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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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 15:58 |
분열된 자아
2020년 6월 7일 본문 말씀: 욥기 10:1-6
(10:1)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불평을 토로하고 내 마음이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10:2)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시옵고 무슨 까닭으로 나와 더불어 변론하시는지 내게 알게 하옵소서
(10:3)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추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10:4) 주께도 육신의 눈이 있나이까 주께서 사람처럼 보시나이까
(10:5) 주의 날이 어찌 사람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해와 같기로
(10:6)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들추어내시나이까
욥은 하나님을 상대로 끝장 토론에 나섭니다. 같은 인간들 하고는 상대하고 싶지 않는 겁니다. 새로운 사실을 더 얻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욥은 자신이 죽음으로 향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후회 없게 할 말 다 하겠다고 나섭니다. 자신에게 고난을 주시는 주님이 평소 욥이 생각한 하나님상과 다르다고 느낍니다.
따라서 스스로 자신을 수정하는 것이 곤란함을 아는 욥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먼저 제시하고 하나님의 입장을 충분히 듣고 싶어서 일치성을 갖추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욥이 모르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면 펼칠수록 인간의 자아는 당구공처럼 딱딱하게 더 내부적으로 굳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자아가 굳어지게 되면 모든 가치와 의미와 최종 자기 안으로 집약되어 ‘나의 위한 단일성’으로 종결됩니다. 나를 비켜가는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인간은 반발하게 마련입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은 이 세상에서 생기지도 마세요”라고 항변하게 됩니다. 즉 나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 되기를 고집하게 됩니다.
하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욥의 이러한 항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프니까 고함지르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고함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욥은 줄기차게 오해하는 것은 고통이 찾아오는 것이 자기에게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따라서 욥이 아무리 몸부림치고 자체적으로 반성을 한다할지라도 결국 어서 빨리 고통이 자기에게서 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리고 그 고통의 사라짐으로 마음 편하게 사는 ‘나’를 상정한다면 욥은 전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점은 해결은 이방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에서 이루어집니다.
레위기 16:8에 보면,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고 되어 있습니다. 대속죄일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에 의해 두 마리의 염소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염소는 속제죄물로 죽어야 하고 다른 한 마리는 그냥 외로이 광야로 보냅니다. 정처없이 떠돌다 죽기 위해 말입니다.
즉 한 염소는 이스라엘 진영 한복판으로 끌고 오고 다른 한 염소는 그 성막이 있는 곳으로부터 점차 저멀리 멀어지게 합니다. 이 염소가 아사셀 염소입니다. 아사셀 염소나 속죄 염소나 둘 다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외로이 벌판으로 떠나야하는 염소는 속죄되어야 할 백성의 죄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즉 염소가 떠나야 되는 광야는 위험하고 불결한 땅입니다. 속죄되지 못한 상태의 땅입니다. 저주가 작렬하는 대지입니다. 그러하기에 나머지 한 마리의 염소는 여지없이 속죄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죄 때문에 염소가 희생되어야 된다는 말은 곧 만약에 속죄되지 않는 상태의 인간들은 아사셀 염소처럼 비참하게 대지(땅)가 주는 처벌을 다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는 두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염소와 같이 두 가지 내용을 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에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마 26:39) 예수님께서 땀방울이 핏방울되기까지 기도하신 것은 “내 원대로 되게 하옵소서+내 원대로 되지 않게 하옵소서”입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소원이 선행되었지만 그 소망에 다른 소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이 그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그 뜻을 받들 새로운 자아가 발생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아직까지 단독적인 자아의 뜻만 주장하게 됩니다. 스스로 이 자아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통해 깨트리실까요? 마태복음 16:4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자아성을 문제 삼기 이전에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을 보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제대로 지적하는 것은 특수한 자아로서 다루어진 선지자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요나입니다. 요나 2:2에 보면,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이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이 세상 자체가 쓰레기 같은 동네라는 겁니다. 요나는 그것을 몸소 경험했어야 했습니다. 