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노선 변경
2020년 8월 16일 본문 말씀: 욥기 13:1-8
(13:1)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깨달았느니라
(13:2)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하지 않으니라
(13:3)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13: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13: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13:6)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 보라
(13:7)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13:8)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합니다. 욥 본인은 결코 하나님을 속일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즉 지금 욥은 본인과 하나님을 직접 상대할 생각입니다. 욥에게 있어 중보자 개념은 지금으로서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에게 따지고 싶어합니다. 즉 자신이 잘못되었다면 자기쪽에서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수정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겁니다.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수정해도 할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친구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단호합니다. 그들은 견해에 따를 것 같으면 결코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과 고통이 올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상대할 자격도 위치도 갖고 있지 않다고 욥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곧 진리입니다. 그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진리에 대해서 여러 종류의 견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욥은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하나님은 옳고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은 틀리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논쟁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과연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이며 뜻은 무엇이고 진리의 내용은 무엇이냐고 말입니다. 마태복음 25:31-34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류는 두 종류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양, 다른쪽은 염소로 말입니다. 이러한 분류에 대해서 사람들은 궁금해합니다.
과연 기준이 뭘까? 기준으로 작용하는 진리값은 무엇일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결정이 곧 기준입니다. 이는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시고, 그리고 구원될 자들의 말도 듣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창세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누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남은 일은 이것입니다. 이 하나님 일방적 결정에 자꾸만 인간들의 속성과 요소를 들어오는 것을 제거하시는 일입니다. 즉 예수님의 결정지음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미리 정보를 캐내었다든지 정보를 입수했다든지 하는 거짓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누가 구원되고 무슨 근거로 구원되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알려줄 필요가 없습니다.
욥이 초반에 나왔듯이, 욥이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과 악마가 내기를 해서입니다. 욥이 이 내기에 끼어들어서 하는 말이, “나를 목숨을 가지고 내기하지 마세요”라고 대들 하등의 권리가 욥에게 없습니다. 여하튼 하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버리기로 작정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이 자기 구원이 뭔가 한게 있다는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간절함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 충족시켜주지 않느냐하면 인간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괴물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욥에 대한 하나님의 칭찬을 도저히 그냥 묵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마의 본성상 그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악마의 의도를 알고, 욥에게 이유없는 고통을 주신 겁니다.
이것을 전인류로 확대시켜 보편화하면 이러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자기 보기에 절망적이기 않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18:30-31에서 엘리야는 제단을 하나 쌓습니다. “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를 따라 열두 돌을 취하니 이 야곱은 여호와께서 옛적에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네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하리라 하신 자더라”
지금 엘리야는 바알+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상대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의 특징은 인간의 선한 행함에 의미를 주는 신입니다. 즉 인간들이 희망하는 신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신이며 따라서 인간들은 자신의 목표를 가지고 자기가 믿는 신을 움직일 수 있다고 인정하는 신이 바알과 아세라 신입니다.
인간들이 지상에서 어떤 짓을 하면 신을 거기에 응답하는지 잘 아는 신입니다.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왕상 18:28) 따라서 백성들의 호응도 대단합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독려에 힘입어 최선을 다하여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었습니다. 지금 엘리야에게 있어 하나님은 따로 내세울 수 있는 신이 아니라 인간들의 신을 보고서 그것을 부정하는 신으로 등장됩니다. 이는 마치 히브리서 7장에서 멜리세덱이라는 계보를 생각하면 됩니다. 히브리서 7:3에 보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인간들 보기에 ‘없어보이는’ 제사장입니다. 반면에 레위지파의 제사장은 실제적으로 활동하는 제사장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7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제사장 노선은 레위노선에 속한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에 속한 노선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모든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그 노선에 속한 제사장입니다. 따라서 노선이 다르다는 말은 곧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노선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의 노선을 따르는 제사장 지파는 레위지파가 아니라 유다지파가 됩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히 7:14) 모세가 하던 식으로 율법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접 하나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오셔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기준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요소는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850명이나 경쟁자 앞에서 궁지에 몰립니다. 자기 혼자 남았다고 자부할 만합니다. 그러나 바로 사실, 아무도 자기를 도울 수 없는 그 형편이 바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하나님다운 면모를 보이는 순간입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자신의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원칙이 나타나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인 하나님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 구원되는 겁니다. 진리는 예수님의 고유권한에 속하기에, 우리 인간들이 예상하고 끼어드는 모든 것을 궁지 몰아넣으시는 그 하나님께 찬미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절망할 권리나 자격도 없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4강-욥기 13장 1~8절(율법노선 변경)2020081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3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772페이지입니다.
