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한계
2020년 7월 19일 본문 말씀: 욥기 12:1-6
(12:1)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12:2) 너희만 참으로 백성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12:3) 나도 너희 같이 생각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12:4)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의롭고 온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12:5)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12: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은 대꾸는 간단합니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것, 나도 다 안다”. 더 나아가서 ‘너희들이 모르는 것까지 내가 알려주겠다’고 나섭니다. 욥이 친구들의 주장하는 것을 다 아는 이유는, 자신 홀로 사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나올 수밖에 없는 내용들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현상적으로 일어나는 사항을 가지고 하나님을 일을 수집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형통하게 살면 그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닐 것이다.’ 혹은 ‘평안하게 사는 상태는 결코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지는 않는 상태다’라고 이해하면 된다는 겁니다. 욥도 악마로부터 주어진 고통이 전까지는 이런 생각이 옳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욥의 친구들의 주장의 근거를 알고 있는 겁니다.
욥은 그 이상의 경우까지 나아갑니다. 이렇게 되면 홀로 살아가는 욥의 친구들이 따라올 수 없는 지경 속으로 욥은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 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사람들의 상식적인 세상 분석을 뒤로 남겨두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만이 아는 경지까지 알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자기네들 형편은 평온하고 만사 형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욥이 정상 궤도를 벗어났다고 평하고 있는 겁니다. 하등 복잡할 게 없는 하나님 뜻, 즉 ‘나쁜 짓하면 벌받고 착한 짓하면 복받는다’는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겠다는 겁니다. 욥에게 벌어지는 낯선 상황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를 향하여 그들과의 의견 일치성을 끊고 반대로 말해버립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6절) 즉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주시는 그 내용은 인간들의 기존 생각을 반대로 뒤엎는 생각이라는 겁니다. 평안한 상태가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상태인 것을 왜 모르고 있느냐는 겁니다. 너희들이 모르는 이유는 5절에 나옵니다.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즉 재앙을 유발하는 자들의 마음은 ‘평안이 곧 축복이라고 여기는 자’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왜 욥의 생각과 친구들의 생각과 다를까요? 그것은 본인이 나 홀로 산다고 여길 때의 마음과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 실질적으로 주어지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인간들이 단지 이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노르웨이 고원지역에서, 떼를 지어 이동하던 순록 323마리가 몰살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이유는 전기에 감전되어 일어난 감전사입니다. 번개가 323번 쳤다는 말도 아니요 한 번 칠 때마다 한 마리씩 벼락 맞아 죽은 것이 아닙니다. 벼락이 한 번을 치더라도 물로 푹 젖은 땅을 쳐버리니 그 젖은 땅 위를 이동하는 순록 때가 한꺼번에 죽은 겁니다.
오늘날 신약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사람이 이미 심판받아 죽은 겁니다. (고후 5:14) 즉 이미 하늘의 벼락을 맞은 겁니다. 그런데 단독자로 살아가는 자들은 이 사실을 거부하는 겁니다. 자기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본인이 선택하고 결정된 결과라고 여깁니다.
지혜롭게 제대로 대처했기에 이만큼이라도 인생을 버텨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단독자 의식으로 무장된 사람은 욥에게 일어나는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욥에게도 마찬가지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고통을 ‘자기 일’로 여긴 겁니다. 이 고통이 ‘하나님의 일’로 여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겨냥해서 일을 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 쪽으로 손을 써보겠다고 애씁니다. 그러나 ‘뺏은 쪽이 주신 쪽’입니다. 다 가져 다신 분이 실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나의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마저 자기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자기 변명에 나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인간에게 넘겨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을 통해서 일을 성취하십니다. 굳이 인간에게나 욥에게, ‘왜 고통을 주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욥에게 일어난 일은 앞으로 모든 성도에게 공히 일어날 일입니다.
즉 성도는 단독자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그들의 자의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닙니다.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날 우리 자신 홀로보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결하라고 독촉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냥 일어난 일입니다.
