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함과 죄용서
2020년 9월 13일 본문 말씀: 욥기 14:1-6
(14: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14:2) 그는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아니하거늘
(14:3)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여겨 보시나이까 나를 주 앞으로 이끌어서 재판하시나이까
(14:4)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14:5) 그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의 규례를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14:6)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가 품꾼 같이 그의 날을 마칠 때까지 그를 홀로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자 하는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 바로 그 관점으로 자신이 또한 돌아옵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안목으로 볼 때에 나 자신을 어떻게 보이겠느냐를 빼먹지 않고 살핍니다. “나는 나를 이 정도로 압니다. 하나님, 아직도 저를 아는데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을 묘사하면서 원초적으로 약하고 한계있는 인간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자신은 내세울 것도 없는 더러운 자라는 것도 압니다. 따라서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시선으로 볼 때,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점을 본인도 이미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구약 이스라엘에서 나타나는 신앙인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103:12-15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 인생에 대해서 ‘들의 꽃’ 같이 허망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신앙인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입장에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 죄과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전혀 만나지 못하게 해놓으셨음을 받아드리고 난 뒤에 고백하는 겁니다. 반면에 욥은 전혀 하나님의 용서함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죄 안 짓고 열심히 살다보면, ‘약한 인간의 능력이 그것 밖에 안되니 하나님의 감안하심이 있겠지’하는 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간다는 것은 조금씩 지식이나 정보를 넓혀가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2:10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규칙을 율법에 담아놓으셨는가요? 그것은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자신을 지키겠다는 일념에 의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지식과 정보를 조금씩 철저한 점검을 거쳐서 받아들입니다. 조심에 또 조심을 하는 겁니다.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 말씀 중에 믿을 수 있는 것과 아직 자신이 못 믿겠다고 옆으로 제켜 놓을 것으로 구분 짓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지식의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는 조금씩 넓혀가는 방식으로는 아무리 해도 자기 지혜의 범주를 극복해 낼 수가 없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지배하는 영역, 그 밖에 있다고 여깁니다. 자신의 정당성에다 더 추가한 정당성을 갖추므로서 보다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시편에 나오는 신앙인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미진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심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이 자체가 완전입니다. 용서하심과 만나는 것은 단순히 모자람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죄’입니다. 인간의 지혜가 모자라서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죄입니다. 근원적으로 인간들은 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일거에 오십니다.
완전, 그 자체로서 오십니다. 인간들이 더 추가할 것이 남아있는 식으로 찾아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짓을 해도 묻지도 따지지 않는 죄용서하심을 가지고 오십니다. 반면에 인간들은 평소에 내뱉은 모든 태도나 행동이 늘 자기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갖는 식입니다.
예를 들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라는 교훈이나 혹은 “나 내일 떠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나, 혹은 “왜 너답지 않게 행동하냐?”라는 충고같은 겁니다. 여전히 인간들은 더욱 더 고상하고 훌륭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자기 앞에 늘 깔아놓으면서 인생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의 단절이 여전합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 뿐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이름은 하나님과 끊어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지만 부활로 인하여 이어진 겁니다. 따라서 사도행전 4:12의 말씀이 중요한 내용을 나타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다른 이름’은 하나님과 연결될 수 없음을 유념합시다. 세례 요한은 요한복음 3:2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즉 지상은 결코 하늘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욥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다 많은 지식이 보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런 의식이 대세인 것은 열왕기상 18:28-29에 나옵니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들이 타인들과 상관하는 것처럼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정성과 열심과 순수함을 보태면 하늘이 감동할 줄 압니다. 옆에 있던 엘리야가 조롱합니다. 열성과 정성을 더 보태야 되지 않느냐고 놀립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갑니까? 그것은 인간의 무능성입니다.
