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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비명(욥7;17-21) 20032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23. 07:10
2020-03-22 14:58:49조회 : 31         
   말씀의 비명 20032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말씀의 비명(욥기 7:17-21)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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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20-03-22 15:39 
말씀의 비명

2020년 3월 22일              본문 말씀: 욥기 7:17-21

(7:17)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7:19)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7:20)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7:21)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제하여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이제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고통당하는 사람은 욥이기에 욥만이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아니됩니다. 그들은 기존의 인간관을 그대로 옳다고 여기면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아무 탈이 없겠지”라는 식으로 삽니다. 하지만 그럴 것 같으면 왜 욥에게 이토록 격한 고통이 찾아왔겠습니까?

욥의 친구 그 누구보다도 선하게 산 사람인 욥에게 왜 난데없는 고통이 찾아왔겠습니까? 이는 욥 외에 다른 사람은 안일에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가정은 아무 탈이 없고, 그들의 자녀들도 난데없이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재산도 멀쩡합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 그들이 진리입니까? 아닙니다.

그 멀쩡함이 도리어 진리를 가로 막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욥에게 일어나 낯설고 황당한 일에 대해 속아넘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속지 않는 자가 방황’하는 법입니다. 반듯하게 사는 자가 스스로를 타락시키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이하고 낯선 고통을 비켜가려고 합니다. 익숙하고 납득되는 길만 골라 가려고 합니다. 자기네들 수준으로는 욥에게 일어나는 현상과 그것을 대처하는 욥의 몸부림이 이해되지 않기에 통째로 진리가 아닌 것으로 처리합니다. 즉 욥의 친구들에게는 ‘괴성이나 비명 지름’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무심한 활자가 아닙니다. 이 말씀이 인물화되면 그 인물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비명지르고 아파합니다. 그 비명 소리가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 저에게 갈굴 것이 뭐가 있다고 갈구십니까?”라고 반응을 보입니다. “잠시라도 마음놓고 숨쉴 틈도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아파야 할 이유를 알려주시고 고통을 달라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대꾸는 너무나도 엉뚱하십니다.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그것이 몇 달 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그 낳을 때를 아느냐”(욥 39:1-2)고 하십니다.

당연히 욥은 모르지요. 지금 욥의 관심사는 여유롭고 한가하게 자연 탐구생활이 아닙니다. 아픕니다. 아픈 것은 추상이 아닙니다. 관념도 아닙니다. 연출이나 연기를 펼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상황입니다. 아프면 그 아픈 것만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아픈 욥에 대한 처절한 하소연에 대한 하나님의 대꾸는 욥의 질의 태도를 문제삼는 겁니다.

욥은 마치 자신이 아픈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단정 짓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즉 자신이 아픈 것이 아무런 이유없이, 무의미로 아프다는 생각이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 인류에 속한 인간 말고 다른 인간을 준비해놓으셨음을 감안해야 합니다. 진정 의미있고 이유가 있는 인간은 아담계열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십니다.

그 때가 신약 때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욥기는 구약입니다. 욥의 고통에서 나오는 비명이 같은 인간들 입장에서 당연하고 마땅해보이지만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무의미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으당 아파야하고 으당 고통스러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저주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냥 곱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수고에 수고가 더해지는 것 가운데 죽어갑니다. 시편 90:9-10에 보면,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철칙이요 원칙입니다. 더 근원적으로 말씀 드리자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실은 모든 인간이라면 마땅히 받아야 될 고통이요 고난입니다. 어쨌든 욥은 구약 사람이라는 자신이 고통에만 집요하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아픈 자이니 참으로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인간상으로의 교체가 필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욥과 그 친구들은 이방사람들입니다. 이방민족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그 해답을 이스라엘 역사에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는 언약의 구체성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이 점만 생각하게 되면, 약속의 땅이란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평온한 삶을 보장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가질 겁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기근이 찾아옵니다.(창 12:10)  아브라함도 버티고 싶어도 인간의 한계를 보여주면서 기근이 없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기근도 일종의 고통입니다. 고통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론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아니라 본성대로 움직이는 자라는 사실을 들추어냅니다. 명분보다 실리위주입니다. 이는 곧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이 인간을 능가하는 능력이 필요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능력없는 자는 당연히 약속의 땅의 취지에 의해서 뭉개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무너지고, 그 무너진 파편인 벽돌들을 통해 새로운 건물이 새롭게 건립되는 겁니다. 약속의 취지에 맞추어 무너뜨리는 작업과 더불어 새로 세우는 작업을 병행하는 겁니다. 야곱에 있어서도 그러합니다. 애굽에 야곱이 사랑하는 자식이 있다는 소문이 있더라도 약속의 땅을 버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식보다 대신 애굽에 가기를 원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룻 1:1-2)

