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벌하심

아빠와 함께 2020. 6. 29. 10:17
벌하심

2020년 6월 28일                 본문 말씀: 욥기 11:1-6

(11: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11:2)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11:3)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11:4)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11:5)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11:6) 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욥의 친구는 소발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이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말실수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욥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지은 적이 없다고 우기니 본인이 참다 참다 못 참아 한마디 해야겠다고 거듭니다.

이러한 상식에 비해서 욥이 당하고 있는 고통은 너무나도 특이합니다. 기존의 인간들이 알고 있는 상식을 능가합니다. 그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고통이 개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지금 그 경계선에 들어선 겁니다. 아무나 들어설 수 없는 고통 영역입니다. 이 영역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락했기에 기존의 언어로서는 표현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말이나 언어라는 것은 기존의 인간들 세계에서 상용되던 그런 언어들입니다. 그 언어들 배면(뒷면)에서 개개인들이 서로 타인을 의식하면서 관계지우기 위한 용도의 개념들이 담겨 있습니다. 즉 “네도 이 뜻 알지? 나도 이 뜻 알아!”라는 식으로 소통 가능한 개념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로 표현되는 ‘하나님 개념’이 과연 올바른 개념일까요?

욥에게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개념이 그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욥에게 고통이 오므로서 다 깨어진 겁니다. 안 먹히는 겁니다. 욥도 친구들과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만하게 지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겁니다.

전에 사용했던 말로서는 한계를 느낍니다. 전에 알던 단어들을 사용해버리면 자신은 어떻게 설명해도 ‘의로운 존재’ 즉 ‘결코 심한 징벌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이런 요구하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를 제가 아는 나 밖에 세워주세요” 이것은 참으로 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욥의 이런 주장은 자신의 정당성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욥은 인간들 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끼리 상대한다면 인간들의 의미 소통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하고 단독으로 상대하다보니 주변 인간들이 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지만 욥 역시 구약 인물입니다. 신약의 인물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기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여깁니다. 구약 시대 때, 하나님과 상대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제시한 방식이 전부입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앞장 세워서만 움직입니다. 달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신은 가짜입니다. 우상입니다. 진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언약의 준해서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만 참된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이방인들의 신은 신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나기’에는 ‘흠없는 제물의 죽음’이 있습니다. 즉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성을 받지 않고 처참하고 흉물스러운 죽음의 자리에만 만날까요? 이 질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주실까요? 그 답변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서 드러난 사실은, 인간 세계가 하나님의 원수(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생각하기를, 이방민족은 자신들에게 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들 자체가 하나님이 원수를 못한 겁니다. 시편 79:6에 보면,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자기 자신들만이 참된 주님을 안다고 여깁니다. 이방민족이 믿는 신과 다르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 21:13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의 적이요, 너희들은 나의 적이다”고 하십니다. 이방민족이 유대나라를 쳐들어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이방민족들의 신의 특징은 언약이 없기에 자신들이 믿는 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생각을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열심과 정성으로 빌고 바치면 본인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원만한 사이라고 여긴 겁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평화’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욥의 고통은 참으로 낯선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친숙함으로 낯섦에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알고 있던 그 범주를 부수고 부정하고 들어오십니다.

‘나를 위한 나’를 하나님께서 하용하신 적이 없습니다. 적과 적 사이에 무슨 우호적인 것이 오고 가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면, 그동안 우리가 알던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실루엣에 불과함을 알게 합니다. 흔들이는 얇은 천에 비추어져 어른거리는 그림자 말입니다. 커튼이 찢어지면 같이 찢어질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간은 늘 흔들리고 변화무쌍에 맞쳐 산다고 인생 자체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부질없고 무의미함에 모든 자존심과 마음을 강탈 당한 겁니다. 하나님을 그냥 상상한채로 만날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허느적거리는 실루엣을 뜯어내면 거기에 붉은 피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피로 나타나십니다.

