요? 우리에게, 성도에게 특이점을 주기 위해서 뭘 손대겠습니까? 이 자연에다가 손을 대겠죠. 자연의 특이점에 대겠죠. 자, 52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무덤들이 열리며 자는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죠. 무덤들이 열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무덤들이 열리고 자는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났다. 나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그쪽 예수님 근처도 안가고 나는 관계없죠. 그럼 나하고 관계없는 거예요. 아, 이거는 마태복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그 당시에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 끝. 나는 그냥 오늘도 강아지 껴안고 아무 무덤하고 나는 관계가 없어. 내 무덤은 아직 멀었어. 나는 아직 죽기 싫어. 이래 되죠.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에 여기 51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죠. 아까 했잖아요. 찢어지면 그 다음에 꿰매면 되니까. 원상복귀하면 되니까. 왜? 원상복귀가 우리의 본성이에요. 우리는 안정되고 말썽이 없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대자연이 안정적인 것처럼 거기에 더불어서 우리도 안정적인 것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우리는 갖고 있어요. 찢어지면 꿰매면되니까.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자연의 붕괴와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의 특이점이죠.
특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관련성 없이 일어난 일. 이게 특이점이에요. 어떤 관련성이 없이. 이 말은 뭐냐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데 결과만 있고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것이 특이성이에요. 특이성.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너는 누구 닮아서 이렇게 말썽을 부리냐. 이게 특이성이에요. 이 특이성을 우리가 원하겠습니까? 원하지 않겠습니까?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 원인과 결과가 뚜렷하게 느껴져야 우리가 사는데 숨통이 트입니다. 왜? 원인을 고치면 결과도 고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게 뭐냐, 아기염소 벗을 삼아 논밭을 이루는 것, 이거는 아무 특이성이 별로 없어요. 염소새끼 키워서 건강원에 보내고 젖 짜서 돈푼이나 벌어서 그래가지고 엄마아빠하고 같이 채소나 키우면서 살면 뭐 그리 골치 아파요? 사는 게. 틈만 있으면 지가 열심히 해서 사는데. 그리 되겠죠. 그걸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 특이성을 찢어버립니다. 이걸 찢는다는 말은 안정을 원하는 내 마음을 찢어버려요. 찢어버리면 우리는 곧장 빨리 그 찢어진 것을 꿰매버리고 덮어버리고 아주 발작을 일으키면서, 안 돼! 안 돼! 내 인생 안 돼! 이렇게 해버립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이 어디까지 이어졌는지, 참 이게 어려워서 주저하게 되는데, 일단 이 말을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자연 안에 신체가 있고 신체 안에 자아가 있다. 자연이 안정되면 신체가 안정될 거고 신체가 안정되면 나도 안정을 누릴 것이다. 이래 되잖아요. 근데 이걸 한번 바꿔봅시다. 자아 또는 주체, 주체가 신체를 골라잡는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특이성이에요.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은 자연에서 신체가 나왔고, 왜냐하면 신체가 자연에 속하고 신체가 있을 때 자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이 내게 맞는 신체를 골라잡는 식으로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결론은 뭐냐 하면은 나 자신이 특이한 괴물이다 이 말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내가 괴물인 것을 어느 누구도 지적해낼 수가 없어요. 십자가가 겨냥하는 것은 자연도 아니고 이 세상도 아니고 내 자신을 겨냥하는 거예요. 니 자아가 수상하다는 겁니다.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자아가 왜 문제가 있습니까? 나는 자연에 그냥 순응하는데.” “아니야. 니가 맞는 자연과 신체를 니가 골라잡았어.”라고 하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 생전 처음들을 거예요.
이걸 제가 부산강의에서 한적이 있습니다. 자아를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스크린으로 봐요. 스크린. 막으로 봤거든요. 이렇게 할 때, 그거 뭐 이목사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는데,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생물학에 나와요. 세포가 자기의 막을 스스로 만들어요. 이게 생물학을 모르는 사람은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입니다. 세포의 주인이 누구냐? 없어요. 두뇌의 뚜껑을 열어보고 두뇌의 주인공이 누구냐 하면은 두뇌가 아무 소리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요. 근데 두뇌는 누구의 지시를 따라요. 자아의 지시를 따르거든요. 그러면 자아는 두뇌에 어디에 있느냐? 없어요.
