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63강 사무엘상21장1-2절(자존감과 사명감)20201027-이 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1장부터 시작합니다. 먼저 사무엘상 20장 1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도망하여, 라고 되어 있죠. 오늘 본문 21장을 보게 되면, 요나단에게도 기댈 처지가 못 되어서,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자꾸 도망 다닙니다. 다윗이 도망 다닌다는 뜻은 다윗을 공격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죠. 누가 공격하는가, 다른 사람은 별로 안 미워하는데 사울이 그렇게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울이 미워하게끔 한 분위기가 뭐냐 하면은 골리앗을 다윗이 이기고 난 뒤에 인기가 다윗에게 쏠렸죠. 사울은 천천이지만 다윗은 만만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보고 만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은, 전에 사울, 자기 수하에 있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것이라고 여겼던 백성들의 관심사가 다윗에게 쏠리고 말았습니다. 여기 성경 사무엘상 21장 다윗이 쫓기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자존감 또는 자존심.
이 자존심을 지금 사울은 극도로 높이고 있습니다. 자존감을 극대로, 극한으로 높이고 있죠. 자존감을. 자기는 왕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울의 자존감을 높여서 다윗을 공격하게 한다면, 그럼 다윗 쪽은 자존감이 아니고 뭘 갖고 있는가? 사명감을 갖고 있죠. 이건 다윗입니다. 사명감이 극한 되는 겁니다. 자존감은 사울 왕이고, 사명감은 누구하고 했습니까? 다윗이죠. 근데 다윗은 처음부터 사명감으로 온 것이 아니고, 사울처럼 다윗도 뭘 갖고 있느냐 하면은, 자기도 자존감이 있어요.
자존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존감을 사명감으로 바꾸고, 사울은 그냥 자존감으로 쭉 가는 겁니다. 그럼 다윗의 입장에서, 자존감에서 사명감으로 바꿀 때에, 주님 주시는 역할 때문에 사명감으로 바꾸는데, 그 사명감으로 제공되는 역할이 뭐냐 하면은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전에 우리가 보았듯이 사무엘선지자하고 사울하고 만났을 때에 분명히 사무엘은 언급을 했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왕 됨을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사울왕 몰래 어디로 가느냐 하면은, 이새의 집에 가서 누구한테 기름을 붓느냐 하면은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이새의 가정에 아들 일곱 명이 있고, 막내가 있어요. 막내. 아들 여덟 명이 있었죠. 10절에 보면, 이새의 아들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했는데, 근데 일곱 명만 보여주고 막내는 나중에 크면 보여주겠다, 이렇게 생각했는지 안 보여줬다 이 말이죠. 그런데 사무엘이 다윗을 만났을 때에 자기 뜻으로 만났겠어요? 아니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났겠습니까?
사무엘이 자기 뜻을 개입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일곱 명을 다 지나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사무엘이 이상해서 혹시 이 자리에 없는 아들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보니까, 막내아들이 있었다. 그럼 막내아들을 데려와 보세요, 해서 데려오니까,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 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더라” 이렇게 해서 사무엘 자기 역할은 끝났어요. 사무엘의 역할은 뭐냐 하면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면 기름을 부어야 하는데, 일단 먼저 기름을 부었던 사울은 잘렸어요. 하나님에 의해서 거부당했습니다.
그 다음에 기름 부은 사람은 다윗이다 이 말이죠. 그렇게 되면 모든 인간은 다 뭘 갖고 있습니까? 자존감이 있죠. 결국 여기서 우리가 잠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간단해요. 자존감에서 사명감으로 바뀌려면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뭔가 투입이 되어야 해요. 그 투입된 것이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기름부음이에요. 기름부음. 신약에도 동일한 원칙이 주어집니다. 신약에도.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되어 있죠.
여기 너희에다가 구약에서는 다윗을 집어넣고요, 신약에서는 우리를 한번 세워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졸지에 뭐가 됩니까? 다윗이 되는 겁니다.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왕 같은 제사장이니까. 계속해서 요한일서 2장 27절에, 기름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고 했죠. 기름부음을 받으면 이제부터는 니 맘대로 산다, 니가 하는 것이 그게 옳다가 아니고, 기름부음을 받음으로서 우리 안에 기름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은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의 주도권을 갖고 있는 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버렸죠.
