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반대 방향

아빠와 함께 2021. 2. 1. 08:45

반대 방향 

2021년 1월 31일                본문 말씀: 욥기 20:1-7

(20: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0: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20: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20: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20: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20: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20: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소발이라는 친구는 욥을 보면서 자신이 구상한 현실 속의 일부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즉 욥이 중심이라는 사실을 못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안 받아들이고 싶은 겁니다. 욥이 어떤 입장에서 욥의 친구들을 비난하는지 그는 대충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소발은, 욥이 아는 범주를 자신의 범주의 일부라고 여깁니다.

욥보다 반박하라는 듯이 ‘인생의 허무’를 논합니다. 실은 ‘악인의 허무함’을 나열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교만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늘어넣습니다. 교만하게 되면 결국에는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소발이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공식에서 나온 주장입니다. ‘진리란 현실 안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 현실이 있다’고 말입니다. 즉 현실이란 보이지 않는 진리를 더욱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는 현실과 진리가 상호 대립되는 성질로 자리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욥의 경우가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현실이란 진리에서 파생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들은 지금 있는 현실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해 욥에게 일어난 진리성을 뭉개버리려 합니다. ‘악’이라고 규정하고자 합니다, 즉 ‘선한 현실’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욥에게 일어난 특이성을 얼버무릴 작정입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선함이 여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욥을 통해서 나타난 바에 의하면 현실과 진리를 상극입니다. 충돌합니다.

우리는 그 경계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욥의 친구들의 주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주장은 뭔가 방향성을 띱니다. 그쪽 방향의 끝은 본인들이 행복해지는 겁니다. 다치지 않는 ‘나’이고 싶어합니다. 반면에 욥쪽은 이미 일이 터졌습니다. 욥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기 파괴’가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상호 대화가 될 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성도가 세상에 나가서 타인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이해하는 말을 해버리면 서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반대라는 사실이 사라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4-6에 보면, “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상대방을 납득을 시키려고 시도하면, 지금의 현실이 주류가 되어버립니다. 더 큰 범주로 오해하게 됩니다.

현실과 진리의 충돌은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예수님과의 격돌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은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이 현실 질서를 지탱하려고 했습니다. 이미 자신들은 현실을 자기 삶의 안정적인 바탕으로 자리잡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사도 바울 당시의 교회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교회’가 있음으로서 그 ‘교회’를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자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도 필요하고 예수님의 복음도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엮어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진리는 현실과 타협하거나 협상하지 않습니다. ‘교회 있음’은 진리가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교회를 붙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차라리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를 유지시켜야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 3:4-7에 보면, “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분명히 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욥에게 주어진 ‘특이성’입니다.

이러한 특이성은 구약 사무엘상 1장에서도 나옵니다. 사무엘은 ‘부모 없음’에서 나온 자식입니다. 원래 모든 자식들은 ‘부모 있음’에서 당연히 나오는 결과로서 생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당연함을 끊어버리고 부모로부터 나오지 않는 자식으로서 사무엘을 출현시키십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현실상의 한계를 노출시키는 겁니다. 즉 현실을 지키고자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닌 겁니다. 차라리 현실을 뭉개버리는 특이성이 진리인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은 자신을 두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입니다. 현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와 결부된 것이 아니라 다른 원인에 의해서 생겨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을 둘러싼 현실이 위태로우면 불안감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길을 가다가 소방차나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뿌리면서 달려가면 사람들은 긴장됩니다. 그것은 상실감에 동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이 나서 누구의 재산이 홀라당 다 탔든지 아니면 누구가 죽을지경에 되었다는 점을 상상하면서 잠시 동요하게 됩니다.

인간들이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뒤가 걱정스러워서가 아니라 죽음 직전까지 벌어지는 일들, 즉 내가 집착한 것들이 하나 둘씩 없어져가는 것에 대한 상실감 때문입니다. 이 상실감이 싫다는 것은 여전히 진리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 속에 있다는 말이 됩니다.

