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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취객(욥6;18-23) 20022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2. 24. 18:48
2020-02-23 14:59:01조회 : 39         
   성령의 취객 20022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성령의 취객(욥기 6:18-23)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KFV2sNdJ1h4, Hit:2
 이근호20-02-23 15:41 
성령의 취객 

2020년 2월 23일                본문 말씀: 욥기 6:19-23

(6:19)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6:20)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6:21)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6:22)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6:23)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욥과 친구 사이의 괴리는 점점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인간은 기대하는 것으로 인하여 실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멀리서 오는 무역상들이 목마름을 찾기 위해 보아 두었던 시냇물을 기대하더라도 막상 그 시냇물이 바짝 말라있다면 얼마나 큰 허망한 일인가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있어 뭔가 기대한다는 것이 인생을 잘못 사는 것이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인간은 허망해야 한다는 겁니다. 욥은 지금 자포자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평소에 알고 있던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그 어떤 해답을 내릴 수 없다고 결론 지으려고 합니다. 차라리 욥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허망’한 존재로 보려고 합니다. 욥의 친구나 욥에게 있어 아직도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항상 올바르신 하나님상’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게 구약적 방식입니다. 구약적 방식은 복선이 아니라 단선입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연결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옳으심을 지켜드리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 바짝 차려서 항상 제 정신으로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옳다’는 것을 판정내리려면 그 일과 연관된 숱한 관련 일들을 다 조사해야 합니다. 밝혀내어야 합니다. 즉 옳은 결과가 나오기 위해 그 과정이나 원인까지 옳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옳은 시작이 옳은 결과를 낳는다고 사람들은 여깁니다.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까지 다 지켜보면서 옳은 절차이기를 바라고 있다는 겁니다. ‘옳은 결과’, 즉 ‘고통이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이 상황에서 욥의 세 친구들이며 욥은 아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욥은 고통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정당하고 옳게만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실수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 죄도 없는 욥에게 고통의 벌을 내려줄 리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렇다면 잘못은 욥에게 있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이런저런 식으로 잘못된 점을 찾아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제시한 원인들은 전혀 욥 본인이 수긍할 수 없는 이유들입니다. 터무니없는 원인을 제시하고 있는 겁니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에 반발하면서도 한편으로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답도 제시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이 시점에서 해답이라고 내놓은 것이 바로 ‘인생의 허망함’입니다.

즉 죽게 되면 늘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욥을 이 시점에서 죽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욥이 놓친 게 뭡니까? 욥이 모르고 있는 게 뭡니까? 욥이나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정신력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력을 여전히 믿습니다. 자신의 이성적인 자질에 입각해서 하나님을 ‘항상 올바르신 하나님’으로 설정해 놓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건전한 것처럼 하나님도 나처럼 건전하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예상 밖의 본질로 나타났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 ‘쓴 잔’을 마셔야 하는 그 모순을 안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없으신 하나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으로서 ‘있는 하나님’은 실은 가짜입니다. ‘없으신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있는 하나님’이 가짜라면 ‘항상 옳은 하나님상’도 가짜입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십자가 후’ 시대가 됩니다. 하나님 자신의 드러냄을 그대로 적용된 인물이 사도 바울입니다.

이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로 자부합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6) 즉 사도 되기 전의 사울은 결코 깡패가 아닙니다. 타인을 해치는 것을 취미로 하는 자가 아닙니다. 완벽에 완벽을 기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마땅한 도리라고 여겼습니다.

문제는 사울은 십자가 속으로 들어서지 않았던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 현장에 합류되지 못한 자입니다. 디모데전서 1:13-15에 보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사울은 포행자요 훼방자로 변모시켜 버립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즉 사울은 본인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백합니다. 결코 사울이라는 사람이 경솔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경솔하게 일하지 않아서 죄인 중에 괴수로서 살아간 겁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살아가기에 그는 여전히 구약적 인물에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정당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출처로 해서 자신의 정당함을 도출하면서 움직였던 겁니다.

그랬던 그가 에베소서 5:18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사도 바울은, 인간의 술취함 상태를 방탕한 것으로 보고 그것과 대비해서 ‘충만’을 언급합니다. 이는 정신 바짝 차리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자신 주님의 정신에 몰입당하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욥에게 적용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시는 고통에 취해버려야 하는 겁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납니까?’를 물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라는 마음 가짐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사정없이 줘 팹니다.

