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강-욥기 7장 11~15절(안 죽는 이유) 20200315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7장 11~15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내가 바다니이까 용이니이까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 때에, 주께서 꿈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뼈보다도 죽는 것이 나으니이다”
욥 앞에 욥의 친구들이 있지요. 욥이 서로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 대 사람으로 서로 소통하는 거, 그것으로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사람인지 찾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욥은 본인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너와 이야기하고 말할 입장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려고 작심을 했는데 너희들은 그 이유를 아느냐고 물어보니까 그들은 욥이 죽어야 될 이유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자꾸 욥은 죽이는 쪽으로 몰아넣고 욥의 친구는 멀쩡하게 하는가. 그것은 둘 다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자기 전제라는 거, 인간이 아무리 누구와 이야기해도 결국 어디로 환원되느냐 하면 자기 전제, 자기 선입관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처음부터 맹탕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뭔가 장착되어있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장착되어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욥의 친구들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욥에게는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욥을 자꾸 파내는 겁니다. 끊임없이 빼내는 거죠. 그러면 이것은 하나의 수수께끼가 되는 겁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들어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계획을 모르고 있고 하나님은 알고 있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계획을 알기 위해서는 쑤시고 후비고 파낼 수밖에 없죠.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그 파내는 과정에서 무엇이 와서 맞닿느냐 하면 평소에 내가 옳다고 여긴 전제들, 선입관들과 주님이 파내는 원리 원칙과 계속해서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추운 겨울에 자전거 한번 타보세요. 자전거 타면 아무도 없는 허공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얼굴을 때리는 것이 있을 거예요. 아주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점점 더 얼굴에 와닿는 게 있을 겁니다. 그게 찬바람이고 눈바람 같은 것이 오게 되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이렇게 빠른 속도로 가게 되면 없다고 여기는 곳에 뭔가 있어요.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이 내가 스스로 그 인생을 차근차근 만들어 나간다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 하는 일을 훼방하고 방해하고 거치는 것들이 우리 온몸에 와닿는 겁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욥기에서는 이방인이니까 자꾸 문제를 제시하고요, 해답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해답을 미리 컨닝해서 봅시다. 이 허공에 뭐가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신명기 8장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 나름대로 허공을 달릴 때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게 있습니다. 욥의 경우는 반대죠. 이스라엘에게는 해답을 먼저 주고 왜 이것이 해답이 되어야 하는지를 질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서 이스라엘이 자체에서 해답을 가진 채 질문을 뒤늦게 끄집어내는 방식이라면 욥의 방식은 그냥 답은 없고 계속 질문하게 하는 거예요. 계속해서 욥에게 질문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양쪽 다 필요하죠.
신명기 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광야에서 하신 말씀인데 2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우리에게는 그냥 보통 광야잖아요. 비어있는 곳이죠. 보통사람 같으면. 그런데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어요.
무엇으로 그렇게 하느냐. 여기 3절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그다음에 나오는 게 있어요.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만나는 과자 같은 거예요. 과자. 만나가 뭔지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도 몰라서 이름을 짓기를 ‘뭐꼬? 뭐지?’라고 해서 이름이 만나가 된 거예요. ‘이게 뭐지?’가 이름이에요.
아침에 가서 ‘뭐꼬’ 먹자고 하는 거예요. ‘뭐지?’라는 이거는 인간이 예상 못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답이에요. 항상 답은 ‘뭐꼬’가 되고 ‘뭐지’가 되어요. ‘하나님 내 인생은 이렇게 사는데 이게 뭐지요?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꼬이고 이런 식으로 몰고 가십니까. 이게 뭡니까’라고 그 모르는 것이 바로 답이에요.