그러면 나라는 인격 안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됩니까? 두 개의 인격이 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게 기름부음이에요. 교회 가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되죠. 교회 가는 것은 내 다리 가지고 교회 갔고 예배드리는 것도 내 눈으로 예배드리고 내 음성 내세워서 찬송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뭐? 그래서? 교회놀이 잘했잖아요. 그래서 뭐?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아니, 서커스 구경하면 구원받습니까?
서커스 구경하는 것이나 교회 예배 구경하는 것이나 차이점이 뭐가 있느냐 이 말이죠. 교회, 서커스, 영화관람, 경기관람, 야구경기 관람, 쇼 관람, 나훈아 쇼 관람, 또는 여기 뭐 어떤 세상 관광하는 것, 그것은 자존감으로 시작해서 집에 올 때도 뭐가 남아있어요? 자존감으로 가서 뭐로 나온다? 자존감으로 나오죠. 자존감으로. 옛날 대학 다니기 힘들 때, 또는 일류 고등학교, 일류 중학교, 또는 대기업 같은 것이 있을 때에, 옛날이에요. 옛날. 그때는 대구에 일류 중학교, 일류 고등학교만 돼도 대구 오래된 신문, 매일신문에 합격자명단이 나왔어요. 그리고 학교에 가면 합격자 명단이 죽 나와 있다고요.
그 합격자 명단을 보러 갈 때 자존감을 가지고 가거든요. 그 합격자 명단을 보고 난 뒤에 돌아올 때는 뭐합니까? 자존감을 높여서 오는 거예요. 만약에 떨어진 사람은 자존감을 가지고 갔다고 돌아올 때는 자존감이 무너지고 오는 거죠. 그러니까 자존감은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현실 속에서 자존감이 사라지는 경우가 없어요. 자존감이. 사울이 아닐 때가 없다 이 말이죠. 사울이 아닐 때가. 교회 갈 때도 자존감가지고 가서는 올 때도 복 받았다고 착각해서 자존감가지고 오고.
이런 자존감을 유지하다가는 어디를 못갑니까? 천국을 못가는 거예요. 갈 수가 없어요. 이거는 잘리는 거예요. 성경이 왜 있습니까? 바로 성경은, 여러분이 이건 아시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거든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 이 말이죠. 구약성경.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인들과 만날 수 있지만 특별히 중간에 개입한 중보자께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중보자에요. 하나님의 이름이 특별한 민족에게만 나타났다 이 말이죠. 호세아에서는 이 많은 민족 중에서 너희만 알았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특별히 그 이스라엘에게만 나타나고, 그 이스라엘에게 나타났는데 특별히 그 중에 왕, 왕의 자리에 나타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에서 만났다는 자를 등장시킵니다. 만났다는 자. 하나님을 만났다고 여기는 자를 등장시켜서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자 하는 거예요. 이 성경 자체가. 그러면 오늘날 어떤 두 사람이 길을 가는데 한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누구를 드러내고자 합니까? 인간을 드러내고자 해요. 인간을. 인간을 드러내고자 하는 거예요. 내 아는 사람이 법무부 장관이고 내 아는 동생이 뭐 좀 되고.
오늘 아침에 kbs2에 나오는 아침마당에서 나진기라는 사람이 나왔어요. 나진기가 누구냐 하면은 나훈아 사촌이에요. 나훈아 사촌이 30분 동안 떠들었어요. 왜? 나훈아 하고 잘 아는 사람이에요. 그럼 나훈아 없었으면 나진기에게도 사람들이 관심도 없는데, 나훈아 사촌이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특별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제2의 나훈아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서 모든 인간들은 나 자신이 이렇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평생을 살아가요. 나 자신이. 그것뿐이에요. 기억과 추억이 본인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나 그 기억과 추억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용을 쓰고 애를 썼던 긴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택한 백성들은 뭡니까? 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간단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인간은 무엇이냐, 에요. 인간은 홀로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거예요. 누구와 만나야 돼요. 누구와 만나는가, 하나님과 만나줘야, 인간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한 존재가 인간이다. 이 말은 나의 자존심 높다는 그것을 드러내라고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죠.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에요.
