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단선과 복선(욥8;1-7) 20032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30. 07:01
2020-03-29 14:54:39조회 : 27         
   단선과 복선 20032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단선과 복선(욥기 8: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Hp_mILKYu-Y, Hit:0
 이근호20-03-29 15:35 

단선과 복선 

2020년 3월 29일                  본문 말씀: 욥기 8:1-7

(8: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8:2)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8: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8:5)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8:6)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의 이야기가 인간 세상 속에 통하는 상식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라면 당연히 수긍할 수밖에 말을 합니다. 즉 세상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세상 정신 질서를 잡아나가는데 있어 인간들은 지혜를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보내는 방식은 정직한 토론과 의견 제시입니다.

여기서 반대 의견들을 최대한도록 끌어 모아서 빠진 요소가 최대한도로 없기를 바립니다. 즉 정(正)과 반(反)과 합(合)으로 논리가 이어집니다. 욥기 전체 내용도 이런 논리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이 정(正)이라면 욥의 친구들은 반(反)이 되고 합(合)은 또 다른 친구, 즉 엘리후가 등장되어 보여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기 전까지의 인간의 논리라는 것은 어디까지 단선구조입니다. 단 하나의 계통뿐입니다. 마치 엘리베이트처럼 하나의 계통이 마련되면 위와 아래 사이에 서열이 형성됩니다. 줄 세우기가 나타납니다. 보다 잘나고 멋있는 자들은 위 자리에 앉아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봐줍니다.

반면에 망하고, 가난하고, 몸 아프고, 사람들에게 제공될 것이 별로 없으면 아래쪽에다 세웁니다. 이 아래쪽에 있는 자들을 사람들은 짐처럼 간주합니다. 부담으로 작용하지요. 이처럼 인간 세계 자체가 서열화가 되는 식으로 인간들은 보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인정(認定)투쟁의 장’이 됩니다.

즉 한 개인의 삶의 의미는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정을 받아내느냐에 달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사람이 사는 이유는 타인들이 자신을 주시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직장에 취직하면 보는 눈들이 많지요. 동료 뿐만 아니라 상사들이 처음 입사한 자의 말과 행동을 주시하게 됩니다.

인정받으면 그 회사에게 오래 있도록 요청받게 되고, 그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그 직장에서 있으나마나 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머물고 있는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과 평판의 대상으로 자리잡는 것에서 사적인 인생살이의 의미로 굳어집니다.

빌닷이 이 서열화될 수밖에 없는 단선 구조에 준한 인식을 가지고 욥을 대합니다. 전에는 세상 서열에서 높고 존경받는 위치에 있는 친구로 간주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은 낮은 자리로 욥이 전락했다고 간주하고, 왜 그런 추락이 주어졌는지를 나름대로 분석합니다. 4절에 보면, 욥의 자식들이 죽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랍니다.

이렇게 되면, 단선 구조에서 높은 자리에 앉은 자들은 낮은 자리에 앉은 사람보다 더 의롭고 착하고 훌륭하기에 하나님께서 합당한 보상을 받은 결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은 여전히 의롭고 훌륭하고 나무랄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힘든 시련이 찾아오는 걸까요?

그것이 이 세상의 진정한 의미는 단선이 아니라 복선 구조를 따라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단선은 빌닷이 생각하는 그 구조며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아온 구조입니다. 욥도 또한 그러한 구조를 통해서 줄곧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단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탐구해도 이해될 수 없는 일이 욥에게 일어나버린 겁니다.

이는 단선구조에 통하던 서열화가 복선의 다른 계통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7:13-14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 세상에 서로 다른 두 개의 길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두 길은 각기 도착되는 끝점이 다르다는 겁니다. 넓은 길은 멸망이요, 좁은 길은 생명입니다. 하나밖에 없었던 그 길에서 또 다른 길이 나타났다는 말은 이것은 곧 ‘새로움’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기존의 모든 인간들이 아무로 애써도 몰랐던 새로움을 나타내려고 하십니다.

