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의 공포
2021년 2월 14일 본문 말씀: 욥기 20:20-23
(20:20)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0:21)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
(20:22)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20:23)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생존에 집착했으면 자신이 식사시간이 훼방될까봐 겁을 집어먹게 될까요? 밥 못 먹게 되는 것을 욥의 친구 소발은 저주의 항목으로 넣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밥 못먹는 것을 불행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상당히 속물적입니다. 이는 평소에 이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자세를 그대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즉 사람의 행복이란 먹을 것을 기본적으로 챙기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러한 생활 태도는 세상에 눈에 띄는대로 그것을 분류해서 저주와 복을 정하는 식입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욥기를 통해서 오늘날 일반인들의 의식구조가 그대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서 낯선 현상을 일으키시는 이유는 욥 주변에 욥의 친구들이 모여들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던 욥의 친구들의 의식구조와 욥의 생각이 어떻게 판이하고 대조가 되는지를 알려주십니다. 그저 소박하게 잘먹고 잘살고 잘자고 건강하고, 평생 챙긴 자기 재산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주는 그 반대가 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의식으로서는 비록 음식 먹을 때에 방해받지 않고 잘 먹는다 할지라도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잘되나 못되는 늘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저주가 주는 공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주가 공포스러운 이유는, 여전히 ‘나의 것’을 챙기는 것을 기반으로 살아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나의 것’이 없다면 나는 인생 헛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가 뭐가 되지요? 하나님의 고유의 뜻은 없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복 염원에 휘둘리는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친구 옆에 욥에 두시는 이유는, 이런 엉터리 저주와 복을 발각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복이란 인간들의 자기 실상이 숨을 곳없이 들키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앞에서만 이 복이 가능합니다. 자꾸만 가져야 하고 자꾸만 누려야 하고 자꾸만 쌓아야 그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일반인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 낯선 체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자신의 입장을 철없는 인간의 수준으로 낮추신 겁니다.
히브리서 2: 17-18에 보면,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이 속된 세상체험을 하셨기에 성도는 이제 주님의 체험을 자기 체험으로 가져올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즉 ‘속된 세상에서의 낯선 체험’을 성도는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자신의 행복에 유리하다고 여긴 것들을 모아서 ‘복을 받은 증거’로 삼고, 자신이 불행하게 되는 것들을 모아, ‘저주의 증거’로 삼습니다. 이것이 하나도 낯설지 않는 체험입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에게 있어 욥이 당하는 아픔은 참으로 낯선 체험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선뜻 욥의 체험을 ‘복된 체험’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저주받은 체험’이라고 간주해버립니다. 그 이유는, 낯설지 않게 살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나의 나다움’을 지탱하는데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처럼 되기 싫은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복 욕망으로 인해서 정말로 복받은 자를 더욱 더 저주받은 자로 오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약의 성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27에 보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고 되어 있습니다.
위의 본문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요? 왜 신앙인들은 보이는 것들에 신임하지 않고 있는 겁니까? 그것은 이 땅에서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과 만나면서 하던 행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인간들은 유일하게 복을 내려주시는 분이 살해하고 말았습니다.
없애버렸다는 말입니다. 자기 눈 앞에서 사라지게 했습니다. 필요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절호의 찬스를 놓치고 맙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한적인 설산에 가서 산을 향하여 “거기 잘 계십니까?”라고 안부를 묻게 되면 다른 사람은 의아할 겁니다.
