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강의

피밭

아빠와 함께 2020. 7. 10. 21:09

대전-122강 마태복음27장5절-10절(피밭)20200630-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7장 5절부터 봅니다.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6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7절,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절,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여기 밭이 나옵니다. 밭은 뭐냐 하면 땅이죠, 밭은 땅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신기하게 봐야 될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계시다’ 이것은 안신기해요. 이 세상에 무신자는 없습니다. 신을 안 믿는 사람은 없어요. 무신론자는 있지만 무신자는 없어요. 과학자들은 그 과학이 신이 되고 예술가들은 예술이 신이 되고 전부다 절대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희미하나마 전부다 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이성+α 거든요. 이 점을 좀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인간은 경험하게 되어있고 경험한 것은 그냥 경험이 아니고 추상적 형식화를 시도하게 되어 있어요. 추상적 형식화를 국가적으로 하는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인간이 체험한 그것에 시간이 개입하게 되면 역사가 되겠죠. 민족의 역사, 유구한 역사라 하죠, 경험된 겁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역사 나오죠. 민족 역사의 추상적 이데올로기가 뭐냐 하면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되는 거예요. 추상이에요.

경험에서 추상적인 형식화를 시킵니다. 왜 시키느냐 하면 모든 이성에서 +α, 인간이 생각하는 이성을 한 초점으로 수렴시키기 위해서. 이게 뭐냐 하면 정치거든요, 정치.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이게 나라가 돌아가거든요. 국가 시스템이 돌아간다고요.

그러니까 왕들마다, 대통령마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어요. 좌파가 됐든 우파가 됐든 관계없이.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되면 과거의 역사를 재해석해버립니다. 해석 다시 하자. 역사 재인식하자. 이런 거요. 대통령 나올 때마다, 왕 나올 때마다 역사 다 바뀌어요. 역사 또 바뀌어요, 또 바뀌어.

인간들의 마음은 굉장히 합리적인 것 같지만 절대로 합리적이지 않아요. 내가 기대고 싶은, 내 마음까지 다 던지고 싶은 어떤 절대자, 신적인 절대적인 영웅이 등장했으면 하는 겁니다. +α, 영웅. 그 영웅을 뽑는 게 대선이잖아요, 대선. 윤석열이 할 거냐 아니면 임영웅이 할 거냐. 이름도 영웅이야. 이건 뭐냐 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을 얻으려면 분류된 것들을 통합해줄 수 있는 초월적인 어떤 힘 같은 것, 아우라 같은 것을 모든 국민들은 원하고 있는 거예요. 모든 백성들은 원하고 있고요. 민주주의는 국민이라 하고 전에 봉건주의에서는 백성이라고 하잖아요.

경험한 것을 그냥 ‘나는 어떤 경험했다’가 아니에요. 그걸 추상화시킵니다. 형식화시켜서,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이념이라는 뜻입니다, 이념은 믿음의 대상이에요. 그래서 이 땅에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 땅에 종교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 종교가 있어요. 안중근의 종교는 뭡니까? 대한민국이죠 뭐. 물론 천주교 신자이기도 하지만. 자기는 예수님 보고 싶은 게 아니고 대한민국이 일제로부터 독립하는 그게 보고 싶은 거예요.

이 이데올로기를 현실화 시킨 게 정치죠. 이 정치를 그냥 정치라 해버리면 또 5년마다 선거해야 되니까 아예 선거 없이 그냥 밀어붙일 때 이 정치가 뭐가 되느냐 하면 종교가 됩니다. 대표적인 것 딱 두 개 만 할게요. 대표적인 게 신천지고 하나는 북한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은 종교적이기 때문에. 종교적이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믿고 싶어. 우울증 걸렸다. 우울증 걸릴 때 약은 뭡니까? 정신과에서 약 먹어도 소용없어요. 누구 노래 들어야 돼요? 김호중이 노래 한번 들어야 돼요. 이찬원이 노래 한번 들어야 돼요. 속이 다 풀려요. 수십 년 전에 일본에 있는 아주머니들이 한국까지 와가지고 배용준, 욘사마 찾아오는 게 우리는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아무리 잘 살지만 어떻게 자기보다 나이어린 배용준 보러 여기까지 오느냐.

