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인생
2020년 5월 17일 본문 말씀: 욥기 9: 22-24
(9:22) 일이 다 일반이라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멸망시키신다 하나니
(9:23) 홀연히 재앙이 내려 도륙될 때에 무죄한 자의 고난을 그가 비웃으시리라
(9:24) 세상이 악인의 손에 붙이웠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리워졌나니 그렇게 되게 한 이가 그가 아니시면 누구이뇨
욥이 단단히 삐졌습니다. 선인과 악인이 명확하게 판정하시고, 그 결과를 우리 인간들이 알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욥에게 있어 하나님의 침묵은 정신적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육체적 고통에다 정신적 고통이 추가됩니다. 욥이 같이 호응할 수없게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욥은 큰 실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의 의견을 나름 솔직하게 발설합니다. “선과 악의 기준이 불명확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서 이 세상을 악이 설치는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제발 선한 자와 악한 자를 달리 다루어 줍소서”라고 간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것이 고통이 없으면 세상을 즐기면서 신에게 감사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막상 고통이 오게 되면 기어이 하나님의 세상 운영의 해답을 알아내어서 자기 정당성을 어떤 식으로 확보하려 합니다.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자아 조작’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살아남을 권리가 있다고 날마다 조작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자기에게 고통이 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잘못된 처사를 내린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이러한 항변을 해대는 그 바탕에는, 자기에게 주어진 이 목숨이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셨다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욥에게 그 목숨이 위태롭고 고통스럽습니다.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준 목숨을 도로 가져가려는 처사로 여깁니다. 여기서 욥은 의문을 갖습니다.
‘나는 정당한데 왜 내 목숨을 가져가시려고 하시는가?’하면서 반발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가져가시면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하나님의 일관성있는 원칙이 깨어진다는 겁니다. 이러한 욥을 보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너무 유난떤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욥처럼 고통을 안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아무리 우리의 마음을 점잖게 유지하고 싶어도 오로지 그 고통당하는 지점으로 온 신경을 쓰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자아는 그 고통 자리에서 또다시 자아를 재조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욥이 구원과 비구원의 경계선상이 있는 인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도 이 절차를 필수적으로 겪게 하신다는 겁니다. 극한적으로 하나님의 정당함에 의문을 품고 대드는 절차를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에게 다가서면 자기 백성은 자신이 잘난 존재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단 ‘괜찮은 품격으로 무장된 신자’로 자처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난데없이 목숨을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갑자기 성도는 ‘나의 목숨과 나의 구원은 그만큼 내가 받을 만한 인물이라서 받는다’는 기존 인식이 흔들리게 됩니다. 억울하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과도한 처벌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참으로 성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역시 나는 신자가 아닌 게 맞아”라고 말입니다. ‘신자 아님’으로 도피하려는 이유는 ‘저를 더 때리지는 마세요’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찾아오시려는 이유는 ‘약속’을 이루려함입니다. 약속은 예수님을 두고 말입니다. 약속을 중간에 두지 않고 구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모든 구원이 약속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너 구원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속 완성한 분이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한 구원입니다. 따라서 욥에게 찾아온 고통은, 욥이 악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닮기 위한 조치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닮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편을 닮습니다. 인간들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힘들게 살고 고통스러워하는지 직접 체험하시려고 합니다. 인간들이 벌려놓은 그 더러운 일 속에서 하나님께서의 일은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에게 벌 주는 것이 인간의 더러운 것에 벌주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 약속에 대한 거부차원에서 다루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자신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십니다. 그들의 죄의 이유와 본질을 공감하시면서 파악하십니다. 히브리서 5:7-9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라는 이유 때문에 인간의 아픔을 모르고 유유자적하실 것이라고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아픔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에게 고통이 오게 되면, 갑자기 자아조작에 나서서 자신이 이만한 고통을 안 당할 대상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는 항상 자기편입니다. 자기에게 우호적입니다. 억울함으로 무장해 있습니다. 따라서 욥이 짜증부리는 그 모습은 실은 오늘날 우리들의 진상 부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결코 우리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자신에게 너무 집착하고 수시고 자기 잘난 쪽으로 자아를 조작하고 수정하는 식으로서는 하나님의 뜻에 공격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마태복음 16:13에 보면,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인자(人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로 인간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모습이 인자(人子)입니다. 즉 고난받는 인자입니다. 인간의 고통을 아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주님의 질문에 대해서 누가 과연 제대로 질문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인간은 이 질문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욥이 하나님에게 항의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답변을 바로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욥이 자신의 억울함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고난받은 인간형’으로서의 하나님이 되시므로서 새로운 질문 형식으로 답변을 대신하시는 겁니다. 바로 고난받은 인간형을 모델로 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백성을 친히 창조하십니다. 이사야 43:7에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사정에만 정신 팔려 있는 자는 약속에 대해 오해하게 마련입니다. 인생이란 그저 연습일 뿐입니다. 잘난 연습, 못난 연습 하지만 어디까지나 약속은 따로 계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연민에 너무 빠져 있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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