언약의 피입니다. 세상에서 감당못할 고통이 담겨았는 피입니다. 이 피만이 냉혹한 진실입니다. 그동안 세상이 유지된 모든 힘이 이 힘에서 나오고 피로 수렴됩니다. 전도서 9:7-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

인간이 이 땅에 사는 것 자체가 징벌입니다. 불신자에게는 본격적인 저주가 죽고 난 뒤에 시작이 됩니다. 성도는 이 땅에 살면서 힘들게 버텨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하나님께서 낙을 주십니다. 고통이 당연하고 평온은 의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된 우리에게 속죄의 피로서 이 생애가 끝나는 희망을 주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일에 예수님의 피 희생에 근거를 둔 조치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7강-욥기 11장 1~6절(벌하심)2020062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1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71페이지입니다.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 하는구나, 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나아마 사람 소발이 욥의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욥의 하는 이야기는 욥이 자기가 경험한 것을 총동원해도 욥 자신이 당하고 있는 처지를 묘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현재 주어진 형편과 자기가 알고 있는 언어로 말로 자꾸 매치 되지 않고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욥의 고백 자체가 틈이 벌어져 있는데 욥의 친구들은 욥과 하나님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하지 못하고 욥이 자기들처럼 자기의 처지를 다 이야기했다고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욥은 답답해서 이야기하는데 욥의 친구들은 지금 자꾸 자랑질한다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네가 자랑할 것이 많으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은 욥의 친구들은 욥처럼 어떤 고통이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묘사할 때 기존에 떠돌아다니는 개념들을 주워다가 자기 자신과 일치시키는 거예요. 나는 이런 정도이고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를 묘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도 같이 동의하고 있다고 그렇게 욥의 친구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나는 별로 큰일 없이 아무 일 없이 잘 믿고 있는데 너는 믿는 게 왜 이리 유난스럽고 유별나냐는 식으로 공박하고 나선 겁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언어라는 것을 사용하고 할 때는 이것은 그 언어 뒤편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남들이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는 기대와 바람 같은 것이 단어 하나 선정에 다 들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말을 하더라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말을 해요. 나는 이 정도라는 것들을 보이기 위한 말들을 사용하는 겁니다. 나보다도 남들이 벌써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에서 적당한 것을 자기에게 꽂아 넣어서 “여러분들 보세요. 제가 이 정도입니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욥아, 너도 남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묘사를 해라. 표현해라. 우리가 동의해 줄게’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 욥의 친구들이에요. 욥이 그걸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기도 평소에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 이정도야. 이런 사람이야’라고 알리고 싶은데 이번에 찾아온 고통은 묘사할 길이 표현할 길이 없어요. 고통을 당하는 자기 모습이 자기 보기에도 너무 낯설어요.

그래서 욥이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익숙해진 내 자아의 모습과 낯선 자아의 모습을 자꾸 합치시키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포맷이 안됩니다. 완전히 모든 것을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려고 한다면 그 시작점은 욥도 알고 있어요. 현재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나부터는 이게 다시 시작해도 소용이 없고 포맷을 해도 모든 것을 갈아엎어도 시작점을 하나님부터 새로 시작한 나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은 욥은 알고 있습니다.

새로 시작할 때 새로 시작한 나를 묘사할 그 단어나 언어는 기존에 내가 살면서 알고 있던 단어나 언어와는 적합하지가 않아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말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묘사한 데 있어서 아무리 어떻게 설명해도 제자들부터 해서 다른 사람들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 단어 하나하나가 이미 그 단어의 의미를 선점하고 있는 의미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 음식이 맛있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묘사할 길이 없네”라는 말이 있잖아요. “너무 맛있다. 맛있다. 아니야. 그것도 모자라. 짜릿하게 맛있다”라고 그 단어 말고 다른 단어로 자꾸 이동하면서 그 의미를 방황하는 의미 또는 유동하는 의미라고 하는데 자꾸 의미를 바꿔치기하면서 계속해봐도 아직도 미흡하고 다른 단어를 또 요청하게 되고 그 단어 해봐야 또 요청되고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까 어떤 분이 공백이 무엇인지 질문하시는데 ‘왜 하나님은 공백이고 빈자리냐’라고 했을 때 제가 하는 답변은 이거예요. 없음보다 더 있음. 없는 것보다 더 모자라는 거. 없던 것보다 더 모자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모자람이 새로 생기겠느냐 하겠는데 오전 설교에서 언급했지요. 개라는 것은 죽음보다 못한 것인데 ‘네가 죽었으니까 내가 더이상 손 안 댈게’라는 정도가 아니고 ‘죽었으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매 맞아봐’라는 이게 바로 개 같은 인생의 말로입니다.