“너 지금 누구의 안부를 묻는거야?”라고 하면서 이상스럽게 여길 겁니다. 대화라는 것은 죽은 사람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분이라고 공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분과 대화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깨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것은 이 세상 임금들의 권세를 그대로 온 몸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체험이 성도에게 온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저주와 복의 개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바로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모세가 이미 세상에서 말하는 저주에서 벗어난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많은 자들이 이러한 모세의 체험과 공통됩니다. 히브리서 11:35-38에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무서워하는 그 저주스러운 상황에 대해서 두려워 떨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에게 찾아오셔서 성도의 내부를 일방적으로 사용하시는 주님께서 성도의 외부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꽂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체험을 내부에 갖고 있어도 이 세상에서 여전히 악마가 활발하게 설치고 있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는 악마가 주는 저주의 공포가 찾아듭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체험이 활성화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말씀이 제시됩니다. 한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8의 경우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이런 약속으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저주스러운 속에서 성도는 감사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체험보다 예수님의 체험이 우리의 내용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0강-욥기 20장 20~23절(저주의 공포)202102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0장 20~23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그는 마음에 족한 줄을 알지 못하니 그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치 못하겠고, 남긴 것이 없이 몰수히 먹으니 그런즉 그 형통함이 오래지 못할 것이라, 풍족할 때에도 곤액이 이르리니 모든 고통 하는 자의 손이 그에게 닿으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밥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같이 쏟으시리라”
지금 복음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는 무식한 욥의 친구 소발이 지금 자기 아는 범위 내에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 진노로 나타나실 때 이런 식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나타나느냐 하면 뭔가 음식 먹으려 할 때 갑자기 천장이 내려앉아서 흙이 떨어져서 음식을 못 먹는다든지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저주하신다는 겁니다. 그거 뭐 흙을 골라내면 되겠죠.
그러니까 얼마나 평소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해 평가하면서 자기가 지금 원하고 있는 것을 방해받는 것을 하나님의 진노라고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세속적이에요. 속물적입니다. 밥을 맛있게 먹고 싶은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진노를 비같이 내리셔서 밥을 못 먹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밥 못 먹으면 슬프고 슬프니까 진노라는 겁니다.
나는 밥먹고 사는 재미로 살겠는데 그 재미를 하나님께서 꺾었으니까 이게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는 사람은 밥이라도 속 시원하게 먹는 것이 복이라고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얼마나 쩨쩨하게 보는지요. 그러니까 소발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내가 되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호응해 주는 거, 죄가 없는 사람에 대해서만 ‘하나님, 이거 하고 싶어요, 저거 하고 싶어요’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 채워주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밥에 고깃국 먹고 싶다는 북한 사람들처럼 쌀밥에 소고깃국 먹고 싶다는 그런 거, 그런 거 하나님이 들어주면 그게 복이라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목사님, 그것도 복의 일종이잖아요’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럴 줄 알고 내가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복고 하나님의 기적에 대해서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뭐냐 하면 내가 죄인으로 들키는 거예요. 내가 내 생각이 얼마나 속물인가를 들키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게. 뭘 소유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내가 잃어버렸는데 회복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나는 속물 맞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 다 철딱서니 없습니다’라는 것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십자가 의미를 안다면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어요.
죽어 마땅한 인간이 그동안 살려고 얼마나 쓸데없는 짓거리를 했는가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해답을 제시했어요. 기적이라 하는 것은 숨을 곳이 없는 거.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숨고자 하는 그 행동 자체가 죄라는 것으로 노출되는 그것이 기적이 됩니다. 기적이 된다면 이러한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들에게는 분명히 누가 있느냐 하면 욥이 있잖아요. 욥은 사실 고난 받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멀쩡한 욥에게 저주를 퍼부었죠. 이게 기적이잖아요. 멀쩡한데 하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니까 우리가 신약 성도 같으면 그것도 아버지 뜻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텐데 욥이 자꾸 반항을 해요. ‘하나님 뭘 잘못해서 제 인생이 자꾸 꼬입니까?’라고 했을 때 아직도 욥은 바닥이 온전하게 내가 저주를 주든 복을 주든 심판을 주든 그냥 아무 소리 안 하고 받아야 할 처지인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구약에서는 그게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러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시는 모든 것이 기적이고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과정이 신약에 나옵니다. 히브리서에 보게 되면 히브리서 2장 17절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백성들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 레벨 우리 수준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형제들의 철딱서니 없는 곳까지 주님께서 내려오셔요.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세계의 한계를 다 미리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나중에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이 낮아진 그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리까지 가게 된 사람을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는 자라고 하는데 그 믿는 자 중에서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 제가 예를 하나 들고 싶은 것은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나옵니다.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는 이게 신약에서 예수님의 체험이 들어온 사람, 예수님이 우리의 그 모든 허약함과 나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허약함을 보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시고 구원했다는 것을 이미 들어온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적인 특징이 있느냐 하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라고 나오고 히브리서 11장에 쭉 보면 성도의 특징들이 있어요. 특징이 뭐냐 하면 무서워 아니하는 거예요. 히브리서 11장 35~38절에 보면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세상이 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을 이러한 특이함으로 나타낼 수 있는데 아파트 전체에서 저녁 6시쯤 되어서 누가 퇴근하고 누가 퇴근 안 했는지는 한 번에 다 보입니다. 아파트 전체. 불 켜져 있으면 퇴근한 거고 불 켜있지 아니하면 아직 퇴근 안 한 집이에요. 그래서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한눈에 딱 보게 되면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는 사람은 불 켜진 사람입니다.
