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욥기 6장 24~30절(고통이 주인공) 20200301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6장 24~30절입니다. 구약성경 767페이지입니다.
“내게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하리라,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 그렇지만 너희의 책망은 무엇을 책망함이뇨, 너희가 말을 책망하려느냐 소망이 끊어진 자의 말은 바람 같으니라, 너희는 고아를 제비 뽑으며 너희 벗을 매매할 자로구나, 이제 너희가 나를 향하여 보기를 원하노라 내가 너희를 대면하여 결코 거짓말하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돌이켜 불의한 것이 없게 하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돌이키라 내 일이 의로우니라, 내 혀에 어찌 불의한 것이 있으랴 내 미각이 어찌 궤휼을 분변치 못하랴”
성경 말씀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이 뜻이 우리가 갖고있는 뜻과 일치되면 좋겠는데 그 중간에 십자가가 있어서 인간이 갖고 있던 뜻은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뜻은 실제로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배치되고 대치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반드시 의견이 충돌되는 두 가지 상황을 나란히 대조해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친절하신지요.
하나님이 아니라는 쪽도 여기에 기록되어 있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쪽도 기록되어서 둘 중에 너는 어느 편에 속하느냐, 너의 의견에 현재 네가 동조하고 있고 동의하느냐를 우리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선뜻 주인공 쪽으로 가지 마시고 어디를 경유 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는 쪽으로 먼저 가서 거기서 ‘아, 이런 게 아니구나. 나와 뜻은 같은데 하나님 보시기는 그게 아니구나’라는 판정을 받고 난 뒤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은 내 쪽이 아니고 어느 쪽에 있지?’라고 찾는 방식이 되어야 해요.
무조건 하나님 편에 선다고 성급하게 나설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한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예요. 바리새인을 자꾸 무시하지 마시고 바리새인의 의견을 한번 들어보자는 말입니다. 들어보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나 우리가 생각하는 모습이 어찌 그렇게 똑같은지요. “바리새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딱 하나만 이야기합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예수님이 없어요. 하나님은 있어요.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인 사울이라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울이라는 사람에게는 누가 없었느냐면 예수그리스도가 의미가 없어요. 그 당시 사울 이전에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고 예수님이 빠진 상태에서 그들이 미흡한 것이 아니고 반대했었다는 겁니다. 미흡할 것 같으면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말렸을 거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밀어낼 때 말린 것이 아니고 같이 동조했다는 말은 그들이 모자라고 미흡한 것이 아니고 무식한 것이 아니에요. 그들 속에는 극구 예수님을 반대하는 힘이 있었던 겁니다. 청년이 귀신들렸을 때 그 귀신이 청년의 입을 통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괴롭게 하는 자”라고 했어요. “예수여,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왔지요”라고 했단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예수님 보시기에 괴롭게 할 일인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해줘야 하는 겁니다. 여기 욥기가 얼마나 친절한지 욥 친구들의 말도 그대로 나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욥의 말도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욥기 4장 5장의 말과 6장 7장에 나오는 욥의 말을 양편에 다 적는 거예요. 양편에 다 적어놓고 두 의견 사이에 어떤 점이 차이가 나는지를 보면 되는 겁니다. 어떤 점이 차이나는 지.
그래서 지금 우리가 그 일을 하고 있거든요. 4장 5장에 나오는 엘리바스의 주장을 우리는 듣고 엘리바스의 주장을 들어보면 엘리바스는 항상 하나님 중심입니다. 놀랍게도. 벌써 5장 12절에 나오잖아요. “하나님은 궤휼한 자의 계교를 파하사 그 손으로 하는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시며”라고 나온단 말이죠. 들어보니 하나님은 정의롭고 정의롭기 때문에 악한 자를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다 내치신다는 겁니다. 너무나 옳은 소리라서 누가 와도 반박이 안 돼요.
