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쭘한 인생
2020년 6월 21일 본문 말씀: 욥기 10:15-22
(10:15)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10:16)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10:17)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10:18)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10:19)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10:20)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10:21)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10:22)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의 탄식이 계속 됩니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에게 하소연합니다. 이 ‘하소연’은 신학적인 논쟁하고 전혀 무관합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프니까 아프다고 고함치는 것과 같습니다. 양심이나 성격과는 상관없습니다. 참을성이 부족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아프니까 아프다고 외치는 것 뿐 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아프게 하는지를 욥이 모르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쪽에서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 욥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냥 곱게 죽게 해달라는 겁니다. 아픈 것도 아프지만 이 ‘아픈 육신’ 자체으로 타인에 나서기에 부끄럽다는 겁니다.
남들이 뭐라고 흉볼 것인지 뻔하기 때문입니다. 뭐라고 오해하고 비난 할지 뻔하니 육신의 고통에다 타인의 조롱이 합쳐져서 정신적으로 더 아픈 겁니다. 따라서 죽은 마지막 순간만큼은 편안하게 죽여달라고 합니다. 이 요청은 욥의 나름대로 믿음을 표현한 겁니다. 즉 아프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욥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왕 아파서 죽을 것 같으면 지금이라도 죽음으로 직행케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욥이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세계를 마치 도피처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고통스러운 세계를 피해서 고통이 멈추거나 덜 아픈 세계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욥에 있어 아픈 것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을 우리가 대하면서 욥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욥의 탄식을 지금도 우리의 일상 속에서 수시로 반복되고 있다는 겁니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즉 “건강하고 편안히 살고 싶다!”가 감출 수 없는 우리의 본심인 겁니다. 욥이 겪는 육체적 고통은, 동일한 육체를 지닌 우리도 겪고 있고 동일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겁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의 ‘이동 경로’를 통해서 비로소 정립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윤리는, ‘내가 여기 있음’으로부터 의미를 끄집어냅니다. 즉 내가 얼마나 아프지 말고 편하고 행복할 수 있느냐를 목표로 자기 행위를 조정해보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피조물이 끄집어내는 의미대로 움직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의 세상 이해란 ‘과거+현재’로 결합된 데서 정립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미래+현재’ 방식으로 끄집어냅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자손’이 곧 ‘다윗의 주’기 되시는 방식입니다.(마 22:41-46)
세상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낳지만, 하나님에게 있어 의미 있는 것은 자식에 의해서 아비 존재가 정립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과정은 ‘출생→죽음→음부에 가심→부활→승천→재림’입니다. 이 과정에서 비롯되는 의미로 인하여 기존의 인간 행복 위주로 편성된 의미의 구조는 그 그물망이 다 찢어져버립니다.
예를 들면, 욥은 음부(죽은 자들이 가는 곳)를 지상의 육신의 고통에서 면제되는 곳으로 보지만 잠언 27:20에서는,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잠언 30:15-16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음부는 결핍으로 목말라하는 곳입니다. 모자람에서 오는 고통을 끝없이 견뎌내야 하는 곳입니다. 불만족스러움 자체가 징벌이 되는 곳입니다. 전도서 9:10에 보면,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이는 곧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이 이미 지옥이 되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출생했다는 것 자체가 모자람과 결핍에 시달리는 징벌이 기다리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호사스럽고 풍족하게 살더라도 살아 남아 있는 것 자체가 피곤함이요 벌받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이렇듯 땅 자체가 ‘선행된 음부의 세계’ 역할을 하는데서 나타납니다.
시편 85:10-11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으로 이사야 45:8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 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욥이라든지 이스라엘이라든지 오늘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시려는 ‘진리’를 위하여 이 지상에서 힘든 인생을 의미 있게 사는 겁니다. 결코 인간은 편하고 행복하고 고통 없이 사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아닙니다. 이 하늘과 땅의 만남에서 진리가 용천수처럼 터져나오는데 그 분출되는 물줄기를 표시하는 병뚜껑 역할하는 것이 바로 언약의 성도요 예수님이신 겁니다.
