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저주의 노예

아빠와 함께 2021. 2. 22. 06:02

저주의 노예 

2021년 2월 21일           본문 말씀: 욥기 20:24-29

(20:24)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20:25)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

(20: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0: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0:28)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

(20: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욥의 친구 소발은,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장 두려워하는 저주의 상황을 장착하는데 열중합니다. 공포감을 크게 조성하므로서 이 공포가 크면 죄를 안 지를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본인이 자의적으로 미리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즉 죄라는 것은 본인들이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벌이 무서워서 안 짓는 죄는 곧 이미 마음 속에서부터 죄의 노예가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죄란 개인에 속한 문제가 아니라 범사회적 문제입니다. 인간이 속해 있는 그 사회가 죄가 되는 줄도 모르는채 서로가 공감하면서 조직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벌 내리시기 전에 벌써 인간은 벌부터 받고 사는 셈입니다.

죄 짓기 전부터 벌이 주는 압박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죄를 모르는데서 오는 벌 속에서 삽니다. 욥의 친구가 제시하는 징벌의 내용들은 그 사람이 살아가면서 의식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화살촉이라는 사물감이 주는 차가움과 냉정함은 따뜻한 체온에 둘러싸인 인체의 몸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어울리지 않는 것 사이에 화살촉이 인간의 깊은 내장에 해당되는 쓸개에 꽂혔다는 점을 상상해보라는 겁니다. ‘차가움과 따스함’의 난폭한 만남에서 인간의 정신은 더욱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 모아놓은 재산을 한 순간에, 책임자도 없는 채 불어닥친 불에 다 태웠다면 이것도 죄에 따른 하나님의 냉혹한 징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친구는 말하기를, 미래에 그동안 쌓아놓은 재산이 다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의 친구는 지금 미래에 대해 미리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있어 시간 자체가 현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징벌같은 겁니다. 현재 상태가 아무리 단단해도 미래에 대한 무지 자체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즉 사람들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변하지 않는 보편적 진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흘려도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이 무엇일까요? 대도시의 밤풍경을 봅시다. 모든 이들이 다 잠들을 있는 그 한 밤 중을 생각해 봅시다. 온통 깜깜해도 그 대도시를 가로와 세로로 그어버리는 가로등들은 불빛을 낼 것입니다.

그리고 대도심에 있는 고층빌딩 사무소에서도 밤샘하는 직원들이 켜놓은 불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떤 곳은 어둡고 어떤 곳이 불빛으로 깜박거립니다. 오늘밤도 그러하듯이 내일밤도 그러할 것입니다. 한 달 뒤, 1년 뒤로 그러할 겁니다. 이처럼 빛은 사방이 깜깜하면 할수록 진가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지금 욥 같은 경우에, 하나님이 심어진 지혜가 욥 내부에서 켜져있습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전혀 복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그저 자신들이 신으로부터 벌 안 받는 것만 계산하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은 본인들의 평소 생각에, 자신들이 잘난 존재로 간주합니다.

그런데 내가 나로 인하여 자신을 ‘잘난 존재’로 본다면 이러한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내가 억지스러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환장할 노릇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높일 궁리만 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들을 미끄럼틀 꼭대기만 올라가도 세상을 다 가진 포만감을 갖지만 그날 저녁에서 온 식구가 같은 방바닥에 앉아있습니다.

한 순간 객기를 부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의 겉모습을 보시지 않고 바닥을 보닙니다. “네 지금 어느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느냐?”를 보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7:24-27에 나오는 말씀처럼, 전 인류는 단 두 가지 바닥만 허용됩니다. 하나는 모래 위에 지은 집, 다른 하나는 반석 위에 지은 집 뿐입니다.

욥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욥은 친구들이 자신을 보고 욕하는 것을 참지를 못하고 있는 점이 문제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박아넣지 않는 뿌리 때문에 큰 실망감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처벌과 자신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바가 진정 정당합니다.

이 정당함을 구약 때부터 밝혀주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율법입니다. 레위기 17:4에 보면, “먼저 희막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기 17:13에 봐도, “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나 그들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이 먹을 만한 짐승이나 새를 사냥하여 잡거든 그 피를 흘리고 흙으로 덮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약속의 땅에서는 결코 피를 흘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는 다른 피가 이 약속의 땅에 일괄적으로 덮혀야 한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을 적시게 되는 피는 죄인에 의해서 유발되는 억울한 피, 곧 희생의 피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이란 인간들의 죄악됨을 다 받아내는 땅입니다. 지금 욥은 이 고통에 본의 아니게 참여하고 있는 겁니다. 성도라는 욥처럼 이 피에 뿌리가 박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없는 이질적인 것이 약속의 땅을 유지시켜 줍니다.

