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선과 복선
2020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9:25-31
(9:25)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9:26)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9:27)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 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9:28)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9:29)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9:30)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9:31)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이 최종 의미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자신에 관한 내용으로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아프니까 그러합니다. 아프면 모든 관심사는 닫혀지고 오직 통증이 일어나는 바로 그곳에만 정신이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만사가 다 귀찮은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그 어떤 일보다 자신에 관한 일이 최우선입니다.
이것이 일반인들의 일상입니다. ‘지금 몸이 아프냐 아니 아프냐’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은 자기 몸이 아프고 불편하면 오늘 본문에서 욥이 내뱉는 바를 그대로 내어놓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육체의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같은 육체들을 다들 갖고 있기에 ‘내가 너보다 낫다’라는 것도 실없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고통의 극한에서 욥이 하나님에게 항변하듯이 하는 이유는, 평소에 모든 인간들이 자신에 대해서 본인이 줄곧 평가하면서 살아오고 있음을 뜻합니다. 즉 자신 앞에 자기를 상상해서 설정해놓고 그 ‘나’라고 하는 대상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게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감상(鑑賞)하는 겁니다.
자기로 인해 자기를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대상화된 자아는 본인이 만들어놓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정작 자기를 평하는 자기는 누군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욥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자아에 두고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해대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불쌍한 겁니다.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아파하는 자신이 측은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나서서 자기를 도와주기 위해 하나님을 붙잡고 따지고 싶은데 하나님은 자기를 상대조차 하지 않는 것같이 나타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욥에 있어 ‘하나님의 부재(不在)’입니다. 여기 아니 계신 것입니다. 욥 본인이 ‘여기 있음’이 되니, 그러한 자기 눈에 띄지 않으니 ‘부재’가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나는 여기 있는데, 내가 상대하고 싶은 하나님은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재’와 ‘무’를 구분해야 합니다. ‘부재’란 ‘내가 있는 여기에 같이 없는 것’이 부재입니다. 반면에 ‘무’란 아예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회사에 손님이 와서 부장님을 찾을 때, 회사 부하직원이 말합니다. “부장님, 오늘 부재하십니다. 출타 중이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그 부장이 죽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손님 입장에서 ‘부재’나 ‘무’나 결과적으로 마찬가지라는 기분이 들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 세상을 ‘단선(單線)’구조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복선(複線) 구조’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나를 최종 의미의 마감으로 설정한 이 노선말고 다른 노선에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모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 ‘다른 노선’이라는 것을 나를 최종 의미로 여기는 한 한 그 노선은 곧 ‘없는’ 것입니다. 즉 부재와 무가 같은 것이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눈에 안 보이고 자기에게 안 느껴지니 없는 겁니다. 아플 때는 이것이 노골화되지만 인간의 평소의 생활도 역시 모든 의미의 마감은 자기로 종결되는 식으로 꾸준히 살아온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인간들의 일상의 내막을 소개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욥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는 막힌 인생이 됩니다. 이 막인 인생이 곧 이방인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늘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서 항상 옳게 살려고 자기가 자기에게 독려하고 반성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자신이 설정은 허구적 자아상일 뿐입니다.
이점을 해결하는 해답은 역시 이스라엘의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은 상상한 자아상 붙들고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시조(始祖)가 다른 특이함을 보이는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이 주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에 의하면, 율법대로 살지 못하면 저주받고, 율법대로 살아야만 복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는 최종 의미가 일반적인 인간의 본성에 구멍을 뚫고 더 뒤쪽으로 나아가는 바가 됩니다. 즉 이 세상 어떤 경우라도 나는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고집이 언약을 만나면서 하나님께서 이 희망을 좌절되어 버리는 겁니다. 즉 “네가 의미의 최종착점이 아니라 나의 언약이 최종착점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동적으로 자기에게 쏠리는 단선적 의미선을 떠안게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복선적 의미를 보입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7:13-14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를 통해서 이 세상은 모두들 단선으로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 싶으신 겁니다. 이 복선의식은 필히 성도가 최종 의미마감은 본인으로 멈춰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욥은 지금 본문에서, 의미가 ‘자신의 고통 당함’으로 멈춰져 있지만 이스라엘은 더 나아가서 언약의 의미를 인간이 가리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가지 최종 의미는 항상 동반되어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어떤 인간도 자신의 최종 의미를 자진해서 마다할 위인은 없습니다. 따라서 부재한 다른 노선에서 이 단선을 치고 들어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8:7-8에 보면,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땅에 무슨 글을 쓰시면서 인간들의 자기 최종성의 한계를 뚫어버립니다. 그럴 때, 없다고 여긴 세계가 새롭게 열립니다. 곧 나를 정죄하는 세계가 열리는 겁니다. 마치 무대 세트 뒤에 비밀 공간이 새롭게 공개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부재의 세계가 지금 나의 있음의 세계를 공격하는 겁니다.