여러분들이 쉽게 실험할 수 있습니다. 밤에 여러분들이 침대에 누워서 주무실 때에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잠결에 빠지잖아요. 하나둘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합니까? ‘오늘도 하루를 통해서 주님을 어떻게 나타냈습니까?’ 다들 이렇게 하면서 주무시죠. 그러니까 사람은 안 보이고, ‘주님, 오늘 내 하루를 주님의 마음을 어느 자리에 가든지, 어느 시간대든지 제대로 전했지?’라고 하면서 잠들을 주무시잖아요. 잠들을. 그리고 내일도 제 역할이 하나님을 증거 하고 주님을 증거 하기 때문에 내일도 주님이 살려주신다면 증거 하겠다고, 이렇게 하잖아요.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 나라의 의, 천국이 어떻다 하는 그걸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살아있거든요. 그런데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밤에 침대에 누워서, ‘오늘 저 사람이 내 욕 안 했을까? 나는 저 사람한테 저렇게 잘 해줬는데 나한테 실망을 주고 상처를 줬어. 내일 만나면 두고 보자. 따질 거야.’ 뭐 이런 것. ‘남편 비자금 어디에 숨겨놨더라. 분명히 돈 받았는데.’ ‘자식이 내 말대로 안 들어’ 전부 다 돈 생각, 돈과 자식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면은 내 자존감의 구성요소에요. 자식이 내 맘대로 안 되면 내 자존감이 확 내려가고, 돈이 이렇게 손실이 되면 내 자존감을 다시 구축하기 힘들어져요. 내 건강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이 사울이라는 등장이 얼마나 우리한테 고마운 줄 몰라요. 왜? 우리의 바닥이니까.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사울은 악신이 들렸거든요. 나중에 그 뒤에 보면 창 들고 다윗을 죽이려고 할 때에 그냥 죽인 것이 아니고 악신이 들렸다. 그러면 내린 결론은 간단하죠.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어디에 걸린 사람이다? 악신이 걸린 거예요. 미친놈이죠. 환자죠. 정신적 환자예요. 성령이 없으면 무조건 정신적 환자예요. 자기 자존감 하나 내세우면서 덜렁덜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존감 내세우면서.
다윗도 마찬가지죠. 인간은 다 타고났잖아요. 자존감. 그런데 여기에 누가 개입했습니까? 기름 받았더라도 역시 어린 다윗은 어려요. 사울하고 똑같아요. 자존감밖에 몰라요. 그래서 사울이 자꾸 자기를 공격하니까, 다윗이 도망간다는 말을 달리 이야기합시다. 다윗이 자존감을 본인이 지키기 위해서 도망간다. 같은 말이에요. 남이 중요 하냐 내가 중요하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하고 노나, 집사님은 강아지하고 논다고 하는데, 그거는 틀린 말이고, 집사님은 본인하고 놀아요.
인간은 나하고 놀아요. 인간은 하나님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내가 그리워요. 교회가도 마찬가지고. 강아지는 왜 키우느냐, 내 대용이거든요. 내 자존감 대용으로 하는 거예요. 왜 20대 남자들이 돈만 벌면 차를 바꾸려고 하는가, 20대 아니라도 60대도 차 바꾸려고, 240개월 할부로 차를 사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왜 차를 사려고 하는가, 차가 내 안에 있는 자존감을 바깥으로 끄집어낸 거예요. 이게. 일종에 여자는 강아지 남자는 차. 이게 뭐냐 하면 일종의 자기 자존감이에요. 본인의 사명은 내가 내 자존감을 지키는 것이 사명이에요.
그리고 난 뒤에 교회 온다니까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목사가 자존감을 키워주는 설교를 해야 돈 몇 푼이라도 내줘요. 돈 천원이라도 내준다고요.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와서 헌금을 하는데, 부부가 교회 왔거든요. 그 교회 예배 마치면 점심을 줘요. 헌금을 천원을 한다고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한 사람당 점심 값으로 오백 원으로 한 끼를 채우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나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하겠다는 거예요. 손해 보는 짓은. 그러면 제가 그 사람에게 묻죠. 무엇이 손해입니까? 내 자존심에 손해 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요? 내 자존감 높여주는 하나님만 나는 믿겠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하나님 믿고 지금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지옥은 부자의 자존감을 유지시켜 주는 곳이 지옥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그러니까 어떻게든 뭔가 바꿔야 돼요. 죽기 전에 뭔가 바꾸어져야 돼요.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꾸어지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돼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욥의 친구는 한 번도 인생에서 유턴한 적이 없다. 유턴. 차 없어도 아시죠? 유턴이 뭔지. 사람이 주님을 바닥에서 만나야 돼요. 바닥에서. 자기 바닥을 알아야 돼요. 자기 바닥을. 그러면 내가 자존심을 높이는 쪽으로 말고, 자존심이 망가진 그 이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야 돼요. 내 자존심이 다 망가진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져야 한다고요.
