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차라리(욥9;11-16) 2005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5. 3. 23:08
2020-05-03 14:55:43조회 : 20         
   차라리 20050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차라리(욥기 9:11-16)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aJhs5XJ0jx8, Hit:0
 이근호20-05-03 15:53 
차라리

2020년 5월 3일              본문 말씀: 욥기 9:11-16

(9:11)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9:12)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9:13)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

(9:14)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9:15)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9:16)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욥은 하나님에게 당하면서도 해답을 알지 못합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날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해답을 압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무엇을 알아야 하고 무엇을 정답으로 여겨야 하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태의 시작은 욥의 고통입니다. 욥은 자신의 경험상, 지금의 고통이 죽음으로 이어짐을 압니다.

그것도 자신이 과오를 범해서 생긴 죽음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주신 ‘죽음의 자리’임을 압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이 나뉘어지지만 어느 민족이든 공통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곧 ‘죽음의 자리’를 매개로 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봐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내가 왜 죽지?” 혹은 “내가 왜 이 세상에서 고생하지?” “왜 인간들은 너나 할 것없이 단체로 벌 받고 있지?”라는데 의문점을 가져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 혼자 살만하고 숨쉴만하니 그저 즐기는 식으로 사는 것은 욥의 고통이 주는 특이성을 외면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욥에게 있어 여전히 해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사람들과 사람들만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마치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의 저자들이 모두 인간들이라는 점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이 제시한 것들이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는 지혜요 지식입니다. 인류는 줄곧 산업혁명들은 필요할 때마다 일으켜서 오늘날의 대단한 문명사회를 이루었다고 자찬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빠트리고 외면서고 무시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특이한 죽음’입니다. 죽고 난 뒤에 사흘만에 살아난 이야기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 있고부터 모든 사태들은 ‘이미’ 정답을 반영하면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성도에게는 발견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욥은 아직 ‘십자가가 모든 일의 해답’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 혹은 구약적 형편을 ‘사전(事前)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사후(事後)적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벌써 정답이 알려지고 난 뒤에, 매사가 십자가 의미로 최종 집결되는 양상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병들고 약 주는 것이 아니라 약부터 주고, 왜 이 약이 약다우냐를 알리기 위한 맞춤 병이 일어나는 겁니다.

비록 욥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모르지만 그의 고통 속에서 장차 일어나는 요소가 섞여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라합’이라는 단어입니다. ‘라합’의 뜻은 ‘흥분하는 자, 격동하는 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라합’이라는 괴물이 바다에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날의 칸막이의 의의를 알 수 있습니다.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방치하지 않고 각자의 격납고에 집어넣듯이  세 째 날에 하나님께서 뭍과 바다를 구분 지었습니다. 즉 바다의 역할과 땅의 기능이 같이 않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인간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흙에 물이 덮혀 있는 것을 바다로 여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바다에 괴물을 집어넣으셨다고 하십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찾아봐도 별 괴물이 안 보이는 괴물을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이 창조세계의 원리가 인간의 합리적 의심 너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보고서 믿어지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상상한다고 해서 그것도 진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은 어디까지나 땅에 묶여있습니다. 땅이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죽음의 자리에 앉은 욥이기에 ‘라합’을 언급할 수가 있습니다. ‘라합은 바다 속의 괴물로서 뱀의 동맹군 역할을 합니다. 욥은 지금의 자기 형편이 하나님과 주고 받을 형편이 아님을 압니다. 자기에게 준 고통의 성격은 마치 바다의 괴물을 하나님께서 잡을 때 작용하는 고통이다고 여깁니다.