불이 내려와야 할 제단에 엘리야는 의도적으로 물 12통을 넘치도록 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거론합니다. 즉 세상의 인간들의 신과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보라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다가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면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단절과 주님의 연결하심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8강-욥기 14장 1~6절(허망함과 죄용서)20200913 이근호 목사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이와 같은 자를 주께서 눈을 들어 살피시나이까 나를 주의 앞으로 이끌어서 심문하시나이까,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그날을 정하셨고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 그에게서 눈을 돌이켜 그로 쉬게하사 품꾼같이 그날을 마치게 하옵소서”
욥이 하나님 앞에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은 피곤한 인생인데 그냥 피곤한 채로 쓰러져서 죽을 때나 좀 편안하게 가게 해달라고 그런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탁하면서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 것을 미리 앞에다 단서를 붙이지요. 내가 열심히 하려고 애썼지만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여인에게 난 사람.
이 세상에 출생할 때 남자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여인에게서 태어났죠. 그 여인에게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말은 여인에 대해서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말은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남자보다는 못한 약한 여자, 약한 존재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럼 남자에게서 태어나면 좀 강해질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인 자체가 이미 연약하고 그 연약한 데서 태어난 사람인 고로 사람이 주 앞에 깨끗하다고 해 봤자 하나님 성에 차시겠습니까. 그건 저도 알고 주님도 아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갈구지 마시고 그냥 조용하게 죽어가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라는 그런 제안을 하는 거예요.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욥이 어떤 의미에서 기특하다고 한 것은 바로 자기가 이렇게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낙담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꾸 하나님에게 대화를 시도한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이 존재하는 이것을 내가 아무리 힘들고 절망적이지만 어떻게 그것조차 내가 외면하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아는 하나님을 다 털어놓고 가겠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시간에 관한 문제인데 5절에 “그 달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사온즉”라고 되어있어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죽을 날짜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정도 알면 꽤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고 사는 문제가 내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주님 손에 달려 있다는 이정도까지 제가 각오하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뭘 더 얻어내겠다고 뭘 털어봐야 챙길 게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얻을 게 있다고 이렇게 챙기냐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2절에 보면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이라고 되어있어요. 사람이 어느 방에 있다가 누가 불러서 후딱 가게 되면 어떤 소설가는 이런 표현을 해요. ‘근식이는 그림자처럼 빠져나갔다’라는 이야기를 해요.
근식이가 누구냐 하면 바로 김유정 단편소설 ‘솥’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근식입니다. ‘근식이는 그림자처럼 빠져나갔다’라는 표현이 멋진 표현이 되는 이유는 그 사람 나갔는지 보면 벌써 몸체는 빠져나간 거예요. 뭔가 휙 지나가서 보니까 몸체는 안보이고 뒤따르는 꼬리 같은 그림자만 보고 있으니까 ‘그림자처럼 빠져나갔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욥도 마찬가지예요. 인생 사는 것은 몸체는 ‘몸체 있었나. 그런 기억이 안 나는데’ 살아가는 것이 몸이 방에서 빠져나가는 것처럼 뭐가 성질이 그렇게 급한지 후딱 그림자 같이 빠져나가 버렸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이런 이야기가 하나둘 새겨보게 되면 오늘날 소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아무리 봐도 흠잡을 데가 없어요. 욥의 신앙적 고백이.
흠잡을 데 없으면 욥도 문제고 흠잡을 데 없다는 그 사람도 문제예요. 흠을 잡아야 해요. 욥이 메시아가 아니니까. 욥이 신앙의 표준모델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모델이지 욥은 모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여기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믿음 좋고 이렇게 신앙 좋은데 도대체 욥에게 무슨 문제점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없는 거 같은데’라고 생각하죠.
그것은 욥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 당시에 욥도. 자기가 탈탈 긁어서 자기가 내놓을 수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이게 전부입니다. 제가 아는 지식이 이것뿐이라고 하며 다 내놓았는데 그래도 뭔가 이게 내가 벌 받을 만큼 고통스러울 만큼 나쁜 점이 또 있다는 말입니까. 이 정도인데 하면서 내놓았단 말이죠. 그러면 우리 신약 성도는 ‘그 정도뿐이야? 그 정도?’라고 하면 넘어 서주는 게 있어야 해요.
이제 그걸 우리가 여기서 찾아봐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라고 나와 있는데 시편 103편 12~15절에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되어있어요.