이 진리에 의하면, 인간은 안 죽고, 안 아파야하는 것이 아니라 이사야 26:19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12:2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고 되어 있습니다.
즉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일괄적으로 죽여버립니다. 그래놓고서 누가 영광스럽게 부활될 것인가는 언약을 완성하신 주님의 자율권으로 의해서 결정됩니다. 인간들 입장에서 음부는 인간에게 일체 계획이나 목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 9:10)
이것은 인간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정해버린 지옥과 천국의 분류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천국이든 지옥이든 그리고 죽음이든 모든 문제는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주님에게 해당되는 문제입니다. 인간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일방적으로 규정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행복을 위한 주님의 세계가 아님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6강-욥기 10장 15~22절(뻘쭘한 인생)2020062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0장 15~22절입니다. 구약성경 770페이지입니다.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 내 속에 부끄러움이 가득하고 내 환난을 내 눈이 보기 때문이니이다, 내가 머리를 높이 들면 주께서 젊은 사자처럼 나를 사냥하시며 내게 주의 놀라움을 다시 나타내시나이다, 주께서 자주자주 증거 하는 자를 바꾸어 나를 치시며 나를 향하여 진노를 더하시니 군대가 번갈아서 치는 것 같으니이다,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무슨 내용이냐 하면 조금이라도 내가 반항하면 주께서 나를 아주 사정없이 밟아버린다는 겁니다. 마치 전쟁할 때 상대방 병마들이 나를 와락 들이쳐서 무참하게 밟고 지나가고 사정 두지 않고 밟아버리죠. 조금 숨 좀 쉰다 싶으면 또 와르르 달려와서 밟아버리고. 그래서 이야기하기를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하기 전에 주민등록이 생기기 전에 무덤으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겁니다.
왜 그것을 욥이 요구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심하게 당하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되게 부끄럽고 수치스럽다는 겁니다. 남들은 멀쩡한데 나만 이렇게 하나님 앞에 독하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그 몰골을 나 스스로 나의 그 모습을 본다는 것이 한심스럽고 수치스럽고 부끄러워서 더는 못산다는 뜻이죠.
그래서 19절에 보면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나를 태어나자마자 바로 무덤으로 옮겨 주시옵소서”라고 나오죠. 태어나자마자 바로 죽음으로 직행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렇게 많이 살았다면 나를 죽일 때 죽이더라도 나를 편안하게 내어 버려두사 평안하게 죽게 해달라는 겁니다. Please~~, 제발, 제발 편안하게 죽게 하옵소서.
‘내가 그 죽음의 곳이 지금 이곳에 살아있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는 덜 수치스럽고 더 평안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뜻은 하나님, 저를 곱게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팠으면 얼마나 힘들었으면. 육체적으로 아프고 힘든 것도 그렇지만 평소에 자기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고 있었어요. ‘누가 아파도 나는 안 아플 거다. 누가 신종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린다’라는 이런 거.
누가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고통이 없을 정도로 나는 정당하게 똑바로 바르게 살아왔다는 거고, 악한 사람은 고생해도 마땅한데 그 악한 놈에게 때리시는 징벌과 고생이 나에게 이를 것은 나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바뀌어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치이니까 이렇게 치인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못 살겠다는 겁니다. 남에게 내세울 것 하나도 없어 그 점이 또한 괴롭다는 겁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보게 되면 10장 9절에 “주께서 내 몸 지으시기를 흙을 뭉치듯 하셨거늘 다시 나를 티끌로 돌려보내려 하시나이까”라고 되어있고 10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젖과 같이 쏟으셨으며”라고 되어있는데 우유와 같이 줄줄 쏟아붓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흘러내리는 내장을 수도꼭지로 잠글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냥 줄줄 새서. 그러니까 내장 자체가 내 몸의 지체 자체가 완전히 설사 난 거 같아요.
