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과 부활
2020년 7월 26일 본문 말씀: 욥기 12:7-12
(12:7)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12:8)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12:9)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12:10)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12:11)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12:12)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사람 대 사람을 만나게 되면 비교하는 것으로 각자 자기 위상을 정하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 자신이 가진 총역량을 동원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 대 인간끼리의 경쟁이 하나님에게 의미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놓고서 저돌적인 논쟁이 벌어져도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논쟁에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래봤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대와 나는 결국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일에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서로가 만나야 내가 정립되기에 싸우면서도 아쉬운 법입니다. 아무나 나와 말 건네주는 사람조차 없다면 홀대당하는 서러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기존에 알고 지내던 그 그룹에서 내침을 당하는 것이기에 그동안 쌓아놓은 자아정립이 무너지고 새롭게 정립해야 하는 힘든 수고를 해야 합니다. 즉 타인의 나의 가치를 안 알아주면 나의 존재 의미 자체가 무너져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싸우면서도 친구사이가 되는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욥은 연륜의 지혜를 강조합니다.
상대의 지혜를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 지혜라고 거론하면서 욥은 자기에게 있어 세월 헛 먹은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지혜가 나오지 않으니 친구에게 실망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답답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욥과 친구 사이의 지혜는 그저 인간들 사이에 늘 나올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손’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느 편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에 와서 여호와의 손, 즉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연속’이 아니라 ‘단절’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모였다 하면 위계를 세우고 서열을 정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높고 최고의 자리에 대한 집념을 보이게 됩니다.
도전의식을 고취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율법으로 모든 사람의 입을 막는 일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즉 아무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규정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의견을 피력해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인간쪽에서 해명할 수 없는 단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단절로 인해, 인간과 인간들의 의견 조정을 무의미합니다. ‘무차별적인 동질성’을 하나님께서는 발휘하시는 겁니다.
마태복음 3:4-6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있는 지혜의 한도 너머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인간들은 이 위계적 단절성에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인간 대 인간 끼리의 비교나 경쟁은 실용성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연속성을 인정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자기 해석은 선과 악이라는 구조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는 무조건적으로 옳고 타인은 이 잘난 나의 평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됩니다. 이것이 바로 ‘헤아림’입니다. ‘헤아림’이란 ‘헤아리는 나’의 평가에 주도권이 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할 때 나오는 태도입니다. 즉 자신은 남을 평가하는 심사위원으로 당연한 권한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럴 때, 자신의 자기 평가는 당연히 옳고, 그것은 타인을 평가하는 최종 기준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욥에게도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선과 악’말고 다른 기준이 작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단절 뒤의 부활’입니다. 즉 부활의 요소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리라고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활은 여백입니다. 다 설명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욥에게 난데없이 주어진 그 고통이 욥으로 하여금 친구들의 세상 보는 기준은 다른 기준을 적용시키려 합니다. 기존에 선악체제에 입각해서 자신과 타인을 평가하던 그 평가 기준이 더 이상 신약에서는 통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속적’이지 않고 불연속적인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김성수가 부른 ‘당신’이라는 노래)
“내 품에 안기어
곤히 잠든 그대여
어느덧 그대 눈가에도
주름이 졌네
내 가슴에 묻혀
꿈을 꾸는 그대여
야위어진 그댈 바라보니
눈물이 솟네
고왔던 여자의 순정을
이 못난 내게 바쳐두고
한마디 원망도 않은채
긴 세월을 보냈지
난 맹세하리라
고생 많은 당신께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그대를 사랑하리”
이 가사에 나오는 사연을 보게 되면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연속성이 유지됩니다. 전에 아내에게 고생을 하게 해 나는 이제라도 남은 생애를 아내를 위해 살면 만회가 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내용 속에 부활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자신의 잘 잘못을 평할 수 있는 기준점을 본인에게서 도출시키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고통이 이유도 없이 왔듯이 하나님께서는 욥으로 하여금 기존의 인간들의 선악체계에서, 하나님과 악마만 아는 그 영역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선악체계와는 단절이 일어납니다. 중요한 점은, 욥은 더 이상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해석하거나 설명한 권리자로서 박탈됩니다.
고통이란 그냥 이유 없이 주어진 겁니다. 욥이 큰 잘못을 해서 남보다 더 큰 고통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찾아들 욥에 대한 축복도 같은 원리에서 주어집니다. 로마서 8:18에서 사도가 밝힌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나쁜 짓해서 성도에게 고난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슨 연유로 어려움이 오든 상관없이 장차 올 영광은 지금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겁니다. 비교에서 벗어나는 인물들이 새로 창조된 성도라는 겁니다. 항상 따지고 살면, 감사나 고마움이 사라집니다.