없는데 두뇌의 세포가 알아서 자기 자신을 관리하고 있다고요. 알아서. 관리자는 없는데 관리당하는 것들만 있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세포입니다. 생물학에서 사람들은 여기서 손을 떼버렸어요. 생물학 공부하는 사람이. 두뇌 공부하는 사람이. 손을 떼버렸어요. 그래서 자아 대 신에 어디에 맡겨버렸느냐 하면은 컴퓨터에 맡겨버린 거예요. 컴퓨터가 내 자아를, 전에 자아가 했던 것을 컴퓨터에 일임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됩니다. 자, 컴퓨터는 지능이 뛰어나죠. 인공지능. 인공지능이 뛰어나죠. 뛰어나게 되면 이 인공지능에 의해서 이게 커넥트connect, 연결돼버리면 나는 졸지에 천재가 되는 거예요.
그 작은 인공지능 칩을 내 머릿속에 심어서 옛날 자아가 했던 것을 인공지능이 내 자아의 자리에서 하기를 누가 원한다? 귀신같이 있지도 않은 내가 원하고 있어요. 이 말이 너무 어려운 거예요. 이 말이. 귀가 어둡다, 귀를 기계의 귀로 바꾸면 되고. 눈이 어둡다, 눈을 기계의 눈으로 바꾸면 되죠. 내가 간질이 있다. 간질이 있는 두뇌의 해마를 하나 잘라버리면 간질이 치료가 된다고 하거든요. 간질 치료할 때 해마를 뜯어낸다. 기계로 바꾼다. 콩팥을 다른 기계로 바꾸듯이 바꾼다. 인공지능이 내 자아를 대신한다. 인공지능이 내 자아를 대신하라고 누가 지시했어요? 내가 지시한다고요.
인간은 요물입니다. 인간은 요물이에요. 다마고찌라는 말을 들어봤어요. 다마고찌. 이 다마고찌는 일본서 만든 애완용 개에요. 이 다마고찌는 주인이 시키는 대로, 로봇인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짖기도 하고 노래도 부로고 엎어져서 재롱도 부리고. 노인들이 이거 사게 되면 외롭지 않아요.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똥을 안 싸요. 냄새도 안 나요. 그냥 정기적으로 배터리만 갈아주면 돼요. 그런데 이 다마고찌가, 뭐 기계를 좋아하겠어, 했는데, 기존에 있는 개 못지않게 굉장히 사랑을 받아요.
왜냐 하면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주인이 자기가 제공한 것을 본인이 회수하는 의미에서 사랑이거든요. 어떤 남자여자가 사랑한다는 말은 내 맘에 들기 때문에 내가 사랑주고 내가 사랑을 되찾으면서 내 사랑에 내가 도취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나이에 사랑을 모를 리는 없겠지만. 저보다 더 아시겠지만. 남의 자식 사랑 안 하잖아요. 내 자식이기 때문에. 예배시간에 생중계하는데 들어와도 생중계 때려치우고 우리 애만 챙기잖아요. 남의 자식 같으면 있을 수 없어요. 내 애기 때문에.
자식 앞에 뭐가 붙는다고요? 나죠. 이게 자아거든요. 이게 자아라고요. 그러면 아들이 엄마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까요? 모를까요? 모릅니다. 뭐냐 하면은 아들 나름대로 또 뭐가 있어요? 자아가 있어가지고 자기 딴에 효도해줬기 때문에 효도의 대가로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자아는 둘로 섞이지 않아요. 아무리 한 이불에서 같이 살아도 자아는 결코 혼선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아는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겁니다.
개한테 잘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개도 요물이 되어가지고, 사회생활 할 줄 알아가지고 주인한테 잘 보여야 사료를 더 준다는 것을 알아요. 개도 사회생활 잘한다고요. 재롱부리면 더 맛있는 것 준다는 것을 알아요.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자식도 다마고찌라. 사회생활 할 줄 아는 거예요. 아빠엄마한테 잘못했다가는 유산이 형한테 다 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단단히 자기 아내한테 시켜가지고, “우리 일요일 되면 찾아가 뵙자. 제일 좋아하는 손자 한번 보이고. 아쉬운 소리 한번 하자.” 이게 인간의 자아생활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아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도 도용한다는 사실. 성경말씀에서 하라고 하는 것을 실천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 알고, 복음 알고, 피 알고 다 아는데, 문제는 그것이 자아의 평온함을 유지하는 차원이지, 자아가 찢어지는 차원이 아니거든요. 자아가 찢어지는, 자아가 구멍이 생기지 않아요. 이거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어떤 노력을 해도 자아가 일종의 스크린이죠. 스크린. 스크린이라.