지금 한국이 코로나를 이긴 것은 트롯트다. 코로나 블루, 우울증을 해소하는 데에 트롯트 만한 게 없다 이 말이죠. 그게 뭐냐 하면 바로 그 사람 속에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 나의 추상을 발견하거든요. ‘나’라는 것이 여기 있는데 나는 어떤 환경 속에 맞을까? 발라드? 아, 이건 아니야. 클래식? 아, 이건 아니야, 그럼 나는 거기서 죽어. 나는 트롯트. 거기서 나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예요.

이게 바로 교회에요. 이게 바로 종교라니까요. 이게 기독교고. 목사 그거 돈만 밝히고. 욕해도 소용없어요. 목사 좋아서 가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은 자기 좋으라고 가는 거예요. 자기 치유하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그 교회 비리 많다. 백날 이야기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아니 본인이 좋다는데 본인이 숨을 쉬겠다는데.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모든 민족에 다 신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별 의미 없어요. ‘신이 존재한다’ 이건 의미 없어요.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오셨느냐’가 더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땅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뭐로 되어 있어요? 땅을 축소해서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밭. 무슨 밭? 피밭. 하나님의 계시가, 구름타고 꿈에 예수님 나타나가지고 암시하는 게 계시가 아니고 땅에 예수님이 지나가면서 어떤 사건들이 나오고 흔적들이 발견될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계시에요.

사람은 추상화하는 기능이 있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굉장히 점잖게 그립니다. 애들보고 하나님 그리라고 하면 그려놓고 보면 전부다 미국 치킨집 할아버지, KFC 할아버지나 아니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다 그려놓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기성세대가 하나님의 자비를 그런 식으로 가르친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나오면서 하나님을 묘사하려고 하니까 인자하신 소 모습으로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 인간의 모든 생각은 반드시 머리 속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picture, 그림으로 형상화합니다. 몽타주죠 또는 이미지. 인간의 모든 체험들은 두뇌세포에 기억할 때 그림 형식으로 이미지화합니다.

그림형식을 이용한 컴퓨터의 소프트웨어가 딥러닝(deep learning)이라고 해서 바로 AI(artificial intelligence)죠. 인공지능은 이런 식으로 감안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고양이냐 개냐 구분하고 또 각도가 뭐냐, 세모냐 네모냐 해서 학습한 것을 되새겨서 또 학습해서 학습의 도를 자꾸 반복해버리면 가장 근사치, 인간이 생각하는 두뇌의 근사치라고 할 수 있는 게 인공지능입니다.

그래서 그 인공지능하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는데 인공지능보고 “지니야, 너 나를 사랑하냐?” 이렇게 물으면 인공지능이 하는 말이 “그건 적절하지 않은 답변입니다.” 실제로요. 김일우라는 영화배우로 보면 나오잖아요. 차타고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혼자 살거든요. 인공지능하고 둘이 살아요. 이게 뭐냐면 인간이 바깥을 볼 때에 어떤 식으로 본다는 걸 다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면 인간은 땅에서 나왔잖아요. 인간이 참조할 건 뭐밖에 없냐하면 땅밖에 없어요. 그러면 땅의 일이 실선이라면 하늘은 점선을 남겨두는 거예요. 땅의 지평 그 너머에 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하늘에 있는 이 모든 내용의 아이디어는, 여기 들어갈 내용들을 어디서 차용하겠습니까? 땅의 미흡한 것을 하늘에서 다 채운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슬람 나라는 주로 사막이 많죠. 그래서 이슬람의 천국은 분수가 있고 또 이슬람 남자들은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곳은 4명까지 공식적으로 아내를 둘 수 있어요. 4명이나 두니까 남자는 죽을 지경이에요. 1명도 감당 못하는데 4명 감당해보세요. 4명까지 되는데 그러면 이들이 가는 나라에서는 여자 몇 명이 되느냐? 남자 1명에 여자가 쭉 둘러서 있어요. 이게 그들이 말하는 천국이에요. 코란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호와의 증인의 천국은 뭘까요? 저 푸른 초원 위에 골프장을 만들어 놨어요.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남진이 천국이라. 님과 함께 천국.

이 말은 뭐냐 하면 땅에서, 생로병사 아닙니까? 불교에서, 고생하고 해봤자 내 욕망을 채울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채우죠. 그 미흡함을 어디서 댓가 얻겠다? 천국 가서 댓가 얻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장례식에 뭐라고 하느냐면 “아이고 이 사람아, 이 땅에서 고생 그렇게 많이 했는데 그 뒤에 부디 저 하늘나라 하나님한테 가가지고 못다한 호강 다 누리게.” 이러면서 이제 우는 거예요.

