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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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31 15:54 |
판결자
2020년 5월 31일 본문 말씀: 욥기 9:32-35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9:33)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9:34)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9:35)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욥은 신앙적 행함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습니다. 욥이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징벌이 자신의 선행적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해서 단판을 짓고 싶어합니다. 아직 욥은 복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것입니다. “나의 선행이 타인에게 넘겨진다”는 원리입니다.
욥은, 본인의 선행이 최종적으로 본인의 몫으로 돌아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점은 오늘날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은 죽을 때 결국 홀로 죽는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되면 태어날 때도 홀로 태어난다는 논리로 역으로 연결됩니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에 오늘날 사람들은 하자를 못느낍니다.
최종적으로 나만 남는 인생구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중도에 숱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도 그들이 내 죽음을 대신할 수 없음을 한시도 잊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점은 곧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즉 “내 행복은 아무리 해도 남이 공감해주지 못한다. 내 슬픔도 마찬가지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욥은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 극히 사적인 이 고통으로 인해 죽음도 홀로 죽는 죽음이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사정을 알 길이 없으니 하나님과의 단독면담을 통해서 좋은 평판을 얻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신약의 사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의를 타인에게 넘겨 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만 기뻐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만약에 복음을 자신이 이용하는데서 오늘 기쁨이라면 이것은 복음 자체의 기쁨이 아니라 ‘복음을 알게 된 자신’에 대해 기쁨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알게 된 상황은 결코 타인에게 넘어가지 않고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남는데서 오는 기쁨’으로 전환됩니다.
복음은 이런 결과를 낳는 것을 거부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온전히 복음을 수행하신 분에게 도로 종속되는 식으로 되돌아와야 합니다. 복음을 내가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음에 의해서 기존의 ‘나됨’이 파괴되어야 하는 겁니다. 즉 ‘내가 파괴되지 아니하면’ 복음이 나올 수 없습니다.
복음을 아는 순간부터 ‘나를 위한 나’에서 ‘복음을 위한 나’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복음대로 움직이는 좋은 교회 되기’란 복음에서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도 파괴되면서 복음이 나옵니다. ‘복음으로 된 교회’도 복음 앞에서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유일하게 자신의 행함을 타인으로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라는 사실만 최종 남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이처럼 인간은 끈질기게 자기 위주입니까? 이사야 40: 6-8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이 본문에 의할 것같으면 말씀은 하나님 스스로 완성시키고 완료시키십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 인간의 모든 영광은 철저하게 하나님에 의해서 밟혀야 하는 겁니다. 이는 예수님에 의한 복음의 혜택을 끊임없이 방해하는 요소가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독 자아성으로 악마는 인간을 부추깁니다.
이러한 경향은 이스라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은 사람들은, 안식일 그 말씀 자체를 인수받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어떤 식으로 거뜬하게 지킨다는 그 비법 자체를 인수받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율법을 지킨 공로가 여전히 자기 것으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철저하게 근원적으로 자기 부인을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형편입니다. 이사야 53:10-11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결국 살해한 이유를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예수님이 모독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서, 모세 율법을 위반했다고 지적하고, 예수님도 그들을 향해 ‘모세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요 7:49/요 5:45)
욥은 자신의 현 처지가 하나님과 만날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음까지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중보자가 계셔서 이 중보자를 통하지 않고서는 감히 인간을 하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중보자마저 부활하시게 되면 그 어떤 인간도 함부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게 1:16) 그렇다면 오늘날 주님과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 주어집니까? 시편 94:4-7에 보면,
“저희가 지껄이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죄악을 행하는 자가 다 자긍하나이다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출애굽 할 때 다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의 처지에서 나왔습니다.
