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목적있는 죽음(욥기 14:7-13)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Nsjn7QHo2Lg,

아빠와 함께 2020. 9. 20. 19:13

목적 있는 죽음 

2020년 9월 20일            본문 말씀: 욥기 14:7-13

(14:7)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14:8)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14:9) 물 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14:10)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14:11)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 같이

(14:12)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14:13)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죽음이란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할 내용이 아닙니다. 한결같이 모든 인간은 죽습니다. 동일하게 죽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죽음에 대해서 새롭게 가미될 내용은 없다고 믿게 됩니다. 일반인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욥은 나름대로 알고 있는 죽음에 대해서 거론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나무의 죽음과 비교해볼 때, 아쉬운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죽어도 물기운이 주어지면 언제든지 살아나는데 왜 인간은 이 땅에서 죽으면 다시는 일어날 줄 모르느냐고 탄식입니다. 욥의 이 주장에 의할 것 같으면 이 세상이란 ‘살고 싶은 자’들의 세상입니다.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자들에게만 희망이 얻고자 하는 세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까 죽고 싶은 것이 본능입니까? 욥은 모든 인간들의 전부가 다 자기처럼 살고 싶어한다고 단정짓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본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무의 운명이 부러운 겁니다.

그러나 신약의 안목에서 보면, 욥은 전혀 죽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신약에서는 죽음을 둘로 나눕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으로 말입니다.(계 20:14) 인간에게 죽음이 있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행이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죽음이 무엇을 알리기 위한 죽음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죽음입니다. 즉 나의 죽음 자체로 죽음이 해석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분, 예수님 단 한 분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한 일반적 죽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의 입장에서는, 어느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인간의 죽음은 동일한 코스를 갖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번 죽음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욥의 입장에서는 모든 의미를 생존기간에 둘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곧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죽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보면, 나의 죽음은 전혀 중요하거나 심각한 일이 아닙니다. 나의 죽음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과 일대기가 더 중요합니다.

성령님이 성도에게 주어졌다는 말은 바로 이 교체가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즉 나의 죽음보다 주님의 죽음이 더 중요하고, 나의 생애보다 주님의 생애가 본질이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생애란 곧 예수님의 생애가 원판이 되어 그 뒤를 따라가기 위해 하나님께서 요리조리 몰고 가시는 여정이 됩니다.

나의 죽음보다 우선적인 그분의 죽음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됩니다. 목적 있는 태어남과 생애와 목적 있는 죽음을 성도가 보여주게 됩니다. 성도의 인생이란 마치 폭발해버리고 남아 있는 찢어진 탄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의 인생’이라는 자기 고유의 목적이 날아가버린 겁니다.

이제 나를 위해 사는 인생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주님을 위한 인생뿐입니다. 이제 알아봐야 할 문제는, 예수님의 목적이 어떻게 성도 내에 적용되느냐 하는 겁니다. 수학자들이 수식을 발표하는 것은 그 수식이 단순히 문자에 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E=mc² 같은 경우, 칠판에 쓸 때는 그냥 수식입니다.

하지만 태평양을 헤치고 다니는 핵항공모함의 갑판위에 적혀 있다면 이는, 이 수식에 의해서 작동되는 원자핵 에너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항공모함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은 그냥 옛날 사람들의 지혜 정도가 아니라 지금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질서입니다. 수식이란 세상을 재료로 여기에 변형시켜 쓸모있는 상품으로 변형하게 하는 겁니다.

성경 말씀은 인간이 참조로 하여 잘 살아라가 아니라 그 어떤 경우라도 이 성경 말씀의 원칙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이 세상의 운명이라는 겁니다. 시편 90:8-10에 보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존재가 이 말씀이 목적하는 바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말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에 있어 운명같은 겁니다. 그런데 욥은 사적인 죽음으로부터 죽음을 이해하려 합니다. 그래서 나무의 운명이 부러운 겁니다.