‘생명의 은인’이란 좋은 인상을 가지고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에게 따질 대로  따지면서 ‘내가 알던 생명은 생명이 아니었구나’를 통감하면서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이처럼
하늘나라 소망이란 지상에 없습니다. 단지 환란 속에서만 나타납니다.(롬 5:3-4)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의 잘남을 내용으로 하여 밀어붙이는 식으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3-22 19:50 
23강-욥기 7장 17~21절(말씀의 비명) 2020032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7장 17~21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내 허물을 사하여 주지 아니하시며 내 죄악을 버리지 아니하시나이까 내가 흙에 누우리니 주께서 나를 부지런히 찾으실지라도 내가 있지 아니하리이다”


욥기만 말고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우리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었습니다. 생명을 줬다는 말은 생명의 은인이라는 뜻이죠. 생명의 은인이라면 생명의 은인 앞에서 우리가 군소리하지 말아야 하죠. 죽었던 나를 살려줬으니까. 신앙생활 굉장히 간단하죠.

죽었던 나를 지옥으로 가고 있던 나를 방향을 돌려서 천국으로 데려가시고 천국에 있게 하시는 그 생명의 은인, 그 생명의 은인 앞에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며 절을 백번이라도 하면서 분초마다 절하고 시도 때도 없이 무시로 고마워해도 마땅한데 오늘 본문의 욥은 이렇게 불평불만이 굉장히 심해요. 왜? 구약이니까.

구약은 터닝포인트인 ‘나는 인간이다’라고 하던 것이 ‘아, 인간이 내가 생각하는 인간 말고 다른 인간이 있을 수 있구나’라는 겁니다. 신약에는 다른 인간이 누구냐 하면 그것을 인자라고 해요. 예수님을 보고 아담에 속하지 않은 다른 인간,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구약도 마찬가지지만 항상 인간이라고 여겼던 인간과 주님 자신이 인간으로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둘 중에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존재냐를 따져보자는 거예요. 쉬운 예를 들게 되면 욥이 오늘 본문에 대해서 굉장히 불만이 많습니다.

“갈굴 걸 갈궈야지 왜 저를 갈구십니까? 도대체 저를 갈궈서 하나님께 이익이 되는 게 뭐가 있다고 저 같은 하찮은 것을 그렇게 주시하시면서 이렇게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주님의 답변은 의외도 너무 의외입니다. 상상도 못 했어요.

욥기 39장에 보면 그런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욥에게 도리어 묻기를 이렇게 묻습니다. 1절에 보면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암사슴의 새끼 낳을 기한을 네가 알 수 있느냐”이게 어처구니없는 답변이죠. 아프다면 물파스라도 뿌려주는 것이 나의 요구사항에 대한 합리적인 처방이고 조치거든요.

딸들이 엄마에게 어리광부리면서 “엄마, 여기 아야 해. 호~해줘”라고 하죠. 여기가 아프다고 하면서 자기가 처방을 내리고 엄마에게 요구해요. 여기가 아프니까 ‘호~’해달라는 처방전까지 내리고 자기가 요구를 해요. 그러니까 지금 욥이 어린아이 같은 입장입니다.