이 말은 우리가 몰라도 되는 것이 우리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계속 몰라야 될 것이 나를 이끌고 있어요. 사람이 알게 되면 미리 예측을 해서 예측을 하게 되면 이건 좁은 길로 갈 수 없고 넓은 길로 갈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꾸 예측하게 되면 꼼수를 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통해서 자기를 왜 이렇게 한편으로는 죽이려고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만나 주면서 살리기 위해서 매일같이 도시락 주는 이유를 모르고 그렇게 양쪽으로 하나님 하시는 일이 앞뒤가 없는 것처럼 죽이려면 죽이든지 살리려면 힘들게 하지 않게 하든지. 힘들게 해놓고 자꾸 살려내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그건 우리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런 생활은 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천국은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 생활을 미리 앞당겨 해야합니다. 천국 생활을 앞당겨 하려면 만나만 주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앞당겨 하려면 만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이 천국에 합당치 않은 요소들이 전제로 선입관으로 꽉 차 있는 거예요. 그것은 다시 욥기로 돌아와 보면 이렇습니다.
욥기에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욥은 좀 시건방지다고 할까요, 이런 게 있어요. 12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하나님 제가 죽겠다는데 왜 못 죽게 나에게 파수꾼을 세웠습니까? 내가 용입니까? 내가 바다입니까? 내가 죽겠다잖아요. 힘들어서 못 살겠고 내가 죽겠다는데 왜 죽지도 못하게 하십니까?”라고 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아프면 죽게 되어 있는데 아픈데도 안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뽑아내겠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 고통을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자 하는 겁니다. 여기 12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지키시나이까”라고 나오죠. 하나님의 파수꾼이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13절에 보면 내가 나를 위로한다고 하는데 위로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편할까를 자기가 예상하는 겁니다.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라고 나오는데 좀 누워있으면 낫지 않겠느냐 생각했는데 이거는 주님께서 꿈까지 침투하셔서 나를 놀라게 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 마음에 숨이 막히기를 원하오니” 그러니까 그냥 죽기를 원한다는 말이고 “뼈보다도” 뼈라는 것은 아프다는 말입니다. 뼈라는 실체가 있으니까 거기서 고통이 발생 된다고 욥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욥의 지금 소원이 뭐냐 하면 밧줄로 묶되 나를 유령으로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죽은 자가 되어 버리면 유령을 밧줄로 묶어도 이미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아프지는 않을 거란 말이죠. 죽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고 아픈 것이 죽는 것보다 더 무섭다고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죽는 것을 자기가 마다하지는 않겠는데 왜 이렇게 아프게 하시냐는 겁니다. 차라리 그럴 것 같으면 자기를 죽여 달라고 욥이 그렇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절에 보면 욥이 “내가 생명을 싫어하고 항상 살기를 원치 아니하오니 나를 놓으소서 내 날은 헛것이니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이 뭐를 모르느냐 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다 엉터리라는 사실을 지금 욥은 고통이 심하니까 자기 소리가 나와버렸어요. 내가 살아온 것이 다 잘못 살아왔다는 말을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말이 나오지를 않는 거예요. 이게 욥의 문제 거리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은 우리로하여금 십자가 지는 것이 고통스럽다가 아닙니다. 사람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자기는 잘났다는 것이 인간입니다. “나는 잘못 살았어요. 나는 엉터리입니다”라는 말을 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이에요. 왜냐 하면 인간은 마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마귀가 회개하는 거 봤습니까? 마귀는 회개가 없어요. 한번 해보겠다는 거죠.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7년 동안 환란을 받으면 환란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무조건 예수님 받아드릴 것이다. 누가? 유대인들이. 그렇게 요한계시록 해석하는데 사람은 고문하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회개하는 게 아닙니다. 오기만 더 생길 뿐이에요. 인간 안에 어떤 저항 요소가 있어요. 반발하는 요소가 있어요.
죽더라도 못 버릴 그런 고집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 고집을 누가 이길까요. 못 이깁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이 말은 그만큼 마음은 인간의 힘으로 다스려지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하는데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걸 감추기 위해서 형식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들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도와줬다. 불쌍하다. 그 사람을 도와줬지만, 그 사람은 도움을 받고 난 뒤에는 그다음부터는 그 이상으로 안 도와주게 되면 미워하는 줄로 오해한다니까요. “전에 한 번 도와줬잖아요. 왜 지금은 안 도와줍니까?”라고 무슨 도움 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런 욥의 진행 과정에서 욥이 뭔가 잘못 살았고 살아온 것이 엉터리라면 그리고 우리가 욥의 입장이라면 이걸 다시 바르게 옮겨 놔야겠지요.
