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있음과 없음 !!
오늘은 교재 48페이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현대의 양자 물리학 이야기인데, 즉 "없는데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현대 물리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여분의 것, 즉 초과적인 것이 나온다는 말이죠. 양자 물리학은 그런 이론을 내세운다는 것이죠.
그런데 49페이지에 들어가면, 그러한 답변을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어디서 나온 발상인고 하니, 지금은 무엇이 있는데, 그 있는 것과의 반대상황, 즉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그게 없으니 없는 상태가 아니냐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은 전혀 성경적이 아니라는 말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현재 우리가 '있다' 라는 것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보통 '있다' 라는 것의 반대말을 '없다' 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요? 하지만 이 '있다' 라는 것의 반대말이 '있다' 라고, 즉 어디에 '계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현재 인간들의 '있다' 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에, 그래서 이 '있다', 즉 '있음'을 무엇으로 보면 되는고 하니, '없음'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있음', 바로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물리학에서는 '있다' 라는 것을 정당한 생각으로 여기는데, 즉 거울을 보면 자기 몸이 있고, 그러면 그 있음을 누가 뭐라고 해도 그 있음은 맞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 나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
하지만 우리가 진리를 알려고 하면, 그것은 자기 목숨을 바쳐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것이 진리인데, 그러니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불행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 목숨을 바칠 곳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이죠. 목숨을 건다는 것은, 자기 있음이 없어도 괜찮다고 여기는 것인데, 그것을 찾지 못해서 불행하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 같은 것은 없어도 괜찮아요"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진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러면 누구에게 기대를 걸게 됩니까? 있는 '나'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가족 중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을 받지 못해서, 복음을 몰라서 그렇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무엇입니까? 그런 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현재 자기 몸뚱아리가 아니라면 기대를 걸 곳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악착같이 붙들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기존 교회는 여기에 대해서,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그 몸이 귀하지요? 그러면 그 몸을 천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 지도에 없는 땅 !!
그러니 우리가 몸이 있는 이상, 기존 교회를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 것이 귀한데, 그 귀한 자기 몸을 천국에까지 보내준다고 하니, 그 교회를 떠나면 자기만 손해라는 말이죠. 그래서 교회를 결코 떠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일반종교인데, 그러면 복음은 무엇인고 하니까, 없다고 여기는 것에서 무엇이 생깁니까? 그만 '있음'이 생겨버린다는 말이죠. 구글 지도에도 전혀 나오지 않는 땅이 생긴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성령 안', 즉 '그리스도 안'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지도에 전혀 나오지 않는 땅이라는 겁니다.
그 땅은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즉 죽고 난 다음에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도 역시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이죠. 즉 "내가 여기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없어지면 보이겠지" 라고 여기는 것조차도 잘못된 있음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지도에 없는 땅이 현재 인간 세상에 같이 있다는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지도에 없는 땅이니 갈 수 없다는 말이죠. 이것은 신약이고, 구약에서는 이것을 이스라엘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래서 이스라엘 자체가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 유월절, 새로 만들어지는 이스라엘 !!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달력으로는 1월 10일인데, 나중에 15일로 바뀌는데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왜 1월이 되는고 하니, 애굽에 있을 때는 그 달이 원래 4월이었는데, 없는 나라가 새로 생기니, 시간과 공간도 이스라엘을 따라서 새롭게 시작이 되는데, 그래서 새해 첫 달이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히브리인들조차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나라라는 말이죠. 그들은 나라를 원한 것이 아니었는데, 그저 자기들 몸 하나 편하면 그만인데, 그러면 된다는 겁니다. 그 어떤 나라를 만든다고 하는 것, 그것은 그들에게서 나온 아이디어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누구의 생각입니까? 모세를 찾아와서 모든 프로젝트를 말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인데, 즉 하나님의 자기 나라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생각이지 인간들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해당이 되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경우에만 없음이 있음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나라를 만드는데 있어서, 하나님에게는 생명이 있는데, 그게 영생이라는 말이죠. 그 영생을 주고 나라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나는 너희에게 다가갈 때, 나의 목숨을 주고 다가갔다. 따라서 너희가 가지고 있는 목숨과 바꿔치기를 하지 않으면, 너희는 나의 영생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다" 라는 것인데, 그게 성경의 이야기라는 말이죠.
* 신학이란, 인간의 자기 행복추구 !!
여기 교재 49페이지에 보면, "신학에서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창조했다고 한다" 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그 의도 자체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음을 강조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 자체가 복음을 가로막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왕 지옥에 가는 것, 신학공부를 해서 지옥에 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공부한 자기 자신에게 모든 기대를 다 거는데, 자기 목숨을 거기에 둔다는 말이죠. 자기 목숨을 바꿀 생각이, 즉 목숨을 잃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신학을 가지고 자기 몸의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하나의 전문직종으로서 말이죠. 그게 신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목숨은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불행해지는데, 행복이 아니고 말이죠. 그래서 인간에게는 "목숨=짐"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목숨이 자기에게는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이 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라오너라"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포기하게 되면, 그 목숨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자기가 그동안 공들여 살아왔던 자기 한 평생이 다 들어있다는 말이죠. 9살이면, 그 9살의 한 평생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친구들과 함께 수영장에서 놀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자기 목숨이 없어지면 한꺼번에 모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죠.
* 자기의 유불리에 따라서 !!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기 전에 전체적으로 이것부터 하겠는데, 인간에게 이렇게 '나' 라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음이 되는데, 이것은 선한 것과 나쁜 것, 이게 선악체계인데, 이렇게 자꾸만 구분을 한다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합니까? 자기가 하는데, 그때의 정신상태가 무엇인고 하니,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 라는 것으로 한다는 말이죠.