요나가 빠진 세계는 지옥 같은 세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지옥 같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이것은 곧 개인적으로 바르게 산다고 해서 고통이 오지 않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욥은 오해하기를, 자꾸만 본인의 잘, 잘못에 따라 고통이 오고 아니오 가 된다고 여깁니다. 욥이 고통하는 것은 욥의 잘못과 상관없이 그냥 온 것입니다. 마치 고통이 오기 전에 욥이 평온하고 풍부하게 산 것이 결코 욥이 선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욥은 개인적인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본인을 비롯해서 다른 인간들이 함께 속해 있는 이 세상이 온전치 못한 세상인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욥에게 또 다른 문제점은, 욥이 평소에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온 셈이 된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어떤 혜택을 입게 되면 마치 자신이 그만한 혜택을 받아도 마땅한 존재인양 오해하기 마련입니다. 즉 ‘나’라는 존재를 위하여 환경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 속해 있는 환경이란 인간이 손댈 수 없는 시스템으로 가동됩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있는 존재라고 자부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그 어떤 살아있는 증거를 더 근원적인 요소에 특정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을 분해하면 분해할수록 그 자리에는 살아있는 증거보다 죽어있는 증거가 더 풍부하게 드러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계속 속고 있습니다.
이 속임 당함에 의해서 자신의 등급을 계속 끌어올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은혜는 은혜가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즉 나 자신답지 않을 정도로 괜찮아 보이는 이미지까지 자신이라고 우기고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요청하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만사에 감사보다 짜증을 부리게 됩니다.
이러한 욥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지경이 어디까지인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4강-욥기 10장 1~6절(분열된 자아)20200607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0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내 영혼이 살기에 곤비하니 내 원통함을 발설하고 내 마음의 괴로운 대로 말하리라, 내가 하나님께 아뢰오리니 나를 정죄하지 마옵시고 무슨 연고로 나로 더불어 쟁변하시는지 나로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학대하시며 멸시하시고 악인의 꾀에 빛을 비취시기를 선히 여기시나이까, 주의 눈이 육신의 눈이니이까 주께서 사람의 보는 것처럼 보시리이까, 주의 날이 어찌 인생의 날과 같으며 주의 해가 어찌 인생의 날과 같기로 나의 허물을 찾으시며 나의 죄를 사실하시니이까”
욥이 하나님을 상대로 아예 끝장 토론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 토론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면 하나님답게 하세요. 제발 이렇게 갈구지 마시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갈구셔서 도움 되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점잖으신 하나님께서 점잖게 처신하시고 애꿎은 의로운 나를 구박하거나 학대하지 마시고 정 할 일 없으시거든 나쁜 사람, 악한 자들을 족치셔야지 나같이 선한 사람을 못살게 굴어버리면 선한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저는 원치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그런데 욥이 모르는 것은 신약의 상태를 모르죠. 하나님은 악한 자를 놔두고 유일하게 선한 자, 의로운 자를 족친다는 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욥은 상상도 못 합니다. 의롭기 때문에 족치는 겁니다. 선하기 때문에 족치는 겁니다. 그 이유가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욥은 그냥 질문할 뿐이죠. 그런데 이 질문도 그냥 무의미한 질문이 아니고 오늘날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말씀을 대해도 다시 세상에 나오면 우리 육신의 자리를 그대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자리라는 거, 육의 자리라는 거, 육에서 와서 육으로 계속 가는 이 성깔, 성질을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식으로 하나님 앞에 비치느냐를 욥이 우리를 대표해서 깔끔하게 이렇게 보여주니 아프기는 욥이 아프지만, 우리 개인 입장에서 상당히 고맙습니다. 지금 이 욥이 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발설하고 있지만, 우리 마음 속에는 이 노골성이 깊이 억눌린 채 있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대들어. 내가 참아야지. ‘내가 참아야지’라고 하는 것은 참는다는 것은 일이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스프링 누르듯이 꾹 누르고 있을 뿐이죠. 그런 점에서 욥은 상당히 용감하고 솔직합니다. 물론 욥도 처음에는 안 그랬겠지만 속에 있는 할 말을 그냥 다 해버립니다. 왜냐 하면 이미 끝장이기 때문에 할 말 하고 죽으나 못하고 죽으나 어차피 마지막 갈 때까지 갈 판인데 이왕 죽는 거, 평소에 내장되어있는 하나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고 죽자 해서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자기처럼 선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자기를 갈구는지 묻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 같으면 자신 같이 약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그렇게 갈궈서 도대체 뭘 얻어내려고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반항을 하죠. 이러한 반응을 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하면 되겠어요. 이러한 반응을 하면 할수록 욥에게 구성되는 것은 뭐냐 하면 오늘 본문 절에 “내 마음, 나” 2절에 “내가 하나님께, 나” 그 다음 2절 끝에 “나로 알게, 나” 쭉 나오는데 6절에도 “나의 허물, 나”가 나옵니다.