다윗도 사울하고 똑같아요. 자존감을 스스로 포기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름부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바닥 치게 만드는 과정을, 오늘 20장, 21장에서 연이어 보여주는 겁니다. 내 자존감이 바닥을 드러낼 때, 나는 내 자존감을 가질 필요도 없는 존재, 그런 존재로 만드는 거예요. 내 자존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전혀 없어요. 내가 나를 지킬 이유가 없다고요. 지키는 분이 따로 있거든요. 사명감이 있는 자를 하나님이 지키지, 자존심이 있는 나를 지키지는 않아요.
따라서 기름부음은, 성령은 나로 하여금 내 자존감을 사명감으로 바꾸어주기 위해서 나의 자존감에다 모든 할 수 있는 것을 다 오게 해서 내 자존감을 뜯어내는 작업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저 아마존 바다에 가면 무서운 육식고기가 있다는 거예요. 피라냐, 라는 게 있죠. 007영화에 나오는데, 그거는 뭐 한번 던지면 거기에 전부 다 왁~하고 달려들잖아요. 성령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 하면은 자존심이 있으면 피라냐처럼 다 뜯어먹게 해요. 다 뜯어낸다고요. 왜? 니 거 말고 내가 준 것 좀 보고 싶다는 거예요. 니 거 말고. 너에게 덕지덕지 붙은 자존감 말고. 니 추억과 기억을 통해서 갖다 붙인 자존감 말고. 내가 니한테 준 성령의 기름부음. 그거 보고 싶다는 거예요.
이 말을 알게 쉽게 하면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진흙 바닥에 떨어진 닭발. 닭발 먹다가 딴 짓해서 진흙바닥에 떨어진 거예요. 닭발은 먹고 싶고 묻은 게 많으니까 어떻게 해야 해요? 다 털어내야 하죠. 성령께서 다 털어내는 거예요. 닭발 먹고 싶다는 거예요. 닭발에 붙어있는 양념 말고. 진짜 닭발. 주께서 주신 것. 그 작업에 다윗이 기름부음에 의해서 쓰여 지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 만나면 어떤 대화를 했는가 보세요. 잠시 생각해보세요. 어떤 대화를 했는지. 니 잘났나, 내 잘났나, 이거 외에는 없죠. 우리 애들 공부 잘해. 이번에 아파트 바꿨어. 전부 사울 대 사울의 대결. 배틀. 자존감과 자존감의 만남. 이거 외에 있었습니까?
내 것이 없으면 참 좋은 게 있어요. 내 것이 없으면요, 뭐도 없다? 제가 일방적으로 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묻는 내가 잘못이죠. 내 것이 없으면 네모⯄가 없다. 가장 적당한 것은 지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지킬 것이 없으면 그 다음 차례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근심이나 염려나 두려움이 없다. 이래 되는 겁니다. 이게 어떤 상태냐 하면은 일찍 찾아온 천국이에요. 이게 일찍 찾아온 천국입니다. 내 것이 없으면 지킬 것이 없고, 지킬 것이 없으면 걱정, 염려할 게 없어요.
그러니까 근심이 된다는 자체가, 이게 오만함입니다. 왜 근심이 되느냐, 내가 나의 증인이 되려고 하니까 근심이 되는 거예요. 남에게 그럴싸하게 내세울 게 없어서 조마조마 바들바들 떨고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쓰시겠다는데, 우리는 주님 손 떼세요, 하고 내가 나를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내가 나를 쓰겠다고. 이런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하면은 바로사울의 마음입니다. 이 나라가 내 나라인데 소년 다윗이 인기가 있으니까, 저 소년 다윗을 죽여야 내 자존감이 유지가 되는 거예요. 제사를 드릴 때, 동생의 제사는 받았고 나의 제사는 안 받았다. 만약 여러분들이 형이라면 그 동생하고 친하게 지낼 마음이 들겠어요? 짱돌로 그냥 죽여 버리죠.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정리하기는 기름부음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사명감이 나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사명감과, 이걸 사울이죠. 하나님의 의해서 패배당하는 사명감. 하나님 앞에 져버리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 초반에 그런 이야기를 했죠. 우리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이유는, 하나님 저를 이겼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이기신 거예요. 하나님이 저를 무너뜨려서 하나님이 승리하신 것을 찬미합니다. 나는 남한테, 교회에서 인기 끈 거 말고, 다른 교회에서 십일조 백만 원 하는 교인이 우리 교회에 왔다고 성질부리지 마시고, 주님이 나의 고집과 나의 자존심을 꺾어버린 것을 찬미합니다. 그게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다음에 괄호(), 나에게는 뭐가 없다? 부족함이 없다.