그 방식이 아까 신명기 8장을 통해서 다시 보게 되면 ‘만나’라는 것이 과자입니다. 과자. 그 과자가 어떻게 신명기 8장에서 뭘로 바뀌느냐 하면 말씀으로 바뀝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과자를 줘놓고 이 과자가 말씀이라는 거예요. 이걸 도대체 우리 전제 선입관에서 해석 전제에서 뭘로 바뀌어야 과자가 말씀 자체가 되는 걸로 바뀔 수가 있을까요.
이게 우리가 오늘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만나라는 그 부스러기가 주님께서 보이시면서 “네 눈에는 뭘로 보이냐?” “과자로 보입니다” “과자 아니거든. 말씀이야” “주님, 논리가 너무 비약적입니다. 과자는 과자이지 어떻게 과자가 말씀이 됩니까?” 너무 비약적이거든요.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이게 얼마나 비약적입니까? 말, 이 말이 어떻게 사람이 됩니까? 이렇게 과자가 말씀이 되고 또 말씀이 육신이 되고 이런 비약적이고 도약하는 거, 뭔가 논리로 채울 수 없는 거, 붕 뜨는 거, 이것은 바로 욥기를 통해서 우리가 욥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채워 넣어야 하겠지요. 저는 이것을 수수께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구약에서 수수께끼로 유명한 구절이 바로 사사기에 삼손에 보면 나오죠. 전에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삼손이 수수께끼를 내었고 블레셋 사람은 수수께끼를 못 풀었다. 그런데 풀게 된 것은 수수께끼를 낸 자인 삼손이 자기가 알아서 자기 아쉬운 것이 있어서 여자를 얻기 위해서 그 답을 여자와 바꿔치기해서 내놓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수수께끼이냐. 모든 인간이 감추고 있는 이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인간 속에 하나님의 수수께끼가 각 사람마다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예요. 욥은 그걸 몰라요. 그래서 자꾸 죽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해요. “캭 죽겠습니다”라고 자꾸 죽는 것으로 생각하려고 하는데 주께서는 비밀이 끄집어내 지고 난 뒤에 죽으라는 겁니다. 지금은 죽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네가 고통 가운데 내뱉는 그것이 바로 수수께끼에 접근하는 한 걸음 두 걸음이니까 너는 아파야 해. 그리고 죽으면 안 돼”라고 하십니다. ‘죽으면 안 돼’가 지금 욥에게는 기분 좋은 말이 아닙니다. 지금 고통스러운 상태이고 그 말도 고통스러워요. 그럼 제가 수수께끼를 낼테니까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우리 안에 어떤 수수께끼가 있는지.
어떤 여자가 남자를 사귀게 되었는데 그 남자는 막 교도소를 나온 남자예요. 그런데 남자가 교도소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드 가지고 잘 써요. 쇼핑하는데 다 씁니다. 도대체 어디서 돈을 벌어서 그 카드를 막 쓰는지 남자가 말을 안 해주니까 여자는 모르죠. 여자는 명품가방 하니까 기분은 좋은데 카드가 어디서 나온 카드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내가 살아 있으니까 수수께끼를 생각 안 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마땅히 살아가야 할 것처럼 하나님 앞에 얻어먹어도 되는 존재인 줄 알고 있는 거예요. 마치 그 여자처럼. 그런데 그 받아야 될 은혜가 어디서 나오는 줄을 몰라요. 욥의 고통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오는 고통과 매치가 되려면 우리 안에 있는 나는 마땅히 은혜받아야 한다는 이 토대 자체가 전제 자체가 붕괴되어야 하는 겁니다.
망가져야 해요. 욥이 욥의 친구 앞에서 그걸 대신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내가 아파서 아파하는 거나 너희들이나 똑같아. 하지만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주께서 자꾸 손가락 집어넣어서 쑤셔내는 거예요. 그 수수께끼가 나올 때까지. 아까 질문 다시 합니다. 어떤 여자가 교도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데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카드 막 썼다면 그 카드가 어디서 나온 카드냐는 겁니다.
