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강-욥기 9장 17~21절(국소적 만남)20200510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17~21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 나로 숨을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으로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호출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 나는 순전하다마는 내가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내 생명을 천히 여기는구나”
욥이 고통 가운데서 나오는 이 고백이 평소에 우리가 몸이 멀쩡하고 튼튼하다고 여기고 사는데 지장 없다고 여기는 이 가운데서도 욥의 이러한 고백이 계속해서 나와야 됩니다. 왜냐 하면 욥의 고백 같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이란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 있으면 꼭 이 같은 고백이 아니더라도 여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고백들이 나와줘야 해요.
손가락 꼭꼭 누르면 말하는 인형 전에 예를 들었잖아요. “알라뷰~알라뷰”라고 나온다고. 그 사람을 자극하고 누르게 되면 그 사람 속에서 뭐가 나와야 하느냐 하면 욥의 고백이 탁 나와야 해요.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라는 고백이 탁 튀어나와야 합니다. 욥은 지금 구약과 신약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의 두 가지 요소를 다 품고 있습니다.
먼저 욥에게 불신자의 요소가 어떤 것이냐 하면 본인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입니다. 본인부터 출발해서 하나님을 자꾸 내 자리로 끌어당기며 이 상황을 해명해보라고 강요하는 자꾸 억지를 부리는 요소가 바로 불신의 요소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다 불신의 요소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알라뷰~알라뷰~”라고 말씀의 계시가 나오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원망부터 나오는 것이 이게 죄인인 존재들이 필히 보여줄 공통적인 요소입니다.
욥이 이런 불평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욥은 불신자라고 규정하면 안 됩니다. 이걸 시퀀스(Sequence)라고 하는데 시퀀스라 하는 것은 사건의 정렬된 순서를 말합니다. 이거 다음에 이거, 이거 다음에 이거, 과정과 순서라는 게 있어요. 그 순서를 하나님은 친절하게도 욥을 통해서 현재 우리의 몸이 보여주는 시퀀스인 사건의 정렬 과정을 욥을 통해서 정말 제대로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욥의 자리가 우리는 신약이니까 욥과 상관없다고 하지 말고 신약의 성도 입장이지만 욥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서 욥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욥은 이렇게 생각을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불신 적 요소라고 했는데 욥은 자기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왜 자기로부터 출발했을까요? 그것은 욥이 지금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이 고통받는다는 거죠. 욥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몸이 아픈 거예요. 몸이 고통을 받는 것은 무엇과 무엇이 벌어지느냐 하면 몸이 안 아플 때는 몸과 자아가 한 덩어리가 됩니다. 몸이 안 아플 때는 몸이 곧 나요, 내가 곧 내 몸이 되는 겁니다. 이 말은 내 몸을 내가 부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몸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단 말이죠.
아까 예배 전에 감독 이야기 나왔는데 제가 그 이야기 듣고 공사 감독을 하신다는데 얼른 지나가는 생각에 ‘그럼 자기 몸은 누가 감독하지’가 되게 궁금해요. 또 인간의 몸은 누가 감독합니까? 안 아프면 자기가 자기를 인도하고 다스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프면 그때부터는 욥 같은 반항이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왜 나의 뜻 따로 몸 따로이게 하십니까?
평소의 내 몸은 내 의사를 따라야 하는데 왜 내가 갑자기 암에 걸린다든지 뭔가 어지러워서 떨어져가지고 팔을 다친다든지 왜 이런 내가 요구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데 왜 제 몸을 다치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는지 항변할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그래요. 때리면 아프다는 것은 당연한 거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인간은 이 몸을 내 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존재이고 권리가 없음을 욥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몸은 주님의 것이지 욥 본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동안 욥이 고통이 오지 않으니까 내 뜻대로 내가 움직여 나가는 그것을 일상적으로 늘 체험하고 경험했으니까 으레 내 몸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절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몸 따로 내 자아 따로 이렇게 구분됩니다. 그러면 어느 게 가짜냐. 당연히 자아가 가짜죠. 몸은 아무 문제 없는데 자아가 고통을 느끼는 겁니다. 내가 고통을 느껴요. 그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아란 몸에서 나오는 주관적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몸을 보고서 스스로 주관적인 통일성을 갖추는 겁니다.