“나의 눈이 이것을 다 보았고 나의 귀가 이것을 듣고 통달하였느니라, 너희 아는 것을 나도 아노니 너희만 못한 내가 아니니라,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데없는 의원이니라, 너희가 잠잠하고 잠잠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 너희는 나의 변론을 들으며 내 입술의 변명을 들어보라,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궤휼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좇으려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려느냐”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은 상식이죠. 그리고 옛날 사람들도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다는 그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러면 진리는 신에게 있겠죠. 그다음 문제입니다. 그러면 신이 누구에게 진리를 줬느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쟁론하고 토론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인간들은 숫자가 많잖아요. 다양하지요.
그 다양함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나오는 말씀입니다. 32절에 보면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연소는 왼편에 두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사람을 딱 둘로 쪼갭니다. 관심사를 두어야 할 것은 그 기준이 무엇이냐는 거죠.
그 기준이 뭐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여기 이 말씀을 하시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님께서 “얘들아,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안 살면 내가 너희를 작살 낸다”라는 이런 기준이 있어야 될텐데 그렇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는 양과 염소를 나누신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기준은 예수님 본인의 의사가 기준이고 본인의 마음 먹기가 기준이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 먹기가 기준이 아니에요.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간을 밀어버립니다. “너는 그냥 내 대상으로만 너의 자리로 가 있어. 오지 말고 가 있어.” “주님, 제가 뭐라도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니야. 그러지 말고 그냥 가 있어. 내가 결정하는 데로 결정 날 거야. 그냥 가 있어.” 양은 양대로 염소는 염소대로 예수님 자체가 기준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겁니다.
욥기를 시작한 지 오래되었잖아요. 1장에 보게 되면 욥이 고난받는 이유가 터무니없이 상당히 예상밖에 이유로 고난받아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악마와 내기하면서 욥이 고통받게 되어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고통받는 당사자의 의사를 주님께서 사전에 통보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기분 나쁘게 다루죠.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욥을 자랑하면서 “네가 건드릴 수 있거든 건드려봐라”라고 악마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악마는 욥을 건드린 거죠. 그러한 내기에 있어서 욥은 어떤 자기 자리가 자기 의사가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냥 당했죠.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에 인간은 그냥 당한 것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악마의 내기에 당했다는 사실을 어떤 인간이 이것을 수용하고 반기겠습니까.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터무니없어요.
이것을 욥에서 이야기했지만, 마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 되고 염소 되는 것에 있어서 양은 열심히 했고 염소는 게을렀다는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결정지어 버립니다. 이것은 이렇습니다. 인간 쪽에서 자기가 의도해서 구원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구원되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거기는 하나님의 일방적 뜻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걸 천국 백성의 요건으로 삼을 수 없다는 거예요.
천국 백성이 되는 요건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의사만 전체 백프로 다 들어가 있어야 해요. 조금이라도 인간의 요소가 섞여 있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적합지 않습니다. 이게 얼마나 시원한 말이에요. 참 시원한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거기서 묻지요. “하나님, 굳이 인간과 의논하지 않는 이유가 뭡니까?”라고 물으면 구약 때는 그것이 이스라엘을 통해서는 조금씩 나오는데 이방 민족에게는 전혀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사를 거론하지 않느냐 하면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수상한 괴물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속여서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내내 그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18장 31절에 보면 거기에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놓고 17대 1이 아니고 850대 1로 붙습니다. 850대 1.