이 새로움은 욥과 욥의 친구들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욥도 자신이 고난받는 이유도 몰랐던 겁니다. 이 새로움은 예상과 예측을 뛰어넘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한숨과 괴로움은 뭔가 계속 예측하고 예상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자신이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계속 예상하고 예측하고 싶어합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결과가 된다면 이는 일이 잘 풀린 것이고, 반대로 남들로부터 비난받는 일이라면 이는 저주받은 인생이 된 것이라고 식으로 자신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는 아무리 촘촘하고 빈틈없는 예상을 할지라도 그것마저 모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데서부터 출발한 겁니다.

누가복음 13:1-5에 보면,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욥의 자녀들은 결코 하나님에게 득죄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노선’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죽었던 겁니다.

더 제대로 말해서 욥의 자녀들은 ‘죄없이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죄관을 알리기 위해 죽은 겁니다. 단선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한 죽음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억울함’이 아니라 ‘새로움’으로 이해하시는 겁니다. 이 새로운 노선은 신약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여기서 ‘피로 사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얼마나 생소한 말입니까!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는 그런 구조가 아닙니다.

제대로 주님은 자기 백성을 ‘죄인’으로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은 제대로 피의 체험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피 앞에서 성도는 자신이 죄인됨을 알고, 그러하기에 성도는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여기서 예상 못할 새로움이 나옵니다. 그 새로움을 요한계시록 15:3에서는 ‘모세의 노래’, 혹은 ‘어린 양의 노래’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새 노래’입니다.(계 14:3) 욥의 경우에, 새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자녀, 곧 세 딸입니다. “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욥 42:14-15)

이처럼 의인이라고 우겼던 성도들이 피 앞에서 죄인으로 나타날 때, 이것보다 더 새로움이 있을까요?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쓸데없이 경쟁하지 않게 하옵소서. 사소한 일에 마음 쓰지 않게 하옵소서. 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3-29 21:58 
24강-욥기 8장 1~7절(단선과 복선) 2020032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8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광풍과 같겠는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빌닷이 하는 이 이야기가 아마 성경 전체에서 제일 유명한 말 중에 하나가 될 겁니다. 액자까지 해서 집에 걸어놓은 사람들 많을 겁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이 다단계 회사에서 선호하는 문구인데요, 빌닷이 이야기하는 그 사고방식을, 그 사고방식 속에 들어가 보게 되면 선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 단선밖에 없어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철로로 치며 철로가 복선이 아니고 한 개밖에 없습니다. 미약한 것이 점차 점차 창대하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그 미약과 창대가 같은 노선에 들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 단선이 아니고 복선을 깔아놨다고 생각한다면 빌닷의 주장은 헛방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인생 같이 산다고 해서 길이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분명히 두 개의 길이 있어요. 하나는 넓은 길이고 또 하나는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빌닷은 너나 나나 똑같이 길을 간다고 생각한 거예요. 길이 한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처음에는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할 때 미약도 소유의 대상이 되고 창대도 소유의 대상이 되는 거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지금 신종 코로나 백신 개발하는 사람들이 아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요. 바이러스가 있을 때 치료 약만 빨리 제조가 되면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구하는 사람은 평생을 두고 아주 뛰어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의대를 가서 의대 중에서도 노벨상을 목표로 해서 치료제를 연구하는 연구 쪽으로 가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것도 수십 명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면서 백신 개발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신 개발하는 방식은 박테리오파지라는 바이러스의 일종인데 바이러스를 가지고 바이러스를 치는 방법으로 치료제를 사용하는데 그 박테리오파지는 전에도 설명했지만, 바이러스는 유전물질 외에는 다른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세포도 없고 외피와 유전물질인 RNA나 DNA밖에 없단 말이죠.

그것 가지고 인간이 박테리오파지 가지고 DNA를 조작해서 바이러스를 잡아먹도록 조작하게 되면 치료가 되는 그런 방식을 씁니다. 그러면 그런 방식을 연구하는 사람과 또 어떤 유튜버는 냉동만두 쉽게 굽기라는 백종원식 방법을 내놓는 사람이 있어요.