나무처럼 죽어도 또 살고, 죽어도 또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신약의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보면 두 증인이 나옵니다. 그 두 증인은 하나님이 주신 수식,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하지만 그당시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이해하는 세상이란, 살고자 애쓰는 바로 그런 자들의 세상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을 죽여버립니다.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계 11:8-9)

즉 신약의 성도는 욥처럼 안 죽으려고 발바둥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 있는 죽음’을 목적있게 증거하는 식으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두 증인의 주변 환경도 예수님의 죽음을 증거하기에 적절한 반응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받으면 이미 첫째 부활에 참여된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무섭고 두려워하는 그 죽음을 이미 겪은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합류했기에 겪은 겁니다. 성도에게는 어떻게 하면 안 죽느냐가 아니라 이 살아있는 매 순간이 예수님의 ‘목적 있는 죽음’을 보이는 증거의 장으로 여깁니다. 즉 내가 살기 위해 보내는 세월이 아니라 ‘죽어도 다시 산다’는 그 예수님의 원칙을 증거하는 삶인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게 하옵소서. 무의미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9강-욥기 14장 7~13절(목적있는 죽음)2020092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4장 7~13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다시 움이 나서 연한 가지가 끊이지 아니하며, 그 뿌리가 땅에서 늙고 줄기가 흙에서 죽을지라도, 물기운에 움이 돋고 가지가 발하여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

욥이 죽음에 대해서 자기 나름대로 가진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욥이 소개한 죽음에 대한 설명은 오늘날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그 죽음과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어떻게 똑같으냐 하면 나무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거, 눈에 보이는 나무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외부적으로 측정하고 관찰해서 내놓은 결론이 바로 욥이 내린 결론입니다.

눈으로 보면 나무보다 인간이 못하다는 거죠. 나무는 찍힐지라도 죽었다 할지라도 다시 비가 내리고 물기운이 있으면 새로 심은 것 같이 다시 돋아난다고 되어있습니다. 욥이 그런 나무를 보고 인간의 죽음과 비교하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부럽다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나무가 부럽다는 겁니다. 죽어도 다시 사니까 그게 그렇게 부럽고 반면에 그 잘났다는 인간은 참 서글프다는 거죠.

12절에 보면 “인간은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눈을 뜨지 못하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시체가 그렇죠. 눈 떴으면 시체 아니죠. 그다음에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욥이 세상 사람과 아주 다른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다음에 13~14절까지 다른 점이 나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다시 때가 되면 저 나무처럼 살게 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하는 거예요. 욥이 기껏 뭐가 부러우냐 하면 나무가 부러운 거예요. 나무처럼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살고 죽어도 살게 되면 얼마나 좋겠냐는 겁니다. 그래서 욥이 누구에게 부탁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잠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욥은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건 죽음에 대해서 일체 인간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나무가 죽는 거, 그리고 사람이 죽는 것에 대해서 인간이 어떠한 것으로도 끼어들 수 없는 하나님의 고유 권한이다. 이걸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뜻으로 죽으라면 죽겠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 더 보태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그것을 기다립니다. 저 나무처럼.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자, 그렇다면 오늘날 신약시대에 있는 우리가 보게 되면 욥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욥이 몰라도 너무 모른다. 죽음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라는 생각을 여러분이 가질 거예요. 왜냐 하면 욥은 자꾸 첫째 죽음만 생각합니다. 육신이 죽는 거, 육신이 죽는 거, 그것만 되게 아쉬워해요. 욥이, 그리고 세상이.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 살다가 죽는 것이 그렇게 아쉽습니까. 잠시 3초 동안 침묵을 했어요. 코로나 있어도 마스크 안 쓸 거 맞죠. 마스크를 왜 쓰느냐 하면 빨리 죽을까 봐 마스크 쓰잖아요. 나라도 살아야지 하는 겁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이 있는데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하심으로써 그동안 안 알려졌던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사망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러니까 사람이 눈감고 숨끊어져서 시체 되는 것이 다가 아니니까 다시 살려고 욥처럼 그렇게 기도할 것이 아니라 죽음 속에서 부활이 있다는 거, 죽음은 하나의 필수 경로이고 필수 절차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스스로 자살하면 안 되고 주께서 죽여주실 때 뭐로 죽여주시느냐 하면 그냥 죽으면 안 되고요. 약속을 품고 죽여주셔야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약속대로 죽어줘. 약속대로. 그러면 약속대로 살려줄게”라고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아직 약속을 몰라요. 자기 몸이 전부인 거예요. 욥이 죽음을 이렇게 무서워하는 것은 욥과 더불어서 그런 인식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욥의 입장에서는 ‘나만 살겠다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세계’ 그것이 바로 욥이 생각하는 이 세계입니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죽음이란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업이 됩니다. 아름다운 죽음이에요. 죽더라도 약속대로 죽으면 그게 그렇게 아름다운 겁니다. 노아가 물 심판 벗어나서 안 죽고 살아났다는 것을 우리가 좋아하면 안 됩니다. 노아가 안 죽은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노아가 그 방주를 통해서 누가 자기 대신 깨끗한 제물이 자기의 죄를 처리했기 때문에 살았다는 그 대속에 대해서 노아가 알게 된 것이 아름다운 작업이죠.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인생 살아가는 모든 것이 결국은 죽음에 모이게 됩니다. 그러면 죽음에 모이면서 죽음으로 늙어 가면서 죽어가면서도 이 작업조차 내 작업이 아니고 주님의 작업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에서 어떤 세월을 보내든 간에, 영천에서 벌초하든 말든 간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작업이에요. 그게 아름다운 작업이에요.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 이렇게 죽음을 언급한 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만만하냐 하면 이게 단순히 사적인 내 개인에 관한 일이 아닌 것을 알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내가 지금 주장하는 것같이 똑같이 그 길을 가고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모든 인간. 욥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인간이라고 한 것은 그 당시는 예수님을 몰랐으니까요.

