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속의 무한성
2020년 9월 6 일 본문 말씀: 욥기 13:20-28
(13:20)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13:21)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시오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마실 것이니이다
(13:22)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13:23)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시고 나를 주의 원수로 여기시나이까
(13:25)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라게 하시며 마른 검불을 뒤쫓으시나이까
(13:26)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
(13:27) 내 발을 차꼬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
(13:28) 나는 썩은 물건의 낡아짐 같으며 좀 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따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결코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악마가 아무리 욥을 흔들어대어도 욥의 소망은 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그런 사이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욥이 전에서부터 시들시들 않는 지병이 없음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욥에게 갑자기 심한 병에 결렸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은 욥은 하나님의 의도적인 조치임을 인정합니다. 받아들입니다. 문제는 욥의 수준에서 이점을 해명하고 설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설명이 되려면 욥, 본인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하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에게 고통을 주셨습니까?”에 대해서 욥은 나름대로 설명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시도하는 전제가 신약성도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여전히 선악체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즉 벌이라는 것은 죄를 지은 양과 비례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죄를 지은 자는 작은 벌을, 큰 죄를 지은 자는 큰 벌을 받아야 합리적이고 정당하다는 겁니다. 작은 죄를 지었는데 결코 큰 벌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생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문제는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인간들이 자체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고생을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는다는 점입니다.
즉 죄를 짓지 않았다고 자부한다면 미리 마음이 편해집니다. 왜냐하면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없는 자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짐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이 모두 각자 자기 생각에 몰두하다보니 생긴 현상입니다. 욥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표준이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난데없이 고통당한 자는 그 당시에 자기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찾아든 고통이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징후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자기에게 그다지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여지간히 살만하면 자기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자부합니다. 이는 세상 전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느냐에 대해서 본인들이 몰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니 답답한 쪽은 욥의 친구가 아니라 욥 본인뿐입니다. 이것은 신약에 들어와서,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예수님만 하나님 아버지와 연락을 취하는 상황과 같습니다. 욥은 끊임없이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시도합니다. 이 와중에서 욥은 다음과 같은 본심을 드러냅니다. “하나님, 성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책임질 때 저질은 죄만 죄라고 규정해주세요”라고 말입니다.
욥이 생각하기에 본인이 스스로 행위에 책임질 시기로 넘어오면서 본인이 의도적으로 죄지은 것은 도통 생각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단 하나, 즉 자신이 성인이 되기 전에 지었던 어릴 때의 죄를 지금 자신에게 책임을 물으신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싶은 겁니다. 철없던 시절의 죄까지 주님께서 욥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과연 진짜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겠습니까?
신약의 입장에서 볼 때, 욥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알지 못합니다. 창세기 8:21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새삼스럽게 성인이 되어 자기 인생을 본인이 책임지고 싶어도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인간들이 태어났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심판받은 인간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꼴보기 싫다는 겁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물청소하듯이 세상을 청소했지만 계속해서 태어나는 인간들은 여전히 태어나면서 하나님께서 역겨워하는 본성을 멈추지 않고 연속적으로 튀어나온다는 겁니다. 이 수치스러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통해서 가려버립니다. 덮어주시는 겁니다. 추한 것에 대해 아름다움으로 감싸주시는 겁니다.
에스겔 1:28에 보면,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전 자체 안에 죄사함에 대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욥은, 인간의 근원적인 죄에 대해서 여전히 미흡한 안목을 갖고 있지만 욥 자체가 계시의 완성을 위한 준비절차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약의 십자가 완성을 ‘되찾은 시간’이라면 구약의 욥은 ‘되찾는 시간’, 혹은 ‘되찾아가는 시간’입니다. 욥의 항변 속에서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초월과 영적인 것은 무한 다음의 무한으로 넘겨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찾는다는 겁니다. 수학과 과학에서는 자꾸만 시간을 연장하는 것으로 해결보려고 합니다.
자본 경제체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용의 근거를 그 다음 신용거래에다 두면서 자본 유통의 근거로 삼고자 합니다. 언젠가는 인간은 늘 찾아오는 위기를 이길 묘책을 갖게 마련이ekl는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겁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되찾은 인물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네 인생이란 그냥 한낱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일종의 방향을 바꾸는 터미널 같은 겁니다. 이 터미널은 쭉치고 계속 살 생활공간이 아닙니다. 터미널 우리 모습을 잠시 드러내더라도 조금 있으면 그 현장에 없습니다.
