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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과의 연관(욥8;8-10) 200405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4. 6. 09:13
2020-04-05 14:58:20조회 : 24         
   만물과의 연관 200405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만물과의 연관(욥 8:8-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axLrSO6fOsE, Hit:0

 이근호 20-04-05 15:47 
만물과의 연관 

2020년 4월 5일              본문 말씀: 욥기 8:8-10

(8:8)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8:10)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사람이 말을 무심코 내뱉을 때에도 순수한 진리만 골라서 말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순수한 진리는 일단 자기 자신이 순수하다는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욥의 친구도 자칭 순수합니다. 그리고 욥도 순수합니다. 두 순수가 만났지만 여기에 의견에 큰 격차를 보인다면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은 말일까요?

우리는 미리 하나님의 판정을 압니다. 욥의 친구는 틀렸지만 욥이 옳다고 말합니다. 상대적으로만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욥 속에 절대적인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욥도 미처 예상 못했습니다. 즉 욥조차도 자기에게 담겨 있는 진리를 알기 위해서 뜯겨지는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이 욥에게 일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욥의 친구들은 오해했던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과거 진리에 의존합니다. 계속해서 누적된 진리체계에 권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게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전통이라는 것이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추방된 채, 단지 살기 위해서 구축되어 온 주장들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과거의 시작점은 미래에 제대로 완성된 채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집착하는 자들에게 있어 과거란 벌거벗은 마네킹은 첩첩히 감싸고 있는 옷같은 기능을 할 뿐입니다. 자신의 수치성을 전력을 다해 감추기에 급급합니다. 과거에 대해서 인간들이 아는 게 아닙니다.

단지 과거 중에서 자신이 지금 온전하다는 것을 증명해줄 것들만 추려서 자신이 일방적으로 가지고 올 뿐입니다. 참된 자신의 순수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노출될 때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서기 전의 인간은 현재 자신을 사수하려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에 대해서 ‘자기를 증명하는 시간’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착오를 통해서 시간을 규명됩니다. 인간의 신체는 늘 세계를 조작합니다. 관찰하는 자와 관찰되는 나가 원래는 ‘같다’고 우기지만 실은 쉴새없이 차이를 보입니다. 차이가 생기면 자아는 얼른 이 차이를 조정하려고 시도하면서 여기에서 시간이 발생됩니다. 즉 현재 ‘나’가 곧 참된 ‘나’라고 여기고 싶은 겁니다.  

예를 들면, 나무와 숲과 비교해봅시다. 숲은 나무를 단순히 한데 모은 것이 아니며 전체성을 갖고서 통일적 인상을 이룹니다. 숲을 생각하는 순간,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개성은 은폐됩니다. 그래서 나무의 집단이 숲이 아닙니다. 한 그루의 나무를 대상으로 선택했을 때, 숲은 그 선택된 한 그루의 나무와 쌍을 이루는 전체가 되며 배후를 만들어 냅니다. 대상과 배후라는 나무와 숲의 대비는 ‘나무 집단’이 곧 ‘숲’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숲으로 바뀌게 합니다. 

어떤 대상을 골라내는 것과 그 이외의 것을 배후로서 숲으로 보는 것은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고른 것 이외의 것을 적극적으로 무색화하고 숲으로 일방적으로 간주하는 순간, 선택된 숲은 대상화됩니다. 나무로서 명확한 윤곽을 가진 것으로 시점이 이동할 때 여기서 ‘과거’가 만들어지고 숲이라는 모호한 것으로 시점이 옮겨질 때 ‘미래’가 만들어집니다. 나의 존재로 인하여 새로운 경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내가 숲을 봄으로써 나무라고 여겼던 그 시점은 과거가 되며, 반대로 나무를 주목하다가 숲을 생각하면서 여기서 미래가 생성됩니다. 이러한 시간의 발생은, 세상 만물을 나를 위한 내 중심으로 보고 싶은 욕구가 자꾸만 밖으로 기어올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책’은 이 모든 인간의 자기 중심적 시간관을 부정해버립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책을 취하시니라”(계 5:6-7) 책, 곧 계시 안에서 시간은 중지됩니다.