바알과 아세라 850명이 그냥 850대 1이라고 하면 실감이 안 나니까 큰 체육관에 851명을 다 집어넣어 놓고 의사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앞에 사회자가 묻습니다. “우리는 어느 신을 섬깁니까?”라고 물으면 천둥 치듯이 “바알 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이미 대세가 다 넘어갔어요. “아니요”라는 말이 무슨 모깃소리처럼 “아니요”가 들리지를 않아요. 거기서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여호와 편에 있는 엘리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궁지에 몰린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절차인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가 나서서 선지자 노릇 해서 내가 구원받는다는 것을 하나님 쪽에서 거부하십니다. 거절하십니다. 엘리야는 그냥 궁지에 몰린 거예요.
그런데 왜 거기에 엘리야가 아무것도 할 게 없느냐 하면 저쪽에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는 그들이 인간들의 마음을 현혹할 수 있는 모든 장치와 종교적인 제도와 형식을 다 구비 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복을 받는 방법과 거기에 대한 필요한 인간의 도리와 행함 역사와 전통 이런 것들을 바알과 아세라가 다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그들에게 바알 신이라는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것을 받아주는 신이 바알 신이에요.
인간이 하는 것을 받아주시는 하나님. 기도와 헌금과 예배 이 모든 것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에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고 예배를 받으신다고 했잖아요”라고 할 수 있는데 시편 자체가 율법적이에요. 시편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리라는 그것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실컷 드려봤자 주께서는 안 받습니다.
왜냐 하면 시편 시대에 보면 인간들 마음속에 이미 바알 신이 들어있어요. 인간 속에 바알 신이 들어있으면 형식으로 여호와 섬기는 거 하나님이 안 받거든요. 바알 신이 들어있다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느냐. 바로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율법을 줘버려요. 율법을 줘버리면, 여기서 좀 어렵습니다, 율법을 줘버리면 이스라엘 내부가 두 종류로 갈라지게 되어있습니다.
이게 어렵더라도 참으셔야 해요. 히브리서 7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두 개의 족보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멜기세덱의 족보, 반열, 계열, 멜기세덱의 계열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라는 이것이 멜기세덱의 위상입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지금 오늘 본문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믿는 하나님 정도는 나도 안다고 하고 그러면 욥의 친구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면 네가 아는 하나님을 제시해 봐라”라고 하겠죠. 그러면 욥이 하는 말은 “나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고통뿐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는 욥은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어요. 고통을 주신 것은 뭔가 전달 과정에서 배달 사고 일어난 것이지 실제로 ‘내가 아는 하나님은 역시 정의롭고 옳은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 하나님은 나에게는 없다. 그런데 너희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없다. 너에게는 있는 하나님, 나에게는 없는 하나님. 그런데 나는 없는 하나님이 맞다’라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겁니다.
멜기세덱의 반열에 나오는 그 천국 가는 노선도 이게 없어요. 없는 노선입니다. 그럼 없는 노선인데 어떻게 그걸 확인하고 파악할 수 있느냐. 인간의 모든 혈통 족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가운데서 없음이 없음으로 드러나면서 있음이 얼굴을 내미는 거예요.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거예요. 인간의 족보를. 멜기세덱이 제사장이거든요. 그러면 제사장이 없는 족보예요.
없는데 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뭘 만드느냐 하면 없는 걸 인간들은 힘들어하기 때문에 있는 족보를 만들어요. 그 족보를 위해서 율법을 주었고 율법에 준해서 나타나는 선지자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레위 지파가 있고 레위 지파 혈족의 제사장이 있으니까 우리에게는 제사장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틀어버리시죠.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은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 만들어 놓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 있느냐. 제사장은 멜기세덱과 관련된 제사장이 현재 형성되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레위 지파와는 다른 지파인 유다 지파를 통해서 멜기세덱의 족보와 연결을 하나님께서 시도했던 거예요. 그러면 유다 지파의 제사장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과 어떻게 만나는가. 레위 지파의 제사장에 구멍을 뚫어버립니다. 이걸 단절 또는 끊어짐이라고 합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 그대로 적용해 봅시다. 욥은 하나님은 고통만 줬는데, 아까 전에 이걸 배달 사고라고 했죠, 나는 하나님을 정의롭다고 믿는다. 하지만 나에게 전달된 것은 악한 자에게 주는 징벌이 전달 되었다. 이건 뭔가 하나님께서 내가 모르는 다른 거, 실수는 아니지만 뭔가 다른 게 있을 것이다고 생각해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저하고 변론합시다. 한번 따져봅시다. 어디서 문제가 일어났는지 한번 따져봅시다. 저는 하나님 의롭다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만 악한 일을 한 적 없는 나에게 죄인에게만 주어지는 벌을 덤버기로 줬는데 앞과 뒤가 연결이 안 되니까 어디서 꼬였는지를 한번 변론해 봅시다”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이에요.