도대체 이걸 위하여 득달같이(목적한 곳이나 수준에 도달하는)달려드는, 로마서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자, 로마서 8장을 한번 봅시다.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이런 것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거든요. 그게 진흙판에 떨어진 닭발이라 이 말이죠. 떨어질 때,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8장 마지막에, 악마라 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 질겨요. 굉장히 질긴 거예요.
이거는 어떤 환난도 주님이 주신 닭발은 안 끊어지는 거예요. 그대로 있는 거예요. 우리의 염려, 근심이, 하나님의 결과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결과물을 우리가 우리 자존감으로 흐려놓은 거예요. 방해 놓은 겁니다. 가려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감사와 고마움이 없고 그 대신 염려와 근심이, 수심이 가득한 거예요. 하루를 살면 하루치 수심이 가득, 이틀을 살면 이틀치 수심이 가득, 일주일을 살면 일주일치 수심이 가득해요. 수심이 가득하니까, 참으면서 한 달 뒤에 봅시다. 내년되면 좋은 일이 있겠지. 시공간은요, 주님이 사용하는 것이지 내가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1년 뒤고, 2년 뒤고 주님의 시간이고 공간이지, 내 시간공간은 아니거든요. 왜 내가 거기다가 끼어듭니까?
그래서 여기서 기름 부었다 해가지고, 구약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역할을 사용하실 때, 두 가지 기능이 나오죠. 하나는 뭐냐 하나님을 공격하는 기름 부은 자가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 받는 다윗 같은 기름 부음 받는 자가 있다는, 구약을 이렇게 제시하는 겁니다. 구약을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제시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했다. 이게 하나의 모델하우스거든요. 이스라엘은 모델하우스이기 때문에, 아니 모델하우스가 불이 났다고 해가지고 진짜 그 아파트 단지에 불이 난 것은 아니거든요. 그렇죠. 모델하우스는 그냥 모델일 뿐입니다. 모델.
그 모델을 통해서 이 지상에서 말하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인간들의 방향 쪽에서 알고 있는 하나님은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제가 아까 했잖아요. 다윗도 자존감이 없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작용하니까 다윗의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뀐 것뿐이지, 다윗 자기가 노력해서 사명감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20장, 21장에서 다윗은 지금 겁이 나서 도망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할 거예요. 도망치고 있다는 거예요. 도망치는 것을 훌륭하다고 할 수 없어요. 근심걱정이 늘어났어요. 사울이 따라와서 죽이려고 하니까 자기는 죽기 싫고, 다윗 본심이 아닙니까?
인간의 그 본심, 문제는 인간의 그 본심을, 자기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은 잘났던 못났던, 구원 된 사람과 안 된 사람과 둘 다 인간의 인간다움의 본심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오류가 있다는 겁니다. 오류가.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거예요. 아는 사람은 다윗 같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그걸 숨기면서 아닌 척하고 있는 인간들은 전부 다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 인류를 함축해요. 압축시킨 모델하우스가 이스라엘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기름 부음이라는 하나님의 그러한 계시를 받았건만, 역시 망할 자는 망하고 구원받을 자는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에 오는 성령은요, 그 기름 부음은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안에 이미 완성된 것이 들어가요. 우리 안에. 우리 안에 완성된 것이 들어간다고요. 완성된 것이 들어갔으니까 구닥다리는 어떻게 됩니까? 뜯겨져 나가야 되죠. 그래서 제가 주일 낮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있으면 주님은 없는 존재고, 주님이 만약에 살아있다면 나는 없는 존재다, 라는 말을 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백퍼센트 망상이고 환상이고 가짜입니다. 가짜예요. 지금 여러분이 저를 눈에 보고 있잖아요. 가짜죠. 그러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가? 초과적이죠. 보이는 가짜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것. 그것이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할 때, 성경에는 성령의 충만을 받았다고 하거든요. 돌 던지는 유대인에게 그 현장에서 스데반 집사님에게 초과적인 것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그냥 스데반 집사가 이단 소리하는 그것만 보이는 거예요. 이거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못 넘어가겠어요. 이게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우리는 이 공부 시간이 지나면 보는 것만 보고 있거든요.