모든 인간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이 없다. 끝. 이게 내가 아는 모든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14절에 보면 “하나님 어떻게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없겠습니까”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이렇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 있는 우리는 알아요. 모든 인간은 다 죽는다. 맞다. 하지만 단 한 분의 예외가 있었다. 그분은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 이게 바로 복음이다.

그 복음을 설명한 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이잖아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너희들 눈에 보이는 모든 인간은 나무처럼 인간이든 나무든 모든 생물은 태어나서 죽는다. 끝. 그게 전부다’라고 알고 있었지. 그게 아니야. 죽음을 이이고 그 죽음의 위세를 뚫고 하나님께서 부활의 사랑, 부활의 혜택, 복을 누릴 자가 있다는 이런 이야기가 바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러니 이 기쁜 소식을 우리가 나만 알고 있을 수가 없죠. 우리가 외칠 수밖에 없죠. 누군가는 이것을 외쳐야 합니다. 그 외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목적을 위해서 존재가 마련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목적을 위해서. 복음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이게 거꾸로 내가 있고 내가 살기 위해서 복음이 있다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그건 엉터리입니다. 그건 약속 아닙니다.

약속이 먼저예요. 그 약속을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이 찾아와서 그걸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 깨달음을 위해서 약속이 없는 사람들, 욥 같은 이런 사람들이 그들이 아는 지식의 마감, 그 경계선, 그것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죠. 그렇다면 인생은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면 제가 질문하나를 할테니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큰 조카 부인이 숙부 장례식에 꼭 같이 참석해야 합니까’라는 응용문제입니다. 인간은 신약 사람들은 죽어도 부활 된다는 기쁨 소식이 이미 있단 말이죠. 그리고 그것은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약속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단 거죠. 약속 또는 목적.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어떤 남편의 부인이라면 숙부 장례식이라고 소식이 왔을 때 숙부인데 꼭 거기에 참석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서 어떤 답변을 내놓을 것이냐 하는 겁니다. 응용문제가 굉장히 어렵죠.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늘 상 우리가 부딪치는 그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갈등들이 생겨요.

만약에 안 갔다고 한다면 안 가고 돈만 보내줘도 상관없는데 만약에 그 남편 집안이 고지식하고 자기 성씨 따지고 집안 따지고 대대로 족보 따지는 집안 같으면 만약에 자기 부인이 참석 안 하면 묻는단 말이죠. “야, 왜 네 마누라 안 오나?” “몸이 아파서 못 왔습니다” “이런 일이 있나. 집안일인데. 여자가 시집을 왔으면 시집 귀신이 되어야지. 어디 시건방지게 어른을 못 알아보고. 너는 마누라 교육 어떻게 시켰노. 그래서 우리 종가에서 나온 종가 땅 하나 얻겠나?”라고 반격이 나오는 거죠.