자기 목숨이 더 단단하게 되는지, 아니면 위태롭게 되는지, 그것으로 결정을 한다는 겁니다. 배우자를 고르고, 친구를 선택하고, 그 모든 것이 그렇다는 말이죠. 하지만 성경은 그것이 아닌데, 자기 자리는 없어지고, 예수님이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구원인데, 하지만 아무리 자기가 훌륭한 선택을 해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지옥행이라는 말이죠. 요한복음 3장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아들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즉 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겁니다.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저주받은 인생 !!
예를 들어서, 뛰어나게 공부를 해서 사법고시 상위로 패스하고 젊은 나이에 검사가 된 뛰어난 신랑감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면, 그러면 그 가정에는 언제나 저주가 머물러있다는 말이죠. 그것은 자기가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닌데, 저주가 임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때,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게 중요한데, "나는 태어날 때부터 옳지 않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데, 그런데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옳게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려고 애를 쓴다는 말이죠. 태생이 그게 안 되는데,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이죠.
"이만하면 천국에 가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선교사를 위해서 기도도 해주고 말이죠. 그러니 자기가 보기에 꽤 괜찮은 작품으로 여겨지는데,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고, 저주를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 나는 시체야 아니야 !!
그래서 여기 교재 49페이지에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죽은 자로 봅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여기에 전혀 동의가 되지 않는데,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미 죽었는데, 그렇게 죽은 사람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말이죠.
(롬 5: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인데, 여기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즉 자기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평생을 소비한다는 말이죠. 그것을 건사하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고상한 것은 다 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한다는 것이죠.
* 나와 남을 녹여버려라 !!
어제 오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나와 남을 녹여버려야 한다" 라고 말이죠. 자기도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남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범죄한 인간에게 모든 일은 주의 일이 되는데, 그것이 바로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자기 일이 없는데, 그러니 자기를 보고 탓하거나 책망하지 말라는 겁니다. 물론 자랑질도 하면 안 되는데, 주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다는 말이죠. 태풍이 불고 계곡에 물이 넘쳐나도록, 주님이 하셨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범죄자이니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이 소식에 목숨을 걸만 하지 않습니까?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리지만, 인간이 불행한 것은, 목숨을 걸 일이 없어서 불행하다는 겁니다. 자기의 목숨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항상 노심초사인데, "혹시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닌가? 벌을 받으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매일같이 그런 식으로 한 평생을 마음을 졸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네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주님의 일이 덮친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네가 죽었잖아? 죄의 값은 사망이야" 라고 하는, 그게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우리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출생 자체가 그러한데, 즉 우리는 시체로 태어났다는 말이죠.
* 아담 계통인가? 예수님 계통인가?
목숨에는 두 가지의 질이 있는데, 그것을 "아담 계통인가? 예수님 계통인가?" 라고 나눌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 계통은 백날 태어나도 무엇을 증명합니까? 아무리 해도 죽음을 증명할 뿐이지, 결코 생명을 증명하는 노선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목사님의 설교는 매일 죽으라고 합니다" 라고 말이죠. 제가 죽으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날조하지 말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이미 죽었는데 자꾸만 살아있는 척을 하니, 자기가 자기를 조작하니, 무척 힘든 인생살이가 된다는 말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는데, 물론 인간은 아니고 영적으로 그렇다는 겁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성 !!
오늘 강의초반에 이 공식은 하나 알아놓으면 좋은데 말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성을 내가 미리 알아버리면, 그것 또한 나를 찌르는 가시처럼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일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서, 도자기를 이렇게 굽는다고 하면, 도예가가 마지막에 유약을 칠하는데, 그게 바로 통일성이라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이란 것은, 조금 알았다고 해서 통일성을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생을 결국 다 살게 되면, 도자기 전체에 유약을 발라주듯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점점 더 느껴진다는 말이죠. 그러면 자기 일은 점차 없어지고 모든 게 주님의 일이 된다는 겁니다.
조금 전에 장로님이 에이스를 드시는데 참 맛있어 보였다는 말이죠. 장로님이 몇 년째 드시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달라고 하면 안 되는데(ㅋㅋ), 그런데 그렇게 에이스를 가지고 온 것이 장로님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맛있다고 여기면, 그것이 곧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죠. 물론 나누어주어서 같이 먹으면 더 좋고 말이죠(ㅋㅋ).
도자기 전체에 유약을 바르는데, 그런데 그 도자기의 일부를 자기 것이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전체에 유약을 바르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 말이죠.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던지 간에, 그러니 우리는 옥경이인데, 아무튼 전체가 그렇게 된 것은 주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 망하는 기쁨 !!
다시 말해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 은혜를 보이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제 이스라엘을 하겠는데 말이죠. 그 이스라엘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것은 이스라엘이 망한다는 것을 미리 아는데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선지자인데, 에스겔, 이사야, 예레미야, 아모스, 호세아 등,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망하는 것에서 기뻐하라" 라는 겁니다. 즉 "내가 죽는 것에 대해서 기뻐하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사도바울의 소원도 그러했는데 말이죠.
우리가 목숨을 바치던 말던 간에, 그것과 상관없이 주님께선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가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죽었는데, 그 죽은 것을 죽은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주님이 하실 일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돈까스 가게를 차렸으면, 망한다는 것을 고대하면서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ㅋㅋ).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
아무튼 이스라엘이 정말 이스라엘이 될 때는, 그것은 이스라엘이 망하는 것에서, 즉 자기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에 대해서 기뻐해야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욥기 1장에서, 욥이 뭐라고 합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라고 한다는 겁니다.