이 두 유튜브 가운데 어느 것이 유용할까요?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냉동만두 쉽게 굽기가 중요할까요, 백신 개발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인간들은 가치를 단선으로 봐요. 물론 백종원의 냉동만두 쉽게 굽는 것도 좋아요.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백신 개발이 중요하지요.

바로 그런 가치를 의학자들 같은 연구하는 사람에게 가치를 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뭐냐 하면 엘리베이터가 돼요. 높은데 계신 사람들은 좋은 일을 하고 힘든 일을 하면서도 인류에 보탬이 되고 공헌하는 사람에게는 노벨상을 주자는 것이 위쪽이죠. 위쪽이고.

그냥 냉동만두나 맛있게 먹기, 라면 맛있게 끊이는 레시피 같은 거 있잖아요. 라면은 봉지에 적힌 대로 끓이면 젤로 맛있어요. 배고플 땐 더 맛있고요. 어쨌든 냉동만두, 라면 레시피는 아래쪽이에요. 아래쪽. 이거는 뭐냐. 엘리베이터 구조는 단 하나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단선구조 딱 하나밖에 없어요.

지금 빌닷의 이야기가 오늘 성경에 나온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빌닷은 우리 본심을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이 단선밖에 없는 나에게 내가 어떻게 될까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니까 욥이 다 빼앗기고 다 박살 나고 망했거든요. 망했으니까 너는 내 뒤에 서라는 겁니다. 내 뒤에.

“전에는 네가 나보다 의롭고 잘났고 훌륭한 말 한다고 존경했지만, 이제는 내가 너보다 앞서서 내가 너에게 한 수 훈수할게. 왜? 나는 복을 많이 받았고 너는 있는 복도 날렸으니까 너는 나보다 못한 인간이니까 너는 내 뒤에 줄을 서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줄이 한 줄밖에 없어요. 한 줄.

이걸 줄 세우기라고 하는데 인간들의 모든 사회를 연구했던 유명한 철학자 헤겔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그 사람은 인간 사회를 간단하고 단출하게 정리했습니다. 인간 사회란 무엇이냐. 인정 투쟁이다. 서로가 남에게 인정받는 투쟁의 장. 끝.

남들 보기에 내가 얼마나 잘나 보이느냐의 투쟁과 경쟁의 장으로 끝입니다. 부모가 자식 키울 때도 “너는 사람에게 인정받아야 해”라고 하고 목사가 교인들에게 “여러분 인정받아야 합니다”라는 이야기거든요. 이웃 사랑해서 참 착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을 헤겔이라는 사람은 단출하게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인정 투쟁이다. 인정받으면 되는데 인정받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게 욥이 가졌던 거예요. 욥은 돈 되지요, 자식 열 명 다 되지요, 부인까지 되지요, 사람들에게 칭송받지요, 최고의 이상적인 모델을 욥이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욥이 그런 것을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단선밖에 없는데 욥이 앞서니까, 투쟁이니까, 그 욥이 가진 자리에 내가 차지하고 싶은 그 의욕이 생기고 그 의욕이 바로 삶의 의욕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목표가 있기때문에 사는 거고 그 목표가 있는 한 내가 곱게 죽을 수 없어요.

악착같이 살아서 남에게 인정받는 집안 인정받는 그런 사람 되고자 하는 그런 목표를 빌닷이라는 사람이 고난받는 욥 앞에서 숨길 수 없이 다 내놨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닷이 욥에게 충고한다고 하면서 결국 본의 아니게 자기의 내부, 더러운 내부를 그대로 덫에 걸리듯이 다 노출하고 만 겁니다. 물론 자기는 안 더럽지만, 성경에 비춰보면 더러운 겁니다.

