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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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 19:39 |
권세와 권능
2020년 8월 2일 본문 말씀: 욥기 12:13-17
(12:13)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계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12:14)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12:15) 그가 물을 막으신즉 곧 마르고 물을 보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12:16)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12:17)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 가시며 재판장을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이 세상에는 인간들의 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의 지혜에 막혀 하나님의 지혜가 순수하게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 즉 이 눈에 보이는 세상과 그 변화에 대해서 인간쪽으로 질서잡은 것과 하나님께서 질서잡은 것이 상호 다르다고 욥은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지금 난데없는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알던 모든 삶의 지혜를 총동원했지만 자신이 고통당할 만한 원인과 이유를 알아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마치 자신이 잘못한 사람처럼 대외적으로 비치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곡해해서 욥에게 비난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습니다.
욥은 치열하게 반격합니다. 이로서 욥이 속해 있는 세계와 욥의 친구가 속해 있는 세계 자체가 이 세상에서 구분됩니다. 요한복음 8:47에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남은 인간들의 모자란 지혜를 마저 채워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소속을 달리합니다.
소속이 다르면 무슨 말을 해도 상대는 못 알아 듣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되면 이 세상에 주어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계략과 명철은 인간들 입장에서 요원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의 편리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이 이해했다고 하는 그 진리를 뒤엎어버리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마치 멀쩡하고 건강하고 유복하게 살아 마땅해보이는 욥이 한 순간은 모든 형편이 뒤엎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보면,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들의 타인에 대한 태도는 다음과 같은 경우뿐입니다. “돼요”, “안 돼요” “하겠습니다.”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하나님에게는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알지 못하는 이상, 이미 이 세상에 범람한 악마의 지혜에 놀아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법조인이 법의 조문을 읽고 그대로 판결에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법조문을 그냥 순수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조문을 적용시켜 판결을 내리는 이 행위는 나로 하여금 더 생존케 하고 나의 행위가 부당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살 궁리가 찾고, ‘나는 결코 이유없는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는 자격자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한, 그 법조인은 대중을 향하여 속이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간은 스스로 거두어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세상을 장악한 악의 권세에 물들여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25-2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알아들었을까요? 아닙니다. 마태복음 26:51-54에 보면,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에 하나가 손을 펴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권세에 빠져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 땅에 출생할 때부터 몸에 배겨든 겁니다. 그 권세 하에서 그들은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논했던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주시고자 하는 것은 ‘권세’가 아니라 ‘권능’입니다. 세상 권세를 째고 돌파가 되는 힘으로서의 권능입니다.
그 권능은 낯설게도 권세를 포기하면서 뒤집기 하는 겁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은 사기꾼으로 보라보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 권능입니다. 사람을 속여서 그 사람이 나의 의도대로 움직일 때, 세상의 모든 권세자들이나 교회 내의 권세자들은 희열을 느낍니다. 몇 푼을 돈을 얻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내 것으로 빼앗는 희열보다 더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그 맛에 들인 사람은 다른 것들은 쾌락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열왕기하 2:4에서, 열리사는 엘리야 선지자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고 끝까지 따라붙입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올려보내고 맙니다. 즉 엘리사는 사람을 따라 추종하는 권세의 망에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엘리야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늘로 갔다면, 엘리사는 굳이 하늘로 올라가지 않더라도, 심지어 이 땅의 사람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어 엎는 권능에 속한 사람입니다.