마치 신약 시대에 성도에게 성령으로 충만케하시는 방식과 같은 방식입니다. 개인적인 따짐이 무의미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는 신약과 구약 시대에 십자가가 가로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들의 모든 세상 판단과 자기 판단이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즉 인간이 자신을 선악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게 하시는 원리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고난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2-23 20:02 
19강-욥기 6장 19~23절(성령의 취객) 20200223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6장 19~23절입니다. 구약성경 766페이지입니다.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 거기 와서는 바라던 것을 부끄리고 낙심하느니라, 너희도 허망한 자라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 내가 언제 너희에게 나를 공급하라 하더냐 언제 나를 위하여 너희 재물로 예물을 달라더냐, 내가 언제 말하기를 대적의 손에서 나를 구원하라 하더냐 포악한 자의 손에서 나를 구속하라 하더냐”

욥에 등장하는 인물은 욥의 친구들과 욥이 지상에 등장합니다. 욥의 친구들과 욥은 친구 사이입니다.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평소에 허물없이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갑자기 공포스러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욥을 보면서 자기가 속해있던 형편과 욥의 형편을 알아서 분리시키기를 시도합니다. 21절에 보면 “너희가 두려운 일을 본즉 겁내는구나”라고 되어있어요.

욥의 친구들은 욥의 자리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자리에 못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데 어딜 봐서 제자입니까? 주님과 함께할 수 없는 제자들이었어요. 주님께서 가고자 하는 그 자리까지 주님께서 마시고자 하는 쓴 잔까지 그들은 갈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 하면 예수님 이용하기 바빠서 그렇지요.

예수님 이용할 생각했지 예수님 때문에 내 것이 망가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누가 누구를 친구 삼는다든지 누구를 위해서 다가선다는 것은 얻을 게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가서는 겁니다. 얻을 게 없으면 다가설 수가 없지요. 거리를 두는 겁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다가서고 어느 정도까지는 발을 뺄 마음의 준비 자세가 다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이 가장 오해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욥의 고난은 욥에게만 일어나는 일, 욥에게만, 이거는 인류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주어질 일이 아니고 욥에게만 일어날 만한 일이라는 겁니다. “욥아, 망해라. 망하는데 우리까지 끌어당기지 마라”라는 뜻이에요. 우리는 안 망하고 있는데 욥은 망하고 있으니까 이건 욥이 분명히 네가 잘못한 것이 있고 우리는 안 망했으니까 우리는 너만큼 잘못한 것은 없다는 것이 욥기에 전체적으로 흐르는 맥락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두 가지 안목을 다 봐야 합니다. 욥의 친구 입장에서 욥을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욥 입장에서 욥의 친구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는 욥의 친구 입장에서 욥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욥은 우리보다 더 은밀하게 죄지은 것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은 정의로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죄지은 사람에게 벌주고 착한 사람에게는 벌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욥과 우리 사이에 욥이 상대적으로 고생을 더 많이 하니까 분명히 욥은 나쁜 짓을 우리보다 더 심하게 했다는 결론을 내려야 하나님의 정의로움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욥의 친구들이 모르는 것은 욥에게 일어난 그 시련과 고난을 본인들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같은 교인이나 이웃끼리 누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지게 되면 뭐 갖은 동정을 다 하지요. “안 되었다. 힘내라! 힘! 기도하면 희망이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의 시발점이 되고 결국은 그다음 차수가 누구냐 하면 그다음 차수가 본인이 내가 동정했던 사람에게 일어난 똑같은 일이 나에게 들이닥친다면 여러분들은 그렇게 동정한 그 모습이 굉장히 부끄러울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 구약과 신약을 구분하겠는데요, 구약에서는 모든 선이 단선입니다. 욥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욥은 하나님에 의해서 고난받을 때 왜 자기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적절한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옳으신 하나님이고 바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걸 유지하다 보니까 내가 고난받는 것이 앞뒤가 원인과 결과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무조건 옳게 행하시는 분이다. 바른 것만 행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에게는 실수도 오류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이런 벌을 받는 나는 오류가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앞뒤가 맞는데 욥 본인도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욥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자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자기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은 아니에요. 잘못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잘못된 게 있다고 그렇게 설명하면 안 되고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그냥 인생사는 게 허망하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게 오늘 본문입니다.

얼마나 허망하냐 하면 17절에 보게 되면 “따뜻하면 마르고 더우면 그 자리에서 아주 없어지나니”라고 되어있어요. 어떤 개울가에 물이 넘치는데 물이 넘칠 때 사람들은 개울가 보면서 ‘야, 물 시원하게 내려간다’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래서 여기 19절에 “데마의 떼들이 그것을 바라보고 스바의 행인들도 그것을 사모하다가”라고 데마의 떼들 나오는데 대상들입니다.