현실이란 나를 지켜내기 위해 둘러친 환경 자체로 봅니다. 즉 내가 곧 진리다 는 말입니다. 현실은 그런 나를 위해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얼마나 진리와는 반대방향으로 질주하며 사는지를 밝혀집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은 욥이 행한 일과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신약에 성령님이 활동하십니다. 성령님은 마치 집달리 같습니다. 내 것이라고 우기는 것들 안에 파묻혀 있는 진리와 은혜를 다 들추어내어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는 일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어나야만 하는 일들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주님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자기를 사수하려 그것으로 인하여 복음이 훼손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68강-욥기 20장 1~7절(반대방향)2021013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0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므로 내 생각이 내게 대답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초급함이니라,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내게 대답하는구나,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있어 옴으로, 악인의 익기는 자랑도 잠시요 사곡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그 높기가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욥과 소발이라는 욥의 친구가 서로 배틀(싸움) 을 벌리고 있습니다. 서로 차이나는 그 질적으로 대조되는 부딪힘을 통해서 경계선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와 복음을 얻을 수가 있어요. 좋은 소리와 정답만 이야기하는 자리에서는 어떤 진리도 안 나옵니다. 사람이 정답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것을 속이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는 정답을 아니까 더이상 쑤시고 들어오지 마라’하는 그런 마음일 수가 있는데 성경은 그렇지 않고 꼭 대조가 일어납니다.

바리새인과 예수님, 그리고 적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 고린도후서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교회가 사도바울을 불신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도 그냥 있지 않고 그들 교회 지도자들을 양의 탈을 쓴, 양의 마스크를 한 사실은 악마의 종이라고 아주 단정을 해버려요. 그리고 그들이 입만 벌리면 이야기하는 복음이라는 거, 예수님이라는 거, 그리고 성령이라는 거, 그것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사도바울 편들지 마시고요, 자기가 사도바울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나는 사도바울 편들래”라고 하지 마시고 항상 출발점을 사도바울 욕하고 비난하는 그 적들 편에 서서 그 적들이 사도바울 보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해요. 사도바울 보고 그렇게 ‘저건 사도가 아니야. 거짓된 거야’라고 비난하는 그 심정이 있잖아요. 그 심중을 헤아릴 때는 충분히 그런 말을 할 납득이 됩니다.

그들은 뭔가 지킬 게 있어요. 사도바울은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심지어 예수님도 본인이 안 지킵니다. 왜냐 하면 주님이 그때그때마다 사용하기 때문에 주님의 살아 계심이 자기 살아 있는 것보다 월등 하기때문에 자기가 굳이 예수님을 소유해서 예수님을 지키려고 사수하려고 할 하등에 이유가 없고 수고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예수 이름으로 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그들은 어쨌든 간에 이 교회를 지켜야 해요.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하여튼 뭐든지 자기 교회에 뭔가 해가 된다싶으면 사정없이 공격하는 본성을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양쪽 다 알기 위해서는 그 경계선, 사도바울을 공격하는 쪽과 사도바울이 말하는 쪽과의 경계선에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차이 성을 발휘하는지를 우리가 알면 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발이라는 사람이 지금 욥을 공격하고 있는데 어떤 식으로 공격하느냐 하면 이렇게 공격합니다. “욥아, 네가 아는 거 내가 다 아니까 이제부터 내가 썰을 푸는데 말을 할 텐데 내가 말하는 그 속에 네가 생각하는 것이 아마 다 담겨 있을 거야. 따라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거든 욥아 너는 소발이라는 친구가 이미 벌써 알고 있다는, 너는 입 다물고 있어야 하겠다는 결말을 낳는 그러한 결론이 지어지는 이야기를 한번 풀어 볼게”라는 식으로 욥기 20장에 나오는 겁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욥 네가 보기에 나 소발이 그렇게 만만하게 보이는 거 같은데 나 만만하지 않아. 세상사에 대해서.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게 없어. 사실은 내가 다 알고 있어. 내가 한번 이야기해 볼까. 한번 풀어봐?”라고 나오는 것이 몇 절이냐 하면 4절부터 11절까지 있습니다. 있는데 다 읽지는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악인들이 자랑질하거나 나쁜 사람들이 여유만만하게 살지만, 사실은 그 높이가 하늘에 닿고 머리가 구름 위에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멸망할 것이며 나중에 그가 아무리 유명세를 떨어도 몇 년만 지나면 ‘그가 어디 있지. 그가 누구였더라?’라고 다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 꿈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8절에 보면 밤에 보이던 환상처럼 다 없어질 것이다.