민수기 21장에서, 광야를 지친 몸으로 통과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와 하나님께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자신들에게 마땅히 주어질 기본적인 조건마저 영 미흡하다고 본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아예 죽게 하십니다. 즉 악마의 권세에 휘돌려 살아가는 모든 인간에게 ‘죽음의 권세’가 철저하게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이고 아프게 하시면서 주님께서 제시한 것이 바로 놋뱀입니다. 이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은 살게 하셨습니다. 자신이 살 권리가 없음을 아는 자들만이 진정, 세상 권세가 아니라 하늘의 권능에 속한 사람입니다. 내가 뭔가 결정하고 시도한 것이 결코 나의 잘남으로 되돌아와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부터 하나님을 속이면서 살아감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ㄴ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2강-욥기 12장 13~17절(권능과 권세)2020080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2장 13~17절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께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그가 헐으신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이지 못하느니라, 그가 물을 그치게 하신즉 곧 마르고 물을 내신즉 곧 땅을 뒤집나니 능력과 지혜가 그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하였으므로, 모사를 벌거벗겨 끌어가시며 재판장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게 하시며”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욥이 언급할 때는 인간들 세계에서 인간들이 서로에게 적용하는 그 원칙과 원리는 터무니없고 하나님의 것을 알게 하지 못합니다. 인간이 자기들이 이렇게 살아왔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가려진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말하기를 인간이 갖고있는 지혜와 권능이 양에 있어서 차이나는 그 정도가 아니고 성질과 성격에 의해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반대가 된다는 그러한 지혜와 그러한 생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의 말이 성경의 욥기에 욥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곧 욥이 하나의 선지자 또는 예언자라고 보시면 됩니다. 욥이 내뱉은 사적인 의견처럼 보이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욥의 말을 그대로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성취시키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28절에 보면 제자들을 부릅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어서 대속물이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 본인이 그만큼 훌륭하다는 그 점만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이 살고있는 이 세상이나 환경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취지와 정 반대가 된다는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제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기존에 속해 있는 그 세력권이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되고 대립이 된다는 것은 너희들이 눈치챘느냐고 묻습니다. 너희들은 결국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거죠.
인간은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환경을 무시하고 개인이 수립될 수 없어요. 인간이 인간성을 그렇게 만들어내는 환경, 그 환경을 여기 25절에는 권세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권세에 눌려 살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신약에 더 나가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그 권세를 이기는 권능, 파워(Power) 싸움인데 이 세상은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권능을 갖고 있어요. 예수님의 권능이 과연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권세를 돌파하는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주님께서는 스스로 증명해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0~11절에 보면 빌라도가 먼저 말하기를 “내가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빌라도가 예수님께 겁박을 하고 협박을 했죠.
제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너는 네가 죽은 줄도 모르느냐. 너 죽은 거야. 넌 생명이 없어”라고 했을 텐데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라고 하시면서 “지금 너가 나에게 권세 있다고 자랑질을 하는데 내 아버지께서 그거 너에게 잠시 허락한 거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너에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상 권세자에게 권세를 주는 것은 죄를 더 키우기 위함입니다. 너는 이제 지옥 가도 할 말 없다는 거죠. 그러면 ‘죄냐 죄 아니냐’를 신약에서는 어떻게 판정 내리냐 하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했고 예수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판가름 나는 겁니다. 신약에서의 구원과 천국과 지옥은 내가 나 스스로 보기에 얼마나 괜찮으냐는 그런 것은 소용없어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하냐는 그것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네가 생각했느냐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해 우리 성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 권세와 대비가 되고 비교가 되고 대립이 되는 식으로 예수님은 살아가셨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예수님을 관찰하면서 이런 질문을 해야 해요.
‘나는 예수님 편인가. 아니면 세상 권세 편인가. 내 위치가 어디인가’라고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조망해 봐야 해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 자체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렇게 언급을 하죠. 맞습니다.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구성되어 있던 모든 권세는 자기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권세가 자기의 생활 모든 구석구석에 이미 파급되었어요. 스며든 거예요.
중국의 산샤댐이 있는데 댐을 설치한 이유가 물이 넘치지 말라고 위에 물이 이제 멈추라고 쌓은 거예요. 물이 그냥 쏟아지면 밑에 경작지 논밭이 다 물바다 되고 농사지은 것이 허사가 되니까 댐을 쌓아서 위에 있는 윗물에게 “이제 댐 넘지 마세요”라고 댐을 쌓은 거죠. 그런데 여기 16절에 보면 여기 15절 끝에 보면 “물을 내신 즉 곧 땅을 뒤집나니”라고 하나님께서 홍수를 주시니까 인간의 권세로 만든 댐이 소용없어요. 물이 댐을 타고 막 넘어옵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거예요. 뭔가 내 의지와 관계없이 자꾸 뭔가 덮치는 것이 있어요. 열왕기하 2장 2절에 엘리야와 엘리사 나오는데 엘리사가 엘리야를 보고 자기 멘토라고 생각하고 스승이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결심을 하느냐 하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지금 엘리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붙들면 불들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긴 거예요. 바르게 살겠다는 거죠.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세상을 쫓아가도 엘리야만 붙들면 나는 훌륭한 주의 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참,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사람은 무슨 재미로 사느냐 하면 남을 속이는 재미로 살아요. 돈 버는 재미도 재미지만 돈 벌 때 그냥 노력해서 돈 벌면 별 재미가 없는데 사기 쳐서 돈 벌면 돈 들어온 것도 기분 좋지만 남이 나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그것이 희열로,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없어요. 남이 나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
그래서 목사로서 가장 힘든 일이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속이지 않는 목사가 되느냐가 제일 힘들어요. 교인들 속이지 않는 목사. 왜냐 하면 교인들은 목사 말에 먹히니까. 여러분들 빼고요. 오죽했으면 요한 1서 2장 27절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라고 이야기했겠어요.