(욥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주고 받고 하는, 그런 것에 마음을 두지 않겠습니다. 그 어떤 일이 되더라도, 그게 주님의 일이라는 것, 이것만은 결코 놓치지 않겠습니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이것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래서 마귀를 보고 뭐라고 하십니까? "봐라, 욥이 이 정도야. 내가 준 믿음이 이 정도야"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자 마귀는 여기에 지지 않으려고, "아직까지 욥 자신의 몸을 건드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서, 시비를 걸고 나온다는 것이죠.
* 자기 목숨을 버려도 괜찮은 그분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목숨을 버려도 괜찮은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인데, 그분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이 땅을 방문했다는 말이죠. 즉 역사 속에 출몰하셨다는 겁니다. 시작이 되시는 분이 중간에 오셨는데, 그러면서 끝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 중간이 오셨는데, 그래서 그것을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라고 하는데(ㅋㅋ), 인간세계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주님의 일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서 '권세' 문제가 대두된다는 말이죠.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데, 결국은 그리스도의 통일성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던 죽을 몸으로 태어났던 간에, 그것은 우리가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 죽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
이제 낮 설교시간에 "죽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 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의 역할을 하면 되는데, 괜히 의인인 체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계속해서 날조를 하라는 것이죠.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것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하기 때문에 어떻다는 겁니까? 불신자는 거울 앞에서 하는데, "내가 더 예쁘지?" 라고 말이죠. 그런데 신자의 경우에는, 같이 거울 앞에서 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거울 속에서 없는 지도가 나오는데, 쉽게 말해서 거울에서 손이 툭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 섬뜩하다는 말이죠.
* 실제로 등장한 주먹 !!
성경에 보면 실제로 그런 주먹이 등장한 일이 있었는데, 바벨론의 벨사살 왕 때,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을 썼다는 겁니다. 자기들의 마르둑 신이 여호와를 여겼다고 하면서 성전에서 기념파티를 벌리고 있는데 말이죠. 그때 왕이 얼마나 놀랐던지, 다니엘서 5장 6절에 보면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라고 한다는 겁니다.
(단 5:5) 그 때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서 왕궁 촛대 맞은편 분벽에 글자를 쓰는데 왕이 그 글자 쓰는 손가락을 본지라
(단 5:6) 이에 왕의 즐기던 빛이 변하고 그 생각이 번민하여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손가락만 나타나도 이렇게 무서운데, 그러면 진짜가 나타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왜 벌벌 떱니까? 여기는 인간들밖에 없다는 것인데, 즉 지도에 있는 세계라는 말이죠. 그러한 있음의 집합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집합의 있음의 손가락이 나타나니, 그야말로 충격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경우에는 전신을 다 드러내시는데, 초라한 모습으로 말이죠. 왜냐하면 그런 초라하고 낮은 모습이 아니면 인간들은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과 같이 섞여도 인간들이 옷을 벗기고 뺨을 때리고, 하찮게 여기고 자기들의 할 짓을 다 했다는 말이죠.
* '나'는, 망함의 대명사 !!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의 잘못은 망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조지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죠. '나' 라는 것은 망함의 대명사인데, 즉 "나는 망한 자로서, 망한 자와 결혼하고, 망한 자식을 낳았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죄를 짓고 망한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게 될 때, 그러면 하루하루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고, 기적이라는 말이죠. 사는 것이 기적인데, 그래서 홍수가 나면 잠기는 것이 억울한 게 아니고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 보면, 그 발걸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일일이 인도하신다고 한다는 말이죠.
(렘 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그러니 우리는 살아있으면서 자기가 무슨 죄를 짓게 되는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발산하면 된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배후에는 악마가 있다는 겁니다. 즉 "나는 죽지 않았다" 라는 존재증명을 악마가 부추겨서 계속해서 하게 된다는 것이죠.
* 계속해서 이스라엘 이야기를 !!
이스라엘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보면, 이것이 좀 어려운데 말이죠. 이스라엘은 분명히 없음에서 나온 나라인데, 없는 나라가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이스라엘의 구성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애굽에 살던 자들이라는 말이죠. 쉽게 그냥 애굽 사람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러니 애굽나라가 있다고 본다는 겁니다. 애굽나라가 허상이나 망상이 아니고, 실제로 있다고 주장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만들어지기 이전까지는 없는 나라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살던 기존의 히브리인들을 데리고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니까, 그러니 그들은 당연히 자기들이 살고 있던 애굽과도 같은, 그런 종류의 나라가 또 하나 여기에 이스라엘로 나타났다고 여겼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이 잘못인데, 왜냐하면 여기 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게는 율법이 있고 말씀이 있다는 말이죠. 물론 애굽에도 법이 있는데, 하지만 그 법령이라는 것은 애굽나라가 있고, 그 나라가 잘 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그것이 아니라, 말씀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있다는 것이죠.
* 할례율법 !!
여기에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율법이고, 두 번째는 백성이고, 세 번째는 땅인데, 여기서 백성과 땅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율법은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의하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기 위한 율법이라는 말이죠. 의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이 백성과 관련해서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할례율법' 이라는 겁니다.
할례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남성의 생식기에 문신을 하는 것인데, 즉 생식기에 율법을 장착시킨다는 말이죠. 이것을 무슨 의미인고 하니, 즉 "너희 구성원은 기존의 혈육적인 구성원과는 달리, 하나님의 언약, 즉 아브라함과의 약속에 의한 구성원이다" 라는 것인데, 그것을 남자의 생식기에 문신으로 새겼다는 겁니다.
* 피 남편 !!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서 애굽에 가서 이스라엘을 만들려고 할 때, 모세가 누락시킨 것이 있는데, 그때 자기 아들을 그만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는 말이죠. 할례가 없으면 나라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그 나라의 백성은 사라져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숙소에서 그만 모세를 죽여버린다는 말이죠.