외부에서 들었던 모든 감각, 모든 감각을 대뇌피질에서 정보를 해서 패턴화시키거든요. 패턴화시켜서 그걸 끄집어낼 때, 해마를 거쳐서 끄집어내기 때문에, 이 패턴은 장기기억된 것과 새로 들어온 신출내기 감각의 기억과 비교해서,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따져서 불리한 것은 내보내게 되어 있어요. 그럼 불리한가, 유리한가를 누가 따지는가? 자아가 따져요. 존재하지 않는 게 꼭 모든 결정을 다 내려요. 존재하지도 않는 게.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이 자아한테 전부 다 들어오면서, 그냥 들어오는 것이 아니에요. 누구한테 검역을 거치느냐 하면은 자아한테 검역을 거치는 거예요. 자아의 검역을 거쳐서 저거 나한테 생존에 유리하다.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낫다. 이래서 다 들어온 거예요. 문제는 자아 자체가 안 찢어진다는 것이 문제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보자, 보자 엘리야가 도와주는가 보자.” 이게 무슨 뜻이에요? 아까 이야기했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깊이를 인간들의 자아가 아는 수준이 있잖아요. 우리가 엘리야 때 뭐 가뭄이 들었다. 엘리야 때 어려웠다. 엘리야가 쪼르르 와서 도와줬잖아요. “저분이, 저 억울한 분이 돌아가실 때 엘리야가 도와줘서 다시 살리는지 한번 보자.”라고 하는 이 말은 누구의 판단이냐 하면은 보고 있는 인간 자아들의 판단이에요. 자아들의 판단.
무덤이 열려서 죽은 자가 살아났다. 아이고, 신기하다. 신기하다는 것을 누가 판단하는 겁니까? 내 두뇌를 관장하는 내가 판단하는 거예요. 왜? 비교해서 과거에 없던 어떤 새로운 광경이 일어났을 때 기존의 기억에 그게 유리하다 싶으면 그걸 새롭게, 신입이라 하고 받아들이면 그만이니까. 나를 더 키우거든요. 자아를 더 키우거든요. 자아의 폭을. 그러니까 이 괴물 같은 자아는요, 아무리 좋은 소리하고, 뭐 마음을 낮추라고 하면 마음을 낮추는 것을 할 수 있어요. 마음을 낮추는 것이 나한테 유리하기 때문에. 모든 걸 다 받아들인다고요.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십자가 다 지셨다. 다 이루었다고 할 때에 그 이루심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잘 안 물어보는데 제가 하나 물어볼게요. 공원에 있다든지 놀이터에 있는 공중변소가 왜 더러운지 이유를 아십니까? 빨리 답변해야 돼요. 여러분들이 힘들어서 안 돼요. 그거는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 집에 있는 화장실이 깨끗한 이유가 누가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그렇죠. 내가 관리하기 때문이죠.
이 말은 자아가 관리하는 그 모든 것 안에 신이든, 예수든, 삼위일체든, 그게 다 들어오는 방식, 그 방식 외에 다른 방식은 자아는 도통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납득이 되고, 압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내 자아의 허락을 맡아서 내가 아는 범위 안에 옹기종기 다 모여 있다는 것을, 지금 자신감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게 자아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에피소드죠. 다 지나간 과거지사입니다.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죄를 예수님의 피가 씻어주셨습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다 알고 있는 문제에요. 문제는 자아는 멀쩡하다는 겁니다. 자아가 신체를 고른다는 말은 이 자아가 환경에 따라서 내 신체를 변형시키는 힘도 갖고 있어요. 이 두뇌에서 그렇게 만듭니다. 두뇌의 세포는 근육조직과 연결되어 있어가지고 내가 원하는 신체대로 내가 바꿀 수가 있어요. 이게 운동, 피트니스하는 거죠. 생각하고 마음먹고 운동하면 뱃살이 들어가고 하는 거죠. 내가 내 마음에 맞춤 신체도 내가 바꾸는 겁니다. 쌍꺼풀 수술하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아까 제가 언급한 것, 자아의 자리에 뭘 집어넣는다? 인공지능을 집어넣어서 갑자기 천재가 되고 싶어 했다.