제가 말을 이렇게 하게 되면 좀 어려운데 예를 들면 쉬워져요. 한 10개월 가까이 되는 아이가 있다고 합시다. 서지는 못하고 앉아 있고 포복으로 기어 다니기는 하는 10개월 정도 아이 거든요. 그 아이에게 엄마가 나타나면 엄마를 보고 엄마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엄마가 없으면 자기 할 수 있는 역량대로 돌아다니면서 엄마를 찾습니다. 그러면 엄마가 또 나타나요. 그러면 또 아이가 좋아해요. 또 한 2초 있다가 엄마가 없어져요.
그러면 엄마가 ‘있다, 없다’가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되는 겁니다. 마음의 상처를 얻어요. 몸은 움직이지 않고 이리저리 돌렸는데 몸이 아픈 것이 아니고 마음이 아픈 거예요. 엄마가 진득하게 있어야 하는데 자꾸 엄마가 있다가 없다가 하니까 아이가 걱정을 하는 거예요. 혹시 엄마가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하게 되면 이것은 마음에 평생 상처를 입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아주 간단해요. 뭐냐 하면 몸은 상처 입은 적 없지만, 마음이 상처를 입으면 이것은 마치 몸에 내 전체의 몸에 상처가 있다고 여기면서 자아가 몸을 대신해서 엄마나 하나님께 대들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대들게 되어 있어요. 몸은 분명히 하나님 것인데 욥이 지금 자아가 대들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보면 17절에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몸이 말을 한 것이 아니에요. 몸이 말한 것이 아니고 몸에 대한 요소가 중요한 역할은 얼굴 쪽에 다 집결이 되어 있는데 그걸 부분 대상이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얼굴이라는 이 부분 대상이 몸 전체를 대표하는 거예요. 그게 에베소서 같은 경우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하고 또는 “그리스도가 얼굴이다”라고 하는 말은 얼굴의 표정이 몸의 다른 지체들의 상황까지 표정으로 다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 때 얼굴의 자비로움으로써 우리에게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아도 만족스럽지만 우리의 몸이 천사의 몸으로 주님의 영광된 몸으로 변한다는 그러한 약속을 한샘이 됩니다. 주의 얼굴이 우리를 좋은 관계로써 서로 볼 수 있다는 거, 그것은 우리 운명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왔을 때 자기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준 것은 도마의 운명과 관련되어 있고 사도바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난 것도 우리의 확정된 미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욥은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친히 고통을 준다는 것이 하나님이 욥을 책임지고 천국 백성 만든다는 하나의 표징인 것을 욥은 지금 너무 아파서 지금 모르고 있습니다. 이게 욥으로서는 불신 적 요소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욥이 신자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욥이 여기에 보면 17~18절에 “그가 폭풍으로 나를 꺾으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많게 하시며”라고 여기에 “폭풍”이 나옵니다. 어느 교회의 건물에 보면 이런 게 있을 거예요. 헬라어 문자로 ‘A and Ω’라고 써있는데 알파와 오메가라는 헬라어 문자입니다. “알파요 오메가”라는 말씀은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오는 사도 요한이 하나님 만났을 때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할 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는 말은 “시작이고 끝이다”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그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주권적인 하나님이다. 시작과 끝을 마무리 짓고 지금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이라는 신과 비슷하게 되어 버려요. 그러면 그러한 이방 신과 여기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과 차이점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하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모든 걸 주관하십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래서 그것과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천지를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자아와 상관관계,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이게 인간이 찾아가는 신이 아니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셨죠. 하지만 찾아 왔잖아요. 얍복 강가에 찾아오신 하나님이에요. 찾아오시면 이게 뭐냐 하면 국지적인 요소가 되어 버려요. 예수님께서 활동한 무대가 뭐냐 하면 유다와 갈릴리 땅이에요. 경상북도만 한 땅에 오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지중해도 관리하시고 스칸디나비아반도인 스웨덴 노르웨이도 관리하셨죠. 하지만 집중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신 곳은 유다와 갈릴리 땅이에요. 이걸 국지적 또는 국소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많은 넓은 땅 있지만 한 곳에 집중해서 본인을 몽땅 다 보여주시는 식으로 이야기하시는데 그게 오늘 욥기에서는 욥의 고통, 욥의 몸에 고통을 주시면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국지적입니다.