같은 인생은 꽃과 같다, 그림자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시편에서는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미 인자하심, 주님의 죄 용서를 받았어요. 우리의 죄가 동에서 서로 먼 것 같이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처럼 우리의 죄과를 주님께서 멀리 다른 방향으로 처리를 해버렸단 말이죠. 이미 12절에서 시편에 있는 신앙인은 알아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주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따지거나 묻지 않는 거, 다시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오늘 본문 욥에서는 지금 용서하심이 없어요. 빠져있어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으니까. 빠져있으니까 인간이 나름 죄 용서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나름대로 최고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할 거 다 겸손하고 낮출 거 다 낮췄을 때 그 모습이 오늘 본문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오늘 본문에 “모든 것이 더럽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죽을지는 주님 손에 달렸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라고 나오는 거예요.
“다 아는데 왜 나를 이렇게 괴롭히십니까”라고 되어있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할 일은 뭐냐 하면 자기 죄 용서하시려는 주님의 하나님과 따지고 책망하고 문제 삼는 하나님과의 교체 작업을 지금 욥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문제 삼고 따지려고 오시는 분이 아니고 문제 삼고 따지는 경우라도 그것은 전제가 무슨 전제냐 하면 하나님께서 죄 용서하시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신 거예요. 욥에게.
그런데 욥은 그 다가오심을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해서 상당히 불만이 늘어집니다. 그렇다면 욥의 이 문제를 우리 신약의 입장에서는 이걸 집어넣어 놓고 하나님은 네가 다가서는 식으로는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만날 수 없음을 우리가 언급을 해야 하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언급을 하느냐 하면 아까 제가 언급을 한 대로 뭐가 문제냐는 겁니다.
욥은 이것저것 다 믿는데 율법에 하나를 어기면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이 된다고 야고보서에 나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걸 다시 변형해 보면 다 안 믿어지거든 아무것도 안 믿고 있다고 보라는 겁니다. “나는 이거 이거는 믿어지는데 이거는 안 믿어져”라고 하면 지금 인간 쪽에서 뭔가 전체 완결적인 것을 제대로 구성해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들이밀려는 그런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올 때 한꺼번에 오는 데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오시는데 십자가로 한꺼번에 다 오시는데 모든 지식은 십자가로 끝인데 한꺼번에 오시는데 죄 용서로 끝인데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너는 용서받았다고 한꺼번에 오는 데 우리는 용서받을 짓과 용서 안 받아도 될 짓을 내 쪽에서 수습하면서 다가서니까 어떤 것은 이해되고 어떤 것은 이해 안 된다고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더러 있어요. 성경에 어떤 대목은 이해 가는데 어떤 대목은 이해 안 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은 이해 되는데 사사기나 여호수아에 보면 젖먹이 아이까지 다 죽이라는 말은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젖먹이 아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여호와 모른다고 다 죽여버리느냐는 겁니다. 딴 것은 다 믿겠는데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57억 년 전 진화론적 관점에서는 이건 도저히 진화론적 증거물을 비춰볼 때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7일 만에 천지를 창조하지. 그것도 해와 달과 별을 어떻게 다 창조하지.
이건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건 과학을 믿고 싶지 성경을 안 믿고 싶다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그게 또 걸리네. 그래서 하나님에게 일단은 믿을 것은 믿고 차츰차츰 믿을 범위를 넓혀 가겠다는 식이에요. 이게 욥의 한계이고 오늘날 불신자들의 한계입니다. 불신자라는 말을 빼고 일반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김유정이라는 소설작가가 일제 시대 때 29세에 죽었는데 아주 유명한 소설가예요. 지금도 김유정 문학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지은 ‘솥’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거기에 들병이가 나와요. 들병이라고 하는 것은 병에 막걸리를 담아서 이동하면서 술 파는 여성을 들병이라고 합니다. 병에 막걸리 담아서 이동하면서 남자들 꼬셔가지고 팔고 술 다 팔았다 싶으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사람을 들병이라고 해요.