계속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생은 허무하다는 그 정도는 욥 네가 이야기 안 해도 내가 알고 있다. 욥이 지금 친구 나 소발을 공격하려고 할 때 지금 이런 레벨에서 공격하려고 이런 말을 끄집어낸 거 아니냐고 지금 반박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소발이라는 사람이 1~3절에 이야기하기를 네가 그렇게 공격할 때 내가 참으려고 했는데 못 참겠다고 하면서 “네가 그렇게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이라고 되어있어요.

여기 3절에 보면 “네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라고 하면서 내가 일부러 너를 공격하려고 하는 마음은 없었는데 저절로 내 마음에서 슬기로운 마음이 있어서 내가 너에게 한 수 가르쳐 주려고 지금 답변을 한다는 겁니다. 너에게 이야기해주는 이런 수고를 하니까 내 심정을 알아주라고 소발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욥과 소발의 차이점이 뭐냐는 겁니다.

그건 이렇게 정리됩니다. 소발이라는 사람은 현실 속에서 진리, 하나님의 뜻이죠, 진리를 찾아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현실 속에서. 현실이 이렇게 넓게 있으면 그중에 하나, ‘한번 찾아볼까, 진리가 어디 있지, 진리가 어디 숨었지, 여기 진리가 있네’라고 전체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식으로 지금 소발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바리새인들은 공부하는 사람들이에요. 연구하는 사람이고 공부하는 사람이고 말씀을 탐색하는 사람입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현실 세계가 이렇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는지 찾는 거예요. 오늘날의 과학자처럼. 아인슈타인이나 유명한 과학자 또는 인간의 몸을 연구하는 의사들이나 코로나 백신을 연구하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의 특징은 우리가 현실에 있는데 이 현실 속에서 현실을 더 낫게 하기위해서 진리는 있을 것이고 그 진리를 찾고 얻어내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이 소발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발의 입장에서, 본인 입장에서는 자기가 진리를 찾고 헤매는 것이 전혀 이것이 나쁜 짓이라는 생각을 못 하죠. 소발의 입장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이냐 하면 이 세상에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에 무관심한 사람, 자기 배나 채우고 출세나 추구하는 사람, 자기 명예나 찾는 사람, 권력 찾는 사람, 돈 찾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는 겁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이 세상에 대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돈을 찾는다든지 권력을 찾는다든지 정치권을 헤매는 사람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고 행복이라 하는 것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올해 나이로 102살 먹은 철학자가 그래요. 딱 들어보니 완전히 소발이에요.

욥의 친구입니다. 철학자이니까. 기독교라 하는 것은 이제 그 사람이 교회 다니니까 진리 찾는 것이 기독교라는 겁니다. 102살 먹으면서 한 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나이가 부끄럽지요. 102살 먹었는데 한 번도 복음이라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얼마나 많은 목사가 자기에게 진리라고 하고 복음이라고 했겠습니까. 자기는 그 정도는 다 안다는 겁니다.

인간의 행복은 복음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행복이지 이 세상에 돈과 명예욕은 행복이 아니라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반대되는 말을 제가 설교시간에 안 하고 있어요. 안 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뜻이 왜 틀렸는지 그런 주장이 왜 틀렸는지. 그러면 정답은 뭐냐. 정답은 이겁니다. 현실 속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 안에 현실이 있어요. 그걸 바꾼 겁니다.

현실 속에 진리가 있으면 나는 괜찮고 나를 유익하게 하기위해서 어떤 참된 진리가 있는지 찾아가는 식이죠. 찾아가는 그것조차도 악이 되고 그게 마귀 짓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나이가 102살이 되어도 도무지 상상을 못 하는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이것이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누가 철학 교수인 본인에게 어떤 목사가 그런 소리를 하겠어요.