인간의 눈으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바다는 ‘라합’이라는 괴물을 품고 있습니다. 그 괴물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땅으로 기어 올라옵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한 이름들이 있더라”(계 13:1)

이로서 땅의 바다 괴물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바다 괴물의 특징은, 창세기 1장에서 칸막이 쳐놓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를 공격하는 세력입니다. 뱀과 단짝이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사 51:9)

즉 땅이 전부에, 오직 땅의 것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는 하나님께서는 바다에서 짐승을 올라오게 하신 겁니다. 이로서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면서 평생을 고생하며 살게 됩니다. 악마가 가진 본심은 악마의 지배를 받아 보므로서 실감나게 됩니다. 국가의 통치 이념을 말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해서 받게 된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 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볼 사이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입었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으며”(단 7:2-4)

하나님께서는 이 짐승들을 통해서 혹독한 삶을 살게 합니다. 사람들은 악마의 개입으로 세상살이가 힘든다는 사실을 모르고 인간들의 온갖 지혜와 노력과 지식을 총동원해서 해결해보려고 합니다. 이 악마의 통치성을 보여주는 것이 욥의 고통이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땅 방문은 악마의 통치가 극에 달라고 모든 자들이 악마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에 이루어진 겁니다.

비록 욥은 사전적 분석에 머물러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후적 분석이 가능합니다. 그 예가 마태복음 26:24에 나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여기에 ‘차라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차라리’라는 말은, 모든 상황이 종결된 상태에서 그 사람의 운명의 비극을 말해주는 겁니다. 뱀이 땅을 지배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최종적 해답이 터지고 난 뒤에 알려집니다. 마태복음 2장에서, 아기 예수님 가정은 헤롯의 공격을 받습니다. 동방박사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아기 예수님 가정과 동방박사를 다른 곳으로 빼돌렸습니다.

화가 난 헤롯왕은 예수님의 태어난 베들레헴 지경의 아들 중, 예수님의 출생과 비슷하다고 여긴 2살 밑의 아기는 다 죽이게 했습니다. 이처럼 뱀, 곧 악마는 정치의 이름과 종교의 이름으로 여전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차라리’을 양산하는 엄숙한 영적 환경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2에 보면,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최종 해답인 십자가에 모든 것을 걸지 않거든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악마의 힘에 지배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불신자에게 퍼부어지는 가혹한 형벌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5-03 20:11 
29강-욥기 9장 11~16절(차라리)2020050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9장 11~16절입니다. 구약성경 769페이지입니다.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아래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더불어 변론하랴,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오늘 본문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를 살펴보면 욥이 몸이 아픈 것은 아는데 그리고 몸이 아프면 “아야”라고 말하면 되는데 비명소리가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상황을 비명에 섞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나를 아프게 한 것은 맞는데 해답을 전혀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 해답을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이게 구약과 신약의 차이 때문에 그러는데요 구약에서는 사전적 분석에 들어갑니다. 결정적 일이 일어나기 전에 계속해서 해답을 찾는 식으로 자기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분석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약은 어떠하다고 감을 잡지요.