참 가관입니다. 속는 거 보게 되면. 목사 하다가 그만두고 교인들 없다고 접으려고 할 때 목사로서는 미치는 거예요. 왜? 내 말이 먹히는 사람이 있다는 그 희열을 내가 스스로 포기한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요. 그렇게 힘들어요. 돈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야 아르바이트해서 먹고 살면 되는데 내 말에 고개 끄덕이면서 ‘아멘’하는 사람이 내 앞에 없다는 거. ‘아이고, 인간아 왜 사냐’라고 자기가 자기에게 이야기해요.
이렇게 사느니 이게 무슨 재미냐는 거죠. 왜냐 하면 최고의 재미를 맛보았거든요. 속아 넘어간다는 거, 내가 함부로 다룰 수 있다는 거, 그런 대상이 있다는 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누리는 건데, 그 맛을 봤는데 이제 교인이 두 명밖에 안 돼요. 그것도 하나는 마누라고 하나는 아들이고. 이건 속고 아니고 관계없어요.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해요.
미치는 거예요. ‘한국에서 때려치우고 태국에 선교사나 갈까’라고 생각하는 거죠. 거기 사람들은 무식하니까 먹히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는 속아 넘어가는 그 재미를 목사에게 제공해 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엘리사가 엘리야만 붙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사정 봐주지 않고 훌쩍 떠나버려요. 없어요. 누구를 붙들고 말고 할 입장이 아니에요.
이미 산샤댐 위로 악마의 권세의 물이 넘쳐 가지고 온 천지가 악마의 가르치는 지혜와 권능으로 이 세상이 충만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구석구석까지 악성 바이러스 코드가 안 퍼진 곳이 없어요. 모든 구석이 안전한 곳은 없고 모든 구석이 피할 곳이 없습니다. 본인 자체가 바이러스 전파자예요. 본인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이.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욥은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지혜가 13절에 보면 “지혜와 권능이 하나님에게 있고 모략과 명철도 그에게 속하였나니” 이 세상은 그런 권능의 힘에 의해서 유지되고 운영이 되고 관리가 된다는 겁니다. 16절에 보면 “모든 능력과 지혜가 하나님에게 있고 속은 자와 속이는 자가 다 그에게 속했다”는 말은 17절에 보면 모사꾼이, 사기꾼이죠, 그 모사꾼의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재판장이에요.
참 이런 말이 어려워요. 재판할 때 법대로 재판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인간은 법대로 재판할 수 있는 그럴만한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법대로 한다는 것은 법에 나오는 문자를 본인이 해석해서 그걸 선포하는 행위를 말하거든요. 그런데 해석할 때 반드시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나는 이 세상 권세에서 떠나지 않겠다’라는 의도가 담긴 채 법관이 법을 해석해요.
이 재판하고 나는 목이 잘리기 싫다는 말이에요. 이 재판하고 나는 사표 당하기 싫다는 말입니다. 그런 내용이 들어있어요. 남이 죽든 말든 나부터 살고 보자는 의도가 담긴 채 재판하게 되어있어요. 모든 인간은. 모든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한 행위 덕분에 내가 밥 좀 먹고 살자는 행위. 그 살자는 자체가 이 세상 악마의 권세에 속한 것이지 예수님의 권능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게 서로 대립 되어있어요.
민수기 21장에 보면 여러분 잘 아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21장에 보면 홍해 건너 광야로 백성들이 가면서 5절에 보면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라고 나옵니다. 원망하죠. 그들은 이미 세상 권세가 유포되어 있어요. 악성 바이러스가 퍼진 거예요. 원망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왜 내가 사는 게 이렇게 힘겹고 불편하고 괴로우냐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 맞기는 맞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들이 불평하기를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라고 해요. 죽게 하는구나. 누가? 모세와 모세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우리를 집단적으로 죽게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좀 죽으면 안 됩니까? 이유도 뜻도 없이 무조건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신약에 오게 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주지가 돼요.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가 돼요.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저 밖에 세우고 자기는 자기가 애굽에서 가져온 내 몸은 계속 이것을 내 안에 유지하겠다는 겁니다. 계속 내 몸은 내 몸이니까 하나님이 좋은 하나님이 되려면 나를 살려내라는 말이죠. 나에게 희망을 주라는 말이죠. 하나님은 말합니다. “네가 말하는 희망은 도대체 어디서 참고 자료를 빼 왔느냐?”라고.