자꾸만 반항하고 반발하면 아니됩니다. 이 반항과 반발은 곧 질투심에게 비롯됩니다. 질투란, 내가 갖지 않았는데 상대방이 가질 때 생기는 마음 현상입니다. 질투는 미움을 유발합니다.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질투를 양산하고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입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사도 바울은 세상 사람과 동급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타인이 받지 못한 것이 자기에게 생겼다고 말합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이 복음은 개인이 독점할 게 아니라 세상 만방에 전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 보기에 사도의 이런 태도는 분노를 유발할 발언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는 바를 본인만이 알고 있다니 저런 건방진 자를 봤나!”라고 나올 겁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과 친구들의 형편도 이와 같습니다. 친구란 실은 경쟁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개척하고 계발한 영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신의 새 노선에 편입되기를 원하십니다.
욥과 함께 하시므로서 기존의 인간 세계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읽고 있음을 욥을 통해서 말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점에서 욥은 선지자입니다. 인간이 홀로 사면, 그 지혜로 인하여 본인이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것의 귀한 것을 모르면서 삽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배려로 주어진 것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형편이 욥의 친구의 형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모두가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에 대해 어떤 평가가 결정적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0강-욥기 12장 1~6절(친구의 한계)2020071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2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만 참으로 사람이로구나 너희가 죽으면 지혜도 죽겠구나,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께 불러 아뢰어 들으심을 입은 내가 이웃에게 웃음 받는 자가 되었으니 의롭고 순전한 자가 조롱거리가 되었구나, 평안한 자의 마음은 재앙을 멸시하나 재앙이 실족하는 자를 기다리는구나,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자가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욥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욥의 반격 내용이 이렇습니다. “너희들이 보는 것과 실제 그 사람의 본질은 차이가 난다”라는 것이 욥이 친구들에게 대항하는 무기가 됩니다. 반대로 보고 거꾸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사는 게 평안하고 형통하게 되면 그 사람이 강도 아닌 줄 알지만 형통하고 아무 문제 없는 강도가 있다는 거예요.
만사형통하는데 그 사람은 강도같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왜 너희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 체계에서는 너희들이 포함 안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욥이 말하기를 6절에 보면 “평안한 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느냐?”라고 물어요.
만사형통하고 평안한데 그 평안함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 중에 있고 하나님의 분노 중에 있다고 욥은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나를 공격하는 너희 친구들아 나를 공격하는 너희 사고방식 안에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 그 안에 들어있는가를 너희들이 스스로 한번 돌아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요구하는 것은 뭐냐 하면 형통하고 평안하다고 해서 그게 정상적이라고 평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건 곧 “내가 지금 형통하지 않고 모든 재산과 자식 다 죽고 사정이 악하고 불행하게 산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의 진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너희 친구들이 알고 있는 사고 체계에서 나의 사고 체계로 넘어오는데 그만큼 너희들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단정 짓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합니다. 그 한계를 갖고 있는데 너희들은 나를 모르지만 나는 나도 알고 너희들도 알고 두 개를 다 알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1절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참으로 사람이라고 우기고 있구나. 하지만 너희들이 말하는 지혜라는 거, 나를 충고하려고 동원하는 지혜라는 것은 너희들이 살아 있을 때뿐이지 너희들이 죽고 하나님 앞에 가게 되면 아무짝도 쓸모없는 그러한 훈계를 나에게 하고 있다”라는 거예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인간 자신의 생존 게임에 빠진 사람은 결코 하나님 세계까지 그 생존 게임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뜻도 됩니다. 생존 게임이라는 거 여러분도 아시죠. 최종목표가 둘 중 누가 오랫동안 살아남는가를 게임 한다는 말이죠. 이 세상 자체가 그거니까요. 복 받으면 오래 살고 복 못 받으면 일찍 죽는다는 그 게임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생존 게임에 집어넣은 모든 지혜와 총명과 총기 그런 것 들은 정작 살아 있을 때뿐이지 죽고 나게 되면 아무 소용없고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이 생존 게임에 필요한 총기와 총명은 욥을 통해서 ‘아,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 체계에 기본적으로 문제가 있다’라는 것을 좀 파악하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경험한 그것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이 특이한 사실에 대해서 이것을 너희들의 기준으로 삼고 내가 뭔가 잘못 해석했다는 것을 아는 계기로 삼으라고 욥은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3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있어요. “나도 너희같이 총명이 있어 너희만 못하지 아니하니 그 같은 일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라고 되어있어요.
