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교만의 한도200830 이름 : 우리교회 (IP:119.18.87.190) 교만의 한도(욥기 13:14-19)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GNWPKXtpLFw, Hit:1

아빠와 함께 2020. 8. 30. 21:26

교만의 한도 

2020년 8월 30일            본문 말씀: 욥기 13:14-19

(13:14)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

(13:16) 경건하지 않은 자는 그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13:17) 너희들은 내 말을 분명히 들으라 내가 너희 귀에 알려 줄 것이 있느니라

(13:18)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정의롭다 함을 얻을 줄 아노라

(13:19)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이 교만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과해야 될 코스에 놓인 사람입니다. 오늘날 신약 시대에 속한 성도 입장에서 구약에 속한 사람을 무시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그들이 보여주는 그 자리가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소위 교만이라는 규정되는 그 처음 자리를 그들이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가 결코 교만과 무관한 생활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도 내부로 교만을 품고 가는 자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바탕을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도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너무 성급하게 해답을 얻겠다고 신약부터 옆구리로 들어밀어서는 아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아에 대해서 강렬한 집착을 보입니다. 인간이 자아의식이 강렬할 때는,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올 때입니다. 사람이 건강하고 넉넉하면 참으로 누구든지 타인에게 너그러운 사람 행세를 합니다. 많이 가졌기에 조금 손해보는 것은 위기를 자초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도 그러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욥에서 자식이 한날에 다 죽고 그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가도 욥에 직접적인 몸의 고통이 없으니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앙심을 드러냅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욥은 내부적으로 모순이 발생했습니다. 분명 자신은 의롭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갈수록 모르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고통이 왔고 그로 인해 자아의식이 강력해졌고 이로 인해 진실, 혹은 진리를 원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진실, 혹은 진리란, ‘필히 나는 정당하게 구원되는 게 맞다’라는 사실을 증명해 줄 진리가 됩니다.

이는 바로 ‘자 의식’으로 인하여 진리나 진실마저 일방적 자기주의적 성격을 지니게 된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이 고통이 찾아오면 자기편을 들어줄 자들은 모두 진리처럼 느껴져서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들은 이러한 욥의 기대에 부합되지 못합니다.

욥은 사정없이 여기서 ‘나의 구원기준’을 언급합니다. 즉 ‘나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구원못받는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고통’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원기준’까지 도출한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약 성도에게는 이 고통을 어떤 식으로 풀어냅니까? 로마서 14:7-8에 보면,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에서는 진실과 진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부터입니다. 반면에 욥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죽이시면 기꺼이 죽겠습니다”까지 나옵니다. 하지만 자의식이 있는 이상 이것은 교만입니다. 달리 말씀드려서, 진실과 진리의 기준이 ‘나’에 두고 있는 이상, 그 어떤 희생적 제안도, 낮아짐도 교만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이 자의식은 어떤 식으로 제거되어야 할까요? 에스겔 37:2-4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에스겔에 등장하는 ‘인자’라고 불리는 선지자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출발점은 이미 죽어 바짝 마른 뼈들의 집합소입니다. 즉 주님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이미 죽은 자로 규정된다는 말입니다. 이 ‘바짝 마른 뼈’의 특징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겁니다. 죽은 자가 아무리 몸부림쳐 봤자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 주제에 아무리 선한 일을 도모해봤자 산 자가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음이 자기에게 끝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나의 죽음이 나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끝은 주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넘어설 수없다는 점에서 여전히 교만한 자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거짓말하는 거짓 존재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아성 속에는 인간이 해낼 수 없는 요소는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시고, 풍랑과 바다도 잔잔케 하시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들은 너무나도 터무니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이미 자아성을 지닌 인간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에 대해서 변경시켜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간의 자아성이란 이 세상 자체가 자신들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환경으로 다가오기에 발생하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이 세상이 최종 완결된 이상세계로, 천국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습니다. 

뭔가 계속 손질해야 되는 세계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개선작업도 마음대로,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변수가 계속 발생되기 때문입니다. 원인이 타인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을 원망해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본인에게 문제가 있음 여부조차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오셔서 일하시니 이 예수님의 일에 대해서 인간들의 자아적 역량으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해석의 능력 밖의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쪽에서 자아가 날조하고 있는 생각은 하지 않고 예수님의 일 중에서 일부만 챙기면서 예수님에게 존경심을 보이면 좋은 결과가 있을 줄을 압니다.