신약은 뭐냐. 이미 결정적 상황이 일어나고 난 뒤에 사후적으로 분석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답은 항상 하나로 고정이 되어요. 주님의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라는 그 의미, 그 의미를 반복해서 되새기는 식으로 이것만이 정답이라는 식으로 계속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놓쳐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십자가에 하는 일을 헛수고로 만들어 버려요. 있으나 마나 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구약에서 계속 제자리걸음 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사는데 왜 이렇게 힘듭니까? 왜 이렇게 하는 일이 안 되는 겁니까?’라고 계속 불평해 대는데 그것은 결정적인, 이미 해답이 주어지기 전에 몰랐을 때 하는 이야기지 주님의 십자가에 모든 최종 의미가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자전거 나가지도 않으면서 자전거 굴리는 헬스클럽의 자전거처럼 계속 밟아도 1센치도 나가지를 않아요. 자기 한풀이만 될 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욥의 고통 가운데서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욥으로하여금 입으로 토하게 하느냐 하면 사전적 분석에 들어가면서 욥이 그 해답을 잘 모르면서도 사후에, 십자가 이후에 온전하게 정답이 다 드러난 세상에 해답이 다 드러난 상태를 욥의 비명소리 가운데 집어넣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오늘 본문 13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아래 굴복하겠거든”이라고 라합을 돕는 자로 되어 있고 15절에 보면 “내가 의로울지라도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하였을 뿐이며”라고 되어 있어요. 의로워도 심판 속에 놓일 수밖에 없고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 욥의 비명소리 가운데 섞여서 사후적 사태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는 사람이 ‘라합’이 등장할 때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라합이 거기서 왜 나와? 라합이 갑자기 등장한단 말이죠. 욥이 라합을 언급할 때 이건 설명이 필요한 겁니다. 라합하면 우리는 기생 라합밖에 생각 안 하는데 그 기생 라합 아니에요. 욥기 26장 12절에도 라합에 대해서 어느 정도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는 권능으로 바다를 흉용케 하시며 지혜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며, 그 신으로 하늘을 단장하시고 손으로 날랜 뱀을 찌르시나니”라고 할 때 여기 라합이 나와요. 라합은 욥기 26장에 의하면 바다에 숨어있는 괴물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제가 사전적 분석이라고 언급한 것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계시가 다 노출되기 이전에 바다에 무슨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이 성경이 인간이 알고 있는 그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어요. 인간의 합리적인 의심, 합리적인 판단으로도 미처 손에 닿지 않는 다른 그 너머의 세계를 언급하는 겁니다. 제가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땅과 바다는 원래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바다는 땅을 침범하지 못하고 땅은 바다를 침범하지 못해요. 땅과 바다를 가름함으로써 그게 바로 하나님의 창조에 하나의 구역을 정한 겁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창조에 어떤 칸막이라는 것이 설정되어 있어요. 창세기에 제 3일째 되면 뭍(땅)이 드러나고 바다가 드러나게 이렇게 구분 지어서 땅은 땅대로 내가 손대고 바다는 바다대로 손을 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창세기 1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땅이 뭔가 문제가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뭘 허락하시느냐 하면 바다로하여금 땅을 지배하고 접수하도록 그렇게 하셨다는 겁니다. 참 신기한 일이죠. 이건 과학적으로도 분석 안 되고 이런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일 거예요. 바다가 땅을 접수하고 점령한다? 그러면 해일이 일어나는가? 해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어떤 주인공이 숨어있어요. 은밀하게. 나쁜 괴물이 숨어있어요. 숨어있다가 괴물이 뭘 노리느냐 하면 땅을 노리고 땅을 지배하고 장악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허락을 해야 해요. 손 좀 보라고. “바다의 괴물에 땅에 있는 그 주인공들을 손 좀 봐서 네가 주인 노릇 해라”라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최초의 이야기가 성경 제일 끝에 나옵니다. 최초의 사실이 성경 제일 마지막 요한계시록에 처음과 끝이 다 나와 있어요.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 보니까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라고 바다에서 짐승이 기어 올라온다고 나와 있어요. 다니엘 7장 1~3절에 보면 그 짐승에 대해서 예시를 했습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 원년에 다니엘이 그 침상에서 꿈을 꾸며 뇌 속으로 이상을 받고 그 꿈을 기록하며 그 일의 대략을 진술하니라, 다니엘이 진술하여 가로되 내가 밤에 이상을 보았는데 하늘의 네 바람이 큰 바다로 몰려 불더니”라고 되어 있는데 바람, 그러니까 천사의 힘이 바다에 작용하니까 거기서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니”라고 되어 있어요. 기어 나온 거예요. 도롱뇽처럼 긴 악어처럼 기어 나왔어요. 악어라는 말도 욥기에 나와요.

기어 나왔는데 “그 모양이 다르니”라고 되어 있어요. 모양이 달라도 출처는 동일해요. 바다에서 올라온 것이다.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이렇게 설명하면 됩니다. 이 세상은 아무리 문명이 바뀌고 문화가 바뀌고 산업혁명 제1차, 2차, 3차 아무리 산업혁명 해도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낯짝밖에는 못 봐요. 인간의 얼굴밖에 못 봅니다.

같은 인간이 인간밖에 못 봐요. 그러니까 무엇이 계속 숨어있느냐 하면 왜 세상에서 우리가 단체로 벌을 받고 있는지 그 내막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겁니다. 물론 창세기 3장 15절에서 뱀의 후손, 뱀이 작용해서 악마가 작용해서 우리는 하나님에게 벌 받고 있다고 되어 있지만, 그 성경 말씀 무시해버리면 인간이 살아봐야 70년, 80년, 90년, 지금은 백 세까지 살지만 옛날에는 일찍 죽었잖아요.

