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
2020년 8월 23일 본문 말씀: 욥기 13:9-13
(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13:10) 만일 너희가 몰래 낯을 따를진대 그가 반드시 책망하시리니
(13:11) 그의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의 두려움이 너희 위에 임하지 않겠느냐
(13:12) 너희의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13:13)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닥치든지 내가 당하리라
욥은 타인에게도 분노하고 있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도 화를 내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좋게 보시고 자신도 확실하게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영 기쁨이 없고 감사함도 없습니다. 그저 못난 친구들만 닥달내고 있는 장면입니다. 즉 “너희들은 나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라는 겁니다.
욥은 친구들과 자기 사이에 제대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는 자기 뿐임을 분명히 합니다. 하지만 지금 자기에게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으니 이 점이 욥으로서는 답답해 할 뿐입니다. 이러한 답답함을 오늘날 소위 신앙생활을 마음먹고 해보자는 모든 이들에게 여지없이 찾아오는 경우들입니다.
내가 나를 정립하는데 있어 늘 빠지고 마처 채우지 못한 부분이 발생한다는 겁니다. ‘온전하다’, 혹은 ‘완벽하다’고 자신만만해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흘러가게 되면 그때 그 기쁨과 감사가 소멸되어버렸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즉 전혀 온전하지도 완벽하지 않음이 들통나 버린 겁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욥은 모르고 있습니다. 구약이니까요. 온전한 해답은 신약 시대에 와서 드러납니다. 지금 우리는 신약의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 욥에게 뭔가 해줄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는 우리도 욥과 같은 경우는 필히 겪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친구들보고 뭐라고 잔소리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스스로 정립되는게 없으면 만만한 사람을 찾게 됩니다.
자기보다 신앙이 없어보이고 뭐가 뭔지 전혀 정리가 안 된다는 사람들을 붙들고 선생노릇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 기쁨이 그런 식으로 회복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우리가 제대로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바깥 환경을 늘 대하며 삽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스페인의 성지순례길을 간다고 칩시다. 그리고 평소에 집 주위를 산책한다고 칩시다. 차이점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폭이 동일하고 운동화와 올라오는 무릅 수위도 동일합니다. 아무리 바깥 풍경이 한국과 스페인이 다르다고 하지만 이 풍경 안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자기 지신입니다.
괜한 헛바람 들어서 멀리까지 가게 됩니다. 갔다보면 내 다리만 아플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공간을 ‘실공간’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관리 하에 있고 자신이 선택해서 속할 수 있는 공간에서의 주인공은 자기이고 싶어합니다. 반면에 자기에게 속하지 않는 공간은 ‘허공간’이라고 여깁니다.
허공간이란 실공간 빼고 나머지 공간을 말합니다. 이 공간에 대해서 신에게 위임합니다. 즉 “하나님, 제가 열심히 할 수 있는 이 실공간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잘 관리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리 범위 밖에 있는 공간의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관장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에게 문제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인간할 도리는 다하고, 그 다음에는 하늘에 맡기자’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상에 나오는 인간상이 과연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바른 인간상이겠습니까? 갈라디아서 3:1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여기서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이 과연 눈 앞에 보이십니까? 그것도 미미하거나 흐릿하지 않고 그것도 ‘밝히’ 말입니다. 실공간을 인간이 장악하고 내가 장악했다면 사도 바울의 말은 엉터리입니다. 과장된 말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실공간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자신의 철저함이 살아있다고 여깁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무 위에 올라가는 힘든 일은 제가 할테니 하나님께서는 날씨나 제때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면 과연 믿음이 있는 사람일까요? 신앙인으로 바람직할까요? 아닙니다. 허공간에 있다는 주님의 십자가가 실공간까지 접수한 겁니다.