그것은 시간이 인간 중심이 아니라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 중심임을 말해주시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과거와 본인의 현재를 연관시켜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도리어 미래와 관련지어야 합니다. 욥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도 일찍이 그랬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56-58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즉 하나님께서는 욥 속에 미래에 오실 메시야를 미리 심어놓으신 겁니다.

이는 욥이 겪는 고통과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통과 관련성을 지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고통이란 곧 악마로부터 공격을 받는 것과 그리고 그 악마의 권력으로부터 어떤 식으로 벗어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내용에 관한 내용으로서 고통입니다. 일종이 욥을 상태로 하나님께서 벌리신 ‘유전자 편집기술’입니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 고통이 찾아듭니다. 그러면 성도 본인이 과거에 상식적으로 알던 것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헤쳐나가보려고 애쓸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로부터 벗어남’에서 늘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벗어난 나’가 순수한 ‘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바는, ‘순수한 나’입니다. 이 ‘순수한 나’는 현재 ‘나’가 예상할 수는 바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내가 생각하는 ‘나의 순수함’에 하늘에 떠있는 달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그냥 나만 행복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진정한 계획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하늘의 달과 별과 연관지어서 자신을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최종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기 위해 달이 있는 것처럼, 욥이나 오늘날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우리가 있습니다.(시 136:9) 이를 위해 주님은 우리가 감추고 있는 그 죄성을 들추어내시면서 일을 성사시키십니다. 곧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하면서, 참된 십자가가 베푼 현실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욥을 다루듯이 오늘날도 우리를 친히 다루어주심에 감사하게 하시고,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고통이 어떤 식으로 악마를 이기게 되었는지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4-05 21:02 
25강-욥기 8장 8~10절(만물과의 연관) 2020040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8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는 말을 발하지 아니하겠느냐”

참 ‘아멘’하기가 곤란해요. 왜냐 하면 이것은 욥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욥의 친구가 이야기 한 거예요. 욥의 마지막 대목에서 욥의 친구가 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잘못된 생각을 지금 우리가 미리 당겨서 듣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친구들의 말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이렇게 결론 짓기 이전에 우리가 그 결론을 모른다고 치고 욥 친구들의 말을 귀담아들어보세요. 하나도 버릴 게 없고 전부다 ‘아멘’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쫘악 나열해 놓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분간도 못 하면서 세상 휘둘리는 대로 휘둘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욥 친구들의 주장을 우리가 거기서 고개 끄덕이면서 받아들일 때 그 앞에서 욥이 이유도 없이 고난받고 있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욥의 친구에게 없는 게 욥에게 있다는 거죠. 그리고 욥에게 있는 것이 욥의 친구에게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고개 끄덕일 정도로 보편적이라고 욥의 친구들이 대신해서 우리에게 알려줄 때 우리는 거기서 뭐가 빠졌는가를 찾아봐야 하죠.

욥의 친구들 말에는 뭐가 빠졌느냐 하면 십자가 고난이 빠져있습니다. 자기 부정과 자기 부인이 빠져있는 거예요. 나 같은 것은 못 돼도 괜찮다가 빠져있는 겁니다. 나 같은 것은 망해도 상관없다가 빠져있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받지 못한 욥의 친구 속에는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부처고 간에 무조건 나는 잘되어야 하고 나는 내 욕망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고집 같은 것이 그들 속에 담겨서 그게 입을 통해서 뿜어져 나온다는 거죠.

이런 이야기를 나는 내 주장, 나는 내 욕심만 채우겠다는 말을 누가 노골적으로 하겠습니까? 그걸 노골적으로 못하니까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옛사람에게 물어보자는 식으로 그 책임을 옛사람에게 핑계를 대는 겁니다. 오늘 8절에 보면 “청컨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라고 나와 있어요.

