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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같은 인생(욥8;1-4) 2003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3. 9. 09:38
2020-03-08 14:59:49조회 : 27         
   전쟁같은 인생 200308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전쟁같은 인생(욥기 8:1-4)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qSJhuqZ1rk, Hit:1

 이근호 20-03-08 15:44 
전쟁 같은 하루

2020년 3월 8일                 본문 말씀: 욥기 7:1-4

(7:1)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7:2)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7:3)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

(7:4)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세상 사람들도 나름대로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냅니다. 낮에 온종일 노동하고서는 저녁에 되면 거기에 상응하는 품삯을 받을 생각을 하는데 바로 이러한 초조함과 기대성이 전쟁같은 마음 상태를 유발한다는 겁니다. 욥도 친구들 앞에서 하소연합니다. 난데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맞는 이것도 노동이라면 도대체 상응하는 보상이 뭔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응하는 보상을 전쟁하듯이 초조하게 괜찮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겁니다. 욥이나 욥의 친구나 둘 다 악마와 하나님께서 내기하고 있는 중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떻게하든지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사수하려고 진력을 다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을 지적하므로서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욥이 여기에 지지않고 반격에 나서니 욥의 친구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정당성이 훼손당했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들은 남과 대화하면서, 자기 입장에서 충분히 옳은 주장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이런 기분에 제대로 호응해주지를 않게 되면 섭섭하게 마련입니다.

욥을 통해서 악마의 개입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조치에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뭔가 잘못해서 얻어맞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얻어맞다보면 욥은 하나님 앞에서도 자신의 정당성을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적절한 논리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욥의 친구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3개월에서 24개월까지의 어린아이들 앞에 거울을 놓고서, 거울 안에 있는 아기가 곧 본인임을 아는지 실험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18개월 이하의 아동들은 대부분 그 거울 속의 인물이 본인임을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욥이 당한 고난을 보면서도 욥의 친구들은, 현재 자신이 당해야 할 고난을 대표로 맞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들의 신학이나 신앙관이 이스라엘 나라의 신앙의 표준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록 욥이 이방인이지만 십자가 복음을 미리 전하는 선지자라는 사실은 맞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받았던 언약은 욥과 욥의 친구들에게는 없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적 지혜가 중첩되어진 상황 속에 놓여 있습니다.

중첩이란 지름길, 빠른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드넓은 우주에서 멀고 먼 별까지 여행한다고 시도할 때, 지금은 로켓 속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공간이 틀어지는 지점을 찾아 이쪽 블랙홀레서 저쪽 블랙홀로 빠져 나오게 되면 광속으로도 수만년 걸리는 별도 불과 몇 개월만이 도달될 수 있다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방인은 욥이 경험했던 그 하나님이 내리신 고난을 이스라엘 나라는 ‘언약의 역사’라는 통해서 지름길이 아니라 혹독한 고난의 긴 역사를 경과하게 됩니다. 이는 곧 성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지나가신 경로, 혹은 길이 되게 하십니다. 즉 인간이 길을 찾아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에다 길을 만들어버리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 길은 주님께서 친히 다녀가신 흔적으로서의 길입니다. 주님께서 그 인간을 방문하시고 그 방문해서  복귀하면서 발생된 그 경로가 성도에게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따라서 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지 아니하면 인간에게는 구원의 길이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이 곧 길이요 경로가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나라를 지도하는 지도자인데 그에게 내려진 모든 원칙들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나타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것은 지름길이 아닙니다. 역사 속에 길을 개척하는 험한 일입니다.

이 길 닦으면서 전쟁이 발생됩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은 318명을 가지고 5개국 연합국을 이깁니다. 아브라함은 압니다. 자기 실력이나 자기 힘이 아님을 압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일에 개입하신 결과임을 압ㄴ다. 바로 개입이 없던 길이 새로이 생긴 겁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은 애굽의 바로 왕과 아비멜렉 족장과는 만나는데 여기서도 역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탐내었다는 단지 그 이유로 애굽의 바로왕이나(창 12장) 아비멜렉의 족종 집안에 큰 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창 20장)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즉 아브라함 언약이란 이 세상에 ‘특별한 한 개인’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아브라함이 벌린 전쟁은 바로 이 특별남을 알리기 위한 전재입니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언약은 이삭언약입니다. 이 언약은 ‘특별한 개인’이 아니라 ‘특별한 가족’을 나타내기 위한 언약입니다. 창세기 24:60에 보면,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쟁을 치르게 될 자식’을 낳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전쟁은 누구와 누구와의 전쟁일까요? 창세기 25:23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요소로 둘로 나뉘어졌다는 말은, 마지막 하나를 최종 확정시키기 위한 전쟁이 둘로 갈라져 싸우는 방식으로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조건은 오직 하나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최종 우승자’라는 겁니다. 따라서 야곱과 에서는 서로 형이 되기 위해 중단할 줄 모르는 전쟁을 합니다.