반박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합니다. ‘욥의 친구들 말이 다 맞네. 욥 친구들의 말도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6장에 들어와 봤는데 6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26절에 “옳은 말은 어찌 그리 유력한지”라고 했어요. 꼬고 꼬고 또 2번 더 꼬고 비비 꼬아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욥은 입이 살았어요. 욥이 아프다는 것도 빈말 같아요. 입은 어찌 그리 살아가지고 대꾸는 그렇게 잘하는지 몸이 아프다 하면서도 말은 곧잘 합니다.
너희들이 너희들 딴에 이건 틀린 말이 아니고 하나님 보셔도 옳은 말이라고 하는 것들을 어찌 그리 잘하는지 그걸 지금 나에게 책망이라고 책망하는 거냐는 의도로 26절에 “너희가 나를 책망하려느냐”라고 묻지요.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망이 끊어진 말은 바람 같으니라”라고 합니다. 귀담아들을 말이 한마디도 없다는 거예요.
목사가 설교하는데 교인이 하는 말이 “귀담아들을 말이 한마디도 없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네 쪽에 속한 것과 네 영역과 내 영역이 지금 다르다는 거예요. 그것은 출발점이 달라서 그래요. 욥 친구의 출발점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욥의 출발점은 놀랍게도 내가 여기 이유도 없이 아프다는 데 있어요. 고통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욥의 반박이 욥의 친구들에게 먹혀들 이유가 전혀 없죠. 왜냐 하면 자기는 안 아프니까. 자기는 안 아프거든요.
이걸 하나둘 언급하게 되면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쉽게 쉽게 가겠습니다. 진짜 쉽게 가겠습니다. 욥의 친구 한쪽에 놓고 맞은 편에 욥을 놓자는 거죠. 그러면 이 구약 욥기에서는 욥과 욥의 친구들밖에 없죠.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모든 이면, 인간의 숨어있는 이면이 다 들통난 사람이 나와요. 그게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거기 4장 17절에 보게 되면 사마리아 여인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남편이 다섯 있다는 말을 자기가 먼저 끄집어내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 사실을 누가 아느냐 하면 먼저 우리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예수님에 의해서 다 들통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25절에 사마리아 여인이 하는 말이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하고 29절에 보면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나에게 말한 사람을 말하며 사마리아 여인이 수치스럽게 부끄럽고 우사스러워하며 말한 것이 아니고 아침에 이야기한 것처럼 신이 났어요. 세상에 엑스레이도 이런 엑스레이가 없고 MRI도 이런 MRI가 없어요. 인간의 육체 이상의 그 마음까지 홀라당 다 까발려서 다 알고 계신다는 말은 자신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자신의 최후 도착지점까지 미리 챙겨주시는 분을 내가 만났다는 그 행복, 그 즐거움, 더 이상 내가 나를 추스를 필요가 없는 자유인, 이것이 바로 욥도 모르는 수준이에요. 욥도 이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네가 오기 전까지 너보다 위대한 선지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세례요한보다 더 많이 안다. 천국에서 더 큰 자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욥을 보면서 욥의 친구 이쪽에 놓고 욥 놓고 우리는 신약이니까 여기에 뭘 놓느냐 하면 우리는 신약 성도다움을 이렇게 놓게 되면 욥 친구들의 한계도 알고 욥 자체의 한계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 때 이것을 다 아는 거예요.