신약의 우리 성도 속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현장부재증명’을 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즉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주님만 계시니 우리는 나와 너에 대해서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주시하지 말자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사람의 모든 불행은 자신을 주시하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주시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타인이 의식됩니다. 이제는 이 ‘나’와 ‘너’가 그리스도 고통 앞에서 할 말을 잃고 녹아 내리게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대상이 더 이상 ‘나’나 ‘타인’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7강-욥기 13장 20~28절(몸속의 무한성)2020090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3장 20~28절입니다. 구약성경 773페이지입니다.
“오직 내게 이 두 가지 일을 행하지 마옵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나는 썩은 물건의 후패함 같으며 좀먹은 의복 같으니이다”
욥이 평소에 자기 지병이 있어서 아프다가 심하게 아플 것 같으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욥은 대단히 건강했던 사람입니다. 건강했던 사람이 갑자기 아팠어요. 자기가 예상도 못 한 상태에서 아픈데 그냥 아플 것 같으면 치료받으면 되는데 이건 가망성이 없을 정도로 아파도 너무 아파요. 자기는 분명히 단정했습니다. ‘내가 지금 아픈 것은 하나님께서 손으로 나를 죽이려고 하시는구나’라고 단정했습니다.
그런데 죽이는데 아프게 죽이고 고통하게 하시면서 죽였다. 그리고 이렇게 하게 함으로써 욥은 자기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무엇이 괴로운가 하면 평소에 자신이 죄짓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았다는 모든 체계가 다 무너진다는 거. 그 체계 무너진다는 그것이 너무 아픈 거예요. 내가 내 나름대로 바르게 살았다는데 이 바르게 살았다는 것이 지금 주어진 자기 현실을 설명할 수 없고 해석해 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이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 가지고 지금 현실을 어떻게 설명을 하고 싶어도 해내지를 못할 때 내가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동안 내가 하나님으로 여겼던 그 하나님의 구상된 하나님 생각에 하나님 아닌 분이 아닌가, 하나님도 아닌데 내가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구상하고 형성시킨 그것이 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이미지화시키고 형성하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그러면 바른 하나님의 상은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난감해하는 거예요. 자기가 아프고 죽는 것도 힘들지만 자기가 정말로 사랑하는 하나님이 내가 알고 지내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이 더욱더 절망적인 겁니다. 이렇게 절망적일 때 그야말로 욥은 신자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욥은 신앙인입니다. 마귀가 뭐라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욥은 신앙인인 이유가 하나님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에요. 자기 자신으로 고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고민하고 있고 아픈 가운데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시도하는 내용이 쭉 나옵니다.
나오면서 여기 20절에 보면 자기 소원을 이야기하는데 “주여 내가 주의 얼굴을 피하여 숨지 아니하오리니” 그러니까 욥은 자기 소원이 뭐냐 하면 주의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거, 그것이 바로 욥의 소망이고 소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마귀가 흔들어 대도 오직 자기 모든 목적을 주님에게 두는 한, 마귀가 욥을 힐난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면 욥이 문제없다는 말이고 욥의 신앙이 그것으로 완결적인가라고 할 때 그렇지 않습니다. 24절에 보니까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라고 나오고 25절에 보면 “주께서 어찌하여 날리는 낙엽을 놀래시며 마른 검불을 따르시나이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여 저라는 것은 주님 앞에서 바짝 마른 날리는 낙엽이고 쓰레기 같은 낙엽에 불과하고 마른 검불 같은데 어떻게 이런 나를 갈구십니까. 갈구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점에 있어서 24~25절에 있어서 아직도 욥은 신약 성도들이 알고 있는 그런 하나님에 대해서 여전히 모르고 있다고 되는 겁니다. 23절에 보면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라는 말은 하나님이 알고 있는 것을 나도 같이 알고 싶다고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여기 본문을 통해서 해결해야 할 점은 뭐냐 하면 욥이 여전히 신앙인이라는 그 점과 그러면서도 신약 성도들이 알고 있는 알고 있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그 점이거든요. 그 점을 둘 다 채워 나가야 합니다. 둘 다 해결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여기서 욥의 단점이라 할까요, 23절에 보면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라고 되어 있는데 욥은 뭣이 잘못되어 있느냐 하면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을 통해서 자기에게 내가 모르는 어떤 죄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죄가 작으면 고통은 작고 죄가 많으면 벌도 더 커진다는 그러한 생각을 욥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받은 고통은 그 사람이 지은 죄에 비례한다고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이게 바로 선악 체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을 욥을 통해서 이야기함으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우리의 마음 바닥에 여전히 욥과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같이 동감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이것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느냐 하면 창세기 9장에 보게 되면 12~13절에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라는 말씀에서 무지개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그다음에 하나님과 이 세상, 심판받은 세상 가운데 무엇을 하나님께서 제시했느냐 하면 무지개, 일곱 빛깔 무지개를 등장시킨 겁니다. 무지개는 굉장히 아름다워요. 호화찬란하고. 이 무지개가 뜻하는 것이 뭐냐 하면 심판받아야 할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추접하고 꼴보기 싫다는 거예요. 꼴보기 싫다는 것은 창세기 8장에 보면 나옵니다. “내가 너희들 날 때부터 꼴보기 싫은 짓거리만 한다. 출생 자체가 너희들이 계획하는 바가 태어날 때부터 계획하는 바가 악함이라”라는 겁니다.