첫 번째는 욥이 외치면 외칠수록 ‘나’가 점점 더 굳어진다는 사실, 나라는 것이 갈수록 더 확고하게 다져진다는 겁니다. 자아가 깨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강렬해진다는 거죠. 두 번째는 이 두 번째가 중요한데 어떤 체험을 하게 되고 내가 예상 못 한 어떤 고통이 오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느냐면 “네가 평소에 안 속는다고 하면서도 일평생을 속고 살고 있다”라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뭔가 하나님 쪽 말고 다른 쪽에 속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반발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입니다.
두 번째 하면 첫 번째 다 잊어버리죠. 첫 번째는 뭔가 외치면 외칠수록 내가 점점 자기방어체제가 강렬해지고 내가 나라는 것이 더 강렬해진다는 거예요. 이게 첫 번째예요. 요한계시록 보면 사람들이 7년 대환란 받으면 회개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환란을 받으면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욥의 이야기 같으면 점점 강렬해져요.
반발하게 되죠. 뉴턴의 법칙처럼 ‘작용 반작용’이라고 작용 오게 되면 거기에 반발하는 작용이 같이 작용한단 말이죠. 이게 첫 번째고요, 두 번째는 그렇게 작용하면서 자기는 선하고 의롭다고 하지만 그동안 욥이 누리고 받았던 그것이 사실은 욥이 잘나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냥 준거거든요.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 줄 때 나빠서 고난 준 것이 아니고 그냥 줬잖아요.
마찬가지로 고난 이전에 고통이 없을 때도 그냥 줬는데 받은 욥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착각을 하느냐 하면 착해서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자아 외에 다른 요소가 욥으로 하여금 자기 정당성을 갖추도록 속여온 거예요. 속임수에 넘어간 거예요. 속임수에. 그래서 오늘 문제 해결은 두 가지 다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는 자아 문제 해결해야 하고요. 자아가 깨져야 해요.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도대체 우리가 누구에게 자꾸 솔깃하고 누구에게 자꾸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가. 속아 넘어가는 자아의 성질은 어디서 왔는가. 속아 넘어가는데 귀신이에요. 속아 넘어가는 이유가 매사 생각하는 것이 나 잘되도록 내가 이익되도록 내가 편하도록 내가 행복하도록 이런 것에 꿍꿍이를 갖고 여기에 삶의 목적을 두다 보니까 주의에서 뭔가 조금이라도 오게 되면 ‘역시 나는 정당해. 나는 훌륭해. 나는 이만한 것을 가질 권한 있어’라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속여 먹는 거거든요.
그래서 첫 번째 경우에 해결점은 이방인이니까 언약있는 이스라엘에서 해답을 찾아야 해요. 레위기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대 속죄일에 염소를 2마리 잡아요. 한 마리 염소는 잡고 속죄제를 드리고 다른 한 마리 염소는 남겨두었다가 광야 저편 아사셀로 보냅니다.