하지만 이 전쟁은 승자는 에서도 아니고 야곱도 아닌 ‘이스라엘’이 가져갑니다. 그 이스라엘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요 1:51,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섬김받기 위해 오신 게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최종 섬김을 받는 분이 되신 겁니다. (마 20:28) 그 다음 언약은 야곱 언약입니다. 개인이나 가족 단위가 아니라 국가 단위가 곧 복의 근원이 되는 겁니다. 모세가 이도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천하무적입니다. 애굽의 바로왕도 이겼고 바다로 그들의 진격을 막지 못합니다. 여리고성의 함락은 하이라이트입니다.

이들이 가는 곳이 천국의 길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 속에서 제사를 통해서 희생하신 분이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그 희생이 곧 욥의 고난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을 쑤시면 오직 복음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20-03-09 03:14 
21강-욥기 8장 1~4절(전쟁 같은 인생) 20200308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8장 1~4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 되었구나, 내가 누울 때면 말하기를 언제나 일어날꼬 언제나 밤이 갈꼬 하며 새벽까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는구나”

지금 욥이 친구 엘리바스에게 반박하는 대목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반박하는 가운데서 욥이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는 내 사정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본문에서 전쟁이라는 말을 합니다. 전쟁같은 사랑이죠.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자꾸 쥐어 팬다는 거예요. 맞을 이유도 없는데 자꾸 팬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때리면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대들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마귀에게 얻어맞는 것이 아니고 사랑하는 분에게 얻어맞을 때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왜 얻어맞는지, 마귀에게 얻어맞으면 ‘마귀야, 너가 나를 시기하는구나’라고 이해가 되는데 지금 욥은 전혀 악마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 정답을 알고 있는 우리가 정답을 이야기해 봅시다.

지금 욥에게 이렇게 난데없이 아픔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욥을 빼고 이야기하신 거예요. 욥을 빼고 누구하고 내기하기 위함이냐면 욥 1장에 보면 악마와 내기하기 위해서 얼토당토않는 애꿎은 인간 욥을 하나 놓고 자꾸 하나님이 마귀에게 때려 보라는 거예요. 빼앗아 보고 때려 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욥은 모르고 있고 하나님이 왜 패시는지만 묻고 있고 중간에 악마와 하나님과 내기하고 있다는 거, 애꿎은 본인 하나 두고 내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욥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욥이 악마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해답을 얻어내려고 나름대로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하죠. 그리고 욥만 해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고 욥의 친구들도 욥이 왜 애매하게 이렇게 매를 맞고 하나님께 얻어맞는지를 친구 쪽에서도 아무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리합시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이유를 모른다는 점이 지금 심적으로 더 아픈 거예요. 그게 오늘날 신약에 있는 우리 입장에서는 ‘욥의 애꿎은 이런 고통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라고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하실 거예요.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욥의 친구들 앞에서 욥이 애꿎은 아픔을 겪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저분 예수님이 왜 맞지? 왜 예수님이 사람에게 밉상 받지? 행동을 좀 조심하고 정치적 발언 안 했으면 안 맞을 건데 왜 맞지?’라고 하며 우리가 예수님을 보며 이해 못 하는 것과 욥의 친구들이 그 당시 욥을 보면서 이해 못 한 것이 동일한 선상이라는 겁니다. 왜? 둘 다 악마를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심리학자가 생후 3개월~24개월 된 아이들 88명을 거울 앞에 세웠습니다. 거울 앞에 세워두고 그중에서 거울 속에 비취는 모습이 본인이라고 느끼는 아이들이 18개월 아래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겁니다. 거울 쪽에 있는 아기가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는 아이는 18개월 미만은 한 명도 없는 겁니다. 18~20개월까지는 극소수가 있고 20~24개월까지의 아이들 2/3가 저 거울에 있는 아이가 바로 자기라는 것을 자각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모습이 곧 마귀세력권 안에 있는 내 모습이라고 알아먹는 욥의 친구들이 없어요. 세 명 중에는 없어요. 심리학자가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엉터리 같은 자아만 있을 뿐이지 진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준 진짜 자아를 아는 사람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러니까 우리는 가짜 자아를 ‘나’라고 여기면서 그것 지키려고 분주하게 애를 쓰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을 쉽게 말하면 아기 인형이 있으면 그 인형을 한번 눌러 보는 거예요. 그런 인형 있죠? 딱 누르면 “아이 러브 유!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고 하죠.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딱 쑤셔보게 되면 복음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어요. 누르면.