쥐가 개나 다 아는 이야기 나에게 해도 소용없다는 말이죠. “그거 뭐 뻔한 이야기, 다 아는 이야기, 그건 너희들의 한계야. 나는 너희들의 한계를 넘어섰어. 한계를 넘어서지도 못한 인간이 어떻게 너희들의 한계를 넘어서고 하나님이 특별히 조치하시는 나에게 건방지게 조언을 하고 훈계를 해? 너희들이 아는 거 다 털어볼까? 내가? 너희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해볼까?”라고 욥은 반격에 나서죠.
그래서 욥은 5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의롭고 순전한 자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롭고 순전한 이유가 뭐냐 하면 너같이 그런 엉터리 사고방식 가지고 공격당하는 거 보니까 나는 의롭고 순전한 사람 맞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하다하다 보니까 욥이 좀 너무 많이 나가는 경향이 있어요.
이건 뒤에서 나중에 엘리후라는 친구가 와서 너무 많이 나가버린 그 지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욥을 직접 지적합니다. 욥에게 그렇게 지적한다고 해서 욥기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욥이 순전하지 않다든지 믿음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욥이 몰랐던 것은 욥에게 일어난 고통과 고난이 욥 본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욥이 몰랐던 거예요.
사람이 아프니까, 만약에 이가 아프면 이게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잖아요. 이가 아픈 내가 힘들단 말이죠. 이 말은 주의 일이 사람의 일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해요. 주의 일은 인간의 일로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이걸 오늘날 적용시키면 우리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도 심지어 기침하는 일도 이게 주의 일이지 우리 일이 아니에요.
왜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이 나의 일로 여기는가. 과거 전통과 역사가 내 몸을 휘감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과거의 전통, 이건 허망한 거거든요. 허망한 것으로 자기 자신을 마치 비닐랩으로 꽁꽁 싸듯이 싸매고 있으니까 항상 자기 쪽에서만 관심 둘 수밖에 없어요. 제가 젊을 때 노래 잘 모르는데 자꾸 기억이 나는 게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이라는 노랫가락이 지금 막 나오라고 하는데 오 목사님 노래 부르지 말라고 해서 참습니다.
‘천 번을 접어야만 학이 되는 사연을’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정성을 천 번 정성하면 나중에 종이학이 실제 학이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이면. 999번은 안 됩니다. 999번 했는데 재림하시면 안 됩니다. 999번 했는데 마지막 한 번을 접어야 해요. 반만 접어도 안 돼요.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인간이 나는 어떻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전영록이 그대로 다 보여준 겁니다.
용쓰고 애쓰면 언젠가 좋은 날 오겠지. 그게 바로 절대로 하나님의 일이 사람의 일이 안되고 사람의 일은 절대로 하나님의 일이 되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욥이 친구들에게 난처한 거예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아까 말씀드린 데로 욥이 모르는 것은 뭐냐. 뺏는 쪽이 주신 쪽이에요. 욥의 모든 것을 뺏는 쪽이 그쪽이 욥을 지켜주는 쪽이에요. 욥과 한편이고 같은 편이란 말이죠.
같은 편이기 때문에 욥을 다 거덜 내는 겁니다. 뼈를 발라내듯이 다 발라내는 거예요. “거봐. 너에게 일어난 일이 네 일이 아니고 내 일이잖아”라고 하죠. 나중에 신약에 오면 그게 예수님 일이죠. “욥아 너는 장차 예수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어. 주님의 일을 미리 보여주는 선지자였어”라고 되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요한복음 5장 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 본인을 위하여 쓰인 일이거든요. 욥도 마찬가지고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성경해석 쉽다고 하지 말고 성경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 자신을 해석하세요. 우리 자신을 해석하라고 주신 겁니다. 자신을. 낚시 안 해도 인간 안 바뀝니다. 그냥 조용해요. 왜 조용한가.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낚시가서도 은혜를 받으세요.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고기 잡히는 것도 주의 뜻입니다. 모든 게.