그리고 친구들에게는 “너희들의 하나님에 대해서 나는 안 듣는다. 그 정도는 나도 아니까 치워라. 치우고 하나님과 직접 단판을 짓겠다”라고 나서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욥이 이방 민족이라는 한계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그것을 그러한 흔적을 계속해서 주셨지요. 히브리서 3장에 보게 되면 그 흔적이 나옵니다. 2~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라고 나오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종이었고 하나님의 장차 계획은 아들이 종의 자리에 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방금 제가 쉽게 이야기했는데 이게 쉬운 말이 아니에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편에 함께 있는 주인 자리에 앉으신 분이 인간이 해야 할 종의 자리에 아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해야 할 자리에 그것을 인간에게 시켜놓고 그것을 제대로 못 했다고 율법으로 지적하면서 “그 자리에 내가 갈게”라고 나서신다는 것이 히브리서 내용이에요. 히브리서란 성경의 내용입니다.
율법을 줘놓고 “율법은 하나의 실루엣이다. 하나의 그림자다”라고 하면서 폐기 처분해버려요. 제가 수련회 때 9강에서 실루엣이라는 이야기를 했죠. 사극에서 자객이 와서 대감의 목을 치는데 너무 잔인하기 때문에 카메라 감독이 그냥 현장을 안 보여주고 그림자만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고 나중에는 창호지에 핏빛만 쫙 뿌려지는 것을 통해서 대감은 자객이 살해해서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죠.
그런데 신약에는 그 창호지를 뜯어내는 거예요. 아니, 무슨 일이 벌어졌어?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뜯어 보니까 아주 착하고 착한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신앙인이 악마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그런 실체가 딱 보이는 거예요. 당사자 욥은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는데 이렇게 고생합니까. 당사자도 모르고 친구도 모르고.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너는 하나의 역할이고 폼잡는 거다. 실제로는 장차 오실 하나님 자신을 너희들이 미리 대역했던 그 역할을 예수님이 다 해버리는 거예요. 여기서 다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다~~~. 역할을 다 가져가는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 가져가 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율법은 하나의 의인화가 된다. 율법이 한 인물을 보여주고 말해줘요.
율법이 문자가 아니라 한 인물을 이야기해줍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그 말씀은 한 인물로 의인화돼요. “내가 안식일이다. 내가 안식일이야. 내가”라고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안식일의 주인. 이것은 내가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율법 지키는 데서 비켜라’가 되어 버려요. “비켜. 비켜” “제가 지키겠습니다” “아니야, 그러지 말고 비켜. 내가 지킬 테니까. 나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빠지지 않게 다 완수하러 왔다. 비켜라. 비켜. 내가 네 자리에 갈게”
아직 욥은 그 정도까지 몰라요. 욥 본인 자리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욥과 똑같은 그런 아픔을 겪는 자리인 것을 욥은 몰라요. 그냥 자꾸 의문만 생겨요. ‘왜, 왜, 왜?’라고. 해답은 몰라요. ‘하나님, 한번 따져봅시다. 왜 저에게. 왜 저에게...’라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저’라는 거 ‘나’라는 것을 끄집어 당겨버립니다. ‘나’라는 자리를.