일방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내려서, “착한 일이 나를 살린다”라고 굳힙니다. 정작 자아의 거짓성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말입니다. 즉 인간의 자아성 내부에는 예수님을 밀치는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신의 거짓됨을 예수님을 밀치는 것으로 감출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리는 것은 인간들의 자기 행위 조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명령이 이미 죽은 자를 살립니다. 이는 곧 모든 인간은 죽은 존재임을 신약에 와서 밝혀집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구원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해 주심만이 구원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욥기 13장 14~19절(교만의 한도)2020083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3장 14~19절입니다. 구약성경 773페이지입니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변백하리라, 사곡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 너희는 들으라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설명을 너희 귀에 담을찌니라, 보라 내가 내 사정을 진술하였거니와 내가 스스로 의로운 줄 아노라, 나와 변론할 자가 누구이랴 그러면 내가 잠잠하고 기운이 끊어지리라”

욥이 얼마나 아팠으면 자해소동까지 벌일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겁니다. 13절에 보면 “내가 내 살을 내 이로 뜯고 물고 내가 나를 죽이고”라고. 내가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그러나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겠다는 겁니다. 내가 이 고통을 내 쪽에서 제거하는 방법은 스스로 자살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아프다는 겁니다.

나보다 고통이 더 심한 거죠.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도 욥처럼 똑같아요. 내 인생을 내가 감당 못 합니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세상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딱딱 정돈되면 왜 우리가 감당을 못하겠습니까. 하겠죠. 하지만 세상이라는 것이 내 뜻대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더 많아요.

전에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누구보고 그런 말씀 드렸어요.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왜? 우리 어머니는 마스크 끼고 돌아다니는 꼴을 못 봤잖아요. 얼마나 천만다행입니까. 마스크 끼고 돌아다니지 않았어요. 그런 세상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했죠. 무슨 이런 터널 같은 것이. 차라리 터널 같으면 좋겠는데 마지막 남은 우리의 세상 상이라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 세상은 우리 뜻대로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그것을 지금 욥이 우리 대신 화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자신의 구원을 언급합니다. 그 대목이 좀 난해한데요. 16절에 보면 “사곡한(악한) 자는 그의 앞에 이르지 못하나니(하나님 앞에 서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나의 구원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욥이 이야기하기를 약간 복잡한데요, 악한 자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서지를 못 한다고 이야기하는 내 생각과 일치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중간에 욥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거예요. 나는 이래도 저래도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나를 비난하고 있잖아. 내 사정도 모르고. 너희들은 왜 하나님께 구원받는 방법을 하나님의 눈앞에서 나를 보면서도 구원을 모르느냐는 이 말이에요.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에게 너희를 사랑해서 구원의 방법을 줬는데 그 방법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방법과 전혀 다르게 아무 죄도 없는 의로운 내가 너희들이 당해도 억울해하는 그 억울한 고통을 내가 왕창 짊어지고 있다는 이 모습이 너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신약시대에서 보기에는 이게 지금 신약적인 이야기를 하고있는 건지 구약적인 이야기인지 지금 계속해서 그 경계선에서 우리에게 비춰주는 겁니다. 따라서 그래도 우리는 욥이 구약의 인물이고 나중에 마지막 친구가 와서 나무란다는 사실을 우리가 미리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구약의 욥이 주장하는 것과 신약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도들의 주장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그 둘 다를 알면 되죠.

미리 말씀드리면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신약에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죽느냐 내가 사느냐는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로마서 14장 8절에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지금 구약에 있는 욥은 지금 죽겠다고 난리예요.

그러나 신약의 사도바울이 만약에 욥을 보았다면 “죽어라. 죽는 것도 주의 일이다. 너는 앙탈 부릴 권한이 없어. 주께서 죽으라고 죽이는 건데. 그러면 네가 주의 구원받은 자라면 주의 뜻으로 그냥 감수하면 될 문제지 무슨 발악을 하느냐”라고 말하면 그만이겠죠. 물론 사도바울이 욥을 보고 선배보고 그런 소리 할 사람은 아니지만 여기서 욥이 신약에서 바로 정답 때리고 ‘나는 사도바울 편이야’라고 성급하게 들어가시면 안 되고요. 욥부터 들어가서 사도바울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욥에 들어가게 되면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겁니다. 인간이 고통이 찾아오면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이 더 강렬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여유가 있고 몸이 건강하면 남을 잘 배려할 줄 알아요. 특히 우리 한국 사람은 서양의 합리주의가 아니고 동양의 유교 사상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조선은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 사고방식이 끝나지 않았어요. 북한 같은 경우에 대표적이고요. 유교적 가부장적 제도가 북한은 유지되고 있어요. 유교적 가부장적 제도. 민족의 태양이신 어버이, 아버지 찾고 있다고요. 그런데 남쪽에 있는 이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천지가 바로 그거예요. 기둥 같은 아버지를 찾고 있는 거예요. ‘나는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라고 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아버지 없어서 천만다행입니다만.