사도행전 19장을 잠시 한번 보겠습니다. 15절에 보면,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라고 되어 있죠. 여기 이야기를 누가 한다고 했죠? 악귀죠. 그럼 그 현장에서는 누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악귀는 안 보이잖아요. 보이는 자가 입을 열어서, 혀를 놀려서 이야기를 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일 낮에 설교하면서, 성도는요, 광기 너머에 있는 광인들이에요. 세상은 미쳤는데, 성도는 그 미친 것을 볼 수 있는 더 미친 사람들이에요. 어차피 미친 것은 마찬가지인데, 미친 것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는 미침.
이거는 왜냐하면 세상에서 이쪽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요. 이쪽 이야기를 못 알아듣게 만들어야 돼요. 그래야 쥐나 개나 천국을 안 오게 만드는 겁니다. 복음 전파는 씨 뿌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 씨 뿌리는 것이지, 설득하고 내 사람을 만드는 것이 복음전파가 아닙니다. 참, 이거 말해도 기존교회는 사람 하나 꼬시려고, 뭐 삼성생명도 아니고. 전부 다 사람 꼬시는 거. 성과급주고. 이거밖에 없어요. 어디 보험회사 사원들이에요? 구원 되고 안 되고는 성경이 알아서 하는 겁니다. 그냥 성령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너희들은 너희 자존심 주장하지? 증거 하지? 우리는 주님 증거 한다고 하면 저쪽에서 뭐라고 하냐면, 주님이 어디에 있는데? 어디 있는데? 보여 달라고 하는 거예요.
니가 보고 있다고 하니까 니가 오류가 있는 거야. 우리는 살아서 부활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이, 주님이 보이지 않아야 설교하고 전도하고 뭐 하는 우리가 가짜인 것을, 나는 가짜고 나는 자존심밖에 챙길 게 없다는 것을 증거 할 게 아니겠습니까? 내가 가짜라는 것을. 나는 아니요. 우리 주님이라고 할 때는, 보이는 것은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은 깁니다. 진실입니다. 그게 되잖아요. 그게. 일주일동안 돈 벌다가 교회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예배드리고 하는, 그 반복적인 그 쓸데없는 짓을 하는. 또 한 3, 4년 다니면 장로 시켜준다고 해요. 돈 더 내라고. 그 놀음에, 언제까지 그 놀음에 말려들어야 돼요. 그 허접스러운 악마의 장난에.
아니, 목사치고 이단 아닌 자가 어디에 있어요? 제가 이야기합니다. 이단이기 때문에 목사 하는 거예요. 목사 안수 받을 때 진짜다 싶으면 이단들이 목사 안수 다 안 주니까. 목사가 노리는 것이 보이지 않는 주님이 아닙니다. 보이는 예배당이에요. 교회예요. 밤이 되면 네온사인이 켜있는 예배당 보고서 목사 직업을 얻는 거예요. 뭐 돈이나 될까 싶어서. 그러면 우리가 여기서 스스로 묻고 답해봅시다. 그럼 목사님 초과적인 것은 어떻게 얻을 수 있고 어떻게 느낄 수 있습니까? 모든 있음을 있는 대로 다 부정해버려요. 모든 있음을. 예배당이 있으면 예배당 부정, 헌금 했으면 나 헌금 안 했다고 부정,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있음은 내가 본다 이것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내가 보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고, 주께서 보고 계신다가 중요합니다. 주께서 보고 계시는 것은 반드시 예수님을 증거 하게 돼있어요. 예수님의 증거를 어떻게 하느냐, 무슨 과정을 통해서? 어떤 인간도 자존심이 없는 인간이 없잖아요. 자존감이 사명감으로 바뀌는 그 과정을 증거 하는 것이면 그 사람은 초과적인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참 쉽죠. 말로는. 자존감이 없는 사람이 없어요. 애초부터 자존감이 없다고 하면 안 돼요. 있어요. 그거 버리지 마세요. 이 세상에서 다 쓸데 있습니다. 자존감 세우시고, 그 자존감이 뭐로 바뀐다? 성령이 오게 되면 사명감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걸 더 쉽게 이야기하면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이 성령이 와서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온갖 것 해가지고, 유발시켜가지고 뜯겨져나가면, 나한테 이런 게 있었나? 나한테 주님이 주신 것이 있었네!