사람이 등장하면 등장할수록, 이미 노아 홍수로 인하여 세상은 깨끗하게 청소, 물청소 되었지만, 사람은 계속 태어나잖아요. 태어나는 사람마다 악을 품고 계속 태어나니까 자연을 조진다고 될 것이 아니고 인간을 조져야 할 문제거든요. 그래서 창세기 9장에 보면 사람에게 피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고, 피에서 찾을 거라고 했는데, 피라는 것은 “네가 날 때부터 추하고 더럽다는 것을 내가 문제 삼을 거다”라고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내가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애를 썼는데 죄를 안 짓기 위해서 애를 썼기 때문에, 그렇게 조심조심했는데 그래도 내가 이 정도 고통받을 정도로 죄가 많습니까?’라고 출발점을 자기가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노아 홍수 같은 건 모르고.
그리고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나로 나의 어렸을 때에 지은 죄를 받게 하시오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한 거예요. 내가 커서 소위 식견이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죄가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죄 있다고 이렇게 고통 주는 거 보니까 내가 아주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를 때 ‘예배시간에 뒤돌아보기’ 같은 이런 거 있잖아요.
아무것도 모를 때 철없이 굴 때 그때 지은 죄를 이제 와서 다 커서 나에게 묻는구나. 참 하나님 지독하다 지독해. 몰랐을 때 내가 무슨 짓거리도 할 수 있는 거지. 어린애잖아요. 애 아닙니까. 애. 애가 한 짓을 그걸 갈구십니까. 인간은 어릴 때 하는 짓은 봐주는 게 옳다는 거예요. 날 때부터 더럽게 태어났다는 생각을 욥은 못 하는 거예요.
에스겔 1장 28절에 보면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부수고 새성전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가 원형으로 견본으로 들어가요. 그 견본으로 투입되는 그 무지개 안에는 성전 자체가 죄 사함의 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에 노아 홍수 끝나고 “너희들이 어릴 때부터 악하고 죄짓기 때문에 내가 물로써는 홍수로 벌 안 줄게”라고 봐주는 원리원칙이 그 증거가 무지개란 말이죠.
그 무지개 요소가 새로운 성전 안에 이게 장착이 됩니다. 내가 네가 지은 행동 보고 지금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출생 자체가 더럽게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을 내가 근원부터 물을 거야. 그래서 근원부터 물어서 네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어. 너는 지옥 가야 해. 그 사실을 분명히 할 거야. 내가 굳힐 거야.
“주님이여, 뭘 근거로 합니까?” 주 예수그리스도를 보냄으로써, 예수님이 성전이거든요, 주님이 새성전 보냄으로써 새성전 되는 예수님과 날 때부터 죄 된 인간들의 그 차이성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분명히 확정 짓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게 비밀이에요. 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훌륭하고 확실해도 네가 십자가 앞에서 그런 소리 할거냐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사도바울은 “나는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했어요. 어릴 때부터 까부니까 십자가 필요한 거예요. 안 까불면 십자가 필요 없죠.
욥의 문제점은 어린애 같아요. 자기 자신밖에 몰라요. 그런데 이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는 말은 욥은 우리 보기에 장점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에게 오는 고통을 자기에게 문제 있다고 계속해서 자기 쪽으로 돌려세우는 것이 대단히 신약 입장에서 보면 이게 장점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무한에 있어서 수학에서 무한이 나오거든요. 과학 자체가 무한 뒤에는 무한이 있다는 그 공식에서부터 시작되는데요. 이 세상 역사는 갈 때까지 가보자는 겁니다. 이 세상 모든 과학이. ‘백신 만들어서 또 견디면 되고 버티면 되고 인간의 지혜는 극복할 힘이 있다. 단결하면 된다’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무한에서 무한으로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식인데 욥의 장점은 무한은 무한 뒤에 무한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한은 안으로 접힌다는 겁니다.