여기서 이 응용문제를 푸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 세상 모든 것은 욥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죽는다는 것이 싫어요. 싫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두기 위해서 인간에게 싫어하는 죽음을 제공했는데요, 그건 뭐냐 하면 처벌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벌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뭐냐, 같은 행동을 하지 말라는 처벌. 두 번째 처벌의 의미는 처벌자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처벌.

이렇게 두 종류의 처벌이 있어요. 지금 욥 같은 경우에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를 죽여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이익이 뭡니까?’라는 두 번째 경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용이 난해하죠. 처벌에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님이여,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죽이려고 하는데 저를 죽여서 도대체 하나님이 얻는 이익이 뭡니까? 뭣이 좋아서 굳이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건데. 내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백했잖아요. 주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아닌 저를 갈궈서 기어이 죽을 나이도 아닌데 죽이려고 하시는 그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처벌하시는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여기 처벌이라는 말이 등장해야 할 이유가 여기 12절에 보면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라고 나오는데 주의 진노예요. 진노. 화냄. 벌. ‘너는 매 맞아야 한다는 그런 조로 하나님께서 인식해서 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여, 제가 죄 없다가 아니라 그래도 이렇게 죽을 정도로는 아닌데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못마땅하다면 저를 언젠간 다시 살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욥이 부탁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처럼 하나님이 어떤 죽어서 이익이 있느냐고 묻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일들은 ‘너 까불면 죽인다’로 해서 이것은 네 죄에 대해서 똑같은 반복적인 행위를 이 세상에서 되풀이하지 말라고 강력한 금지 경고로써 처벌로 또는 죽인다는 말을 사형제도로써 그렇게 주어진 거예요. 그래서 여기 ‘큰 조카 부인이 숙부 장례식에 꼭 같이 참석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하는 자체가 이미 그 여자는 갈등을 일으킨 겁니다.

참석해서 종가로부터 처벌 안 받는 게 편하냐, 아니면 참석하기 위해서 내가 차비 준비하고 시간 빼고 하는 이것이 귀찮지만 편하냐를 따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꼭 죽지 않더라도 인간은 이미 죽음의 협박과 공갈과 위협에 늘 시달린다는 이 말씀을 제가 드리고 싶은 거예요. 아직 죽으려면 멀었다고 해도 아니에요. 종갓집 이야기나 모든 행동의 선택에 있어서 이것이 과연 나 사는데 유리할지를 스스로 측정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부활을 믿어도 그건 지식이고 교회에서 한 소리 들은 지식이고 실제 우리의 행동은 부활도 없고 복음도 없고 기쁘지도 않고 내가 살기 위해서 무슨 짓도 하는 달랑 그 생각 하나로 온종일을 보내고 있는 거예요. 온종일을. 그래서 욥보고 ‘아이고 욥은 시근도 없이 부활도 모르고 뭣도 모르고’라는 식으로 남 욕하지 마세요.

정말 욥의 절실한 이 하소연은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 해요. 우리가 다시 한번 자신은 안 죽더라도 죽음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이 문제에 해답이 있어야 하니까 이 해답은 어떻게 풀리는가. 어떤 분이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저에게 한 적이 있어요. 드라마 보는데 어떤 물리학자가 수식을 쫙 써놨거든요. 수식을 보면서 “저 복잡한 수식이 어떻게 기계가 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수식은 기호거든요. 기호인데 기호가 나중에 보니까 어떤 상품 하나가 툭 튀어나온단 말이죠. 어떻게 기호가 저 수식이 어떻게 물건이 되어가는지. 상당히 좋은 생각입니다. 왜냐 하면 복음과 관련해서 좋은 생각입니다. 뭐냐 하면 폭발을 해서 다 찢어진 폭탄 탄피, 폭발해서 나온 탄피가 이것이 바로 성도거든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안에 뭐가 폭발했느냐 하면 두 번째 사망이 폭발해 버린 거예요. 십자가와 더불어서. 폭발해 버리니까 본인은 본인의 인생은 이미 헛방이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것을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것을 이미 아는 거예요. 남들은 죽음이 무서운데 사도바울이나 사도들은 벌써 죽음을 넘어섰어요. 남들은 1단계 공부하는데 사도바울은 벌써 모든 공부를 끝내버렸어요.