네가 산다는 것과 장차 올 예수님이 산다는 것과 이것이 같은 성질이 아니에요. 내가 산다는 것은 남들처럼 사는 거예요. 서로서로를 참고로 해서 똑같은 오답을 베끼면서 인생을 사는 거예요. 똑같은 오답을. 들어가 보면 전부 다 오답이에요. 뉴스 보면 전부 다 오답이에요. 정답이 아닙니다. 박원순 시장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하는데 그걸 왜 이야기하느냔 말이죠.
이거 이야기해서 또 우파에게 욕되게 얻어먹었죠. 그걸 왜 이야기하느냔 말이죠. 그걸 왜 이야기할까요? 내가 남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이야기를 왜 할까요? 그걸 주님에게 이야기했습니까. 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까. 똑같이 이미 산샤댐 위로 악마의 권세가 다 퍼져있잖아요. 다 퍼져서 병들고 환자인데 마귀의 마음으로 병들어있는 자에게 호소를 하고있는 거예요.
무능한 그들에게 호소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광야에 있는 백성의 마음이었습니다. 너희들은 광야에 들어와야 하나님 앞에서 나의 본색이, 이렇게 원망과 불평만 해 대는 그러한 애굽의 권세가 여전히 내 안에 장악하고 있고 물들어 있다는 것은 광야라는 그러한 세트 안에서 비로소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죽이는 거 참 쉬워요. 나는 내 몸 살리려고 온 신경과 지혜를 다 짜내고 있는데 주님께서는 악마의 권세 안에 있는 인간은 이미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예레미야 8장 1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뱀과 독사를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리라 하시도다”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매일같이 물리고 있습니다. 모기 파리에게 물리는 것이 아니라 독사가 주는 이 세상 겁박에 협박 공갈에 늘 물리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대들었듯이 지금 마태복음에서는 지금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대들고 있어요. 똑같이 세상 권세에 물들어서 아는 권세가 그것밖에 없어요. 제자들도. 요한복음 8장 47절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나님은 인간을 두 종류의 인간으로 만드는 겁니다. 권세에 속했느냐 권능에 속했느냐. 권세는 이미 세상에 쫙 깔렸고 권능은 예수님에게만 속했고. 따라서 예수님의 권능이 권세 안에 눌려서 맥도 못 추고 있는 숨도 못 쉬고 있는 자기 백성에게 권능이 오게 돼요. 권능이 오게 되면 뒤집는 거예요.
전에 내가 알던 내가 아닌, 전에는 권세에 끽소리 못해서 세상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면서 “저 어때요? 저 어때요?”라고 맨날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 자랑거리 끄집어내는 그 보람으로 살던 내가 이제는 그 사람에게 그 상대방에게 말도 통하지 않는 이야기만 늘어놓는 희한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모세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 원리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창세기 4장 4~5절을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벨과 가인 이야기입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라는 이 대목에서 어려운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을 극히 차별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해요.
그냥 아벨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고 누구는 안 받아주고 받아주는 거예요. 누구는 받지 아니하고 받는 겁니다. 이게 가인과 아벨이 모든 인류의 시작이에요. 모든 이 아담의 개통에 가인 노선과 아벨 노선이 확립되어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뭐냐. 구분 짓는 거예요. 아벨에게 속했느냐 가인에게 속했느냐. 아벨의 제사는 더 깨끗했고 가인은 더러웠다는 그런 거 아니에요.
인간의 눈으로 내가 드린 제사가 하나님이 받을 거냐 못 받을 것이냐는 인간의 혜안으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인간은 세상에 악마의 권세 속에 있기 때문에 자기 딴에 최선을 다했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받아주는 게 아니에요. 가인도 최선을 다해서 바쳤습니다. 성의없이 바친 것이 아니고 성의를 가지고 바쳤습니다. 아벨도 성의를 다해서 바쳤겠지요. 하나님께 드리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성의를 담았느냐가 아니라 받는 쪽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버린 거예요. 이게 권세를 돌파하는 권능입니다.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그 많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자체만 받았다는 이 사실을 아벨이라는 실루엣을 통해서 미리 보여준 겁니다. 이건 지금 어려운 정도가 아니에요. 이건 설명이 안 되는 겁니다.