못 들어갑니다. 천국 그런 사람 안 넣어줘요. 왜냐하면 연속적이기 때문에 안 넣어줘요. 그거 보면 기가 차요. 그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예요, 위로랍시고. “엄마, 기다려 내가 갈게.” 천국에는 엄마, 아빠 모든 혈육 관계가 다 끊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면 요한복음 3장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요한복음 3장 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은 그냥 육이에요.

야구공을 던지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것 같죠. 그렇지만 홈런이라도 어디로 돌아옵니까?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와요.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의 천국은 결국 뭐냐? 인간이 착안한 겁니다. 만들어낸 거예요. 그런데도 왜 교회 갑니까? 이렇게 하죠. 아까 전에 제가 교회 가는 이유를 설명한 것 알겠죠? 모든 인간은 뭘 안 믿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괴로워서 못 견뎌요. 장차 올 불행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뭔가에 의탁해야 약간이라도 안심이 되거든요. 안 그러면 맨날 뭐해야 돼요? 맨날 술이야~ 맨날 술 먹어요. 특히 남자들은 구실 만들어서 친구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술 먹고 싶어서 친구 만나요. 혼자 먹으면 맛이 없거든. 그러니까 맨날 술 먹기 위해서 만나는 거예요. 왜? 이 허전함을 메울 길이 없으니까.

오늘 본문에 자살한 사람 등장하는데 자살한 사람은 누구냐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죠. 여기서 가룟유다와 수제자 베드로를 한번 비교해봅시다. 자, 가룟유다는 스승님을 죽였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베드로는 양심의 가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공개적으로 얘기했죠. 나는 저 예수를 저주한다.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듣는 데서 나는 예수님을 저주한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룟유다는 자살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해요. 본인이 본인을 용납 못하는 거예요. 내가 나쁘다는 것이 내가 싫어. 참을 수가 없어. 내가 선생님을 팔아먹다니 이런 나는 내가 용서가 안 돼.

그런데 베드로는 뻔뻔하기 짝이 없어요. 나는 저주한다고 해놓고 자기는 친구하고 고기 잡으러 에이, 고기나 잡자. 옛날 했던 직업으로 돌아왔습니다. 상당히 뻔뻔합니다. 베드로 천국 가고 가룟유다는 지옥 갔습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복음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개판인 것을 인정해요. 그러나 가룟유다는 내가 개판되는 것을 남이 용서해도 내가 나를 용서 못하겠다.

고집 같은 거 있죠. 그걸 저는 일본말(根性こんじょう)인지 모르겠는데 ‘곤조’ 라고 해요. 곤조가 일본말입니까? 남자는 곤조 있어야 되죠. 여자는 남자 닮아서 같이 곤조 있어야 되고. 남자는 힘으로 여자를 때리잖아요. 여자는 말로 남자의 마음을 후벼 팝니다. 일종의 폭력이에요, 말로 후벼 파요. 왜? 같이 곤조가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존심에 살고 자존심에 죽고. 내가 돈 없는 것도 용납하고 내가 남한테 욕 얻어먹는 것도 용납하지만 내가 나를 용서 못할 때는 죽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제가 아까 강의할 때 이러한 일이 누구로 인하여 유발된 거예요? 전부다 누구로 인하여 유발된 겁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게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 때문이에요, 예수님 때문에.

따라서 인간 대 인간 관계는 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간 대 인간 관계에서는 죄가 성립되지 않아요. 남을 용서하지도 마시고요, 남에게 용서받지도 마세요. 누구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 아무도 없고요, 사람한테 용서받아봐야 그 용서는 효력 없어요.

모든 죄는 예수님이 개입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개입할 때. 가룟유다가 양심껏 한 게 남들 보기에는 뭐가 그렇게 죄가 되겠어요? 가룟유다가 죄 같으면 그럼 노무현은 뭐에요? 부엉이 바위에 올라가서 자살하고 그게 뭐에요? 대단한 의인되잖아요. 베드로가 배신했죠?