‘죽은 것으로 너에 대한 회계처리가 다 끝난 것이 아니고 이제 본격적으로 네가 이 지옥의 맛을 한번 봐라’라고에 해당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로막고 살았던 모든 인간, 개 같은 인간들의 갈 길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가로막았다는 말이죠. 그 뜻이 뭔 뜻인지를 그들은 몰랐던 거죠. 물론 우리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모르는 것은 예를 들어 십자가를 설명해보라고 하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이미 돌아다니던 그 의미를 잘 주워 모아서 “십자가라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라고 한다고 그게 무슨 우리에게 구원이 됩니까. 그게 무슨 구원이 돼요.

사람은 만나봐야 뭐 뿅하고 가는 게 있든지 실망하든지 뭐가 생기는데 만나보지도 않고 아니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자기 생각을 계속 유지하겠다는 거예요. 만남은 깨어짐이에요. 내 선입감의 깨어짐. 이것을 주께서 깨기 위해서 계속 만나는 겁니다. 그러면 깨어지게 되면 상대방을 우리가 만나면 안 지려고 상대를 자꾸 공격하고 깨려고 하지만 막상 그 만남 속에서 정작 내가 미처 몰랐던 나 자신, 죽음보다 더 못한 요소가 내 안에 들어있음이 발견되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세상 친구들, 욥의 친구들은 기껏 살아온 것이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었어요. 그게 다였습니다. 하나님 만난 적이 없어요. 다만 하나님 만났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지요. 풍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고 주님은 이런 모습이고 꿈에 예수를 본 사람은 예수가 이렇게 생겼고 하나님은 이렇다고 풍문으로 들었지요.

직접 하나님을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기껏 아는 것이 기존의 아는 단어 가지고 하나님 앞에 꿇어앉아 하나님 앞에 쫄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이고, 마음을 낮췄구나’라고 생각하며 봐줘서 은혜 주실 것이라는 자기의 계산, 구원받는 방식 같은 것들을 알아서 다 챙기고 있잖아요.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주신 고통 속에 먼저 만났어요. 그러면 고통이라는 것이 뭔 뜻이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욥이 겪고 있는 고통이 경계선을 형성한다. 그 경계선이 지금까지 인간들이 고생고생 상상했던 고통과는 족히 비교될 수 없는 거예요.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소발이라는 철없는 친구가 하는 말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다”라고.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소발이 욥보고 놀리는 거예요. “네가 입이 싸구나”라고. 입이 싸다는 말을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입이 부푼 사람” 얼마나 말을 많이 했으면 입이 부풀어 터졌겠어요. 우리가 소발이 되어 봅시다. 소발이라고 가정한다면 자꾸 하나님 앞에 군시렁궁시렁 거리면서 “하나님 왜 저를 이렇게 고통을 줍니까”라고 기도하고 하소연하게 되면 옆에 있는 우리는 제 3자 입장에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예요.

“사람이 쓸 말을 해야지. 사람이 말이 많으면 그중에 반드시 실수가 있기 마련이야. 네가 말이 많다 보니까 그 많은 말 가운데서 어떤 대목에서 실수하고 어떤 대목에서 네가 잘못했는지 너도 모르겠지? 네가 말이 많아서 문제다. 입 다물고 있어”라는 그 충고를 지금 하고 있은 겁니다. 네가 잠잠해야 하는데 잠잠 안 하고 자꾸 말을 하니까 내가 네 소리를 듣고 지금 가만히 있으려고 무척 노력했는데 더는 못 참겠다고 하면서 한마디 한다고 하는 이야기가 1절부터 5절까지 이야기예요.