쫙쫙 빠지는 거죠. 이제 껍데기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껍데기만 남았다는 말은 골조만 남았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뼈와 심줄만 남고 아무것도 없다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그게 뭐가 필요하다고 이 만큼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면 지금이라도 부끄럽지 않게 그냥 죽음에 넘겨주소서. 15절에 보면 내가 지금 환란 당하는 것을 목격한다는 자체가 나에게 부끄러움이 가득하다고 되어있어요. 머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내가 악해서 이렇게 벌 받을 것 같으면 내가 덜 억울하죠. 악하지도 않고 악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 지은 죄에 대해서 아무리 이리 생각하고 저리 생각해도 내가 누구에게 나쁜 짓 한 적이 없는 거예요. 아무리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도 내가 누구에게 해코지하거나 욕한 기억이 없어요. 욕이 될까 싶어 비타민 C도 함부로 말 못 하고 그 정도로 조심해서 살아왔는데 이건 누구한테도 나쁜 놈이 벌 받는다는 식으로 보이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것도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니고 공개석상에서 동네 전체가 다 알도록 죽이시니까 도대체 내가 이 땅에 나서기가 뭐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욥이 하는 이러한 불평과 괴로움과 한계성 이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육이 갖고 있는 한계를 욥이 대신해서 보여 준다는 것에 대해서 일단 욥에게 고맙고 또 한가지는 욥이 아직도 신약의 상황에 대해서 욥이 모르고 있습니다.
미래적 안목에서 욥은 현재를 볼 줄 모르고 과거적 안목인 ‘과거 + 현재’라는 과거적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최대한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린 결론은 뭐냐 하면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죽여 주옵소서’라는 겁니다. 죽더라도 아프지 말고 그냥 조용하게 그냥 죽어줬으면 더는 소원 없겠다는 거죠. ‘내가 살려고 이런 소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시죠?’라는 뜻이에요. ‘뭐가 더 좋아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라도 좀 편안하게 편히 가게 하옵소서’라는 외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인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면 결국 우리가 이 자리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면 욥과 별만 다르지 않은 그런 고백을 우리가 내놓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왜냐 하면 욥을 경유 해야 주님이 보이니까요. 욥을 경유 한다는 이 말은 십자가를 경유 해야 십자가 아픔을 경유 해야 아버지가 기다리잖아요. 하나님이 기다리신다고요. 예수님의 모델로서 욥은 미리 구약에 주어졌습니다.
그러면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음부란 ‘죽음의 그늘진 땅 또는 무덤’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죽음이라는 것이 나의 문제라고 여기는 것이 욥의 근원적이 문제고 우리 인간의 문제입니다. 죽음이 내가 죽는다고 해서 그게 죽음의 개념이 아니에요. 죽음에 담긴 뜻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죽어도 죽음을 모르게 되어있어요. 왜냐 하면 창조자의 죽음이 아니고 피조물의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미는 창조주에서 나와야 해요. 창조주에서 창조되어야 해요. 창조주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한 의미들을 이 땅에 남겨두는 겁니다. 인간을 위해서 의미가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힘드니까 아프니까 죽여달라 할 때 그 죽음은 본인에게서 나오는 죽음의 의미기 때문에 주님에게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죽는 죽음이 죽음이고 하나님이 사는 것이 생명이지 우리가 사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할 때는 그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했다고 좋아하지 말고 주님의 이동 경로를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개념의 원뜻은 예수님의 이동 경로에 따라서 그때그때 마다 없는 데서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사실. 주님이 죽음을 만들고 주님이 생명을 만드시는 거예요.