알파요 오메가는 맞는데 알파요 오메가의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자기를 나타낼 때는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꺾어 버리고 와해시켜 버리고 무너뜨리는 거죠.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겠습니다. 여호수아 2장 18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내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누가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리고성에서 이스라엘이 공격해서 모든 것을 함락시킬 때 기생 라합 집만 건진다는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냥 기생라합 살릴 필요 없이 이스라엘에게 보란 듯이 “이스라엘아 잘 봐라. 내가 저 여리고성 이방 민족이지. 약속의 땅을 공격하고 전쟁할 때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다 없애 버렸다. 다 너희들 차지다”라고 하면 굉장히 간단한 문제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탐꾼을 보낼 때 이미 함락되기로 한 그 여리고성에 왜 기생라합으로 하여금 정탐꾼을 함락되기 전에 미리 영접하는 일을 만드셨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의 구원의 증표를 따로 만들기 위해서 사적으로 하나님께서 기생라합에게 마음을 열어주신 거예요. 마음을 열어주신 거예요. 뭘 하기 위해서? 붉은 줄이라는 약속.
그 붉은 줄은 어떻게 약속되느냐 하면 기생라합이 정탐꾼 둘을 도피시키기 위해서 결국은 그들로 하여금 성 밖에 가장 바깥에 있는 집에다가 성안에서 밖으로 바로 빠질 수 있도록 붉은 줄로 끙끙거리면서 내려가도록 했던 그 사실, 그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거예요. 구원은 저렇게 된다.
멸망에 대해서 기정사실로 여기고 자기도 멸망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서 그 멸망 소식을 미리 듣고 미리 그것을 체크 하는 사람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그 체크 할 때 기생라합이 직업이 뭐며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는 일체 묻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그건 새로운 만남이 아니기 때문에.
기생라합이 살았던 과거사는 일체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이 보낸 정탐꾼과 기생라합의 만남에서 구원이 증표가 될 수 있는 구원은 이렇게 해서 구원된다는 구원의 약속 내용에 들 수 있는 사건을 일부러 만드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럼 여러분들에게 그게 있느냐가 문제죠. 자꾸 우리가 사적으로 옛날에 이렇게 살았다는 거 말고 멸망을 기정사실화 시킬 수 있는 고백이 우리 속에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나는 마땅히 지옥 가야 한다는 것을 인지시키는 그걸 알게 하시는 사건, 그 사건이 우리에게 터졌느냐가 중요해요. 내가 마땅히 멸망 받아야 한다고 여러분들이 고백하신다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착실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은 거기서 그런 입을 열면 안 되죠. 멸망 받겠다는데 착실하니까 봐달라는 건 말이 안 되죠.
하나님이 원하는 사건은 네가 멸망 당함을 네가 분명히 인지하느냐를 구원의 모티브로 삼는 거예요. 핵심으로 삼았다는 말이죠. 그 생각이 또 유지되어 줘야 해요. 한때가 되면 안 돼요. 계속 유지되어야 해요. 그러면 구원의 상황은 뭐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바로 보며, 십자가 사건이 그건데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 죽은 것은 사실은 내가 저주받아야 하는 십자가의 의미가 계속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그 사람은 새로운 삶,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내가 곧 구원의 증표가 되도록 대외적으로 알려주는 삶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쓰시고 있는 겁니다.
기생라합보다 착하자는 것이 아니고 기생라합보다 직업이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고 “기생라합 봐라. 자기가 멸망 당할 것을 기정사실로 알고 하나님의 멸망하심이 정당함을 본인의 인생을 통해서 만남을 통해서 보여줬잖아”라는 겁니다. 그래서 기생라합 이야기는 계속해서 반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있게 하는 겁니다.
하나의 예인데요, 어떤 새댁이 시집와서 에어컨이 없어서 달아야 하는데 LG전자에 전화해서 에어컨 큰 거 하나 달아달라 하니까 설비기사 보내 준 거예요. 에어컨 설비기사가 에어컨 들고 올라와서 낑낑거리며 에어컨 들고 “여기 전화하신 곳 맞죠?”라고 하며 서로 얼굴을 보는 순간 10년간 죽고 못 살던 사랑 하던 옛날 여인이었어요.
결혼 약속까지 했는데 반대에 부딪혀 결혼 못 한 사이였어요. 그때는 너무너무 사랑한 사이. 여자가 “오빠...”라고 하고 남자도 “네가 왜 거기서 나와...”라고 하면서 그 남자 하는 말이 “너무 힘들다...”라고 하니까 여자 하는 말이 “오랜만에 만나서 힘들지...”라고 하니까 남자가 하는 말이 “에어컨 들고 있으려니까 힘들다. 좀 같이 들어줘라”라고 하고 에어컨 설치 다 끝나고 남자는 그냥 갈 길 가죠.
인간의 이 세상에 만남이라는 것은 이렇게 일시적입니다. 한시적이에요. “오빠 힘들지...” “그래 힘들다”라고 하면서 빠이빠이 하는 겁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만나지 말자”라고 말하면서 헤어지는 겁니다. 어떤 코미디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만남이 “오빠는 저주받아야 해”라는 이런 소리 한 것이 아니잖아요.