세상에 말이 많은 가운데서 정결한 사람 누가 있더냐. 반드시 실수하잖아요. 반드시 실수한다고요. 그래서 하는 말이 “네가 벌 받을 거야”라고 악담을 하는데 욥의 입장에서 보면 가잖지도 않은 거예요. 왜냐 하면 지금 받는 고통도요. 이것도 본인이 감당 못 할 벌이에요. 그러면 이미 감당할 수 있는 벌이 오게 되면 놀라가지고 “조심할게. 앞으로 내가 말 좀 줄일게. 앞으로 개선할 게. 고칠게”라고 되는데 지금 나에게 들이닥친 환란도 내가 어떻게 감당 못 할 환란이라면 거기에 더 추가적인 환란이 온다고 할지라도 자기 행동 바꾸는데 아무 관련성이 없어요. 아무것도 하지를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욥이 하는 이야기가 일반인들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정말 초월적인 이야기를 고통 속에서 고통과 더불어 내뱉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지난 이야기와 오늘 이야기를 연관시켜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밖에 세워주세요. 하나님, 나를 내 밖에 세워주세요. 나를 내 밖에 넣어주세요’라는 이런 뜻이거든요. 이게 불가능해요.

왜냐 하면 인간이 아무리 밖이라도 이미 안에서 예측이 가능한 밖은 이미 내 안쪽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지금 답답해하는 것은 이미 태어났잖아요. 본인이 있잖아요. 본인이. 본인이 있는데 어떻게 무를 수가 없다고요. 이미 있는데 그냥 있었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내 생각과 더불어 알고 있잖아요. ‘내 생각, 선입관,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이 모든 것이 있는데 이걸 그냥 놔두고 내가 아는 이 동네 말고, 내가 전혀 모르는 다른 동네에 나를 세워주옵소서’라고 전에도 기도한 적이 있어요.

하나님은 내가 죽고 난 뒤에 하나님 그때 이 자리 말고 더 바깥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저를 판결해 달라는 요청을 한 적이 있단 말이죠.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이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장 25~26)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논리적으로 가능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욥은 이러한 불가능함과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고통 속에 있습니다. 경계선. 인간과 하나님 사이는 경계선 사이에 있고 욥이 경계선 상에 있어요. 어떤 사람은 다이어트해서 37킬로를 뺀 사람이 있답니다. 대단하죠. 노력하면 뺄 수 있어요. 하지만 욥은 알아요. 이에 현재 있는 나, 그 밖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 쪽에 가는 것이 내가 노력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주님이 주신 고통 가운데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현재 이 자리에 있는 한 나는 도저히 어떤 해결책이 없고 내 바깥에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고 욥은 생각하는 겁니다.

다시 한번 우리가 욥기 지난번에 했던 똑같은 공식을 적용하겠어요. 욥은 구약 사람이잖아요. 신약 사람이 아니에요. 세례요한이 아무리 대단해도 천국에 난 아이보다 더 못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과 족히 견줄 수가 없어요. 욥이 뭐가 문제냐 하는 것은 신약에 속한 성령 받은 사람은 이게 간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간파되기 전에 성령 받기 전에 먼저 그것을 간파한 민족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질적인 거, 하나님의 뜻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그들 속에 삽입되어 있어요. 욥은 시대도 시대지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그냥 한계까지는 왔지만, 그 문턱을 넘는 것은 욥의 입장에서는 이게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 해답을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해요. 그러면 역사 속에서 찾아보게 되면 시편에 79편 6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여기 ‘주’라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앞장세운 주입니다. 그냥 인간들이 돌아다니는 개념의 ‘하나님, 주님’하는 그 주님 아니에요.

