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2021년 2월 7일 본문 말씀: 욥기 20:15-19
(20: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20: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20:17)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20:18)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20: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욥의 친구 소발은 욥에게 일어나는 현상에 합리적 해석을 부여합니다. 이 세상은 신이 다스리고 그 신은 인간들도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치 질서를 가동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욥에게 일어난 일도 이 합리성 밖으로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 합리성이 곧 ‘죄와 벌’입니다.
곧 죄가 있는 곳에는 필히 벌이 있게 마련이고 그 양은 상호 균등을 맞추는 것이 정의롭다는 겁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선과 악에 대해서 알까요? 악마가 인간에게 이해시키는 선과 악의 관점을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종속시키는(롬 5:12) 자료로서 제공된 겁니다. 즉 인간이 지속적으로 악마에 매여살려면 지속적으로 선과 악 사이에 가두어진 신세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생각하는 한계가 곧 선-악 지식체계의 한계입니다. 악을 버리는 것이 곧 선이 되고 악을 이기는 것이 선한 사람의 능력이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 이런 잣대에 준해서 욥의 친구 소발은, 지금 욥이 당하고 있는 징벌에 합당한 경우가 어떤 것이 있을까를 궁리하면서 결국에는 욥이 가난한 학대하고 버렸고 그 가난한 자의 주택까지 빼앗다고 몰아세웁니다.
욥의 친구는 욥에게 일어난 일이 친구 자신이 누구인지를 재조명하기 위한 일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선-악 지식 체계에 준해서 인간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볼까요? 요한복음 3:19-21에 보면,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일괄적으로 어두움입니다. 뭘해도 어두움입니다. 달리 선한 것으로 뽑아낼 수가 없습니다.
쉬운 예를 들면, 장롱 밑에 바퀴벌레 한 마리 웅크리고 있는데 사람이 후레쉬를 들고 그곳을 비춥니다. 그러면 바퀴벌레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늘 어두움 속에서 살랐던 그 바퀴벌레는, 자기 나름대로 선과 악을 규명하면서 자기가 선한 자임을 증명하는 식으로 살아갔을 겁니다.
그러나 막상 최초로 빛이 자기에게 비추고 오니 비로소 바퀴벌레인 것을 자각하게 된 겁니다. 즉 자기 스스로 달라질 수 없는 처지가 아님을 알게 된 겁니다. 만약에 스스로 자신을 바퀴벌레라고 자부한다면 더는 바퀴벌레가 아니기를 바라면서 갱신의 노력을 경주하게 될 겁니다. 바치 불교나 유교에서 자기 마음 수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자아로 거듭나지 위해 분투노력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있어 하나님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것을 밝혀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돈’입니다. ‘재물’입니다. 마태복음 6:24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들이 선과 연계된 결과물과 악과 관계된 결과물을 모두 재물로서 측정을 시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부한 자들의 주택을 탈취하는 것보다 가난한 자의 주택을 뺏는 것이 더 나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 재물에 따른 박탈감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친구 소발이 보기에 욥은 재물을 강제로 얻어 복받은 사람이라고 자처하고 싶지만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욥의 재물 사랑을 친히 처단하시어 결국에는 그가 얻은 모든 재물을다 없애버렸다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욥의 친구 소발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 자체가 뱀이라면 그가 시도했던 재물 모으기는 모조리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는 겁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 소발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어떤 식으로 다루는 지를 모릅니다. 이것은 신약에 와서 밝혀집니다. 갈라디아서 3:1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보인다는 겁니다. 그것도 ‘밝히’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 눈에 십자가가 보이지 않는 일상만 보일까요? 왜 욥의 친구같은 안목에 의해서 보이는 재물의 세계만 보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어두움을 밝혀줄 빛 쬐임을 맛보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참으로 빛 쪼임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선과 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3:19의 말씀처럼,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과 악을 규명하려고 했습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면 곧 자신이 선한 사람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일종은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해서 중립적 위치에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개입하게 되니, 처음부터 악했음이 알려집니다. 이는 곧 성도로 하여금 새로운 체험을 하게 합니다. 그 체험은 바로, “왜 나는 이미 죽은 자이면서 평소에는 멀쩡하게 산 사람으로 느껴지느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합니다. 그것은 성도의 임무가 “왜 나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가?”가 밝히는 업무에 나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도를 죽은 자로 간주하면서, 더 이상 선악체계로 작용하는 이 세상의 한계를 보게 하십니다. 즉 여전히 자칭 ‘산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시지 않았을 때, 내가 나를 선악적으로 판단하면서 느낀 체험이었던 겁니다. 바로 이 느낌이 곧 죄악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일상들은 바퀴벌레가 바퀴벌레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시하는 경험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돈을 벌면서 자신의 주체에 회의를 갖게 됩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돈버는 일 속에서 자신이 선한 존재로서의 보람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이 선함에서 오는 기쁨보다는 이 선함이 돈으로 전환되어서 오는 재물의 기쁨으로 만족하려 합니다.