과연 이 관계성이 계속 유지되느냐를 살피시는 겁니다. 난데없이 누구네 부모가 죽는다든지 누구네 남편이 죽을 때, 그들이 결코 나보다 더 악해서 죽는 것이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만드실 때, 그런 형편에 있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즉 “저도 저 사람과 같은 딱한 처지에 놓여도 당연합니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신자가 취할 태도입니다. 단독적이 아니라 공통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다같이 주님의 속죄의 혜택으로 하나되었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3강-욥기 9장 32~35절(판결자)2020053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32~35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주께서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그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하지 아니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리하시면 내가 두려움 없이 말하리라 나는 본래 그런 자가 아니니라”
욥이 혼자 재판하고 혼자 판결 내리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움에 대해서 욥이 전혀 감각이 없어요. 욥은 과거에 자기가 성실하게 진실 되게 살았던 그 자체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은 새로움을 원하는데 욥은 옛것 가지고 잘 개선하고 수리하면 그대로 통과될 줄 알았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게 되어 있어요. 옛 부대에다 새 술을 담아버리면 새 술도 쏟아버리고 부대도 찢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기쁜 소식은 기존에 우리 자신을 옛 부대로 규정하고 간주하는 거예요. “내가 준 이 복음을 어디 기존의 네 몸 살리려고 그 용도로 거기에 연결을 시키느냐. 네 몸 너의 생각을 파괴하기 위해서 내가 새로움을 너에게 준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욕심이 있어서 기존의 나도 괜찮은 나인 것을 자부하고 괜찮은 나에다가 주님 십자가까지 알았으니 더욱더 괜찮아진 존재로 개선된 줄 알고 질이 더 좋아진 것처럼 그렇게 여깁니다. 그런 오류를 우리가 수정할 때는 욥기를 봐야 해요. 오늘 본문을 보셔야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옛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할 때 궁극적으로 어떤 수작을 부리는지 어떤 식으로 주님에게 마중 나올 때 자기 자신을 정리정돈 하는지 욥이 제대로 보여줍니다.
그런 점에서 욥이 굉장히 고마워요. 그러면 욥이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혼자라는 겁니다. 인간은 죽을 때 혼자 죽는다는 겁니다. 아무도 나를 대신해서 죽을 자가 없다. 이걸 분명히 합니다. 이건 죽기 전에도 그렇고 아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빨이 아픈데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는 거예요.
인간이 죽을 때 혼자 죽는다는 말은 결국 태어날 때부터 이미 홀로 살기 위해서 인간은 홀로 태어났다는 것을 이렇게 논리를 뒤로 가져가서 전체를 하나로 통하는 논리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 인간은 혼자야. 인간은 나밖에 없어’라고 하는데 이걸 철학에서는 실존주의라고 합니다. 실존주의라는 것은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담글 수 없다. 똑같은 강물에는.
그리고 다른 말로 하면 머리 깎는 것은 남이 대신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은 나를 위해서 세상이 적응하라고 있기 때문에 나만 적응 잘하면 그것이 바로 정의다. 그게 선이다. 이런 것들이 실존주의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실존주의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콘테스트(Contest)라고 해서 상황이라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은 나만 잘 되기 위해서 변조해서 변경해서 잘하면 그것이 인생사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게 실존주의라고 하는 건데 뭐 철학적으로 실존주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런 식으로 다 가르쳐요. 교육심리학 기본 원리가 그거예요. 빨리 네가 너 스스로 설 수 있는 인간 만들기. 그것이 바로 교육의 이념입니다. 하나의 우뚝 서서 국가에 이바지하는 시민으로서 네가 서라는 겁니다. 남 의지하지 말고 네가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그건 잠재력이 너의 안에 있다는 거예요.
교사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뒤에서 너의 잠재력을 키워주는 역할만 하지 그 모든 능력은 너에게 달렸다는 겁니다. 이게 몬테소리 교육법이에요. 유치원 선생님이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장난감 가지고 숨어있는 자기 자질 찾기, 숨어있는 나의 능력 찾기거든요. 제가 이야기하니까 여러분들이 낯설지 않지요. 뭐 교육이라고 할 거 없이 우리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는데요.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죠. 그게 나밖에 모른다는 것에 우리의 본성과 악마가 심어준 본성과 너무나 가깝게 접근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자기 잠재력을 키우면 결국 인간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사람이 극대화될 수 있다. ‘나에게 이 정도의 능력이 있었나?’라고 자기가 놀랄 정도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는 이것이 니체의 ‘초인사상’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철학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만 내가 내 안에 들어있는 본성을 뭐라고 표현할까 하는 그게 바로 세상의 과학과 철학이 다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교육받는 것은 하나도 거부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그러한 기본 자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만큼은 극도로 거부하죠. 그러면 성경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배워서 남 주자고 하거든요.