그 옛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바로 여기 7절에 나오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고. 사람이 바르게 살게 되면 어떠한 어려움이나 갑자기 팔을 다치는 그런 일도 없을 것이다. 너에게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네가 분명히 건장한 나의 신체보다 못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너는 그 일을 당했다는 이것이 옛사람의 지혜라는 거죠.

쉽게 말해서 “욥아, 너는 너의 선배들 더 똑똑하냐? 더 많이 아냐? 네가 아이큐가 더 좋고 네가 인생 경험을 해 봤어?”라는 식이에요. “했냐고? 했냐고?”라는 식으로 다그치는 거예요. 거기에 욥의 답변은 이겁니다. “네가 아는 옛사람의 수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말하기를 “나도 답답하다”라고 합니다. “네가 아는 수준보다 나도 더 많이 아는데 내가 너라면 나도 너 같은 이야기를 그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

 “안 아프고 안 다치고 네가 걸쩍한 입장에서 하는 소리. 자기 부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 과연 나의 부인과 나의 부정이 포함되지 않은 게 그게 진리였을 까. 옛사람이 뭐라고 하든 지금의 내가 뭐라고 하든 그리고 지금의 나도 그 정도 수준은 되는데 나는 예상밖에 나는 지금 다치고 아프고 어렵고 힘들고 그렇다. 그렇다면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옛사람이 모르는 바가 지금 나에게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고 네가 그렇게 봐주면 안 되겠니?”라고 욥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 욥에게 일어나는 고난 문제는 옛사람과 연결 지으면 안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면 미래에 일어날 일과 연결지어서 해석되어야 하는 겁니다. 현재도 아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을 연결 지어야 해요. 그러면 여기서 현재는 뭐고 과거는 뭐고 미래는 뭐냐?

‘시간의 정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요약한 것을 제가 십자가 마을에다 올려놓았습니다. 시간의 정체라는 책에 보게 되면 인지과학, 인지 철학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무를 볼 때, 현재 있는 내가 나무를 보게 되면 그것은 과거가 되고 내가 그 시선을 키워서 숲을 보게 되면 그건 미래가 된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죠. 이 말은 사람은 뭔가 현재라고 생각하고 우기지만 안에 내용을 뜯어보면 전부 다 과거 이야기예요. 그러니까 옛사람을 거론하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 안에 옛사람이 들어있어요. 자기 안에 노인네가 들어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옛사람의 일을 한 것에 대해서 동의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옛사람 하는 일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고 옛사람이 이야기한 것 중에서 내가 동의하고 싶은 것을 내가 마치 옛사람이 이야기했다고 우회해서 일방적으로 자기가 취득하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현실구성에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채택해가지고 마네킹 같은 자기를 장식하는 거예요. 자꾸 데코레이션하는 거예요.

어릴 때 어머니께서 양품점을 해가지고 우리 집에도 마네킹들이 있었어요. 그 마네킹들이 있는데 아침 되면 어머니께서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떼온 옷들을 여자 마네킹들에게 새로 바꿔 입혀서 파는 거예요. 그래서 옷이 늘 다른 겁니다. 달라요. 대구 비산동 방직공장 많을 때 여공들이 와서 외상으로 많이들 사 갔지요. 참 그때 좋았는데.

그렇게 해서 마네킹 옷을 입힐 때 과연 그 옷이 마네킹 본인 옷이 아니고 계속해서 그 옷은 벗겨지고 까발려지는 거죠.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벌거벗은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의 욕망은 있으면서 그것이 남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본심을 가리는 식으로 계속해서 세상 것에 옛사람의 상식, 유명한 사람, 천재들이 이야기한 거, 어느 논문에 보면 있는 거, 그런 것들로 계속해서 자기를 꾸미지만 그 꾸민다는 것은 자기 부인, 자기 부정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 와서 사람 버린다는 말이 그런 말이에요. 교회 와서 자기 본 모습이 나와야 하는데 자기 잘남이 점점 두께가 두꺼워요. 완전히 제주도 흑돼지 같아요. 기름이 자꾸 삼겹살, 오겹살 계속해서 찌는 겁니다. 위선의 수법을 교회 와서 배우는 겁니다. 말씀으로 배우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특정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디모데전서 1장 4절에 보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다 그랬어요. 1장 3절부터 보면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끝없는 족보 이야기, 신화 이야기, 전통적인 이야기, 옛사람에게 묻는 그런 것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사람이 있더란 말이죠. 말로는 “우리가 뭐 아느냐. 역시 선조들이 지혜가 많다”라는 식으로 핑계를 대면서 자기 자신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고 덮기에 급급하는 겁니다. 덮기에 급급.