여기서 힌트는 교도소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겁니다. 그 남자의 주특기를 생각해 보세요. 그 남자가 여자 아버지 카드를 훔친 겁니다. 하루는 그 남자가 여자 집을 놀러 갔는데 마침 아버지가 없었어요. 그 남자의 전문 직업이 뭐냐 하면 훔치는 거예요. 딱 들어가면 뭐부터 훔쳐야 하는지를 생각하는데 거기에 카드가 있었고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비밀번호입니다. 이게 삼손과 관계가 되어 있어요,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여자 아버지 카드를 사용해서 여자에게 사주니까 여자는 이상하게 기분은 좋은데 찝찝한 건 있고 나중에 그 남자는 구속 되었죠.
이게 남의 이야기입니까? 뭔가 하나님께 혜택을 받는데 찝찝해요. 도대체 이게 무엇에 근거해서 이런 혜택을 입고 있는지요. 삼손의 경우는 아까 말씀드렸던 것처럼 자기가 수수께끼를 그 비밀을 자기가 이야기해버렸다고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 자기 맘에 드는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비밀을 그냥 자기 사리사욕을 위해서 사용한 겁니다. 삼손의 모습은.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도 마찬가지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들으면서 “아이고 고맙습니다” 너 대신 피 흘렸다는 말 듣고 “아이고, 고맙습니다” 용서했다는 말 듣고 “아이고 더더욱 고맙습니다”라고 하는데 그래서 살림살이 나아졌습니까? 그래서 사는 것이 기분 좋습니까? 욥처럼 주님의 십자가 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선입관이 뭐냐 하면 ‘나는 마땅히 구원받아야 해. 나는 용서 받아야 해’라는 마음으로 들어가잖아요.
마치 택배를 기대했는데, 하늘나라에서 십자가 택배가 왔단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에서 나를 기쁘게 한 요소가 있는가 싶어서 택배를 뜯어 보니까 그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이게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십자가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십자가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십자가 어떤 것도 우리가 기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교회 30년 50년 다녀도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가 헛바람 든 거예요. 헛바람. 자기에게 뭐 주실 거라고.
인간에게 안 줍니다. 인간에게는 아무것도 줄 필요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인간은 끄집어낼 대상일 뿐이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줄 의무도 없고 그럴 권리도 없어요. 욥은 그걸 모르는 겁니다. 욥은 이만큼 착하니까 고통이 안 와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욥은 평생을 살아도 지금 잘못 살고 있는 거예요. 인생 잘못 살고 엉터리로 산 거예요. 뭔가 기대한다는 거 소망한다는 그 자체가 잘못이에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달라고 요구한 거예요. “입을 열라. 채우리라” 뭐 각도 보고 채우겠다는 겁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리라”라는 말도 전부 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로 달려가지요.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본 것은 빈 무덤입니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 알고 난 뒤에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자기가 소유할 건 없습니다. 소유해서는 안 되는 게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이유가 뭐냐 하면 만나 자체가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말씀 자체가 예수님인데 인간은 자기가 말씀을 가지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만나를 가졌던 것이 잘못입니다. 만나가 우리를 가져서 만나답게 사용해야지 우리가 만나를 가질 이유도 없고 우리가 말씀을 가질 이유도 없어요.
주님께서 말씀이 되셔서 우리를 그냥 장악할 뿐입니다. 저는 이것을 가지고 에베소서 4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요. 그걸 두 자로 교회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가장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뿔 도장에 나오는 ‘결, 무늬, 문양’이 성도예요. 뿔 도장에 보면 그냥 무늬 없는 뿔 도장도 있지만 돈 더 주면 대리석 문양의 무늬 있지요. 그 대리석 문양이 성도예요.
이미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성도는 하나의 디자인된 주님에 의해서 디자인된 그런 문양 같은 거, 어떤 결 같은 거, 그런 것이에요. 내가 예수를 쥐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라는 손도장 안에 내가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이미 주님이 우리를 가졌는데 우리가 뭘 가집니까?