그때 아내인 십보라가 이것이 율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를 챘는데, 그래서 남편을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저 남자는 나의 남편이 아니라 율법의 남편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피 남편' 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이게 선지국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ㅋㅋ).
(출 4: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출 4: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 인간의 해석은, 반드시 자기 유불리를 !!
이 피 남편은 예수님밖에 없는데, 즉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이 지상에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묘사하게 되면,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두가 애굽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게 낯설다는 겁니다. 그래서 해석이 그야말로 난감하다는 말이죠.
아까도 말했지만, 인간은 뭔가를 받아들일 때는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을 따져서 하는데, 명칭을 붙인다든지 그렇게 언어를 사용할 때도 그것을 따진다는 겁니다. 언어학이나 기호학에서 제일 난해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인데, 그래서 "비가 온다" 라는 것도, 거기에 인간의 자기 가치관을 섞어서 설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매우 어렵다는 말이죠.
여기에 이렇게 열쇠가 있는데, 이것도 그냥 "여기에 열쇠가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의 유불리를 따져서 설명을 해주어야 열쇠의 온전한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모든 것이 자기 중심인데,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이죠.
* 천국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시험이 없어요 !!
이것은 성경원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왜 성경원어를 분해하고 해석을 하는고 하니, 제 아무리 히브리어를 잘 하고 헬라어를 잘한다고 해도, 그게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사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연구하면서 붙였던 그 모든 의미들은 어떻다는 겁니까? 유대교라면 유대인들이 잘 되라고 했을 것이고, 교회의 경우에는, "교회의 하나님의 전당이다" 라고 하는, 교회의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 갈 때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시험이 없다는 것이죠(ㅋㅋ).
그러면 무엇을 하는고 하니까, 이스라엘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지금부터는 그것을 하겠는데 말이죠. 요한복음 17장 2절을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요 17: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 권세와 그 방향 !!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개인용이 아니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인데, 따라서 주님의 조치가 자기에게 좀 불리하다고 해도, 그 권세는 그 시작에 아프리카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 관할하는 가운데, 자기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신종 코로나도 마찬가지인데, 특별히 자기만 미워하고 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라는 겁니다.
북한에 요덕 수용소가 있다고 하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잡아서 가둔다고 하는데 말이죠. 그런데 억울하게 잡혀서 오는 자들도 있지 싶은데, "엄마가 믿는데 네가 안 믿을 수 있어?" 라고 해서 올 수도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 신천지와 같은 종교단체라는 말이죠. 종교단체는 교리가 있는데, 그 교리에 어긋나면 양심에 가책도 없다는 겁니다. 이단을 처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때 잡혀온 사람이 "주님,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저는 주님이 살아계셔서 반드시 승리할 줄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평소의 기도내용이 "제발 선교사가 망하게 하소서" 라고 하면 괜찮은데,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운명에 합당하게 망하게 해달라고 하는, 그러한 기도는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게 아니고 기도를 부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망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러니 구약을 모른다는 겁니다. 물론 신약도 모르지만 말이죠.
* 망해버린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권세 !!
이 땅에 작렬하는 권세가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 이미 망해버린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것이고, 그러니 하나님마저 이 땅에서 망해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니 십자가로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과 함께 망하게 되어서 영광이입니다" 라는 것인데, 즉 "아니 세상에, 이런 영광이 다 있나?" 라고 하는, 그런 뜻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권세의 방향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되는데, 이 권세의 방향은 우리로 하여금 망하게 한다는 말이죠. 물론 그냥 망하면 자살이라서 좀 곤란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망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것을 세 글자로 '좁은 길' 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이게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 아닙니까? 이것이 모 출판사 이름인데, 이렇게 간접광고를 하면 안 되는데 말이죠(ㅋㅋ).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라고 하셨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좁은 문을 통과해서 넓은 길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좁은 길이 나오는데, 거기에 주님이 계신다는 겁니다.
권세라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몸부림을 치고 금식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주님의 권세가 임하면, 우리는 자기 몸부림과 상관이 없이 영생의 길, 좁은 길, 달리 말하면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납득이 되지 않는 길, 같은 부부인데 도저히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다니는 교회는 축복이 줄줄이 달려있는데, 그런데 지묘동에 있는 우리교회는 "그게 뭐예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 대동단결(大同團結) !!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달랑 한 분이었는데, 좁아도 너무 좁다는 겁니다. 제자들도 모두 떨어져 나가고 달랑 한 분이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은 그 한 분을 대적하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사자성어가 등장하는데, 즉 '대동단결'을 한다는 겁니다. 즉 "하면 된다" 라는 식이란 것이죠.
이것은 권세가 믿어지지 않고 인간의 힘이 믿어진다는 것인데, 그래서 인간들끼리 모여서 뭔가 한번 뒤집어보자는 겁니다. 그게 정의고 옳다고 하는데, 그렇게 뒤집으면 수혜자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히 자기가 속해있는 조직체라는 말이죠. 그러니 결국 '나' 인데, 그렇게 인간의 모든 행함은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는 겁니다.
* 너희들은 짐승이야 !!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면, 인간은 자기 목숨을 바꿀만한 것을 찾지 못해서 '나' 라도 건져야 한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너무나 절망적이라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수시로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만드는데, 처음에는 천지를 만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한다고 좋아했는데, 그래도 여호수아까지는 잘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사기에 들어오면, 수시로 이방나라들이 침략을 한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와 이스라엘이 한 편이라고 감정이입을 하는데, 그래서 이스라엘도 물론 나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좀 편하게 살도록 해주시지 이렇게 괴롭히느냐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스라엘과 한 편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여기니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혔는데, 틈만 나면 이방민족을 동원해서 마구 마구 두들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를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갓난아이까지 잡아먹고 했다는 겁니다. 인간이라고 우겼던 것이 인간이 아니라,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였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발각이 되도록 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의 권세 대신에, 잘 먹고 잘 사는 주변 이방나라의 권세를 그들이 모방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방나라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들이 무엇을 모방하고 싶어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방나라에는 '왕'이 있었다는 말이죠.