그렇다면 일제시대 때 일본제국주의가 평양에 있는 목사부터 전국에 있는 목사들보고 뭐하라 했습니까? 황국신민이라 해서 신사참배 하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예배시간에 형사와 경찰이 참석해가지고 예배하는데 먼저 황국신민의 도리를 다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종교라는 것은 나라가 있고 난 뒤에 종교가 있다는 거예요. 나라가 없으면 뭐도 없다? 종교도 없다는 거예요. 현재 그 정책을 쓰는 나라가 이 대한민국 근처에 있죠. 하나는 북한이고 또 한 나라는 중국이죠. 모든 종교를 공산당이 다 쥐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땅의 일은 절대로 하늘로 가는 게 아니고 땅의 일은 어디로 마감된다? 백날 뛰어봐야 벼룩이다. 땅의 일은 땅의 일로 해결해야지, 정치적으로 해결해야지, 신이 도와주고 이런 건 없다. 라고 이야기해요.

최선의 노력을 할 때나 하나님이 뭐 도와주고 말고 하지 노력은 안하고 신에게 갖다 빌면 네 일이 되나? 이러거든요. 그 말 맞아요, 안 맞아요? 그 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노력은 안하고 기도하면 뭐 만사가 형통됩니까? 제 말 맞아요, 틀렸어요? 둘 중에 하난데 이야기해보세요. 맞지요! 기도한다고 일이 안되고 노력해도 될까 말까다 이 말이죠. 이게 맞는 이야기거든요.

맞는 이야기인데 왜 기도합니까, 그러면? 인간이 지가 노력하는 게 머리로는 맞는데 왜 기도해요? 아까도 얘기했죠? 이성+α, 더 추가된 요소가 있다는 말이죠. 대구 말로 단도리(段取りだんどり?순서,절차)라는 게 있어요. 단디 해라. 노력도 하고 그 다음에 기도도 하고. 고3되었으면 지가 공부도 하고 그 다음에 교회 가서 엄마가 기도해주고, 그래야 성적 오른다. 이게 지금 너무나 합리적인 의식이죠, 합리적인 의식이다 이 말이죠. 땅에서는 이게 맞는 이야기에요. 그리고 성경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짜 기도란 ‘나를 잃어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준 기도거든요. 사람이 기도를 해야 될 이유가, 처음에 기도하게 되면 무슨 고민거리가 있어 기도했죠. 내 안에 고민거리를 집어넣고 아까같이 노력만 하지 말고 도저히 안심이 안 되니까 하나님이여, 내 기도 응답해 달라 하겠죠. 그러면 기도하기 전에도 나와 고민은 함께 있고 기도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으면 고민도 함께 있죠.

그런데 여기 누가 주입됩니까? 예수님이 개입되죠. 자,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이 개입되면 그 기도는 뭐가 된다? 예수님이 개입되어야 뭐가 형성된다고 했습니까? 죄죠, 죄. 기도하는 게 죄가 되는 거예요. 헌금하는 게 죄가 되고 예배하는 게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죄가 아닌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기도에 개입해버리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어떤 일이 되느냐 하면 다 시시한 일이 되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지난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귀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너의 이름이 생명책 명단에 있다는 것을 더 기뻐하라 (누가복음 10장 20절,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그 말은 구원이라 하는 것은 네가 간절히 원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명단, 리스트에, 책에 있어야 그게 구원이 돼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 명단이 천국에, 합격자 명단에 있다는 그 생각만 해도 진짜 차타고 오다가 찻길이 좁아서 차가 빠져도 걱정 안 해요.

사람들이 고민이라는 게 왜 생깁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구만 쳐다봐요? 계속 나만 쳐다보니까 계속 고민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래도 옛날에 바쁠 때는 나 쳐다볼 시간이 없어가지고 그때는 고민할 시간이 없어서 고민 안했는데 이제는 일 다 없고 혼자 있으니까 망상과 상상만 하는 거예요, 상상만. 걱정 근심만 계속 자기가 생산해 내는 거예요.

기도를 하는 가운데서 기도를 할 때에는 내가 들어가죠. 고민거리 이만큼 해서 배불룩이처럼 들어가죠. 주님께서 개입하시면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서 내가 죽어 없어져야 될 존재라는 걸 알 때 나를 잊어버립니다. 나를 잊어버리면 가지고 있던 고민도 같이 날아가 버려요. 이건 고민거리도 아니었던 거예요. 왜냐면 인간은 주시는 대로 살기 때문에. 햇빛과 공기를 언제 고민해서, 기도해서 얻었습니까? 비 오는 것도 기도해서 받았어요?