무한은 바로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무한의 요소가 들어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영적 존재지요. 무한적인 요소가 인간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신약에 와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둘로 나눠요. 되찾는 시간과 되찾은 시간으로 나누는 거예요.
시간을 되찾는다는 말은 시간에는 원형의 시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원래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것은 시간부터 공간부터 모든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거예요. 시간이 진공청소기처럼 어디로 빨려 들어가는 겁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을 향하여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되찾은 시간이 되고 예수님께 빨려가는 과정은 되찾아가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욥은 구약이기 때문에 신약에 오실 주님에게 가는 되찾아가는 시간인 거예요.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되찾은 시간, 안식의 때, 안식일의 완성, 이렇게 되는 거예요. 1,2,3,4,5,6,7의 반복이 아니라 안식일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구닥다리 같은 옛날 되찾는 시간에다가 되찾은 시간이 뜯겨서 신약성경에는 새로움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이걸 쉽게 하면 모든 것이 나에게로 온다고 욥은 생각했는데 욥은 한계고요. 이제는 말을 바꿔야 해요. 이제는 나에게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니고 보이기는 ‘나’이지만 내 안에 그리스도에게로 모든 것이 집합하는 장소로서 우리를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 16절에 그리스도와 합한 자는 한 영이라고 했거든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최종점이 되는 이 영광을 우리가 누립니다. 아주 짜릿하지요. 십자가를 믿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가 꽂혀버리면 나 자신이 내가 도달해야 할 최종점이 나인데 사실 나는 죽어야 하고요 낙엽처럼 없어야 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종결되어야 해요. 모든 것이 모여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욥 같은 경우에 되찾아가는 시간의 입장에서는 욥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자꾸 나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너라고 생각하고 저를 왜 이렇게 괴롭히십니까. 하나님 당신을 만나고 싶은데 왜 그런 소원을 안 들어주십니까. 너, 나, 너, 나를 계속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나 되찾은 시간에 있어서 너, 나가 주님 앞에 녹아져버립니다. 나도 필요 없고 너도 필요 없는 더이상 나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하는 거. 나를 신경 안 쓰면 너를 신경 쓰지도 않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현장 부재라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게 십자가예요. 알리바이. ‘나는 그 현장에 내가 없었습니다. 나는 죽어 없습니다’
그 반대되는 현상이 뭐냐 하면 ‘논공 비슬산 한식부페에 참석한 사람은 가까운 관할 보건소에 신고하세요’라는 거죠. 대구사람들 문자 받으셨죠? 논공 비슬산 한식부페에 참석한 사람은 보건소에서 검진받으라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그 현장에 당신 있었지? 코로나 확진자와 같이 있었잖아. 검사하세요’라는 거죠.
세상은 나를 나라고 규정하고 너를 너라고 규정합니다. 이게 인간이 불행한 이유예요. 나는 나라고 생각하고 너는 너라고 생각할 때마다 인간은 더이상 힘들어 못살아요. 인간은 맨날 뭔가 무한 속에 헤엄치면서 정답을 찾길 바라요. 정답은 여기 있는데. 내가 내 부재증명. 나는 있어도 죽게 되면 없어지거든요. 하나를 여러분들이 시험해 보세요.
신발 끈을 이렇게 맬 때 옆 사람에게 사진 찍어보라고 하는 겁니다. 신발 끈을 맬 때 사진 찍습니다. 그러나 신발 끈을 매고 난 뒤에 일어설 때 사진 찍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진 두 장이죠. 한쪽은 신발 끈을 맬 때 사진이고 한쪽은 다 매고 일어서며 허리를 편 상태. 이 두 장의 사진. 여러분이 이 두 장의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보니까 펼 때는 젊었는데 나중에는 펴지고 보니까 이게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면 꼭 죽은 송장처럼 되어 있다면 우리는 깜짝 놀라겠지요. 이게 인생입니다.
인생은 신발 끈만 매고 일어서면 할아버지가 되어 있어요. 그 가운데 아무것도 나에 대해서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나만 생각하는 그 점에 있어서 한결같아요. 욥은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거예요. 욥처럼 아무리 고민하고 하나님 생각해도 너는 이 상태로 나가면 결국은 하나님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아집니다.