히브리서 9:22에 보면,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하면, ‘죽음’을 가지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당해야 합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 자신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존재는 감히 주의 일의 결과물이며 내부에서 일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성도 자신의 존재와 일에 대해서 본인이 나서서 판단하고 결정한 대상이 아닌 겁니다. 성도 자신이 성도 자신을 다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이 어두운 세상의 빛입니다. 이는 성도 안에 빛의 요소가 박혀있다는 말입니다.

이 빛의 요소로 인해 성도는 시간의 흘러감과 어두운 사태에 대해서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도리어 세상이 어둡고 흉측할수록 성도 안의 계신 분의 빛의 가치는 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트럼펫을 부는 이가 소리 하나를 내기 위해 다른 구멍들을 다 막는 것처럼, 오직 예수님의 피의 가치만 드러내기 위해 주님께서는 성도를 활용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탓을 하지 말고 자신이 어디에 뿌리 박혀 있는 것을 수시로 확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71강-욥기 20장 24~29절(저주의 노예)202102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0장 24~29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그가 철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

욥의 친구 달리 말해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 달리 말해서 우리와 함께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무엇을 걱정하고 무엇을 겁내고 있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를 그들은 욥 앞에서 다 노출되었습니다. 평소에 인간은 어떤 공포감에 휩싸여 살아가는지 ‘나는 절대로 이래서는 안 되겠어’라는 것을 자기에게는 해당 안 되고 욥에게 해당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욥의 친구들의 솔직한 자기 고백은 왜 이 고백이 성경에 꼭 있어야 하는지를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복음을 모르고 성령을 받기 전에 주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도 이런 삶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서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도 지금 이 공포에 휩싸여있고 심지어 교회 나와서 복음을 안다고 우기는데 전혀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전히 이런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 친구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이 신을 인정한다는 거예요.

신을 인정하니 뭐합니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자기는 신을 인정해 놓고 벌벌 떨고 있는데. 이런 저주가 임할까 싶어서. 욥의 친구는 이런 거예요. 이런 경우를 당하면 겁나지? 겁나지? 나도 겁난다. 뭐 이런 거예요. 혼자 겁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본문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세상 사람들은 왜 이런 것을 겁내고 두려워하고 있는가를 봐야 해요.

여기 오늘 본문 24절에 보면 “그가 철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활이 쏘아 꿸 것이요, 몸에서 그 살을 빼어낸즉 번쩍번쩍”, 번쩍번쩍 이라는 것은 아주 날카롭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는데 번쩍번쩍하는 차가운 사물체가 화살이죠, 그 차가운 사물체를 우리 따뜻한 36.5도의 몸을 차가운 사물체가 어찌 겁나지 않으리오 라는 뜻이죠. 그런데 그 사물체가 어디에 꽂히냐 하면 쓸개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이게 상상만 해도 얼마나 아프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물체, 딱딱한 인간의 말을 들을 줄도 모르고 그냥 냉혹하게 인간을 꿰뚫어서 사람을 즉사시키는 그 화살촉에 뾰족함이 평소에 겁나고 그 차가움도 겁나지만 그게 꼽혀도 엉덩이 살이나 허벅지에 꽂히면 덜 무서울 텐데 가장 은밀한 쓸개에 꽂히니까 두려움이 배가 되는 겁니다. 그 무서움이 사정 봐주지 않고 우리에게 꽂혔을 때 그다음에 나오는 말이 “큰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느니라” 큰 두려움.

하여튼 상상에 상상을 업그레이드하고 있는 거예요. 무섭다는 정도가 아니고 ‘무십다. 무셔워. 무셔워. 무셔워’라고 계속 모든 상황을 끄집어내도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옛날 사극에 보면 사람들을 고문할 때 본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죄인에게 이실직고하라고 막 쑤셔 대잖아요. 손톱을 뽑는 댈지, 혓바닥을 어떻게 하고, 사지를 어떻게 하고 할 때 고문하는 본인도 이런 일을 당하면 정말 사람으로서 못 참을 것을 총동원합니다.

