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61강 사무엘상19장1절(다윗의 요소)20200721-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9장 1절,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그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 말하였더니” 그 대목부터 시작됩니다. 등장인물은 이렇게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사울 등장하죠. 그 아들 요나단 등장하고 그 다음에 여기 진짜 중요한 주인공이 누가 나오죠? 다윗이 나오죠. 사울이 나오고, 사울 아들 요나단 나오고, 그 다음에 사울의 의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다윗을 어떻게 하라고 하는데, 죽이라! 다윗을 죽이라! 이렇게 돼요. 그러면 여기 사울이 다윗을 보고 죽이라고 함으로서, 사울의 세계에서는 다윗을 용납하지 못하겠다. 그런 뜻이죠. 사울의 세계에서 다윗이 제거대상이 되는 겁니다.
다윗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사울은 자기 세계가 여전히 유지되기를 바라죠. 근데 여기에 다윗이 끼어들었다. 끼어들었을 때에 사울은 죽이라고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사울이 죽이라고 했을 때에 같은 영역에 있다고 하는 요나단은 다윗을 죽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해요.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명령이 뭐냐 하면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4절에 보면 “요나단이 그 아비 사울에게 다윗을 포장하여 가로되” 포장이라고 하는 것은 공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왕께 득죄하지 않았고, 다윗이 아버지에게 한 일은 악한 일을 하지 않았고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그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죽였고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사울은 죽이라고 하는데 요나단이 나서서 증언하기를 다윗은 죽일만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었습니다. 이거는 죽이라는 이 이야기의 근거를 제시해주시옵소서. 아들이지만 아버지가 왕이잖아요. 그래서 다윗이 죽어야 될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고, 5절에 보면 무죄한 자, 죄 없는 자, 그럼 죄 없는 자를 아버지가 죽이라고 한다면 어느 쪽이 죄가 있겠어요? 이쪽 사울에게 죄가 있겠죠. 그럼 이쪽에 죄가 있다면, 사울이 왕이거든요. 왕이 죄가 있다면, 왕이 통치하는 이 영역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죄가 지배하는 영역이 돼요. 이해되죠. 일반 개인의 영역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통치자잖아요. 통치자가 하는 명령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따라야 된다 이 말이죠.
따라야 되는데, 나름대로 정립하기를 다윗은 지금 죄가 없는 거예요. 사울에게 죄가 없는 자가 혜택을 입으면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죄가 없는 자가 들어왔는데 사울이 죽이라고 하는 순간 사울만 나쁜 것이 아니고 이 자체가, 나라 자체가 지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뭔가 잘못 됐다. 이래 되는 거예요. 8절에 보면 “전쟁이 다시 있으므로 다윗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9절을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사울이 손에 단창을 가지고 그 집에 앉았을 때에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접하였으므로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탈 때에” 10절, “사울이 단창으로 다윗을 벽에 박으려 하였으나 그는 사울의 앞을 피하고 사울의 창은 벽에 박힌지라” 이래 되어 있어요.
사울은 다윗을 죽여야 된다는 것을 목표로 해서 짧은 창을 던졌는데, 그 창은 벽에만 박히고 다윗은 거기서 빠져나왔죠. 그러면 이 동네, 사울이 왕으로 있는 이 동네에 다윗은 포함이 되는 것 같지만 소속되지는 않는다. 이 나라에. 그리고 사울이 창을 던질 때 사울의 개인적인 하나의 의사였습니까? 아니면 여기 다른 게 있어서 창을 던지게 되었습니까? 9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있죠. 거기는 악령이라고 되어 있죠. 악령이 와 닿네요. 악령의 지배를 받아서 사울이 다윗을 공격했다면, 자, 그러면 여기서 다윗의 존재는 그냥 눈에 보이는 육적인 존재일까요? 영적존재일까요? 영적존재죠. 영적존재가 되는 겁니다.
악령이 없다고 한다면 사울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은 이성적이 돼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거예요. 이 합리적인 사고를 옆에 누가 하느냐 하면은 아들 요나단이 하는 겁니다. 아버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세요.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저 다윗은 사울의 적이 아닙니다. 왜? 우리한테 도움을 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쉽게 들면 이렇죠. 이 집에 개하고 네 식구가 사는데, 어떤 나그네가 들어왔어요. 나그네가 들어와서 혜택을 줬어요. 아이고, 갈 데가 없어요? 여기 방 하나 비니까, 방 하나가 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 주무세요, 라고 했는데, 그 사람이 밤 2시 46분에 깨가지고 창 들고 와서 집사님을 때려서 죽이려고 할 때, 그럼 아들 둘은 뭐냐, 저 사람이 미친 모양이다. 왜? 우리가 혜택을 입었으면 합리적으로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왜 죽이려고 하느냐? 라고 생각을 하겠죠.