인공지능에 칩을 넣는 것도 되지만 사람들이 더 연구를 해서 DNA, 디옥시리보핵산. 이 DNA가 뭐냐 하면은, 도킨스라는 사람이 충격적인 발언을 했거든요. 세계적인 생물학자인데. 인간 속에 DNA가 있는 것이 아니고 DNA속에 인간이 들어있다고 획기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이 살기 위해서 DNA가 동원되는 것이 아니고 DNA라는 이 괴물을 살리기 위해서 인간은 자기 신체로서 동원된 것뿐이다. DNA라는. 그럼 DNA와 자아의 차이점은 뭐냐, 자아는 구조실체가 없어요. 근데 DNA는 디옥시리보핵산으로 되어 있어가지고 탄산고로 되어 있다고요. 현미경으로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DNA가 살아있으면 DNA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의 생식기능이 결혼하고 싶어서 자식이 생기고, 사랑해서 애기도 낳고 싶고, 자식에게 DNA를 반쪽씩 분배하는 거예요. 유산만 남기는 것이 아니고 DNA도 남겨줘요. 자기의 유산 자식이기 때문에 더 이쁘고. 왜?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에. 자기는 손자가 다른 손자보다 더 이쁜 이유는 조금이라도, 1/8이거든요. 팔분의 일이라도 자기 얼굴모습이 약간 있잖아요. 약간 있다고요. 물론 저쪽 사돈 쪽도 팔분의 일이지만. 어쨌든 내 게 있으니까 나는 불멸의 존재입니다. 자아가 실체적인 불멸의 방법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는 거예요.
자식이 그렇게, 본능적으로 자식은 귀하죠. 예배시간 넘어도 어서 오너라~ 하죠. 야야! 뭐 하러 바리바리 싸왔노. 비대면인데 오지 마라. 그게 미리 오라는 이 뜻이에요. 아무리 자식이 밉다고 하지만 자식이 힘들 때는 부모가 나섭니다. 왜? 자식이 아니고 내 자아의 연장이기 때문에. 내 자아의 확장이거든요. 자, 아직까지 문제가 해결이 안 됐어요. 현재 과학은 여기까지 왔어요. DNA가 내 자아를 대신한다. 자아는 없고 DNA가 스스로 자기 복제를 하면서 불멸의 존재가 인간이다.
자, 그렇다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겉돈다. 자아가 이렇게 있다면 자아에 들어오지 못하고 뺑뺑이 돌면서 십자가가 못 들어오죠. 그러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하고 나하고는 사실은 별개입니다. 나는 나니까. 예수님은 남이 되는 거예요. 가까이 오지만 연결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의 의미에 한몫을 해요. 십자가의 의미에 한몫을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준비한 십자가는 뭐냐 하면은 아까 시소 이야기했죠. 보고 있다. 보았다. 보고 있다, 보았다를 반복합니다.
뭐냐 하면은 이 자아를, 영어로 하면 saw, 이미 보았다고 넘겨버려요. 이미 보았다고. 이미 너는 죽었다고, 내 자아는, 니 자아는 이미 한물간 자아, 이미 죽어버린 자아라는 것을 십자가 영이신 성령이 바로 예수님의 죽음의 영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죠. 그러니까 성령이 들어온다는 말은, 들어오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살았다는 것이 없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성령이 훅 들어와요. 훅. 훅 들어온다고요. 훅. 왜냐하면 자아는 자꾸 검열해서 받아들인다고요. 검열해서. 그런데 그런 것 없이 훅 들어오죠.
그러면 살아있던 내 자아는 찢어져버리는 겁니다. 찢어버리면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은 여기서 구멍이 생겨요. 구멍이. 이 구멍은 자아의 어떤 모든 역사와 나의 노력과 성의와 헌금과 전도를 다 집어넣어도 이 구멍은 샙니다. 그냥 구멍이에요. 밑 빠진 독이에요. 그냥. 뭘 집어넣어도 남아있지를 않아요. 내 것이 남아있지 않게 하는 구멍 자체를 우리는 뭐로 만든다? 자아를 만들고 이 자아를 계속해서 주께서 되살리십니다. 반복하는 거예요. 이 자아를 다시 살리는 거예요.
자,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셨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의 자아죠. 예수님의 자아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이 나와요. 성령이죠. 성령이 나와서 예수님의 자아가 우리 자아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자아는 뭐냐 하면은 찢어져버립니다. 찢어버리고, 날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구멍이 생기면서 예수님의 자아가 쑥 들어오죠. 아까 첫 번째 시간에 했던 대역의 자리에서처럼 쑥 들어오죠. 쑥 들어오면 우리의 육신이 있잖아요. 육신.
육신은 누굴 닮았느냐 하면은, 누굴 따라가느냐 하면은 처음에, 우리의 옛날 자아의 종이에요. 육신이. 이 두뇌 세포는 보이지 않는 요물, 내 자아를 따르는, 순종하고 추종하고 충실한 신도가 육신이에요. 육신은 자아라는 괴물을 그냥 따라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육신의 본성은 뭡니까? 찢어진 것을 어떻게 해요? 덮어버리는 겁니다. 꿰매버리는 겁니다. 꿰맬 때 뭐냐 하면은,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냥 핑계대면서 덮어버려요. 지금은 내 자아를 위한 내 신체. ‘아이, 왜 몸이 근지러워. 아, 목욕탕에 가야 하는구나.’ 이거 누가 명령한 거죠?