그렇게 이방나라에 왕이 있으니, 이 이스라엘에서 없음에서 뭔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말이죠. 즉 없음에서 꼼지락거리면서 왕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마치 마술사가 아무 것도 없는 보자기를 가지고 손을 꼼지락거려서 비둘기를 만들어 내듯이 말이죠.
* 왕과 왕의 투쟁 !!
이방나라에 왕이 있으니 여기 이스라엘에도 왕이 생겨나는데, 그렇다면 이 왕과 왕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고 하니, 서로가 전쟁을 벌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의 왕의 권세와 이방나라 왕의 권세와의 투쟁에서, 그 차이성을 두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먼저 제가 물어보겠는데, 여러분에게 왕이 과연 계십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왕이 없는데, 왕이 있던 전제군주제에서 정치적인 변형을 이룩한 것이 민주주의라는 말이죠. 왕 때문에 살기 힘든다고 해서 시민계급부터 농노계급까지 모두 다 들고일어났는데, 그게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겁니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서 전 세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말이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에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국가들이 다 불쾌하게 여겼는데, 왜냐하면 민중들의 건방짐이 온 유럽을 모두 다 뒤엎을 것이라고 여겼다는 겁니다. 과연 그렇게 되고 말았는데 말이죠.
그러면 민중의 민주주의 세계는 무엇입니까? 왕이 있는데, 마치 왕이 없는 것처럼 사는 날조된 세계라는 겁니다. 반면에 전제군주제는 왕이 있는데, 즉 신이 왕을 주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그러니 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있던 시대인데, 그것이 우상이든 무엇이든 간에 말이죠.
물론 우상인데, 그러면 왕이 없다는 것은 무엇도 없다는 겁니까? 신도 없는데, 그러니 각자가 신이 된 시대라는 겁니다. 그것을 요구한 것이 배후에 숨어있는 악마이고, 그 악마가 왕이 된 시대, 그게 바로 민주주의 시대라는 말이죠. 그러니 악마는 계속해서 자기를 숨길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마태복음 31절에서 36절을 보겠는데, 누가 한번 읽어주세요.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5: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 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
여기 32절에 보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라고 하는데, 인자가 와서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들을 다 모은다는 말이죠. 각자의 민족마다 왕이 있던 민주주의이던 상관이 없이, 그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왕으로 생각했는데, 진짜 왕은 숨어있었다는 겁니다. 그게 아까 본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민민, 즉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였는데 말이죠.
그렇게 모든 민족을 다 주님 앞에 모으는데, 그러면 여기서 왕은 무엇인고 하니까,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왕이 끌어당기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고 하면 곤란한데, 왜냐하면 왕이 옳고 그름을 다 알아서 제대로 판단을 하신다는 말이죠.
평소에는 자기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이고, 실제로는 예수님이 옳고 그름을 구분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옳음을 인정하면 구원이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저주가 있다는 것이죠. 제가 아까 분명히 다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지요?
*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
그렇게 주님이 모든 민족을 자기 앞에 모았는데, 그러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하십니까? 알곡과 가라지,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그렇게 누가 구별을 하신다는 겁니까? 인자가 하시는데,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그렇게 해서 양은 그 오른편에 두고, 염소는 왼편에 두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는데 필요한 권세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이미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왕이 필요하십니까?" 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데, 이미 왕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싫던 말던 간에, 교회에 다니기 싫던 좋던 간에, 인자가 되신 주님으로부터 힘이 나오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끌려가고 있다는 말이죠. 매일같이 반항하고 대들지만, 질질 끌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 반항심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 인간 !!
어떤 분이 "하나님이 이렇게 코로나를 보내고 태풍을 보내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어긋난다는 말이죠. 그런 일이 일어나면 오히려 반항기가 더 사는데, 잘못했다고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부터 반항심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죠.
자식을 키워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는데,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반항을 한다는 겁니다.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심해지는데, 노인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그 반항기는 늙지도 않는다는 말이죠(ㅋㅋ). 그래서 인간은 반항하는 힘으로 산다고 할 수가 있는데, 주님의 권세에 대드는 힘으로 산다는 겁니다.
마치 사사기를 보는 것 같은데, "하나님이여, 왜 우리를 치십니까?" 라고 반항하고,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서 반항한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던 말던 간에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것이죠. 자기도 의사가 되고 싶고 판사가 되고 싶다는 겁니다.
* 인간은 라디오와 같아서 !!
이것은 이스라엘 왕의 반대편에 있는 이방나라 왕의 발언과도 똑같은데, 성령의 발언이 아니고 다른 왕의 발언이라는 말이죠. "나는 이미 저쪽 편입니다" 라는 것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은 라디오와 같은데, 그 라디오 안에는 정작 말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죠. 방송국에 있는 성우가 라디오라는 기계를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는 그런 입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왕이 이야기하는 대로 스피커를 통해서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뿐이라는 말이죠. 우리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는데, 왜냐하면 주님의 일에 반대를 하니까 죄인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전체에 발라놓은 유약을 인정하지 않는 죄, 그것 이외에 다른 죄는 없다는 말이죠. 그냥 주님에게 반항을 하고 마구 대든다는 것이죠.
* 아버지, 제 것은 없습니까?