근데 그거만 생각하면 안 돼요. 그거만 생각하면 성경이 아니에요. 뭐냐, 엄마가 영적이다. 이걸로 바뀌어야 돼요. 악령이 공격하는 쪽도 영적존재가 되는 거예요. 악령이 공격하는 쪽도. 지금 사울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고요. 우리는 어디까지 보느냐, 요나단도 뭔가 영적세계에 대해서는 아직 눈이 밝지 못하다는 것까지 나가야 됩니다. 19장 마지막을 한번 보겠어요. 20절에 보면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사자들을 보냈는데 그 사자들이 예언했죠.
그 다음 21절에 사울에 세 번째 사자들을 보내매 그들도 예언한지라. 22절,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물어 가로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혹이 가로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절,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행하며 예언을 하였으며 24절, 그가 또 그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종일 종야에 벌거벗은 몸으로 누웠었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이래 되어 있습니다. 육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으로 쭉 이야기하다가, 19장 마지막에는 어느 세계에 들어가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로 진입해버리는 거예요. 19장 전체가. 그러면 끝에 영적인 세계에 들어갔다면 처음부터 영적인 세계에 있는 겁니다. 근데 처음에 사울이 창을 던지기 전까지는 사울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다윗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요나단도 그냥 평범한 인간이고. 이 동네 사람들이 다 한 동네 사는 전부 다 인간들이에요.
문제는 그들의 최종적인 인생의 끝이 영적인 판단에 의해서 어느 쪽으로 갈라지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이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요. 왜?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으니까. 합리적인 사고방식. 자,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생존게임에 속했다. 이러면 돼요. 생존게임. 보통 생존게임이라는 말을 잘 안 하는데, 생존게임에서 게임이라는 말을 빼버리면 생존이죠. 생존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생의 전부가 되는 거예요. 살아남는 게 전부가 되는 겁니다. 이게 육적일까요? 영적일까요? 육적이에요. 육적.
살아남는 게 전부에요. 태어나서 밥 먹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업하고 전부 다, 매일 매일의 삶이, 일상의 삶이 돈 있으면 생존하고 돈 없으면 죽는다. 그 원칙, 그 구조 안에 그냥 놓여있는 겁니다. 성경 볼 필요가 없죠. 성경을 굳이 볼 필요가 없다니까요. 착하면 나중에 천당 간다. 악하면 지옥 간다. 그 정도는 상식이니까. 합리적인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거잖아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어서 한번 확인해볼게, 이게 아니라 살아있으면서 생존게임에 빠진 모든 살아있는 것에서 과연 영적인 세계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오늘 이야기가 과연 육적으로만 보이고 그냥 니나 내나 다 밥 먹고 사는 것이 거기서 거기다, 라고 충분히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이 세상 속에서, 육적으로 넘어설 수 없는 영적인 세계를 어떻게 발췌하느냐, 찾아내느냐, 이게 관건입니다. 찾아내는 방법은 고맙게도 사울이 다윗에게 창을 던지는 거예요. 어떻게 하려고? 죽이려고. 혜택을 줬는데 반대로 돌아오는 것은 죽어버려라, 이래 되는 거예요. 너 까짓 것은 죽어버려야 돼.
근데 성경에서는 악령이 임했다고 되어있지만, 악령이라는 말을 달리하게 되면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발작이 되는 겁니다. 발작이. 발작을 정신과용어로 표현한다면 히스테리라고 해요. 히스테리. 노처녀 히스테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발작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성질내는 것을 발작이라고 하지 않고 신체적인, 비정상적인 뒤틀림이 드러날 때 그게 병이 되거든요. 그냥 화를 내는 것은 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히스테리는 병이 돼요. 이거는 병원에 가야 돼요. 화날 때 그냥 화만 나면 이거는 병원에 안 가도 되는데, 화가 남으로서 갑자기 손발이 마비가 된다든지 이럴 때는 병원에 가야 돼요. 그게 히스테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은 정신이 육과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 겁니다. 크게 쓸게요. 징후죠. 징후. 이게 징후가 되는 거예요. 뭐가? 나의 몸. 육체가. 육체가 이 세상에 영적세계가 있음을 징조 또는 징후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존재한다는 겁니다. 사무엘상 19장에서. 늘 그런 게 아니고 악령이 임할 때. 악령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예를 들어서 히스테리 같은 경우를 예로 들게 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유치원 때 나에게 돌을 던졌던 남자애가 있어가지고 그것이 평생 동안 내 맘에 트라우마가 되어가지고 어떤 때는 꿈에도 나타나서 깜짝 놀라서 식은땀이 나는데, 그때는 뭐 깨어나서 ‘아이고, 내가 뭐 또 옛날생각을 했네.’라고, 이럴 수가 있어요. 근데 이 앞집에 그 남자가 이사를 왔다면? 다른 식구는 모르죠. 왜? 동일한 과거가 아니니까.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저거 성추행범인데.” “왜 그래?” “니는 몰라도 돼.” “나에게 기분 나쁜 존재가 앞집에 이사 왔어. 매일 봐야 돼. 그래서 못 견디겠어.” 그 다음부터는 어떤 징후가 나타나느냐 하면은 밥맛이 하나도 없어. 그 앞집 때문에.