그런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것은 평소에 그게 내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이런 것이 하나의 잠재의식으로 우리 안에 남아 있으니 아무리 맛있는 것을 먹고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우리 내부에서 번쩍번쩍이 가만두지 않고 쓸개 다칠까 벌벌 떠는 것을 겁내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또 26절에 보면 “모든 캄캄한 것이 그의 보물을 위하여 쌓이고”, 쌓인다는 것은 덮는다는 거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산불 같은 것, 벼락 맞는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사르리라”라고 하죠. 그 사람뿐만 아니고 그 집에 쌓아둔 평생에 모든 것을 다 사를 거라는 거죠.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 그 가산이 패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날에 흘러가리니” 여기서 가산은 모아 놓은 재산을 말합니다. 모아놓은 재산에 그동안 얼마나 정들었고 애지중지했느냔 말이죠. 그런데 악을 저지른 이 저주받은 인간들은 그 모아놓은 것이 한꺼번에 쓸려지나 갈 때 너는 낭패중에 낭패, 절망중에 절망에 빠질 것이라는 거예요.

욥이 이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하겠습니다. ‘너나 그렇지. 나는 안 그런데. 왜 너의 사정을 네가 무섭다는 것을 강제로 나에게 자꾸 강조하냐. 너에게 문제 있다는 것을 모르고 우리 다 같이 그렇잖아. 다 같이 그렇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29절에 보면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산업이니라”라고 나오죠. 자기가 기껏 살아 봐야 어차피 그렇게 처참한 말로가 된다는 겁니다.

“무섭지? 겁나지? 그러니까 죄짓지 말자”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벌이 무서워서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의식 단계는 자기가 결정 못 해요. 감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미운 것은 밉다, 좋은 것은 좋다는 이것을 의식이 어떻게 관리가 되고 통제가 됩니까. 안 되죠. 되지를 않아요. 이런 벌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아예 그런 벌에 대해서도 무감정이 되면 더 낫잖아요. 전혀 안 무서운 가운데 뭐든 할 수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오늘 욥의 친구가 이야기하는 것이 소발이 이야기하는 것이 평소에 얼마나 인간들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대표적으로 잘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욥의 친구가 뭐가 문제냐 하는 겁니다. 이것 모르고 그냥 넘어가 버리면 성경에 이게 담긴 이유도 우리가 놓치는 것이 됩니다. 뭐가 문제냐 하면 그것은 바로 욥 친구의 문제점이 우리의 문제점이 되는데 시간 개념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언젠가 그런 강의를 한 기억이 나는데요. 어떻게 하면 미래를 없앨 수 있느냐. 어떻게 하면 내일을 없앨 수 있느냐는 겁니다. 미래만 없애면 남은 재산이 어떻게 되고 그런 걱정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인간은 미래에 시달리는 거예요. 미래를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망이라고 하거든요. 나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성공의 여지를 준다는 희망이 지금 현재의 나를 이렇게 괴롭히고 있는데 이거 바보 아니에요.

그럼 미래를 생각 안 하면 되잖아요. 어떤 영화 대사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내일을 위한 자는 오늘만 사는 자에게 죽는다”라는 유명한 대사예요. 깡패인데 자기 것 다 날아가니까 너희들 다 죽었다고 복수하는 거예요. 이걸 원빈 이라는 배우가 이야기했어요. 내일을 남겨놓은 자는 오늘만 사는 사람에게 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또 유명한 대사가 “그렇게 다 가져가셔야 속이 후련하시겠습니까?” 꼭 복수할 때는 핑계가 있기 마련이죠.

사람들이 시간을 주체를 못 합니다. 내일에 대한 기대와 희망과 내일이 주는 괴로움과 두려움을 본인이 처리 못 하고 있어요. 그건 인간의 시간 의식이 내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시간 의식이 뭐냐. 기억이라는 거예요. 기억. 해마라는 곳에 장기기억이 있는데 해마는 두뇌 가운데 가장 은밀한 곳에 있어요. 쳐다보면서 찾아야 볼 수 있어요. 해마처럼 생겼어요.

해마(hippocampus)라는 기억이 인간의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비교해서 대조해서 오는 거예요. 내가 어제 기대했던 오늘과 지금의 오늘 사이에 그 갭(간격)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서 나는 기분 좋다, 기분 나쁘다를 기억으로 결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현실과 아무 상관 없어요. 현실은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개나리 피고 진달래꽃 피어가는데 본인은 내일 생각하면서 내일의 걱정 근심을 늘어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 친구의 문제는 뭐냐 하면 자꾸 내일 잘되면 내가 복되고 내일 못 되면 나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그 시간에 놀아나는 것이 지금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건 인간이 지어낸 잘못된 생각이고 그럼 실제는 뭐냐, 실제는 대도시에 밤 풍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면 LA 밤 풍경 많이 나와요. 길이 반듯반듯하고 가로등 켜있는 LA 밤 풍경.