자꾸 아버지를 찾는 거예요. 그분에게 모든 권리를 인양하고 당신 뜻대로 따르겠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특히 신천지만 그렇다고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 국가가 신천지화 되어가고 있어요. 신천지를 그렇게 공격해 놓고 국가 전체가 드디어 신천지화 되어갑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이 없으면 각자 자기 팔 흔들 수가 있어요.

그러나 고통이 오게 되면 어떻게든 나만 살겠다고 나만 지키겠다고 버틸 수밖에 없습니다. 이거는 본능입니다. 그러면 그 고통이 올 때 느슨해졌던 자아감이 갑자기 강렬해져요. 그러면 이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 붙잡을 만한 사람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그 붙잡을 만한 사람을 붙들 때 어떤 마음으로 붙드느냐 하면 ‘당신이 나에게 와서 하나의 진리가 되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붙들어요. 당신이 나에게 진리가 되어 주세요.

인간은 진리를 찾아요. 그런데 진리 안에 뭐냐 하면 지금 내가 자각하고 있는 나를 영원토록 보존할 수 있다는 조건하에 진리입니다. 나를 지켜줄 때 진리예요. 나를 지금보다 더 힘들게 한다든지 나의 마음을 흔들게 만드는 그거는 나는 아예 제껴 버립니다. ‘그건 진리가 아니야. 그건 진실이 아니야’라고 쳐버려요.

욥에게 고통이 주어졌을 때 욥은 전에 고통이 없을 때와 행동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자기 자신을 우선 두지 않고 가난한 이웃을 우선했어요. 자식부터 먼저 챙겼습니다. 어쨌거나 자기를 비웁니다. 욥기 1장에 보면 우리가 욥을 한지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을 텐데 1장 끝에 보면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두신 자도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합니다. 그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닙니다. 저는 저를 챙길 마음이 없습니다”라고 해요. 초창기에는 그렇게 했어요.

아직 까지는 자기 몸에 아픔이 온 것이 아니고 가진 재산이나 날리고 가진 자식이나 죽었을 때는 여전히 이거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까 여기 보면 “찬송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해요. “하나님 잘하셨습니다”라고 상당히 느긋하고 초월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직접 몸에 고통이 오니까 그 고백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다 날아가 버렸어요.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다. 여러분은 다니엘 세친구가 불속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다니엘 2장인가 나오죠. 여러분은 2가지 중에 어느 것이 먼저 떠오르는지 보세요. 다니엘 세친구는 불속에 들어갔다. 첫 번째, 불은 빨갛다. 두 번째는 불에 열기가 있다. 여러분은 둘 중에 어느 쪽이 마음에 확 당깁니까? ‘빨간 불속에 한번 들어가 보지, 뭐’라고 되거든요. 빨간 불속에.

그러나 실제로 불속에는 보는 것이 아니고 느끼는 거예요. 느껴지는 거예요. 열기가. 보는 것이야 보죠. 그건 관찰자로서 주변에서 다니엘의 세친구가 어떻게 되는가 관찰하는 사람들의 심정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나 그 열기에 대해서는 보는 것도 귀찮아요. 후다닥 뛰어 나가버립니다. 목욕탕에서 뜨거운 물만 조금 실수로 나와도 후다닥 피하듯이 우리 인간은 본능적입니다.

이것은 인간 욥에게 고통이 주어진 것은 그리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한계 안에 갇혀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자기 한계. 그 한계가 무슨 한계냐 하면 나라는 것을 나 자신이라는 의식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는 한계입니다. 그러면 그 한계에 대해서 우리가 욥기 13장을 보면서 남의 이야기라고 듣지 말고 내 이야기라고 들으면서 욥의 이야기를 한번 따라 가봅시다.

“내가 어찌하여 내 살을 내 이로 물고 내 생명을 내 손에 두겠느냐,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소망이 없노라”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 말은 앞에 ‘나’라는 말이 두 개 다 있습니다.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이 주어지게 되면 갑자기 없던 ‘나’라는 ‘나는 내가 지키지 누가 지켜주랴’라는 ‘나’라는 자각이 강렬합니다.