이름이 계숙이라고 하는 그 들병이가 있는데 그 들병이에 꽂힌 어떤 남자가 이름이 근식인데 근식이라는 사람이 들병이에게 꽂혀서 집안에 있는 가재도구를 전부 다 술값으로 가져다준 거예요. 마지막에 자기 아내를 버리고 그 여자와 같이 따라가려고 내밀었던 그 가재도구가 뭐냐 하면 솥입니다. 마지막에 솥을 들고 가는데 이 솥을 들고 갈 때 부인이 환장하죠.
옛날 일제 시대 어려웠을 때는 솥만 있어도 살았어요. 장날에 솥 하나 사가지고 솥에 뺨을 대며 비비며 “아이고, 우리는 이 솥이 있어서 살았다”라고 이렇게 살림을 시작한 것이 그 당시 시대상이고 민초들의 서글프기 짝이 없는 삶이란 말이죠. 요새 시집가는 사람들 솥 사서 그렇게 좋아하고 눈물 흘립니까? 그냥 쿠쿠 전기밥솥 그거는 아버지가 다 사주는 거 아니에요?
혼수로 친정아버지 어머니가 하이마트 가서 다 고르라고 하고 이걸로 때우자고 하면서 다 사주는데 옛날에는 그 솥만 있어도 행복했던 그 마지막 남은 아내와의 평생 살자고 계약했던 계약의 마지막 증거인 솥을 들고 가는데 그때 그 들병이가 하는 말이 “나 내일 떠나요”라는 이 말에 반해서 솥을 들고 밤 새벽에 온 거예요. 자기 아내는 코 골고 자고.
그런데 여기서 “나 내일 떠나요”라는 이 문장, 이것이 바로 불신자들의 세계입니다. 내일 떠날 곳이 있다는 거예요. 욥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인생은 떠나보았자 풀이고 꽃이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이 땅에서 인간들은 “나 내일 떠나요”가 있어요. 떠나니까 주인공이 환장해서 마지막 남은 게 솥이니까 솥 들고 같이 가자고 오는 데 그 술집 여자의 남편이 있었던 거예요. 그 들병이 계숙이라는 여자는 꽃뱀이었던 겁니다.
이 남자 꼬시고 그다음 가정집 남자 만나서 파탄시키고 하는 꽃뱀인 거죠. 참 서글프기 짝이 없는 옛날 1935년도 작품이에요. 옛날에는 연약한 여인을 남자들이 그런 식으로 앞세워서 살림을 살았던 거예요. 제가 그걸 보면서 “나 내일 떠나요”라는 이 대목, 이 문장을 보며 ‘그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든 거죠. 인생은 그게 아닌데. 내일 떠날 곳이 있다는 것이 인생이 아닌데.
그 비슷한 문장이 뭐냐 하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라는 말. 왜 분수도 모르고 사느냐는 겁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어요. 막 누가 횡포 부리면 “왜 그래? 너답지 않게”라고 하면 “나다운 게 뭔데?”라는 이런 거. 그러니까 이런 귀에 들리는 여러 가지 문장들. 흔히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장들은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갈 때까지 가 보자는 해답은 없고 그냥 갈 때까지 가 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하는 겁니다.
오늘 욥이 이야기하는 갇혀있는 인생, 그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잖아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을 것만 믿고 안 믿는 건 남겨두고 나중에 다음에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안 믿는 게 없어야 해요. 왜? 한꺼번에 다 왔으니까. 네가 들병이를 쫓아가든 송중기를 쫓아가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한꺼번에 전부 다 용서를 해주는 거예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뭔가 자꾸 착실하게 살려고 하고 다져가면서 다진 데 또 다지면서 조심조심 그렇게 인생 살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결국은 나중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교훈 같지도 않은 것을 교훈으로 하고 말이죠. 나다운 게 뭐냐고 땡깡부리고 말이죠. 앞으로 그런 단어는 불신자들이 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부터 10년 전에 북한에서 10월에 일어난 일인데 MIG-29기 최신형 비행기, 북한에서 먹을 거 안 먹고 모아서 산 러시아제 최고급 비행기 MIG-29기를 샀는데 그건 함부로 내놓지도 않아요. 깊숙한 지하에 넣어놓고 귀히 여기는데 그 두 대가 불에 타고 말았어요. 폭발해서. 한 대 값이 북한 돈으로 계산하면 어마어마합니다.