그러니까 밥맛이라는 것은 과학적으로 하면 단백질과 탄수화물 이래해가지고 그냥 숟가락을 들고 떠서 입에 넣어 먹는다는 표현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인간이 등장해버리면 이게 밥맛이 떨어져서 내 쪽에서 강력하게 거부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인간은 굉장히 예민해요. 상당히 예민합니다. 왜 예민 하느냐 하면은 주위 환경에 같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환경에. 집사님이 여기 왜 이사 왔는지 이유도 모르겠어요. 주위의 어떤 환경에 의해서 엮어진 것을 인위적으로 거기서 벗어나는 거예요.
근데 오늘 본문 다윗 같은 경우에는 벗어나는 게 아니고, 다윗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다윗이 악령의 표적의 대상이 된다는 거예요. 다윗의 누구의 표적? 악령의 표적이에요. 악령의 표적. 그러니까 다윗이 악령의 표적이 된다는 것은, 사울왕은 아무것도 모르죠. 사울왕은 하나의 중개인이에요. 중개인. 그냥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악령이 작용하니까 던지고 싶은 거예요. “내가 왜 이러지?” 늘 그런 것이 아니고 악령이 임할 때마다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악령은 다윗을 주목하고 있다 이 말이죠.
마태복음 9장을 잠깐 한번 볼까요? 27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오늘날 지금 우리가 다윗이야기를 하죠. 32절에 보면 “저희가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벙어리 된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절, “귀신이 쫓겨나고” 그렇게 되어 있죠. 자, 소경이라고 하는 것은 눈이 감긴 사람입니다. 소경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중재자에요. 중재자. 어떤 징후라니까요. 그 사람이 죄를 지어서 소경 된 게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다 소경이 아니에요.
근데 이 사람은 소경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소경은 본인이 왜 소경이 됐는지 이유를 모르죠. 모르는데, 여기에 누가 지나갑니까? 예수님이 지나가는데 뭐라고 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연속시켜주시는 분이여, 옛날에 다윗에게 있었던 하나님과의 접촉사건, 다윗과 다윗의 특수성이 지금도 이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온 그 결과로서의 다윗의 자손이여, 이 다윗의 자손이여는 신이시여, 하고 같은 말이에요. 다윗이, 예수님이 신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늘 쪽에서 오신이여.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가 용서받을 근거가 없으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용서받을 근거가 없을 때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불쌍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내가 바쳐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나에게 혜택을 주시옵소서. 나의 아쉬움을 들어주시옵소서. 제가 뭔가 드려서 받아버리면 이거는 자비가 아닙니다. 이거는 거래죠. 흥정이죠.
불쌍히 여겨달라는 거예요. 불쌍히 여겨주는데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내가 소경이라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소경된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소경될만한, 그만한 죄가 있어서 소경이 되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죄는 내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하는 짓이 있기 때문에 내 죄를 내 손으로 그냥 원상복귀가 안 됩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은 뭐에서 뭐밖에 없느냐 하면은 자비밖에 없어요. 그냥 불쌍히 여겨주는 거예요. “아이고, 이 불쌍한 놈아.” 이렇게. 불쌍히 여결줄 때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은 죄책임, 죄책, 죄의식, 죄의식이라기보다도 무거운 자기의 잘못된 실적들이, 이게 전부 다 없어지는 거예요. 말소가 되는 거예요.
남녀가 둘이 사귀다가, 남자가 여자 몰래 다른 여자를 양다리 걸치다가 딱 걸렸어요. 근데 남자가 여러 가지를 변명하다가 궁지에 몰리는 결정적인 증거를 딱 될 때에, 두 가지 반응이죠. 니 아니면 여자 없나? 이거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은 아무리 봐도 이 여자가 돈도 되고 하니까, 생존게임이니까, 자기 생존이니까, 지는 좀 놀아도 저 여자가 생활비를 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는 뭡니까? 불쌍히 여기소서. 살살 빌죠. 전과가 없으니까 한번만 봐달라고 하죠. 두 번째 걸리면 안 되지만 처음 걸렸으니까 개과천선의 여지는 있잖아. 그러니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자비는 영적인 것이 아니고 상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에요. 왜냐하면 생존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밥 먹고 살려면 그런 식으로 넘어가면 되지만. 영적인 문제, 영원한 죄를 심판하시는 분 앞에서는 사람에게 빈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뇌물을 갖다 바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의 뇌물 안 받습니다. 받지를 않아요. 받지 않는 대신 누굴 꽂아주죠. 다윗을 꽂아주죠. 정말 이거 중요한 거예요. 인간의 제물을 받고 기도를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안 받고 주신다는 말은 자비덩어리로 왔다는 거예요. 자비덩어리로. 이미 용서해주기 위해서 꽂아준 거예요.