밤 풍경을 보게 되면 대부분은 11시 넘어서 보게 되면 깜깜해요. 깜깜한데 가로등과 몇몇 건물에 사무실에 불이 켜있잖아요. 그러니까 밤 풍경 뜻은 불이 켜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는 풍경이 밤 풍경입니다. 밤에는 모든 것이 고요하고 밤에는 특징이 뭐냐 하면 그 순간 정적이 흘러요. 다시 말해서 시간이 스톱 되어 있어요.

시간이 정지되어 있으니까 인간의 본질만 드러나는 거죠. 반짝반짝하는 것과 그냥 꺼져있는 거. 형광등이 형광등 값을 하려면 불이 켜져야 하잖아요. 꺼진 형광등과 밝힌 형광등, 그것이 그 인간의 본 모습이고 본질이에요. 그게 내일 되나 한 달 뒤에 되나 일 년 뒤에 되나 그 켜져 있는 형광등은 그대로죠. 에베소서에 보면 “너는 빛의 자녀라”라고 나오는데 빛의 자녀 같으면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내 안에 있는 빛은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빛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빛이 빛 되기 위해서 세상은 오히려 따라줘야 하는 거죠. 빛이 빛 되게 하기 위해서 세상은 맞춰서 따라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고 염려하니까 아무리 지금 풍족하게 살아도 내일은 인간이 보장할 수가 없고요. 보장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 내 안에 있는 빛이 시간을 초월해 내일이 되든 모레가 되든 한결같이 빛이 빛난다면 오히려 내일 번쩍번쩍하는 화살이 쏟아지고 내일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간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어두운 평소에 인간을 괴롭혔던 악마가 괴롭혔던 저주스러운 상황에서도 유독 빛은 빛답게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트럼펫을 부는 사람이 하나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 다른 구멍을 다 막아버려요. 단 하나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 ‘시’는 시, ‘레’는 레 음을 내기 위해서. 성경은 욥을 유난히 독특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다른 친구들의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완전히 묵사발을 내버립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는 뭐냐, 욥의 친구 같은 요소도 있고 성도라면 욥의 요소도 있어요.

그러면 ‘욥 친구들의 말은 정말 정당했다. 욥의 친구가 말하는 협박은 실질적이고 협박할 만한 협박이다’라고 동조하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있어요. 이게 옛사람입니다. 옛사랑 아니고 옛사람. 이게 항상 있어 줘야 해요. 유난히도 있어 줘야 해요. 왜? 빛이라는 것은 이질적이고 내가 집어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빛의 운반체거든요.

성도가 뭡니까. 내가 만들어 내지 않는, 노력해서 얻지 않는 그런 공짜, 은혜로운 거, 그런 하나님의 은사 선물이 내 허락도 없이 쑥 들어와서 이건 내 집이라고 자리 잡는 거,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그걸 저는 박혔다고 하는데. 박혔다는 것이 뭐냐 하면 너는 지금 어디에 뿌리가 박혔느냐는 겁니다. 마태복음 7장에 분명히 나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인간은 어디엔가 박혀 있어야 해요. 박혀 있는 위력이 어느 정도냐 하면 시간을 초월해서 박혀 있어야 해요.