자신의 악함과 죄, 그리고 바퀴벌레됨을 예수님의 빛 앞에서 비취어보며 감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한 관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매순간 십자가만 밝히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69강-욥기 20장 12~19절(죄와 벌)202102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0장 12~19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에 물고 있을지라도, 그 식물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다시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가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수고하여 얻은 것을 도로 주고 삼키지 못할 것이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워하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림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욥에게 없는 악을 욥의 친구가 억지로 만들어 낸다고 이렇게 바빠요. 소발이라는 친구인데 욥이 당하는 그것을 그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하고 그 징벌의 분량, 크기와 부합되는 형벌이 어떤 것이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하는 거예요. 균형을 맞추는 겁니다.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보면 죄가 있는 곳에 벌이 있다는 거죠.
그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같은 것들을 보면서 인간의 실존 문제에 대해서 인간 내부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문학적으로 희망을 주려고 그 책을 쓴 거죠. 인간 내부를 알고 알면 개선의 여지가 있고 모르면 개선의 여지가 없는데 아니까 고칠 것은 고치면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 그러한 진리가 문학을 통해서 나올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죄와 벌을 균형을 맞추면 이제는 그 벌이 무서워서라도 죄를 적게 짓는 것이 인간의 상식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은 죄 지을 줄을 몰라요. 선과 악을 알게 되면 내가 아는 악을 벌리면 그게 선이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는 레벨의 선과 악이 아니고 인간이 마귀가 아는 수준의 선과 악을 알아버리면 자기가 악을 버렸던 그것이 선이 아니고 그게 악이 되어 버려요.
선과 악이 나뉘는 것이 아니고 선과 악이 아니고 그들이 아는 선도 악이 되어 버리는 거예요. 오직 악밖에 없습니다. 악밖에 없는 입장이기 때문에 죄를 새삼스럽게 자기가 죄라고 하는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뭐 죄를 알아야 죄를 짓지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죄를 짓게 되면 저주받는다는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네가 사는 것 자체가 저주라고 보는 겁니다.
사는 것 자체가 저주라고 보기 때문에 한시라도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와 함께 살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의 마음으로 사는 겁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것은 마귀의 마음이에요. 마귀는 알고 있어요. 그 마음을 인간이 어쭙잖게 어설프게 모방하면서 인수받은 겁니다. 그래야 마귀의 종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마귀는 자기 갖고 있던 그것을 인간에게 넘겨주고 인간은 어설프게 그걸 받았으니까 선과 악에 매었다는 것은 악마에 매어 사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인간 자체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오든 누가 오든 본인이 누구인지를 몰라요. 러시아 인구의 75%가 러시아 정교 기독교 신자들이에요. 그런데 복음은 러시아 정교회에 있을까요? 너무나 형식화되고 제도화되어 있어요.
러시아 정교 예배드리는 것을 보게 되면 갓바위에서 비는 것과 너무 유사합니다. 들어가면서 몸에 뭐 뿌리고 바빠요. 그걸 제가 아침에 말씀드렸는데 연출하는 겁니다. 종교 자체를 연출하는 겁니다. 왜냐 하면 그걸 자기 자신은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왜 선해야 하는지 물어보면 벌을 안 받기 때문이라고 하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코로나 끝나고 통계상 반 이상이 교회로 돌아갈 의사가 없다는 겁니다. 이유가 뻔하죠. 안식일 안 지키면 벌 받는다고 했는데 나라에서 강제로 안식일을 못 지키게 만드니까 벌이 내려와야 하는데 벌이 하나도 안 내려오네요. 십일조 안 하면 벌 받는다고 했는데, 십일조 안 하고 벌써 일 년 반 지났는데 무탈해요.