여기 내 몸이 시도 때도 없이 아프니까 어떻게 좀 안 아프게 해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처방은 뭐냐 하면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또 38잘 25~27절에 보면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고, 황무하고 공허한 토지를 축축하게 하고 연한 풀이 나게 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무도 채소도 안 갈고 텃밭도 아닌데 비가 오더란 말이죠. 아무것도 없는데 비를 내려보았자 어떤 소득도 없는 곳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네가 아느냔 말이죠. 질문을 욥이 요청한 것에 맞는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질문 자체를 개무시 해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문제냐 하면 인간에게는 장차 오실 예수님에 비해서 인간은 의미 없습니다. 인간은 의미 없는 겁니다. “황무지가 비가 오는 이유를 모르듯이 네가 아파하는 이유도 네가 알 필요 없어”라는 말입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그러면 신약적 입장에서 예수님 입장에서 그렇게 아파하는데도 이유도 없이 아프거든요. 그걸 저는 이유 없는 폭력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유없는 폭력을 욥에게 행사했습니다. 과연 욥에게만 이유 없는 폭력을 했겠습니까?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은 태어나면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원인도 없이 하나님 앞에 시달리게 되어 있어요. 정말 개 패듯이 우리는 얻어맞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5살 먹은 사람이 트로트 부르는 것과 44살 먹은 사람이 트로트 부르는 것과 달라요. 44살 먹은 장민호는 찡그리면서 오만상 다 쓰면서 상사화를 부르는데 25살 먹은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이찬원이는 헤헤거리면서 노래 부르면서 웃어주니 보는 사람들이 그 모습만 봐도 그렇게 이쁘대요. ‘너 때문에 내가 일이 손에 안 잡힌다’라는 댓글도 달리고.

하나는 찡그리며 오만상 찌푸리며 하고 한쪽은 인생살이가 그렇게 즐거운지 가벼워. 가볍단 말이죠. 그러면 가볍다고 해서 그것이 주님 앞에 얻어맞지 않는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창세기 3장에서 모든 인간은 결국은 매일매일이 질곡과 고생의 연속으로 되어 있어요.

이 사실을 욥의 친구는 제쳐두고 욥에게 대표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아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에게 의미 찾지 마. 인간도 아닌데 의미를 왜 찾아. 네가 의미 찾아서 새사람 되려고? 어림도 없지. 인간 아니면 그냥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십니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네가 예측하지 못한 예상하지 못함이 의미예요.

인간은 인간에 대해서 아는 바 없음, 이게 정답이에요. 내가 고통받는데 내가 왜 고통받는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해서 고통받는지 이유 없습니다. 기존 세상에서는 나쁜 짓 했기 때문에 고통받는다는 공식을 내세웠는데 그건 엄청나게 잘못된 거예요.

정답은 욥에게 있어요. 욥의 친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막상 정답을 부여받고 있는 욥은 본인이 본인 나름의 정답이 왜 정답인지를 모르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욥의 친구들은 욥을 보고 남의 이야기로 여기려는 겁니다. 이걸 보고 ‘속지 아니하려는 자가 방황한다. 속지 안으려고 애쓰는 사람일수록 방황한다’라고 합니다.

그 비슷한 말로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 타락한다.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 점점 자기를 타락시키고 있어요. 왜냐 하면 자기중심에서 못 벗어나니까요. 계속 의미 찾고 있어요. ‘오늘도 어떤 행동 했다. 착한 일 했다. 무슨 결과가 나오겠지’라고. 결과 안 나옵니다.

신종코로나 같은 이런 사태를 보면서 제가 티비 뉴스 보지 말라고 했죠. 보니까 300만 원 벌금 이런 이야기 자꾸 들리는 거예요. 아예 안 보면 되는데. 거기에 가끔 후딱 지나가듯 보게 되면 남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한 의료진들이 아파요. 의사들이 아파요.