무역하는 상인들이 와서 뭘 기대하느냐 하면 지금 어느 시냇물에 가게 되면 물이 흐른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힘든 여정을 계속하며 그 시냇물 만나면 우리는 물 실컷 먹을 수 있으니 염려 없다고 생각하며 가는데 막상 그 시냇물에 왔는데 바짝 말랐어요. 바짝 말랐다고요. 그럴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허망이라고 해요. 허망. 허망이 성립되려면 뭔가 잔뜩 기대해야 해요.

‘하나님은 옳으신 분이다. 하나님은 뭐든지 바르게 행동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찾아서 복을 주려고 하신다. 나쁜 사람에게는 복을 주지 않고 저주를 주시고 바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이다’라고 그런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행동하는데 될수 있는 데로 나쁜 짓은 안 하고 옳게 살아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치 시냇물을 찾는 대상들의 마음처럼 뭔가 기대하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들이. 지금 제가 구약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구약부터 출발해야 신약의 모든 의미가 풀리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면 되잖아. 나쁜 짓 하면 벌 받는 게 당연하고 착한 일 하면 복 받는 게 당연하다’라고 시작을 했는데 욥에 와서 이게 연결고리가 안 되는 거예요.

왜냐 하면 욥의 친구들은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무탈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나쁜 짓을 안 한 보상으로 산다고 생각했는데 욥은 뭐냔 말입니다. 욥은. 욥은 하나의 걸림돌이 된 거예요. 거기서 욥에게 질문하는 겁니다. “욥 너 나쁜 짓 했지?” “아니” “그런데 왜 그렇게 벌을 받지?” “글쎄, 나도 모르겠어” 그러면 욥이 할 소리는 “이게 아마 인생이라 하는 것이 허망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욥은 하나님을 안 다치게 하려고 그러는 거예요. 하나님은 옳게 하시는데 인간 쪽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인간 쪽에서 문제를 끄집어내려고 하니까 욥이 내린 결론은 “인간이라는 것은 허망하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쪽으로 결론을 맺으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욥의 생각은 잘못이에요. 욥은 구약적 안목밖에 안 되기 때문에 신약적 안목을 모르기 때문에 기껏 자기의 고통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 죽자. 죽으면 그만이잖아’라고 하는 게 욥의 일관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목 졸라 죽이려고 한다. “여기 목 있습니다. 목 드릴게요. 그냥 죽여 버리세요”라고 하면서도 뭐냐 하면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답이 없는 인생을 욥도 마찬가지고 욥의 친구도 계속 지루하게 끌고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해답을 알아야 하겠지요. 신약에는 그 해답이 나옵니다. 신약에서는 그 해답이 어디 나오냐 하면 에베소서 5장 18절에 보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되어있어요.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신약의 성도는 성령의 취객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취객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술이 자기의 이성을 이기는 겁니다. 자기의 판단력을 이기는 거예요. 여러분은 성도니까 화투 한번 쳐본 적 없고 술은 근처도 안 갔고 아마 그럴 건데요. 술이 뭔지 모르고 술 하면 어떤 느낌이 없는 사람이지요. 담배는 물론이고 나쁜 짓도 평소에 한 적 없지요. 성도니까.

제가 지금 꼬아 말하는 건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물어보지요. “교회 다녀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예, 교회 다녀서 그렇습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목사님 말씀대로 내가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써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의 빛과 소금이 되고 영광을 돌린다고 저는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리고 살고 있습니다”라고 이걸 자랑이라고 하거든요.

제가 시비 걸고 싶습니다. 신약에서는 정신 바짝 차리면 안 돼요. 취객이 되어야 하지 정신 바짝 차리면 안 돼요. 사람이 정신 바짝 차리면 자기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게 되어 버려요. 성경에서는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지금 나는 주머니에서 오천 원을 꺼낸다. 저 앞에 거지가 보인다. 내가 지금 폼나게 돈을 넣는다’라고 이걸 자기가 디테일하게 시나리오 다 써서 하는 거예요. 자기가 봉준호 감독도 아니면서 다 계획이 있어요.