사람은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님에게 했습니다. 주님이어서 안 했습니다. 주님, 이건 됩니다. 이건 안 됩니다”라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밖에 없어요. 내가 했느냐 안 했느냐. 주님께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 이건 주께 되느냐 안 되느냐. 항상 두 가지밖에 모르거든요. 주님께서는 둘 다를 밀어붙입니다. “네가 하든 안 하든 네가 받든 안 받든 나는 애시당초 그것에 신경 쓴 적도 없다”라고.
“하나님 뭘 했습니다. 안 했습니다”라고 하면 이건 자기가 자기에게 한 구분이에요. 그건 어디서 배웠느냐 하면 세상 권세에서 배운 거예요. 세상 권세에서. 권세에서 배워놓고 결과에 대해서 본인이 주눅 들고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지혜와 권능이라고 하는 것이 고작 그게 다예요. 그걸 지금 욥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몰라도 네가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그냥 하나님은 인간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분이 아니고 뒤집는다니까요. 뒤집기 알죠? 이만기가 씨름할 때 하는 거. 그냥 뒤집어 버려요.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가 내 입에서 나와 줘야 해요. 세상이 모르는 이야기가. 내가 세상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고 세상을 다 알면서도 그걸 속에서 뒤집어서 나와야 해요. 뒤집어서. 그게 성도 아닙니까. 이게 바로 성도가 성도로 살아가는 맛이 아니겠어요. 그맛 말고 무슨 맛이 있습니까?
남들 알아듣는 말 해서 뭐 하려고요? 그러려면 인문학 강좌나 듣든지 하지 교회를 왜 나와요? 못 알아듣게 이야기해야 해요. 못 알아듣게. 그냥 무식해서 못 알아듣는 거 말고. “너의 이 말은 이런 뜻이 맞지? 그 최종적인 목적은 그래서 나는 잘 먹고 잘살고 나는 내 자랑한다는 뜻이지? 그런데 그게 아니거든. 그게 바로 열두 제자가 예수님 말을 못 알아들은 거야. 그게”
세상의 권세자처럼 높고자 하고 성공하고자 하고 출세하고자 하는 그 의도. 어떤 문장을 봐도 어떤 책을 봐도 나 하나 포기 못 한다는 그런 욕심과 탐욕, 그걸 거처로 해서 나온 발언들 그걸 주님께서 뒤집어 버립니다. 그게 악마의 권세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자유함이에요. 지금 그 이야기를 욥이 하고 있는 겁니다.
“나 너희들 이야기 다 아는데 내가 그걸 뒤집겠다. 너는 이런 거 모르지. 그지?”라고 하면서. 욥은 심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자기의 고난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 내가 속해 있는 이 환경 세상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욥은 고통 가운데 간파한 거예요. 찾아낸 거예요.
고통 가운데 내가 살고 싶다고 죽고 싶다고 했지만 내가 살고자 한 것도 의미 없고 나를 죽여달라고 하는 것도 의미 없고. 그렇다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하느냐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주님의 지혜와 권능이 나를 향해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끝으로 히브리서 11장 13~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땅에 있으면서 땅과 대비가 되는 하늘의 이야기를 땅에 있는 우리 입에서 그게 나온다는 거는 우리 자신이 굉장히 신기해야 합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불뱀이 아니라 그보다 더 한 걸로 지금 물려 죽어도 그건 하나님의 적합한 조치임을 받아들여야 해요. 왜냐 하면 아벨은 하나님 때문에 죽었잖아요. 형에게 맞아 죽으나 독사에게 물려 죽으나 그냥 살다가 늙어 죽으나 아무 상관 없어요.
사랑에는 나이가 관계없잖아요. 나이가 숫자에 불과하죠. 마찬가지로 사는 것도 주님의 권능 앞에서 내가 몇 년 살았다 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다만 내 입에서 나도 예상 못 한 뒤집기가 나온다는 거. 그것이 바로 고난 가운데서 천국을 바라보는 성도의 삶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충분히 세상을 알게 하옵소서. 그들이 무슨 뜻에서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저희들이 철저하게 알게 해주시고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죽게 한 권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 권세에서 권능이 더 우세함을 반가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