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인간 창조

아빠와 함께 2020. 6. 15. 18:21

인간 창조

2020년 6월 14일             본문 말씀: 욥기 10:7-14

(10:7)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10:8) 주의 손으로 나를 빚으셨으며 만드셨는데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10:9)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10:10)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10:11) 피부와 살을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엮으시고

(10:12)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나를 보살피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10: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0:14)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욥의 인간창조론에서는 선악과 관점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간에게 자신의 영을 주셨다는 겁니다. 흙으로 인간의 물질적 기본 골조를 갖추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위에 근육질로서 가죽 덮듯이 덮어주시고 그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선하신 영을 부어주시는데 이 선한 영은 선하시기에 인간의 훼손하면 더는 용서가 없을 것이다는 겁니다.

따라서 욥은 비록 자신의 물질적 요소는 주어진 병으로 다 뭉개졌지만 하나님과의 선한 관계는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병으로 죽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희망사항입니다. 물론 자신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엄중한 선하심을 그대로 적용시켜 결코 자신을 용서하지 않해줄 것이라는 사실을 본인이 미리 알고 있다고 언줄을 줍니다.

따라서 욥의 입장에서는 비록 몸은 병으로 고통스럽지만 마지막 하나님의 관계만큼은 ‘선한 영’을 부어 받은 만큼 선하게 지키고 싶은 겁니다. 욥 자신이 자기 영에게 물어보고 살펴보건데 전혀 문제가 없고 여전히 선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따라서 이런 자신이 이 선한 영을 부여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악하게 나온다면 주께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더라도 무방하다는 조건을 내겁니다.  

‘고통 중에 있는 욥’은 곧 극단에 처한 인간의 본 모습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구나 극한 고통 속에 있으면 이런 거래를 하나님한테 제안하고 싶어합니다. 어차피 목숨이 잃게 되는 그 최후에 순간에 자신의 신체의 회복을 욕심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영이라도 건지고 싶은 겁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인간의 이성의 말미에서 보여주는 철학적 인식입니다. 철학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인간은 ‘육+영(혼)’이라는 겁니다. 혹은 인간은 ‘육+혼+영’이라는 겁니다. 인간을 이런 식으로 분석해서 스스로 어떤 조작에 나서고 싶어합니다. 어떤 보다 구원이 되는 방향으로 시도를 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태는 이런 형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원형)’이 빠지면 더 이상 인간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상대하는 자는 다음과 같은 상태에 있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자는 기존의 욥과 같은 인간 인식은 다 엉터리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인간은 이미 인간 자신이 자기에게 손을 대어 인간다운 인간이 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기존의 창조된 인간은 더는 인간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인간이 다시 등장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인간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만 없이 모든 것들이 다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왜 하나님께서 그것을 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땅을 만드셨다고 여겨지십니까? 땅 위의 ‘하늘의 요소’를 두기 위함입니다. 그 ‘하늘의 요소’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냥 인간이 아닙니다. ‘하늘의 형상’을 입은 흙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따로 만들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곳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두 나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성격이 정립됩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입니다. 또 다른 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여기서 마지막 천국에서는 생명나무는 있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선악과 나무가 중간 절차상을 차지하는 나무라는 것을 압니다.

즉 중간에 끼어들어 생명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고 그 역할을 다하면 소멸하는 나무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용서’가 먼저 선행되어 있고 ‘죄’는 그 용서를 위해 등장한다는 겁니다. 흔히 이 세상에서는, 논리상 죄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그 죄를 씻어내기 위해 용서가 있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확보하게 된 것이 옳고 정당한 일이 되어버립니다. 즉 일단 자신의 행위를 놓고 선인지 악인지 본인이 구분해서, 선한 일을 그대로 하고 악한 일에 대해서만 새삼 용서를 구해 처리하면 자신이 온전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는 바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악과 나무를 심어신 취지는,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는 방식에서 다시 온전하게 되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의 논리 절차로서는 파악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5: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즉 죄인이 자기 죄를 알고 그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경우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알만큼 온전하고 완전한 안목과 기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가지고 선악과의 처벌을 극복하는 일은 없습니다. 선악과는 어디까지나 생명나무의 취지를 보여주기 위한 보조적 나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이해하는 하나님과 선악지식에 준한 하나님상입니다. 용서하고 아니하고가 마치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인 줄로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 용서란 진정 죄의 진실을 아는 자에게 해당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의 나타남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으로부터 배척당했기에 그 분의 살과 피에 대해서 어느 누구로 마실 의도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근거로 새로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창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번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식’으로 자기 백성을 만드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곧 생명나무를 통해서 자신이 사후(事後)적으로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일방적인 주님의 고유권한임을 이들을 공통적으로 증언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이미 죽어 마땅함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피조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5강-욥기 10장 7~14절(인간 창조)2020061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0장 7~14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 주의 손에서 나를 벗어나게 할 자도 없나이다, 주의 손으로 나를 만드사 백체를 이루셨거늘 이제 나를 멸하시나이다,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 엉긴 젖처럼 엉기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가죽과 살로 내게 입히시며 뼈와 힘줄로 나를 뭉치시고,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내가 범죄 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