내가 하는 선행이 타인에게 전달이 된다는 것이 성경 이야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이에요. 세상에서 기쁜 소식은 ‘나는 이 정도 자질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알아다오’라는 이게 세상이 이야기하는 복음인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어떤 인간도 인간은 자기가 하는 짓거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구원받는 것은 그런 식으로 구원될 수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본인이 일했지만, 그 혜택을 남까지 연결할 수 있고 넘겨줄 수 있는 분이 등장했으니 그게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게 복음이라는 거예요. 주님 의지하라는 겁니다. 주님 이용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부수고 이제는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종이 되라는 겁니다. 그것이 니체의 초인사상과 대충돌이 되는 겁니다. 이사야 40장 6~8절에 보면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모든 육체는 풀이고 그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일시적인 꽃 같아서 결국은 이게 시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뭐냐 하면 시들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인간을 만드신 거예요. 인간의 모든 영광이라 하는 것은 궁극적인 아름다움까지 이르지 못한다. 도중에 추락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남느냐. 꽃이 시드는 것이 여호와의 기운이 거기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광을 밟아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아, 너의 영광은 내가 짓밟아버릴 거야” 그러면 뭐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라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서는 방법은 밟아야 해요. 내가 안 밟히고서는 말씀이 서는 법이 없습니다.
인간이 파괴되지 않고서는 그 사람 입에서는 복음이 안 나와요. 인간이 자기 부인이 되지 않고서는 절대로 복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아, 교회 나와라”라고 하면 “어머나, 교회 와서 얻을 게 뭡니까?”라고 물으면 “교회 가서 다른 거 얻을 게 뭐가 있냐. 하나님에게 밟혀서 망해도 괜찮다는 그 고백하러 교회 나오는 거지. 내 인생 종 치고 내 가족 망해도 괜찮아. 그래도 기뻐. 왜? 안 망했으면 모를 뻔한 것을 그 기쁜 소식을 알았으니까”라고 고백하라고 교회 나오라고 하는 겁니다.
뭐 코로나 때문에 못 나오고 뭐 때문에 못 나오고 핑계도 여러 가지예요. 망해야 부서져야 복음이 나와요. 인간이 부서지게 되면 인간의 시듦이 나올 것이고 인간의 허접스러움이 나올 것이고 동반해서 나오는 것이 그 허접스러움은 결국은 마지막 죽어서 주님의 심판대에 갈 것도 없어요. 이미 일찍 말씀 앞에 가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말씀 앞에 미리 서게 되면 판결을 미리 받게 되면 인간은 누구나 구원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지금 욥이 얼마나 감사한지 욥은 지금 복음을 몰라요. 아직까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는 다 취해서 주님 앞에 들이댑니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 본문에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라고 했거든요.
이게 우리의 본성이 외치고 싶은 우리가 맘속으로 진짜 하나님 앞에 대들고 싶은 그 본심이 이 본심이에요. ‘주님, 제가 보기에는 제가 하자가 없고 완벽합니다.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인생을 살아왔는데 자신 있습니다. 한번 측정해 주세요. 주님의 눈으로’라고 하죠. 자신만만하다 이거거든요.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 심판하나 보내주세요.
심판하나 보내줘서 정말 남들이 나를 칭찬하는 거 말고, 이제 그것도 지겹고, 목사님 훌륭합니다는 말도 지겹고, 집사님 훌륭합니다는 말도 고만 듣고 싶고, 하나님이 나서서 ‘너 괜찮아. 훌륭하게 살았어. 훌륭하게 산다고 고생했어. 하자 없어. 너 합격이야’라고 이렇게 미리 당겨서 수능 한번 치자고 하는 거예요. 주님에게 판정 한번 하자고 하는 거예요.
이게 욥의 생각일까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되지도 않는 자신감이에요. 그러나 시편 94편에 보게 되면 지금 욥이 하나님의 언약을 몰라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자신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율법을 몰라서 그래요. 자기가 지킬 만한 것만 지켜서 그런 겁니다. 교회 목사가 지시한 것만 완벽하게 숙지를 다 해서 그래요. 그래서 교회는 목사의 지시사항이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고 말씀을 이야기해야 해요. 말씀을.