60되면 환갑이라 해서 전부 다 축하해 줬습니다. 60까지 살면서 배워봤자, 자기가 도서관에 들락달락 하면서 공부해봤자 거기서 악마가 보입니까? 이 세상에 정답이 나오겠어요? 같은 인간들 머리만 맞댈 뿐이죠. 거기에 머리 맞대고 악어가 어떻고 짐승이 어떻고 뱀이 어떻고 그런 거 안 나옵니다. 사람은 합리적인 거밖에 몰라요.

손으로 만져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인간이. 도마도 그랬지만. 내가 경험해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하늘의 별? 그거 망원경 보고, 내가 그걸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죽었던 장애자 스티븐호킹 박사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나는 신이 있다는 걸 믿지 않는다. 그저 자연이라 하는 것은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소멸될 뿐이다”라고 이런 소리를 했다고요. 자기가 뭘 안다고.

“네가 뭘 알아? 공부를 해봐”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도서관에 있는 책뿐만이 아니고 뭐 고산도서관, 동대구 도서관, 어느 도서관에 있는 책이든 다 봐보세요. 아무리 봐도 거기서 악마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습니다. 악마의 존재가 증명 안 돼요. 인간이 기껏 지혜와 지식이라는 것이 그 수준밖에 안 됩니다.

이 세상에 땅에 있는 인간들만 상대했기 때문에 그래요. 은밀하게 바다에 있는 괴물이 기어올라 왔다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데는 없어요. 바다에서 뭐가 기어 올라오면 “네가 거기서 왜 나와?” 이러고 있다고요. 인간 문제는 인간이 해결하는 거예요. 인간 문제는 인간이 해결. 그래놓고 악마가 인간을 하나님에 의해서 지배한다는 그것을 그 기본적인 것을 빼돌리고 하는 말이 땅에서 인간이 뭘 만들었느냐 하면 소위 종교라는 것을 ‘신’을 만들어 내요.

“신이시여, 도와주소서”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네가 무슨 낯짝으로 도와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면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도와달라고 하는 겁니다. 무조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잖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없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빠졌어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싸운다는 이 싸움의 요소가 빠져버렸어요.

그냥 하나님 존재하고 나 존재하니까 도와줘야 마땅하다는 거예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 궁금해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아요. 그건 당연히 진짜 하나님이라고 우기고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계시를 보여주죠. 욥이 이방인이에요. 이스라엘사람 아닙니다.

이방인이지만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이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죽음으로부터. 죽음이 매개가 되어서 진짜 하나님이 죽음 속에서 나와요. 죽어 마땅함 속에서 나온다고요. 내가 살아 마땅함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안 나옵니다. 악마가 안 보입니다. 죽어 마땅함을 통해서 오늘 본문처럼 욥은 죽어 마땅함을 통해 도대체 해결점이 없어요.

하나님이 지나가도 내가 못 알아보고 하나님이 응답해도 내가 못 알아들을 게 뻔하고 쭉 앞에 나오잖아요. 11절에 보면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나아가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라고. 이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의로울지라도 심판받고.

그러니까 사전적 분석에 들어가면서 내가 사전적, 아는 지혜를 총집합해서 다 해결책을 얻으려고 내 고통의 의미를 알려고 이유를 알려고 애썼지만 자기는 안다는 거예요. 이거는 내가 해답을 얻어낼 가능성은 없다. 정답이 내게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냥 맥없이 죽어갈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욥을 통해서 정답을 모르는 모든 인간들의 난맥상, 한계를 보여주는 겁니다.