욥이 거의 자기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한계에 봉착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자신의 인간이라는 골조가 뼈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실질적으로도 욥은 바짝 말랐어요. 보통 뼈만 남았다고 하죠. 그래서 욥은 이야기합니다. 뼈부터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가죽 입히듯이 이렇게 힘줄을 입혀놓고 그렇게 자기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을 거기에 담았습니다. 그 영은 어떤 영이냐 하면 내가 죄를 범죄 하지 않는 영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혔다고 하는 거예요. 욥이 생각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뼈대로 골조로 해놓고 힘줄을 붙여 놓음으로 말미암아 가시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식적으로 인간이 신체로부터 출발했음을 인정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라든지 혼이라든지 이런 의지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영을 보냈는데

 그 영이 질적으로 악한 영이 아니고 선한 영을 보내셨다는 거예요. 여기 7절에 보면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주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악하지 않고 선하게 하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선한 영을 보내줬기 때문에 12절에 보면 “생명과 은혜를 내게 주시고 권고하심으로 내 영을 지키셨나이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신체적으로 자기 묘사가 합당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우대하는 식으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과정이 선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선한 조치로써 영이 자신에게 임했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기도도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종합적으로 욥이 내린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입니다. 이에 대해 “맞습니까?”라고 우리가 물을 수 있는데요,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욥은 구약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나름대로 설명해서 덧붙이듯이 인간은 무엇인가를 정리하는 거예요. 보이는 것은 신체성 근육질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혼이다.

욥이 주장한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철학이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철학이에요. 인간은 육과 영혼, 또는 육. 영. 혼, 세 개로 되어있던지 두 개로 되어있던지 이런 식으로 되어있다고 결론 내리는 거, 이것이 바로 철학입니다. 욥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자기 백성을 만든다는 것은 이 한계를 터뜨리고 찢어야 하죠. 해체시켜 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육으로 되어있고 영과 혼으로 되어있다는 이것 가지고 그동안 교회가 장사를 해 먹었습니다. 사기를 쳤던 거예요. 근래에 와서 워치만니지만 그 전부터 있었어요. 평양의 부흥사도 그렇고. 혼은 인간이 불신자들도 모두 갖고 있고 짐승도 갖고 있는 인간의 의지다. 영혼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혼을 관리하고 영혼을 관리하게 되면 여러분은 구원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가르쳐왔던 거예요.

이거 가르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룬 교회가 순복음 교회입니다. 순~~~~복음 교회죠. 순 참기름처럼. “여러분, 내가 나를 관리해서 구원될 수 있다는 것에 도전하세요. 도전하면 성공이고 도전 못 하면 여러분들이 못난 인간입니다. 여러분은 못난 인간 되기를 원합니까, 잘난 인간 되기를 원합니까? 잘난 인간 되시길 바랍니다”라고 하면 우리교회는 가만있지만 다른 교회 교인들 같으면 “아멘!!” 하죠. 자신들이 교회 온 본색이 다 드러나 버렸어요.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극단적인 모습, 그 궁극적인 것을 욥이 다 해주는 거예요. 그런데 욥에 대해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지금 욥이 아프다는 겁니다. 사람은 아프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요. 아프면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아프면 아플수록 점점 더 자의식이 강렬해져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관계없이 그냥 몸만 건강했으면 하죠. 몸만 숨이라도 쉴 수 있다면 더는 소원 없다고 기도하죠.