옛날 나라는 인생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내 사랑하는 남자친구가 일부를 차지하는 거예요. 내 인생 구성하는데. 그처럼 기생라합에게 자기 나름대로 자기 가족 먹고살려고 뭔가 구성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욥도 마찬가지예요. ‘내 인생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는 말 차체가 뭐가 있느냐 하면 나는 나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다는 겁니다. 고통은 빼고. 고통이 찾아와서 망가진다는 내용은 빼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나를 노리고 들어오셨는지 의문을 갖는 것이 불신 적인 요소고 신자 적인 요소가 뭐냐 하면 주님께서 노리고 있는 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고 앞으로 모든 구원받는 사람의 대표적인 증표가 된다는 사실이에요. 이 고통이. 하나님과 만남이. 사랑이라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아픈 거거든요. 왜? 십자가 자체가 주님이 아팠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진짜 주님이 오신 게 아니고 가짜 주님, 한 은혜스러움 하는 마귀가 성경 보면서 은혜를 줄 때와 주님 만났을 때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악마가 찾아와서 말씀에 은혜받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네가 죄인이니까 이런 짓 하지 마라”는 식으로 와요. 잘 들으셔야 합니다. “기생라합, 너 직업이 좀 더럽다. 예수 믿고 이제 직업을 좀 바꿔. 기생 하지마”라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네가 이렇게 살면 추잡스러우니까 새사람 되면 너를 구원해 줄게”라는 식으로 해석해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게 왜 악마적인 생각이냐 하면 악이라는 것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을 따먹었거든요. 사람이 악이라고 들어오면 순수하게 내가 저주받아야 할 악, 무슨 짓을 해도 나는 지옥 가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나쁘고 너는 지옥 가야 해”라고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과 악이 같이 맞물려있기 때문에 갑자기 회개하고 반성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앞으로 잘한다고.
선과 악이 이렇게 같이 있다니까요. 제가 어릴 때 동생 하나가 있는데 계속 내가 가는 곳만 따라 다녀요. 동생이 자꾸 나하고만 놀려고 한단 말이죠. 취미가 비슷해서 그런지. 계속 나만 따라오는 데 뭐가 불편하냐면 내가 몰래 간식을 혼자 먹고 싶은데 혼자 먹을 기회를 주지를 않네요. 형제들끼리 있을 때 정말 놀랍게 획득한 간식은 나만 먹고 싶잖아요.
그런데 “형아, 맛있나?”라고 하면서 온단 말이죠. 안 줄 수도 없고. 선과 악이 그래요. 악을 저지르게 되면 ‘아, 내가 나쁜 짓 했다’라고 하면서 그다음은 착한 짓을 두 세배 하려고 해요. 이게 선악과예요. 욥이 지금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겁니다.
“주여, 제가 의인이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인 것 맞는데 이 정도는 아닙니다. 제가 아무리 반성하고 반성해도 이거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잘할게요. 주의할게요. 더 알아 모실게요. 하지만 이 고통은 내가 할 수 있는 선과 악의 저울이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도대체 저는 납득이 안됩니다. 왜 저에게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욥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에 욥이 자기가 아무리 착해도 20절에 보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라고 하는 말은 자기가 아는 선악 적 요소는 다 끄집어내요. ‘이 정도로 나를 낮추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로 나를 스스로 죄인이라고 때리면 이 고통이 물러가겠습니까?’라고 계속해서 몸과 자아 사이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분리됨을 모르고 한 덩어리 되는 거예요.
그러나 이 해답은 바로 기생라합 사건에서 풀린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렸죠. 기생라합은 자기의 기생이라는 직업이든 어떤 직업이든 일체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어떤 탓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옥 가도 마땅한데 그걸 미리 통보하기 위해 왔다는 이 찬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퀀스,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건 적 과정에 포함되었음을 기생 라합도 알고 이스라엘 백성도 알아야 하고 주님은 물론 아시는 거고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지금 시퀀스예요. 이런 식으로 순차 적으로 이렇게 발악하고 이렇게 반항하다가 정말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난 뒤에는 주께서는 우리가 행한 것을 일체 선악 적인 요소로 탓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자기 몸을 피해버리는 거, 복음에 대해서 몸을 돌려버리는 거, 이거는 용납이 되질 않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때로는 반항하고 때로는 감사하지만 얼마 가지 못하는 것을 욥도 같이 경험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욥을 통해서 주님이 나타난 것처럼 저희들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가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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