욥은 거기에 같이 이끌려 나오는 하나의 효과음 같은 겁니다. 바다에 배가 지나가게 되면 배 근처가 아니더라도 약간 먼 거리라도 거기에 물결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배가 중간에 지나가면 물결이 흔들리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동 경로를 따라서 지금껏 내가 고정개념으로 알고 있던 ‘죽는다, 산다, 인생이란, 행복이란, 천국이란, 지옥이란’이라는 것들이 예수님이 와서 뒤엎어 버리는 겁니다. 그 개념 자체를.
네가 계산하고 과거밖에 모르는 인간이 감히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근거한 유추를 하면서 비슷하게 계산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서 전부 파토나는 겁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주께서 일부러 다 흔들기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동 경로를 하시면서 주변에 던져주는 개념들은 원칙은 어떻게 되는가.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죽여버립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처럼 이렇게 고함치고 아프고 하는 것도 전부 말살해 버려요. 그들이 살아있으면서 자기 딴에 아는 어떤 신학 체계, 조직 신학, 성경 신학, 이런 것들도 죽을 때는 아무짝에 쓸모없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성경공부 백독 천독 하는 거 아무 쓸모 없어요. 예를 들어서 요새 유튜브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시편 읽어주기, 요한복음 읽어주기, 로마서 읽어주기’ 같은 것들입니다.
주무실 때 잠이 안 오신다면 그것 틀어놓고 주무시면 잠 잘~~옵니다. ‘읽어주기’에서 남는 것은 무엇이냐면 잠자는 것밖에 더 있어요? 읽어 줬다고 해서 뭐 아는 거 없습니다. 읽어주는 거랑 내 몸이 실제로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거랑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요.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의 개념 자체가 십자가라는 사건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어떤 이론이나 철학이나 과학도 지옥에서 일어나는 코미디에 불과해요. 코미디. 그냥 웃고 치우는 아무 의미 없는 한바탕 놀이마당에 지나지 않아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이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힘은 발휘되지 못합니다. 어떤 유명한 작곡가가 헨델의 메시아를 작곡했다고 해서 지옥 갈 사람이 천국 가고 할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예수님의 일을 비집고 들어가서 추가할 일은 하나님께서 일체 허용한 적이 없어요. 내가 어떤 사람을 천명 전도해도 그게 내 구원에 전혀 보탬 되지 않습니다. 헌금, 봉사는 물론이고요. 왜냐 하면 그건 다 코미디거든요. 우리는 코미디언이고 환자고 그렇죠. 일괄적인 사실을 먼저 생각합시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다 밀어붙입니다.
그러면 다 밀어내면 뭔가 남는 게 있지 않겠느냐. 남는 건 있는 데 그게 언약이라는 겁니다. 남는 건 언약이에요. 여러분들이 이런 것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어떤 나그네가 말을 타고 가다가 해가 저물어서 자기는 집에 들어가고 아랫동네에 어떤 불 켜진 하숙집에 들어가고 말은 적당한 곳을 찾다가 마침 말뚝처럼 보이는 곳에 자신의 말을 매어놓고 저 아랫동네에 가서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자기 말을 찾으러 가니까 말이 어디 있느냐 하면 교회 첨탑 꼭대기에 매달려 있어요. 좀 과장되지요. 그러나 제가 말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 눈이 와서 예배당 꼭대기까지 눈이 찼는데 외지에서 온 나그네는 이게 예배당 꼭대기인지 모르고 그냥 평범한 길에 눈이 약간 쌓여 있고 거기에 첨탑이 말뚝인 줄 알았죠.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녹아버리니까 높은데 말이 대롱대롱 걸려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언약이 욥에게 오니까 욥과 욥의 친구는 같이 맞먹는 줄 알고 뭐 하나님을 아는 줄 아는데 욥만 그냥 첨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예요. 대롱대롱 하나님의 언약에 매달려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계시니까, 욥이 계시니까, 나중에 이스라엘 계시로 여기에 들어오니까, 언약에 편입된 거죠. 매달려 있는 겁니다.