그런데 자기가 지키는 자아를 눌러보게 되면 뭔가 단추처럼 톡 떨어지는 게 있어요. 단추라는 것은 옷에 달린 거잖아요. 십자가가 부직포가 있어서 붙었다가 떼게 되면 이게 툭 떨어져 버려요. 누르면 딴소리가 나온다고요.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서 본격적으로 오늘 본문을 봐야 합니다. 굉장히 오늘 본문 내용을 제가 쉽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욥은 이방 사람입니다. 히브리인이 아니에요. 이스라엘사람이 아니에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욥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 선지자가 되었는가. 제가 여기 메모지를 하나 가져왔습니다. 이건 음성 들어서는 몰라요. 동영상을 봐야 해요.(동영상 17분: 09초) 날이면 날마나 오는 게 아니에요. A에서 B 지점까지 선을 그어 놨어요. 이 선의 간격이 굉장히 멀다고 칩시다.

우주의 시공간이라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멀어요. 안드로메다는 250만 년 걸립니다. 제일 가까운 프록시마라는 곳은 빛의 속도로 가면 5년 걸려요. 이 선이 그려있는 종이를 접어서 좁혀 보는 겁니다. 겹쳐 접은 종이에 송곳으로 겹친 채로 구멍을 뚫어 봅니다. 구멍을 뚫으면 구멍 뚫은 길이 가까운 지름길 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중첩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공간이 중첩되어있는 거예요. 지름길이 되는 거예요.

구멍이 뚫려 버리면 250만 년 걸리는 것이 5개월 만에 가는 겁니다. 이것을 물리학에서는 웜홀(wormhole)이라고 합니다. 시공간이 중첩되어있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욥은 이방인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몰라요. 언약을 모르지만, 욥에게는 장차 올 십자가와 자기의 몸이 중첩되어있는 겁니다.

그러면 히브리인들은 뭐냐. 히브리인들은 이 언약이 긴 과정을 겪어요. 긴 과정. 그게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 언약, 그리고 긴 과정을 통해서 언약이 촘촘히 투입됩니다. 그런데 욥은 한꺼번에 알았어요. 지름길이니까 한꺼번에 안다고요. 그래서 오늘 본문 설교에서 할 것은 이 지름길을 펼쳐보는 거예요.

펼쳐서 이스라엘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에서는 이것이 어떻게 펼쳐지는가, 길어지는가를 더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요.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이 모세이며, 모세 옆에 있는 그 지팡이가 뭐냐 하면 전쟁용입니다. 욥은 악마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왜 자신을 때렸는지에 대해 의문, 질문만 했어요. 그 답은 모세를 통해 창세기가 해답을 갖고있습니다.

해답은 길어요. 질문은 간단해도 해답은 길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간단한 사건이에요. 하지만 십자가에 죽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성경이라는 아주 긴 이스라엘 역사가 필요했던 겁니다. 제사장들은 매일같이 제사 드려야 했고요.

그러면 제가 할 것은 뭐냐 하면 모세는 무엇에 근거해서 전쟁해야 할 것인가. 전쟁했거든요. 이 전쟁은 왜 필요한가. 모세는 어디에 근거해서 전쟁했는가.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의해서 전쟁한 겁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아브라함은 다른 인간과 달리 특별한 개인이다’를 보여주는 게 아브라함 언약입니다.