십일조 안 한 만큼 소복하게 돈이 쌓이는 거예요. 내 창고에. 안 함으로써. 비로소 교회 실상을 맛을 본 겁니다. 안 가도 되는구나. 유튜브로 예배해도 되는구나. 파자마 바람으로 유튜브 들어도 되는구나. 화장실에서 소변보면서 드려도 괜찮구나. 온갖 요령들이 다 생기는 거예요. 왜? 벌이 없으니까. 인간은 벌이 뭔지도 모르고 저주가 뭔지 모르고 죄가 뭔지도 몰라요.
그걸 요한복음 3장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게 어두움이라고요. 일괄적으로 어두움이에요. 일괄적으로. 몽땅 다 어두움이에요. 뭐 이거 하고 저거 하고 나누고 자시고 할 필요 없어요. 뭘 해도 어두움이에요. 뭘 해도. 하나 쉬운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바울은 눈앞에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뭐가 보입니까. 일상이 보이죠. 일상이. 십자가가 안 보여요. 참 이상하죠. 사도바울은 십자가가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는 십자가 본 적도 없는데 어디서 틀어진 겁니다. 어디서 지금 안 맞는 겁니까. 어디서 지금 안 맞는 거예요. 영적 사람 사도바울이 말하는데.
사도바울이 영적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아주느냐 하면 귀신도 알아줘요.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라고 귀신이 하는 말이에요. “너는 누구냐”라고 나온다고요. 사도바울이 영적인 사람인 것은 귀신 나라에서도 다 알아준단 말이죠. 이런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보인다고 한단 말이죠. 십자가가 보이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굉장히 쉽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굉장히 쉬워요.
뭐냐 하면 내가 무엇이 사단났고, 내가 무엇이 문제이고, 내가 마땅히 아무것도 아닌 이유를 평생토록 그것만 찾아내면 되는 거예요. 정말 쉬워요. 내가 죽어 마땅함을,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인 것을 그것만 찾아내면 된다고요. 그걸. 왜냐 하면 이미 합격했으니까. 가진 자의 여유 같은 그런 거죠. 가진 자의 여유. 마귀가 흔들어 대도 흔들릴 것이 없어요. 욥의 친구 소발은 그러한 입체성이 없는 겁니다.
입체성이 없고 표면적이에요. 3차원적이 아니고 2차원 적이에요. 이중성이 없어요. 이중성이라는 말이 오늘 설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 이중성이 뭐냐 하면 내가 분명히 죽었는데 내가 분명 죽었다는 내 죽음을 느끼는 감각이 없다는 것이 이중성 때문에 그래요. 나는 분명히 죽었는데 살아가는 거 보면 나는 멀쩡히 살아 있고 거울 앞에서 보면 나는 살아 있고 세상에 나와서 누구와 만날 때도 늘 산 사람이고 나에게는 옴팍 살았다는 느낌밖에 없는데 성경에는 죽었다고 되어있으니 이게 성경에 나오는 그 이론과 나의 실질적인 체험이 맞지를 않네요.
이게 참 어려운 성경에 사도바울이 쓴 편지에 어려운 대목들이에요. 어두움이면 어두움인 채로 살면 돼요. 뭘 해도 착한 일 해도 어두움이에요. 뭘 해도 어두움이요. 라면 먹을까, 김밥 먹을까. 그 선택도 어두움이에요. 모든 게 어두움이거든요. 그러면 그것에 어떻게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고 그것이 느낌이 되느냐. 장롱 밑에 가면 보통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퀴벌레가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우리가 바퀴벌레처럼 장롱 밑에 산다고 하면 누가 와서 후레쉬로 빛을 비춘다고요. 빛을 비출 때 그 빛에 의해서 나는 바퀴벌레임이 드러나죠. 그것을 에베소서 5장 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는 말씀이 뭐냐 빛을 비추매 비로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드러나는 거예요. 나는 살고 싶고 나는 살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 나는 살았다는 말은요. 예수 믿고 살았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자존적이고 독자적으로 살고 싶어요. 나는 나로 인해 살고 싶어요.