그런데 말씀이 먼저 목사부터 다녀가야 해요. 제가 지금 죽어도 마땅합니다는 이야기부터 먼저 나와야 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직회 하셨습니까? 그러면 2/3는 통과해야 합니다”라는 건 누구 이야기예요? 어디 성경에 2/3는 통과가 나옵니까. 안 나오거든요. “교회 올 때 양복 입고 와야지 슬리퍼가 뭡니까?”라는 건 누구 이야기입니까?
목사 본인은 슬리퍼 안 신었다는 뜻이거든요. 이게. 바리새인들이 다 그렇게 했어요. 본인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깔보는 재미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발굴하고 찾는 재미로 살아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그러나 로마서 2장에 나온 말씀처럼 “간음하지 말라고 해놓고 왜 네가 간음하고 도둑질하지 말라고 해놓고 왜 네가 도둑질하느냐 살인하지 말라고 해놓고 왜 네가 살인하지”라고 합니다.
그런 율법을 전달한다고 해서 인센티브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 전해서 장하고 율법 어겨도 내가 봐준다는 그게 율법이 아니거든요. 시편 94편에 5절부터 보게 되면 “여호와여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주의 기업을 곤고케 하며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하나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참 어려운 건데 여러분이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율법이라 하는 것은 문자로 되어서 똑같은 버전의 십계명 같으면 십계명이 달라질 수 없잖아요. 그렇게 십계명을 줄 때 그 당시 십계명 해석을 사람들이 십계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 해석한 것을 후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받아 온 거예요.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십계명 규명을 못 지키는 계명이 아니고 지키는 계명으로 전환 시킨 그 내용을 후대가 받기를 원해요.
왜? 선배가 했다면 후배도 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고 그것을 의지하고 싶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할 때 요즘 요즘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떻게 지키는가. 안식일 지킬 때는 해질 일몰 18분 전에 지켜요. 이게 왜 17분도 아니고 19분도 아니고 18분 전이냐면 생명이라는 히브리어가 ‘하이’라고 하는데 자음 헤트에 해당되는 숫자는 8이고 자음 요드에 해당되는 숫자는 10이거든요.
그걸 합쳐야 18이 됩니다. 생명이라는 것을 안식일에 집어넣기 위해서 18분 전에 하고 그다음에 주인아주머니가 촛불 두 개를 피워서 촛불 앞에서 두 손을 모아 세 번을 코로 가져가며 흡입합니다. 흡입하고 그 순서가 끝나면 그다음에 가장이 와서 빵을 들어요. 이걸 일주일마다 한 번씩 하는데 그 빵을 들고 축복 기도를 합니다. “대 주재이신 하나님이여, 우리의 안식일을 받아주옵소서”라는 기도를 해요. 기도문을 읊조리고 그다음에 빵을 가지고 일단 식구들과 먹고 어디를 가느냐 하면 회당에 가서 본격적으로 예배드리고 해서 그들에게는 이것이 안식일을 지킨 것으로 되어 있어요.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 말고는 못 지키게 되어 있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남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어요. 실존주의같이 안식일의 혜택을 나 혼자만 달랑 입는다는 생각이 인간의 한계인데 욥처럼 인간의 한계인데 예수님의 안식일은 자기 혜택을 남에게 넘겨줄 수가 있습니다. 그거 예수님밖에 못 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무조건 예수님.
여러분 아시다시피 이사야 53장 12절에 보게 되면 “그분이 범죄자 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는데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화목제물 또는 속건제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더 구체적인 것은 이사야 52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값없이 팔렸으니 돈 없이 속량되리라”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기억나는데요. 어떤 재개발 지역에 업자가 와서 집을 부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막 달려와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고함을 지르는데 “작업중단! 작업중단!”이라고 하면서 손을 흔들면서 오더란 말이죠.
“위험한 작업장에서 아주머니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니까 이 집은 손대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왜? 자기의 추억이 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시집와서 고생하고 도배도 하고 살림도 살고 아이들 장가 시집보낸 추억이 있는데 이걸 그렇게 냉혹하게 다 헐어버리면 자기 추억은 어디서 찾느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럴 때 작업반장 하는 말이 “아주머니, 값을 다 치렀잖아요. 값을 치렀어요”라고 하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 제가 예수 믿는데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 나쁜 생각을 하고 이런 생각 하면 나는 어떻고 어떻고”라고 하고 있으면 주님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야, 내가 너를 값을 주고 샀잖아. 보상금을 다 치렀잖아” 보상금은 쳐다보지 않고 자기 행동 바르게 했는지 옳게 했는지 그것만 쳐다보고 있다고요. 이게 무슨 기쁜 소식이에요.