이 몸 하나 편하게 식사하고 음식이 식도를 통해서 내려가기만 해도 눈 감으면 그냥 잠이 오기만 해도 자신은 더는 소원 없고, 잘 먹고 잘 자고 숨 쉴 때 숨 쉬고 그것만 해도 더 이상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하죠. 지금 욥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깜빡깜빡 거리고 있죠. 죽었는지 하면 아침에 보면 살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경계선이 불분명한 속에서 지금 놓여있습니다.

따라서 욥에 하는 이 이야기가 우리 건강한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믿음도 없다고 하겠지만 막상 우리가 아플 때는 이 욥의 말에 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안 만들었잖아요, 하나님.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것을 이렇게 괴롭히면 하나님 본인이 괴로울 건데 그것을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내가 아파서 아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내가 아프다면 그게 그렇게 하나님이 기분 좋습니까? 도통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납득 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라고 욥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아직 건강하니까 욥만큼 아프지는 않을 거니까 우리는 그것이 잠복 되어있다고 합니다. 이런 바이러스가 잠복 되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런데 욥이 지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어요. 한두 개가 아니겠지만 그게 뭐냐 하면 말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지금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인간은 왜 만들었으며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지를 인간 쪽에서 질문하면 안 돼요.

‘나를 왜 만들었습니까? 왜 살아갑니까? 왜 태어났습니까?’라는 질문을 하면 안 돼요. 그 질문에서 인간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왜냐 하면 인간의 원형은 인간이 아니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방금 제가 인간의 원형이라고 했는데 창세기 1장에서는 그걸 원형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인간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는 주목하지 않고 인간 되었음에 굉장히 강조해요. 강조점을 둡니다. ‘인간이잖아요’라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이라고 보이는 그 형태에 ‘인간이냐?’라고 하시며 관심 두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너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 인간의 원형이 있느냐?’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원형이 너에게 들어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원형이 들어있지 않으면서도 굳이 다른 동물과 비교하면서 외형적으로 “우리는 저 짐승과 같지 않고 저 개와 같지 않고 저 코끼리와 같지 않으니까 우리는 존엄합니다”라고 하면서 본인이 존엄하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탈북자 단체에서 풍선에 ‘김정은 돼지’라고 쓴 삐라를 존엄성을 위반하면서 날릴 때

 우리는 그걸 보면서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 있는데 대명동에 사는데 갑자기 삐라가 하나 날라오는데 ‘대명동 사는 아무개는 개 돼지다’라고 쓰여있다면 기분 좋을 일은 없죠. 갑자기 내 존엄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지금 욥은 남들에게 칭찬받는 인생이에요. 자기 과거가. 그런데 누가 모독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모독을 한 거예요.

남들은 멀쩡하게 자기 낯짝 보이면서 생계 자금 받은 것 가지고 온 시장에 다 가서 “이거 카드 받습니까?”라고 물어 가면서 비싼 한우 사 먹는다고 돌아다니는데 자기는 바짝 말라서 기어 나올 수도 없는 상태라면 이건 누가 봐도 내가 평생 지켜온 존엄을 하나님이 지금 모독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이 모독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뭔가 해결책이 있어야 해요. 해결점. 자신이 잘못했으면 뭘 잘못했는지 이야기해달라는 거죠.

‘아무리 봐도 이 정도까지는 잘못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고 이유도 없이 이러는 거 같은데 죽을 때 죽더라도 이유는 알고 죽읍시다. 왜 멀쩡한 내가 암 4기 되어서 죽습니까. 왜 내가 이렇게 매일같이 아픕니까. 이유나 좀 압시다’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잘못은 딴 것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네가 지금 건드리고 있다는 겁니다.