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도 힘들고, 이야기하기도 힘든 이유는, 기도하는 그 순간 자기 내부가 노출되고 남에게 이야기하는 순간 자기의 평소에 인생관, 사고방식, 이런 것이 들키지 않고 싶어도 다 들키기 마련이에요. 오늘 본문의 빌닷이 별로 복음적이 아니면서도 주께서는 욥과 대비시켜서 욥이 갖고 있는 형편과 대비시켜서 복음이 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무엇이 복음이 아닌가를 이렇게 나타나게 해준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사해야 하죠.

그러면 빌닷의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빌닷이 이야기했거든요. 욥에게 네 자식 열 명 다 죽은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빌닷이 이야기했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이유가 “아니야,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아무리 우겨도 우리 자신이 빌닷 같아요. 우리 자신이.

내가 뭐라고 우기는 가가 나 자신의 삶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요, 남들이 나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가 나의 모든 행동을 내 삶의 기준을 이렇게 규정을 하는 그러한 탁한 공기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겁니다. 죽기 전에는. 오죽했으면 보람상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가시는 길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인생이 살아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가시는 길 편안하게 모시겠다고 파란 제복을 입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겠어요.

보람상조가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 가는 길은 좀 편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당신이 갖고 있죠?’라는 뜻으로 지금 쑤시고 들어가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그것은 아무 짝도 소용없고요. 그건 나에게 별로 위로가 안 됩니다. ‘그래, 세상은 나에게 뭐라고 해라. 나는 내 갈 길 간다. 무쏘의 불이다. 나는 나의 갈 길 간다’라는 이거 괜한 큰소리고 허세입니다. 객기고 소용 없어요.

‘나는 남에게 칭찬받는 거 싫고 주님이 나를 칭찬하는 것이 좋고 나는 내가 주님 앞에 백성이라는 그것으로 족하다’라고 마음먹고 싶은데 옆에서 “아이고 인물 좋으네요”라고 칭찬하면 그만 거기에 ‘엄마야~좋은 거’라고 하며 다 빠져버리죠. ‘오늘부터 당신은 내 편이다. 우리 만남 1일이다’라고 갑자기 마음먹었던 복음적 결심이 칭찬 몇 마디에 와르르 다 무너져버립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내 머리에는 복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내 속에는 남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본 내용으로 채워있기 때문에 그래요. 남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지로. 그래서 욥이 말하기를 “내 자식은 죄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야”라고 아무리 우기고 싶어도 빌닷이 팍 아픈 데를 쑤시고 들어옵니다.

“네가 아무리 고집부려도 네 자식은 죄지어서 죽은 거야”라고. 악플이죠. 악한 댓글 달린 겁니다. 안 봐야 해. 나 안 볼 거야. 안 볼 수가 있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는 것이 나의 인생관인데요. 이건 평소에 살아온 모습이 그 모습인데요. 어쩔 수 없어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욥은 해답이 있느냐. 욥은 현재까지는 아직 하나님 만나기 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해답이 없습니다. 물론 다른 계통도 없어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하나밖에 없는 단선, 오르락내리락하는 엘리베이터 같은, 미약과 창대 그리고 창대와 미약, 이것밖에 없는 데서 그 자체 내에서 어떤 해결책이 없다는 점이 상당히 당황스럽죠.

주님께서는 새로운 가치, 그러니까 다른 길을 욥을 통해서 뽑아내십니다. 욥은 아직 그 사실을 몰라요. 자기는 기존 살던 대로 살고 싶어. 마음만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하나님에게 인정받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체적으로는 해결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욥에게 이러한 이유 없는 고통이 주어진 것은 욥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뽑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새로운 가치를 뽑아내 버리면 선이 단선이 아니고 복선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넓은 길 있고 좁은 길 있다 할 때 그 좁은 길이 어디서 발견되느냐 하면 넓은 길 갔던 사람이 주께서 강제로 뽑아 주니까 그 넓은 길과 비교해서 ‘아, 이 길은 기존의 길이 아니구나. 사람들이 찾는 길이 아니구나’라는 이거는 정말 예상도 못 하고 예측도 못 한 길로 주께서 이끄심을 아는 겁니다.