그러나 요한계시록에 보게 되면, 요한계시록이 참 어려운데, 거기 보게 되면 거기 나오는 사도 요한은 자기 자신이 훌륭하다, 대단하다, 나는 이렇게 바르게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도 요한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이미 종결된 책의 내용에 대한 문제예요. 책의 내용.

요한계시록 5장 1절에 보면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라고 나와요. 책이라는 것은 모든 시간은 그 책 안에서는 정지가 되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없어요. 정답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책 안에 정답이 있다는 말은 더 이상 이 세상에 더 기다리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책의 내용대로 진척이 되는 겁니다.

그 책의 내용이 미래에 주어질 그 일, 계시인데 계시를 빗방울로 봅시다. 미래에 주어질 빗방울이나 과거에 주어진 빗방울이나 지금 나에게 주어진 빗방울이 한결같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어린양이죠. 피 흘리신 어린양. 그 피로 희게 된 사람만 천국 간다는 그 내용이 과거나 지금이나 현재나 동일하게 주어진 겁니다.

그러면 그 내용에 대해서 과거는 뭐냐 곡해한 거죠. 욥의 친구들은 곡해한 겁니다.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오해한 거예요. ‘나 잘났다. 내가 어느 정도 잘났다’라는 이용물로 생각한 거예요. 마네킹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데 옷을 벗지 않고 계속 자기 옷을 껴입기에 급급한 거예요. 자기 수치를 노출하지 않고 덮기에 급급한 겁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김종한도 말했겠습니까? 사랑 앞에서 옷을 벗었다고. ‘사랑을 위하여 나는 그대 앞에서 옷을 벗는다’라는 이 말이 뭐냐 하면 나는 아무것도 내가 나를 가리는 그런 구차한 작업은 당신 앞에서는 나는 중지했다는 겁니다. 나는 그 짓을 하지 않겠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주님이 누구신지가 내게 중요하다.

바로 그것이 그 당시 욥에게는 그것이 일어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욥의 친구가 그만큼 위선이 두껍다는 말은 욥도 똑같은 거예요. 다만 욥에게는 특혜인지 복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특혜를 주셔서 그 감추고 있었던 옷들을 다 뜯어내는 그게 얼마나 아프겠냐는 말이죠.

그동안 그게 자랑거리였잖아요. 그게 자랑거리였다고요. 제가 어느 댓글에 달았습니다만 밥으로 유지되는 목숨은 생명이 아닙니다. 그건 버릴 패죠. 밥으로 유지되는 목숨은 버릴 카드라고요. 그런데 생명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 목숨이 다이기 때문에 버릴 카드에 자기 자존심을 실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자기 이름으로 사인까지 해요.

사나 죽으나 그 목숨을 붙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거는 생명이 아니에요. 그러면 지옥에 가는 것은 죽어서 지옥이 아니라 살아있을 때부터 이미 지옥 생활이 시작된 겁니다. 브레이크도 없어요. 그냥 미끄러져 가요. 지옥으로. 믿는 가정에서 한 사람은 믿고 한 사람은 안 믿을 때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뭐냐 하면 내 목숨 부지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회 가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뭘 도와줬나? 뭘 도와주는데 자꾸 교회 가느냐? 이 코로나 난리 속에 교회 가는 가서 너 코로나 걸리고 우리 가족에게 다 옮기는 것이 속이 시원하냐? 그렇게 해서 속이 시원하냐?”라는 식으로 자꾸 닦달 내는데 정말 복음을 아는 사람은 그동안 내가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 이유는 버릴 카드를 못 버리고 있으니까 버리라고 하는 그것을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이 인생 사느라고 내가 공들인 이것을 내가 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하는 것이 불신자고 ‘이까짓 것 버려도 이거 버릴 때 비로소 예수님의 생명을 주신 살과 피를 주신 생명 있잖아’라고 드러내는 거, 이게 바로 성도죠. 그래서 욥과 욥의 친구들에게 있어서 옛사람이라 하는 것은 바로 과거를 의지하는 척하지만 자기의 치부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핑계로써 어떤 유력한 자의 말이라고 설정한 겁니다.