강렬하면서 그다음부터 뭐가 생기냐 하면 나를 지키는 그 자체가 이제는 소박한 나의 소망이 되는 거예요. 소망이. 나를 지키는 것이 소망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풋풋하게 “너 나중에 커서 뭐 할래?” “대통령”이라고 뭐든지 말로 할 수 있는데 자기 몸이 아파 버리면 그다음에는 소망이 축소돼요.

“네 소망이 뭐냐?” “빨리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 나도 남들처럼 걷고 싶어요”라고 해요. 얼마나 소박합니까. “나도 좀 더 살고 싶어요” 어디 병원에서 의사가 “당신은 6개월 후 끝입니다”라고 하면 ‘1년 만이라도 더 살아봤으면’이라고 해요. 고통이 오게 되면 자아가 생기고 자아는 자아에게 소망이 생기면서 그 자아는 갑자기 현재 내 고통과 연결시켜서 가장 낮을 수 있는 가장 소박하고 겸손할 수 있는 그 고통으로 머물게 되죠.

제가 군대라는 것을 가봤습니다. 군대에서 인간 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한데요. 군에 갔는데 그 군에 어디서 근무했느냐 하면 저는 근무란 말하기 싫어요. 군에서 놀았으니까. 어디서 놀았느냐 하면 38선 있는 양양 밑에 하조대, 우리나라 38선 지나가는 그곳에 주둔지가 있는데 텐트 쳐놓고 있었는데 그 근처에서 통신부였기 때문에 전선 까는 일을 하다가 저녁 늦게 들어옵니다.

들어올 때 그 근처 농가에서 저녁에 뭘 하느냐 하면 수제비를 끓이는데 그걸 보면서 제 소망이 뭐냐 하면 제대하면 농촌에 가서 농사짓고 수제비 끓여 먹는 게 소망이었습니다. 그 수제비 냄새가요, 그것도 장작 때서 하는 수제비, 장작 때는 냄새와 수제비 끓이는 냄새가 같이 결합이 되어서 올라오는 거예요.

‘와, 이 수제비, 내가 군대 생활 한다고 이 수제비를 못 먹는구나. 내가 나중에 제대하면 취직이고 뭐고 농사 지어서 저녁에는 수제비 끓여 먹고 그거 외에 다른 소망이 없다’라는 그런 생각이 정말로 들었어요. 그 수제비가. 그것도 수제비 끓이는 밀가루가 우리 밀이거든요. 시커먼 우리 밀. 그게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런데 이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소박하게 수제비 끓여 먹는 것도 십자가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에 오면 아무리 네가 낮아졌다 낮아졌다 겸손하다 겸손하다 해도 그것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박살 나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나’라는 자아를 우리가 몰라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로써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희망이고 살고 싶고 하는 그게 다 사치고 욕심이다. 너는 지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십자가를 가지고 일거에 한꺼번에 쳐버립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만이 깨지는 거예요. 남들과 비교해서 나는 저 사람보다 겸손하기 때문에 교만하지 않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제대로 우리가 겸손하려면 십자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수제비 아니라도 라면이라도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계란 없는 라면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 집에 먹어야 할 삼양라면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다 먹고 말 거야. 이 라면을.

이게 바로 신약입니다. 자기 딴에 오늘 본문에 보면 지금 욥이 굉장히 겸손해요. “죽으면 죽겠습니다”라고. “아니야. 너는 죽으면 안 돼. 네가 죽겠다는 것도 교만이야.” “내가 선교사로 파키스탄에 가서 이슬람에게 잡혀 죽겠습니다” “그것도 교만이야. 겸손 아니야.” “내가 모든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라는 그것도 교만이에요. 그게 네 재산이야? 그걸 네가 왜 팔아. “제가 차가 세대가 있는데 벤츠있고 BMW에다가 또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예수 믿고 이제 티코 타고 다니겠습니다” 팔지 마. 그것도 교만이야. 그냥 그 차 타고 다녀.

십자가 알게 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 자체가 다 겸손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 목숨이 내 목숨이 아니거든요. 사나 죽으나 주의 목숨이지 내 목숨이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캡슐머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커피가 담긴 캡슐이 있는데 그걸 기계에 넣게 되면 쭉쭉 커피가 뽑혀 나오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서는 현재 우리 몸이 우리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거든요. 그래서 욥의 몸을 가지고 주님이 지신 고통을 줘서 거기에서 나오는 이 자아라는 커피가 얼마나 독한 자아인지 얼마나 독한 커피인지 뽑아내는 거.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실루엣이에요. 그림자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거뜬히 주께서 우리를 캡슐커피로 사용해서 커피 쪽쪽 뽑아내서 주께서 “아이고 커피 맛있네”라고 하실 거예요. 그 일을 하셔도 우리는 감사해야 하죠.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겁니다.