지금 이 이야기하니까 제가 생각나는 사례가 있는데 얼마 전에 노르웨이에서 순록 323마리가 감전되어서 죽었답니다. 그래서 제가 제목을 보고 잘못 생각했죠. 그 동네 노르웨이는 벼락이 자주 치는구나. 저는 이렇게 생각했죠. 벼락 하나가 순록 한 마리를 치면 하나가 죽는 그런 벼락을 생각했죠. 그래서 벼락이 323번 쳐서 323마리를 죽였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벼락이 한번 쳤는데 323마리가 떼로 죽었어요. 왜냐 하면 순록들이 가는 공원에 비가 와서 빗물이 축축하게 고여 있는데 순록 떼가 집단으로 이동할 때 벼락이 어디를 쳤느냐 하면 땅을 쳐버렸어요. 땅을 치니까 축축한 땅에 전류가 흘러서 같이 한 떼로 모여있는 323마리가 한꺼번에 다 죽는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십자가라는 벼락 한 번만 쳐도 이 땅에 인간들은 이미 십자가 앞에 다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미 꽝 하고 십자가 진리는 더이상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이미 확정 났어요. 십자가는 이미 확정 나버립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욥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너는 어디에 편입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너는 어떤 노선에 편입되어 있는가. 그 편입된 노선을 욥에는 어떻게 그것을 보여주느냐 하면 단독자 같이 느껴지는 욥에게 두 층이 분리됩니다. 층이 생기죠. 이게 신약에 오면 간단하게 설명되는데 신약에서는 육이 있는 인간에게 벼락이 오죠. 벼락이 쳐버립니다. 성령이 오죠. 성령이 오게 되면 이건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납득이 안 되는 이해가 안 가는 그런 고백을 내세우는데 뭐냐 하면 내가 단독자가 아니라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이 함께 있다는 정말 남들이 보면 시건방진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이건 본인이 남에게 믿음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조작해내는 게 아니에요. 조작해내는 것이 아니고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낚시하러 가도 거기에서 주님이 함께 낚시하시고 주께서 “아무개야 오늘 몇 마리 잡았느냐?” “135마리 잡았습니다”라고 베드로와 이야기 하신 것처럼 어디를 가나, 화장실을 가나, 등산을 가나, 축구를 하나, 야구를 하나, 어디에도 심지어 거기까지 따라가겠나 하지만 나이트클럽에 가도 마찬가지고요, 룸살롱에 가도 마찬가지고요, 내가 가는 곳에 주님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고요, 주께서 나를 밀어 넣어버리죠. 그 현장에. 그걸 가지고 세자로 ‘현장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감전될 수밖에 없는 벼락 쳤던, 이미 벼락 친 것으로 확정 난,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 확정 난 그 상황 속에 우리를 밀어버리는 겁니다. 누구처럼? 욥처럼. 그렇다면 낚시를 하는 것도 이것이 욥의 고난에 일종이고 골프 치는 것도 고난받는 것에 일종이고 놀러 가는 것도 고난받는 일종이고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태가 주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 않는 사태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들이 욥기를 보면서 여기 혹시 공무원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모임을 가질 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뭐 당연히 그 시간은 늘 비어 있겠지’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건방진 생각이에요. 이건 우리 시간도 아니고 우리 공간도 아닙니다. 인천에 가 있는 집주인이 방 빼라고 하면 지금 방 빼야 해요.
그럼 인천에 가 있는 할아버지가 왜 그 이야기를 안 하느냐 하면 주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이 시공간이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복음 생각하라고. 그리고 우리 자신 생각하라고. 주님 생각하라고. 주께서는 우리를 생각하진 적이 없는 것을 생각하라고. 지금 허락하신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 해요. 감사해야 해요. 물론 기본적으로 우리 목숨이 부지되는 것도 주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욥이 아플 때 욥의 소원은 딱 하나밖에 없었어요. ‘주여, 데려가 주시옵소서. 데려가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못하느냐 하면 친구가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욥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 친구가 어떻게 오해하는가 하면 그걸 우리가 몰라서는 안 돼요. 왜냐면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욥 두 경우를 다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우리가 주님에게 욕 얻어먹을 것은 욕 얻어먹고 꾸중하시면 꾸중 듣고 책망하시면 책망받아야 하니까. 여러분 친구 사이라는 것이 부부도 마찬가지고 친구 사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경쟁자입니다. 친구 없습니다. 경쟁자예요. 인간은 나 말고 누구를 만나도 집안 식구라도 경쟁자입니다. 누나 남동생 사이 경쟁자입니다.