그러면 이 욥의 친구와 욥 사이에 차이점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뭐냐 하면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경리 직원을 뽑는데 광고를 냈지요. 그렇게 한 사람이 회사 경리한다고 뽑혔는데 회사가 좀 수상한 기운이 있는데 ‘나야 뭐 경리하면서 월급 받으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 그 회사에 성큼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경리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회사 비리를 세무서에 안 들키기 위해서 교묘하게 조작하라는 지령을 받는 일에 자기가 공범으로 뛰어든 셈이 된 겁니다. 막상 경리 일을 해 보니까 그런 거예요. 월급은 따박따박 나오는데 하는 일은 비리를 교묘하게 안 들키게 하라는, 이중장부를 하든지 수단껏 해서 회사 비리가 안 들키고 세금 적게 나가게 하는 방법으로 장부를 조작하는 것이 받은 지시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 경리 사원은 이번 달만 하고 그만두겠다고 백날 해도 회사에서는 새로 경리 사원 광고 냈으니 이번 달 만 하라고 했는데 막상 새로운 경리 사원이 왔는데 그 사람이 인수인계하면서 가만히 들어보니 이게 그냥 경리보고 월급 받는 식이 아니고 장부를 조작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알고 인수인계하다가 이틀 만에 튀어나가 버렸어요.

그러니까 본인은 발을 못 빼는 거예요. 책임감 때문에. 그럴 때 그 사람이 이렇게 곤궁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하나님이여, 왜 저로 하여금 이런 질곡에 빠뜨렸습니까? 제가 성질이 너무 더러워서 인간성 고치려고 이렇게 했습니까?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라고 할 거예요. 성도라면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게 바로 욥이 빠져있는 곤궁이에요. 남 탓할 것이 아니라 본인이 해결점이 없다는 점에서 오는 난감함. 본인에게 어떤 해답이 없다는 거. 본인이 원한 것이 아니고 하다 보니까 취직해서 경리일 보고 월급만 받으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그 회사를 갔는데 주어진 것은 덥썩 뭔가 어떤 굴레에 빠져버린 겁니다.

지금 아무 소리 안 하는 거 보니까 세상 다 그리 살고 있는가 봅니다. 공짜로 돈 못 버는 모양이죠. 뭐 졸업증명서를 위조하든지 모든 장소에서 비리와 불의가 얽히고설킨 것에 공조했다는 것에 대해 월급 받는 거, 같이 공범자가 된다는 조건하에 따박따박 월급이 나온다는 이 현실 속에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으시면 제가 드리는 답변은 아주 간단합니다.

“달이 왜 있는지에 대해 연관 지어서 네 인생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라는 이게 욥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에요. “너는 과거만 생각하는 거야”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겁니다. 그래서 내 문제 해결은 내가 과거에 익히 아는 옛사람이 익히 아는 선에서 해결하려고 보니까 발을 뺄 수가 없죠. 왜? 자기는 고난받을 필요가 없고 인간 작자들과 함께 범죄인 될 필요 없을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죠.