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가 현재 살아가는 그 자리가 네 자리인 줄 아느냐? 내 자리야. 예수님 본인이 만든 자리예요. 그러면 우리 자리가 빠져버리면 우리는 ‘나’ 있음이 없음의 자리를, 없는 분이 활동하는 자리를 엉덩이를 깔고 앉았던 셈이 되는 겁니다. 없는 분이 이루실 일을 현재 있다고 믿어지는 내가 너무 열불 내면서 설쳤던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욥은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는 일에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죠. 이게 오늘날 우리 성도가 욥과 똑같은 경우를 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도 의심해야 하고 주님의 살아있음도 의심해야 해요. 만약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나는 그동안 헛수고 헛방 인생을 살았다. 그 교회 돈 준 것만 해도 아까워 죽겠네. 정말. 그 시간에 유명한 데 놀러 갈걸. 왜 나는 남들 휴가 갈 때 안 가고 교회 왔던가. 나는 왜 그 돈 가지고 가족과 재미나게 놀 건데 왜 그 돈을 교회에 냈던가’라고 후회하고 의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거 후회하고 의심 안 하게 되면 정말 우리 신자 아닙니다. 나 자신부터 모든 것을 다 의심하고 주 예수라는 분이 이미 돌아가신 분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아침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하나님의 원수가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생각은 우리가 다 겪어야 해요. 다 겪어야 해요. 제가 뭐 하나님의 원수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원수도 성립 안 되니까 ‘그냥 모른다. 알 수 없다’라고 그걸 지금 욥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13장 다시 보게 되면 “너희가 하나님을 위하여 불의를 말하려느냐 그를 위하여 속임을 말하려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낯을 따르려느냐 그를 위하여 변론하려느냐”라고 하는데 하나님 하나를 두고도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대립이 되도록 그렇게 조치한 겁니다.
열왕기상 18장 이야기를 다시 이어가 봅시다. 바알과 아세라는 850명이에요. 850대 1입니다. 어느 것이 정상입니까. 850명이 다 바보예요? 그건 뭐 학문도 모르고 공부도 안 한 사람이에요? 아주 마음가짐이 악한 자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에요. 그 사회에 지도자들이에요. 남들에게 한 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예를 들 테니 속으로 맞춰보세요. 다음 중 어느 것이 가장 힘든가. 첫 번째, 섹소폰을 부는 거. 두 번째, 공놀이하는 거. 세 번째, 농사 짓는 거. 네 번째, 말하는 거. 정답은 항상 마지막에 있죠. 이게 왜 정답이 되느냐 하면 악기를 불 때는 말할 필요가 없어요. 자기 속내를 남에게 드러낼 이유가 없습니다.
농사는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면 땅과 상대하죠. 땅이 내 본심을 말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냥 매뉴얼대로 파악해서 농사 짓는 겁니다. 상대는 대자연이에요. 말 못 하는 땅. 이 세상에 하는 일 중에서 운동하는 거, 야구 하는 거, 그것도 공치고 축구 같으면 공 차고 놀면 돼요. 굳이 인형 탈 속에 있는 내 자존심을 내 세울 이유가 없다고요.
기도하는 것도 집에서 혼자 중얼거리면 돼요. 어렵지 않아요. 그 기도를 이 앞에서 마이크 놓고 한다는 것은 ‘차라리 죽여주옵소서’라는 말과 똑같은 거예요. 왜 나만 간직했던 내 마음을 왜 남 앞에 내놓느냐는 겁니다. 말하는 게 힘들어요. 그러면 국회의원 정치가들은 왜 말 잘하느냐. 그 사람들은 구라잖아요. 구라. 거짓말만 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재미있지요. 자기의 사기에 넘어가 주니까. 자기 팬들 관리하기 때문에.
그래서 연극 하는 영화배우도 쉽고 가수하는 것도 쉬워요. 노래 부르면 된다고요. 사랑은 뭐냐 영어로 하면 ‘Love is a butterfly’라 하고 우리말로는 ‘사랑은 얄미운 나비인가 봐’라고 그렇게 사랑을 몰라도 그냥 노래 불러 주면 돼요. 그러면 돈 주죠. 그리고 재미있지요. 그 무대를 못 잊을 정도로 재미있지요. 얼마나 좋았으면 다른 직업 다 때리 쳐버리고 트로트 가수 하겠어요. 노래만 불러 주면 되니까. 안 오는 건지 오는 건지 모르는 그 안동역이나 부르면서 그렇게 불러내면 되잖아요.