인간의 발자국, 걸음 걷는 것도 주님께서 인도해야 간다고 예레미야에 나와 있습니다 (예레미야 10장 23절,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따라서 누가 죽고 사는 것도 그 사람 뜻이 아니에요. 주께서 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이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잊는다는 말은 내 생각과 내 이성과 내 판단과 내 결정과 내 선택이 같이 다 날라가 버리는 거예요. 고민이라는 것은 내가 선택을 했기 때문에 고민이 되는 거예요. 내가 뭔가 결정을 했기 때문에 될지 안될지 걱정이 나오는 겁니다. 나를 잊어버리면 주어진 모든 것이 감사와 고마움이죠, 고마움.

김호중이 불렀던 노래, <고맙소>라는 거 있잖아요. 그 가사를 한 번 보세요. 나는 남한테 잘해주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상처만 주네. 상처만 준다는 거예요.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나에게 상처만 주네.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몰랐나보다.

고맙소
김호중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질 않아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술 취한 그날 밤 손등에 눈물을 떨굴 때
내 손을 감싸며 괜찮아 울어준 사람
세상이 등져도 나라서 함께 할 거라고
등 뒤에 번지던 눈물이 참 뜨거웠소
이 나이 되어서 그래도 당신을 만나서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못난 나를 만나서
긴 세월 고생만 시킨 사람
이런 사람이라서 미안하고 아픈 사람
나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남겨진 세월도 함께 갑시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늘 사랑하오
고맙소 고맙소 늘 사랑하오

진심을 다했는데 거기서 상처를 주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밉겠어요, 안 밉겠어요? 부도 나봐야 알지만, 사기 당해보면 밉죠. 내 평생이 다 날아가니까. 하찮은 네 인생 살리겠다고 내 인생이 다 날라가 버렸으니까 이거는 분노의 끝이죠.

그게 바로 가룟유다에요. 3년 동안 예수님한테 잔뜩 기대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여기고 살았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구원자가 아니고 맥없는 존재였어요. 맥이 없어, 아무런 힘이 없어. 결국 가룟유다나 열두 제자가 예수님을 믿은 게 아니고 예수님께 있을 것 같은 힘, 힘을 믿은 거예요. 존재의 힘, 생존의 힘을 믿은 겁니다. 저분이면 생존하고 죽어서는 구원받는 힘이 있을 거라고 믿은 거예요. 이게 무슨 일이다? 땅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하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건 전부다 상상한 거예요. 땅의 일에서는 예수님은 하찮은 존재에요. 힘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원하는 힘은 전혀 없어요, 주님에게 없어요. 주께서 우리한테 하는 것은 “같이 죽자” 이것밖에 없어요. 같이 죽자 또는 죽어라, 이 인간아. “주여, 몸이 아픕니다.”, “죽어라. 죽어서 빨리 제대해라.” 그러죠.

이게 우리가 뭔가 건사하고 있고 살만하니까 이런 이야기를 웃고 치우지만 참으로 아무것도 없고 죽을 지경에 있는 사람한테는 내 명단이 주님의 생명책 명단에 있다면, 그까짓 거 내 목숨을, 자살하면 안되지만, “내 목숨을 주께서 앗아간다 할지라도 감사하겠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내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예수가 아니거든요. 오히려 내 소원이 죄였음을 알려주는 주님이에요. 내 소원이, 내 희망이. 내가 기대하는 모든 것, boys be ambitious 희망을 하는 그 희망 자체가 죄라는 사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만 하늘의 일은 우리가 상상한다고, 쳐다본다고 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개입했다. 그래서 땅의 일과 하늘의 일 중 땅의 일이 많지만 땅의 일에 하늘의 일의 일부가 들어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피밭’이 되는 겁니다, 피밭.

여기 10절 끝에 한번 봅시다.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 예레미야가 그런 이야기 했다는 거예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 그러니까 이게 뭐냐? 땅의 일은 하나님께서 조종해서 반드시 땅에서 벌어질 일. 사실 ‘땅의 일>하늘의 일’보다는 ‘땅의 일=하늘의 일’이 더 나아요. 땅의 일이 곧 하늘의 일이에요. 우리가 밥을 먹고 하는 것도 주의 일이에요. 주께서 허락하신 일이에요. 그만큼 우리가 사는 것도 주께서 은혜를 줘서 살아가는 겁니다.