그 욥의 처지가 오늘날 우리의 처지예요. 남들에게 내 처지 내 입장을 알아달라고 이야기할 필요 없어요. 그 사람들은 눈높이만큼 세상에 대해서 그들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제대로 돌아가니까 주님의 은혜의 눈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걸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게 다 저주로 녹아버리면 이 세상 자체가 주님을 죽인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동 경로에 따라서 이 세상 자체가 이미 시작된 지옥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 누가 알겠습니까. 누가 알겠어요.
긴급생계자금 주니까 이제 재미가 있거든요. 시장의 아주머니들이 “또 안 주나?”라고 합니다. 아무튼 질을 더럽게 들여놨어요. 이 세상에 적합한 버릇들이 들은 거예요. 눈이 이만큼 쌓였는데 저주가 쌓였는지 뭔지도 모르고 이 세상에 이미 지옥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욥의 친구들은 ‘네가 왜 그렇게 아파하냐. 기도해라. 네가 죄지은 것이 있냐’라고 그들 입장에서 생각했지만 욥은 교회 첨탑에서 매달려 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지 모르겠는 겁니다.
나중에 눈이 다 녹아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사실이 다가오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찾아오기 전이기 때문에 부끄러워 미치겠다는 거예요.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남들 보기에 우사스럽다는 겁니다. 이래서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일괄적이 아닌데 주께서는 모든 것을 일괄적으로 밀어붙입니다.
페루라는 나라에서 신종코로나 퍼지니까 그 나라 대통령이 이런 아이디어를 냈어요. 월 수 금요일은 남자만 거리에 나가게 하고 화 목 토요일은 여자만 거리에 나가서 남자 여자 안 부딪치게 하려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그렇게 했습니다. 몰론 결혼한 가정에서는 이게 좋아요. 여자가 한번 장 보고 오고 남자가 한번 장 보고 오면 거리 인구수가 반으로 주는 건 괜찮은데 혼자 살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서 욥이 죽음에 대해서 너무 가볍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욥은 아프니까 그냥 죽으면 그만 아니냐고 꼭 자살 심리처럼 티를 내는데 이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그 해답은 성경 이스라엘 역사와 시편과 신약에 보면 죽음의 세계라는 것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27장 20절에 보면 “음부와 유명(죽은 자들의 세계)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게 설명이 필요한데요. 이 잠언이 쓰일 때 다윗언약의 시대에는 천국이라는 것은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간다는 뜻이 아니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메시아가 같이 와서 이 약속의 땅에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행복을 보장하는 그러한 상황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 겁니다. 또 다른 말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 거예요. 사람이 왕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이 되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될 때 이 세상 어떤 다른 민족의 꿀리지 않고 도리어 그 민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그것이 하나님 언약의 완성이라고 알던 시대예요.
물론 문자적으로는 맞는데 그 내용은 그들이 말하는 다윗 자손의 왕으로 오신다는 것을 혈육 적인 다윗계통의 왕가를 두고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오해였던 겁니다. 여러분 아시는 이야기지만 다시 말씀드려서 다윗의 자손은 다윗보다 먼저 있는 자가 다윗의 자손이 되어요. 아버지가 자식을 낳는 것이 아니고 자식이 아버지를 새롭게 구성하게 되어있어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다시 구성하는 거예요. 이것은 뭣과 경쟁하느냐 하면 과거의 관점에서 현재를 규정하는 그 규정과 경쟁하고 싸우게 되어있어요. 과거에 인간들이 이만큼 알고 있으니까 미래에는 여기에 준 해서 뭔가 이루어지겠다고 밀어붙이는 것과 너희들이 모르는 미래에 준 해서 현재가 와버리면 현재라는 것을 통해서 두 가지 의미가 서로 다투고 경쟁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는 현재거든요. 지금 있는 그대로와 그 원인이 과거에 있느냐 아니면 미래에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다윗의 자손은 미래에 오실 분인데 지금 잠언 서를 그렇게 주는 거예요. 음부라는 인간이 죽게 되는 세계는 목적도 없고 만족함이 없다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장차 천국은 만족함이 풍부하다는 말이거든요.