만약에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는 순간, 이제는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저주의 돌이 율법대로 주어질 겁니다. 성도에게 복이라는 것은 자신의 우수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아니라 부재했다고 여기 세계에서 새로운 공격이 들어오는 순간입니다. 단선의 세계의 옆구리가 터져버리는 겁니다.
모세만 지도자로 여겼던 광야의 이스라엘 삶,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던 겁니다. 그 약속까지 의미를 확장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있어도 그들은 ‘하나님 없음’으로 해석했을 겁니다. 이들은 안식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히 3:19-4:1) 이스라엘은 언약을 보이기 위한 사명자들이었습니다. 단선이 아니라 복선이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 아님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2강-욥기 9장 25~31절(단선과 복선)2020052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25~31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나의 날이 체부보다 빠르니 달려가므로 복을 볼 수 없구나, 그 지나가는 것이 빠른 배 같고 움킬 것에 날아 내리는 독수리와도 같구나, 가령 내가 말하기를 내 원통함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 즐거운 모양을 하자 할지라도, 오히려 내 모든 고통을 두려워하오니 주께서 나를 무죄히 여기지 않으실 줄을 아나이다, 내가 정죄하심을 입을진대 어찌 헛되이 수고하리이까,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 잿물로 손을 깨끗이 할지라도,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
욥이 탄식하면서 자기 자신의 처지를 그대로 노출 시킵니다. 욥이 말하는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우리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욥처럼 이런 불평이 자동적으로 나온다는 것을 일단 인정을 합시다. 인정하는데 욥이 놓친 게 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단선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고 복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일을 합니다.
천국이 있으면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은 지옥과 동반해서 이것이 구성이 되고 나타납니다. 좁은 길이 좁은 길만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좁은 길에 들어서면 자동적으로 넒은 길에 어떤 사람이 가고 있음이 눈에 들어오게 되어 있어요. 구원을 안다면 구원되지 못한 상태가 어떤 상태이고 구원되지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단선이 아니고 복선입니다. 두 개가 나란히 등장하는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욥은 지금 25~31절까지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단선이지 복선이 아니에요. 자기 하소연만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엇과 관련이 없느냐 하면 자기에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 뜻을 자기로 마감을 시켜버립니다. 내가 아픈 것을 최종적으로 그것을 유일한 실제적 사실로 마감을 시켜버립니다.
그런데 ‘나’로 모든 게 마감되는 것이 그 단선적인 사고방식이 복선을 가리고 있는 거죠. 막고 있는 겁니다. 이 점을 오늘 본문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무엇과 관련지어야 하냐면 이스라엘 역사와 반드시 관련지어야 하는 겁니다. 이러면 단선적인 것에 의해서 마지막은 나가 마지막에 의미가 되는 겁니다. 그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하지만 자기 몸이 아프니까 결국 모든 관심사가 ‘나 아프다’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어버려요. 나 아프다. 대통령 선거 누구 찍었느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아파요. 내가 아픈 게 최종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단선이 되어버려요. 복선이 아니에요.