그러면 용서가 용서되려면 주변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야 됩니까? 용서의 가치가 가치대로 드러나려면 이 세상의 통치자는 일체 용서가 없음이 발각되어야 하겠죠. 그 역할을 사울 왕이 하는 거예요. 혜택을 입어놓고 죽여라. 완전히 오기에요. 오기. 다시 말해서 사울은 말하기를, 다윗 너는 내 인생에 완전히 안 맞는다는 거예요. 맞지를 않으니까 통째로 뽑아내겠다는 거예요. 맞지를 않으니까 다윗은 뭐냐, 이 땅의 사람이 아니죠. 이 땅의 사람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으로는 해석이 안 되니까. “아버지 왕이시여, 다윗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었고, 블레셋을 이겼고, 참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으면 우리가 보호를 해줘야지 왜 죽이라고 합니까?”라고 요나단이 이야기를 할 때 요나단은 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거예요.
그러나 사울은 그러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의 합리적인 계산으로 하는 생존게임 그 외의 세계에서, 외곽에서 심어줬고 찾아온 존재라는 사실을 악령은 알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사울은 하나의 매개체니까 그냥 정신없이 창을 던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이 창을 던진다는 말은 악령을 대신해서 던지는 것이니까, 악령의 표적은 뭐냐 하면은 이 땅에서는 죄에 대해서는 죗값을 치러야지, 죄에 대해서 무상으로 용서하는 것은 악령의 세계에서는 눈뜨고 못 보겠다는 거예요. 나는 용납 못하겠다. 그것이 인간에게 이해가 안 되니까 발작을 일으키는 거예요. 발작을.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야, 사울 왕 참 못됐다. 구원을 해줬는데 구원자를 왜 그렇게 죽이느냐? 혹시 이 동네에 사울 왕 같은 자가 없는지 주변에서 찾고 하는데, 사울 왕이 누구냐 하면은 나에요. 내가 사울 왕이에요. 왜냐하면 다윗은 죽음에 노출되어 있어요. 영적으로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데, 우리는 죽음을 피해서 사는 게임에, 거기에 몰입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사람이 너 죽어야 된다고 찾아오면, 우리가 창 들고 있으면 그쪽을 죽여 버려요.
사울을 욕하겠지만, 사울은 자기가 구축한 자기의 영역이 있습니다. 이 영역을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육의 영역이에요. 육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다윗이 하늘로서 꽂혀있으니까 육이 그것을 참지 못해서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죽여서라도 내 영역에서는 나의 공로와 나의 잘남으로만 가득 차 있어야 될 영역에, 다윗의 존재는 나에게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또 한 예를 들게 되면 남자가 돈을 잘 벌어요. 남녀가 사귀는데 남자가 돈을 잘 벌어요. 아버지가 재벌 2세가 돼가지고, 지는 재벌 3세고. 늘 이렇게 기마이(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음)쓰고 돈쓰는 즐거움이 있어요. 근데 좀 예쁘장한 여자 친구가 있어가지고 어떻게 좀 해볼까 하고 장난삼아 사귀었습니다. 사귀어가지고, 친구들도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고, 파티열고, 돈이 있으니까 고급차 타고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그런 짓하는 그런 파티에 자기가 새로 사귄 여자를 초청하니까, 여자가 친구들끼리 노는 분위기, 그 바닥을 보고 난 뒤에, 니도 한잔 먹으라고 하니까, 주여!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다른 여자들은 미니스커트 입고 왔는데 지는 뭐 긴치마에, 여자 전도사도 아니고. 긴치마 입고 와서 주여! 이러고 있다 이 말이죠. 주여, 이 타락된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할 때에, 이미 그 영역은 뭐냐 자기 돈을 뿌린 영역이거든요. 자기가 잘나고 자기 공로가 있는 영역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보고 잘난 남자친구가 당장 뭐냐, 그 여자를 뽑아버려라. 왜? 이 파티 분위기를 버리니까. 노래 부르라고 하니까 뭐 마리아~ 이러고 하는데,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찬송가를 부르니까 분위기가 안 맞거든요.