그건 목사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학 해서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인들이 한번 하는 것으로는 안 들어요. 욥에게 고통이 주어져야 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나의 솜씨, 나의 지금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시작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계속 ‘컷’을 하시는 거예요.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라고. “그러면 저는 하나님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옳지. 그거. 그거야.” “나는 이제 예수 안 믿겠습니다. 하나님 없는 거 맞다” “그렇지. 그거. 그거라니까”
“나는 진화론 배웠다. 인류 역사는 47억 년. 우주는 137억 년이고”라고 하는 바로 그거. 그게 본심이라니까요. 다 털릴 때까지 긁어내는 거예요. 다 긁어내요. 낙태 수술하듯이 다 긁어내요. 나라는 것은 다 긁어내는 거예요. 결국 성령이 오게 되면 바로 주님이 나를 속였는데 그 이유가 나와 함께 있는 괴물이 나를 속였다는 사실을 내가 몰랐잖아요.
모르니까 주님께서 마귀와 나와 더불어 함께 다 긁어내서 버리는 거예요. 쓰레기처럼 버리는 거예요. 그렇게 하시는 그분. 그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율법의 완성인데 잘났다는 인간은 다 나오너라. 그리고 내가 보여줄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뿐이다. 너는 뭘 내놓을 건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라고 대답하니까. “그러면 오른손이 범죄 하는데 찍어버렸나?”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죄인데 너 걸렸나?” “그건 아니고...” “그러면 아직 멀었어”
“다 긁어내야 해. 다. 하나라도 어기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죽여버릴 테니까”라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자리, 십자가 자리는 우리에게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무가치한 자리기 때문에 우리한테 그런 거 없었어요.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해도 전제가 뭐냐 하면 ‘내가 가치 있다. 나는 구원받아야지’라는 것을 시작하는 자리인데 그 자리는 없음을 가렸던 가짜의 자리였습니다.
이제는 십자가가 함께 내 앞에 비춤으로써 바로 나로 인해 ‘아니다. 아니다’라고 했던 그분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여호와의 자리입니다. 엘리야는 뭐라고 부르느냐 하면 이렇게 부릅니다. 엘리야가 제단을 쌓아놓고 하는 말이 약속을 부릅니다. 하나님, 지금 850명 달려드는 이것조차도 주의 일에 전혀 지장 없는 하나님 약속의 일부인 것을 제가 인정합니다. 지금 나만 남았는데, 모든 나라가 다 여호와를 버렸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하시는 일에 일부가 됨을 제가 목격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함께한 제자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게 주의 일이었습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18장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 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시니까 빌라도가 하는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어요. 주님께서 답변하지 않으셨어요. 왜냐 하면 진리가 무엇이냐가 바로 진리를 이루는데 하나의 절차이고 따라서 필히 들어가야 해요. 진리가 무엇이냐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나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고 싶어. 당신이 아는 진리마저 내 지식으로 모으고 싶어’라는 그 진리관이 바로 예수님을 죽게 한 진리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겠다는 그러한 복음관이 주님께서 십자가만 구원받는데 바로 부정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이 나오도록 하시는 거예요.
십자가 알아서 뭐 할 건데. 어쩔 건데. 그거 해서 뭐 할 건데요. 십자가니까 구원받는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바로 내 구원받는 데 하나님을 방해하는 괴물의 목소리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통 받는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고 뭘 인정한다고 구원되는 것도 아니라 주께서 다 긁어낸다는 거, 죽을 때까지 다 긁어낼 때 긁어내는 그 작업이 한없이 고맙고 감사 해야 해요. 왜? 내가 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일을 지금 나에게 적용시키기 때문에 나는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이 해답도 없었고 따지고 싶었고 어떻게 일이 진행되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욥이 나중에는 알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 자리가 주께서 십자가 지시는 자리인 것을 몰랐습니다. 저희들도 말로는 십자가라고 하지만 이 자리가 얼마나 십자가를 가리는 자리인 것을 저희들 뒤늦게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나 위주인 것을 명심하는 자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