인간이 아는 주님, 하나님, 신의 이름 백날 불러도 이건 하나님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언약이 있어야해요. 그런데 지금 욥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은 이스라엘에게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고통, 욥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언약 안에서 생겨나는 고통이에요. 욥은 그것이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출처를 압니다. 어떻게? 반복되는 희생제물을 통해서. 희생제물, 그것도 흠 없는 희생제물이 애꿎은 희생제물이 애꿎게 죽어가는 그 모습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과 관련짓고 찾아오시는가. 그것을 이스라엘은 느끼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에요. 이스라엘이 이웃 나라 이방 나라보다 더 선하고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시편 79편 6절의 말씀처럼 언약을 모르는 백성에게는 필히 하나님의 진노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이스라엘만이 내뱉을 수가 있어요. 희생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이거든요. 하나님의 희생을 모르는 민족은 가타부타 입을 뗄 것도 없어요. 그냥 지옥입니다. 그냥 지옥이에요. 왜냐 하면 신약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방 민족, 단군의 자손부터 해서 이방 민족들도 나름대로 선하고 바르게 살기 위해서 모든 양심을 끄집어내어서 덕스럽게 살려는 그 모든 노력,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한두 명 보는 게 아니고 주변에 깔렸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그 하나님, 천국, 하나님의 심판, 그들 나름대로 성경 보기, 이런 것들이 전부 다 헛방이란 말인가. 헛방입니다. 헛방.

왜 헛방이냐 하면 하나님과 욥 사이에 욥이 지금 모르고 있는 것과 욥의 마지막에 친구가 와서 알려줘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아는 게 있어요. 이방 민족과 이스라엘 사이는 적대적 관계입니다. 원수지간입니다. 그러나 이방 민족에게는 자기가 믿고 자기가 사랑하는 신에 대해서는 절대로 원수라는 개념이 생겨나지를 않아요. 생겨나지를 않아요.

원수기 때문에 공격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에요. 지난 수요일 날 제가 설교한 내용이 이거였습니다. 야곱이 결혼하는데 사랑하는 여자 라헬과 결혼하면 깔끔하게 정리돼요. 복 받았겠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우연히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좋아하게 하고 이쁘게 보여서 결혼하게 한 거예요.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시점에 자기는 7년 동안 죽을 고생 하면서 야근까지 하면서 7년을 7일처럼 보낸 이유가 사랑의 힘이거든요.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 날밤에 첫날밤에 생각지도 않은 다른 여자가 그 방에서 자기를 기다린다고 했을 때 7년 고생이 헛수고잖아요. 이미 하나님께서 못생긴 언니와 이쁜 동생을 딱 두고 마치 자기에게 선택을 묻는 거 같아요. 이쁜 동생과 할래? 못생긴 언니와 할래? 이거는 묻는 자체가 그 물음 자체가 잘못된 물음이에요.

이미 보암직도 먹음직도 탐스럽기도 한 과실을 따 먹었던 인간의 그 성경이 어디 가겠습니까. 이쁜 동생 없이 그냥 그 언니만 있었다면 그 언니는 세계에서 제일 이쁜 여자예요.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러나 이미 이쁜 게 나왔잖아요. 이쁜 게. 부부생활 하면서 다툴 때 있을 때 남자들은 여자들 잔소리하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기죽이려고 잔소리하면 집안의 물건 집어 던지면서 객기를 부리죠. 건들지 말라고. 건들면 너도 이렇게 당한다고.

그럴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예요. 남자가 던지는 것을 봐서 더 비싼 거 있잖아요. 티비 52인치 이런 거. 그걸 더 집어던져야 해요. 왜냐 하면 그게 남성의 범주거든요. 남성의 범주 안에서 여자를 잡고 거기에 꽂아 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평생 정신적 노예가 되죠. 잘해주면서 정신적으로 압박하는 더 나쁘고 더 변태 같은 그런 남자.

그러면 여자는 뭐냐 하면 여자의 영역이 따로 있어 줘야 ‘나는 너 없이도 살 수 있다’가 되고 그래야 협상 가능해요. 어차피 가정이라고 하는 것은 돈의 생산 기반입니다. 돈 없는 가정은 성립이 안 돼요. 정말입니다. 돈 없이 무슨 가정이 됩니까? 그게 아닌 척하며 사랑으로 이긴다는 말은 거짓말이고요. 돈입니다. 이 세상은 원래 그래요. 인간은 태생이 그래요.

인간은 고상한 것은 내놓고 거북한 것은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세력싸움에서 결국은 둘이 평화로울 수 없어요. 부부가 평화로울 때 저는 그걸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상한 평화. 이상하게 성립이 안 되는 평화. 요새 좀 오래 가네. 이상한 평화예요.