말할 수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미리 결론을 내린다면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는 해답이 없어요. 그러면 해답은 어디 있느냐. 인간이 쪼개져야 하는 겁니다. 쪼개짐. 원래 천지를 창조할 때 거기는 인간은 없고 땅만 있었지요. 여러분들이 그런 지도를 본 적 있습니까? 항공사진인데 사람이나 가옥이나 공장이나 밭이나 경작지나 이런 것이 전혀 담겨있지 않고 오직 지형만 토양만 깔끔하게 있는 지도가 있어요.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지 않고 있어요. 그 지도 보면 속이 다 시원해요. 땅만 있어요. 천지 창조할 때 그런 모습이었어요. 땅만 있어요. 6일 째에도 모든 것이 땅과 관련이 없으면서도 땅과 관련짓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있었으니 그게 그냥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이 있음으로써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의 고리가 형성됩니다.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인간의 기능을 위해서 인간을 아무 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가 기다리는 땅으로 거기서 태어나게 했습니다. 그 땅이 에덴동산이에요. 에덴동산은 이 세상에 중심으로 거기에 하나님의 지시가 있는데 그 지시 중의 하나가 주목할 것이 바로 선악과나무예요. 생명 나무라는 것도 따로 있는데 그 생명 나무라는 히브리어 품고 있는 뜻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에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경우에만 따먹을 수 있는 것이 생명 나무예요. 그러면 생명 나무만 있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조건이 있어요. 선악과나무를 거쳐서 생명 나무로 가는 겁니다. 선악과나무를 따 먹지 말라는 지시를 유지했을 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유지된다는 말은 인간 내부에 천지 창조를 했던 원리원칙을 인간 내부에 담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요.

그런데 이 담고자 하는 의도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 담고자 하는 의도와 더불어서 저주받은 땅으로 에덴동산과 분리되어서 쫓겨나게 되어있는데 그 쫓겨남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다지 손해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비로소 쪼갤 것이 쪼개서 인간에게서 틈이 벌어지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의도했던 것과 범죄 한 인간이 의도했던 것과 같이 할수 없고 벌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상당히 어렵죠. 예레미야 5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가 먼저 이고 죄는 나중이에요.

우리의 상식은 뭐냐 하면 죄짓고 난 뒤에 용서할 자를 용서해서 구원하겠다는 것이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용서는 이런 식으로 진행될 거라고 생각 하는데 이미 범죄 한 인간과 하나님의 뜻은 이미 틀어졌어요. 틀어진 정도가 아니고 반대가 되죠. 왜냐 하면 인간의 생각은 곧 악마의 생각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이 같이 장단 맞출 이유가 없거든요.

인간의 경우에는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지은 죄를 놓고 그다음 그 죄에 대해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 있다고 인간은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용서가 먼저 있고 왜 용서해야 하느냐를 통해서 그다음에 죄짓게 함으로써 무엇을 하나님께서는 유지하려고 하느냐 하면 너희 생각이 먼저 있고 너희 생각이 부흥해서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먼저 있고 그 창조의 의도가 인간의 의도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죄용서 부분까지 그 원칙을 집어넣는 거예요.

인간들은 죄짓고 난 뒤에 죄에 대해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절차라고 본 건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고 용서가 먼저 있고 그 용서가 용서답기 위해서 너희들은 죄를 필히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거예요. 이 주장이 왜 실효성이 있느냐 하면 굳이 선악과나무를 따먹히게 하는 이유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따먹히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조치를 그냥 받던 인간이 선악과 조치에서 자체적으로 선악과를 가동시켜서 내가 나를 살리는 방식으로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를 아니까 선악 지식을 알았으니까 무엇이 죄고 무엇이 선이고 본인이 이미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거예요. 그러면 선과 악을 알게 되면 어느 인간이 악을 좋아하겠습니까. 선을 좋아하겠지요. 그러나 악도 짓겠지요.

내가 선을 짓고 모자라는 이루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만 하나님께 용서를 청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라고. 그러면 하나님도 좋고 인간의 존엄성도 살리고 하는 이런 아이디어를 배후에 악마가 인간에게 그렇게 부추긴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레미야 5장에서 “이 땅에서 이 도성 가운데서 단 한 명이라도 진리를 찾고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내가 이 도성을 멸망 안 할게”라고 이렇게 제시하는 이유가 어떤 인간도 단 한 명도 진리를 알고 진리대로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를 분명히 합니다.

아무도 “용서해 주세요”라고 요구할 권한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도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용서는 숨어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용서 안 해요. 인간을 용서해 버리면 뭘 용서하느냐 하면 ‘선악과 따먹어도 괜찮다’가 되어버려요.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으면 순수 죽음, 그냥 지옥 죽음을 결정했는데 주님의 결정을 번복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은 어떤 인간도 인간에게 용서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먼저고 죄를 나중에 짓게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두시는 거죠.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을 죄 안에 가두어 두시는 거예요. 죄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용서가 용서답게 나오기 위해서는 죄인과 의논하거나 협의할 필요 없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 용서가 용서답기 위해서 새로운 인간에게 용서를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죄를 대표적으로 다 짊어질 인간을 이 땅에 보내시는 거예요. 보내시려면 보내시는 그 인간이 기존의 인간과 섞여서는 안 되겠죠. 안 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인간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님을 배척해야죠. 이러한 이야기가 성립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 창조는 흙에서 만들었잖아요. 욥이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골조를 만들고 뼈를 만들 듯이 했다고 하는데 본문 10장 9절에 보면 “기억하옵소서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이라고 했단 말이죠. 그러나 새로운 인간은 흙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살과 피로 만들어요. 새로운 인간이 살과 피에서 나옵니다.