따라서 내 일은 없죠. 주의 일은 있죠. 내 일은 없는데 우리는 내 일이라고 우기니까 그러면 내 일 위에다가 덮칩시다, 주의 일을. 주의 일을 덮쳐버리면 내 일은 졸지에 죄가 되고 주의 일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그래서 주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죄를 뭐로 바꾸기 위해서입니까? 죄를 의로 바꾸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일을 죄라고 여깁니까, 안 여깁니까? 안 여기죠. 그래서 주께서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너의 일이 곧 죄라는 것을 해줘야 죄 있는 자리에서 비로소 의가 나오거든요. 죄가 되어야 의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죄라는 인식이 없으면 의라는 인식도 그다지 반갑지 않아요.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주일 낮 설교에 한 기억이 나는데요.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 예수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 욕하면 별로 기분 안 나빠요. ‘뭐 불신자니까’ 하지만, 내 욕하면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나한테만 민감하고 나한테만 예민한 거예요, 평소에. 그게 그러니 가룟유다나 베드로나 우리랑 다를 바가 전혀 없죠, 똑같죠. 그런데 그들이 누구라고요? 열두 제자들. 가룟유다 빼놓고 나머지는 다 구원받았어요, 성령이 와서. 열두 제자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열두 제자가 예수님한테 교육받고 인간된 줄 알지만 교육받아서 될 인간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교육받아서 될 인간은 없어요. 이 땅에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교육받았다고 개선될 인간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교육을 받게 되면 여기서 정보, 지식이 더 추가되죠. 지식이 추가되면 인간은 여기에다가 자기 수정이 들어갑니다. 수정을 뭐라고 하느냐면 칸트라는 철학자에 의하면 ‘반성’입니다, 반성. 인간은 반성해요. 반성하는데 반성은 누가 합니까? 내가 하죠. 두 번째, 반성 했다 안했다를 누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하죠. 그러니까 이건 반칙이 되는 겁니다. 모순되잖아요. 제3자가 이야기해야 되는데 본인이 반성했다고 얘기하면.

이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회개도 마찬가지에요. 회개했다, 안했다 누가 결정합니까? 본인이 결정해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너 회개했구나.” 할 수 있잖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건 그냥 정보고 지식이라니까요. 어떤 학생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아, 너 참 천재다.” 그러면 얘가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니까 천재라고 비로소 아는 겁니까, 천재 될 생각도 안했는데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니까 천재라고 아는 거예요? 안 그러면 평소에 천재 이야기를 듣는 순간 천재라는 반응을 할 수 있는 기본 잠복되어 있는 성질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있는 겁니다, 인간은. 그 잠재성이 있는 거예요.

계속해보겠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었습니다. 가룟유다가 죽을 때 목매달아서 죽었습니다. 나무에 목매여서 죽었어요. 그런데 가룟유다가 죽기 전에 은 30냥을 받고 예수님을 팔았거든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왜 팔았느냐? 이게 정치적이에요. 예수님을 호산나 하고 많은 군중들이 따랐잖아요. 따랐으니까 이 정치하는 사람들이 그냥 예수님을 공격해버리면 반란 세력들이 형성될 수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 집단 공동체 내부에 배신자가 있으면 이건 외부에서 안쳐도 배신자가 예수를, 자기 선생을 팔아먹으니까 문제가 조용하게 해결되거든요. 배신자로 나선 것이 가룟유다였다 이 말이죠. 미리 결탁해서 밤중이라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뽀뽀하는 사람이 나의 스승입니다. 하고 그 스승을 잡으면 됩니다. 라고 한 거예요.

이런 사실을 예수님이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다 알았죠.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진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의 모든 걸음걸이부터 모든 것은 하나님이 모르는 게 아니고 다 알고 있다. 왜? 땅의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이 관여한 거거든요. 관여하는데 인간이 생각하는 하늘나라, 하나님 그런 건 가짜입니다. 그런 건 없고 지상에서 가룟유다가 은 30냥 받았는데 자살했으니까 도로 주면서 우리는 이건 안 받는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더러워서 안 받는다.

그럼 뭘 하느냐? 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나그네들이 개종된 유대인, 이방인인데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와가지고 성전 구경하러 왔다가 잘 수도 있고 심지어 병들 수도 있고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 장례터의 장지로써 그것을 구입한 거예요. 이것을 피밭이라 하고 나그네 묘지로 삼았는데 7절에 보면, 나그네 묘지 삼는다는 이것이 바로 스가랴 11장 13절에도 토기장이, 은 30냥 나오거든요(“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리고 예레미야 18장 2절 토기장이에 대한 게 나와요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시기로”). 여러 군데 나오는데 예레미야 19장도 나오고 예레미야 32장에도 나오는데 이게 의미하는 바가 뭐냐? 도대체 왜 이렇게 하느냐?