경쟁자 사이에는 어떤 불꽃이 튀는데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고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의 반대인 질투가 발생합니다. 누구든지 타인에 대해서 질투가 발생합니다. 그 질투가 뭐냐 하면 내가 누리지 않는 내가 갖지 않는 소중한 것을 네가 뭔데 네가 갖고 있느냐는 것에 대한 질투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이야기해요. 모든 세계에 대해서 모든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해요. 이 말은 은근히 화를 돋우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뭐냐 하면 너에게 없는 거 나에게 있다는 말이거든요. 네가 없는 거 내게 있다.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친구들아, 너에게는 하나님에게 직접 받은 고통이 없지? 나에게는 있어”라는 말이 돼요. 아직 까지는 욥은 그 정도까지는 이야기를 못 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만나면 그 정도까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네 눈에 보이에는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같아 보이나? 그렇지 않아. 너에게 없는 것을 내가 가졌어. 그런데 그게 아주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복음 하나 이 소중한 것 때문에 자기가 어떤 수난과 어떤 욕을 먹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게 채운다”라고 했거든요.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상을 받고있는 중인지를 고백합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과 동일한 체험을 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그것을 큰 상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뭐라고 오해하느냐 하면 오히려 욥을 오해하기를 욥에게 “우리가 지금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이 질투 나지? 너는 누리는 평안 없고 우리는 평안을 누리니까 네가 시기 나서 지금 화내고 있지? 그게 바로 너의 죄야. 그게 너의 건방짐이고 죄야. 너도 회개하게 되면 우리처럼 이렇게 평안할 수있어”라고 욥에게 그동안 약을 올렸던 겁니다.
그 약 올림에 대해서 욥 12장에 보면 6절에 제가 아까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강도도 너희들처럼 평안하고 너희들이 평안한 것도 하나님이 진노하심이라는 것을 왜 모르나”라고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야기 들어 보니까 친구와 욥 사이에는 화해될 분위기가 전혀 아니죠. 그렇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화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걸 로마서 5장에서는 화해라고 해도 되고 화목이라고 해도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없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화목도 없습니다. 자기 잘난 체하는 것밖에 없어요. 어떤 화목도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자와도 다 화목이 될 수 있어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투 분노 거기에 대해서 이 질투와 다툼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건 결혼을 하게 되면 해소될 가능성이 있어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빼놓고 전부다 라이벌이고 경쟁자입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죠. “나는 결혼해서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너 혼자 집에서 편안하게 잠만 자고 하니까 좋지?”라는 식으로 내 아내를 구박하는 경우 “나도 애 키운다고 힘들다”라고 나오죠.
이게 질투심입니다. ‘내가 갖지 않았는데 네가 왜 건방지게 나 없는 것을 왜 가졌어’라는 식이죠. 그러면 부부 사이가 힘들죠.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런 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된다고 하지만 제가 말씀드려도 불가능한 건데 뭐냐 하면 상대방이 개척한 영역에 내가 합류하는 거예요. 상대방이 개척한 영역에 내가 합류하는 거.
남편이 낚시 좋아해서 맨날 외박하니까 아내가 바가지 바가지 긁다가 생각을 했어요. 다음 날에는 나도 같이 가자. 이거거든요. 남편이 자기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욕망의 결핍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마저 채우려고 낚시를 하는 거예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내게 없는 것을 왜 네가 가지고 있느냐는 겁니다. 인간이 참 못됐죠.
나에게 없으면 너도 없어야 하는데 내게 없는데 왜 네가 가지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런 소리 한다고 그게 마저 채워집니까. 안 채워지니까 자신도 나름대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취미생활이잖아요. 취미생활. 이게 단독자의 모습이에요. 욥의 친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그걸 좋아하지 않지만 나중에는 감사히 여기죠.