누가 뭐래도 나는 버젓하고 누구 앞에 내놔도 그렇게 부끄러운 짓은 안 했다고 자부하고 싶은 거예요. 날 건드리지 마라. 난 괜찮은 존재다. 복음 모르는 사람들의 특징이 다 그 특징입니다. 아침에도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만 놀이동산에 침팬지 공연하고 있는데 자기는 그게 안 보이고 자기 아이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단 말이죠.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십자가 믿는 내 믿음을 내가 쳐다보고 있단 말이죠. 내 자아만. 내 자아가 할 수 있는 것만 쳐다보고 있단 말이죠. 제일 화들짝 놀라는 일은 어느 날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게 졸지에 침팬지로 바뀔 때, 내 자식은 죽고 침팬지만 있을 때, 나는 죽고 내 안에 침팬지가 산다는 상황이 될 때, 이게 얼마나 놀랄만한 일입니까.
그런 가슴 철렁할 놀랄만한 일을 성경 에베소서 5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후레쉬를 빛을 비추매 너는 바퀴벌레가 되었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 성경에서 죽었다 살았다가 참 힘들어요. 여기 시편 115편 17절에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 하리라”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가 찬양되고 감사가 된다는 말은 고맙다고 한다는 말은 우리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말은 숨 쉰다는 뜻이 아니고 살았다는 말은 주님과 우리 관계가 연결되었다는 뜻이에요.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독자적으로 내가 살았다고 하면 안 되고 그건 죽은 거고 내 안에 주님의 빛이 살아 있고 이 어두움을 통해서 빛이 빛 되게 살아 있다는 것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 겁니다.
전에는 내가 살았다고 우기다가 이제는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았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는 거, 그게 살았다는 거예요. 이걸 후레쉬로 바퀴벌레 비추는 것과 같다고 말한 거죠. 내 안에 빛이 살아 있으니까 내가 어두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에 그 대목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처음부터 인간은 어두움을 계속 사랑해 왔었어요. 그런데 그것을 몰랐죠. 왜? 자기는 악을 버리고 선한 쪽으로 나서기 때문에. 오늘 욥의 친구가 하는 것처럼 악을 버리고 ‘나는 이 정도 악은 뱀이라고 본다. 욥은 뱀 같은 인간이야’라고 이야기하는 나는 얼마나 뱀이 아니었으면 착했으면 그렇게 나는 그걸 볼 수 있고 그 정도로 나는 착하다는 겁니다.
이차원적으로 수평적으로 욥과 자기를 비교하는 거예요. 그런데 본인은 일괄적으로 어두움에 속했다는 것을 지금 욥의 친구는 모르고 있어요. 인간 자체가 어둡다는 사실을 죄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요. 모르니까 자기 기준에서 죄와 의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 요한복음 3장 19절에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빠져버리면 그 자체가 어두움인데 그 어두움이 어두움인지 모른 체 어두움이 되어버렸어요.
빛이 와야 일괄적으로 어두움인데 빛이 안 오니까 일괄적으로 어두움이 아니고 나는 빛이고 너는 악하고 어둡고 이런 식으로 자기 기준을 일방적으로 나누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투입하셨죠. 와서 개입하셨죠. 와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배척하고 거부하는 그 자체가 이게 어두움의 성질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겁니다.
아무리 점잖고 인간이 인간성 좋아도 복음을 거부하면 그 자체가 어둡다는 것이 요한복음 3장 19절에 이야기예요. 그 이유가 20절에 나옵니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라고 빛이 와야 악이 악으로 규정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지 않으면 이 세상은 악은 악을 몰라요. 그 자체가 악이면서도 악이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딱 오니까 예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으니까 예수님이 기준이 되어서 비로소 인간들이 그동안 몰랐던 악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악이구나. 그게 악이죠. 그것은 21절까지 읽어보면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너는 어둠인데 왜 빛을 찾아 왔는가. 하나님이 나보고 후레쉬를 비췄거든요. “이 바퀴벌레야, 내가 빛 되기 위해서 너는 어두움으로 짝을 맞추자”라는 겁니다. 후레쉬를 비추니까 자기가 바퀴벌레니까 이제부터 남은 인생 할 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바퀴벌레이다. 나는 뱀이다. 나는 어둠이다’라고 알고 살면 되는 겁니다. 참 쉽지요.
지금 그 예수님 역할 누가 하느냐 하면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이 하는 겁니다. 욥도 본인이 하는 기능에 대해서 도무지 모르겠고요, 이 멀쩡하고 훌륭한 내가 왜 갑자기 천벌 받을 그런 일에 해당하는 정말 악독한 인간이 했을 때 받는 벌을 내가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도 역시 그걸 모르고요.