시간이 아무리 흐르고 주위 상황이 바뀐다 할지라도 오늘 욥의 친구가 말 잘했는데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몸은 망가지고 모든 재산은 불에 다 타버리고 끔찍하죠, 오리 농사 지었는데 AI로 다 살처분하고 끔찍한 일입니다. 아이 키웠는데 세월호에 빠져 죽고 끔찍한 일이죠. 하지만 그런 공포가 또다시 어디서 올지 예상 못 하고 시간이라 하는 것은 빛이 빛 되기 위해서 보조적으로 계속해서 주어지는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빛이 들어온 사람들은 어떤 경우가 터지더라도 오히려 그런 순간순간이 오히려 감사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순간이에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욥의 잘못을 알아야죠. 욥의 친구를 그들이 시간에 눌려서 시간에 후달려 가면서 살아가는 거, 그리고 친구들의 문제점은 이런 저주받은 상황을 자기들이 미리 대비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겁니다. 이것이 너무 끔찍하기 때문에 죄지으면 안 되기 때문에 내가 죄 안 짓는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저주가 너무 강렬해서 겁이 나서 죄 안 짓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욥 친구의 문제점은 자기가 잘난 존재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제일 힘든 것은 내가 잘났다는 나의 비위를 내가 맞춰주려고 하니까 환장할 노릇이에요. 내가 내 자아도취에 하루하루 맞춰주려고 하니까 내가 미칠 지경이에요. 아무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어떤 괴물이 자꾸 나를 부추기는 거예요. 너 잘났다고.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희생에 의하면 그건 악마고 괴물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예요. 악마면 제발 악마답게 살아라. 너는 저주에 겁낼 자격조차 없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욕해서는 안 돼요. 그 인간들은 욕먹을 자격도 안 돼요. 왜냐 하면 안에 자기 것만 들어있으니까. 주님의 것이 없으니까. 주님의 것이 없는 사람에게 욕한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저는 욕 할 줄도 몰라요. 비타민씨나 좀 하지 나머지 것은 할 줄 모릅니다. 그거 할 필요 없어요. 욕 들을 가치도 없는 거예요. 뭔가 있어야 욕을 하지. 욕을 먹을 가치가 뭔가 빛이 있어야 하죠. 아무것도 없는 맹탕인데 무슨 욕을 합니까.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면 되는 거죠. 그러면 욥의 잘못은 뭐냐. 나는 너무 정당하기 때문에 욕 얻어먹는 것이 억울하다는 겁니다. 이게 욥의 잘못이에요.

욥은 아직 십자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질 때 곱게 몰래 산속에 가서 자기끼리 속닥속닥하면서 “좀 죽어주세요”라고 이렇게 했습니까? 우사란 우사는 모든 웃음거리는 다 공개했잖아요. 이래도 너의 죄를 몰랐느냐. 너의 죄를 모르겠느냐는 식으로 세상에서 굴욕과 모욕을 당하셨잖아요. 신체의 아픔보다 더 아픈 것은 내 자아가 모독받는 거예요.

남들에게 모독받고 무가치하게 취급받는 거. 업신여김을 받는 거. 하찮게 여김을 당하는 거. 이거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느 누구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참을 수가 없어요. 그것을 잘 모여주는 분들이 있어요. 지금 이 시대에 같이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자기의 모욕받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거. 김정은. 회의 석상에서 자기보다 나이 두 배 많은 인간에게 욕하고 분명히 담배 피우지 말라고 법 만들고 자기는 담배 피우고 이건 뭐 살아있는 괴물이죠.

웃기지도 않아요. 철딱서니 없는 얘를 지도자라고 우기는 그 사람도 종교단체고요. 이건 신천지보다 더해요. 김정은이 자기가 하는 행동을 지금 모르는 이유가 어린아이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아이 데리고 동네 놀이터에 가보면 세 살 먹은 딸아이가 자기 미끄럼틀 탈 줄 안다고 올라가요. 올라가서 밑을 보니까 저 아래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가 저 밑에 있거든요.

자기는 높아져 있잖아요. 자기가 높이 있는 것을 막 자랑질하는 거예요. “엄마 여기 올라와 볼래?”라고 하면서 스스로 장한 거예요. 김정은이가 자기가 높은 자리에 있으니까 스스로 장한 거예요. 이 자리를 유지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그날 저녁에 그 세 살 먹은 아이는 온 식구와 같이 땅바닥에 앉아 있습니다. 잠시 높았죠. 결국 다 미끄럼틀에서 내려올 건데.

2차원 존재, 인간은 표면적 존재니까 다 내려온단 말이죠. 그래서 욥이 남에게 욕 얻어먹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은 아직 욥이 바닥을 몰라요. 나 자신의 바닥을 모릅니다. 그냥 착한 일만 하고 나쁜 짓 한 기억이 없으니까, 인간은 기억대로 사니까, 분명히 나쁜 짓 한 기억은 없는데 벌은 나쁜 짓 한 사람에게만 벌을 받으니까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거예요.

욥의 고민은 오늘날 정말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듣고 말씀대로 다 사는 사람, 대표적 인물은 잔느기욘, 칼빈, 루터 이런 사람들. 그런 유를 쫓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욥을 보면서 굉장히 위로를 받아요. 세상은 악하지만 나는 정당하다. 계속 자기 정당함을 반증해 주는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데 그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그렇게 조작한 것이 악마라는 것을 몰라요.