내가 어떻게 바르게 살면 주께 영광을 돌리고 그 보상으로 집구석이 잘되겠는가가 계산이 서 있어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요. 이래놓고 그들은 신약 성도라고 우깁니다. 성령 받았다고 우겨요. 그건 성령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약 욥의 친구들이에요. 욥의 이야기가 왜 있느냐 하면 정신 바짝 차려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구약적 위치밖에 안 되는 거고 성도가 아니죠. 그냥 신자 되려고 흉내 내고 모방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행동하게 되면 그러한 그 모습이 자기의 새로운 자기 의가 됩니다. 자기 의가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손 내밀게 되어있어요. 이렇게 힘들게 바르게 사는데 하나님이 나에게 해준 거 뭐가 있습니까? 날아오는 것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 파국이라는 것이 있어요. 파국. 내가 열심히 정신 바짝 차리고 또 정신 바짝 차려봤자 그것은 내 자랑밖에 안 된다는 거, 그건 주님의 영광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계기가 있어야 해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 20절에 하신 말씀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하셨어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관리했는가를 여러분들이 바리새인에 관한 책들 보면 나와요. 바리새인의 주장에 이런 것이 있어요. 네가 너에게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는 말씀도 나와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나와요.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들리죠.

바리새인들의 뜻은 이거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하나님께 기쁨 되고 영광이 된다. 달랑 그것밖에 없어요.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중간에 뭐가 없지요? 뭐가 달랑 없어졌지요? 십자가가 아무 의미 없어요. 십자가가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십자가는 착한 일 할 수 있는데 한번 해보라고 격려하는 차원의 십자가가 아니고 네가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너는 죄인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는 것이 십자가예요. 뭘 해도 죄가 된다는 사실이요. 이미 구약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걸 다 실습을 한 거예요. 자기 조교를 통해서. 정신 바짝 차렸다고요? 차리면 차릴수록 그게 죄가 되는데요.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데요. 사도바울이라는 사람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율법에 흠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어떤 자로 만들었느냐 하면 핍박자요, 포행자로 유발시킨거예요.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라고 되어있어요. 사도바울의 취미가 깡패가 아니고 남 때리는 것이 취미가 아닙니다. 침착한 사람이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에요. 생각이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도바울 되기 전에 사울일 때 어떤 자로 변화시켰느냐 하면 그 사울의 마음속에 그리고 그의 눈앞에 기독교 신자들을 눈에 띄게 만들어서 그들을 포행하고 그들을 체포하고 사형시키고 붙잡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도록 주께서 조치를 해주신 거예요.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 후에 얼마나 그 점이 감사한지요. 내가 만약에 남들 죽이고 때리고 안 했으면 얼마나 내 잘난 척했겠느냐는 거죠. 그리고 하는 말이 15절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했어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 조금 전까지 “나보다 율법에 더 완벽한 사람 나와보라고 해. 나는 모든 율법을 지킨 의인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의인을 하나님께서 뭐로 전환 시켰느냐 하면 죄인 중의 괴수로 전환 시켰습니다. 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구약적 인식을 갖고있는 사람들은 뭐가 기쁘냐 하면 전에는 죄를 지었는데 지금 의를 행한다고 그걸 기쁨이라고 그걸 쥐고 있어요. “나는 예수 믿고 난 뒤에 담배 끊었고, 술 끊었고, 전도하러 다니고 가정도 잘 돌본다”라는 말을 무슨 자랑이라고 여겼단 말이죠.

이건 주님이 하는 작업과 반대가 되는 거예요. 왜 반대가 되는 줄 알겠습니까? 그건 하나님 자체가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체가 달랐어요.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십자가 없이 다이렉트로 인간과 하나님과 연결짓는 하나님은 이건 가짜 하나님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생각한 하나님이에요. 욥도 전에 있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인 줄 알고 납득할 수 없는 고난에 대해서 납득이 안 되니까 설명도 안 되는 거예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왜 고난받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이렇게 말하면 나는 누구를 때린 적 없다고 하지만 맞아 죽으라고 기도한 적은 있잖아요. 저런 인간이 왜 살아있나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건 살인죄인데요. 형제를 미워하는 게 살인죄예요. ‘나는 마음이 점잖아서 남에게 그런 무서운 생각 안 한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그런 무서운 생각 안 드는데 내 자식 건들어 보세요. 갑자기 없던 무서운 생각 듭니다. ‘내 외손자를 누가 건드려. 내 자식을 누가 욕해. 내가 가만 안 있겠어’라고 하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 건드리면 성질 안 낸다고 생각하지만 소중한 것, 소중하게 여긴 것들을 건들어버리면 이건 인간은 참을 수 없습니다. 건드리면 인간은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속에 있는 죄들이 나오게 되어있어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점잖게 이야기하니까 하시는 말씀이 “입으로 들어가는 게 더러운 것이 아니다.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 더럽다. 네 속에서 나온 것이 더럽다”라고 하십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술을 먹으면 괴물 되거든요. 남자든 여자든 괴물 되거든요. 질문 들어갑니다. 술을 먹은 그 순간만 괴물입니까? 술을 안 먹을 때도 괴물입니까? 지금 이건 욥에게 이 질문을 해야 해요. 욥이 고통당하기 전에 자기는 멀쩡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게 욥이 생각한 하나님, 욥이 생각한 친구들 전부 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자기만 쳐다본 거예요.