십자가가 자기 안에 들어와서 폭발해 버렸으니까. 내 것이라고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아까 욥이 이야기한 죽음 이야기와 형식은 같은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욥은 죽음이라는 것은 일체 사람이 손댈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일체 손댈 수 없는 그 죽음을 이미 자신이 겪었다는 겁니다. 경험했다는 거예요.

큰 조카 부인이 숙부 장례식에 가나 안 가나 시답지 않은 아무 문젯거리가 안돼요. 어떤 협박과 종갓집 공갈을 받을 필요가 없어요. 땅 안 준다고 하면 잘 먹고 잘살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이미 자기는 찢어진 탄피만 남은, 폭발했기 때문에 폭발의 흔적을 가진 찢어진 탄피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과연 성도는 무엇인가를 욥이 궁금해하니까 욥이 궁금해하는 것을 해답으로 채워줘야 하겠죠.

수식이 어떻게 기계가 되느냐에 대해서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태평양 한복판을 푸른 바다를 헤치고 가는 미국의 거대한 항공모함 갑판에 이런 수식이 적혀 있어요. E=mc² 이것을 원자력 항공모함이라고 해야 해요. E=mc²이 상대성 원리거든요.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상대성 원리에 의해서 이 거대한 항공모함이 태평양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 파도를 헤쳐가면서.

E=mc² 이라는 수식은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물질과 교환된다. 물질이 에너지고 에너지가 물질이다. 그 원리는 c²(광속도 제곱)에 비례해서 움직인다는 겁니다. 머리 허연 아인슈타인이 칠판에 E=mc²이라고 썼을 때 거기에 청소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아이고, 저 아저씨는 저거 써서 밥이 되나. 아, 저거 써서 월급 타겠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르는데 월급 타려고 한 것이 아니에요.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그 재료에서 질서를 잡아버리면 그 재료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물건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복음이 추상적이에요. 복음은 예수님 본인에게 일어난 이야기.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했데. 그랬데? 좋겠네. 끝.

이렇게 되면 그건 그냥 수식에 불과해요. 칠판에 쓰여있는 수식에 불과합니다. 칠판에 있는 E=mc² 이라는 수식이 내 영혼에 막혀서 내가 이 세상을 헤치고 나가는 원자력 항공모함이 되려면 주님께서 실제적으로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것이 있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와 더불어 나라고 여기는 것은 모조리 폭발해 버리는 겁니다. 나라고 여기는 것은 이 땅에서. 그 폭발하는 계기가 우리에게 맞닥뜨리는 모든 인생사입니다.

그 인생사에 있어서 시편 90:9-10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시편 90편 9절과 10절은 E=mc² 입니다. 수식입니다. 분명히 성경에 있는 수식이에요.

그러나 이 수식을 가만히 보면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네요. 비록 우리가 인생을 짧게 살아도 정말 이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는 것은 어린아이도 초등학교 2학년 아이도 고백합니다.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머리를 길게 길렀어요. 누가 봐도 여자아인 줄 알았죠. 2학년 올라가면서 머리를 싹둑 잘랐어요. 여자아이가 아니고 남자아이예요.

머리를 왜 길렀는가. 엄마 말 듣고 기른 게 아니에요. 보니까 인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서 기른 거예요. 아홉 살 먹어도 나름 수고와 슬픔이 있어요. 아이들이 나름.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네 살 먹은 동생보고 가르치기를 “네가 인생을 알아? 나도 너만 할 때는 다 그랬어. 좀 더 인생 살아봐. 내 나이쯤 되면 네가 엄마의 잔소리 이해할 거야”라는 유튜브들이 떠있어요. 조회 수 100만 되어서 그 애들 엄마 아빠 돈 벌고 난리도 아니에요.

성경 말씀이 그냥 기호가 아니에요. 그냥 수식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게 실제 상황이에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이게 그냥 글자가 아니에요. 우리의 삶에 목적으로 들어온 거예요. 목적으로. 너의 목적 따로 있지? 나는 너의 목적 인정하지 않아. 나는 너의 목적 폭발시킬 거야. 네 목적. ‘우리 딸만 시집보내면 나는 내 맘대로 산다’라는 그거는 누구 생각이에요? 그건 본인 생각이고.