그 아주머니는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나를 바르게 하는 행동이 나를 구원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제가 지금 우리교회니까 이렇게 큰소리치죠. 다른 교회 가면 벌써 허리끈 붙들려서 벌써 내려 감을 당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처럼. 우리 행동으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요. 누가 값을 치렀다니까요. 그 값은 예수님만 치를 수 있어요. 어떤 인간도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복음을 안 듣고 교회를 안 나오느냐. 나는 내 잘난 맛에 살겠다는 거예요. 누가 뭐래도 내 잘난 맛에, 내가 이 정도로 잘났다는 그것만큼은 나는 예수가 와도 배척하면서 이것만 쥐고 있겠다는 겁니다. 독해요. 독해. 정말 독해요. 그래가지고 인생을 한번 살아 보죠. 인생을 살다 보면 이런 고백이 나와요.
‘이 나이 먹도록 세상을 잘 모르나 보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 나이 먹도록 사람을 잘 모르나 보다. 사람은 보여도 마음은 보이지 않아’라는 고백. ‘고맙소’라는 노래입니다. 진심을 다해도 나에게 상처를 준다고 하는데 당신은 살려고 남에게 상처 안 주었습니까? 상처 안 줬습니까? 집에 열 식구 있는데 화장실 하나밖에 없다.
남이야 동생이 지금 설사가 났든 어쨌든 자기는 신문 보면서 느긋하게 일보고 안 했어요? 사람은 살다 보면 자기 우선이에요. 자기가 영순위예요. 영순위. 모든 게 경쟁 사회인데 남에게 양보해서 언제 오지수는 합격합니까? 경찰 공무원 시험 합격해 놓고 옆에 떨어진 친구에게 “참 안됐다. 네가 해라”라는 게 됩니까? 이 세상이 실존주의인데. 이 세상은 안 돼요.
그저 투쟁밖에 없어요. 밟아야 살고 열 군데 가게 망해야 내 골목식당 하나 사는 겁니다. 그게 세상입니다. 양보라는 것은 이용할 가치가 있어야 양보하죠. 욥은 지금 복음을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지금 미리 나를 심사해 달라는 거예요. 왜? 자기가 얼추 고아와 과부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다는 이 말이거든요. 이 고통은 나에게 너무 과한 고통이고 처벌이라는 겁니다.
지금 욥은 선악 체제를 입고 있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이 나쁜 짓 해서 오는 줄 알고 있어요. 이것이 죄 없는 예수님이 남의 죄를 씻기 위해서 대신 고통당한다는 그런 고통도 있다는 사실을 욥은 지금 모르고 있어요. 아직 하나님을 안 만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중에 만나요. 나중에 만나지 지금은 못 만나거든요.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겠는데 너무 과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바깥으로 자기 생각이 떠날 수가 없어요. 갇혀 있어요. 꼭 욕조 위에 떠다니는 거품 같아요. 백날 90 평생 떠돌아도 나중에 거품은 욕조 물에 다 묻히잖아요. 주님께서 생각하는 바깥의 세계, 주님이 어떤 안목 가지고 보는지를 본인이 몰라요.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값을 주고 내가 샀다. 너는 용쓰지 마라. 너 버티지 마라. 몸부림치지 마라” 값을 치렀다는 겁니다. 값을 치르고 너를 샀어. 이제부터는 너는 나의 증인으로서 너 자신이 아니라 바뀐 주인인 나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 살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이게 바로 신약적으로 오는 기쁨이에요.
욥기를 다시 보면 여기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32절에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라고 되어 있잖아요. 이게 욥이 아직까지 하나님의 이스라엘 언약을 몰라서 이런 소리 합니다. 이스라엘의 언약 속에 보면 하나님의 모습이 사람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고아와 과부의 모습으로 등장해요.