번식 방법이 이상해요. 번식 방법이. 엄마 아빠가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이 태어나는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다는 말입니다. 천국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살과 피로 만든다는 이것이 마지막 약속 새 언약인데요. 내 살과 피를 주장하는 이유는 어떤 인간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본인이 나서서 먹을 위인은 이 땅에 아무도 없다는 점이 장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서서 살과 피를 마실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장점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는 부활 신앙은 그건 종말을 구체화 시키는 거예요. 좋아들 하지 마세요. 부활한다는 말은 다 죽인다는 뜻이에요. 다 죽이기 때문에 우리가 기대하는 살고자 하는 모든 삶은 부활과 상관없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의 살과 피를 우리가 시작해서 그것을 먹을 수 있는 방법같은 것은 주님께서 전혀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죽을 자는 죽어야지 주님이 왜 그 방법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까. “한 사람이라도 이 도성에서 진리를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내가 살려줄게”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은 주님의 진리로 다 망해야 해요. 우리는 신종코로나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다시 퍼지고 이것이 일 년 갈지 이년 갈지 모른다고 하면 사람들은 속으로 울어요. 결혼식 11월로 미뤄놨는데 11월에 퍼지면 결혼식 또 계약 취소되는데 어쩌나 어쩌나 하면서 울지요.

그래서 그런 자들을 향하여 이 세상에 나타난 자들이 있어요. 예레미야 14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라고 나와요.

그 예언이 뭐냐 하면 “너희들은 멸망하지 않는다”라는 겁니다. 뭐 이건 근거도 없어요. 마구잡이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너희들은 잘될 거야”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레미야 5장 30절에 보면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진짜 천상회의에 참석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것은 확정된 것으로 보거든요. 그런데 땅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받지 않은 성신을 받지 않은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은 선지자들은 이 땅에서 거짓을 예언하기를 “평안하다. 아무 일 없다. 긍정적 마인드를 가져라”라고 자꾸 이야기하는 거예요.

가수 인순이가 불렀던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게 되면 기가 차요. 기가 찹니다. 진짜 더러운 세상이다. 사람들이 긍정 못 해서 환장을 했어요. 긍정 못 하고 희망을 못 줘서 환장을 했어요. 희망 없는 것이 행복인데. 희망 없는 것이 행복이에요. 희망을 가지면 이건 결핍 때문에 자기가 점점 더 넥타이 매는 것처럼 진짜 숨이 막힙니다.

진짜 백인 경관 와서 흑인 모가지를 한 번 밟아줘야 해요. 8분 44초 동안. 하여튼 전부 다 거짓말뿐이에요. 거짓말. ‘잘 될 거야’ 뭐가 도대체 잘 된다는 건지. 뭘 봐서 잘되는 거예요. 뭘 봐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가 뭘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옷 잘 빼입은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보려고 나왔느냐. 선지자냐? 옳다”

바로 선지자는 사막에서 나오는 거예요. 광야에서 오는 겁니다. 너희들이 기다리는 강자가 아니라 진짜 메시아 진짜 보낸 선지자는 약자예요. 약한 자. 모든 사람이 기대를 걸지 않는 약한 자라고요. 강한 자가 아닙니다. 전부 다 강한 자 되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 지금 욥도 마찬가지예요. 욥도 자꾸 뭔가 분통함이 있고 자기 보기에 서글픔이 있는 거예요. 어쩌다가 내가 인생 이렇게 되었는가. 이런 서글픔이 있어요. 그래서 자꾸 묻는데.

마태복음 26장 59절에 보게 되면 그 당시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사람들이 자꾸 물어요. “네가 누구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성전을 사흘 만에 짓는다는 메시아냐?”라고 자꾸 묻는 겁니다. 자꾸 묻는다는 것은 세상이 기대하는 그 증거로써는 접근할 수 없는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에 내가 기대하는 그런 방식으로 예수든 메시아든 주께서는 보낸 적이 없어요.