창세기 12장에 나오죠.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라고. 하나의 특정 개인, 특별한 개인을 내세워서 복과 저주를 그 개인에 대한 평가나 이해에 따라서 거기에서 결정 나게 합니다. 그 결정 나는 과정 속에서 뭐가 일어나는가 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다섯 족속과 싸우는 대목이 나오죠. 여러분 아시는 내용이지만 318명밖에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다섯 왕의 연합군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그럴 때 아브람은 이런 생각을 해요. ‘이건 내가 이긴 것이 아니다.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경로를 밟고 있다’ 경로.

경로라 하는 것은 경주에 가면 포석정이라는 것이 있어요. 미묘한 경사를 만들어서 저쪽에서 술잔을 띄우면 이쪽으로 술잔이 빙빙 돌게 되어 있습니다. 국민학교에서 포석정 배우고 난 뒤에 수학여행을 경주로 갔는데 실제로 보니까 너무 시시해요. 너무 작아요.

이렇게 내가 이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경로(Path)를 내 몸에, 인생에 발생시킨 거예요. 포석정의 술잔이 흐르는 그 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 경로에 감히 아브라함이 거기 말려들어서 아브라함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다녀간 인생이 되게 하신 거예요. 마치 욥처럼. 욥은 그걸 모르지요. 언약을 모르니까.

십자가 고난을 왜 받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은 지금 악마와 전쟁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전쟁 중이라는 것만 알지 누구와 전쟁하는 것도 모르고 왜 전쟁에 내가 휘말려야 하는 것도 몰라요.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내 구원을 위한 인생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내가 복 받기 위한 나라는 것은 아예 없는 거예요.

주께서 다루시기 위한 하나의 재료요 하나의 도구이고 그릇에 불과한 것이지 ‘나 뭐 챙겼다’라는 것이 욥 앞에서는 욕 얻어먹을 일입니다. 반면에 욥의 친구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챙겼잖아”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욥 안에서 발생 되는 십자가 사건을 이해 못 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그렇게 해서 아비멜렉과 다투면서 애굽의 바로와 그랄왕 아비멜렉을 만나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위상이 이 정도 일지는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들었더니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왕 집안에 난리를 쳐버렸어요. 아브라함 배후에 엄청난 분이 계신 거예요.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을 이 땅의 역사 속에 홈을 파듯이 하나의 경로, 길을 내는 과정에 아브라함이 동원된 겁니다. 일종의 아브라함은 이명박이라고 보면 됩니다. 대통령 이명박 말고 건설회사 이명박,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주영과 경부고속도로 뚫었던 그 이명박이요.

무조건 길을 내버려요. 무조건. 길은 없어요. 천국 가는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조건 길이 나게 하세요. 아브라함이 그 점을 알고 “내게 일어난 사건은 주께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상대로 전쟁하는 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자기가 얻은 전리품(전쟁에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인 받칩니다.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라고 해요. 전리품이 아닌 것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부채표가 없으면 활명수 아니듯이요.

전쟁의 전리품이에요. 전리품이라고 하는 것은 포로 된 거예요. 나는 악마에게 포로 된 거예요. 출발점이 나는 포로 된 거예요. 내 힘으로 내 행함으로 내 착함으로 절대로 이 악마에서 못 벗어납니다. 포로 된 것을 빼내 줬기에 나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라 해서 중간 것이 아니고 맏물, 맏물의 십분의 일을 떼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맏물이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을 맏물이라고 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미 십일조를 다 이룬 거예요. 왜냐 하면 자기 경로가 주님께서 다녀갔다는 것을 하면 되니까 꼭 돈으로 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브라함을 건드리면 저주받는다는 것을 아브라함 본인의 의사가 아니고 아브라함 가는 곳마다 전부 다 그런 현상이 일어나니까 누가 당황스러우냐 하면 아브라함 본인이 당황스러워요. ‘내가 그 정도였어? 내가 그 정도야? 천사까지 세 명이 방문하고’ 아브라함은 개인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두 번째가 이삭 언약인데 이삭도 전쟁해야 해요. 이건 뭐냐 하면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특수 개인은 아브라함으로 굳혀졌기 때문에 이거는 가족, 아브라함의 가족을 특수한 가족이 되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보게 되면 거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줍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의 부인을 하나님께 맡기기 위해서 자기 종을 보내는데 그의 종은 순적히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뒤에 60절에 보면 시집 보낼 동생을 위해 오빠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원수의 성문. 전쟁 중이라는 겁니다. 너의 자식은 전쟁의 전사, 하늘나라의 전사가 된다는 겁니다. 또 전쟁이에요.