그 일이 욥에서 같은 구약이지만 그것을 주님께서 어떻게 실시했는가. 에스겔 37장 2~3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데리고 뼈들이 많은 골짜기를 데려갑니다.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라고 되어 있고 3절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Can these bones live?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인자야” 인자는 장차 오실 예수님의 호칭입니다. 미리 에스겔보고 이야기합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고. 다른 말로 하면 “너 뼈 될래? 안 될래?”라는 말이에요. “너 뼈처럼 살래. 안 살래”라는 말입니다. 기왕 죽은 뼈, 그것도 바짝 마른 뼈, 전혀 가능성 없는 뼈로 살래? 안 살래? 라고 그걸 물으시는 겁니다. 인자되신 에스겔이 정답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면 삽니다”라고.

도대체 에스겔은 무슨 이런 배짱이 다 있어요. 내가 몸부림친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태극기 흔든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 바짝 마른 뼈처럼 살게 되면 살아놓고 뭐라고 고백하느냐 하면 “저 바짝 마른 뼈입니다. 바짝 마른 뼈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결혼할 때 바짝 마른 뼈라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53킬로 나갔으니까. 바짝 마른 뼈도 결혼하잖아요. 바짝 마른 뼙니다. 여러분들도 젊을 때는 다 뼈였어요. 지금은 통통하시잖아요. 이게 욕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만큼 누가 살게 했어요. 말씀이 살게 했단 말이죠. 주님이 우리를 살게 했단 말이죠.

이게 지금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중간 절차입니다. 우리는 너무 성급해. 우리는 구약 모르고 신약으로 가서 십자가하고 피 바르고 구원받았다고 이러고 싶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어버리면 우리의 자아는 괜찮은 자아가 되고 가능성 있는 자아가 되어버려요. 반드시 구약을 거쳐서 신약을 건너오게 되면 욥을 통해서는 ‘하나님이여, 나 구원받는 게 맞는데 왜 이리 사는 게 힘듭니까’라고 짜증 부리고 하나님께 달려들고 싶고 그리고 여기 18절에 보면 “나는 누가 뭐래도 나는 의인이다. 내가 의인인 것을 누구와도 변론할 자신 있다”라고 하나님이 인정 해줬다고 이런 식으로 막 나오죠.

그러니까 이 모습이 우리의 출발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출발점으로 보셔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스겔 넘어오면 뼈라고 당장에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약으로 넘어갑시다. 신약에 넘어가게 되면 유대인도 마찬가지고 이방인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말은 구라라고 합니다.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예수님이 한 말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말이 이게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들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서 인간들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래요. 꼭 아셔야 해요. 하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내뱉는 모든 말이 거짓말 되도록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왜냐? 터무니없어도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그래요.

죽은 자가 산다는 것도 터무니없고 예수님이 물위를 걷는 것도 터무니없고요, 바람과 바다가 잔잔해진 것도 터무니없고 죽은 자가 부활한 것도 터무니없고 하늘에 올라간 것도 터무니없고 성경에 나온 모든 일은 터무니없기 때문에 인간들은 성경을 보면서 여전히 “나는 옳고 예수님은 고려할 가치 없다. 그저 이웃사랑이나 하자. 그것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는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못 받아들이겠다”라고 인간 입으로 예수님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본인에게 거짓말 영이 악령이 들어있다는 것을 노출 시키는 방법으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래서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는 ‘어찌할꼬. 그동안 거짓말 치면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이 거짓말쟁이를 나 어떡해 해야 해요?’라는 고백을 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죠. 이미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 주님의 작전에 정통으로 말려들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나는 모든 내 행동과 말이 구라이고 거짓말인 것을 본인이, 내 자아가 그거 보라고 내 자아가 만들어진 거예요.

욥은 고통이 올 때 나 잘났다고 하지만 신약에서 고통이 오게 되면 내가 고통이 오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이 고통마저도 감수해야 할 이것보다 더 센 악한 짓을 하고 있는 거짓말쟁이라는 걸 주님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의 십자가 성령 앞에서 그걸 다 토해 놓도록 하는 겁니다. ‘주님이여, 제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나는 나밖에 모르는 거짓말쟁이인 것을 ‘주여, 타고난 거짓말쟁이인 것을 발각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이게 바로 신약의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약을 통해서 욥을 통해서 다시 성경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생각했습니다. 주님 오셔서 주님 앞에 깨어지라고 주신 십자가, 우리가 이용할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이 우리를 이용한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