그걸 로마서 8장에서는 주님의 죽으심이 있는데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예수님의 죽으심이 이 안에 들어있을 때, 아, 나는 하나의 운반체가 되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담지자라고 해요. 담다디 담다디 그 노래 말고. 담지자. 뭔가 담아있는. 뭔가 담겨져 있는 거예요. 담겨져 있는 거. 주님이 그것을 늘 주시하고 있었어요. 밤이나 낮이나 늘 주시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예를 다시 한 번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밤 여러분들이 주무실 때에, 자존감이 있으니까, ‘오늘도 누구한테 실수한 거 없을까? 아, 내가 그런 말을 안 해야 되는데.’ 또는 ‘내가 그럴 때 더 강하게 요구를 했으면 내가 수입이 좀 더 많아질 텐데. 내가 괜히 손님 보냈네.’ 이런 식으로 하루일과를 정리할 거예요. 자존감과 관련되어 있죠.
그랬는데, 그냥 쑥 들어온 거예요. ‘그런 식으로 살아서 뭐하나?’ 이런 식으로. 그렇게 살았다 치자. 내일도 그렇게 살았다 치자. 그러면 니가 나중에 완전히 뭉개져서 요양병원에서 죽을 때, 그럼 니는 평생 뭐하고 살았느냐를 물을 때, 이것마저 소급해서 이게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 되게 하셨구나. 내 자존감이, 내 자체가 오류가 있다는 것을, 밤에 베개머리에서 다시 한 번 지적받는 거예요. 지적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내가 된 것은 인내성 있게 지켜보신 하나님 덕분이구나. 못난 것 들어서 예수님 자기 증거 하라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셨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동시에 벌써 꿈자리에 들어가죠. 잠을 자는 거죠. 어떤 사람은 내 설교 듣다가 반도 못 듣고 자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설교를 듣든 뭘 듣든 그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잠만 잘 자면 되죠.
영어로 펜스fence라고 하는데, 장벽입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을 통해서 사울과 다윗 그 사이에는, 비트윈between, 사이에, 이 경계선 사이에는 다윗도 어쩔 수 없고, 다윗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성령께서 또는 기름부음이 친히 마련하신 장벽이 있습니다. 장벽. 이 장벽은 다윗이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친구 요나단을 해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이 했는데도 소용이 없어요. 그 뒤에도 다윗이 쫓길 때 계속 이야기합니다. 저 사울 왕이여, 기름부음 받은 왕이시여,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쫓아와서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할 때에, 사울 왕이 뭐라고 합니까? 미안하다고 하잖아요.
너는 없고 내가 나쁘다고 이야기를 해봤자, 장벽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다윗의 세계에 사울이 들어올 수가 없어요. 장벽의 두께가, 장벽이 장벽답게 그걸 증거 하라고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거예요. 남편한테 아내한테 백날 설교해봐야 먹히지도 않아요. 먹히지도 않는다니까요. 주님이 쳐놓은 장벽을 누가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세치 혀로 됩니까? 안 되죠. 그러니까 설교란 뭐냐, 여러분들이 전도할 때 그냥 던지는 거예요. 그냥 외치는 거예요. 외침이에요. 외침. 그걸 세례요한은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뭐다? 니가 어떤 인간이냐고 할 때, 나는 괄호()다. 나는 소리다. 옛날에 소리사, 전파사 많이 있었어요.
나는 소리다. 나는 보이스voices다. 그냥 소리다. 소리니까 본인의 소리가 아니겠죠. 나를 마이크로 사용하신, 오실 분의 소리를 내가 대역하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역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례요한은 초라한 사람이고 죽을 때도 비참하게 죽었잖아요. 그러면 이 말은 뭡니까? 소리 자체가 비참하고 죽을 때도 처참하게 죽는다는 말은 뒤에 오실 소리를 담아준, 그 담지자, 담게 하는 그분과 자기 운명이 연속, 연결되어 있는 그분도 비참하게 사시다가 비참하게 죽죠.