자기라는 마네킹의 본색을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너무 괜찮게 살아왔다는, 과거에 괜찮게 살아왔다는 그것이 오겹살처럼 덮여 있는 겁니다.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어릴 때부터 소녀로서 착하다고 소문났고 성품도 너무 착해요. 강원도 아가씨인데 성품도 너무 착한데 자기 소망이 뭐냐 하면 소녀 때만 착하지 않고 나중에 아가씨 되고 아줌마 되어도 나는 남에게 배려할 줄 알고 남을 도와줄 줄 아는 그런 착한 품성을 계속 유지해서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도움 되는 그런 여자로서 일생을 살고 싶다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강원도 아가씨가 서울에 와서 직업을 구하는데 직업이 녹음실에서 녹음하는 일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 아가씨가 컴퓨터학과 졸업해서 서울에서 녹음실에 취직한 건데 월급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래도 착하게 사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로 소박하게 사는 데는 지장 없을 정도로 착하게 살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강원도에 산불이 나서 강원도에 있는 자기 아버지 엄마 다 죽었어요.

그 아가씨가 나름대로 어떤 의미를 찾는데 그게 뭐냐 하면 ‘대자연의 실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대자연의 실수. 실수라는 말은 안 죽어야 할 분이 죽었다는 거죠. 왜? 나는 착하니까. 남에게 해코지한 적 없어요.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엄마가 오면 엄마 앉는 의자까지 마련할 정도로 그렇게 착해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대자연의 실수로 죽었다는 거예요. 착하고 싶은 것이 소망이에요. 나쁜 여자 되기 싫어요. 착한 여자 되고 싶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가만두지 않습니다. 드라마 이야기가 그렇게 되어 있지만, 사실은 1957년 노벨 문학상 받은 작품이 있어요. 까뮈가 지은 이방인. 그 이방인이라는 이야기를 보게 되면 어떤 사나이가 해변가를 걷다가 아라비아 사람을 만났는데 햇빛이 너무 따가워요. 그늘도 없고. 그때 권총이 있었는데 햇빛이 너무 따가워서 권총을 들고 그 아라비아 사람을 죽였어요.

주인공이 뫼르소라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체포되어서 교도소에 들어갔는데 왜 자기가 교도소에 들어가야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형날짜가 가까이 오고 있는데 밤중에 창틈으로 별이 하나 떴습니다. ‘아, 인생이라는 것은 이유를 찾는 것이 잘못이구나’ 그걸 까뮈는 부조리, 무의미라고 보는 거예요. 이 땅에서 의미를 찾는 내가 잘못이다. 이 땅에는 모든 것이 의미 없음. 이게 바로 문학과 철학의 결론입니다. 의미 없음. 허무함.

그런데 시편 136편 9절에 보면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나와 있어요. 별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되어 있어요. 그 경리 아가씨가 자기는 어떤 덫에 빠졌고 빼도박도 못한다고 하지만 분명히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세상 모든 만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함께 지어졌다고 나와 있어요. 함께. 연관 지어서.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 오래 다녀도 달과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 그 연관도 모르고 인생 다 살고 목숨 끝나버리면 그것처럼 인생 허무한 것이 없어요.

별과 내가 무슨 연관이 있으며 강원도 산불과 나는 무슨 연관이 있으며 손흥민이 축구 하는 것과 나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든 게 다 연관이 있는 거예요. 연관이. 그걸 욥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해답으로 제시하는 거예요. “욥아, 네가 아프다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데 네가 별 만들 때 있었느냐?”라고 엉뚱한 질문을 한다고 지난번에 이야기했죠.

고작 해답이라고 제시한다는 것이 “너 아프냐? 많이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이런 식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별 만들 때 네가 있었나? 달 만들 때 있었어? 네가 해의 길 황도를 아느냐? 그것과 너의 고통이 연관됨을 아느냐?”라고 질문할 때 욥은 아무 소리도 못 합니다. 왜? 과거에서 해답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겁니다. 과거에서.