누가 넓은 길이고 좁은 길인지, 누가 천국 가고 지옥 가는지 이런 것이 복선이 안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면 바로 뭘 모르느냐 하면 ‘없음’과 ‘부재함’을 혼동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없다는 것과 부재함을 혼동해요. 욥은 자기가 없어지면 그걸로 의미의 마감이 자기이기 때문에 없어지면 모든 것이 부재가 되고 부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부재라고 합니다. 그래서 부재가 되고 없는 ‘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회사 갔는데 “부장님 계십니까?”라고 할 때 “부장님 부재했습니다”라고 하면 부장님 부재라는 말은 바빠서 밖에 나가셨다는 이야기죠. 그러나 찾아온 사람 입장에서는 없는 것은 마찬가지거든요. 다시 예를 들어서 그 직원이 “부장님 죽었습니다”라고 하면 이건 부재가 아니고 없음이에요. 죽었다는 것은 없음이 되죠. 그러나 찾아온 사람에게는 부장이 죽은 거나 지금 내가 만나고 싶은데 부재하거나 똑같은 겁니다.
이게 사람이 볼 때 모든 것을 내가 있음을 가지고 보니까 모든 게 부재하거나 ‘무’도 복선이 아니고 단선이 되어 버린 거예요. “저 부장은 왜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내 눈에 안 보이느냐? 아, 죽었구나”라고 하면 직원이 “죽은 게 아니고 부재한다니까요. 바빠서 밖에서 일보고 계십니다”라고 해도 내 눈에 안 보이니까 죽은 거예요.
이런 고집은 말이 안 되죠. 모든 욥의 시작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지금 내가 아프다는 거, 그렇게 되어 버리면 이게 복선이 나오지 않고 두 개의 선이 나오지 않고 달랑 하나만 나온다고요. 이게 바로 이방 민족의 한계입니다. 이방 민족은 무엇이 없느냐면 수백 번 이야기 하지만 또 이야기합니다. 이방 민족은 언약이 없어요. 약속이 없어요.
약속은 복선입니다. 이 언약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반드시 복선입니다. 그런데 언약이 없어버리면,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언약도 모르고 계시도 모르고, 하나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신을 믿자고 되어버리면 중요한 것은 신을 믿든 부처를 믿든 역시 내가 여기 멀쩡하게 행복하게 건강하게 돈 많이 벌면서 느긋하게 내가 있다는 것에 그게 마지막 최종 의미로 마감이 되어버려요.
여러분들이 십자가 복음 알고 누구에게 전도할 때 왜 십자가 복음이 정말 좋은 이야기이고 기쁜 이야기인데 왜 내가 아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는 이게 먹히질 않는지 그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해요. 그 이유는 그들이 욥이고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방인의 특징은 내가 여기 있다는 거, 그것이 하나님 있다는 것보다 더 시급하고, 다급하고, 절박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있든 없든 내가 굶어 죽으면 내가 안 된다는 거예요. 내 문제로 끝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거기서 더 들어갑니다. 이스라엘은 배후에 조종이 있어요. 언약이 있어서 이스라엘을 쥐었다 당겼다 쥐었다 쥐었다 당겼다 계속 언약이 가지고 놉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벌 받는다가 아니라 네가 손해라는 것이 아니라 네가 그렇게 하면 언약이 손해가 되고 언약이 상처를 입고 언약이 무시당한다는 거예요.
제가 방금 두 가지 일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느 쪽인지 감 잡으실 거예요. 나는 나로 마감되는지 아니면 나를 사용하시는 그분의 심사와 그분의 마음이 더 중요한지 평소의 우리 일상은 어떻습니까. 그야 뭐 물어보나 마나 몸만 건강하다면 까짓것 주님만 생각하죠. 그런데 몸이 아프다고 봅시다. 지금 당장 내가 암 4기 말기가 되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몸이 아프고 병원에서 2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을 때 “2개월 산다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는 벌써 죽었어요”라는 소리를 제가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벌써 죽었는데 그동안 산 것만 해도 덤으로 산 건데 까짓것 2개월 1개월 그런 것 가지고 저에게 힘들겠다는 위로조 이야기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여기 존재한다는 것이 최종 마감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없어 보이지만 저에게는 부재합니다. 어디 출타하셔서 여기 안 보인다뿐이지 내가 있다는 것이 방해할 뿐이지 실은 주님이 함께 계십니다”라는 말을 췌장암 4기에, 그렇게 몸이 아플 때 과연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나로 마감되는 의미를 언약까지 나갈 수 있는 능력은 우리에게는 일단 없습니다.