믿음의 불이 켜진 사람이에요. 왜냐 하면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이는 것같이 살았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항상 믿음의 불이 켜져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신약에서 이렇게 되려면 신약에서 성도의 특징은 어떤 분노와 어떤 저주와 어떤 심판을 같이 경유를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예요. 이미 경유한 사람. 광야에서 올 때 갈렙과 여호수아가 40년 동안 있었는데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갈렙과 여호수아 이 사람이 사막을 걸을 때 그 사람들만 특별 혜택을 받은 게 아니에요. 똑같이 고생했고 똑같이 물 없는 곳, 고기 없는 곳에서 똑같이 지냈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 그들의 믿음의 불은 밝게 켜져 있던 겁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 광야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주제 파악이 된 거예요.
우리가 누구를 무서워한다는 것은 아직 단독적으로 내가 어떤 요령을 부려서 내가 더 살려고 하는 건데 이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분이 어떤 조치를 했는가가 우리의 내용으로 찾아 들어와야 해요. 보이지 않는 분이. 제가 영화를 별로 안 봅니다만 본 영화 중에서 잊지 못할 대사가 하나 있어요. ‘오겡끼데스까’ 이 대사가 ‘러브레터’라는 일본 영화에 나오거든요.
그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이 보통 우리가 사는 삶은 사람과 대화를 해요. 그런데 이 ‘오겡끼데스까’라는 말이 왜 유명하냐 하면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가 이미 죽었습니다. 죽어서 어떤 산에 묻혔어요. 그런데 그 산이 소복이 하얗게 눈이 쌓여서 눈 덩어리가 되어있는 산을 향하여 그 훗카이도에 눈 덮은 곳을 가게 되면서 그 산에 워낙 눈이 많이 있으니까 가지는 못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오겡끼데스까”라고. ‘거기 잘 계십니까’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다른 사람이 그 옆에서 뭐라고 하겠어요. “너 지금 누구와 대화하지?”라고 하는 이 상황이 믿음이잖아요. 이게 믿음이라고요. 사람과 대화하는 게 아니에요.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오겡끼데스까~하나님 거기 잘 계십니까”라고. 다른 믿음 없는 사람 같으면 “없는 사람과 무슨 이야기 하냐. 있는 사람인 나에게 이야기해야지”라고 아마 꾸중을 할 겁니다. 나무라는 거죠. “너 그런 식으로 사회생활 하면 안 돼”라고.
“네가 내 옆에 있는 게 안 무서워?” “안 무서워”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의식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어떤 인간도 무섭지가 않아요. 어떤 인간도. 그런데 이 욥의 친구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혹시 하나님의 저주가 올까 싶어서. 그래서 착한 일 많이 해가지고 ‘제발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든다는데 주여, 숟가락 들 때만 지붕에서 우르르 흙 쏟아지지 말고 곱게 먹게 하옵소서’
나는 이렇게 곱게 먹는 거 보니 복 받은 거다. 그러나 욥 너같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벌 받는 사람 같으면 네가 밥 배불리 먹으려고, 배불리 먹는다는 것은 오늘 본문 23절에 나오지요,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라고 배 불리려고 할 때 그 숟가락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을 거라고 겁박을 하는 겁니다. 무섭지? 무섭지? 하는데 뭐가 무서운데요.