그 어떤 형편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의도에 의해 주어진 이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1강-욥기 12장 7~12절(단절과 부활)20200726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2장 7~12절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땅에게 말하라 네게 가르치리라 바다의 고기도 네게 설명하리라,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늙은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 장수하는 자에게는 명철이 있느니라”
욥이 친구들에게 섭섭해하면서 반격에 나서는 대목입니다. 그 반격에 나서면서 욥이 현재 작용했던 사용했던 무기는 무엇인가 하면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에게는 지혜 있어서의 위계질서가 형성되어있다는 겁니다. 세월을 보낸 만큼 허송세월한 것이 아니고 헛산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오래 산 만큼 지혜가 누적되어있고 축적이 되어있고 축적된 지혜가 젊은이들을 가를 칠 수 있는 입장에 있다고 보는 겁니다.
여기에 가르친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보고 하는 이야기가 네가 아는 그 수준은 어떤 수준이냐 하면 내가 보기엔 짐승 수준밖에 안 되고 새 수준밖에 안 되고 저 바다에 있는 물고기 수준밖에 안 된다고 하는 겁니다. 어디 수준도 안 되는 것들이 감히 인생 헛산 것이 아니고 꼬깃꼬깃 조심스럽게 철저를 철저를 기하면서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담으려고 정성을 다하여 인생을 조심스럽게 살아온 나에게 어디 달려드느냐는 겁니다. 욥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사는 우리 입장에서 도대체 궁금한 것이 이 욥의 입장이 신약에 볼 때 어느 수준인가 하는 점이에요. 욥은 자기 친구에게 수준 낮다고 하지만 그 당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직접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그렇고 신약에 있는 성도 입장에서도 그렇고 욥의 수준이 그렇게 확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이 영 들지 않는 겁니다.
그럴 것 같으면 욥의 수준이 낮다는 것을 어떤 대목을 통해서 지적할 수 있는지 그걸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욥의 첫째 문제점이 뭐냐 하면 누구를 하나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너는 나보다 지혜가 낮고 나는 너보다 지혜가 높다’라는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규정 할 때 혼자 있으면 내가 어느 정도인지 몰라요.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자기 주변에 뭐 친구라고 할 것도 없이 어쩔 수 없이 같이 모여야 할 입장이라면 사람들이 누구인지 모여야 할 입장이라면 수련회도 마찬가지고 모였다 하면 너와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가 보이는 않는 수준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정도였었어? 그 정도 가지고 믿음 있다고 나에게 잔소리 늘어놓은 거야? 그렇다면 너 이거 알아?’라는 식으로 나온단 말이죠.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헤아림이라고 합니다. ‘원, 투, 쓰리, 포...하나, 둘, 셋, 넷...’이라고 헤아리는 거. 헤아리는 자에게 주도권이 있고 너는 나에게 헤아림의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옛날 학교지만 선생님이 선생님 위상을 살리기 위해서 아이들에게 말 안 들면 때리죠. 때릴 때 제일 억울한 것이 맞은 데 또 맞는 겁니다. “영어 선생님에게 여기 맞았으니까 국어 선생님은 다른 데 때리세요”라고 할 수도 없고.
제일 유명한 것은 볼을 잡아당기면서 “너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고 하는 건데 그걸 왜 물어요? “너그 아버지 뭐 하시노?” “너그 아버지 이렇게 고생하는데 네가 이렇게 농땡이를 쳐서 되겠어?”라고 패지요. 사랑의 매라고 하면서.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이러한 위상이 없어요. 무차별적인 동일성이라고 하는데 무차별적으로 전부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뭐를 집어넣는가 하면 욥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에 주어진 율법이 있어요. 율법이 주어져 버리면 모든 게 무차별적인 동일성으로 빠져버리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죠. 밤에는 모든 소가 다 검다고요. 아무리 얼룩덜룩 색깔이 있더라도 밤이 되면 그 소가 그 소고 전부 다 새까맣게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보게 되면 “모든 것은 어두움에 있나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유일하게 빛이 빛 됨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인 동일자로 동일성으로 이 땅에 대비되어야 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요한복음 4장에 추수할 때 나와요. 추수할 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빵 사 오라고 보내버리고 본인이 찾아가서 그냥 이렇게 하면 구원시켜준다는 것이 아니라 “야, 알곡아 나와”라고 그냥 일방적으로 알곡이래. 일방적으로. 요한복음의 특징은 주님의 선언이 곧 실제라는 사실이에요. 내 쪽에서 뭘 하라는 것이 없어요. “야, 너 알곡이야”라고 하시면 그냥 알곡이에요. “너 알곡 아니야”라고 하면 알곡 아닌 거예요.