전혀 없는 거예요. 이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믿는 척하지 말고. 욥이 우리의 모습이에요. 욥과 우리는 똑같아요. 우리는 안 아프기 때문에 아프면 언제든지 욥 같은 고백만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여, 제가 뭘 잘못했는데 이렇게 아파합니까?”라는 말이 오늘 이야기예요. 붙잡고 이야기하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편지 붙이는 사람처럼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내가 잡고 이야기할 틈도 안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하나님을 잡는 것은 마치 독수리가 자기 챙길 것 챙겼다고 좋다고 상대도 안 하고 달아나는 것처럼 “주께서는 자꾸 독수리처럼 달아나려고만 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어도 내가 주님의 손에 잡히질 않으니까 내가 누구에게 이 하소연을 늘어놓습니까? 내가 어디가 잘못되어서 이렇게 인생이 꼬이고 힘듭니까?”라고 하나님 붙잡고 묻고 싶은데 하나님은 상종을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제가 깨끗하게 손 씻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아예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보는 그 점에 대해서 내가 아니까 제가 상종 안 할게요. 그다음 31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개천에 빠지게 하시는데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겠죠. 그처럼 주님은 나를 꼴 보기 싫다고 하시는 태도인데 이유나 좀 압시다. 도대체 내가 왜 하나님에게 꼴 보기 싫은 사람인지 나와 상종 안 하고 말을 안 섞으려고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는 것이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이거는 누구나 아프면 그렇게 돼요. 아프면. 굉장히 억울하죠. 평소에 우리가 얼마나 억울한 게 많아요. 억울한 것을 당할 때 이런 하소연은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해답이 뭐냐 하면 네가 너밖에 모른다는 겁니다. 네가 기껏 네 증거밖에 안 보여준다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좁은 길, 넓은 길 이야기 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지키면 천국 못 지키면 지옥이라는 언약적 발언도 지금 욥에서는 나오지를 않고 있어요. 안 나오고 있어요. 이게 욥의 한계인 동시에 오늘날 우리의 한계인 것을 지금 욥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끝나면 안 되겠지요. 나만 있고 하나님도 기도 응답도 없으니까 없는 거라고 하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이걸 건들어 주는 방법이 뭐냐. 그게 요한복음 8장에 나옵니다.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오늘 제목이 무의미한 일상인데요, 지금 욥이 생각하는 미래는 자기가 경험했던 과거를 다시 만나는 것뿐이에요. 내가 상상한 미래는 다 어디서 나오는가. 그 자료가 과거에 경험 한데서 나왔어요. 경험 한데서. 그러니까 단선이라니까요. 다른 데서 끼어들지를 않고 계속 자기 단선만 고집하면서 이 선 따라가면 천국 간다고 이것만 우기고 있는 거예요.
복선에서 김밥 옆구리 터지듯이 뭔가 치고 들어와야 하는데 치고 들어오질 않아서 고통이니까 고통받아서 점점 자기에게 집약이 되고 반응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는 거예요. 옆에서 끼어들고 치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 끼어 들어오는 것이 요한복음 8장에 나오는 현장에서 바리새인에게 간음한 여인이 눈에 띄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언약 완성의 방법입니다. 신약은 여러분 알다시피 신약이 오게 되면 유대인이고 이방인이고 차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모든 있는 자는 죄 있는 자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잘난 척하고 단선밖에 모르는 자기만 구원되었다고 여기는 그 바리새인에게 난데없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를 데려오게 합니다.
데려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여자에게 돌을 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바리새인이 하는 거고 그건 단선이지 복선이 아니에요.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과 같은 편에 서 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내가 돌로 쳐서 저런 인간은 죽여야 하고 내가 잘났다고 하고 싶은데, 돌로 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내가 잘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현장을 의도적으로 주님께서 유발시켰어요.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바리새인 자기 손으로 데려오게 만들어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들이 예수님을 테스트하게 만드는 상황 속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죄를 여인에게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죄를 죄 있다고 지적하는 그쪽에서 죄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어려운데, 진짜 어려운데 지금 욥의 문제가 뭐냐 하면 욥은 자기를 하나의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대상으로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여기에 끌어당기는 거예요. “하나님 저분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이러할 거라고 상상한 대상체를 자기 앞에 세우고 남들에게 평가를 받고 점검하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모르는데 모르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평가 대상으로 자기 앞에 세우는 일은 인간이 숨길 수 없이 매일같이 그 일을 하고 있어요. 그걸 가지고 반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인간은 반성적 존재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반성한다고. 반성을 하려면 반성의 판사가 있어야 하고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대상이 본인이 판사고 본인이 대상이 되어 있어요. 나 괜찮았어? 나 또 실수 없었어? 맨날 실수하면서 이러고 있죠. 실수해도 잘 커버했지? 이걸 지난 강남 강의에서 선방했다고 이야기했죠. 선방.