여기 마태복음 22장 34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라고 하는데, 여기서 상속이란 기업이라는 뜻인데, 같은 가족이기 때문에 유산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아버지가 유산을 이야기하는데, "첫째 근섭이는 집을 가지고, 셋째 근수는 저기 논을 가져라"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둘째가 당연히 "아버지, 제 것은 없습니까?"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지금 녹음까지 하고 있는데, 그런데 아버지가 그만 치매가 조금 있어서, "둘째도 근호도 있었나?" 라고 한다는 겁니다. 큰아들을 기억하고 막내도 기억하는데, 그만 둘째는 빼먹고 말았다는 것이죠. 그러면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는 기가 찬다는 겁니다. 하지만 자기 일은 없고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등의 기가 찰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이것을 주님의 유언이라고 보고, 히브리서에서는 유언을 언약이라고 하는데 말이죠. 유산이라는 것은 "네 것이 아니고 내 것이지만 너에게 주겠다" 라는 것인데, 즉 "내가 집을 주고 땅을 주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야. 그러니 당연한 것처럼 달라고 하면 안 돼" 라는 것인데, 하지만 주님께서 "내가 주겠다" 라고 하시는데, 이게 상속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바로 상속인데, 그러니 이것은 주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달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죠.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대로 그냥 받을 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곧 상이라고 했는데, 또 다른 사람은 농사를 짓은 것이 상이 되고 말이죠. 성도의 경우에, 자기 노동이 아니라 주님의 노동이 들어오면, 그러면 이유도 없이 자기 상이 아니라 주님의 상이 된다는 겁니다.
* 우리의 인생 자체가 주님의 일 !!
그래서 그 뒤의 35절에 보면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라고 하는데, 그 자체가 상이 된다는 말이죠. 즉 우리의 인생 자체가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 되고, 또 동시에 주님의 권세로 나타나게 하신 주님의 기계, 즉 주님의 스피커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이익만 생각했는데, 그런데 도중에 주님이 십자가로 개입하셨기에,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십니까? 우리의 죄를 주님의 속죄기능으로, 그래서 그것을 다 주님의 의가 되게 바꾸신다는 말이죠. 이것은 선악체계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데, 선악체계는 자기의 지은 죄와 벌이 비례가 되는데, 그래서 큰 죄를 지었으면 큰 벌을 받고, 작은 죄를 지었으면 작은 벌을 받는다는 겁니다.
* 영화 '신과 함께' !!
'신과 함께' 라는 영화를 보면, 그게 바로 대동단결에서 나오는, 즉 넓은 길로 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식이라는 말이죠. 죄가 작으면 벌도 작고, 죄가 크면 벌도 크다는 것인데, 그래서 죽어서 좋은 곳에 가려고 하면 이 세상에 살 때 죄를 적게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빠트리고 있다는 말이죠.
주님의 십자가라는 것은, "너희는 태어날 때부터 아담의 계통이었다" 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즉 아담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모두 다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즉 "지금 너희가 지닌 몸은 그런 몸이야. 심지어 내가 육신을 지녔다는 이유로 나도 하나님에게 이런 버림을 받았어" 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는 말이죠.
이게 바로 복음서에 나오는 복음의 내용인데, 그게 기쁜 소식이라는 겁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야기로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이 십자가 외에 달린 전할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는 겁니다.
* 다시 복습을 !!
아까 이스라엘 이야기를 했는데, 다시 복습을 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기쁨은 망하는 것에 있다고 했는데, 그러면 교회는 어떠해야 합니까? 이게 공식인데 말이죠. 그러니 교회의 기쁨도 역시 망하는 것에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곧 천국이라는 말이죠.
인간은 평생을 자기 일에 치여서 살아가는데, 자식도 키워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모든 것이 자기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라는 겁니까? 주님의 일인데,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주님의 일이 되는 기계가 되도록, 그렇게 주님께서 조치를 취해주신다는 겁니다. 천국에 가는 길로 말이죠.
그런데 마태복음 25장 41절 이하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똑같은 일을 하는데, 즉 자기도 아이를 키우는데, 그것이 지옥에 가는 일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당연히 여기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데, "제가 언제 지옥에 가는 일을 했습니까?" 라고 말이죠.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지옥에 가도록 조치를 했다. 왜? 무슨 할 말이 더 있어? 나는 왕이야. 내가 왕이기에 그렇게 했어" 라고 나오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왕이 가지고 있는 권세인데, 왕은 백성들과 의논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게 왕이고, 왕이 가진 권세라는 말이죠.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여기서 교재 49페이지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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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물리학에서는 무엇이 움직였다는 것을 말할 수는 있는데, 누가 너를 움직였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 만약에 내가 이 종이를 들고 있을 때, 네 말고 누가 종이를 들게 했느냐고 할 때는 답변이 없습니다.
"종이 내가 들었습니다."
"누가 너더러 종이 들라고 했어?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내가 들고 싶어서 들었는데요."
"너에게 종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누가 들게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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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자 !!
여기에 대해서 과학이 답변을 할 수 있습니까? 전혀 답변을 할 수 없는데,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어떤 행동을 할 때,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것을 따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유리하면 옳고, 불리하게 되면 그르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한 사고방식을 자기 배후에 있는 어떤 왕이 있어서, 즉 악마가 우리 인간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다루고 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우리 인간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진다" 라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즉 "네 목숨은 귀해" 라고, 그런 생각만 하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네 목숨과 내 목숨을 바꾸자" 라고 하시는데, 즉 "내가 먼저 목숨을 내놓을게. 너도 목숨을 내놓아라. 같이 섞어버리자. 죄가 의가 되게 바꾸자는 말이야"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렇게 바꾸는 것을 '트랜스' 라고 하는데, 그런 바꾸는 기계, 즉 예수님은 중보자로 오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늘나라에서 살면 되는데, 일부러 이 땅에 온 이유가 다 있다. 내 권세의 효과를 이 땅에서 기어이 다 찾아내겠다. 모든 민족을 다 불러서, 양은 양대로 염소는 염소대로 분류하겠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언약으로 약속한 왕, 그 왕으로 오셨다는 겁니다.