자신의 바닥을 모릅니다. 자신의 붕 떠 있는 상태만 보았지, 자신이 미끄럼틀에 잠시 올라가 있다는 것을 몰라요. 사실은 저 바닥인데. 이 바닥은 어디서 알려주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려줍니다. 레위기 17장 4절에 보면 거기에 상당히 난해해 보이는 대목이 나옵니다. 쉽게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레위기 17장 4절에 “먼저 회막 문으로 끌어다가 여호와의 장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로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가 피를 흘렸은 즉 자기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라고 나오는데 뭔 뜻이냐 하면 ‘네 피를 이 땅에 쏟지 마라. 흘리지 마라’라는 뜻입니다. 네 피를 이 땅에 흘리지 마라. 만약에 너의 피를 이 땅에 흘리면 내가 너를 용서치 아니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 피가 더럽기 때문에 흘리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이 땅에는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이 피가 그리고 이 약속의 땅이 완성이 되게 되면 이 약속의 땅은 뭐로 타일을 까느냐 하면 예수님의 거룩한 피로 완전히 바닥을 깔아버리는 그때가 온다는 거예요. 이게 바닥이에요. 바닥은 죽음과 이야기해야 해요.

내 바닥은 내가 낮아지는 마음이 낮추고 낮추고 겸손하고 겸손하고 말씀대로 살고 해서 바닥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내가 죽어 마땅한 그러한 죽어도 할 말 없는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예수님이 깔아놓은 피 앞에서 감히 내 피가 섞일 수 없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바닥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그 바닥은 완전한 피 색깔로 깔리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내일이냐 모레냐가 의미 없어요. 일단 한번 바닥으로 깔리면 내일이 되든 한 달이 되든 일 년이 되든 칠순이 되든 죽어서 어디를 가든 그 피는 우리 안에서 계속 살아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유월절 이스라엘 특징이에요. 피 흘림이라는 것은 나 아닌 예수님 이름의 피를 깔았기 때문에 내가 상대하는 타인이나 내가 상대하는 나, 이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상대방과 동조하려고 하는데 어떤 할머니가 노인들 모여서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다른 친구들이 전부 자랑질을 해요. “우리는 노령연금 30만 원 탔다”라고 자랑을 하는데 자기 주변에 전부다 30만 원 탔거든요. 그래서 동에 따지러 갔어요. “왜 내 나이 또래 다른 노인들은 노령연금 30만 원 타는데 왜 나는 안 줍니까?”라고 하니까 직원이 할머니 재산을 추적해 보니까 재산이 3억이나 있었던 거예요.

현찰이 3억이라 노령연금을 못 탄 거예요. 그래서 다음날 할머니가 3억을 자식들에게 다 줘버리고 30만 원 타러 간 거예요. 아침에 밤 4개 저녁에 3개 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도대체 30만 원을 얼마나 모아야, 아마 죽기 전에는 못 모아요. 3억. 그런데 남과 유사성을 갖기 위해서, 남과 친하기 위해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미 피로 다 줬잖아요. 3억은 일도 아닌데. 이건 인생이 어떻게 망가져도 상관없는 거예요. 내 안에 피가 피답기 위해서 이 세상은 LA 밤 풍경처럼 어두운 세상이에요. 그들은 공포에 떨라고 하세요. 저주에 벌벌 떨라고 하세요. 하지만 피가 있은즉 죄 용서가 되는 겁니다.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욥에게 자기 행동과 상관없이 고통이 온 겁니다. 그 고통은 십자가 고통이 미리 앞당겨서 욥에게 주셨잖아요.

욥은 십자가를 몰라요. 나중에 알게 되죠. 우리는 십자가 이후의 세대입니다. 주께서 사도바울이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고 할 때 무슨 뜻인지 알아먹어야 해요. ‘아, 내 육체가 이미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천국의 영생을 증거하기 위해서 활용당하고 있구나. 동원되고 있구나’ 그렇다면 제가 아까 기도한 것처럼 감히 내가 그 귀한 존재이신 주의 일을 하고 있는데 어쭙잖게 내가 나에 대해서 이러쿵 인생 못살았니, 잘 살았니, 고생했니, 적게 했니, 그런 황당한 판단은 오늘 이 시간부터 내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트럼펫 소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트럼펫 소리를 내기 위해서 나로부터 해서 모든 주변의 구멍을 다 막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프로젝트이고 계획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히 복음 증거 하는 용도로 쓰임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그동안 나로 인해 감사한 어리석음을 매사에 대해서 벌벌 떨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는 어둡기에 빛이 빛답게 형광등을 발휘할 수 있는 주의 증인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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