‘수치스럽다, 부끄럽다, 부끄러워서 어떻게 사나’라는 것이 더 이상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물 길으로 왔다가 그 귀한 물동이까지 버려뒀어요. 물동이 버려두고 물동이 대신 “나는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외쳐버려요. 그리고 이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메시아에 대해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 여인을 자기와 연관시켜서 그렇게 만들어 버린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저는 여자의 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걸 주의 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여자의 일이 아니고 사마리아 여인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입니다. 그 주의 일이 지금 욥을 보면서 앞당겨서 욥에게 주의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런데 욥의 친구가 뭘 모르느냐 하면 욥이 아픈 것이 주의 일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욥의 아픈 것이 주의 일인 것을 몰라요.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이 저에게 메일을 보냈어요. ‘목사님, 속이 문드러집니다’라는 제목으로. 교회 가려고 하니까 미국에 있는 아들이 “지금 이 시국에 교회 간다니 아버지 미쳤어요?”라고 했다는 겁니다. 마누라에게는 이겨도 자식에게는 못 이기거든요. “속이 문드러집니다”라는 문구가 얼마나 복음적으로 들리는지요. 그래서 제가 답변을 “하하하!!!”라고 드렸어요. 너무 기뻐서 제가 웃었어요. 교회 안 나와도 그렇게 기뻐요.
불신자들이 교회 안 나간다고 뭐라 하는 시험보다 더 큰 시험은 교회 나온 사람이 “집사님, 왜 교회 안 나왔어요?”라고 하는 시험이 더 크다고요. 지금 집사님은 주의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 그 행함은 아무 의미 없어요. 문드러진다는 게 주의 일이에요. 문드러진다는 게. 그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이야기겠어요. 이거 공개하면 안 되는데 누구라고 말은 안 했으니 짐작해보면 알아요. 미국에 아들 있으신 분.
내가 속이 문드러진다고 이야기하는 그 자유 함, 자기 수치 부분 아닙니까. 그 수치를 이야기하는 자유 함. 집사가 돼서 교회를 안 나오니 얼마나 수치스러워요. 불신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나에게 뭐라고 손가락질하겠습니까? 그걸 이겨내야 해요. 그걸. 내가 교회 안 나오는 것이 주께서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수고했어. 교회 안 나온다고” 그 자유 함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 주에는 아무도 안 나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것마저 이겨내야 해요. 그것마저. 그것을 감사해야 해요. 내가 불신자라는 사실을 감사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마귀가 더 이상 공격할 여지가 없습니다. 자기가 불신자라는데 무엇을 공격합니까. 신자 아니라는데. 그런 자유를 지금 욥은 못 누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욥의 친구들이 하는 말은 소망이 끊어진 자의 헛소리입니다. 그런데 욥은 지금 이유 없이 고통받고 있거든요.
지금 욥의 고통은 본인이 왜 고통을 받는지 이유를 모르는 게 고통스러운 거예요. 고통을 주는 것이 주의 일인데. 자기는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착한 분이고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것이 하나님인데 왜 복 대신 고통을 주느냐는 말이죠. 제가 이걸 설명하는데 어떻게 설명할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는데 “이건 사적이 아니고 공적입니다”라는 말과 또 다른 말로 “이건 중심부가 숨겨져 있고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것이 욥의 일입니다”라고 설명해도 되는데 지금 오늘 본문에서는 욥의 고통이 중심부예요.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주변부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이유 없이 고통받는 하소연, 통곡, 욥에게서 찾아야 해요. 자기는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건방지게 욥의 친구가 자기가 주변에 있지 않고 자기가 뭔가를 안다는 거예요. 자기가 중심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인데 그걸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안데요. 그러니까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납득이 안되고.
