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민선

만신창이

아빠와 함께 2020. 9. 19. 22:40

영화를 보다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 시선이 고정된다. 상대 여자는 남자가 손을 놓으면 그냥 바닥에 널브러져 참담한 결과를 낳기 딱 좋은 포즈로 완전히 남자에게 의존적으로 춤을 춘다. 돌리면 돌리는 대로, 밀면 밀리고, 당기면 당겨지는 대로, 딱 내 스타일 아닌 춤인데 눈을 뗄 수가 없다. 탱고를 추는 여자는 남자의 손길에서 만들어지는 움직임에 사로잡혀 그 남자만 바라본다.

주님이 연출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춤에 영문도 모르고 질질 끌려갈 때 내가 나를 단속하려고 저항할수록 스텝은 계속 엉키고 자빠지며 악행자, 무능자, 소망이 끊어진 자임이 선명해진다. 주의 말씀의 손길은 벌거벗김에서 끝나지 않고 나라는 존재가 태어나면서부터 생각하는 것이 악함을 세상 모든 만물 중에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확고히 해주신다.

다 알게 하셨으면 모든 것이 간단히 풀린다. 아담에게 속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맘껏 발휘하며 탈출구 없는 갇힌 세상에서 자신의 가치를 절대 포기하지 말고, 천국 구원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그대로 지옥으로 가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고 낯선 소식이 마음속으로 침투해 오물 가라앉은 구정물을 누군가 계속 휘젓듯이 바닥없는 우물에서 무한으로 잠재된 죄를 떠오르게 해주심에 오히려 정신이 산란하고 마음이 복잡해지는 지경이 되었다면 어찌할까. 결과는 다르지 않다. 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 있어도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인간을 배제시키셨던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 된다. 관점이 바뀐 채로. 오직 기록된 대로 하시는 분의 뜻이 항상 의로우시다는 결론에 “Why”가 아니라 “Yes”로.

하늘에 계셔야 할 하나님이 이 죽음의 세계 안으로 아버지의 뜻하시는 죽음의 사명이 담긴 인자의 형상으로 오셨다. 아버지와의 창세 전 계획과 약속만을 의지해서 친히 저주의 자리로 가셔서 완성하신 하나님의 의로 가득 찬 영광스러운 공간이 인물이 되시고 유일한 심판주가 되시며 그분의 생명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교체하고 채우는 참 생명이고 새 생명이다.

예수님이 친히 만드신 옥토의 자리로 주께서 생명으로 착상해 주시기까지 이 썩은 심령이 주의 의의 거름으로 흡수되게 하시기까지 작동되는 힘은 이 세상에 모든 악한 세력의 저항을 뚫고 찾아오신 어린양의 죽으심의 힘이다. 가장 깊은 곳에 가장 은밀하고 깊은 것을 심어주시는 과정에서 내 사랑을 빼내고 주님의 사랑을 심어주시려고 어떤 처참한 대우를 받으셔야 하는지를 이미 아시고도 찾아오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 너무 가슴 벅차서 누구이신지 내가 알아볼 수만 있다면 바로 찾아가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이 소멸 되도 좋을 것만 같은데 실상은 언제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참담한 자리에서 십자가로만 만나주신다.

주께서 자리를 만드시고 심어주시는 이 모든 과정에서 내가 미리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고 그래서 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더욱 없음만 들춰지며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정당하고 의롭다고 행했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행위들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판단 기준이 바뀌어 있는 것도 내 소관이 아니다. 미리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란 변명도 아무 의미 없게 된 것은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 하나까지도 주님을 위한 것이고 주님을 위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함인지 결정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이다.

온통 말씀으로만 가득 찬 공간만 있었는데 그것을 잠시 인지할 때 그곳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다만 말씀으로 계신 한 분 안에서 주의 뜻에 따라 허락된 타이밍이 너무 현실 같은 가짜 현실에 침투해 십자가 사건을 재현시키며 인간들이 살아있다고 믿는 세계에서 복음이 아무짝에 쓸모없는 쓰레기 취급, 무시와 멸시를 받는 사건 속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 고백이 왜 거기서 나와...’ 더이상 새로움을 만들어내실 필요가 없는 더이상 성령이 오실 필요가 없는 재림 때까지 쭉.