사람들은 이 자연이라는 덮개가 있고 그 위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연과의 관계에서 미처 모자라는 부분에 대해서 도와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소위 인간들이 해낼 수 있고, 잘 알고 있다는 그 대목까지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점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로서의 점령’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제대로 파악케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십자가로 점령하게 되면, ‘내가 최선을 다했습니다.’는 대목은 일체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자기 정당성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자기 정당성이 남아 있지 않는다면 남을 함부로 질책할 수가 없습니다. 즉 ‘나 홀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실공간에서 자신을 주인공로 여겼지만 허공간 입장에서 봤을 때, 통하지 않는 일방적 주장에 불과합니다.
인간들은 본인이 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에 밀리지 않고 버티는 그런 영웅상이 되고 싶은 겁니다. 결코 실수나 실패가 없는 완벽한 인물이고 싶어합니다. 이런 근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이 태도가 유지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들어서면 전혀 용납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면 신약에 무엇이 필요할까요? 마태복음 21:28-32에 보면,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싫소이다’를 먼저 내민 쪽이 제대로 하나님 사람답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대해서 우리 내부에 ‘싫소이다’고 반응하는 것이 우리 본질에 부합된다는 겁니다. ‘싫소이다’를 거쳐야 그 다음에 ‘회개’가 성립합니다. 즉 우리는 ‘싫소이다’하면서 하나님에 반항하는 것을 싫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구원받은 세리와 창기 속에는,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담겨 있지 않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존재임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5강-욥기 13장 9~13절(회개)202008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3장 9~13절입니다. 구약성경 772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같이 그를 속이려느냐, 만일 가만히 낯을 좇을진대 그가 정녕 너희를 책망하시리니, 그 존귀가 너희를 두렵게 하지 않겠으며 그 위엄이 너희에게 임하지 않겠느냐, 너희 격언은 재 같은 속담이요 너희의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니라, 너희는 잠잠하고 나를 버려두어 말하게 하라 무슨 일이 임하든지 내가 당하리라”
친구의 모든 의견에 대해서 견해에 대해서 쓰레기로 취급합니다. 너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나를 설명하는데 전혀 적합지 않다. 그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나 욥은 하나님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본인만이 알고 있는 지금 어떤 정답이나 해답을 소개하거나 나타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욥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무척이나 지금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이 맞기는 맞는데 그러면 내 쪽에서 뭔가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면 서로 통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과 통하질 않아요. 사람하고 통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는 자로 규정짓기 때문에 친구들이 무슨 소리 하든 간에 하나님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지금 욥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면 너희들이 갖고 있고 내세우는 격언들은 재와 같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쓰레기란 말이죠. 먼지 같은 아무 쓸데 없는 속담이고 “너희가 방어하는 것은 토성이다”라는 말은 방어해봤자 들짐승 몇 마리 왔다 갔다 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한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나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욥은 제대로 하나님에 대해 설명을 못 하고 있습니다. 결국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 본문은 평소에 우리가 하나님은 분명히 아는데 왜 인생 사는 것이 이렇게 짜증이 나지? 내가 하나님을 분명히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만족도가 떨어지고 불만스럽고 괜히 화가 나고 왜 이러는지 그 원인을 못 찾는 것과 똑같은 형편에 우리가 있으니까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라는 말 모릅니까? 알지요. 그런데 안 기쁜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라”라는 말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감사가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욥이 갖고 있는 심정과 우리가 같은 심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은 신약적으로 보게 되면 이게 해결이 돼요. 해결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욥은 지금 하나님을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 우주를 덮은 어떤 덮개 같은 것을 생각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높은 차원에 통일성이라고 이야기해요.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내 말이 틀렸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아신다. 전지전능하다. 내 말 안 틀렸지?”
욥이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하면서 본인이 전혀 기쁘지를 않아요. 감사하지도 않으면서 정답은 정답대로 “나에게 문제 있거든 이야기해봐. 문제없잖아.”