욥은 미래에 오실 분을 위해서 미리 당겨서 욥이 존재하는 겁니다. 과거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을 째보면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살아왔던 체험과 경험들이 완전히 굳은 살처럼 꽉 박혀있어요. 과거에 이런 기대와 소망이 있었는데 이런 소박한 것을 들어 주시옵소서. 그런데 아까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눈이 있다는 건 하나님은 다 지켜보신다는 말입니다. 그냥 지켜보시는 게 아니에요. ‘필이 그 일이 일어나야만 했다. 그 일이 일어나야 마땅하다. 당연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아는 겁니다. 언제? 자기 자신의 마네킹이 입은 옷이 아주 아프게 벗겨질 때,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진짜 나를 숨겨 놓고 가짜 나를 위장 위장하는 식으로 매일 매일 살 때, 주께서는 나를 진짜 나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뜯어내시는 거예요.

우리의 과거라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면서 일방적인 편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여기서 편집이라는 말을 제가 했는데 편집이라는 말이 현대과학에서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죠. 그게 뭐냐 하면 ‘크리스퍼(유전자 가위)’라고 하는 유전자 편집기술이 발달 되었어요.

유전자 편집기술은 어떤 바이러스를 조사해보니까 자기가 DNA를 가위로 끊듯이 끊어버리고 면역체계를 갖춘 그런 유전인자로 바꾸는 것을 발견하고 난 뒤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서 DNA 사이를 가위로 잘라버리고 면역성 키우는 유전자를 집어넣어서 그걸 새로운 태아나 어린아이에게 심어버리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신종코로나 같은 바이러스에 면역성을 갖은 인간, 온갖 잡종 질병과 암에서 벗어나는 강력한 면역체계를 가진 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쪽으로 눈을 떠서 지금 경쟁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게 잘라버리는 거죠.

그러면 욥에게 뭐냐. 욥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욥에게 빈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빈자리를 만들고 예수님에게 있는 십자가를 편집기술로 욥에게 미리 앞당겨서 그걸 집어넣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 56절에 거기에 대한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계시 책에서는 과거의 시간이 완전히 스톱(정지)되어 있지요. 다만 하나님의 보는 눈이 있어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아브라함은 아브라함다워야 하고, 욥은 마땅히 욥다워야 하는데 그 안에 있는 DNA, 그 안에 있는 모든 변화된 것은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미리 당겨서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죠. 우리 안에도 주님의 십자가가 들어오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악마를 이겼고 악마는 예수님을 어떻게 공격했느냐는 그 DNA 요소를 우리 안에 빈자리를 만들고 그 안에 집어넣어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경리 사원으로서 내가 얼마나 힘드냐가 아니라,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고난과 이러한 역경조차도 이게 감사할 일이라는 거. 마치 뭐처럼? 달처럼, 마치 별처럼.

하나의 별처럼, 달처럼, 달의 운명이나 별의 운명이나 오늘날 우리의 운명이나 그리스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겁니다. 노벨 문학상 받은 까뮈처럼 ‘모르겠다. 무의미하다. 의미 찾는 것도 잘못이다’라는 식으로 해답을 내릴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집어넣고, 움직이는 십자가, 움직이는 계시, 움직이는 말씀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그럴 때 저 달이 있음에, 저 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달과 동일하고 별과 동일한 우리 자신을 통해서 주께서 일하심을 통해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욥은 아직까지 주님이 안 찾아갔기 때문에 아직도 고래고래 고함지릅니다. 그러나 욥의 끝에 보면 하나님이 친히 방문하시면 욥이 재를 뒤집어쓰면서 “나는 그동안 나 자신을 몰랐습니다. 내가 과거에서 아는 그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만나니까 과거, 현재, 미래를 주께서 알아서 사용하신다는 그 점이 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하죠.

하나님이 욥에게 “네가 제물을 드려서 철딱서니 없는 친구들을 대신해서 제사 드려라. 너의 할 일은 모르는 사람에게 대신해서 희생하는 희생의 기능을 너는 했느니라”라는 것이 욥의 중간 과정과 결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감추고 있는 것이 뭔지를 저희에게 알려주시옵소서. 짜증 내고 불만하고 항의하고 대들고 아직도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만 쳐다보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난 줄 압니다. 달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는 것처럼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