자, 그렇다면 오늘 첫 번째 강의의 결론부분이 정립됐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자존감이 있죠. 자존감이 있는데, 자존감을 뭐로 바꾼다? 사명감. 그럼 사명감은 아까 이야기했죠.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사명감이죠. 자,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그럴 때 사무엘상에서는 쫓겨 다니는 다윗이라고 하지 말고, 쫓겨 다니는 하나님. 그리고 매 맞는 하나님. 친구한테 버림받는 하나님. 다 시편에 나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떡을 먹었던 친구가 나를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전부 다 버림받는, 학대받는 하나님. 무시당하는 하나님. 처참한 하나님. 망가진 하나님.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다윗도, 사울도, 사무엘도, 전부 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죠. 했잖아요. 그러니까 사울이 제사지내고 다 했잖아요. 그러나 그 하나님은 나의 자존감에 막혀있는, 나의 자존감에서 만들어낸 상상의 이미지에 불과해요. 자존감은 자존감대로 살리고, 자존감이 망가지지 않는 조건하에 믿는 하나님. 백 퍼센트입니다. 백 프로 가짜에요. 백 프로 가짜라고요. 나의 있음을 있음으로 돋보이게 하는 하나님, 백 프로 가짜입니다. 악마죠. 가짜라는 말보다 그냥 악마의 얼굴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하나님은 그게 삼위일체를 갖다 붙이든, 예수, 성령, 신학을 하던 뭐 소용이 없어요. 그냥 내 자존심을 안 건드린다면 그건 백 프로 가짜예요. 전부 다. 오늘날 한국교회 백 프로 가짜라고 보면 돼요. 전부 다 같은 말이에요. 가짜입니다. 나를 망가지게 한다고 해서 내가 거지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부자가 되든 망가지든 간에 내 자존감을,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내 자존감을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적기가 와서 폭격을 해버리시는 하나님. 그럴 때 어떻게 하느냐, 쫓겨 다니는 다윗을 보아라! 나쁜 짓 한 것이 없으면서도 얼마나 억울한가를. 이 억울함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돼요. 이 억울함과 공동체험을 해야 돼요. 이 억울함.
나쁜 짓하고 매 맞는 것은 억울하지 않죠. 그런데 상대가 오해해서 억울하게 됐을 때, 진짜 이거는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미치고 환장한다는 것은 아직도 뭐가 살아있다는 뜻이에요? 자존감이 살아있는 거예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억울한 일을 당하니까, 갑자기 미치고 환장하고 잠을 못자는 거예요. 잠을 못 이루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안에 누가 있다? 마귀가 들어있다. 나는 복음 알고 두 시간, 세 시간 강의하는데 설마 내 안에 마귀가 들어있는 줄을 몰랐던 거예요. 내 안에 나의 것은 다치지 말자고 자꾸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그 어떤 괴물이 나한테 달라붙어 있어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와서 십자가의 억울함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발각되지 않습니다. 들통 나지 않아요.
자, 사무엘상 21장 1절에, “다윗이 놉에 가서” 놉이라는 곳은 예루살렘이에요. 예루살렘 그 근처입니다. 베다니 가기 전에 놉이라는 곳에 왔는데. 그 당시에는 예루살렘이 수도가 아니니까. 그냥 한적한 곳이라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거기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이르렀다 이 말이죠. 아히멜렉이 “어? 당신이 여기에 왜 왔느냐? 당신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되잖아. 사울하고 있어야지. 왕의 측근이 여기에 오면 되나?” 이렇게 물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파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다윗이 누굴 속이느냐, 아히멜렉 제사장을 속이는 거예요. 왜 속일까요? 자존심 때문에 속이는 거예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인간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자존심이 상하니까, 멀쩡한 체하는 그런 게 먼저 등장하죠. 다윗도 자존심 주장하는 것은 똑같아요. 이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이 다윗에게 어떻게 사명감을 부여하는가 하는 거예요. 어떻게 부여하느냐 하면은, 자기는 정말 당해도 자기만 당하면 되는데, 자기 주변사람들이 당할 때, 아 그때 정말 미치는 거예요. 죽어도 내가 죽으면 되는데 아들이 내 대신 죽는다든지, 욕해도 나만 욕해만 되는데 자식을 욕했을 때는 갑자기 없던 자존감이 확 튀어나오면서 니 죽고 나 죽자 이래되죠.
우리는 자존감이 없다고, 없다고 하지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여되지 아니하면 항상 우리는 우리 성질이 불쑥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참다 참다 성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광주강의에서 그랬잖아요. 예수 믿고 천당 가려고 복음 듣고 좋은 거 다 듣지만, 철봉에 매달려서 해보지만, 결국에 힘이 빠지면 다시 지옥 가는 그 선반위로 그대로 미끄러져요. 언제든 손을 놔버려요. 내가 교회 다녀서 열심히 하고 복음 알고 하다가 그냥 나 하던 대로 할래. 결국은 지가 지쳐서 복음이고 성경이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그냥 살래. 이렇게 갈 수밖에 없는 주님의 펜스, 장벽, 성령은 그걸 넘어서서 십자가의 억울함에 순간순간 동참하게 해주시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