광야 저편은 어느 쪽이냐 하면 방향이 이스라엘 하나님이 계시는 성막이 있는 쪽과 반대 방향으로 보냅니다. 이스라엘 성막 중앙에 속죄하는 제사 제도가 마련되어 있거든요. 마련되어 있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보내요. 그러면 아사셀로 보낸다는 말이 뭐냐 하면 쉽게 말해서 지옥으로 죽음으로 보낸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죽기 전에 건져야 하거든요.
죽기 전에 건져야 한다는 말은 죽을 때 되면 더이상 건질 수 없는 그 파탄의 지경에 가는 것을 똑같은 염소 2마리 잡아서 한쪽은 이스라엘 편에 남겨두고서 속죄제로 쓰고 다른 쪽 편은 속죄의 의미와 동일한 의미로 속죄의 의미가 무슨 의미냐 하면 죄를 없애는 의미니까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죄를 구경하기 위해서 한 마리 염소는 이스라엘 방향과 반대편으로 가게 해버려요. 그러면 거기에 저주가 기다린단 말이죠.
여러분들이 학창시절 소풍갈 때 예쁜 꽃을 꺾다가 보면 집합하라는 소리도 듣지 않고 예쁜 꽃을 따라 또는 네 잎 클로버 딴다고 가다 보면 잘못하면 사고 납니다. 왜냐 하면 예쁜 꽃들이 하필이면 절벽 끝에 있어서 이쪽 편에는 절벽 있는지 모르는데 막상 가보면 낭떠러지가 있는 그런 경우 있지요. 아찔한 경우. 심지어 어떤 욕심 내는 학생은 절벽 중간에 꽃이 있는데 저것 안 따면 내가 후회할 것 같아서 그 말썽꾸러기가 내려가서 땀 뻘뻘 흘리며 꽃 따서 올라오죠.
유혹스럽다는 말은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은 말로 봐야 해요. 특히 선악과 따먹은 경력이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염소 두 마리를 한쪽은 이스라엘 편에 다른 한쪽은 저주받는 편에 보낸다는 말은 자아가 뭉쳐지면 안 되고 자아가 둘로 분열되어야 해요. 인간은. 당구공이 두 쪽으로 쪼개지듯 나뉘어야 해요. 그 딱딱한 당구공이.
성령을 안 받은 사람은 자아가 달랑 하나밖에 없어요. 아브라함이 아브람으로 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으로 살았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는 말은 두 개의 이름의 내용이 방향이 서로 반대 방향이라는 뜻입니다. 두 개의 이름.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확정된 팔자, 운명을 말합니다. 두 개의 서로 반대되는 방향의 운명이 한 인간 속에 같이 두 조각으로 들어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끄집어내신다는 말이에요.
왜 그런 방식을 하시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바로 그 방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뭐라고 하시느냐 하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놓고 결국은 그 내 뜻대로 안 되고 아버지의 뜻대로 응답이 된 거예요.
이 점에 대해서 굉장히 흥미로운 점은 내 뜻대로 마시라고 기도하고 결과적으로는 아버지의 뜻이 새로운 예수님의 뜻으로 합치가 된 겁니다. 뭐 기도를 해 봐야 알지요. 기도하게 되면 내 뜻이 있어요. 내 뜻이 있으니 답답해서 기도한단 말이죠. 정기적으로나 아니면 답답할 때 아니면 돌발적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이런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주세요.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는데 마지막에 뭘 붙였느냐 하면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붙이는 거죠.
앞에서 쭉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 뜻은 기껏 이 정도밖에 생각할 수 없고 단단한 나의 이 곤궁에 빠진 진솔한 나의 마음입니다. 내가 쥐고 싶은 것은 이것 하나밖에 없습니다’라는 이건데 그걸로 끝나면 그건 그냥 이방 종교죠. 불교나 갓바위나 그냥 보통 종교나 똑같지요. 그런데 성도는 뭐냐 하면 ‘이게 내 뜻인데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는 뜻은 아버지 뜻이 침투한 거예요.