잠언서 30장 15절에서 16절에 보게 되면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물이든 불이든 아이가 태어나든 전부 다 태어날 때부터 결핍을 갈구하는 성질을 지니고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겁니다.
이걸 좀 더 설명하게 되면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계속 갈구한다는 점에서 지옥을 닮았다고 지옥 거주민을 닮았다고 보면 됩니다. 죽음의 세계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음의 세계는 아무리 먹어도 목마른 곳이라고 설명하면 됩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르다는 겁니다. 이 세상도 그렇고 거지 나사로 맞은 편에 있던 부자가 갔던 지옥도 물 한 방울 없어서 그렇게 부자였던 사람이 물 한 방울이 없어서 뭐 딴 소원도 아니에요. 그저 물 한 방울만 주세요. Please~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고 경험한 것이 그거잖아요. 물 한 방울만 주세요. 이 수많은 백성들 물 없이는 못 사는데 물 한 방울만 주세요. 어디 사방을 둘러봐도 물 한 방울 없어요. 물이 없어요. 왜? 사막이니까. 주께서 “여기 있는 거 몰랐지?” 하시면서 바위를 치니까 세상에 바위에서 그 수많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물이 나올 줄이야.
거기에서 물이 나올 줄 몰랐죠. 그게 바로 반석이고 천국의 입구입니다. 지옥과 천국. 천국은 지옥에서 나오는데 지옥의 없던 곳에 천국의 출입구가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보고도 몰랐지요. 십자가로 때리는 거. 반석이 예수님이니까 이게 얻어맞아요. 주님이 얻어맞아야 해요. “나를 쳐라. 나를 죽여버려라” 주님의 그 죽음이 생수의 물 뚜껑입니다. 물 뚜껑.
십자가가 물 뚜껑이고 열면 생수가 나와요. 성도에게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출입구로 살아야 해요. 죽음의 출입구로써 이 땅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이건 제가 확정한 것도 아니고 제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말하는 성경의 해석은 땅과 하늘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진리가 나온다는 겁니다.
시편 85편 10~11절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의 만남. 이것은 진리라 하는 것은 하늘에 일방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땅에 일방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하늘과 땅이 만나는 그 지점, 사건, 반석이 깨어지는 거기서 진리가 솟구쳐 터져 나온다는 거죠. 용천수처럼 터져 나오는 거죠.
이사야 45장 8절에 보면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찌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찌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 돋게 할찌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하늘과 땅이 만납니다. 조금만 이론 설명하면 힘들어하시는데 잘 들으셔야 해요.
이렇게 되면 땅은 뭐가 되어있어야 하느냐 하면 이미 지옥이 되어있어야 해요. 저주를 받아야 해요. 이 땅에서 저주받고 힘들게 살고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산다는 자체가 고역이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함이 아니고 진리를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천국의 출입구를 창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이동 경로가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광야 되게 만들고 사막 되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사야 26장 16절에서 만약에 언약이 완성되고 메시아가 오시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시체가 일어난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욥이 모르는 점이 뭐냐 하면 ‘이렇게 죽었다가 살릴 거 처음부터 안 죽이면 어떻습니까’라는 것이 욥의 생각이었어요. 오늘날 우리들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렇게 죽이고 살리지 말고 병 주고 약 주지 말고 애초부터 안 아프면 어떠냐는 것이 인간들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무엇이 한계냐 하면 피조물이면서도 피조물의 생각을 고집한다는 겁니다. “주여, 주시옵소서”라고 강단 치면서 새벽기도 와서 두드리면서 “쭈여~쭈여~”하면서 계속 부르짖고 ‘랄랄랄라’하고 가끔 시계 보면서 밥할 시간 체크 하고 그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갈구해야 한다’라고 하고.