가룟유다가 죽었죠,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가룟유다가 죽어서 피밭이 되었다. 어떤 지명을 갖게 되요. 지명을 받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밭은 밭인데 밭이면 작물을 키워야 되는데 피밭이라 했으니까 이 피를 생각할 때마다 누구를 생각하느냐 하면 죽은 예수님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전에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서 자살했다 라는 이야기가 이 지상에 계속 남겠어요, 안 남겠어요? 계속 남겠죠? 그렇죠?

그럼 더 확장시켜보면 가룟유다의 돈을 받은 자가 누구냐? 그건 그 당시에 정치하는 사람들이었죠. 또 그 파급효과가 더 커졌죠? 그러니까 이 가룟유다를 중심으로 해서, 계속해서 연결, 연결 되어서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럼 이 정치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다. 그들이 누구냐?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 역사까지 전부다 연결이 돼요. 예수님 한분에 의해서 유발된 그 일로 인하여 이 지상은 새로운 의미로 완전히 여기서 뒤덮이게 되는 겁니다. 덮이게 돼요, 새로운 의미가.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여러분 아는 거 해봅시다. 땅에서 와서 뭐다? 땅으로 가죠. 모든 일은 땅입니다. 왜? 모든 게 눈에 보이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다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개입했죠. 개입하게 되면 땅의 일에 그다음에 뭐가 됩니까? 주의 일이 겹치게 되죠, 땅의 일에 주의 일이 겹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라든지 주님의 뜻이라든지 이 모든 일은 하늘에서 찾아야겠습니까, 땅에서 찾아야 되겠어요? 당연히 땅에서 찾아야 되요. 땅에서 찾는데 어떤 일을 땅에서 찾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배신 때리는 거, 주님에 대해서 반항한 거, 주님에 대해서 불신한 거. 이러한 사항을 찾는 것이, 찾으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방금 정답 나왔는데. 그렇죠~ 아, 이거 할라고 여기까지 왔다. 이게 바로 ‘나’에요, 나. 나는 나밖에 몰라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고요. 가룟유다를 남으로 보지 마세요. 베드로를 남으로 보지 마세요. 그 사람이나 우리나 다 같은 아담의 혈통입니다. 똑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나는 내 생존이 우선이에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은 나중 문제에요. 지금 은행 통장에 돈이 얼마 남고 펀드, 주식 투자한 게 오늘 또 내려간다. 지금 모든 관심사는 내 중심의 원을 그린다니까요, 내 중심의 원을 그려요.

강원도의 90넘은 할머니한테 “할머니, 5월18일이 무슨 날인지 압니까?” 물으면 “5·18? 내 손녀 생일인가?” 이렇게 한다고요. 왜냐면 그 할머니는 강원도 홍천이나 이런 골짜기에 텃밭 가꾸는 할머니는 감자 키워서 읍내에 나가서 팔아먹고 다시 집에 오고 지금 이것밖에 모른다고요. 자기 생활반경이 곧 생각의 반경이에요. TV있어도 드라마보고 자다가 뉴스보고 뭐 안 봐요. 자기 생활반경이 그 범주만큼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럼 우리 인간이 넓히자. 나는 국제정세에 대해서 코로나, 트럼프가 어떻고 북한이 어떻고 하지만 기껏 해봐야 육에서 친 사고방식은 어디로 떨어집니까? 육으로 떨어질 거예요. 결국 육으로 떨어진다는 말이죠. 나로부터 시작한 모든 것은 도로 나한테 부메랑처럼 돌아와요. 저게 나에게 이익일까? 저게 나에게 손해일까? 이거 생각해요.

서울 지하철에서 마스크를 썼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마스크를 쓰기는 썼는데 입을 안 가리고 턱에 걸친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마스크 똑바로 올리라고 잔소리를 했더니 니가 뭔데 나한테 잔소리하느냐 내가 잔소리들을 군번이 아니라고 해서 둘이 싸우고 경찰까지 출동했다는 거예요. 그 현장에 여러분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집사님, 그 현장에 집사님이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이야기해보세요. 이건 응용문제다, 오늘 강의의 응용문제에요. (그냥 보고 지나치죠) 그렇죠! 그게 내가 개입하는 게 뭐가 된다? 이익이냐 손해냐를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당한 분이 보니까 우리 엄마라. 어떻게 하겠어요? 달려들어야죠. 왜? 나라는 생활환경에 엄마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정도로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영역, 나의 생활필드, 장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 피밭, 또는 육에서 육, 이 모든 일을 바로 가룟유다, 그리고 베드로도 마찬가지에요,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은 무슨 판이다? 이 세상 전부가 ‘지구’다 라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피밭’입니다. 예수님을 팔아먹은, 예수님께 대든, 예수님을 미워한, 예수님께 도전하는 세력이 장악하고 있는 세상,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피밭이에요. 오늘 두 번째 제목은 <피밭>으로 하겠습니다.