더 정확히 말해서 그런 어려움을 유발시킨 분이, 그래서 기도하게 하시는 분이, 그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일의 시작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벌어지게 했단 말이죠. 나는 조용하게 살고 싶은데 나는 기도고 뭐고 하기 싫은데 주께서 갑작스럽게 곤궁에 빠지는 일을 발생 시켜가지고 가만히 있는 나를 기도하게끔 조치하셨음을 기도 가운데 내용으로 그걸 집어넣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기도하게 된 것도 아버지의 뜻 맞지요? 그래서 아버지 뜻대로 제가 왔습니다. 나는 이것 때문에 짜증 납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할 때 그 사람은 기도를 통해서 교환 교체가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당구공 같은 딱딱한 나에서 이런 나조차 아버지의 작품이고 아버지의 결과물인 것을 내가 수용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도록 기도를 통해서 바꾸어 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러고 난 뒤에 ‘내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가 아니라 아주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 벌이신 일이니까 예수님께서 알아서 예스가 되도록 모든 것이 오케이가 되도록 하실 줄 믿습니다’라고 기도를 끝내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목사님, 기도했는데 안 기뻐요”라고 하는데 저는 주기도문만 해도 기뻐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그 한 구절 한 구절만 생각해도 그 앞에서 나라는 것은 진짜 힘없고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왜냐 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내가 어떻게 까불고 촐랑대도 그건 아버지 뜻에 이미 포함이 되어 있는 시나리오와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그러면 ‘내가 짜증 난다. 내가 화난다’라는 자체가 막장 토론에서 그 현장토론에서 내가 살해당한 샘이 됩니다. 새로운 나로 인해 교체되어 버렸단 말이죠.
아사셀 염소를 다시 이야기한다면 두 개의 염소를 가지고 하나를 보내고 하나를 두고 이렇게 헤어지게 만드는 것은 인간이 그냥 아담에서 물려받은 그런 자아로는 그냥 마귀 짓만 할 뿐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제사에 합류하는 염소는 합류 되서 귀한 염소지만 그 똑같은 자리에 있던 그 현장에 있던 다른 염소는 지금 지옥으로 가잖아요. 광야에서 빠이빠이 하는 거예요. ‘잘 가라. 저주받아라. 이 염소야’라고. 가버리란 말이죠.
‘이 더러운 것아 가버려라. 지옥 가거라’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그냥 있으면 모르죠. 뭐가 새로운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법이 준비된 자아가 와야 기존의 내가 나 같은 것은 폐기처분 해야 할 쓰레기인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당구공이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돼요. 누가 와서 공을 쳐야 하잖아요. 치죠. 쳐야 한쪽 당구공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 자아와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인간은 욥처럼 하나님 앞에 하는 일마다 생각하게 되면 자꾸 부르짖고 대들고 따지고 반항하고 불평을 토로하고 왜 이런 식으로 인간은, 욥이 우리를 대표해서 보여주니까, 그렇게 살아가는가. 거기에 대해서 상당히 과학적인 사실과 연관해서 보면 알기 쉬워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원리가 있는데 거기에 보면 방정식이 하나 나와요. E=mc^2
핵에너지를 움직이는 미국의 거대한 항공모함 갑판에 보면 영어로 ‘E=mc^2’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습니다. E=mc^2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정지되어있는 물체는 그 자체에 에너지가 있다. 정지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전까지는 움직이는 것만 에너지가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것도 힘이 나오지만 움직이는 거 말고 물체가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 자체로 에너지가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에너지와 물질량은 서로 교환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교환이. 그래서 원자폭탄이 그 원리로 만들어진 거잖아요. 물질 속에 있는 에너지가 폭발해버리니까 히로시마 나가사끼에서 수십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인간은 살아있는데 쪼개 보자는 말이죠. 인간은 분명히 살아있다. 팔 하나 없어도 살아있어요. 속에 장기 하나하나도 움직여요.