그런데 뭔가 문제는 없는데 정답은 알고 있는데 전혀 삶에 기쁨이 없다는 것은 뭔가 빠진 게 있어요. 그 빠진 게 있어요. 그 빠진 게 뭔지를 지금 욥은 부지런히 찾는 거예요. 친구들은 전혀 보탬이 안 되고요. 그래서 하나님이 전체를 다 통일하고 알고 계신다면 그걸로 욥은 어느 정도 자신이 정답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인간 욥 본인이 친구하고 상대하면서 친구에게 안 지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에게 밀리지 않는 강자의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려고 합니다. 자연에게 밀리지 않는다. 자연을 뚫고 나는 밀리지 않겠다는 그 의지 하나로 버티는 거예요.
이런 게 뭐냐 하면 바로 영웅인데 욥은 지금 자기가 영웅을 지향합니다. 영웅 되고 싶어 해요. 그런데 모든 이 드라마나 영화 주인공은 누가 있느냐 하면 영웅입니다. 자연에 밀리지 않고 자연을 뚫고 버틴 사람. 그게 영웅이고 우리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가득 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한 30년 전에 우리 집에 티비가 처음 생길 때 미국 드라마 중에서 지금껏 그렇게 재미있는 드라마를 본 적이 없어요. 미션 임파서블. 그때 우리말로 제목이 뭐였느냐 하면 ‘제5 전선’이었습니다. 다섯 명이 나온다고 해서. 비밀 지령을 받고 ‘이 지령을 하고 난 뒤에 당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모른 척합니다. 그리고 이 테이프는 5초 안에 파괴됩니다’라고 시작해서 펼쳐지는 미션 임파서블이 그렇게 기뻤던 이유는 그 다섯 명의 특수 요원들이 하는 미션, 그 사명 감당에 실수가 없어요.
벌써 마음 푹 놓고 드라마를 보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반드시 목적을 이루고 마는 겁니다. 아슬아슬 한 것도 없습니다. 꼬이는 것도 없어요. 드라마 꼬이는 거 있으면 대번에 짜증 나잖아요. 시원하게 해결해 버립니다. 영웅입니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자연이 인간을 덮고 있고 그 덮고 있는 것을 신의 손으로 덮고 있다는 것을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유피테르라는 로마시대 때 신이 있어요. 유피테르 신은 어떤 신이야 하면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이에요. 가나안 땅에 바알 신이 바로 그 신이었습니다.
그것이 유피테르 신으로 바뀌었는데 옛날 고대 기원전 로마에서 어떤 사람이 번개가 쳤는데 자기 집에는 번개가 치지 않고 그냥 넘어갔어요. 그럴 때 다른 친구들이 와서 “너는 어떻게 번개가 쳤는데도 너의 집은 이렇게 멀쩡하냐”라고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내 집 근처에 숲을 유피테르 신에게 갖다 바쳤더니 그 신이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한 화답으로 고마워서 우리 집을 번개 치지 않고 넘어갔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우리 보기에는 우리 현대 과학에는 그게 아니에요. 번개가 치지 않은 것은 나무 잎사귀가 땅에 닿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번개가 땅으로 빠져나가서 치지 않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그렇게 설명 안 하고 유피테르 신에게 잘 보였더니만 복을 줘서 그렇다는 거예요. 과학에서는 여지없이 그걸 가지고 미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입장에서 과학이 미신이라는 말에 동의 못 하는 이유가 아무리 과학적으로 설명해도 계속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자연에서 계속 우러나와요. 심지어 과학자들이 박물관 짓는데도 고사 지낸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게 뭐예요. 과학자들이 박물관 짓는데 고사 지내는 거예요. 건축이 제대로 되라고.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아는 범위만큼은 과학적으로 설명하되 그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것은 자꾸 어떤 초월적인 신에게 맡기고 싶은 거예요. 지금 욥의 문제점과 이것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와도 관련성이 있지요. 이걸 가지고 실공간과 허공간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가 파악되는 실공간과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여분의 남은 허공간 속에서 그것은 신이 관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관장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수술실에 들어왔다고 할 때 예수 믿는 의사 이야기합니다. “환자님 걱정 말고 제게 맡기시고 제게 맡기시고 수술 잘되도록 기도합시다”라고 되는 거예요. 수술하게 되면 제대로 하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야 할 텐데 의사가 하는 말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까지는 인간이 하되 나머지는 하나님에게 맡겨야 맡겼다고 이쁨받아서 수술이 잘된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것은 다 하고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면 이거는 동양철학에도 마찬가지예요. 동양철학에도 그대로 나오거든요. 이게 지금 구약에 있는 욥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신약은 한마디로 말하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도 있고 친구들에게도 있으니까 자꾸 논쟁하는데 신약에 오면 정답은 이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이겁니다. “바뀐 것을 이야기해라”
딱 하나예요. 신약의 성도가 타인에게나 누구에게나 또 하나님께 할 수 있는 것은 바뀐 것을 이야기해야 해요. 바뀐 것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바뀐 것. 연속적인 거 말고 연속적으로 ‘나는 내 할 일 다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어때요? 이만한 겸손 같으면 제 믿음 괜찮은 거 아니에요?’라고 이만한 믿음이라고 자랑하는데요.