인간이 기대하는 예수, 인간이 기대하는 삼위일체, 그건 다 교회가 사기 치려고 교인들에게 그렇게 가르친 거예요. 이 땅에는 어떤 누구도 진리를 찾고 자력으로 의를 행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평안할 권한도 권리도 없어요. 욥보다 더 심한 고통이 매일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 앞에 ‘왜 저를 이렇게 합니까?’라고 따질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 성도들이 이런 말씀을 보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살과 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새 피조물이거든요. 예수의 살과 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어떻게 만들었고 과정은 어떻고 절차는 어떠냐를 이야기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할 수 없는 거예요.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새로운 피조물 된 겁니다.

우리 자신도 미치겠어요. 설명할 길이 없어서 미치겠어요. “네가 금식 며칠 해서 성령 왔느냐”라고 물어도 그런 식으로 온 것이 아니거든요. 금식 기도해서 온 것도 아니에요. 자기를 낮춘다고 성령 온 것도 아닙니다. 몰라요. 왜 왔는지를 모르겠어요. 왜 맥아리 없이 십자가에 죽었던 분이 바로 나를 살리고자 대신해서 죽으셔서 살과 피를 내신 하나님의 창조주인 것을 그분이 우리에게 새로운 형상을 집어넣은 바로 그 형상 자체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모르지요. 성경 봐서 그렇다고요? 성경을 보면 그게 보입니까? 백번 보면 그게 느껴집니까? 안 느껴지지요. 웬 글자가 있냐고 그러지요. 글자뿐이지 그게 어떻게 우리에게 무슨 실효성 있게 다가옵니까.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형상은 어디 있느냐.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는 존재는 우리의 육은 맨날 틈이 벌어지고 깨져요. 나라고 하는 그것의 틈이 찢어져요.

매일같이 ‘나’라고 하는 ‘나’가,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고 싶은 ‘나’가 주님의 형상에 의해서 내게 생기는 가짜 형상과 내 존엄함이 완전히 매일같이 깨짐을 당하고 바닥 침을 당하는 거예요. 까불지 말라는 말이죠. 살려준 것도 고마운 줄 알아야지 뭐 더 살려고 살려달라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안 살아도 되잖아. 안 살아도. 예수님이 이미 살았으면 예수님만으로 되었으니 더 이상 이 땅에 살 이유 없잖아.

굳이 살게 하신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 살게 해주었다는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증인 되기 위해서 살려준 것뿐이에요. 여기 있는 교인들 중에서 다음 주에 누가 안 보일지, 누가 또 돌아가실지, 안 그러면 없던 분이 새로 올지 그것은 아무도 장담 못 하는 거예요. 그건 우리 소관도 아니고. 우리 자신도 내일 아침을 장담 못 할 입장에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쉽게 말해서 우리는 내 이름은 사라졌고 숨겨진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주민등록에 있는 내 이름은 아무 의미도 없는 그런 이름이고 겉과 속 바깥에 있는 내 이름은 의미 없고요, 속에 있는 내 이름, 주의 이름으로 사는 그것이 우리 바깥에 행실로 존재로서 도착해야 해요. 내 안에 도착해야 하는데 우리가 살려고 하다 보니 우리가 그것을 틈이 없이 꽉 누르니까 주께서 그 틈을 매일같이 찢어버립니다.

내가 살려고 찢어버리면 그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용서가 나와요. 너를 용서했잖아. 용서했으면 됐지 네가 왜 또 나름대로 네 영광과 네 자존심과 네 가치를 위해서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의식하고 예민하고 그럴 필요 없잖아. 이미 용서했잖아. 죄인인데 용서했잖아. 세리와 창기인데 용서했잖아. 그러면 됐잖아. 뭘 더 원해. 용서로 충분하지. 매일같이 용서로 충분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조한 의미도 모르고 왜 우리에게 생명 나무를 먹게 하신 이유도 모르고, 내가 원하는 나 되고자 부질없는 노력을 했습니다. 몸부림쳤습니다. 주께서 은혜 주셔서 용서가 용서되게 그것을 찢어버리니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가 찢어짐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 용서가 바깥으로 나와서 예수님만 증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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