움직인다, 움직인다를 계속 조사해 보니까 나중에 보니 정지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살아있다는 어떤 부분도 살아있는 것은 없다가 되어버려요. 왜냐 하면 더 쪼개고 쪼개 보니 그것은 생명이라고 할 수 없어요. 생명 그 이하 수준이거든요. 어떻게 기계 같은 조립품들이 모여서 어떻게 살아있는 인간이 되느냐. 이게 과학에서는 난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주 똑똑하니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하나는 죽어 있는데 그들의 시스템은 살아있다고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시스템. 모든 것이 시스템이거든요. 이걸 성경에 인용하면 뭐냐 하면 흙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육신을 알 수 없는 악한 시스템이 인간을 가동시키고 있는 겁니다. 악한 시스템이.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죽인다는 말은 뭐와 동시에 끈을 잘라내느냐 하면 악마가 인간을 주무르고 인간을 갖고 놀던 그 작용을 스톱시키고 이제 그만하라고 정지시킨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육체, 인간의 육,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 자체는 산 것이 아닌데 물질에 뭔가 덮어진 것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추가적으로 갖고 노는 그것이 살아있어요. 그게 악한 귀신이란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
내가 안 믿을 줄 알았어요. 진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데 마태복음 16장 4절에 보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세상이 뭐가 악하냐. 인생은 내가 노동해서 산다. 왜? 나는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내가 이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땅을 파고 곡식 심고 곡물 재배해서 인간의 지혜를 짜내서 그런 식으로 해서 살아있는 나를 하루하루 더 살게 한다.
자연은 살아있다. 아니 죽어있다. 아니 그건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자연은 살아있고 죽어있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는 짐승이나 돼지를 고기를 잘라서 삼겹살 구워 먹든지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주님께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눈에 안 보이느냐고 하시면 하는 말이 “네가 살아있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네가 속한 환경과 결합해서 다시 한번 너를 봐라”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그게 어디 나오느냐. 요나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면 요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요나 2장 2절에 보면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스올이라 하는 것은 지옥이죠, 내가 지옥, 음부, 쓰레기장, 신약에서는 게헨나, 이런 쓰레기장에 쓰레기로 내가 들어왔습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요나를 신약 식으로 쓰레기장에 집어넣었다는 말은 너는 쓰레기에 합당하는 거예요.
이 말은 너 자신이 누구냐가 중요하지 않고 네가 속해 있던 환경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그 환경 속에 너를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선지자 되게 했고 거기에 심어놓은 거예요. 내가 사느냐 죽느냐는 하등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태어난 이 세상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경악스럽게 악하고 음란하고 대들고 하는 세상인지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 나도 거기에 합류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의성 근처에 안계라는 곳이 있어요. 쌀이 많이 나는 그 안계에 가다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 거기에 산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제일 규모가 큰 쓰레기장이 있습니다. 쓰레기장. 지옥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쓰레기장에 아이로 태어났다고 보세요. 우리는 얼마나 불평하겠어요. 사는 것이 힘드니까. 그런데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만 쓰레기장에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도 같이 합류할게”
너는 쓰레기장에 태어나서 나름대로 쓰레기장만 탓하기보다는 살아있으니까 살아남겠다고 부지런히 평생을 자기 긍정해 가면서 역시 나는 살아남았다고 애를 쓰는 거예요. 그중 하나가 욥이에요.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욥이 자아가 하나인 것이 문제고 두 번째는 욥은 지금 환경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환경이 악한 환경이지만 나는 나름대로 선했다는 욥의 주장이 그게 바로 욥 네가 속아 넘어간 거라는 겁니다. 그것은 욥의 잘못이 아니고 환경을 몰랐다는 말입니다. 환경을. 우리가 사는 이 세상 환경을.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어요. 여기는 그냥 멈추면 안 될 것 같아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정신병자입니다. 정신병력을 가지고 태어나요. 아버지 어머니 정신병자이고 아들딸 다 정신병자예요.