자, 그 다음. 그러면 이 피밭에서 어떤 사람만 구원받습니까? 그 문제가 되어야 되요. 전체가 피밭이고 모든 인간은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고 거기서 못 벗어나요. 나한테 이익이 올 것이냐 손해가 올 것이냐 그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뉴스 보면 어떤 용감한 학생이 도둑을 잡고 강도를 잡는 거 나오잖아요. 그러면 부모는 뭐라고 합니까? 너 바깥에서 나대지 마. 너 나대면 안 돼. 그냥 못본 척 지나와. 그렇게 가르치죠. 그걸 자슥 사랑한다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게 할 때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가 어떻게 해서 천국을 가게 되느냐? 모든 것이 이정도 밖에 안 되는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피밭 하는데 여기 가룟유다만 개입된 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전부다 관여되어 있죠. 그 당시 정치인들 다 관여되어 있죠.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땅에서부터 땅으로’ 맞아요. 그 다음 ‘육으로부터 육’ 맞습니다. 다른 용어로 하면 ‘인간으로부터 인간으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세계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것이 인간세계고 육의 세계고 이런 겁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아내고 대항하고 그런 마귀 짓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데 그러면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그게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10절 끝에 한번 봅시다.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그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주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라고 할 때 여기서 ‘내게’는 누구냐?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이죠. 여러분들이 선지자, 예레미야라 칩시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경험하지 못하지만 주께서 땅에 오셔서 하실 일을 예레미야한테 이야기했죠? 그러면 예레미야는 입을 통해서 그걸 외치겠죠.

주께서 내게 하게 한 것에 대해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믿던 사람들은 비로소 나중에 성령 오게 되면 그걸 알까요, 모를까요? 알죠. 알면 자기 살림살이가 나아집니까? 어떻습니까? 자신에게 이익이 옵니까? 아니죠. 그러니까 내 중심은 내게 이익이냐, 손해냐 하다가 무엇이 날라가 버려요? 내 자리에 누가 들어옵니까? 주의 말씀이 들어와버린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하면 내가 한 것은 아까 나 위주밖에 없죠. 어떤 행동에 나설 때 내 손해일까, 이익일까만 생각하는 거예요.

남편이 운전하다가 옆차 하고 약간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때 주로 조수석에 앉은 부인네들은 뭐라고 합니까? 팔을 잡아당기죠. “아이고, 술 먹었다 치고 그냥 집에 갑시다.” 하고 잡아당기죠. 그렇지 않은 부인도 간혹 있기는 있지만. “그냥 갑시다 거, 우리가 잘못했다 하고 그냥 갑시다.” 하잖아요. 왜? 따져서 이익이냐 손해냐 계산하는데 지금 바쁜데 바쁜 시간도 돈이잖아요. 그런데 그 남편이 예를 들어서, 성경에 없지만, “아니야 이것은 어젯밤에 계시 받았어. 어느 차와 박을 것이라고 주께서 계시했어.” 그러면 그 자리를 못 떠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내가 주의 말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내 식대로 내 욕망대로 살다 봤는데 돌이켜보니까 그것마저 뭐였다? 주의 말씀대로 구원시키기 위해서. 나로 구원시키기 위해서 그런 죄를 짓게 하신 거예요. 왜? 내가 죄를 지어야 뭐로 바뀌기 때문에? 내가 죄를 지어야 예수님 피로, 십자가로 의가 되기 때문에. 사후적으로 돌이켜보니까 나는 분명히 이익을 위해서 했는데 지나가보니까 나의 허접함과 나의 못남을 노출시키기 위해서 그 일을 의도적으로 발생시킨 거고 그렇게 발생시켰다는 말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미 알고 있는, 생명책에 이미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걸 깨닫게 되는 그런 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주님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다 예정하신 뜻이고 하나님이 원해서 일어난 뜻인 것을 돌이켜 생각해서 그게 바로 천국 가는 백성의 관점인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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