천하에 나쁜 놈들은 지금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있고 진짜 남을 살리겠다고 애쓰는 사람들은 본인들이 아프고, 가정에 누가 아프면 그 집안 가정이 풍비박산 납니다. 자기만 희생적으로 고상한 척 ‘그래 나는 아파도 돼’라고 해도 다른 식구들은 어쩝니까?

아무리 식구끼리 사이 안 좋아도 결국 마지막에 건사하고 관심갖고 도와주는 사람은 좋으나 싫으나 자기 집안 식구밖에 없어요. 마누라도 가고, 남편도 아니고, 오직 혈육이에요. 혈육.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내 자식이고 손자 손녀도 마찬가지고요. 이 혈육은 끊지를 못해요.

그러니까 자식들이 아주 교묘하게 부모를 이용해 먹잖아요. 설마 아버지 엄마가 나를 버릴 리가 없어. 말은 “안된다. 너 알아서 자립해라”라고 해도 나 결혼할 때 다 도와줄 거야. 혼수 다 해줄걸. 벌써 눈치 다 챘어요. 이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비닐하우스 같은 자기 가정만 행복하면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마치 욥의 친구와 똑같아요. 자기에게 고통스럽지 않고 안 아프니까 자기는 지금 괜찮게 살아가는 줄 알고 착각들을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욥은 자꾸 인간을 제치고 하나님께 묻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질문을 이렇게 하는데 오늘 이렇게 우리가 성경을 봤으니까 욥의 질문에 같이 합세하도록 해봅시다.

합세하게 되면 이 말씀은 뭐냐 하면 성경 말씀 하나하나가 괴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부르짖고 있어요. 아프다고 고함치고 있어요. 우리는 그냥 문자로 활자 인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래 부르면서 흥얼거리듯이 추임새까지 넣어가면서 읽고 후딱 넘어가지만 실제로 이 말씀의 의인화, 인물화 된 사람은 죽을 지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는 달랑 세자인데 그 십자가 현장에 있던 예수님도 죽을 지경이고 또 3년 동안 예수님이 뭐라도 긴가 싶어서 모든 청춘을 바쳤던 열두 제자는 예수님에게 너무 실망스럽고 그중에 가롯유다는 주님이 너무 실망스러워서 ‘그동안 주님 따라다닌 내가 바보야. 내가 미쳤어’라고 하며 자기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어요.

가롯유다가 자살한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예수님과 자기를 비교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생의 불행이 뭡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딱 하나밖에 없어요. 경쟁하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 경쟁 안 하면 되는데 꼭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죠. 경쟁하는 의식이 드는 순간부터 행복은 물 건너간 거예요. 행복은 없습니다. 경쟁할 필요 없어요.

경쟁할 필요 없는데 이게 우리 이론상 그런데 막상 현실에 있어서 항상 경쟁하는 겁니다. 왜 경쟁을 하느냐.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내가 형성하고 설정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의 질문 안에 무슨 내용이 들어있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내가 나의 운명이잖아요’라는 질문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입 다물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운명이라는 거예요.

인간의 운명이 인간에게 들어있지 않고 딴데 들어있어요. 오실 분, 오실 인간 속에 나의 미래가 들어있고 오실 예수님 안에 나의 장래가 다 들어있어요. 그걸 가지고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때려 죽여도 내가 운명의 개척자라는 사실을 나는 인정할 필요도 없고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두 개 놓고 항상 예수님에게 갈 때는 예수님에게 어떤 정보를 얻어서 내 것을 만들려고 하면 안 되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만지지 마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주님 앞에 얻을 것을 채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배격해요. 내쳐버립니다. 왜? 볼품 없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을 우리는 계속 믿고 있어요. ‘나는 믿습니다. 나 자신을’이라고 되니까 이런 불만 불평이 나오는 거예요. 불만 불평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제가 아침저녁마다” 심지어 여기 18~19절에 보면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라고 하는 것은 욥에게 시공간 의식은 자기를 위한 시공간이에요.