인간은 자기를 반성할 때 항상 무슨 여지를 주느냐 하면 ‘그래도 선방했잖아. 내 인생 이렇게 산 것만 해도 이 힘든 인생에서 이 정도면 선방했다’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자기를 좋게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 누구와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매일같이 나와 나와 쉴 새 없이 지껄이고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지껄여요. 자기가 자기보고.
이미 해답은 나왔어요. 선방했다고. 그러면서 스스로 자위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유튜브 강의 녹취하면서 우리 주위에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데 제가 타자라는 제목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사람들이 남이 들어오는 것을 심히 무서워해요. 왜냐 하면 평소에 나만 상대하기 때문에 무서워해요.
그래서 그 남의 자리에 대신 뭐를 하느냐면 개나 고양이를 키워요. 말 잘 듣거든요. 꼭 내가 나를 길들이는 것을 그대로 다 보여주고 있어요. 개나 고양이를 키우면. 그래서 요즘은 하도 많이 키워서 개나 고양이를 안 키우면 저 사람은 무슨 자신감 가지고 세상을 살라고 만만한 개나 고양이를 안 키우느냐고 생각하는데 사실 남을 대할 때 자신감 있는 사람은 개나 고양이 키우지 말고 남편이나 자식이나 아내를 키우면 돼요.
내가 잘났음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 거리를 공들여서 키우는 거예요. “여보, 당신 그 정도 하는 것이 다 내 덕인 줄 알아라”라는 이게 사는 보람이고 즐거움입니다. 왜? 그 정도만 해도 내 인생 선방했잖아요. 내 인생 선방한 증거가 있을 때 나는 잘난 존재로 증명이 되고 그게 확인되는 거예요. 이게 단선이에요. 이게 단선이라고요. 선이 하나밖에 없어요.
누가 나를 지적하겠어요. 이렇게 착실한데.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제일 꼴보기 싫은 지저분한 인간들 딱 앞에 세워놓고 “돌로 쳐라. 자신 있으면 쳐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네가 돌로 쳐야 할 인간을 보호하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네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거예요. 단선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러나 복선에 있는 주님에게는 나는 뭐냐 하면 “네가 만약에 죄 없는 자라면 돌로 쳐라. 자신감 없어? 그러면 너는 나에게 돌 맞아라”라는 뜻입니다.
나에게 돌을 던지고 내가 상상한 나의 근사한 선방하는 이미지에 대해서 주께서 돌을 던지는 겁니다. 내가 건너갈 수 없는 저쪽 편에 계신 주님께서 죄인의 편에서, 내가 욕하고 싶은 죄인의 편에서 나에게 돌을 던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욥이 모르는 욥의 한계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보여줍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면 시조의 두 부류를 보여줘요. 시조(조상). 서로 합할 수 없는 갈라진 두 개의 원천을 제공합니다. 너의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다. 그러나 세상의 아버지는 아담이다. 어느 아버지 할래?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네 아버지다. 아버지가 세상에 있는 아들 될 수 없는 자식을 내가 아들 되게 만드는 작업에 너를 가지고 내가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속에는 뭐가 들어오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는데 이 언약은 신약에 오면 뭐로 드러나느냐 하면 아들 되기에 관련된 언약이 내용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 또 로마서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고 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그 같은 노선, 그 노선 외에는 다른 노선에서는 아들의 나라에 참여할 수 없기때문에 지옥 갑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처럼. 넓은 길과 좁은 길. 주님께서는 항상 두 개의 노선을 제시합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 항상 두 개가 들어와요. 그런데 우리의 무심한 일상은 항상 내가 여기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마지막 의미가 되다 보니까 성경과 무관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나만 편하면 되지. 나만 건강하면 되지. 나만 잘되면 되지. 우리 집안만 행복하면 되지. 맨날 스톱이 어디서 스톱되느냐 하면 나만 잘되면 된다는 것에서 스톱이 돼요. 욥을 보면서 욥의 친구가 ‘야, 너 안 됐다’라고 욥의 친구들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욥은 거기에 대해 억울하게 생각하고. 이 점을 신약에서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면 히브리서 3장 19절입니다.