그 예상과 예측 못 한다는 것은 본인도 구원받은 우리도 예측 못 해요. 예상 못 합니다. 사람의 걱정 근심은 예상한다는 데 있어요. 자기가 예측하고 있다는 거예요. 벌벌 떠는 겁니다. 그런데 막상 그 상황이 되게 되면 내가 예상한 대로 안 돼요. 그리고 주께서 예측한 대로 되도록 하는 일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리고 좁은 길은 고생하는 길이 아니고 예측되지 않는 길이 좋은 길이에요. 예상하지도 않는 길이 좁은 길이에요. 잘 먹고 잘살아도 좁은 길 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천하없이 태평스럽게 살아도 그게 환란인 이유가 어디 있느냐면 예측 못 했기 때문에 환란인 거예요. 갑자기 뭐가 잘 못 되어서 수천억이 들어왔다. 그 사람이 성도라면 이것도 좁은 길이고 이것도 환란이에요. 물론 약간 부러워지는 환란이긴 합니다만.

나는 망했다고 예상했는데 안 망했어요. 손가락 아파서 잘렸다고 생각했는데 안 잘렸어요. 그런 것이 예상이고 예측이죠. 이거는 그게 좋다는 것이 아니고 쇼크를 받는 거예요. 이점이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건데 ‘하나님께서 이런 좋은 길을 주셨다’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고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특별히 사용하십니까’라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드는 현상이 일어난다니까요.

이게 요한 계시록 5장 9절에 나옵니다. 새노래를 가졌는데 이 땅에는 길이 하나밖에 없어요. 제가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단선밖에 없습니다. 단선으로써는 천국 못 갑니다. 복선이 되어야 해요. 다른 길이 있어요. 다른 길은 인간이 예상하고 예측하는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 길, 좁은 길, 아무리 해도 그건 내가 지식으로 아는 것이지 실제로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는 진짜 그 길은 어떤 성경 관념과 내용을 아무리 해석하고 기억하고 있다 할지라도 전혀 예상 밖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요한 계시록 5장 9~10절에 보면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여기서 뭐가 쇼킹하게 다가와야 하는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피로 말미암아, 피로 값 주고 사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되게 하셨다”라는 이 대목입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7장 14절에도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라고 나와요. 이 피라는 것이 지식으로 피라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도.

그러나 실제로 피가 피의 효과를 발휘하면서 능력답게 뽑아낸다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는 나에게 쇼크가 돼요. 왜냐 하면 우리 산 사람은 항상 살아있다는 것을 근거로 산 사람만 상대하거든요. 살아있는 주님, 우리는 주님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피로써 등장하고 죽었던 분으로서 우리에게 등장한다는 것은 나를 산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고 이미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면서 주께서 우리를 이끄셨다는 것이 바로 우리 예상을 빗나가게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사도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사도바울에게 곧 죽음이 닥칠 때 ‘한평생 살다가 이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면 이건 쇼크가 안 돼요. 이건 예상돼요. 살다가 죽는 것은 예상이 되는 겁니다. 가시는 길 편히 모시듯이 예상이 되거든요. 그런데 막상 죽었다고 생각할 때 살아온 것은 다 헛방이고 ‘지금 죽어있다. 내고 지금 곧 죽는다’라는 이것만이 유일한 현실태, 유일한 현실상으로 나에게 마주칠 때 비로소 내가 나다운 것을 죽을 때 비로소 체감하고 느끼는 거예요.

그러면 살아생전에는 못 느끼느냐. 느끼죠. 예상밖에 여러분 꿈속에서 죽을 때 많았고 깨보니까 식은땀 막 나잖아요. 그리고 차 타고 가다가 예상밖에 차 안 오는 줄 알고 좌회전하는데 갑자기 차가 확 덤벼들 때 옆에 앉은 사람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죠. 그리고 우리 아이가 분명히 시험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갑자기 예비 5번으로 합격해서 성균관대학에 들어갈 때 갑자기 쇼크죠.