* 제발 우리 교회를 지켜주세요 !!
그러면 불신자는 그 왕을 모르고 있고, 성령을 받은 신자는 알고 있다는 말이죠. 물론 성령을 받지 않아도 교회에서 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왕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 왕은 이방나라의 왕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즉 "제발 우리 교회를 지켜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 왕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하지만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 세상 국가로부터 교회를 지켜달라고 하는 기도가 간절해 보일 수도 있는데, 그러면 주님은 "왜 그렇게 해주어야 하는데?" 라고 묻는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그렇게 지켜달라고 하는 교회 속에는 자기도 반드시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 교회를 지켜주세요" 라고 할 때는, 그게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인 주제에 감히 천국을 넘봐? 가만히 보니 네가 왕이네. 네 속에 다른 왕이 들어있구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기도할 때는 반드시 '주의 이름'으로 해야하는데, 그것은 기도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라는 것을 붙이라는 말이 아니고, 기도조차도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하게 하셔서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렇게 종이를 한 장 들어도, "이것은 주님이 들게 하셨다" 라고 나와야 하는데, 그래야 왕이 왕답다는 말이죠. 아이에게 공부를 하라고 한 대 쥐어박으면, 아이는 "아니, 왜 때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이 때리게 하셨다. 왜?" 라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무튼 권세는 이렇게 작동하는데, 그 권세에는 중심이 있다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런 권세가 실제적인지, 아니면 작가가 지어낸 소설에 불과한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여기 교재 50페이지에 보면, 여기에 "죽음도 모르면서 죽어서 부활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내용이 없는 문자로만 보여진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 첫째 부활 !!
우리의 왕이 이 땅에 오셔서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몸으로 보여주셨다는 말이죠. 이것을 두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첫째 부활' 이라고 했는데, 부활은 부활인데 첫째 부활이란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죽으라는 이야기인데, 왜냐하면 첫째 부활이 있으면 그 다음 부활이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군대에서 유격훈련을 하는데, 앞에 사람이 제일 먼저 뛰어내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사람이 뛰어내리고 하니 너무 겁이 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멈칫멈칫하고 있는데, 조교는 자꾸만 뛰어내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이 줄을 서서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그야말로 환장을 한다는 겁니다.
*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고 하니,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뛰어내리셨는데, 즉 육신으로 인하여 죽으셨다는 말이죠. 죄가 없는 분이지만,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것이 로마서 8장 3절에 나오는데 말이죠.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러니 우리도 이 육신, 이 껍데기 때문에 죽는다는 말이죠. 이제 눈이 좀 열리지 싶은데, 아닌가요?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이 껍데기 때문에 죽는다는 겁니다. 다들 이 껍데기 때문에 고생이 많은데, 이빨 껍데기도 치과에 가서 고쳐야하고 말이죠.
* 야, 어서 뛰어내려 !!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껍데기 때문에 뛰어내리셔서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우리를 보고 뛰어내리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우리는 그냥 서서 구경만 하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딜 가지? 구경만 하지말고, 어서 이리와"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의 권세는 우리를 망하게 하고 죽이는 권세인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악령이 더 이상 너희를 장악하지 못하고, 부활의 영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좀 보여주어라"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망해도 기쁜 것이 아니라, 망하는 모습 자체가 기쁘다는 것인데, 주님은 그것을 보여주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초조해서 철야기도를 해도 마음이 답답한데, 그런데 전혀 초조한 것도 없고 밤이 되면 잠만 쿨쿨 잘 자는데, 그리고 얼굴도 훤하게 좋다는 말이죠. 우리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데,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기계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왕인데, 그 왕의 그 백성이라는 말이죠.
* 우리도 그들처럼 살게 해주세요 !!
우리가 어디서 실패를 하는고 하니, 그게 바로 구약성경인데, 이스라엘의 실패가 오늘날 우리의 실패라는 겁니다. 매일같이 벌벌 떠는데, 그러면서 "하나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살려주면, "우리도 그들처럼 살게 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즉 이방나라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없는데, 그런 능력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능력도 없는 세계를 왜 그렇게 부러워하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 목사님, 제발 모이지 마세요 !!
제가 목사인줄 어떻게 알았는지 몰라도 동대구 구청에서 문자가 날아오는데, "제발 모이지 말고, 비대면 예배를 드려주세요" 라고 말이죠. 그러면 그 메시지가 천국에 가는 사람이 보낸 겁니까? 지옥에 가는 사람이 보낸 겁니까? 백이면 백이 다 지옥에 갈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는 공무원이라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 위가 어디입니까? 보이는 왕입니까? 보이지 않는 왕입니까? 그것은 바로 지옥에 가는 자들이 대동단결을 해서, 모이지 말라고 메시지를 보낸다는 말이죠.
* 왕중왕(王中王) !!
부활의 영이 있는 자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망했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고 그 망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동안 악마가 육신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왕의 왕인데, 그러니 주님의 허락 하에서 악마가 우리에게 흔들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그 폼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번 잡아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십자가마을 사이트에 '신종 코로나 사태를 맞이해서' 라는 글을 올렸는데, 즉 "우리는 시체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주님이 매일같이 살려주셔서 삽니다"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다시 말해서, "나는 어제 죽어도 당연한데,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살아있는지? 아하, 주님이 말씀을 들으라고 살려주셨구나" 라고 해서,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자들이 바로 교회라는 겁니다. 어제 태풍에 쓸려서 죽더라도,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말이죠.