당신은 나이 먹은 것도 죄라는 것을 누가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이 땅에 있는 현실은 진리를 파괴하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파괴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욥의 입장은 지금 소발이 하는 이야기를 다 알아요. 그걸 다 안다고요. 천주교 신부가 무슨 소리 하는지 다 알아요. 불교에서 무슨 소리 하는지 다 알아요.

다 아는데 나에게 일어나는 이 특이사건은 지금 우리가 아는 진리가 찾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 섬기는 것이 바른길이라는 그런 논리와 그런 공식 가지고는 도저히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나 버렸으니 이거 어떻게 할지를 지금 숙제를 준겁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과 우리가 아는 진리 누구나 다 납득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그 공식을 들이대니까 이게 안 맞더란 말이죠. 맞을 거 같으면 왜 말을 안 하겠어요.

욥도 나중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지만, 지금은 해답을 모르겠어요. 아닌 것은 아는데 무엇이 아닌지를 모르는 거예요. 제가 짧은 퀴즈를 낼 테니 한번 답변해 보세요. 테이블 위에 투명한 유리병이 있고 유리병 안에 막이 꽉 막혀 있습니다. 그 유리병 안에 우리 육신이 거기 들어 있다면 우리는 그 병을 어떻게 탈출할 것입니까.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만다라’라는 불교 영화에 보면 나오거든요.

그들이 제시하는 해답은 뭐냐 하면 ‘이것도 꿈이다’라는 것이 해답이에요. 그 사람들은 꿈밖에 없고 현실은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현실은 모르죠. 십자가가 현실이라는 것은 모르고 그저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이 불교예요. 케세라세라(될 대로 돼라)가 그들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면 제가 여러분께 질문 할게요. 테이블 위에 투명한 유리병이 있고 유리병 안에 막이 꽉 막혀서 여러분 힘으로 뚫을 수 없을 때 어떻게 그 병 안에서 밖으로 나오느냐입니다.

우리한테 물을 것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님에게 물어야 하죠.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냐 하면 그 병을 통째로 흔들어 버렸어요. 그 통이 테이블 위에 있으니까 이 병이 떼구르르 굴러가서 병도 깨지고 그 안에 있는 자신도 깨졌지요. 이게 해답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죽고자 왔어요. 죽을 때 혼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흔들어 놔버려요.

이 세상을 같이 파괴해 버리는 겁니다. 지금 욥도 모르고 욥의 친구도 모르는 것이 욥이나 욥의 친구나 사적으로 지금 정답을 찾으려고 해요. 사적인 정답. 이 우주와 연관되지 않고 사적인 거. 개인적이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그 김형석 교수처럼 나만 바르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전부 다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예수님은 우주적 운명과 관련되어서 오신 분이에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를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면 나는 뭐냐. 이 우주 질서의 하나의 보조역할이죠. 고린도전서 3장 5~7절에 보면 이제 신약이니까 해답이 다 알려졌어요. 알려진 상태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라고 본인 자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뭔데,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죠.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Nothing.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하라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내가 여기 있으므로 나만의 어떤 성과를 낸다는 것은 사도바울의 복음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나와 관련된 일은 없습니다. 이 땅에 어떤 일도 나와 관련된 일은 없어요. 컵라면 물 붓다가 손 데는 거는 내가 실수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Only 하나님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예요.

고린도전서 3장 21~23절에는 말을 더 심하게 해요.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나 또는 타인을 자랑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만물과 연결시켜 버립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것,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계획 잡힌 자가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다만 이미 우리가 정답을 아는 입장에서 다시 욥기로 돌아가게 되면 지금 욥의 친구가 욥을 보면서도 뭘 모르느냐 하면 가는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에요. 제가 아까 기도할 때 기도 제목을 제발 무슨 이야기 할 때 상대방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만 하라고 기도 제목을 정했는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천국 가는 방향과 지옥 가는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방향 같으면 좀 설득하고 유하게 나오면 따라올 수 있는데 쳐다보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에요. 코로나 19 일어난 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1년이 벌써 넘었어요. 그러면 제가 낮에 설명한 것처럼 현재 사람들이 소망한 것이 무엇입니까 할 때는 과거와 비교해서 과거에 뭐가 상실되었느냐 하면 코로나 때문에 추석이나 설 때 해외여행을 못 했어요. 하와이 놀러 가지 못했어요. 비행기가 안 떠서.