왜냐 하면 항상 예상밖에는 우리에게 쇼크로 오면서 예상밖에 나를 산자로 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살아서 그 결과에 아무런 보탬이 안되는 존재로 처리해 줄 때 주께서 나를 산자로 보지 않고 죽은 자로 처리하면서 그런 마음일 때 ‘피’로 나의 ‘피’로 너를 구원한다는 그 ‘피’가 제대로 체감되는 겁니다.

내가 성실하고 바르게 사는 것이 내 구원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구나. 정말 이 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수천 번 들었는데, 수천 번 듣다가 수만 번 듣다가 어느 한순간에 피가 새삼스럽게 새롭게 들려질 때, 의외로 들릴 때, ‘오, 진짜 피네’라고 들려질 때 사람에게 더이상 무슨 소원이 있습니까? 무슨 소망이 필요해요?

그 피 앞에서 나는 졸지에 순간적으로 예측 못 할 정도로 나는 죄인이 되어버린 겁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죄인 되었어요. 그 기쁨, 그 기쁨이 어떤 노래냐 하면 요한 계시록 14장 3절에 보니까 새 노래라고 되어 있고 요한 계시록 15장 3절에서는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라고 되어 있고 그들이 바로 유리 바다를 건너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봐도 소용이 없는 것이 성경을 볼 때 성령과 함께 성경을 봐야 해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내가 예상 못 한 나로 졸지에 성경 안의 세계에 꽂히기 때문입니다. 욥은 아직까지 단선이에요. 하나님을 만나기 전이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 과거가 있고 기억이 있기 때문에 계속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욥 끝부분에 욥이 진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도 생소하고 자기 자신이 생소해요. 내가 나에게 생소한 존재로 느껴지는 겁니다. 자식들이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데 누가복음 13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죠.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신종코로나 걸려 죽은 100명의 사람이 너보다 죄가 더 있는 줄로 아느냐? 살아남은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착해서 더 훌륭해서 살아남은 줄 아느냐? 그것은 네가 기존의 알던 너를 고집하기 때문에 네가 구닥다리 너를 계속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건 오해라 이 말이죠.

‘주님 앞에 온다. 주님의 말씀 앞에 선다’라는 말은 기존까지 내가 붙들고 있는 내가 아니라 다른 노선, 주의 말씀으로만 인도받고 주의 피로만 구원이 되는 생소한 노선에 우리가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졸지에 죄인인 것을 알게 되고, 죄인이 된다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모든 일에 감사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해요.

남들에게 조건을 묻지 않아요. 남들이 나에게 이런 이야기 할 때 나는 그 조건에 맞추려고 시도할 필요 없어요. 왜? 이러나저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남들이 뭐라 해도 나는 이미 죄인이 되어 버렸어요. 악마가 뭐라고 나에게 협박 공갈을 쳐도 죽는다고 죽인다고 해도 나는 이미 피 앞에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것은 새로운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의성이에요.

그래서 기존의 욥은 욥 본인이 욥을 만들었다면 하나님 만났을 때 욥이 알게 된 것은 ‘내가 예상 못 한 다른 욥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라는 거예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 욥의 제일 마지막에 나옵니다. 욥의 제일 마지막에 42장 14~15절에 보면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며 전국 중에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 아비가 그들에게 그 오라비처럼 산업을 주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욥에게 새로운 딸이 만들어졌다는 말은 욥이 새롭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여러분들 자식들을 새롭게 보세요. 내 자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만든 새로운 자식이에요. 왜?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에게 죄만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예쁜 자식이 참한 아들과 딸이 나왔다는 이것은 감사할 거리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 된다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저 고마워요. 남편도 아내도 마찬가지고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교회란 죄인의 집합이면서도 온전히 하나님께 찬양하는 그러한 집합체가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단선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부지런히 싸대고 착하게 살면 천당 가는 줄 알았습니다. 다른 길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주님이 들이밀고 주님이 들이닥친 그 길이 졸지에 죄인 되는 복을 주시고 죄인의 눈에 피가 얼마나 예상밖에 축복인가를 깨닫는 복을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