욥이 자꾸 죽으려고 하는데 끝까지 욥은 고통스러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결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형성하는 하나의 문양으로 욥은 가담되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지옥 갔습니까? 아닙니다. 지옥 간 게 아니에요. 거기서는 지옥 갔다 천국 갔다를 논하는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사용하신 거예요. 사용하셨다고요.
심지어 약속의 땅에 못 들어 간 사람 중에 모세도 있잖아요. 모세도 못 들어갔는데 모세 지옥 갔습니까? 변화산에서 보니까 엘리야와 함께 멀쩡하게 하늘나라에 잘살고 있는데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도 구원은 받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는 택배의 빈 상자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여기서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말고 ‘왜 하나님이 저를 도와주십니까?’라고 이야기해야 해요.
욥이 질문을 바꿔야 해요. ‘주님이여, 왜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기분 나빠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고통받는 역할을 왜 제가 꼭 해야 합니까?’라고 이야기해야죠. 그렇게 이야기한다면 ‘죽여주옵소서’라고 이야기하면 안 되죠. 욕심부리지 말고 ‘고통이 필요할 때까지 계속해서 살려주옵소서’라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욥이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오늘날 우리는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역시 우리도 고통스러워요.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왜 고통스러우냐 하면 몸이 아파서도 고통스럽지만, 근본적으로 뭐가 고통스러우냐 하면 우리가 사는 이유가 없고 의미가 없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겁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몰라요. 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는지.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살까가 아니라 질문을 반대로 하세요. 왜 내가 아직도 살아 있어야 하는가, 왜 내가 안 죽어야 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보통 인생을 살 때 살면서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의미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게 지금 욥의 친구들이 하고있는 짓이에요. 사람 사는 이유는 서로 착한 일 하고 서로 도와주기 위해서 살아간다고 이야기했거든요. 제가 거짓말 한 것이 아니고 진짜 욥의 친구들이 욥을 지적할 때 인간이 사는 의미가 뭐냐, 인간끼리 서로 도와준다는 거예요. 뭐가 빠졌습니까? 십자가 빠졌지요. 만나가 말씀 되는 원리도 빠졌지요. 말씀이 육신 되는 것도 다 빠졌지요.
예수님 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존재의 의미가 없어요. 욥이 말하는 거예요. 그 정도는 자기도 안다고. 그런데 그 이상의 것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그 정도는 안다는 것이 문제예요. 그래서 이 안다는 것을 욥을 통해서 뜯어내는 거예요.
동생 축구 하는데 14살 먹은 아이가 노래하면서 동생 축구 뒷바라지를 해야 해요. 정동원. 한 살 아래 동생이 축구 하는데 아버지도 벌이가 시원찮고 엄마는 자기가 4살 때 나가버리고 이제 돌아왔는데 그 14살 먹은 아이가 트로트 불러서 동생 축구 시킨다고요. 그걸 볼 때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칭찬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게 우리 인생을 사는 의미가 아니에요.
서로 도와주는 게 의미가 아닙니다. 부부끼리 친하고 이웃끼리 도와주는 게 의미가 아니에요. 인간은 의미를 내가 알 이유가 없는 거예요. 알 필요도 없는 걸 자꾸 의미를 찾는 거. 이게 자기에게 더 고통스러운 거예요.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신약에서 지체는 하나의 물결이고 무늬예요.
그냥 그리스도가 주님의 십자가 증거하기 위해서 아무 이웃사랑 안 해도 계속 살려주고 못된 짓 해도 살려주고 착한 일 해도 살려주고 그 착한 짓 못된 짓을 거기에 의미 부여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욥의 친구들은 맨날 그것 가지고 지금 욥을 더 고통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에.
네가 나쁜 짓 해서 네가 벌 받는다는 거예요. 착한 일로 돌아서면 벌 안 받는다는 거예요. 욥의 친구나 오늘날 우리 생각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다. 교회 와서 기껏 얻고자 하는 것이 나 잘났다는 것만 확인하러 오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사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살아 있음을 증거 하라고 사는 겁니다. 그게 성령 받은 예수의 증인 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천적으로 우리 선입관 자체가 잘못된 것도 모르고 우리 원대로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빡빡 우겼습니까. 이제는 우리 자신에게 십자가 오셔서 더 살 이유도 없는데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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