정신병자가 뭐냐 하면 사는데 힘드니까 누구에게 의지하느냐 하면 “아이고 아버지, 아이고 누구요”라고 말하면서 본인이 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와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라고 말 하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내 뜻만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왜? 당구공처럼 내 자아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뭔가 일이 힘들고 긴장된다 싶으면 이미 돌아가신 분까지 거론하면서 힘을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 부르는데 그 사람은 울산 근처에서 남자인데 해녀처럼 물속에서 캐내는 일하는 해남이에요. 스물두 살 고정우라고. 그 사람이 트로트 대회 나가서 노래하는데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긴장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혼잣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할매요, 나 지금 노래 부릅니다”라고 해요. 이미 돌아가셨지만 힘을 기를 좀 달라는 거죠.
이거나 교회 와서 “쭈여~쭈여~”라는 이거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주께서는 자아를 분열하라고 하고 깨라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한패 먹어가면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답게 나만 챙기려고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와 딱 합치되는 성깔로 살아가는 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어쨌든 간에 나만 행복하고 나만 편하게 살라고 힘을 부여해 달라는 거예요.
이거나 그거나 오늘 본문 욥과 똑같아요.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왜 저를 괴롭히십니까? 왜 저를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할 때 욥이 모르는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너보다 더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이 욥의 불평보다 더 힘들다는 거예요. 욥이 안 힘들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뭐가 힘드냐. 자꾸 누군가, 악마죠, 누군가 나를 속인다는 거예요.
세상은 힘들어도 너는 힘들면 안 돼. 세상이 신종코로나 다 걸려도 나는 걸리면 안 돼. 자꾸 내가 나를 평생을 두고 줄기차게 속임수를 쓰고 있다는 거예요. 속임수를. 계속 속이고 있는 겁니다. 제가 주일학교 설교할 때 그런 예를 들었는데 평생 바다 구경도 못하고 그냥 강원도 산골에서 감자만 캐는 할머니에게 손자가 있는데 어느 날 손자가 성질내면서 막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가 “손자야, 무슨 일이 있느냐?”라고 물으니까 “삼성 라이온즈가 또 졌어요. 벌써 삼 연패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까 “삼성 라이온즈가 뭐고?” “대구 거점으로 하는 야구팀입니다” “그런데 네가 왜 성질을 내냐?” “제가 삼성 라이온즈 팬이고 잘 알거든요” 할머니가 지혜로우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아는 게 문제다”
그러니까 나는 태어나서 삼성 라이온즈는 나를 위해서 계속 이겨줘야 하고 내가 아는 모든 것들은 내 뜻대로 다 성공해야 하고 성사되어야 하고 만사형통해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게 이 세상을 모르는 내가 나를 평소에 속여온 그 성질들이에요. 속여 온 거예요. 끊임없이. 안 그래도 되는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은 내 뜻대로 다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허경영이라면 나도 거기 가서 폭동해서 이참에 49인치 티비하나 훔쳐올까. 이런 생각할 수 있지요. 왜? 모든 인간은 속아 넘어가기 때문에. 유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셔서 속지 않으시는 분이 마지막 때에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죽여버린 겁니다. 평소에 악마에게 얼마나 속임을 당했으면 자기 자신이 악마에게 속임을 당했다는 그 말 자체가 그렇게 듣기 싫어서 “네가 죽어라. 내가 미쳤나. 내가 죽게. 네가 죽어라”라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너 자신도 모르고 있다고 우리에게 지적질 합니다. 욥은 아직도 주님 만나기 전이라 복음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불평이 나오는데 이 과정을 지금 우리가 필히 필수적으로 겪으셔야 하고 이걸 알아야 해요. 그래야 내가 작아지면 십자가는 더욱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에게 일어나는 일이 사실은 지금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을 저희들이 몰랐습니다. 욥이 탓할 것이 아니라 욥을 보면서 우리를 탓하고 탓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우리를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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