신명기에 의하면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저주받아 죽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이것보다 더 쉬운 것은 어디에 나오느냐. 백종원의 골목 식당에 나옵니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돼지 곱창을 굽는데 백종원 쉐프가 “이건 누린내 나고 맛이 없는 게 곱창을 바꿔야 하겠습니다. 이거 중국산이죠. 한국산으로 바꾸고 구울 때는 불맛이 나야 하는데 제가 한번 해볼게요”라고 하면서 구우니까 곱창에서 불맛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곱창집에서도 전부 다 만족을 했단 말이죠. 그리고 백종원 쉐프가 떠나고 2주 동안 가게 사장이 연습을 해본 거예요. 그런데 이상하게 불맛이 안 나요. 왜 불맛이 안 나는가. 이게 돼지곱창은 소곱창과 달라서 기름이 안쪽에 있거든요. 안에 있는 기름이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바깥에 흘러나온 기름과 거기에 가스불과 만나서 불맛이 있어 줘야 손님들이 씹을 때 기름이 탄 그 불맛을 씹는 것이 요게 별미가 되어서 아침부터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데 이 사람은 성질이 급해서 먼저 불 약하게 해서 안쪽의 기름을 바깥으로 흘러내고 난 뒤에 센 불로 불맛을 내야 하는데 초반부터 센 불로 하니까 타기만 타고 맛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욥이 주인공이 아니고 욥 안에 있는 고통이 주인공이에요. 예수 믿고 힘든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고통이 주인공이에요. 십자가 고통이 주인공이라고요. 그 고통이 주의 일이라는 말이에요. 주의 일. ‘왜 나를 힘들게 하십니까’라는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죠. 힘든 그것이 주인공이고 나는 주변부예요. 나는 중심이 아니고 변두리예요.
여기 연세 많은 분 계시지만 인생 산다는 것이 참 힘들었어요.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힘들어요. 그런데 힘듦에도 불구하고 자꾸 버티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힘드니까 빨리 떠나라고 주님은 이야기하는데 힘들지만 안 힘들게 해서 좀 더 살게 해달라고 백 세까지 살게 해달라고 나오는 거예요. 소시지는 길이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이 고통이 내가 증거 해야 할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같이 겸하고 있다는 이 행복, 내가 주의 종이라는 이 행복.
물론 행복이 너무 심하면 안 되는데, 빨리 데려가시면 최고 좋고. 그런데 안 데려가시고 계속 아프고 편찮게 하시는 이유는 주의 종은 그동안 평생 동안 ‘내가 주인공이다. 구원받은 것은 나다’라는 자꾸 ‘나는 ~이다’라는 나를 주어로 놓고 그다음에 하나님이 도와줬다는 식으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게 주객이 바뀌어야 해요. 그러면 성령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은 바깥에 나올 때 십자가 고통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게 불맛이에요. 안에 있는 기름이 녹아서 이게 욥이냐 욥의 고통이냐 할 때 욥의 고통이 바깥에 나와야 해요. 욥의 고통이 밖으로 나와줘야 해요. 그런데 욥은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거예요. 적어도 나는 당대의 의인인데. 내가 친구보다 더 나은데. 그런데 저 인간들은 멀쩡하고 나는 아파도 너무 아프고. 내가 봐도 해결책 없는데 건방 떨면서 자기는 안 아프다고 하나님 운운해 가면서 “하나님은 정의로운 분이다. 정직한 분이다”라고 하니까 욥에게 욥 친구들의 조언이 먹히지를 않는 거예요.
이 사실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느냐 하면 전도를 할 때 내가 전도하게 되면 그건 전도가 아니에요. 왜냐 하면 ‘내가’ 전도하기 때문에 전도가 아닙니다. 주께서 전도하게 하는 상황을 한순간도 빠짐없이 그 상황을 계속 주셨어요. 오랫동안. 주님은 노시는 분이 아니거든요. 주님은 쉬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님은 끊임없이 일 해오셨던 겁니다. 계속해서 일했던 거예요.
그 상황이 뭐냐 하면 바로 전도적 상황이거든요. 계속해서 일하시는데 계속 일 하시면서 성경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일에 대해서 범사에 감사하라.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와서 “아이고 짜증나지요? 제가 위로해 드릴게요”라고 하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 같은 주제에 이 정도만 해도 저는 고맙습니다. 나 같은 인간은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하지요”라고 하는 이게 주께서 주선하신 상황이란 말이죠.