그러니까 뽑아버리는 거예요. 창을 던지고. 니 오늘 끝났다. 절교다. 집어던지는 겁니다. 왜? 이 세계에 뭐가 필요가 없으니까? 죄 용서라는 그런 요소가 내 세계에서는, 나는 내 잘남만 있어야 되죠. 내가 이만큼 잘나간다만 있어야 돼요. 내가 뭐 돈이 있는데 뭐가 아쉬워요. 아쉬운 게 없는데, 여기서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이래 나오면 재수 없다고 뽑아내겠죠. 썩은 무 뽑아내듯이.
우리가 지금 뭐 돈도 없고 아쉬우니까 주여, 살려달라고 이렇게 하겠지만, 만일 우리가 넉넉한 돈이 있고 잘나가면, 세상적으로 힘이 있으면 내가 다윗을 창으로 꽂아버려요. 내가. 그러니까 이 사울 이야기가 딴 동네이야기가 아니에요. 이제 조금 어려운 것을 해보겠습니다. 뭐가 어려우냐 하면은 아까 사울이 있는 영역은 사울 개인의 공로가 있는 영역이라서, 지금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잖아요. 다윗이 블레셋 골리앗을 이겼죠. 그러면 사람들에게 인기가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뭐라고 했습니까? 만만이죠.
골리앗을 이기고 난 뒤에 인기가 높았다 이 말이죠. 높았을 때에, 자기 영역에서 인기가 높았을 때 이 백성들은 자기 소유에요. 백성들은 사울의 소유에요. 왜? 왕이니까. 옛날 백성들은 왕의 소유거든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의 마음이 누구한테 집중되어야 하느냐 하면은 사울 하나에게만 집중되어야 해요. 근데 갑자기 다윗이 정치적으로 부상이 되니까 사울은 참을 수 없는 거죠. 어떤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데, 분명히 자기 노래에요. 막걸리 한잔, 노래가 있거든요. 이게 누구 노래냐 하면은 강진 노래라고요. 근데 별로 안 떴는데. 영탁이가 막걸리 한잔~~ 부르니까 갑자기 강진이는 천천이고 영탁이는 만만이 돼버렸다니까요.
자, 이렇게 될 때에, 발작이라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발작. 인간은 언제 히스테리, 언제 발작을 합니까? 아무리 좋은 관계를 유지해도, 그 좋은 관계라는 것이 순수한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이 세상에 순수한 것은 없어요. 자기 철조망, 자기 영역을 구축합니다. 심지어 형제간이라도 마찬가지죠. 내 영역, 내 나와바리죠. 내 영역이 고수되어서 이 영역에 누가 침투할 때는 내 허락을 맡아야 돼요. 왜냐 하면은 이 영역 구석구석이 자신의 손길과 자기 과거역사와 힘듦과 애씀과 공로가 다 여기에 배치되어 있거든요. 모든 게.
남편 출근한 뒤에 아내가 양말 개서 서랍에 딱딱 넣어놨을 때, 남편은 직장생활 하느라 정신없어가지고 양말을 휙 하고 벗어던지는데,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놨을 때 아내가 발작을 하는 거예요. 내가 그 뒤집은 양말을 다시 도로 하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이 말이죠. 아무리 월급 받는 남편이라도 일단 집에 오면 집안은 누구 책임 하에 있는, 통제 하에 있는 영역이냐 하면은, 모든 서랍하나 모든 배치가 살림하는 것 하나 자기 고유의, 사울 왕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로마에 가면 로마의 규칙이 따로 있다니까요. 내가 로마인 같으면 로마 규칙을 따라야지 내 규칙을 밀어 넣어버리면 여기에 말썽이 생겨버려요.
방금 설명한 것은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울의 인기가 떨어지니까 사울이 다윗을 미워했다. 이렇게만 해석해버리면 무슨 요소가 없어지느냐 하면은 영적요소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사무엘상 19장의 끝부분을 제가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거기 보니까, 19장 다시 끝에 보게 되면 사울 왕이 나중에 정신없이 예언도 하죠. 다윗이 누구한테 찾아가느냐 하면은, 죽이려고 하니까 사무엘 선지자에게 피신 온 거예요. 피신을 하니까, 사무엘 있는 곳, 사무엘 영역에 다윗이 피신해 가있다 이 말이죠. 이 소문을 듣고 사울 왕이 따라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울 왕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은, 지금 사울 왕 자기 영역에서는 사울은 어디까지나 자기 통치 하에 있습니다.