이렇게 연속적인 거 말고 내 할 거 다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는 이거 말고 그렇게 생각했던 내가 생각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그게 신약의 성도입니다. 구약의 욥이 생각했던 것이 틀려먹었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되려면 내 할 일 도리 다하고 나머지는 겸손하게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그 나, 나가 문제가 있었던 ‘나’라는 겁니다.
‘나’가 잘못된 나라는 겁니다. 아까 실공간 허공간 이야기했지요. 작은 거니까 여러분 한번 이야기 들어보면 이해될 거예요. 제가 아침마다 우리 집 근처에서 거의 한 시간 동안 운동 삼아 산책을 하는데 그 산책하는 것과 내가 안 가봤지만, 스페인의 올레길, 성지순례 할 때 다니는 올레길을 성지순례 길로 개발을 해놨어요.
지금은 못가지만 그 관광지에 한국의 청년들이 굉장히 많이 갔습니다. 자기는 카톨릭 신자도 아니면서 가면 삼겹살 구워 먹다가 욕 얻어먹고 그런 길이 있는데 그 스페인에 300킬로가 넘는 올레길 갈 때 우리가 거기 가서 걷고 있다고 봅시다. 가면 내가 우리집 돌아 다닐 때의 보폭과 그리고 스페인 올레길의 보폭이 다를 리가 없어요. 똑같아요.
그리고 발을 옮길 때마다 나오는 이 무릎, 그리고 발, 모습, 옷차림, 이런 것들이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왜 스페인에 갑니까? 왜 거기에 가죠? 기분 탓인가? 왜 갑니까? 내가 가면 스페인이든 고향이든 집이든 관계없이 내가 가면 모든 게 똑같아요. 우리는 허공간에 하나님을 둡니다. 실공간은 내가 담당하고. 허공간에 가면 내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달라지지 않습니다.
구약이 아니고 신약의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내가 주관한다는 그 자리를 주님이 오셔서 그것을 장악해 버렸어요. 장악해 버렸습니다. 실공간 허공간 이야기했는데 그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성경 구절 하나 읽어드릴 테니까 여러분들이 속으로 해석을 한번 해보세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말 빼놓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의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는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못 박히신 것이 십자가가 “눈앞에 밝히”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고 “밝히” 보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걸 여러분들은 신약 성도기 때문에 이걸 뭔가 해명을 해야 하는데 해석을 하는데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제가 문제를 던지는 것은 이겁니다. 십자가가 그게 눈에 보이느냐는 겁니다. 십자가가 눈에 보이냐는 거.
벌써 십자가 사건 끝난 지 15년 넘었어요. 지금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십자가는 벌써 지나간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밝히” 보인다는 거예요. 미친 거 아니에요? 우리가 시선에서 거리가 멀어져 버리면 이건 실공간이 아니고 허공간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런 말을 해서 우리가 허공간에서 일어났다는 하나님의 공간이라는 그것이 실공간 되는 나는 보이는 것만 본다는 이 실공간을 장악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보이는 것만 보고 안 보이는 것은 하나님에게 맡긴다는 이 나의 사고방식은 잘못된 겁니다. 우리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욥은 자기가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몰라요. 우리 매사가 그래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감당해 버립니다. ‘하나님, 이거는 이것까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라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과 결속이 된다고 생각해요.