전쟁은 구분입니다.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구분하는 전쟁에서 네가 하나의 표징이 시그널과 사인이 될 것이다. 하나의 신호가 될 것이다. 우리는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다루어지는 겁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이 리브가에게 아기가 없어요. 잉태치 못한 자의 자식이어야 해요.

왜냐 하면 잉태를 할 능력이 있어 버리면 그건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의 백성이 아닙니다. 잉태치 못한 가운데서 태어나야 그게 바로 천국의 백성이에요. 처녀가 잉태하여 자식을 낳는 방법이 계속해서 적용되는 겁니다. 여기 리브가라고 되어 있는데 리브가의 영어 표현이 뭐냐 하면 리베카예요. 여러분 리베카 잘 모르죠. 요새 난리도 아닙니다. 세상에 50먹은 아저씨가 저렇게 이쁠 줄 몰랐다고 지금 20~30대 처자들이 난리도 아니에요.

리베카가 이삭의 아내인데 두 백성이 나뉘어서 싸워요. 두 백성이. 어느 백성이 어느 백성과 싸우는지 그거는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건은 있어요. 섬김을 받는 자가 천국 백성이고 섬기는 자가 지옥 가는 백성이라고 섬긴다는 의미를 여기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먼저 태어난 형이 섬김을 받는 자가 복 받은 민족이라고 하니까 야곱도 그렇고 예서도 그렇고 둘 다 섬김받으려고 싸움을 벌입니다. 형이 되려고. 그러나 그게 사실은 반대예요. 섬기려는 본색이 섬김을 받으려는 본색을 뒤엎어버린 거예요.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높은 자가 되게 하셔서 결국은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가 되도록 전환 시키는 계기가 가족 구성의 뒤바뀜 맏이가 동생이 되고 동생이 맏이가 되는 뒤바뀜을 이삭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둘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첫 번째 아브라함 전쟁에 있어서는 뭐냐 하면 다시 태어나는 이삭처럼 죽고 난 뒤에 옆에 있는 수풀의 양처럼 양이 대신해서 다시 태어난 자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두 번째는 이 땅에 살면서 내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글러 먹었다고 이렇게 바뀔 때 이게 참된 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예요.

하나님이시니 영광을 받아야 합당하나 이 땅에 와서는 누구보다도 저 낮은 곳까지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취지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듬뿍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나오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나 그 독생자에게 일어나는 일, 주님에게 벌어지는 그 일, 그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의 일의 전부란 말이죠.

바뀌는 거예요. 돗대가 되고 최고가 되는 게 아니에요. 스타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영웅이 되는 게 아니에요. 1등 되는 게 7등 되는 거예요. 그것을 누가 원하겠어요. 누가 꼴찌하기를 원하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길을 내버려요.

너는 너의 방식으로는 절대로 천국 가는 길이 아님을 내 모습과 그것을 관통해 버리는 갉아 먹는 길을 내지요. 그 길을 내는 모습이 욥이 지금 주님 앞에 쥐어팸을 당하는 모습이에요. 성도는 뭐냐. 주님께 쥐어팸을 당하는 자가 성도예요.

얻어맞으면 우리는 반항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항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죄인임을 알 때 ‘아, 죄인 되게 하는 그것이 바로 길이다’라고 아는 겁니다. 죄인 될 때만 십자가가 고마운 줄 알기 때문에. 자기 잘난 맛으로 살면 십자가는 뒷전입니다. 돈도 안 되고 밥도 안되는 그거는 차버릴 거예요.

그게 바로 욥에게는 중첩되어있는 겁니다. 야곱 언약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중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게 되면 어떤 남자와 여자가 처녀와 총각이 사귀다가 보통 20대는 사귀다 잘 헤어지는데 이 커플도 1년 사귀다 헤어졌어요. 헤어지고 나서 남자는 택시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운전하다가 우연히 “택시”하고 누가 손을 들어서 태우니까 어떤 아가씨가 탔는데 보니까 자기가 헤어진 옛날 여자인 거예요. 같은 도시에 사니까 얼마든지 그럴 확률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하는 말이 “나하고 헤어지고 난 뒤에 다른 남자 만나나?”라고 나 말고 뭐 너 만나주는 남자 있겠냐는 식으로 비꼬면서 물으니까 그 여자가 하는 말이 “있어. 나도 너랑 헤어지고 남자 만나고 있어”라고 하니까 “그 남자랑 사귄 지가 얼마나 되는데?” 택시 운전하는 전 남친이 이렇게 생각했죠. ‘나랑 헤어진 지 일 년 되었으니까 아마 6개월쯤 되었겠지’라고.