이방 민족 사이에 신,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 21장 13절에 보면 예레미야에게 이런 계시가 주어집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 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이 말은 “누가 내 대적인 줄 알아? 네가 내 대적이야. 그리고 내가 너의 적이야”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이 사실을 압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적이고 하나님의 적은 이방 민족이 아니고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알립니다. 나라가 망할 입장에서. 다시 말해서 욥은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주님의 적과 자기 적을 혼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혼동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하나님에게 이렇게 믿고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내 뜻대로 다 해주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한 매개를 다시 한번 거쳐야 해요. 어떤 것이냐 하면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오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나 자신이 이미 내가 우상화가 된 채로, 나 자신이 우상화가 된 채로 지금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해요. 인간이 평생에 살았던 모든 것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는데 커튼에 어른거리는 실루엣, 어떤 그림자가 커튼에 비추다가 바람 불면 그림자가 흔들리잖아요.

세상에 있던 모든 내가 보고 들었던 이 모든 것은 그냥 얇은 천을 통해서 바람 부는 데로 흔들리는 하나의 실루엣같이 실체가 없는 거예요. 허구이고 허상이에요. 왜? 언어가 나에게 그렇게 조작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일종의 베니어판 위에서 세트장 위에서 우리가 노는 겁니다. 인간은 허상 아니라고 하지만 새로운 계기가 오게 되면 직업조차 바꿔버려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부패한 관료로 등장하죠.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장민호가 ‘바람과 구름과 비’라는 드라마에 출연했데요. 가수가. 인간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면 내 직업조차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 다시 이어가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지만 주께서 무엇을 끼워 넣느냐 하면 야곱이 건너가야 할 야곱이 제일 싫어하는 레아를, 동생과 비교되는 레아를 야곱이 경유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경유 하고 난 뒤에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하겠지 했지요. 그 사랑하는 아내와 한 번도 단둘이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야곱입니다.

야곱이 죽고 나은 자식은 비로소 아내가 죽고 난 뒤에 그 모든 자식을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식으로 다 넘겨서 열두 자식이 되는 거예요. 열두 자식. 야곱의 자식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전부 다 환상에 불과하고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야곱 때 알고 있었던 그러한 내가 아는 하나님 말고 내가 건널 수 없는 이스라엘로 건너가려면 나는 필히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그 언약은 나보고 죽으라는, 너는 이미 죽은 체로 이 세상의 리듬에 따라서 흐느적거리면서 유행가나 부르면서 세월만 보내는 아무 희망 없는 그러한 존재로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를 만나야 해요. 십자가의 죽음의 고통을 만나야 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인정할 때 모든 환상이 가로막습니다.

그 환상을 걷어 내세요. 환상을 다 걷어 내면 딱 남는 게 뭐냐. 피예요. 피. 예수님의 피. 예수님의 피만 딱 남는 거예요. 그 피에 우리 빨대 같은 두 다리가 뿌리가 꽂혀야 됩니다. 광주 강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뿌리 꽂혀야 해요. 두 다리를. 빨간 잉크에 꽂히면 빨간 잉크 올라오고 파란 잉크에 꽂히면 파란 잉크 올라오는 것처럼 술꾼이 술병에 꽂히면 얼굴 벌겋게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처럼 우리는 마지막에 나의 뿌리는 피 안에 꽂혀야 해요.

피 안에 꽂혀 버리면 우리가 달리 벌 받지 않고 사는 게 벌이에요. 이 세상 사는 게 벌이에요. 뭐 더 이상 무슨 벌이 필요합니까. 그리고 죽을 때까지만 받는 벌이고 한시적 벌이라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고 우리의 기쁨입니다. 죽고 나면 이 벌은 빠이빠이입니다. 더 이상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말씀에 보면 벌 받는 동안에 주께서 가끔 간식 줄 때가 있어요. 맛있는 거 먹으라고. 벌 받으며 교도소 생활하는 동안에 혹시 주께서 좋은 옷 입히고 맛있는 거 먹이거든 내일 생각하지 말고 딴 거 생각하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고맙게 여기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너무 벌 받는 모습이 여유로워서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하는 그 짓거리와 주께서 주시는 이 혜택과 긍휼하심이 너무 과분하다는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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