농사짓는 것은 내가 사과나무 농사 지을 테니 날씨 문제는 하나님이 좀 채워주면 안 되냐는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은 마치 신앙적으로 옳은 나인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순수하고 순진하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보는 소통과 이쪽 소통이 되질 않아요.
어떤 12살 먹은 아이가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 받은 김성주 아나운서가 이렇게 물어요. “거기가 어디예요?”라고. “경기도 성남시 야탑입니다”라고 대답하니까 김성주 아나운서가 하는 말이 “거기 야탑의 명승지가 어디에요? 자주 가는 곳이 어디예요?”라고 물으니까 그 열두 살 아이가 아이가 하는 말이 “대형마트입니다”라고 했어요. 대형마트.
열두 살 아이는 대형마트를 자주 간 거예요. 자기의 실공간은 자기 자신을 계속 문제없음을 증명하는 장소가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욥은 뭐냐 하면 지금 자기 실공간을 못 벗어났어요. 내가 문제없다는 것을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그 공간에서 허공간은 하나님께 맡기고 ‘지금까지 나는 완벽합니다. 문제없습니다. 주여 더는 못합니다. 이 정도 완벽하면 되었지 뭘 더 합니까?’라고 고집을 부려요.
그러나 여기서 신약은 십자가 사건이 오는 겁니다. 이제 우리가 해결을 봐야 해요. 오늘 본문의 욥처럼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열심을 다 하는데 하나님을 아는데 왜 기쁨이 없지’라고 지금 이렇게 그냥 집에 돌아가시면 안 되거든요. 뭔가 사건이 사건을 만나야 해요. 그 사건을 오늘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쉬운 예가 많이 나오는데.
어떤 열 살 먹은 초등학교 여자아이가 하나 있어요. 여자아이가 있는데 할머니와 같이 살아요. 그런데 그 할머니는 집에 고양이 키우는 거 그렇게 싫어해요. “내가 눈 감기 전에는 고양이는 우리 집에서 못 키운다”라고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열 살 먹은 여자아이는 고양이가 너무 키우고 싶은 거예요. 그들이 어디 사냐면 저기 군위군에 살아요. 고로댐 있는 곳 800미터 위에 살아요. 인간극장에 나와요.
아이가 외로우니까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중재자로 아버지가 제안했어요. 할머니가 손녀에게는 못 이겨요. 그래서 방에서는 안 되고 밖에서만 키우라고 허락한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가 절대 양보 안 해요. 방에서 가족처럼 키우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가 형제가 없으니까. 저 같으면 절대 못 키우게 하죠.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하기로 했냐면 고양이 키운다고 쓰인 종이 다섯 장과 못 키운다고 적힌 종이 다섯 장을 준비해서 제비 뽑아서 공평하게 하자는 거예요. “할머니, 제비 뽑으세요. 할머니가 고양이 키운다는 종이 뽑으면 나는 키우는 거고 못 키운다고 나오면 못 키우는 거예요. 됐지요? 할머니”라고 하니까 할머니가 손녀가 이 정도로 고양이 키우고 싶어 하는지를 알고 안 들어주면 난리 날 것 같아서 그렇게 하자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할머니가 뽑고 보니까 방에서 키운다고 나왔어요. 왜냐 하면 열 개 종이 중에 아홉 개가 키운다고 적혀 있기 때문에. 열 장 중에 아홉 개니까 찍어도 웬만해서는 다 키운다고 적힌 종이로 뽑히는 거예요. 손녀가 반칙해서 아홉 개 종이를 전부 다 방에서 키워도 된다고 적은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자기중심인 것을 욥이 몰랐던 거예요. 오늘날 우리 중심을 몰랐던 거예요.