그건 구원 자체도 무차별성이에요. 천국에는 높고 낮고 그런 게 없습니다. 모든 걸 평탄케 하기 때문에. 천국은 동일하게 예수님의 의로만 구원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 더하기 나의 의로운 쪼가리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아마 예수님의 ‘의’에 쪼가리 들어가게 되면 그 사람은 천국에 못 올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은 넣어 주질 않습니다. 문제는 욥처럼 욥의 입장을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데 욥처럼 누구랑 만나면 이기려고 하고 시합하려고 하고 보다 나으려고 괜찮은 존재임을 확인하려는 이러한 나의 습성과 나의 시도를 나 스스로 힘으로 어떻게 너와 내가 똑같다는 무차별성으로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는 점이에요.
이렇게 차별 두는 것을 가지고 위계적이라고 하는 데 그냥 차별을 둘 것 같으면 평면으로 두는 건데 보통 차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높낮이로 둬요. 그리고 위계적이에요. 높고 낮은 거. 더 위는 뭐가 있고 더 위는 뭐가 있고 사다리처럼 그런 식으로 서열화를 시켜서 세상을 구조화시키는 것이 인간 몸에 배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욥도 바로 그러한 실례를 범했어요. “너 같은 수준은 짐승보다 못하다. 아니 짐승보다 더 못한 새보다 못하다. 아니 아니 저 물속에 있는 금붕어보다 못해”라는 식으로 서열화시키는 것은 욥이 평소에 세상을 볼 때 어떻게 보았느냐를 알 수가 있죠. 그리고 욥이 그렇게 서열화를 시키면서 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9절에 보면 “이것들 중에 어느 것이 여호와의 손이 이를 행하신 줄을 알지 못하랴, 세상에 많은 계층이 있고 서열이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살게 하시는 것은 바로 여호와의 손이다”라고 합니다.
이 말을 왜 하느냐 하면 그다음 12절에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네가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전부 다 하나님 손에 있다고 막 먹을 생각하지 마라. 늙은 사람에게 나이든 만큼 지혜 주신 것도 여호와의 손이고 젊은 사람이 지혜가 늙은 사람보다 못한 것도 여호와의 손이니까 너희 젊은 사람들은 아무 군소리 말고 늙은 사람들의 지혜를 고분고분하게 잘 들어야 한다”라고 그렇게 다짐을 하는 겁니다. 기를 팍 누르는 거죠.
그러면 이렇게 욥이 지혜에 있어서 너보다 낫다고 장담하는 것은 단지 나이가 좀 많아서 그런 걸 까요? 그게 아닙니다. 욥은 욥 속에 마냥 욥을 비난했지만, 욥 속에 신약적인 요소 십자가 이후의 요소도 욥에게 합류가 되어있어요. 그것은 어떤 요소냐 하면 바로 연속적으로 연결된 서열이 아니라 욥에게 와서는 이게 단절되어 있다는 겁니다. 절단되어 있어요.
대화가 어느 정도 될 것 같으면 욥의 대화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면 “아이고, 형님 내가 몰라봤습니다”라고 이렇게 나오면 사이가 좋아지는데 친구들이 그렇게 쉽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걸 통해서 욥은 점차 뭘 해야 하느냐 하면 단순히 자신이 몸이 아프다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일부러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몸 아프게 해서 저쪽 사람들과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것까지 나갑니다. 단절된 거.
어린아이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이유가 뭘까요. 아이들이 우는 이유가 단절이 싫어서 그래요. 엄마를 호출 하는 겁니다. 자신 옆에 앞에 눈에 띄는데 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엄마 어디 갔냐는 식으로 엄마를 찾으며 우는 거죠.