전도할 필요 없어요. 계속 전도할 상황 속으로 주께서 계속해서 우리를 거기에 세운 거예요. 뭐 쪽지 들고 다니며 “예수 믿으세요”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모든 상황이 전도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이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하세요. 뭘 억지로 감사합니까?”라고 했을 때 듣는 사람이 “당신은 감사할 것과 감사 안 할 것을 당신 임의로 결정했지요? 그게 바로 인간은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는 거죠.
인간은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분간 못해요.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걸리버여행기라는 소설이 있는데요. 키 작은 사람들이 사는 소인국에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삶은 달걀을 넓은 옆구리를 뚫어서 껍질을 까느냐 꼭대기부터 까서 먹느냐가 그들의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걸리버 보기에는 이건 아무 문제 거리가 안 돼요. 세상 사람들은 아무 문제 거리가 안 됩니다.
저 사람이 얼마 살다가 돌아가실지 저 사람이 몸이 나을지 그건 아무 문제 거리가 안 돼요. 뭔가 노리고 목표해서 저러면 좋겠다는 것은 전도를 막는 겁니다. 전도는 뭐냐 하면 범사에 감사하려면 우리의 어떤 상황도 전부 다 은혜예요. 전부 다 은혜로 오는 거거든요. 주께서 심판한다는 것은 은혜를 회수해버리면 그것이 심판이 된다고 지난번에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코로나 판치는 이때 대구 시내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종로 바닥에 가봤어요. 세상에 주께서 이런 축복의 날을 주셔서 도로가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요. 특히 쓸데없는 영감쟁이들 하나도 없어요. 얼마나 감사한지. 꼭 필요한 인간만 돌아다녀요. 그리고 서울에서 온 방송국 카메라맨들이 대구 시내에 사람 없다는 것을 카메라로 찍기 위해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요. 저는 왜 갔느냐 하면 만두 사러 갔는데 그걸 보면서 요한계시록 8장이 생각났습니다.
요한계시록 8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하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 8장 1절에 “고요하더니” 고요할 때예요. 고요함. 적막함. 이 적막함이 정상입니다. 분주한 것이 정상이 아니에요. 사람은 적막해도 괜찮아요.
아파도 괜찮고 적막해도 괜찮아요. 왜? 하나님께서 적막하게 하시면 적막한 거고 하나님께서 까불게 하시면 까부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신 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 전부 다 천사, 천사는 심판의 독수리거든요(호세아 8장 1절), 독수리가 와서 위에서 보면서 “저주다, 저주다, 저주다”라고 해도 그걸 감사히 받아야 해요. ‘맞습니다. 여기 대구 도성이 저주입니다’라고 감사히 받으면 되잖아요.
인구 반이 줄더라도 그게 뭐가 이상한 일입니까. 자연스러운 일 아닙니까. 교회 모이는 거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잖아요. 거기에 무슨 토를 달고 이이를 답니까. 토를 달고 이이를 다는 것이 이상해. 아직도 살아있고 주께서 살게 해 주셨고 살아있는 한 모이고 뭐!뭐! 뭐가 문제인데요? 언제부터 나라말 들었어요. 나라가 교회 머리입니까? 주님이 교회 머리지. 국가가 교회 머리입니까?
물론 내가 콜록콜록 감기 걸려서 남에게 퍼질까 봐 배려심에 의해서 우리 귀한 성도님들 집사님들 아프면 안 되니까 그런 마음으로 안 오시는 분 있는데 그렇게 안 오시는 분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스크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마스크 써도 “주여, 죽여 주옵소서” 마스크 안 써도 “주여, 어서 데려가옵소서”라는 마음가짐이 어떤 일이 일어나도 범사에 감사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이에요.
욥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몰라요. 이유를 모르겠어요. 그건 주객이 바뀌어야 합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 받아서 주님의 십자가가 주인공이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위해서 십자가가 아니라 십자가를 위해서 내가 아직도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 죽을 때까지 십자가만 증거 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기름같이 빠져 나와 주시옵소서. 십자가가 바깥으로 나와서 십자가 앞에서 볼 때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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