중심은 우리 중심이 아니고 십자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의 계획 중심이에요. 예수님 스케줄 중심이에요. 우리 중심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선악이라는 것이 있어요. 선악 지식. 요거는 옳은 것이고 요거는 그른 것이라고 판단을 해요. 내가 제비뽑는 종이를 내가 작성을 해요. 그동안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거든요. 내가 세상에서 들은 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비뽑기를 직접 만드는 거예요.
‘하나님 제가 열심히 기도해서 만들었는데 이것으로 할까요. 저것으로 할까요’라고 하나님께 뽑으라는 거예요. 실제로 그걸 누가 작성한 거냐 하면 우리가 작성한 거예요. 지금 욥은 자기와 친구 둘밖에 없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나 잘남을 증명하기 위해서 누구를 뽑느냐 하면 꼭 못난 사람, 나보다 믿음 떨어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유난히도 반겨요. 반갑습니다.
글을 써도 믿음 있는 글이 아니고 쓸데없는 글, 코로나로 교회 나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쓰는 그런 글은 아주 신이 나요. 왜? ‘아이고 믿음 꼬라지 하고는’이라고 하면서. 이건 누가 봐도 자기보다 믿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본능이 뭐냐. 믿음 없는 거, 나보다 악인들, 그런 것들을 다 주워 모읍니다. 정치하는 것 보면서도 못 한 것을 다 긁어모아서 상대적으로 나는 너를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신의 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싶은 거. 그것 때문에 성경 골라서 봐요.
그러나 마태복음 21장 28~30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대압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는데 아버지가 묻기를 네가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니까 큰아들은 “예”라고 하고 가지 않고 둘째 아들은 “싫습니다”라고 하고 나중에 갔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이 뭐냐 하면 우리의 본성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하겠다고 하는 그런 인간이 아니고 우리 본성은 하나님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나는 싫습니다”라고 하는 게 우리 본성에 딱 맞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그러고 난 뒤에 뉘우치고 간 사람이 있으니 세리와 창기, 그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국 간다는 이 말은 세리와 창기에게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 싫습니다. 나는 예수님 싫습니다. 나는 내가 예수님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합니다”라는 그 모습을 본인이 일단 인정을 해야 해요.
인정하고 난 후에 그 인정한 내가 주님 앞에서 나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는 거예요. 인정을 두 개 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이고 그다음에 회개해요. ‘주여, 나밖에 모르는 나, 이것이 나의 전부인 것을 내가 인정합니다’라는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내가 나를 처리하다가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한도를 그냥 누구에게 맡긴다. 그냥 주님에게 맡겨버리세요. 내가 처리하지 말고.
욥은 지금 그런 처리를 할 수 있는 십자가의 은혜가 없어요. 욥은 지금 십자가가 안 보입니다. 내가 아는 실공간만 보여요. 친구들만 보입니다. 나보다 못한 거, 나보다 신앙 없어 보이는 거. 그러니까 우리는 사도바울이 십자가 보이냐고 말하는데 ‘주님 그거는 십자가는 치우고요 믿음 좋은가 있는가 그것만 따지겠습니다’라고 하죠. 누구 입장에서? 내가 판단자 입장에서 나보다 믿음 좋으냐 나쁘냐 그것만 생각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구약 사고방식이에요. 내가 그런 말 할 쨉이 못 된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 안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은 덮개 맞아요. 덮는 거 맞습니다만 그 덮는 뚜껑은 십자가 피로 덮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그걸로 덮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기쁨과 즐거움밖에 없어요.
‘주여, 나 같은 인간이 회개를 알다니, 나 자신을 알다니, 주여 이것이 최고의 복음의 기쁨입니다’라는 그 놓쳐버린 기쁨을 여러분 마음 낮추기로 회복하시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 사람의 한계를 읽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한계처럼 느껴집니다.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 즐거움으로 살았던 저희들 십자가 앞에서 주님으로부터 판단 받을 줄 몰랐던 저희들 날마다 회개하는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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