가족끼리 서로 죽고 못 살지요. 내가 너를 위해 다 해주겠다고 하고. 그건 돈이 얼추 있을 때나 가족을 얼싸안고 위하고 하지요. 어릴 때는. 하지만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 그때는 집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집구석에 앉아서 맨날 티비나 보고 사업한다고 수천만 원 저지레로 날리고 그다음에 휴대폰 대리점 해서 한 오천 날리고 그렇게 나이 사십 되었는데 몸은 뚱뚱하게 그러고 있으면 아무리 아버지가 노끈공장 하고 있지만 그 아들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딱 떠오른 것이 뭐냐 하면 무전취식이에요. 아무리 집안 식구지만 밥값 안 내고 밥 먹을 순 없다. 이게 딱 떠오르게 되어 있어요. 자식 잘 키우려고 애 안 쓰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다 자식 잘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 서른 넘어서 하는 일마다 안 풀릴 때 본인도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는 천불 나는 겁니다. 천불 나요.

이유를 모른다니까요. 이유를. 그게 마귀가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빼놓고 세상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한 거예요. 해답을. 죽으라는 김정은이는 왜 그렇게 안 죽고 왜 또 살아서 기어 나왔는지. 좀 죽지. 죽으라고 해도 안 죽어요. CNN에서 죽으라고 해도 안 죽어요. 도대체. 여러분, 우리가 뭔데 도대체 우리 뜻대로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뭔데. 우리는 해답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처리를 하느냐. 사후적 분석을 하게 합니다. 약을 주고 약에 맞는 병을 일으켜요. 이게 정답이에요. 약을 먼저 줘요. 우리는 병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이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지만 그거는 자기 병이 얼마나 깊은지를 몰라요. 어디까지 꽂혀 있는가를 몰라요. 착한 일 하면 복 받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아예 하나님께서는 약을 먼저 줘버려요. 약을 먼저 주고 우리는 그 약을 건강한 사람 같으면 무시하죠. ‘나 건강한데. 십자가? 그냥 후딱 지나가 버리자’라고 되는 거예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울산강의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십자가는 쇼윈도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냥 보고 ‘좋으네’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가 우리를 잡아 당겨버리면 그 백화점에 쇼윈도 십자가에서 더 지나갈 ‘나’가 소멸되어 버렸어요. 내가 없어요. 십자가를 잘 모르니까 십자가 딛고 그다음 또 뭐 하고 그다음 부활 딛고 천국 가고 재림 맞이하고 하는 이런 시나리오는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 스케줄을 계속 갖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죽음을 매개로 안 하니까 마치 십자가 재림이 해결책인냥 그렇게 우기는 겁니다. 그런 설교가 굉장히 많죠. 십자가 믿는다고 해놓고는 그 다음 뭘 뒤집어 씌우느냐 하면 재림을 얹어 버립니다. 십자가 믿어도 재림 안 믿으면 구원 못받는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막 나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정답을 알아버리면 십자가 믿어도 안 되고 재림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런 추가 밥 이야기는 나올 수가 없어요.

욥에게 있어서 욥은 뭘 보고 뭘 이야기하느냐 하면 라합이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다는 겁니다. 라합은 악마죠. 라합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요동친다. 흥분한다’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잠잠하던 바다가 물결이 일어나서 보니까 괴물 하나가 아주 흥분하고 날뛰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 라합이 뭐냐하면 악마의 동맹국입니다.

라합이라는 것은 이사야에 보면 51장 9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은 좀 어려워요.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라고 나와요. 라합은 용을 도와주는 동맹군이에요. 동맹군.

그런데 이사야 30장 7절에 보면 라합 같은 나라가 등장해요. 그게 뭐냐 하면 애굽이라는 겁니다.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못 빠져나와야 하고 빠져나올 생각도 없었는데 애굽을 흥분시켜서 하나님이 애굽을 자극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백성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게 그렇게 조치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땅에 있는 인간들을 선악과 따먹고 죄짓게 해놓고 인간들이 죄지으면서도 서로 얼굴 보면서 어리둥절하는 거예요. 우리가 왜 이렇게 고생해야 하는가. 자식 키울 때는 이쁜데 자식이 나중에 더 키우려고 하니까 돈도 벌어야 하고 힘든 거예요. 세상 자체가 스트레스예요. 왜 스트레스받으면서 살아야 하는가.