욥은 뭐냐 하면 욥은 지금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어요. 그러니까 욥은 거기서 함께 있다는 자체에 대해서 발악하고 있습니다. 옛날처럼 나 혼자 있게 해달라고. 옛날처럼. 나 혼자 있으면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잘하는 그런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약 때 일이고 욥은 구약 때 사람이지만 신약 때 사람을 보여줘야 해요.
함께 있으면서도 고통받는 것조차 그것도 축복이요, 사랑이라는 것까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고 성령과 함께 있으면서도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다른 사람이 말했어요. “저 사람 지금 누구 보고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욥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욥의 친구들은 지금 살피고 있어요. “욥이 지금 누구보고 이야기하는 거야”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단독자가 두 층으로 나뉘게 됩니다. 나뉘게 되면서 내가 전에 소속된 그 소속 말고 다른 소속, 바로 십자가의 노선에 소속되었다는 사실을 욥은 나중에는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단독자로 살 때는 이런 해프닝이 벌어져요. 어떤 68세 된 아주머니께서 아들을 장가보내면서 축의금을 받았어요. 이분은 단독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축의금 이천만 원을 받아놓고 이걸 누가 탐낼까 싶어서 일부러 쓰레기 봉지에다 이천만 원을 담았습니다. 쓰레기 봉지에 담아서 설마 이거 쓰레기 봉지인데 누가 가져가겠나 생각하면서 자기는 안심 푹 놓고 있었는데 본인이 잊어버렸어요. 왜? 나이가 68세이니까. 이제는 깜빡깜빡 잊을 나이거든요.
쓰레기차가 와서 돈 담긴 쓰레기봉투까지 버려버렸어요. 왜? 쓰레기봉투니까 쓰레기려니 하죠. 나중에 자신이 생각해 보니 ‘축의금 받은 거 어디 있더라’하는데 아차 생각하니 쓰레기차가 가져갔어요. 벌써 며칠 지났어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들 장가보냈다는 기쁨도 다 소실되고 본인이 본인을 결정한 결과가 이렇단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경찰에 신고했지요. 신고하니까 경찰이 전화해서 쓰레기차에 전화해서 지금 갖다 버린 쓰레기를 다른 쓰레기와 뒤섞지 말라고 사전에 미리 전화하고 파출소 직원들 가서 30분 동안 뒤지니까 마침내 이천만 원 들어있는 그 쓰레기봉투 찾았어요. 그 아주머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 기쁨이 성경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남들이 하찮게 보는 땅을 우연히 농사짓다 보니까 세상에 거기에 보물이 들어있어요. 보물이.
그 보물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고 땅 주인이 빚을 내서라도 그 땅을 사는 거예요.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볼 줄 아는 거예요.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욥을 통해서 또 오늘날 성령 받은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는 전혀 안 귀한데 하늘에서는 유일하게 귀한 것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너의 일이 아니고 나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이걸 덮치는 거예요.
쓰레기 봉지 안에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귀한 것 속에 우리가 포함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 사실을 감사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욥의 친구처럼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너무 오랫동안 그 식대로 살아가는데 자기 한평생을 다 바친 거예요. 평생을.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것에 평생을 다 바치다 보니까 정작 귀한 것이 전혀 귀해지지 않으니까 입에서 마음속에서 감사가 어느 날부터 뚝 끊어졌어요.
감사가 메말라 버렸어요. 감사가 소진되고 말았습니다. 그저 평안하기를 원하고 그저 행복하기를 원하고 만사형통하기만 원하는데 그것은 이런 일조차 주의 일이고 코로나까지 주의 일인 줄 우리가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 가운데 저를 포함해서 옛날 전에 있었던 평안한 쪽으로 가기를 지금 굉장히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제발 코로나 물러가서 손자 안 키우는 날 오기를, 손자와 떨어지는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그래서 대구 모임 참석하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겠어요.
그러나 이것마저 아직도 우리가 욥이냐 욥의 친구냐를 스스로 파악하게 하는 하나님의 계기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시간을 내 맘대로 조정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할 줄로 알았습니다. 내 마음 당기면 하고 안 하면 그만이고 단독자로 살아왔던 우리, 이제는 그것마저 주께서 허락한 일인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