제가 얼마 전에 들었는데 누가 아프다고 하니까 뭐라고 하냐면 ‘특심’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아프니까 합심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말인 거 같아요. 진리에는 관심도 없고요. 꼭 욥 같아요. 기왕 죽는 거 안 아프고 죽으면 좋겠다고 하는 거죠. 그것도 안 들어 주겠나 싶어서. 주님은 그것도 안 들어 줍니다. 철저하게 지옥이 지옥답게 되고 우리는 지옥 사람 되어야 하고 죽은 자 되어야 해요.
“죽어라~ 인간아, 죽어야 살려주지~”라는 것이 자꾸 엑스트라가 되어서 죽는 역할 해야 하는데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죽는 척이나 하고 눈 뜨고 있으니까 감독이 ‘큐’사인을 안 하는 거예요. 오케이 사인을 안 해요. 죽으라고 하니까 ‘으악’하고 입으로만 죽는 연기하고 죽지를 않는 거예요.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되어있는데 이 땅에 살면서 지옥 경험하는 것은 항상 임시적이에요. 한시적입니다. 최종적인 것은 아직 구약 때이니까 주님께서 오셔서 어떤 경로를 보일 때 지옥의 기준은 이것이다, 천국의 기준은 이것이다가 판정 나기 전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 땅에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음부는 결핍을 갖고 있으며 목마름이 있으며 계속 성이 차지 않아서 그 자체가 고통이라고 지옥의 세계, 음부 주권자의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전도서 9장 10절에 보면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너 자신의 모든 계획과 지식을 일체 전부 다 무장 해제시켜 버리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아요. 어차피 우리가 죽게 된다면 살아 있을 때에도 우리 자신에 하는 일에 대해서 일체 인정 하지 않아요.
우리의 이동 경로에다가 뭐가 포개져야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이동 경로가 포개져야 합니다. 십자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재림하시고 성령 오시고 재림하시고 하는 이것이 포개져야 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주님이 비로소 창조하신 사망 지옥, 그 지옥에서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 천국으로 옮겨졌느니라.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기준이 뭐냐. 주 예수를 인정하라는 겁니다. 주 예수를 인정하라. 주님 인정한다는 것이 그렇게 상당히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요. 항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지속 되기 때문에 그 지속을 끊어버리고 주님을 인정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이 모든 스케줄이 네 중심이 아니고 이 예수님 중심이라고 언급하는 순간 우리는 뻘쭘함 인생이 돼요. 오늘 제목을 뻘쭘한 인생으로 할까요?
어릴 때 학교에 형님들 와가지고 흙먼지 피워가면서 치열하게 축구하죠. 그러면 주위에서 와~~하고 응원하게 되면 어릴 때부터 공놀이가 좀 재미있는 아이는 나도 언제 어른 되어서 저렇게 축구장에서 경기하면서 환영받고 한골 넣고 파이팅 해보느냐고 생각하죠. 그러다 형들 축구하고 다 떠나고 난 뒤에 혼자서 자기 공으로 운동장에서 혼자 공 가지고 논다고요. 아무도 없는데 하고 있으니 뻘쭘하죠.
우리가 내 생각하고 있으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혼자 공놀이 하는 상황. 아무도 자기를 알아주지 않거든요. 우리가 두 번 절망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욥을 보면서 우리 인생을 보면서 욥이 가는 길이 우리 인생입니다. 욥이 제발 인생 내가 성공하고 부자되는 것까지 원치 않지만 안 아프고 편안하게 아프지 말고 아버지가 택시운전사라도 아프지 말고 행복하면 좋겠다는 겁니다. 뭐 그 소망인데 그 소망 뻘쭘한 겁니다. 내 인생이라는 공놀이 하지 마시고 주님의 공놀이에 합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속에서 주님의 이동 경로가 보이게 하옵소서. 과거를 통해서 이 땅을 안다고 하지 말고 미래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야기한데로 우리가 이 땅에서 지옥같은 세상에서 코미디 놀이하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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