누군가와 같이 애굽에서 빠져 나왔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가정이 파탄되어 버려요. 일부러 하나님이 이렇게 한 거예요. 일찍이 고아가 되게 하든지 남편이 갑자기 알 수 없는 병으로 죽게 만들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옆에 고아가 되지 않고 과부가 되지 않은 그런 사람들에게 고아와 과부를 보면서 네 사정이 내 사정이라고 일치감을 갖고있는지 여부를 테스트하는 거예요. 이게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잖아요. 이게 남의 일로 보이느냐는 것이 성령의 역사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고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실 때 그게 예수님만 국한되는 고백이 아니고 너도 같이 내놓아야 할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의 것이 나에게 넘어왔다는 것이 티가 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가는 코스가 남의 코스가 아니에요. 우리 갈 길이에요. 좁은 길로 갔으니까.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유복자가 되어서 아버지도 모르면서 아버지 돌아가시고 엄마 품에서 아이가 태어났다고 합시다. 아이가 맨날 엄마에게 “아빠 어떻게 생겼는데?”라고 묻는데 사진도 한 장 없고 동영상도 없어요. 그럴 때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납골당에 가서 아빠 여기 있다고 그렇게 보통 이야기하잖아요.
엄마가 “아빠 여기 계시다”라고 하면 아이가 굉장히 냉철한 판단을 가진 장차 물리학 교수가 희망인 아이라면 납골당 문 열어서 단지 꺼내 가지고 뼛가루 쏟아버립니다. 가루 속에서 아빠 얼굴 찾는 거죠. 욥이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대면이 됩니까. 하나님 만나면 죽어요. 욥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우리가 주님 만나면 죽어요. 지금 이 낯짝은 아담 계통 낯짝이기 때문에 못 만납니다. 그리스도 영광의 얼굴이 되어야 해요. 주님만이 아버지와 만날 수 있듯이 장차 우리가 횟가루 되고 뼛가루 되어서 주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가 새로운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을 때, 그때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과 같이 만나게 되는 거예요.
낄끼빠빠인데 낄대 끼고 빠질 때 빠지는 것도 모르고 주제 파악도 못 하면서 어떻게 이 얼굴 가지고 “주님 한 번만 보여주옵소서. 키가 몇 센티입니까?” 예수님 키 알아서 뭐 할건데요? 주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줄 것은 주님께서 한시적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왔을 때는 주님이 마리아를 닮고 하지만 주께서 부활한 이상은 주께서 만지지 말라고 했어요. 네가 만질 몸이 아니에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의 얼굴이 왔을 때는 얼굴이 해같이 빛나서 눈부셔서 보지를 못 해요. 요한계시록 1장에 반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기록했어요.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너무나 모르고 있어요. 점점더 우리는 우리가 원치 않아도 늙어 갑니다. 결국은 우리가 소멸해요. 사라져버려요. 그래서 미리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야 해요.
옮기는 것은 어떻게 옮기느냐. 우리 쪽에서는 안 되고 주님께서 생명이 되셔서 사망 속에 씨를 뿌려야 해요. 사망 속에 파종을 해야해요. 씨를 뿌리듯 주께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시죠. 뿌려지면 이 씨앗이 자랍니다. 자라면서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 것을 기쁨으로 인정하게 되어요.
대단한데 억지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자꾸 세뇌하지 말고 정말 살아가면서 나 때문에 남들이 피해 본다는 거, 내 고집과 내 자존심 이런 것들로 인해 나도 모르게 타인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요. 그 정도로 더이상 나는 살 가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아까 기도할 때 했지만 미리 예상한다는 거, 그 예상한다는 자체가 죄예요.
그런데 예상 안 하는 인간이 없어요. 전부 다 예상해요. 예상한다는 말은 내가 뭔가 잘 되려고 한다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우수해지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방향을 십자가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거기 가게 되면 이미 우리는 확정 되었어요. 그걸 감사해야 해요. 부활이라는 것은 그 십자가의 무모함이 안정화 된 영역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지금 부활의 영역이에요. 십자가가 안정되어 있어요.
우리가 거기서 아무리 잘난 척해도 십자가로 비춰버리면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항상 그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날 때 욥처럼 대들 것이 아니라 주님의 판정에 의해서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가 잘나서 혼자 구원받고자 하는 이 심보가 아무리 복음 듣고 교회 오래 다녀도 여전함을 우리는 실감하게 됩니다. 주여,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오히려 감사하고 기쁨이 넘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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