자기의 이성과 합리성과 지성의 통치 하에 정신 차리고 있다 이 말이죠. 근데 거길 떠나와서 사무엘 영역으로 딱 가니까, 사울이 예언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사울이 횡설수설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옷 벗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이 영역에 오니까 기존에 내가 나를 통제하던 그 통제력이 다 날아가 버린 거예요. 이 말은 사울에게 뭐가 임했다? 악령이 임했다는 것이, 이게 하나의 그냥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게 실제적 현실이 돼요. 현실. 현실의 일부에요. 현실의 일부. 영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 없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이 뭘 만든다? 현실을 중재자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영이 안 보이지만 영에서 보면 현실이 영에 속했음이 이게 드러나는 거예요.
아까 그걸 뭐라고 했어요? 징후라고 했죠. 징후. 맛있는 반찬인데 옆집에 내가 싫어하는 남자가 이사 오니까 갑자기 그렇게 맛있는 것도 밥맛이 떨어진다는 것이 뭐예요? 인간은 자기 딴에 나는 정신 바짝 차리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고 그 결정한 것을 내가 책임지고 그 결과에 대해서 반드시 달성해내겠다는 것으로, 너무나 그렇게 정신 차리고 살았지만, 다른 외부의 요소가 왔을 때에 그 정신 차림이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그러한 상황도 따로 있는 겁니다. 근데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구약이 좀 엉뚱해 보이지만, 구약에서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게 육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이 붙어있다는 거예요.
조금만 나가서 사무엘이 사는 동네에 오면 갑자기 어떤 인간이 들어와도 여기서 다 미쳐버리죠. 아까 여러분들도 다 보셨지만 19장 끝에 보니까, 처음부터 사울이 온 게 아니고 사울이 세 번씩이나 자기 부하들을 보냈잖아요. 부하들이 멀쩡한 부하들이에요. 그 당시 서울대학 나온 부하들이 이쪽에만 나오면 전부 다 미쳐버려요. 이쪽 영역에 오게 되면. 이게 이웃집이거든요. 같은 땅의 지평이라는 말이죠. 같은 이스라엘 땅이라 이 말이죠. 어떤 경계선이 없어요. 어떤 DMZ 그런 것도 없고. 하여튼 붙어있어요. 조금만 밑으로 가면 갑자기 사람이 완전히 바보가 된다 이 말이죠.
근데 이것은 구약에서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지만, 신약에 가면은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지금 함께 있어도 그들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징후를 보여주는데, 소경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에게 침을 뱉어 진흙을 눈에 발라준 후에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고 하죠. 진흙 바르고 씻으니까 눈이 떴잖아요. 자, 눈을 떴을 때 여기서 여러분들이 놓치면 안 되는 게, 소경은 못 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소경이 눈을 떴다. 그러면 이게 눈을 뜬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는 이게 눈을 뜬 게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는 소경이 눈이 감겼다가 눈을 떴으면 다른 사람에 보기에 “아, 이 사람은 소경이 아니네.” 이러는데, 소경이 눈을 떠서 당신들이 있네, 제자들이 있네, 바리새인이 있네,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는 그게 소경이 아닌 게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여전히 소경이에요. 눈을 떠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고, 예수님 키 크네, 몸무게 나가네. 누구 닮았지? 이거는 여전히 소경이에요. 예수님께서는 이 소경으로 하여금 1단계 눈 뜨게 하고 2단계 예수님 믿게 만들어버렸어요. 이 말은, 믿는다는 말은 죽어서 천당 간다는 소리가 아니고, 이미 그 하늘나라가 육의 세계를 통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울 왕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 세계가 사울을 통제하고 있고 다윗을 통제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시대에도 마찬가지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모든 것을 징후로 처리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왜 눈에 보이지 않느냐, 눈에 보이지 않아야 우리에게 다른 눈이 열렸느냐, 안 열렸느냐를 측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니가 본다고 하니 소경이라고 했잖아요. 보는 걸로 마감이 돼버리면 육적으로 와서 육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 겁니다. 육의 한계에 있을 때는 인간이 보는 것이 관찰이 되고 과학적 인식이 되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계획과 미래를 설계하게 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생존게임이에요. 생존은 내가 설치지 않으면 어떤 생존도 나한테 보장되지 않는다. 이게 생존게임이라고요. 남을 이겨야, 남을 꺾어야, 남이 가진 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이 땅에서 먹고 사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그게 과연 사는 것이냐? 사는 것? 산다는 게 뭐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을 찾을 때 산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들어와야 하느냐 하면은 자비가 들어와야 돼요. 자비가. 내가 행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칩처럼 심어준 게 있어야 돼요. 뭐냐 하면은 어떤 짓을 해도 용서되는 장치가 심어져야 돼요. 안에 콩닥콩닥 뛰어야 돼요. 지금. 동대구역이나 보면 요새 코로나로 열 측정하죠. 열이 어디에 있어요? 참 재미있는 게 열이 어디에 있죠? 열은 우리 내부에 있어요. 내부에 있는데 이거 측정할 때, 머리 긴 사람 나오라든지 코가 비틀어진 사람 나오라든지, 이런 거 안 하거든요. 우리 표면에 없는 것을 찾아내요. 열이 어디에 있는가? 열은 우리 안에 있다고요. 열 탐지기. 체온 재는 것.