세상이 욥과 욥 친구를 이렇게 보니까 우리는 욥이 속한 세계와 욥 친구가 속한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렇게 사도바울처럼 십자가 보인다는 식으로 안 살고 일상적으로 살게 되면 보통 종교적인 현상이고 욥의 친구들과 같은 이런 현상이 보통 그냥 일어나는 일이에요.
오키나와에 있는 현주가 곡물을 들고 신사에 가서 참배를 드린다면 신에게 하든지 부처에게 하든지 경배를 드린다면 그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 군수가 오키나와 마을 자체가 일본은 대부분 90퍼센트가 불교이고 신사가 일본식 불교니까 거기서 곡물을 들고 헌금을 들고 가서 바친다는 이게 얼마나 평범해요. “너는 나쁜 사람이고 너는 죽어서 지옥 가야 해”라고 이야기하는 일본 이웃은 없어요.
일본 신사에 가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티를 내는 거예요. 자기가 두 손을 모으는 것은 지금 공손하고 착한 짓을 하는 거예요. 그게 악한 짓이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해요. 만약에 그 신사에 빈손으로 아무것도 안 가지고 들어오면 저 사람은 악한 사람이라고 누구나 규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아직 욥도 잘 모르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은 그걸 알아야 해요. 욥은 지금 희생물이 되고 있어요. 그 당시 메시아가 욥이거든요. 욥은 지금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희생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그냥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죽으면 뭐도 죽느냐 하면 내가 살아 있을 때 알았던 선과 악의 기준도 포기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은 우리가 선과 악의 기준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게 내 운명에 하등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거예요. ‘내가 착한 일 했다. 복 받는다. 뭐 했다’라는 자체가 먹히지 않는 거, 안식일 지키면 복 받는다는 것이 하나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코로나 덕분에 이제 알게 되었지요. 그렇게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게 왜 안 먹히는가. 인간은 다른 뿌리, 다른 바탕에 이미 두 발을 딛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봅시다. 본문을 보고 나서 제가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18~19절에 보면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 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지금 소발이 욥이 당한 징벌에 부합되는 악행을 찾아내는 게 뭐냐 하면 바로 가난한 자를 학대했고 그 집도 욥이 차지했다고 하는 겁니다. 진짜 악한 사람이죠. 그 정도 죄를 지어야 욥이 당하는 그 정도의 벌을 받는 거죠. 이게 지금 소발이 내세우는 벌에 관한 균형 관계입니다. 미신이 아주 심한 사람들에게 누가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저 사람이 저런 벌을 받는 것은 전생에 뭐가 문제 있고 묘터를 잘못 쓰고 집을 살 때 물이 흐르는 수맥을 제대로 안 살펴서 그런다고 자꾸 이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아까 제가 어두움이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달리 이야기하신 대목이 나와요. 그 대목과 오늘 본문이 관련성이 있어서 제가 찾아드리는 겁니다. 여기 마태복음 6장 24절에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인간에게 하나님과 재물은 서로 라이벌 관계에 있고 경쟁 관계에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욥의 친구가 말하는 벌 받는 것이 뭐냐 하면 ‘너는 재산적으로 손해났지’라는 이거거든요. 재산적으로 손해났기 때문에 네가 지금 하나님에게 벌 받는다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의 뿌리는 돈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 지금 들통이 난 겁니다. 욥의 친구도.
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1절에 보면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인간의 보물은 돈입니다. 돈에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그만 발각되었어요. 욥이 고난 중에 소발이 자기가 뿌리가 뭔지를 발각당했어요.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핑계고 실은 뭐냐 하면 내가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라는 거예요.
궁전에서 일하는 여자를 나인이라고 하는데 아이 나이가 5살이에요. 그 다섯 살 아이가 자기 왕후를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그런데 큰 권세를 가진 대비마마가 왕후를 죽이려고 음식 안에 얼음에다가 독을 넣었는데 그 사발에 음식을 마시려고 할 때 그 어린아이가 돌을 던져서 그 사발을 깨서 못 먹게 했어요. 그렇게 해서 살았던 사람이 철종의 부인 신혜선입니다.