지금 이렇게 욥이 자기 몸이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도 아프면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닦달하는 것도 일종의 어린아이가 우는 거예요. ‘너 친구 아니야? 우리 같이 있었잖아. 그런데 왜 요새 너와 내가 말이 서로 안 통하게 되지?’라는 답답함을 이렇게 표현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이렇게 신약적 요소로 단절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반드시 구원에는 부활이 들어갈 자리가 마련되어야 해요. 부활이. 연속되어 버리면 부활이 필요가 없습니다. 우상의 특징이 부활이 없는 신이에요. 우상들의 특징은. 부활이란 것은 짝을 이루거든요. 뭐와 짝을 이루냐 하면 끊어졌었다는 것과 짝을 이룹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가 되었단 말을 처음부터 하나인 것이 아니고 반드시 끊어진 이후에 하나가 된 거예요.
그러면 이 부활 안에는 무슨 요소가 증거가 남아 있느냐 하면 끊어진 증거가 부활의 요소에 이렇게 재료로써 가득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겁니다. 끊어진 거. 끊어졌기에 기존에 끊어지기 전에 저 사람과 친구고 우리끼리는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이것마저 다 끊어졌기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접근한다는 것은 이건 소용없었고, 하나님께서 일부러 끊게 하셨고 끊어진 그 이음새를 하나님 쪽에서 제시해야 이것이 바로 신약에 우리가 알고 있는 참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욥의 자리에서 출발해 줘야 해요. 욥의 자리로부터. ‘내가 안다. 저 사람과 헤어질 수 없다’라는 곳에서 해야 해요. 그게 뭐냐 하면 ‘내 친구 몇 명이다’라고 하는 헤아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아이들과 있고 남편과 아내 만나면서 잘 지내고 있다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남편보고 아내보고 자신보고 “누구세요?”라고 하면 그건 관계가 끊어진 거죠. “누구세요?” “미쳤어요?”라고 이런 식으로 되겠죠.
관계 속에서 부부나 아내나 자식 가운데서 그냥 옛날부터 우리는 결혼을 한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아이는 잘 키웠고 당신은 고생 많았고 뭐 그런 이야기 쭉 하잖아요. 제가 대전강의에서는 그런 이야기 했지만, 아내가 자기 품에서 잠들어 있는데 그걸 보면서 남편이 자꾸 눈물이 나는 거예요. 고왔던 여자의 순정이 이 못난 나를 만나서 망가졌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긴 세월 지나면서 한 마디 원망도 없이, 한 마디 원망도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아내가 많이 여위었던 모양이죠. 그걸 보면서 자기가 가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면 남편이 다짐해요. ‘맹세하리라. 당신을 위해 살리라’라고 모자 푹 뒤집어쓰고 맹세하거든요. ‘당신’이라는 노래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단절이 없어요. 옛날에는 바빠서 못 해줬는데 지금은 잘해주겠다는 이건 단절이 없어요. 단절이 없는 그것이 지금 인간세계 현 지옥 가는 이 세계에 한계입니다. ‘그동안 좀 소홀히 했는데 이제 와서 열심히 하면 만회되겠지’라고 해도 되는 게 없어요. 이렇게 딱 끊어 줌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욥을 친구 자리에서 욥을 다른 자리, 친구들이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미지의 자리로 욥을 데려갑니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내밀의 자리, 비밀의 자리인데 어떤 자리냐 하면 하나님과 악마만이 아는 사실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 인간은 배제되는 자리.
‘욥은 뭐래? 왜 이래?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지?’라는 경우들이 있어 줘야 해요.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 줘야 합니다. ‘나쁜 짓 해서 벌 받았다’라는 이런 거 있으면 안 돼요. 그건 연속성이에요. 그건 선악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선악적인 사고방식 말고 선악적 방식으로 해명이 안 되고 납득이 안 되는 자리, 거기서 뽑아내서 우리에게는 엉뚱한 자리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 몸이 아프다든지 가정이 어렵다든지 뭐 별로 나쁜 짓 안 했는데도 모든 가산이 기울어져 가는 자리, 또는 그 반대로 뭐 한 것도 없는데 땅값이 오르고 가만히 있어도 월 천오백만 원 들어오고 뭐 그런 일은 별로 없습니다만 만사가 너무 형통해서 겁이 나는 자리, 이 자리가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친구들과 있었던 똑똑하고 서열화시켜서 빽빽하게 앉는다는 그 모든 자리, 내가 아는 것으로 율법화 시켜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고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된다고 가르치던 그 자리. 이제는 그 자리가 생뚱맞게 아무 소용없는 자리. 그걸 가지고 여백의 자리라고 합니다.