로마서 8장도 마찬가지에요. 니 안에 성령이 있는가? 성령 그걸 측정하는 거예요. 니 안에 성령이 있는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 십자가에서 니가 해결해야 할 문제, 니 운명과 미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 니 안에 있느냐 없느냐를 보는 겁니다. 니가 한 평생 무슨 짓을 했는지 그거는 물음의 대상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악마가 통치하는 모든 세계에서는 목적이 자기 생존으로 모든 의미가 마감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절대로 영적인 것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그게 영적인 것하고 달라요.
영적인 것은 정신 차려서 될 문제가 아니고 외부적인 것이 와야 돼요. 이게 사무엘 옆에 누가 있다고 했어요? 사무엘 옆에 누가 있다? 다윗. 다윗적인 요소가 있어요. 다윗요소. 다윗은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칼로 이겼습니까? 힘으로 이겼습니까? 다윗은 고백했어요. 이거는 내 전쟁이 아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할 때에 인간들끼리는 이미 힘이 있어야 승리한다는 그런 기존의 관념을 깨기 위해서 힘이 약한 소년 나를 보내는 거예요. 소년을 보냈다는 말은 소년의 힘이 아니고 아예 없는 힘이, 힘자랑하는 인간들을 꺾는 방식이 하늘나라에서 너희들을 용서하는 방식이다. 니가 나한테 뇌물을 바쳤나, 기도를 했나, 찬송을 했나, 전도를 했나, 예배를 드렸나, 니가 착한 일을 많이 했나, 해도 그거는 안 받아요.
왜냐하면 이거는 나의 요소지, 내가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내 마음은, 내가 평소에 세상에서 나는 밥 먹고 살겠다는 내 마음과 동일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마음은 안 받습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밥 먹고 사는 것이 최종목적이에요. 인간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힘을 가지는 것, 따라서 그거만 덜렁 들고 천국 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이거는 바보 같은 생각이거든요. 바로 내가 이렇게 밥 먹고 사는 것이 어쩔 수 없지만, 이 어쩔 수 없음이 바로 악령의 통치를 받는 죄 모습인 것을 인정하는 다른 눈, 다른 시선이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대조하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방식과 내가 이 땅에서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서 살아가는 방식과 그것이 너무나 대조가 되어야 돼요. 그 대조, 너무 차이 남. 그래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나오는 이야기죠. 나는 잘난 사람을 부르러 온 게 아니다. 자기가 못난 자라는 것을 누가 자랑하고 있는가.
그 자랑은 결정적으로 대조가 될 수 있는 결정적 기준이 내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에, 그 심어져 있는 그 다윗의 요소로 하여금 또는 사울로 하여금, 다윗으로 인하여 사울로 하여금, 나는 예수보다도 돈이 좋다는 말을, 예수님보다도, 십자가보다도 돈이 더 좋다는 본성이 있음을 내가 고백하는 거예요. 우리 집도 돈 좀 많았으면 좋겠다. 빨리 여기서 탈출했으면 좋겠다. 이 벌판에서. 이런 식으로. 강남에 뭐 한 세 채 정도 있으면 좋겠다. 그런 거.
내 속에서 주님이 준비한 나와 내가 지금 실제적으로 느끼는 나, 두 개의 나가 한쪽은 이름이 사울이고 한쪽은 다윗이 되는 거예요. 다윗은 예수님 이름이고. 다윗의 자손이니까. 사울은 아담에 속한 아담의 이름이에요. 사울 이름이. 그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거는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계속 이 사건이 반복이 됩니다. 계속 반복이 됩니다. ‘예수도 안 믿는 남편하고 내가 안 살아야지.’라고 했는데 차를 태워주네. 또 혜택을 입었으니까, ‘아, 이거는 나를 위함이 아니고 주께서 차 태워주라고 안 죽고 살게 했구나.’ 주님께 감사하죠. 그러니까 항상 시작은 내 생존이에요. 모든 시작은. 왜냐하면 이게 자연스러우니까. 이게 육에 속한 내 생존이고 내 욕망이에요.