그게 불에 탔거든요. 최근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왜 불에 폭발했는가가 나왔어요. 거기 정비하는 중사가 군 생활 7~8년쯤 했는데 인민군 중사가 곧 제대를 앞두고 뭔가 제대할 때 돈이라도 들고 나와야지 안 그러면 빌어먹거든요. 그래서 밤중에 몰래 가서 비행기에 있는 기름을 빼서 그것 가지고 있다가 곧 제대하니까 그때 팔아서 사회생활 해야겠다고 왔는데 이 바보 같은 중사가 어두컴컴한 곳에서 기름을 부었단 말이죠. 한 통 붇고 두통 붇는데 이제는 얼마나 더 부어야 하는지 좀 더해도 되는지 알기 위해서 라이터 불을 켰던 거예요.
제가 그 글을 보면서 뭐냐면 사람은 지금 내 신앙이 좋은지 나쁜지 이렇게 해서 천국 가겠는지 그 판정을 자기가 평소에 나를 지키는 그 방식을 사용해서 그냥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소에 나는 나 하나 지키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것을 거론했고 착함과 윤리와 도덕을 거론했단 말이죠. 그러면 그걸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도 오늘 욥처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이정도 하면 믿음 생활 아니겠습니까. 하나님, 이정도 하면 천국 가겠지요. 아직까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라는 식으로 라이터를 가지고 기름 더 넣을까 보다가 그게 폭발해서 다 죽었고 그 중사는 공개처형 당했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맨날 우리가 매일같이 우리 점검에 나서는 우리 모습과 뭐가 다릅니까. 그 사람에게 바보 등신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주님 앞에 바보 등신 아니에요.
여기서 욥의 문제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금 끊어진 것을 모른다는 거예요. 제가 낮 설교 이야기했지만 주님의 이름의 영속성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문제인데요. 왜 주위에 이 세상 모든 것이 끊어져도 예수님의 이름이 죽었다가 살아난 그 이름만이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라는 말이죠.
아직도 여전히 네 이름에 기대 거느냐. 너의 조심스러움에 너의 착실한 인생 살기를 아직도 믿느냐는 겁니다. 네가 너를 믿어? 라이터에 불 켤래? 너 자신을 폭발시키게. 확인할 필요 없어요. 주께서는 일거에 용서하겠다고 했으면 동에서 서로 먼 것 같이 다시는 너의 죄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면 제발 그 말에 대해서 신임해 주세요.
자기 경험을 믿지 마시고 우리 인생 살아봤자 뭐 얼마나 살겠어요. 백날 경험을 쭉쭉 해봐야 여전히 우리는 경험에 역시 모자라요. 요한복음 3장 27절에는 더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이건 신앙생활 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똑같은 거예요.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매일같이 라이터 불 켜서 자기 자신을 본다고요. 매일같이. 그런 짓 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늘에서 주실 때는 조금씩 주신 것이 아니고 그 성질에 있어서는 동일한 거예요. 10년 믿으나 20년 믿으나 똑같은 걸 줘요. 내가 동에서 서로 먼 것같이 너의 죄를 옮겼다는 그 사랑, 시편 103편에서는 그것을 알지만 오늘 본문 욥에서는 그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구약성경 이스라엘에서는 그게 차이가 나겠죠. 이스라엘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거기 엘리야 나오는데요. 엘리야와 그 시대에 누구와 한판 붙느냐 하면 850명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 한판 붙어요. 거기 27절부터 보면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신을 부르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해서 감정을 흥분시키는 방법들을 사용해요.