지금 뇌신경학자들은 그거는 두뇌가 한다고 했죠. 두뇌가 왜 하느냐 하면은 몸에 때가 있으면 근지럽다는 감각이 올라와가지고 이렇게 종합해서 아, 이것은 목욕할 때가 되었다는 명령을 내린다는 거예요. 그 명령을 누가 내리는데요? 그거는 두뇌를 지배하는 거죠. 그럼 두뇌를 지배하는 것은 누군데요? 자아죠. 말을 그렇게 두뇌라고 하지 말고 쉽게 하자. 내가 내 신체한테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뭐라고 바꾸느냐, 근지럽지 않는 신체로 바꾸기를 내가 명령내리는 거예요. 내 신체는 뭐만 고이고이 모시느냐 하면은 이 신과 같은 내 자아를 고이고이 모시는 데만 이 자아가 딱 들어맞은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디에 들어오는가, 우리의 마음, 자아 거기에 침투해가지고 이걸 찢어버립니다. 이걸 찢어버리면 무엇의 본성과 대치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체와 이게 대치가 되죠. 내 몸은 옛날 주인을 섬기고 싶어. 옛날 주인을. 근데 새 주인은 이 신체를 너는 이미 죽었다고 통보를 해버리죠. 그러면 이 신체가 그게 싫은 거예요. 아주 강한 반발을, 저항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일어나는 자가 성도예요. 이런 자가. 거기서 나온 말이 뭐냐 배설물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계속해서 버릴 수 없는, 안 죽었으니까 못 버리죠. 버릴 수 없는 신체가 가라고 하는 대로, 유혹하는 대로, 감정이 요구하는 대로,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탐욕대로, 욕심대로 신체가 계속하게 돼요.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누구 말씀 들었어요? 이미 습관화되었어요. 나는 나를 위해서 내 욕구와 욕망이 하고 싶은 대로 신체를 따라갔던 그 버릇이 있잖아요. 습관이 있잖아요. 그걸 그대로 한다고요. 근데 돌아서게 되면 다 헛된 거고 다 소용이 없는 짓인데. 그거 뭐 자식 사랑? 그거 옛날 자아가 했던 건데. 지금은 자식 사랑이 어떻게 되었어요? 찢어버렸죠. 그래서 여기에 성령이 들어온다고 했잖아요. 이제 마지막으로 할 것은 성령이 들어온다고 하지 말고 말씀+말씀 완성과 함께 들어오는 거예요. 말씀 완성과.
그러면 마태복음에 천하 자식이나 아내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라고 하신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성령이 쑥 들어와 버리는 거죠. 쑥 들어오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강력한 육신의 저항이 강렬하게, “그러면 죄 아닌 게 없네.” 라는 식으로 괴물이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다 이루신 의가 들어오면 잠자고 있던 내가 갑자기 뭐로 바뀝니까? 죄 덩어리로 바뀌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요. 성령이 이래가지고 계속해서 말씀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요. 반복적으로.
그게 뭐냐 하면은 십자가사건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십자가사건은 한때 믿었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육신이 있는 한, 십자가사건은 육신을 가지고 십자가 펌프처럼, 물이 계속 올라오는 것처럼 끊임없이 십자가가 올라와야 돼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이런 거예요. 십자가가 늘 나오면 안 됩니까? 십자가사건은 늘 나오면 안 돼요. 그거는 하나의 이론이 돼요. 십자가사건은 충돌, 이 세상 인간의 요구를, 자아와 주님의 자아가 충돌된 그 현장의 반복이기 때문에, 그 반복을 위해서 지금 우리의 육신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죽을 때까지, 육신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사용해서 주님의 십자가만 드러내는 일을 지금 성도를 통해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인지요? 지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함부로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마세요. 잘 돼야 될 텐데, 또는 잘했다든지, 그런 평가를 하지 마세요. 주께서는 계속 펌프질해서, 십자가의 물을 길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을 끊임없이, 이 더러운 육신을 버릴 때까지 우리 옛 자아를 활용하시는 그러한 범위까지 아주 전부 다 갈무리를, 그렇게 다 조치를 해주십니다. 우리는 범사에, 이런 것조차도 범사에 감사하면 되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안다고 그게 십자가인지 알았는데, 십자가가 늘 우러나올 수 있도록 욕심덩어리고 욕망덩어리인 우리 육신을 사용해주시는 그 은혜에 대해서 또 다시 저희들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