저주받는 게 무섭다는 거예요. 저주받아야 하면 저주받아야지요. 그걸 왜 무서워합니까. ‘오겡끼데스까’ 그분이 하신다는데. 그분이 하신다는데 그걸 왜 무서워해요. 저주를 퍼붓는다는 말은 본인이 지금 저주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이고 멀쩡한데도 지금 알 수 없는 것에 심적으로 고문당하고 있는 겁니다. 욥의 친구 이야기가 얼마나 지금 중요한 이야기인지요.
우리가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알 수 없는 공포에 벌벌 떨며 살아가고 있어요. 욥의 친구나 세상이나 뭐 똑같습니다. ‘나는 이런 경우 당해서 아주 가슴이 내려앉았다’라고 하면 성도가 믿음 있는 사람이 보면 ‘그게 왜 가슴 내려앉을 일인가’라고 하는 거죠. 그렇다면 문제를 풀어야죠.
왜 이 상황이 근원적으로 뭐가 문제냐는 건데 뿌리로부터 몸통을 찾아가는 거기 때문에 이게 하나님이라는 것이 엉터리 하나님이 나오는 겁니다. 뿌리로부터. 원래 신약은 몸통으로부터 뿌리로 이어지게 되어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교회의 몸통이에요. 몸통에서 가지가 나오는 겁니다. 주님이 뿌리가 되어서 주님이 원리 원칙이 되어서 나오거든요. 성령을 선물로 주시면서.
그러나 인간들은 모호한 신을 찾아가는 입장이라는 말이죠. 찾아가는 입장이니까 어떤 증거들을 하나님의 저주와 복을 돌아다니면서 그 증거들을 찾는 거예요. 어떤 경우는 내가 화들짝 놀랄 일, 어떤 것은 내가 좋아할 일, 그러면 좋아할 일을 끌어모아서 이거는 복이라고 치고 그다음에 내가 살기 불편한 일을 끌어모아서 이걸 저주라고 치자는 거죠.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가 불편하지 않도록 도와주시고 내가 잘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내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는 것이 욥의 친구가 하는 사고 구조가 그렇습니다. 보통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3월 되면 따뜻해지니까 춘계 대신방 이라는 것을 해요. 들어는 봤습니까? 춘계 대신방. 민폐 끼치는 기간들이죠.
3월부터 일반교회는 춘계 대신방을 하고 4월부터는 여호와증인이 따뜻해지니까 삼삼오오 모여서 양복 입고 나서는 계절이거든요. 3월 되면 전도한다고 전부 다 바빠요. 춘계 대신방 할 때 주로 목사님들이 잠언서를 가지고 합니다. 잠언서. 이건 뭐 성경 몰라도 되고 신학 몰라도 되고 이건 뭐 초짜나 장로님 가정이나 관계없어요. 잠언서 내용이 뭐냐. 이거 하면 이거 주고 이거 안 하면 이거 안 나온다.
그러니까 신방 할 때 수행원 두 명정도 여전도사 남 전도사 대동해서 가니까 민폐가 되는 거예요. 또 직장 없는 사모도 따라다녀요. 봉투 주면 봉투 챙기고 감시하려고 따라다니는데. 갈 때 그 전도사님 하루에 한 열 집을 다닌다 치면 전부 다 잠언 아니면 신명기 28장에 “네가 들어가도 나와도 말씀 지키면 복을 받고 안 나오면 저주받고”라고 하는데 목사님들이 그런 말을 할 때는 저주가 무엇인가를 알려줘야 해요. 저주.
자, 오늘 설교 시작했습니다. 저주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들키지 않는 것이 저주예요. 태어난 자기 자신이 잘났다고 우기는 것이 저주인 거예요. 불러주지 아니하면 인간은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불러주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찾아냄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찾아 주셔야 해요. 성령으로 찾아 주셔야 한다고요. 세상에 이런 기적이 어디 있어요. ‘오겡끼데스까’ 거기에 잘 계시는 그분이 잘 계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나를 찾아 준다고요.