내가 운명이니까 운명을 내가 개척하기 때문에 시간 관리, 분 관리, 초 관리도 내가 하는데 왜 주님이 주제넘게 내가 내 스케줄 관리하는데 끼어드시냔 그런 말이죠. 이런 이야기는 욥의 친구들이 평소에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욥의 친구들도 욥도 똑같이 살아가는데 욥의 친구들은 멀쩡하고 욥에게는 내 인생 내 스케줄을 내가 관리한다는 이것의 고통이 더욱더 크게 나오는 거예요. 크게 나오는 계기가 된 겁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20절에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라는 말입니다. “하찮은 제가 좀 잘못했다고 칩시다. 주님. 그렇다고 해서 주님에게 뭐가 그렇게 손해가 된다고 뭐가 그렇게 주님 가슴팍을 아프게 한다고 갈궈도 이렇게 갈굽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욥이 뭘 모르고 있느냐 하면 그 정답을 찾을 때 어디서 찾는다고 했습니까? 욥은 이방 민족이죠. 그 이방민족의 모르는 정답은 해답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해답이 주어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약속의 땅에 기근이 왔다는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은 이겁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어요. 젖과 꿀이 흐른다면 그 이야기 딱 들으면 우리 생각에는 계속 젖과 꿀이 흐르기 때문에 어떤 가뭄같은 거 없고 사는 것에 불편함이 없도록 다 하나님께서 챙겨 주실것이라는 선입관이 확 와야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도 그걸 믿었어요. 믿었는데 막상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갔는데 기근이 있습니다. 처음엔 참았죠. 나중에는 못 참습니다. 약속의 땅이고 뭐고 기어이 애굽으로 살아야겠다 생각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죠. 이같은 경우는 야곱에도 있었어요.

야곱도 자기 스스로 한 믿음 한다고 자부하면서 요셉이 오라해도 안 가요. 내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왜 버리느냐. 그런데 결국은 가요. 또 이번 여름 수련회에 룻기를 할 건데요. 룻에 보게 되면 약속의 땅에 나오미 가정이 모압땅에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불교 나라에 우리는 이민 갈 생각이 없어요. 교회 놔두고 절 많은 나라 가기 싫어요.

그러나 가뭄이 드니까 종교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못 버티거든요. 버틸 수가 없어요. 나오미 가족이 못 버티는 거나 오늘 본문의 욥이 못버티는 거나 주께서는 자꾸 못버티게 만드는 겁니다. 좀 좋게 좋게 자기 백성 같으면 좋게 나오면 되는데 자꾸 버티지 못하게 만들어요.

오늘날 교인들도 목회자들이나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묻는게 ‘예수님 잘 믿고 하나님 잘 믿어 왔는데 왜 우리 가정에 풍비박산입니까?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는 질문.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해답이 나왔는데 건물이 무너져서 벽돌이 깨져야 그 깨진 벽돌을 다시 주워모아서 건물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부수는 작업과 세우는 작업이 항상 같이 병행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내가 옛사람이 깨어져야 새사람이 같이 일어나는 거예요. 물론 그 작업가운데 우리는 괴성을 부릅니다. 우리는 아주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죠. 하지만 우리가 내는 하나님의 교체작업 때문에 내는 신음소리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안에 들어오고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는 내 뜻대로 되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뜻대로 안 돼요. 예상 못해요. 예상 할 수가 없어요.