빈자리가 생겨요. 이제는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내가 설명할 건더기가 없어요.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다른 설명이 필요해요. 다른 해석이 필요해요. 내가 알던 것 가지고 내 인생을 설명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하나님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삼계탕 먹고 난 뒤에 “내 안에 닭 있다”라고. 그 이야기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닭은 먹기 전에 닭이에요. 안에 들어가면 닭이 아니고 죽 되겠지요. 그리고 닭 먹으면 그 사람 안에 닭의 요소가 있긴 해요. 그러나 인간이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내 안에 주님 있으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 달리짐을 보여야 해요.
욥 같은 갈등이 생겨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전에는 내 안을 얼추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도대체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겠어요. 알 수가 없어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되어있어요.
지금 사도바울이 이 복음을 보게 되면 우리가 편하게 이해하게 되면 고생이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견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가 사도바울의 이 고백을 다시 한번 읽어 볼게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여기에서 “생각건대”라고 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본인이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뽑아내지 않는다는 거예요.
자기의 행동과 지금의 고난을 연계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행동을 잘못하고 태도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고난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것은 왜냐 하면 사도바울이 새로운 율법의 자리가 아니고 성령의 자리에 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율법에서는 내 고난을 이런 식으로 나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해석으로부터 내가 단절된 거예요. 단절된 겁니다.
‘고난이 왜 왔어?’라고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형편을 내 식으로 이해 못하기 때문에, 내가 주도권을 쥐지 못하기 때문에 그게 고난이 되는 거예요. 고생한 것만 고난이 아니고 잘 되는 것도 고난이고. 왜냐 하면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내 해석권이 박탈당했다는 그 사실이 바로 이게 고난이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 굉장히 즐거워해요.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목처럼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이 그냥 헛소리고 빈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욥처럼 매일같이 사건이 주어지고 세워질 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할 때 욥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욥부터 시작해 봅시다. 욥부터 시작하면 욥은 일단 연속성과 단절성 두 개를 다 가지고 있으니까 연속성부터 시작할게요. ‘아, 내가 다음부터 조심해야 하겠다. 앞으로 이런 일 터지면 기도 좀 해야겠다. 내가 너무 기도를 소홀히 해서 이런 벌을 받는구나’라는 식으로 온갖 것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없어지느냐 하면 감사가 없어요.
감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백프로 장담합니다. 왜냐 하면 성경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으니까. 감사가 없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거 다뤄서 뭐 할겁니까? 그러면 우선 그것부터 해요. 그것부터 하면서 무엇을 내가 놓쳤는지 ‘아, 고마움과 감사가 날아갔구나. 그러면 내가 나를 해석하는 거 말고 다른 해석이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건 매일 매일 주께서 생소한 것을 줘요. 내가 예상 못 한 하루하루를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내가 이 일에 대해서 해석하는데 손을 떼란 말이죠. 손을 떼면 걱정이 없는데 괜히 아는 척하면서 여백이 있어야 하고 공백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뭔가 다 안다고 똑똑하다고 그 정도 지혜는 짐승들이 아는 거라고 자꾸 남에게 비교하고 이쯤 하면 지혜가 있는 걸로 착각하게 되면 생소한 것 놓치지요. 여백 다 놓치지요.
차라리 오늘 자기가 하는 말 그대로예요. 참새도 물고기도 친히 하나님이 기르시잖아요. 그런데 본인은 왜 본인이 기르려고 해요. 왜 따지려고 하고. 왜 조심스럽게 삽니까? 주께 맡기시면 되죠. 그냥 자기를 맡겨주면 되거든요. 왜냐면 하루하루가 내가 원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생소함과 예상 못 함을 보라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러한 하루하루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지나가는 꽃들 속에서 너의 샴푸 향을 느끼는 거. 어느 노래 제목인데 굉장히 길지요. 이제 이 말씀 하고 마치겠습니다. 욥은 자신의 정장 안에 장례복을 겹으로 입고 있어요. 남들 보기에는 정장인데 항상 자기 안에는 다른 요소,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나는 정장 외피에 지나지 않고 하나님이 직접 다루시는 그 무엇, 아직 하나님 만나기 전이라 욥이 그런 줄 몰라요.
하여튼 저쪽과는 다른 것을 아는데 그게 뭔지를 몰라요. 항상 주님께서 다루시기 때문에 나는 그 안에 이미 죽었다는 마음을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장례 복장을 하고 겉에다가 세상에 나오는 정장을 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모든 것이 감사가 되고 안 따지게 되고 고마움으로 받아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약 입장에서 구약을 보았습니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이런 사도바울의 고백이 의미가 무엇인지를 직접 다가서지 말고 철저하게 욥의 자리에서 출발해서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에 늘 고마워하고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