그런데 안에 성령이 있는 사람은 끝은 뭡니까? 누구에게 감사하죠? 주님에게 감사하죠. 내 생존을 주어서, 이걸 제공해서 감사한 게 아니고. 뭘 제공해도 이거는 내 덕이에요. 내가 계획을 잘 짜서 그렇고. 이거밖에 안 되는 이것이 바로 나의 한계임을 지적해주신 것이 바로 감사고 고마움이에요. 이게 없으면 다윗과 같은 편이 아닙니다. 사무엘 다윗 아브라함... 이쪽 편이 아니에요. 이것은 주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사무엘상 19장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뽑으라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데가 아니고, 이미 징조로서 이 땅에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이 땅에 이미 왔어요. 이미 와서 자기 데려갈 사람을 데려가는 겁니다. 이미 온 사람의 특징은 만사가 완벽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고, 만사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본인은 항상 서툴고 어설프고 실패의 반복인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에요.
지난주일 낮에 우리교회 장로님이 기도를 하셨는데, 제가 설교 시간에 그걸 인용했지만, “실패하면서 감사하게 하옵소서.” 실패하면서. 보통 우리의 상식은 내 생존, 내 계획이 우선이기 때문에 실패에서 감사가 안 나오죠. 뭐라고 나옵니까? 우쌰! 드디어 성공했구나! 성공한 것을 감사하는 게 바로 육의 세계, 사울의 세계의 특징이라면, 다윗에 속한 사람은 실패한 것에서 감사하는 거예요. 실패하면서.
근데 이 실패라는 것이 육적인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주님의 안목으로 볼 줄 아는 그 시선에 의하면, 내가 세상적으로 성공한 이것가지고 얼마나 희희낙락하고, 자만과 잘난 체하고, 인생 다 산 것처럼 우쭐대고, 남한테 내가 이만큼 잘난 존재라는 것을 떠벌리는 그 보람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한심스러운 모습이에요. 누구하고 비교해볼 때? 예수님하고 비교해볼 때.
다윗은 사울 왕과 그 어른들에게 도움을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하등의 도움을 안 받았죠. 일체 안 받았죠. 조금의 도움을 안 받았어요. 도움을 안 받았는데 혜택은 뭐냐, 블레셋이 물러나갔잖아요. 이 시간 끝으로 한 가지 더하겠습니다. 사무엘상 19장, 젊은 분들이 있으니까 이게 도움이 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12절, 다윗이 집에 있을 때 사울이 명령을 해서 부하들이 와서 죽이려고 했죠. 죽이려고 할 때에 그 부인 이름이 미갈인데, 미갈은 자기 남편을 사랑합니다. 물론 좀 드문 경우지만. 하여튼 사랑해요. 남편한테 반했을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생겨요. 사랑합니다.
미갈이 남편을 사랑해서, 남편을 살리기 위해서 피하게 만들고 남편 침대에 인형, 우상을 덮어놓고 군사가 왔을 때에 병들었다고 해서 그냥 돌려보내죠. 사울이 그 소리를 듣고 “침대 채로 가져와라. 내가 죽일게.”라고 했거든요. 침대 채로. 아픈 채로 가져오라. 완전히 이거는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을. 본인도 이유를 몰라요. 그냥 뽑아내고 싶은 거예요. 내 영역에서. 그래서 보니까 어떻게 됐어요? 나중에 보니까 이게 우상이에요. 우상을 공개했다고요.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은 사울이 다윗을 아무리해도 사울은 자기 행동이 어디서 나오는지 본인이 하면서도 모르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냐 다윗이 하는 행동은 무엇과 결부되어 있느냐 하면은 우상과 결부되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믿는 그런 인간들이 하는 짓거리를 사울 니가 했음을, 원래 침대에 누가 눕던 자리에요? 다윗이 눕던 자리에 다윗은 빠져버리고 우상이 들어가 버리면, 사울아, 너는 우상이나 맞이해라. 니가 하는 짓거리는 우상적인 사고방식에서나 나올 수 있는 짓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러니까 다윗은, 그냥 다윗이 죽었나, 살았나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다윗이 하는 모든 행적이 사울 본인이 몰랐던 본인의 본질을 다 알려주면서 다윗은 빠지고 있는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주면서 빠지는 것하고 동일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미갈입니다. 미갈이 이렇게 다윗을 살렸잖아요. 미갈은 다윗과 혼인한 사람입니다. 결혼했어요.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면 안정감을 얻죠. 육적인 세계에서는. 그러나 구원문제에 있어서는 결혼한 여자라고 할지라도 남편을 영적으로 살릴 수는 없다. 그 이야기하고 싶어요. 결혼하는 것은 행복이다. 좋다. 다 좋은데, 해야죠. 하지만 결혼이 나를 용서하는 곳이 아니에요. 결혼은 나에게 근원적인 자비를 베푸는 곳이 아니에요. 진짜 결혼은 그리스도와 혼인해야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