인생이라 하는 것은 딸만 시집보내면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다음부터 행복 막 기다리고 그런 거 없어요. 끝까지 수고와 슬픔뿐이에요. 왜?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집어넣어 준 우리 인생 자체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동행하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가 죽는 이유는 나무는 몰라요. 하지만 인간만큼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는 이 귀하고 고귀한 이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겁니다. 어디 나무와 비교를 합니까. ‘아이 부러워라. 죽어도 산다’라고 그걸 부러워해요.

우리는 나무가 갖고 있는 목적 정도가 아닙니다. 참새도 기르죠. 들풀도 기르죠. 하지만 우리 인간은, 성도는 그 나라 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기르신다는 겁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시고, 내일 목적 숙제 또 있을 거예요. 내일 되면 내일 몫의 수고와 슬픔이 기다릴 거예요. 하지만 이미 수고와 슬픔을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수고하자 슬퍼하자가 아니라 그런 거 이미 내 안에서 폭파한 것으로 보고 폭파했어요.

이미 나이 들어서 죽었다는 그 죽음을 첫째 사망을 우리는 이미 경험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십자가의 영이 왔을 때 우리는 부활이 된 거예요. 그게 우리 몸이 부활된 것과 구분해서 이걸 첫째 부활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 11장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욥이 지금 뭘 모르고 있느냐. 요한계시록 11장에 보면 두 증인이 있습니다. 그 두 증인이 있는데 두 증인이 뭔가 수식을 외치고 있어요.

E=mc² 이런 거를 외치는 것이 아니고 그 두 증인이 복음을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났다. 이것을 외치니까 그때 많은 사람들이 8절에 보면 그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핍박하고 결국 죽여 버렸어요. 왜? 납득이 안되고 이해가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죽여버린 겁니다. 숙부 장례식에 참여하냐 안 하냐가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지 될 수 있는 대로 죽는다는 처벌을 피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지 죽고 난 뒤에는 도무지 그들은 아는 것이 없어요.

그 인간들이 이 두 증인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유를 기어이 고집스럽게 안 받아들이는 이유는 지금 내가 알았던 이 모든 지식이 내가 사는데 내가 죽음을 지연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분도 아시죠. 뉴스 시간만 되면 나오는 머리 허연 50대 아줌마 나오잖아요. 질본(질병관리본부) 수장.

그 사람이 내뱉는 모든 말은 “여러분 이렇게 해야 여러분들은 오래 살고 일찍 안 죽습니다”라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지겨워요. 지겨워. 그 사람들에게 복음 이야기하면서 “걱정마세요. 복음에 있어서는 죽어도 삽니다”라고 하면 그들은 화 나서 요한계시록 증인들처럼 죽이려고 덤벼들 거예요. 문제는 우리가 그 말에 어느새 동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말에. ‘그래, 조심해야지’

도대체 뭐예요. 뭐가 기쁜 소식입니까. 마스크가 기쁜 소식입니까. 그러면 수식은? 죽었다가 부활하는 수식은 어디로 날아가 버렸어요? 어릴 때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아이들 같아야 구원받기 쉽다고 하는지. ‘은하수 배 노 저어가는 하얀 쪽배에(은하수 통과하는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그루 토끼 한 마리’라는 이 노래가 지금 가당치 않죠.

은하수에 무슨 배가 다니고 달에 무슨 계수나무가 있고 거기에 토끼 한 마리가 있어요. 만약 토끼가 있다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한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허황하게 들리냐 하면 바로 달에 토끼 있고 계수나무 있고 은하수에서 배 노 저어간다는 그 정도 이상으로 허황한 겁니다. 이걸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생겨날 수 없는 기적이에요.

그런 기적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미 죽음을 경유 해서 첫째 부활의 그 본질로 그 비어있는 탄피 안을 꽉꽉 채우시기 바랍니다. 아예 우리 배에다가 수식을 쓰세요. E=mc² 이라고. 예수님은 이미 죽었다가 부활한 것을 싣고 가는 거, 이게 바로 우리 성도의 목적입니다. 이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복음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경 허투루 보지 않게 하옵소서. 쉽게 믿으면 믿어진다고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하나가 주님의 십자가 믿었다가 부활하신 수고가 밑바탕 되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우리를 믿게 하시는 능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기쁘게 감사히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