지금 철인왕후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감히 왕의 부인에게 돌을 던졌다고 아이를 법대로 그 다섯 살 먹은 아이를 죽여버립니다. 시체가 되었지요. 사실은 술을 먹여서 궁전 밖으로 빼냈지요. 그 뒤에 나온 이야기입니다만. 철종이 왕후에게 손가락을 사인을 보냅니다. ‘사실은 바뀌었지롱’하면서 살려냈지만.
그러니까 사람들이 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좋아하는 거예요. 사람은 법이라는 것이 핑계에 불과합니다. 선악도 핑계에 불과하고. 정말 돈이 있어야 내 생존이 부지가 되는 거예요. 죽어서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안 죽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은 “나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아니한다”라고 하는데 그딴 거 듣기 싫어요.
이왕 있는 몸 그냥 안 죽고 싶어요. 그냥 안 죽고 싶어. 살아서 죽는 것은 너무 아찔해. 도대체 신앙이라는 것이 이게 다 허구고 남아있는 것은 돈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가난한 것이 만약에 벌 받은 거라면 여러분들이 공장 현장에 가보세요.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파레트를 자켓으로 운반하는 거는 아무나 원서 내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파레트는 물건 담을 때 밑에 까는 거고 자켓이라고 하는 것은 핸드 자켓은 그걸 들어서 운반하는 거.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할 때까지 그것만 하는 거예요. 조금 기술 있다 싶으면 지게차 가지고 하고. 하루 열두 시간씩 지게차 타면 속이 다 울렁거리죠. 사람 사는 것이 아무리 돈으로 살지만 이거 아니다 싶으면 트로트 가수로 튀어나오고.
맨날 하는 반복적인 생활에 사람이 미칠 지경이에요. 다른 게 저주가 아니고 그게 저주예요. 내가 하고 실은 일을 못 하고 이건 기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맨날 하는 거. 세상에 어느 인간이 “나는 파레트 옮기는 일이 너무 행복해요. 이런 단순 노동 주셔서 너무 행복해요”라고 하는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나도 부모 잘 만나서 돈 많으면 이런 짓 안 한다고 생각하면서 맨날 자기 자신을 저주하죠.
욥 친구의 문제점은 딱 하나입니다.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지 그걸 찾아내지를 않아요. 내가 왜 아무것도 아닌지. 이 단순 노동조차도 내가 감사해야 할 그런 존재인 것을 자기가 그걸 찾아내질 못하고 있어요. 자꾸 의로운 쪽으로 복 받은 쪽으로 가버리지 나에게 원초적인 문제가 뭔지를 전혀 그걸 뽑아내지를 못합니다.
자꾸 변명하고 나는 이래서 훌륭하고 이래서 잘 되었다고 자꾸 변명해요. 인간은 자기 행동에서 계속 변명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65세 넘은 사람인데 결혼을 세 번째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에게 가서 “이번에 세 번째 부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라고 물으니까 “그분이 미국에 있는 사람인데 내 손을 딱 만져보더니 3년 전에 죽은 내 남편 손과 똑 닮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발도 만져보더니 죽은 자기 남편 발과 똑같다는 겁니다”라고 엄영수가 이야기해요.
그러니까 거기 총각들이랑 다른 이혼한 후배들이 전부 다 부러워서 자기들도 죽은 남편 손 닮았다는 여자 안 오나 하는 겁니다. 물론 여자는 돈이 좀 있어야 해요. 여하튼 무조건 기본은 돈이에요. 돈 없는 여자랑 결혼하면 안 돼요. 돈 있고 이 남자 좋다고 해야 말이 되지요. 어두움입니다. 돈 있는 것을 자랑질하려고 착하다고 우기는 이 더러운 세상. 성경에 보면 여자의 미모는 꽃처럼 시든다고 했어요.
인간은 모든 것이 허무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제는 즐겨야 합니다. 욥은 아직 그 정도 수준까지 안 갔어요. 내가 아끼는 내가 왜 죽어야 합니까. 신약에 오면 “죽어도 살겠고” 주께서 죽어도 사는 근거를 주님 자체가 죽었다가 살아서 근거를 주셨잖아요. 이런 근거. 그게 사도바울이 말한 십자가가 보인다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을 보면서 “죽어도 살겠고”가 내 안에 있는 그것을 보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뻔한데 다 드러난 사실을 돈뿐인 것을 누가 알아도 아는 사실인데 되지도 않는 선을 논하고 자기 잘남을 논하는 그 거짓된 삶이 십자가 앞에서 다 깨어지고 일괄적으로 어두움인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