찾아 주면서 신명기 28장 딱 대령하는 겁니다. “네가 말씀 지키면 복을 받는다”라고 할 때 네가 그 복과 저주를 아느냐는 겁니다. 그걸 알아? 예수님에게 있어서 복과 저주라 하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백성의 환란에 참여하는 것이 복이에요. 그래야 주의 일이 돼요. 우리의 복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주의 일이고 이게 복이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게 하나가 돼요.
이 땅에서부터 이미 내 사고방식이 완전히 주님 사고방식으로 교체가 되는 거예요. 나의 사고방식은 내 노동한 대로 이익을 얻는 것이 내 사고 방식이고 주님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일한 것도 없는데 부여하는 거예요. 아무 행한 것도 없는데 값없이 의롭게 되는 거예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아무것도 행한 것 없이 값없이 행한 것도 없는데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 거. 이 작업이 쑥 하고 우리 속에 들어올 때 찾아올 때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고 쑥 들어오거든요.
‘나는 너를 위해서 이런 일을 했다. 네 안에 그걸 장착해야 한다’라고 쑥 들어 온다고요. 쑥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뭘 포기하느냐 하면 뿌리로부터 몸통 찾기라는 것이 이게 얼마나 나쁜 짓인가, 더러운 짓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내가 쓸데없이 교회를 수십 년 다녔지만 하는 모든 일이 몽땅 쓸데없는 짓이고 아무 쓸모 없는 짓이라는 거.
더 심하게 이야기할까요? 그게 저주로 돌아오는 거. 이 말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를 교묘히 감추려는 그 수작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이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나는 어떤 내부를 가지게 되는데 그 내부와 ‘오겡끼데스까’라는 외부에 계신 분이 내 안에 내부로서 장식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내 내부에서 외부로 찾아가니까 그 외부에서 외부로 외부에서 또 주님이 우리에게 내부로 일을 시키니까 내 안에는 자체적으로 내부와 외부와 또 외부와 내부 그 자체를 순환하는 써클이 내 안에서 마련되는 거예요. 주님이 자기의 일을 하시며 ‘나는 너에게 찾아갔다. 이루고 하늘로 갔다. 하늘로 간 내가 또다시 너의 내부로 들어왔다. 또 내부로 들어와서 너는 공통 체험을 했다. 공통 체험을 한 뒤 다 이루고 또 떠나갔다’라는 식으로 내부 외부 그리고 또 외부에 계신 주께서 내부로 와서 일하시고.
나는 그냥 공장 부지만 제공했을 뿐이고 공장 안에서 작업자는 예수님만이 작업자가 되는 거예요. 이런 순환 구조, 이게 바로 주의 일에 참여자가 되니까 이게 바로 복인 겁니다. 이게 복이에요.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대로 사용하시도록 내버려 두는 겁니다. 마음대로 이 내부를 주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셨고 부활하시고 하늘에 계신 분이 다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경험을 하게 하시고 그 일을 작업하는 거예요.
그 작업을 하면서 같이 여기에 그 작업이 되도록 우리 육신으로 하여금 육신과 친한 거 있죠. 악마. 악마로 하여금 또 와서 이렇게 시달리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내부로 하게 되면 우리 속에 무엇이 생산되는가. 기쁨이 생산됩니다. 그 기쁨이 생산되게 하기위해서 주님께서는 외부 내부로 또 내부로 오신 분이 외부로 가셨고 또 외부에서 오신 분이 말씀을 주시는 식으로 내부에 참여하거든요. 계속해서 말씀이 오는 겁니다.
말씀이 들어오는 우리 현장은 항상 돌아서면 또다시 악마의 시험을 받아서 우짜꼬 벌벌 떨고 임금의 노함에 어쩔 줄 모르고 보이지 않는 분은 다 잊어버리고 ‘오겡끼데스까’는 다 잊어버리고 보이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어느새 변질해 있거든요. 그러면 말씀이 다시 와서 우리의 모든 골수와 우리의 모든 것을 분해해 버려요.