울산 강의에 의하면 인간은 왜 신발을 신어야 하고 옷을 왜 입어야 하는가. 그건 땅에서 저주가 올라오니까 신발 신고 나이키 신고 옷을 입어야 안 얼어 죽으니까 옷을 입는 거예요. 그러면 그다음 문제. 왜? 왜 그래야 하는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나이키를 안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이 원피스 안 만들었죠. 지금 우리가 문제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를 아무리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도 이게 악마의 존재를 모르니까 이게 해결책이 없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보자. 언놈 천국 가봤나? 있다치고 교회 다니고 가봐서 없으면 헛수고했다 치지’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우리 곁에서 십자가로 욥처럼 고통당하는, 고통당하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의미한 거예요. 그냥 쇼윈도예요. 예배당에 그냥 있는 하나의 기호밖에 되질 않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는 철학의 기초가 되는 그리스신화에 보면 바탕이 잘 나와 있어요. 거기 보면 프로메테우스라는 신하가 신을 속이고 인간에게 불로 음식 해먹는 지혜를 주다가 걸려서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당합니다. 신이 하지말라는 일을 하면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프로메테우스는 묶여 있고 독수리가 와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파먹는 신화가 나와요.

우리나라 전설에도 구미호에 보면 묶여 있고 간을 파먹는 그런 신화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고통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살아있는 채로 간을 파먹히는 그것이 가장 고통스럽지 않느냐라고 생각해서 신화에서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이 그런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런 고통이 있고 또 다른 책에 보면 인간의 비극에 무슨 비극이 있느냐 하면 집안끼리 몰살당하는 비극이 있어요. 햄릿에 보면 가족이 아빠가 엄마가 그리고 같이 기대고 의지했던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자로부터 배신당할 때 아픔 당할 때 그때 그 고통이 아주 말도 못 하는 고통이죠.

옛날 전설에 이런 게 있죠. 신혼 첫날 밤에 신랑 신부가 결혼했는데 그렇게 좋다고 좋다고 해놓고는 딱 첫날밤에 얼굴 보고 그다음부터는 각방 쓰고 자기 색시를 돌아보지 않을 때 그때 색시가 당하는 배신감이 얼마나 지독하겠어요. 차라리 이러려면 나랑 뭐 하려고 결혼했느냐는 겁니다.

결혼했으면 사랑해줘야지 결혼하고 첫날밤 치르고 돌아서 버리는 거예요. 꼴보기 싫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레아. 첫날밤에 보니 색시가 얼굴이 달라요. 정말 뒷 목 잡을 일이죠. “나는 너를 좋아한 것이 아닌데 왜 네가 거기서 나와”라고 하죠. 색시 아빠가 하는 말이 “우리 동네에서 마침 원 플러스 원 행사한다. 하나 끼워 넣기로 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럼 나머지 하나는? 7년 일을 더 해야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완전히 야곱도 한 속임수 하지만 외삼촌도 속이는 거예요. 못생겨서 시집 못 보낼까 싶어서 덤으로 끼워준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하나가 징벌이고 벌이란 말이죠. 왜 세상은 천국이 아니고 낙원이 아니냐. 왜 벌 받느냐. 해답이 정답이 없어요. 그러면서 이미 태어난 걸 무를 수도 없고.

번개탄 피워서 자살하려고 해도 죽고나서 지옥 갈 것은 또 뻔하고 오가도 못 하는 거예요. 그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단어가 나와요. “차라리”라는 말.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뻔했다”라는 차라리. “차라리”라는 말이 사전적 분석에서는 안 나와요. 사후적 분석에서 나와요.

다 일이 마무리되고 천당 갈 사람 천당 보내고 지옥 갈 사람 지옥 보내놓고 사후적으로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주님이 하시는 말이 “차라리 너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했구나”라고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 가롯유다에게 하신 말씀이에요. 누가복음 17장 2절에도 나와요. 택한 백성을 시험케 하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나와요.

“네가 어린 소자에게 다른 복음 전하면 차라리 너의 목에 연자 맷돌 매고 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 네가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목에 연자 맷돌 매는 각오로 이야기했느냐? 너 빠질 각오로 복음 이야기할래? 그 정도로 되어 있나?”라는 말입니다.