그렇다면 올해 소망은 무엇이겠어요. 반드시 과거가 없으면 미래가 형성이 안 돼요. 과거에 못 한 거 올해는 백신 맞아서 잘 되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과거에 본인이 알았던 그 지평선 내에 자기 범주 그 범주가 자기 전부가 되어버린 겁니다. 현실 속에서 자기가 여기 있으니까 현실 속에 진리라 하는 것은 여기 있는 내가 요구하는 것이 소망하는 것이 곧 나에게는 진리가 되는 거예요.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잘 될 거라는 맨날 잘 될 거라는 생각뿐이고. 누가 잘 될 건데. 내가 잘 되는 거지. 그게 소발이고요. 나 올해는 행복할 거라고 하는 그게 소발이고 욥은 나도 너처럼 잘되고 싶은데 내가 과거에 생각했던 단절된 과거와 끊어진 전혀 예상 못 한 일이 일어나서 도대체 나의 관심은 이게 왜 일어나는지 지금 해답을 못 찾아서 문제예요.

이미 뭔가 일은 벌어졌는데 그렇게 벌어진 그 연결되는 원인을 못 찾는 거예요. 일단 나는 아니에요. 내가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나와 상관없이 터져버린 사건, 그 사건을 우리도 지금 매일같이 경험합니다. 여러분들이 길을 걸어갈 때 갑자기 구급차나 소방차가 지나가면서 사이렌 소리를 내죠. ‘삐용삐용’하고 소리를 낼 때 우리는 뭘 느낍니까. ‘누구 죽었나? 불났나?’라고 생각하죠.

그게 뭐냐면 상실이에요. 상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죽음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 하면 죽음의 메타포, 죽음의 비유가 뭐냐, 죽는 게 왜 싫으냐면 죽는 게 잃어버리고 상실하기 때문에 싫은 거예요. 그러면 죽는 순간은 전혀 무섭지 않아요. 죽는 순간에 다가가면서 느끼는 그 상실감 그게 무서운 겁니다. 눈이야 감고 스카치테이프 바르면 되는데 죽는 순간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죽음이 가까이 오면서 내가 일궈놓았던 모든 것이 다 떨어져 나간다는 이 상실감, 내 것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그거, 얼마나 귀한 것들인데 말이죠.

세월호가 지금 몇 년 지났습니까. 보상금을 수억을 받아놓고도 아직 계속 세월호 언급하는 것은 이 상실감을 메꿀 수가 없어요. 메꾸는 방법은 뭐냐 하면 박근혜 좋아했던 사람들 자기 아들들 물에 빠져 죽는 거죠. 복수하는 거. 머리 손질한다고 아이들 다 물에 빠뜨렸으니까 머리 손질할 때 자기 아들도 당해야 한다는 이런 복수심. 그 외에는 무엇으로 그 상실감을 메꿀 수 있겠습니까.

상실감을 못 메꿔서 올해는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할 때 결국 진리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이 진리가 되어버렸어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이고 이게 바로 악마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시는 이야기가 우리를 개무시했잖아요. 왜냐면 우리는 아예 애시당초 살 가치도 없는 존재로 봤거든요. 예수님은.

우리는 뭐 멀쩡하게 살아서 올해를 기대하지만 주님께서는 “기대하지 마.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뻔했다”라고 하실 정도로 우리는 아예 없어도 되는 거예요. 없어도 되는 존재. 그런데 자꾸 우기게 되는 게 마땅히 있어도 되는 것처럼 우기고 있으니까 주께서 우리 곁에서 사이렌 소리를 내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 걱정 안 하고 남의 걱정하고 있는 거예요. ‘아 누가 아프나. 어디 불났구나. 휴, 나는 다행이다’라고 이렇게 된단 말이죠.