예상한대로 되어지게 되면 우리는 운명을 내가 개척한 것이 되기 때문에 주님에게서는 어림도 없는 거죠. 자 아까 했던 이야기 다시해보겠습니다. 욥이 말하기를 “왜 저를 갈구지 못해 안달나서 나를 표적 삼아서 그렇게 나를 치십니까”라는 말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뭐냐 하면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그것이 몇 달만에 만삭되는지 아느냐?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라는 이야기를 한다고요. 나귀는 지가 알아서 풀었겠지 그걸 몸 아픈 욥보고 왜 묻습니까. 엉뚱한데로 돌려요. 엉뚱한 데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꾸 젖과 꿀이 흐른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에 누가 사느냐? 우리가 산다. 그러니까 젖과 꿀이 하나님이 사는 곳으로 먼저 인식되지 않고 내가 산다는 곳으로 그 좋은 땅에 내가 멋있게 행복하게 산다는 쪽에 먼저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그 관심사가 주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좋으면 다 좋다는 내 쪽에 평소에는 육신적인 욕심으로 나만 좋으면 된다는 그 사고방식을 치과에서 이빨 뽑듯이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나만 좋으면 그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로마서 좀 읽어 봤다는 사람들은 아는 유명한 말이 있어요. 로마서 5장에 보면 ‘하늘나라 소망이 어디 있느냐. 찾아 가겠다’라고 할 때 찾지 마세요. 소망은 없어요. 우리에게 하나님이나 천국이나 소망은 없습니다.

5장 2~4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은 딴데 없어요. 소망은 없어요. 우리가 받은 소망은 세상 소망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 소망이 세상이 흔들려요. 신종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쓰는 것도 답답해서 이러고 참고 있는데 이제는 외출금지까지 해요. 미치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이 꽃 누가 피게했습니까? 하나님이 피게했잖아요.

저 벚꽃이 운명은 주님에게 있잖아요. 우리도 좀 벚꽃 되었으면 좋겠어요. 벚꽃아, 네가 부럽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 운명을 왜 우리가 자꾸 개척하고 우리가 다듬어야 하고 우리가 조정해야 합니까? 결국 그렇게 얻어진 것은 뭡니까? 지옥가는 운명밖에 더 되겠어요? 이걸 이스라엘은 교체하는 거예요. 교체하는 겁니다. 세상이라는 어떤 미련과 기대는 너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삼층천 올라간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그것도 여러번 맞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면 195번 맞았네요. 태장으로 세 번맞고 한번 돌로 맞고, 맞은 기억은 또 해요.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처럼 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 가는 길에 그것도 나쁜일도 아니고 복음 전하는 일에 왜 협조하고 도와주지는 않을 지언정 왜 이렇게 가는 길을 훼방질 합니까?

이게 바로 사도바울 가는 길이 십자가 가는 길이예요. 그 십자가에 동참하기 때문에 이런 욥같은 아픔을 겪게 하는 겁니다. 그럼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 생각하기를 ‘우리도 사도바울처럼 욥처럼 고생해야 합니까’라고 생각하는데 고생시킬만한 위인이 되어야 뭐 고생을 시키지 우리는 그런 고생 시킬 만한 쨉도 안 되거든요.

그냥 주는 밥만 먹으면서도 ‘과분하다. 이게 생명의 은총이구나’라고 해야해요. 생명의 은인이 십자가에 근거해서 드라이브스루(drive-through)해주는 거예요. 십자가에 차를 딱 세우니까 차로 도시라 하나씩 배달해 주는 거예요. 우리 집으로.

매일같이 하는 짓거리는 욥보다 더 맞아야 하는데 우리도 맨날 ‘왜 나를 갈구십니까’라고 해야하는데 ‘마스크 쓰는 거 짜증난다. 밖에도 못나가고’하는 이정도로 그치면서 이찬원이 까부는 거나 보면서 그렇게 사는 거 이게 그만큼 우리가 아직까지 말씀이 주는 괴정과 그 십자가에 고함소리 비명소리 그걸 일부러 찾지는 마세요. 또 자기 고난 자랑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그냥 가만 있으면 주께서 대신해서 그분이 대신하는 고통이 우리를 구원함을 그게 생명의 은인의 본 모습임을 그게 참된 인간임을 나는 아님을 주님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자가 예수의 증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제 넘게 너무 많은 은혜 받았습니다.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더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 질문 던지고 해답마저 우리가 요청하는 어리석음, 그러나 지금도 황무지에 비내리고 바깥에 벚꽃피고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것을 새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