어떤 해답이 없어요. 인간은 해답이 없습니다. 제가 춘천에 갔는데 춘천에 김유정역이 있어요. 김유정역에 가니까 역이 두 개입니다. 하나는 새로 지어진 역이 있고 이곳은 진짜 기차가 달리고 멈추고 하는 곳이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옛날 김유정 역을 그대로 살려서 거기 앞에 뭘 정차시켰냐 하면 기차를 딱 정차시켜놨어요. 기차를. 기차를 네 칸 정도 정차시켜놨어요.
그래서 내가 그 정차된 시간에 시간여행 하겠다고 타임머신 타고 들어가려고 하니까 거기 관리하시는 여자분이 코로나 때문에 들어가지 말라고 당분간 금지해서 못 들어갔는데 인간은 되찾은 시간이 없으면 본인이 아무리 백 살 먹어도 정지되어 있어요. 옛날 김유정역이에요. 아무리 매일같이 살아도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이 나오질 않아요. 나에게. 그리고 같은 가족을 봐도 새롭지 않아요. 남편 얼굴이 그 얼굴이고 아내 얼굴이 그 얼굴이고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새로운 것이 없다고 힘들다고 탄식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노래가 나올 쯤 되었죠. 그 노래가 뭐냐 하면 ‘걱정말아요, 그대’예요.
가사에 보면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라는 이 가사 들으면 눈물이 팍 쏟아집니다. ‘그대여, 너무 힘든 일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라는 이 가사. 사람은 사는 재미가 늘 새로운 재미거든요. 새로운 재미. “엄마, 또 백점 받았다” “으이그, 지겹다” “엄마, 80점에서 90점으로 올랐어” “오, 새롭다” 날마다 새로운 것이 있을 때 사는 맛이 나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새로움이 없어요. 이미 죽은 역이니까. 내 역이 정지되어 있어요. 그냥 사진이나 찍지. 백날 신발 끈 묶어봐야 나중에 늙어서 신발 끈 매는 그 사진만 찍히죠. 하나님께서는 욥을 터닝포인트로 잡습니다. 터닝포인트라 하는 것은 일종의 터미널이에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이 생겨나는 터닝포인트.
다시 말해서 무한이라는 것은 욥 네 속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왜? 욥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에. 계시를 받아서 고통 가운데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통받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욥은 고통받고 있어요.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새로움을 줍니다. 터닝포인트예요.
꼭 오송역 같아요. 여러분 오송역 가보셨습니까. 민가가 없고 허허벌판이에요. 오송역 왜 지었겠습니까. 여기서 차나 바꿔 타라는 말입니다. 차나 바꿔 타라는 오송역. 아무 허허벌판이고 민가도 아파트도 그 근처에 없어요. 옛날 부락 몇 채밖에 없어요. 터미널은 생활 공간 아닙니다. 근데 욥은 주님에 의해서 자기 인생이 있었는데 그걸 없애 버리고 터미널로 만들었어요.
그냥 살다 죽어라. 그래. 죽으면 천국 간다. 우리의 몸, 인생 자체를 하나의 터닝포인트로 생활 공간으로 오송역으로 바꿨어요. 오늘 제목은 오송역으로 하고 싶네요. 오송역으로 바꿨어요. 김유정역으로. 오래 사셨죠. 우리 권사님 장로님 참 오래 사셨잖아요. 그냥 눈 감죠, 이제. 안 될까요? 안~~ 되죠. 아무리 오래 살아도 또 살고 싶어. 또 살고 싶어요.
이미 되찾은 주님과 함께 있으면 나를 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나만 생각해요. ‘나이는 숫자고, 나이야 가라.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 아모르 파티’라는 것들이 전부 다 자기만 생각해요. 자기 행복만 생각해요. 더 건강해서 오래 살도록. 다음에 오송역 갈 때 한번 둘러보세요. 민가 없습니다. 허허벌판 같아요.
천안역에 가면 민가가 조금 생겼어요. 역부터 짓고 그다음 민가가 생겼는데 아직도 허전해요. 대구역이나 이런 곳은 민가에 역을 지었거든요. 주님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이해 안 되었어요. 다 외로워요. 주님 자신이 외로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자기 주변에 자기 사람을 불러모았습니다. 인생은 너처럼 사는 것이 아니고 나처럼 사는 것이라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욥처럼 산다고 합니다.
욥이 문제 있기는 있어요. 욥이 아직도 선악 체계 안에 있습니다. 날 때부터 무지개가 안 보이고 날 때부터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이런 식으로 따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영적인 사실, 초월적인 세계는 욥의 고통 바로 그 속에 있다는 거. 욥은 구약에 나타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새삼스럽게 알게 하옵소서.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십자가 꼽힌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형상이고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제는 너, 나 생각하지 말고 주님만 끄집어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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