그런데 그 여자 하는 말이 3년 되었다는 거예요. 그게 중첩입니다. 1년 전 그 남자와 사귀기 전에 2년 전부터 양다리 걸친 거예요. 그게 바로 중첩입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성령을 받고 난 뒤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미 주님의 자서전, 주께서 택한 백성이었어요. 중첩된 거예요. 그걸 성령 받고난 뒤에 가만히 보니까 소급한 거예요. 창세 전부터 중첩되었어요. 창세 전부터 구원받기로 작정 되었어요.

이것을 바로 로마서 9장에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오늘 집에 가서 로마서 9장 읽어 보세요. 왜 믿지 못할 말인지. ‘예수 믿고난 뒤에 그다음부터 착실히 내가 관리해야지’하면 이건 신천지죠. 신천지는 있지도 않은 구원을 위해 돈 다 갖다 바치고 심지어 아파트까지 따로 살고 난리도 아니에요. 구원이 없어요. 인간에게는. 없는데 자기들이 애써서 얻어내겠다는 거예요. 성령을 받고 보니까 구원을 내가 받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길을 뚫어버린 거예요.

야곱 언약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을 아예 국가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열두 아들 낳아서. 하나하나 낳다가 갑자기 열두 명을 확 낳아 버리죠. 열두 명을 낳고 국가가 되죠. 그다음에 바톤을 누가 이어받느냐 하면 모세 언약이 인수받아요. 모세는 가는 곳마다 시비 걸어요. 그래서 모든 이방 민족을 다 이겨버립니다. 애굽 이기죠. 홍해 이기죠. 요단강 건너가죠. 여리고성 할 때는 이건 뭐 나팔 불고 끝냈죠. 나팔 부니까 자기가 알아서 무너졌죠.

이건 뭐 ‘건들기만 해봐라’입니다. 아브라함은 “나를 축복하는 자는”이라고 하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자는 다 저주받을 것이다”입니다. 모세가 길입니다. 모세가 길이고 모세 건드리면 다 작살나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은 착각했습니다.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 줄 알았어요.

그러나 모세는 모세 율법을 통해서 너희 안에 희생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바로 언약궤를 모시려면 거기에 매일같이 양을 바쳐야 해요. 피를 흘려야 해요. 주의 이름, 주의 이름에서 나오는 길이 곧 이스라엘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자체가 복의 근원이 되도록 조치를 하신 거예요. 아기 인형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누르면 ‘아이 러브 유’라고 나오죠.

복음은 우리를 보는 게 아니에요. 우리 속을 건드려요. 그러면 거기서 “주께서 하셨잖아요. 주께서 십자가 집어넣으셨잖아요. 이 십자가 때문에 나는 용서 받았잖아요. 이 십자가가 주의 모든 뜻이 함축된 거 맞잖아요. 주께서 집어넣어 놓고 우리 자신을 길로 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 유일한 길로 사용하셨잖아요”라는 고백이 ‘아이 러브 유’라는 식으로 톡톡 튀어나오죠.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 주의 십자가 복음만 나타나실 때,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 군사로 이 땅에 영적 군대로 전쟁하게 하는 겁니다. 오늘 욥은 그 사실을 상세히 모르지만 내가 평소에 사람들 일꾼하고 언제 월급 받느냐 하듯이 나는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성과가 뭘까 전쟁하듯이 하루하루를 보낸다는 그런 고백을 오늘 본문에서 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직도 결론을 모르죠. 다만 사용한다는 것만 알아요. 우리는 이제 신약이니까 마귀도 알고 이 세상도 알고 십자가도 아니까 우리는 주저없이 마음껏 사용하라고 나를 주님 앞에 드리는 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의 일어난 그 일이 동일하게 저희에게 일어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버린 돌로 쓸데없는 걸로 갖다 버렸지만, 그 쓰레기 같은 버린 돌이 성전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