그런데 악마가 뭐라고 합니까? "모이면 죽습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게 우리에게는 어떻게 들립니까? 서로 가는 길이 다는데, 다른 기차를 탔는데, 그들의 기차는 지옥행이란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도 같은 줄 알고, "모이면 죽습니다" 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지옥에 가는 자들과 같이 섞여서 살아간다는 것이 고맙다는 겁니다.
* 김유정 역 !!
저기 춘천에 가면 '김유정 역'이 있는데,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 그곳 출신이라서 역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하는데 말이죠. 경춘선이 사라지는 바람에 더 이상 열차가 다니지 않아서 관광지가 되었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레일 바이크와 같은 것을 타고 놀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역에 기차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있다고 보자는 말이죠. 어떤 사람은 태극기를 흔들고 있고, 또 경찰이 막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같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도착지점이 있다는 말이죠. 성령을 주셨으면, 그 성령이 끌고서 도착하도록 하는 지점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라지는 안개니까 말이죠.
그런데 저쪽에서 "빨리 와라. 우리와 합세해" 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그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는 겁니다. "아하, 사도바울이 느낀 것이 바로 이런 재미구나" 라고 하게 된다는 말이죠. 교회에서 나간다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나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보내셨다는 겁니다.
* 나는 왜 남아있지?
이것은 어떤 특정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듣기 싫어서 나간다는 것은, 그것은 주님이 다른 기차로 옮겨 타게 하셨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말이죠. 그래서 나가지 않는 사람은, "나는 왜 나가지 않지? 도대체 여기에 무엇이 있다고 남아있지?" 라고 해야하는데, 그렇게 남아있다는 것이 정말로 희한안 일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선교인데,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만 기계이고,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시는데, 악마까지 보태서 사태를 그렇게 만드신다는 것이죠.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에게는 그만한 권세가 있는데, 그 권세를 통해서 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그게 도자기에 유약을 바르듯이 다 통일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데 빈틈이 없고, 천국에 갈 사람도 빈틈이 없이 다 보낸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 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벌벌 떨면서 !!
그런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불안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구원이 자기 문제로 돌아가 버리면, 즉 주의 일이 아니라 자기 일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완벽하게 악마의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벌벌 떨고 있다는 말이죠.
"끼고 있던 마스크 때문에 찬송을 제대로 부리지 못했는데,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하고, 혹은 "인터넷으로 비대면 예배를 드리려고 하다가, 그만 예배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말았는데, 그러면 지옥에 갑니까?" 라고 하면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네가 다니는 교회는 무슨 교회고?" 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제가 돈을 바친 교회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은 "그러면 결국 네가 바친 돈이 아깝고, 네가 바친 봉사가 아까워서 그렇게 하는구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 망하자 !!
그러니 교회가 아닌데, 왜냐하면 오히려 자기가 다닌 교회가 망할 때 비로소 천국이 보인다는 겁니다. 자기가 망하니, 자기가 다닌 교회도 같이 망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게 진실이라는 말이죠. 오늘 강의제목은 '망하자' 라는 것으로 하겠는데, 그것도 기쁘게 망하자는 겁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것이죠.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주님께서 육신을 입었다는 것은, "내가 대표해서 너희들의 정체를, 너희들이 미처 모르는 그 실체를 내가 보여줄게. 바로 이것이다" 라는 의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마 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신학은 허망해 !!
그러니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버림을 받았는데,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죠. 구원받을 가능성, 그런 것은 모두 다 신학에 불과한데,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모두 허망하다는 말이죠. 신학은 결코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죠.
여기 교재 50페이지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데, 즉 "신학이란 문자의 나열인데, 그것은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자들입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게 헬라어이든 히브리어이든 간에, 그것을 해석하는 해석자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그런 신학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다" 라고 하는데, 이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말이죠. 주님이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교재에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은 주님의 창조취지가 아닙니다" 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무엇이 창조취지입니까?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곧 창조의 취지라는 말이죠. 그러니 '창조과학회'와 같은 것도 잘못이라는 겁니다.
* 망하면서 감사를 !!
이제 끝으로 이것만하고 마치겠는데, 이방 나라의 왕과 이스라엘 나라의 왕이 있는데,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이 왕을 구해서 얻었을 때부터 이스라엘은 이미 망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진노함으로 너희에게 왕을 주었다" 라고 하시는데, 그러니 이미 망했다는 말이죠.
물론 이방나라도 망하고 모두 망하는데, 이스라엘은 망하면서 남은 자가 생기고, 그 남은 자가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도 망하고 아무튼 망하는데, 그렇게 망하면서 그 이유를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죠. 망하지 않았으면 몰랐던 그 진리, 그래서 다시 한번 "아하, 주님도 망했구나. 주님도 같이 침몰했구나" 라고 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비록 하나님이시지만, 그 모든 영광을 다 포기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이죠. 바로 그 십자가의 유약, 그 통일성, 그 최종점이 보이도록 하면서 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최고로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겁니다. 그러니 자기 일은 없고, 모든 것이 통일성이 있게 주의 일이 된다는 말이죠.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일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일인 것을 알게 해주니 감사를 드립니다. 다만 저희들은 그 일에 기계로서, 예수님을 왕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통일성 있게 다루어주시는 줄 압니다. 다만 내일이 있고 또한 모레가 있다고 하면, 또한 감사하게 하시고, 그게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까지 이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20,09,14 오후 4시에 마침.
주님의 망함에 동참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