내어 버려두시어 자기 죄로 죽게 하셔도 주는 의로우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최종의 때, 지옥형벌의 때는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든 육체에 예비 되어 있건만 왜 무너져야 하는지 왜 죽은 자인지 이유를 알게 하시는 은혜 가운데서 미리 망하고 진멸되게 해주시면서 죄가 더이상 나를 주장하지 못하는 흠 없는 죄인으로 주의 의만을 전파하는 운반체가 되게 하심을 사람은 감당하지 못한다.

십자가의 세계관이 만드는 공간은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녹아지게 해주셔서 고마움만 남는 곳이고 무지개 언약으로 보류해 주시고 허락하신 시간이 공간의 취지를 완성하시기까지 오래 참으심으로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리게 하신 은혜였음을 미리 알게 하는 말씀만 살아있고 움직이는 지점이고 그렇기에 어디에 있어도 주 안이 된다.

할례받은 마음인 십자가 자리와 내 자리가 여전히 대치하지만 나는 항상 죽음의 자리에 넘겨지고 안에서 소화되지 않은 그래서 결코 소유되지 않는 초과적인 것이 흘러나와 주님의 생명만이 표현되도록 하시는 것에 대해서 나는 막으시기에 멈추고 손 떼는 것이 내 역할이고 그래서 모든 것을 무작정 주저 없이 한다. 하늘이 불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이 육이 뜨거운 불에 녹아 없어져 가짜모형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진짜 실재인 새하늘과 새 땅만이 보이게 하실 때까지 그렇게 주의 능력만 활동하신다.

말씀을 듣고 나면 속이 잠잠한 적이 없다. 말씀을 뱉은 분에게 이야기하고 싶고 이 말씀을 들은 분들을 붙잡고 주님 죽으심에 공범임을 서로 나누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 마음인지를 배워가는데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정도로 눈치가 빠르지 않은 건지. 눈치 없다는 말을 별로 들은 적이 없는데 소위 복음이라 하는 말씀 안에 떨궈진 뒤로 눈치 없는 작태를 발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스스로 통제 안 되는 이 요란한 침묵을 어찌할 고 어찌할 고 가슴을 칠 때 손 떼! 멈춰! 밟아도 아직 꿈틀하는 거 보니 덜 밟혔네! 하시며 자근자근 밟아주시는 율법의 마사지를 어찌 반발하고 밀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이미 최종적인 것이 덮쳐 어떤 것에도 내 존재를 주장할 수 없는 더러운 실체를 알았고 그 실체를 피로 품어버린 유일한 실재자의 사랑이 전부이기에 그 사랑만 늘 그립게 된 상태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사랑이 소망이 믿음이 친히 만드신 주님의 자리를 품은 사랑하는 자들에게서 흘러나온다. 감당 안 될 무한한 것이 하찮은 육에서 쏟아져 나올 때 잃어버린 자를 다시 찾으신 주님의 기쁨으로 기뻐하고 죽은 자 안에서 주님의 심장이 뛰고 있기에 느껴지는 감격으로 감사한다. 오직 주께만.

그리고 나는 나를 몰랐으되 나를 이미 아셨던 분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방적으로 오셨고 심어주신 사랑이 내 것이 아니기에 그분을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사랑하게 하시고 몸을 통해 발산되는 증상으로 느끼게 하신다, 이제 주님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으셨다면 나라고 믿던 나를 잃어버리고 그분을 알고 싶은 마음만 가득 차는 지금 순간이 영원하기만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이근호    

닭 백숙 그릇에서 닭 국물이 진하게 배인 채, 퍼진 찹쌀 위에 고물처럼 찢어진 살점들이 하나 둘 세로로 얹힌다. 세상에서 살다가 ‘주 안’에 들어오는 자는 다 이런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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