농담도 아니고 이건 실없는 농담처럼 복음 십자가 이야기하지 말고 “나 이거 십자가 하나에 목달았다. 나는 십자가 부활 없으면 내 인생 헛살았다”라고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처럼 “나는 이거 하나로 모든 걸 걸었다”라는 마음 자세로 십자가 복음 안 전하면 차라리 네가 연자 맷돌 매고 네가 빠져 죽으라는 말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라고 그 정도로 주님께서는 세상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다가섭니다. 진중성 있게. 성경이 농담이 아니고 이게 현실화되거든요. 욥이 라합이야기를 그냥 평소에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고통스러울 때 해결점 없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이 와서도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자기가 짐작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여, 이럴 것 같으면 악마를 죽이는 그 심판의 고통으로 지금 저에게 찾아오셨군요”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너무나 무서운 단호함이죠. 그래서 성도의 기쁨이라는 것은 불신자에게 내리치시는 하나님의 잔인한 처분, 어느 정도로 무서우냐 하면 “인간아,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라는 그 무서운 처분 속에 그것을 우리가 아신다면 성도는 이 땅에서의 받을 기쁨은 다 받았어요. 일종의 질투심이거든요.

네가 내 복음을 안 받아드리는데 이제 너는 죽었어. 하나님이 가만두시지 않아. 너를. 너를 지옥 불에 보내실 거야. 필히 보낼 거야. 왜? 내가 전에 그 가운데 있었거든. 나도 알거든.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참, 그걸 알게 되면 불신자와 친구 관계 맺는 것이 아슬아슬해요. 이 복음을 알고 친구를 볼 때 뭐가 보이겠습니까? 친구의 간이 보인단 말이죠.

악마가 뜯어 먹고 있는 게 다 보인단 말이죠. “너 오른쪽 상부가 간지럽다는 생각 안 드나? 아프다는 생각 안 들어? 나는 알거든. 너는 모르고 있고. 나는 너랑 싸우는 게 아니야. 네가 모르는 것을 알려줄 뿐이야”라고 하나님께서 그거 이야기하라고 계속해서 안 믿는 친구와 만나게 해주는 겁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차라리’입니다. 사후적 분석이에요.

하나님께서 바다로 하여금 바다에 괴물이 올라와 땅을 지배하게 합니다. 자, 그다음 이야기가 뭐냐 하면 땅에서 모든 권세를 다 쥐었습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어요. 손으로 잡았는데 손가락 사이로 뭔가 빠져나갔어요. 누가 빠져나갔느냐.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목수의 아들 예수님이 빠져 나가버렸어요.

헤롯이 기겁을 해서 베들레헴에 아기들 다 죽였잖아요. 동방박사도 빠져나오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와버렸어요. 바다에 있는 괴물이 땅을 지배함으로써 땅과 바다는 이제 구분이 없습니다. 바다에 있던 그 흥분됨 그 난폭함이 그대로 땅까지 증폭되어서 이 세상은 216개국 모두 코로나 때문에 난리도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빠져나온 분이 누구냐.

예수님이 새로운 땅을 마련했어요. 그 땅은 악마가 침범 하지 못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빌립보서 3장 20절에 말씀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재해보상금도 못 받습니다. 하늘에 있어요. 하늘에. 하늘에 있는 그 영원한 땅, 영원한 본향, 그 중심성을 사후적 분석을 통해서 알게 하셔서, 성령을 통해 알게 하셔서 세상을 향하여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앞에 ‘차라리’라는 말을 붙이면서 친구를 부르죠.

“친구야!”부르고 “뭐 할 말 있나?”라고 물으면 속으로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뻔했다’라고 하는 거죠. 이미 이 세상 분석 끝났어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지금 욥은 모르고 있어요. 그러나 나중에 욥이 알게 될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서관에서 공부한 것이 다가 아니고 철학과 과학이 다가 아니고 인간이 기껏 경험한 것이 다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없는 영적 세계를 약속을 저희에게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의미가 무슨 의미인지를 이제는 기쁨으로 세상에 대한 보복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