마치 통닭 한 마리 가지고 딱딱 쪼개서 이거는 날개살, 몸통 살, 다리 살 쪼개서 어느 것 먹을지 결정하는 것처럼 말씀으로 쪼개보면 쪼개진 거기에 이미 다 이루심이 거기에 있습니다. 성경적 예를 드는 것이 좋겠죠.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 보면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라”할 때 이제 말씀이 진짜 성령이 들어온 사람은 이걸 기뻐해요. 이걸 기뻐한다고요. 이 말씀의 순환 구조에 이런 내용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하나의 현장으로써 대여 정도가 아니라 다 내준 거예요. 그냥 가지고 노새요. 이렇게 기뻐하는데 만약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보느냐 하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할 때
갑자기 여기에서 하나님의 진노하실 심판이 겁이 나 가지고 벌벌 떠는 거예요. 왜 떠느냐. 주님 앞에 내놓지를 않고 자꾸 나만 챙기려고 하다 보니 말씀은 진노하심에서 건지시는 예수라 했는데 내가 믿어지지를 않네요. 믿음이 없으니까 안 믿어지는 거예요. 찾아오질 않으니까 내 단속을 내가 하다 보니까 항상 말씀 앞에서 ‘그럼 내 구원은 과연 성사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라는 이런 고민에 빠지는 겁니다.
똑같은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을 읽을 건데 읽기 전에 여러분 마음 준비부터 하고 웃어야 하는지 벌벌 떨어야 하는지 먼저 준비하세요. 자, 갑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1초, 2초, 3초. 기쁘십니까?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신다”라고 하실 때 ‘오겡끼데스까’가 되어야 해요.
‘주님이 그렇게 하실 거죠’가 되어야 하는데 성령 없는 경우에는 ‘안 해주면요?’가 올라옵니다. ‘안 해주면 나 어떡해요. 나 어떡해. 갑자기 훅 들어오면 나 어떡해요. 안 지켜주면 어떡해요’라는 이게 욥의 친구입니다. 진노함을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자기가. 내가 손해 보면 이건 저주고 내가 이익 보면 축복이다. 아닙니다. 이게 축복 저주가 아니에요.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내가 나만 챙긴다는 사실이 이제 다 폭로 당해야 해요. ‘이런 바보. 이런 나쁜 인간. 어떻게 나만 챙기냐. 주님이 계시는데 왜 내 것을 주님이 챙겨야지 내가 챙기냐’라고 들켜버리는 거, 성령에게 들켜버리는 거, 이것이 복이고 기적입니다. 여러분에게는 아니지만, 여러분 젊은 자녀들 보세요. 20~30대 자녀들 어떻게 사는지 보세요. 믿음 없는 자녀들 어떻게 살아갑니까.
맨날 부모에게 설날에 큰소리치면서 “떡국 해 놨습니까?”라고 하고. 떡국을 꼭 먹어야 하나. 평소에 그들이 어떻게 삽니까. 발발발 떨어요. 내 인생은 내가 한다고. 그래놓고 교회 나오라고 하면 교회 안 나옵니다. 내가 얼마나 잘나고 내가 얼마나 대단한데 왜 나약한 면을 보이겠습니까. 나는 강한데. 이게 바로 소발이라는 욥 친구의 객기입니다. 허세이고 엉터리입니다.
이게 이 세상이에요. 눈에 보이는 것을 수집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결정하려고 하는 거. 얼마나 진리를 모르면 얼마나 예수님 십자가를 모르면 나라도 꾸역꾸역 뭐라도 건져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거. 이제는 우리가 그것을 옛날 일로 여깁시다. ‘거기 잘 계시죠’ ‘오겡끼데스까’라고 속으로 한번 외치고 기도하고. 주께서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 영광스러움을 우리는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말씀이 우리 속에 있는 악마를 겨냥해서 추방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인 줄 이제는 알았습니다. 잘난 체하지 말고 들키게 하옵소서. 대단한 체하지 말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