옷을 찢고 꽹과리 치고 꼭 오늘날 부흥회 하는 것처럼 “주여!, 주여~!”하면서 통성기도하고 하면서 어떤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이 잠자고 있다는 거예요. 자고 있으니까 우리의 바알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열성으로 그것을 깨워줘야 우리의 정성도 알고 우리 성의도 표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 성의와 정성에 감동받아서 깨어나서 “그래. 그래. 왜 이렇게 시끄럽나. 내가 뭘 해줄까. 해줄게”라는 그런 관계라는 거예요.
그래서 엘리야가 그걸 보고 “야, 그래가지고 되겠어? 더 심하게 해야지”라고 놀리니까 그들도 약이 올라서 큰 소리로 부르고 28절에 보면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그들의 신이 흥분한 것이 아니고 누가 흥분했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에게 흥분하는 방식을 자기에게 자학하듯이 사용하는 거예요.
형제간에 둘이 있는데 형에게는 큰 빵을 주고 동생이라고 작은 빵을 주니까 성질 더러운 동생이 형 손에 있는 빵을 보고 갑자기 빵을 바닥에 내버리면서 방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가면서 가슴을 치면서 “나도 빵 줘!”라고 소리치듯이 발작 일으키는 거 봤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입니다. 내가 더 자학하고 더 자신을 깨게 되면 그 분량만큼 부모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겠지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내가 평소에 나 하는 방식이 그대로 하나님께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보고 엘리야가 쓰는 방식은 뭐냐. 엘리야의 방식은 그냥 하나님의 약속에 맡깁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 이 자리에 현장화 되게 하옵소서. 그건 뭐냐.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제단 위에다가 펼칩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거.
다시 말해서 불이 떨어져야 할 곳에 불에 반대 성질인 물을 갖다가 부어버리는 거예요. 물을 열두 통을 부어버려요. 그러면 저쪽 바알과 아세라에서는 “저런 신은 없다. 어디에도 저런 신은 없다. 불이 붙어야 할 장소에 물을 붓는 것은 우리 인간 세계에는 없다”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줘요. 현장에서 보여줘요. 너희들이 안 된다는 것을 주께서 하시는 거, 내가 안 되는 거, 아무리 죄 씻으려 해도 내가 안 되는 그 일을 주께서는 안 되는 것을 안 되게 하시면서 되게 하시도록 주께서 찾아오시는 그 하나님을 욥은 몰랐던 거예요.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세례요한의 이 말을 우리는 헛것으로 들으면 안 됩니다. 비슷한 이야기가 열왕기하 2장에 보면 나와요. 엘리야가 기적을 베풀고 하니까 엘리사가 그게 부러웠던지 “나도, 나도, 선생님 나도 그 능력 주옵소서. 그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하니까 엘리야는 본인이 그 능력을 주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엘리야의 제단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기 때문에.
엘리야가 불 수레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요. 아, 저거는 엘리야, 우리 선생님의 위대함이 아니라 바로 약속의 하나님이 엘리야를 쓰시는 것처럼 주께서 들어 쓰시면 두 배나 실제로 엘리사가 두 배나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이제는 엘리야를 잊어버리고 엘리야의 하나님, 엘리야의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욥이 모르고 있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던 하나님의 나타내심이에요.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한계를 다 드러냅니다. 욥처럼, 우리는 빵 더 달라고 땡깡부리는 아이처럼 내 죄, 나의 잘못, 내 실수에 대해서 어떻게든 회복해 보려고 선한 일, 착한 일, 헌금, 기도, 금식, 모든 것을 바알과 아세라처럼 이렇게 하지만 그것은 또 성경 보면서 ‘이거는 믿어지는데 이거는 안 믿어지고 앞으로 정신 차려서 진도 나가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아부하는데 주님에게는 아부가 통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다 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주의 이름의 영속성, 바로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그것을 십자가를 알게 되면 이미 너는 그 연속성 속에 포함되었기에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는 너를 받아 주겠다는 약속이 용서하심이 오늘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사람과 불신자나 신자나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갈수록 깨닫게 됩니다.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할 수 있는 것만 즐거워하는 저희들 이었습니다. 이제는 주께서 해주시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을 엄청난 것을 참된 복을 주셨는지 이제는 그 복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고맙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