그 전에 16절부터 보겠습니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쫓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라고 해서 하나님이 언약에 속한 백성들을 광야에 보내면서 그들에게 뭘 뽑느냐 하면 누가 안식에 합격이고 누가 불합격인지를 친히 광야와 만나게 해줘서 보여주는 겁니다.
욥은 아프다 하니까 아픈 자기만 의미가 마감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고통 속에 있으니까 그 고통 속에 있으면서 뭐를 뽑아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줘버려요. 이건 다른 노선이에요. 원망했다고 주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시는 거예요. 거저 주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간음하는 여인을 붙잡아 온 바리새인에게 “돌로 쳐라”라고 해놓고 바리새인 노선 다 간 뒤에 이쪽에 있는 간음한 여인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도 너를 용서하노니”라는 이 말은 뭐냐 하면 “간음한 여인아, 네가 간음했기 때문에 지옥 간다는 그 마감을 더 늘어뜨려라”라는 말이죠. 나는 그저 쓰인 거지 나 하나 천당 가냐 지옥 가냐는 이방인적 관심사예요. 오늘날 세상적 관심사예요.
쓰이는 거, 사명으로 쓰이는 건데 맨날 일상생활은 뭐냐 하면 내가 잘 될까로 마감되어버려요. 너는 쓰이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나와야 하지 최종적으로 내가 나오면 안 돼요.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가 나와야지 내가 주님 앞에 애썼다가 나오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19절에 안식에 참여하지를 못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4장 1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라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단선이 아니고 복선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복선이 되면 우리는 나를 나의 대상자로 삼겠지요. 인간은 자기를 평하니까. 나를 나의 대상자로 삼을 때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나를 노선으로 삼아야 해요.
그래야 주님의 약속이 나의 약속으로 결합 되어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에 살던 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단선밖에 모르는, 최종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 그 노선이 바로 그 앞에 눈에 보입니다. 이게 바로 언약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 안목이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세상에 나오면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습니다.
세상은 단선이 아니고 복선으로 보인다. 좁은 길로 가는 사람도 보이고 넓은 길로 가는 사람도 보이고 천국 가는 사람도 보이고 지옥 가는 사람도 보이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내가 옛날 저렇게 저 주장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미 다 겪었기 때문에 아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자요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욥의 이야기를 충분히 귀담아 들읍시다. 다시 말씀 정리하고 끝나겠습니다. 고통당할 때 욥은 결국은 내가 왜 이렇게 아프냐는 그 이야기밖에 안 나왔단 말이죠. 그렇다면 제가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픈 것도 사명이에요. 아픈 사람에게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닌데 아픈 것도 사명입니다. 실수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니까요.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아픈 것도 복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심하고.
아픈 것도 사명입니다. 어차피 주님이 보는 그 죄에 의하면 돌로 침을 당해야 해요. 주님이 저쪽에 있고 부재하시는 주님이 보기에 나는 돌이 날아와야 마땅한 그쪽 편에 서 있었잖아요. 그쪽 편에 서 있었다는 증거가 뭐냐. 나는 나밖에 모르니까. 이런 내가 왜 이렇게 달라졌죠? 그건 주와 함께 언약이 약속이 주도적으로 나에게, 내가 주도적이 아니라 약속이 주도적으로 나를 잡고 있다 보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언약이 주인공인 거죠.
그러니까 아플 때도 사명이고 그리고 그것이 나아도 사명이고 나았다가 그다음 날 또 아파도 사명이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주께서 조절하고 조정하는 그 대상자로 하나님께서 받아주고 있다는 거, 그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의 주장이 사실은 얼마든지 우리 입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우리의 한계임을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욥처럼 했더라면 불평과 원망으로 마감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이 이제는 아픈 것도 사명인 것을 알려주셔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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