주일학교 설교 때 그런 이야기 했는데, 한나라는 사람이 기도해서 아기를 낳기 전에 한나는 없음이에요. 아들 사무엘은 아빠 엄마 있으니까 저절로 아들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아빠 엄마를 끊어버렸어요. 아빠 엄마 있어도 자식은 없는 거예요. 이게 새로운 이스라엘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여기 있는데 나를 천국 보내는 그런 메시아는 없어요.

나를 끊어버리고 나를 끊어버린 그런 상태에서 없는 나에게 내 안에 뭔가 다른 분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자라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자라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물 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물주라고 지시하는 거예요. 내가 뿌린 것이 아니고 주께서 뿌리라고 지시한 거예요. 이게 성도입니다. 욥은 지금 불평이 뭐냐 하면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지금 이게 왜 이렇게 사단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 비가 오는 이유를 네가 모르잖아. 너 있기 전에 하늘에 북두칠성 만들었을 때 네가 간섭했나. 네가 그때 있었나? 욥은 “제가 북두칠성 만드는데 제가 왜 관여합니까”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러니까 너는 너 있음에 대해서 이렇고 저렇고 이야기할 게 없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아프게 하든 건강하게 하든 지금 있다가 없애버리든 너는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너의 행복? 행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 신약 적으로 봤을 때 복음으로 봤을 때 내가 여기 있음은 미끼였습니다. 내가 유혹 거리였어요. 주의 복음을 가리는 유혹 거리. 내가 너무 멋있고 너무 고귀해요. 이게 미끼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복을 어떤 경우도 나는 포기 못 하겠다는 겁니다. 이게 소발이에요.

욥은 그것이 강제로 주님에 의해서 각성 되기 위해서 어떤 일이 터져버린 거예요. 일이 발생 되고 만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뭐냐. 성령은 집달리. 집달리 알죠. 붉은 딱지를 티비고 냉장고이고 다 붙여놓고 문 안 여시면 문 따고 들어갑니다. 세금도 안 내고. 현찰 많은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건설공사 하면서 세금 다 떼먹고 있죠. 없다고요? 재산 빼돌린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365 세무서 긴급조치에서 왔습니다.

그렇게 문 열고 다 붙이고 다 들고 나가요. 그동안 과거에 내 것이라고 여겼던 거, 그것 때문에 내 인생 더 살 이유가 있었던 그것들 다 들어내요.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에요. 집달리예요. ‘아까워라’라고 하며 붙들면 너는 심판 받아야 해. 붙들지 마. 가만히 있어. 그러면서 다 들고 갑니다.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 때 죽는 그 자리에 바로 낯선 생명의 죽음이 생명에 인도되는 새로운 죽음인데 내가 추구하는 방향과는 전혀 예상도 못 한 다른 방향 쪽에 천국이 있고 거기에 생명이 있는 겁니다.

좁은 길로 가거라. 이게 우리 맘대로 안 되잖아요. 좁은 길은 주께서 좁은 길을 열어 줄 때 아까운 거 들어낼 때 주의 복음을 그동안 방해한 거예요. 우리 안에 있는 창세 전에 구원받게 했다는 이 선택에 혜택과 이 선물을 그동안 진짜 쓰레기 같은 우리 자신이 꽉꽉 누르며 숨을 틀어막은 거예요. 그러니까 숨통 터트리기 위해서 하나둘 거두어 내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틈 사이에서 주께서 세리와 창기와 강도 같은 인간도 구원하시는 이유를 그제 서야 알죠. 잘났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이 된 그 확정됨을 주께서는 두 번 다시 가리지 말라고 우리 것을 거덜 내는 이 사랑, 이 사랑을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미친 짓 하면서도 사실은 정상이라고 우겼습니다. 주의 복음을 가려놓고도 짜증부터 내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하나둘 거둬주실 때 그 빈자리에 주의 은혜가 주의 값없는 용서가 들어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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