자기만 멀쩡하니까 나 멀쩡한 데서 아는 하나님도 멀쩡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이 이성 밖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욥은 생각도 못 한 거예요. 그저 하나님은 정당하고 하나님은 옳게 행동한다는 그것뿐이고 그건 욥의 친구와 욥과 공통점이에요. 신약적 입장에서 욥이 가장 무시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게 단선이 아니고 복선이라는 겁니다. “욥아 너는 어떻게 똑바로 행동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욥이 답변하지만 “욥아 너 어디에 미쳐있었어?”라고 물으면 욥은 답변을 못 해요.

“미쳤다니. 나 같은 멀쩡한 사람이 미쳤다니. 나는 정신 온전해. 난 안 미치고 싶어”라고 하니까 하나님 말이 욥이 안 미친 것이 문제라는 거예요. 성령의 취객이 되고 성령에 미쳐버려야 해요. 왜냐 하면 내 행동에 대해서 결과는 주님이 판단하지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되거든요. 나는 내 행동을 판단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하나 행동해 놓고 그 판정을 누가 내리냐 하면 본인이 내려놓고 오늘도 바르게 살았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선악 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선악과를 따먹은 티를 톡톡히 내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선악과 따먹은 사람 못 들어가요. 천국은 생명 나무를 먹어야 갈 수 있지 선악 지식을 그대로 옳은 원칙이라고 유지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바르게 살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선과 악 자체가 바른 게 아니에요. 그 자체가 죄가 되고 악이 되는 거예요. 선과 악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닦달 냈습니까? 선과 악으로 바르게 하라고. 네가 행동 똑바로 안 하면 하나님께 영광 안 된다고 얼마나 우리가 닦달 냈던가요. 동화를 보면 인간의 복수심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겁니다. 지금 욥은 하나님에 대한 이유 없는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의 정답은 이겁니다. “네가 고통에 취하면 안 되느냐? 네가 술에 취하듯이 고통에 취하면 안 되느냐?” 물론 신약이 아니니 성령에 취하지 않아요.

하지만 주님이 주신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고통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 너무나 심한 고통. 발바닥부터 머리까지 한순간도 일 초도 쉬지 않고 누르는 그 고통. 그 고통에 취해버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걸 제가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어 볼게요. 성도란 하나님이 쥐어패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냥 뺨을 때리는 거예요. 지금 욥의 친구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패는데 욥이 뭔가 나쁜 짓을 해서 팬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아니고 욥의 역할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팰 때 때릴 때 그 때리는 자체에 취해버리라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거죠. 마치 주님이 쓴잔 마시고 비틀거리신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바로 하나님의 저주에 취해버리는 일을 예수님께서는 온몸으로 보여준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패면 저 못 견뎌요. 도망가기 바빠요”라고 하지만 여러분 인생 사는 것이 고역입니다.

쾌락도 고통이에요. 여러분들이 만약에 술 안 먹지만 술 마신다고 치면 술 마셔도 그다음에는 더 많은 술을 마셔야 전에 마셨던 쾌락이 유지가 돼요. 여러분들이 기도를 2시간 해보세요. 다음에 3시간 안 하면 기도한 것도 아니에요. 그다음은 4시간 해야 해요. 마귀에게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다음에는 5시간 해요. 헌금에 십일조 더하기 10% 하면 그다음은 십일조 더하기 20% 해야 해요.

이미 인간은 주님께서 미치게 하기 전에 악마에게 이미 미치고 있고 자기 의에 미치고 있던 거예요. 인간은. 자기는 멀쩡하다고 우기는데 멀쩡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잘남에 미쳐버린 거예요. 욥의 친구도 그렇고 욥도 마찬가지예요. 구약이니까. 자꾸 정신 차리고 신학 체제 갖추고 어떤 신학 교수는 자기가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라고 하고. 신자 같으면 신학 교수하겠어요?

신자 아니니까 교수하는 거예요. 개척교회 하면 되지 교수를 왜 하겠습니까. 자기 하는 일로 자기 밥벌이하려는 그 자체가 자기가 안 죽으려고 미치는 거예요. 주님은 고통당하라고 하는 것은 죽으라고 하는 건데. 사람은 안 죽으라고 미치고. 주님은 죽으라고 미치게 하고. 안 죽으려고 하니까 계속 패는 거예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듭니다. 힘드니까 마귀가 주는 방식이 뭐냐 하면 정신 바짝 차리기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너를 팰 때 그 패는 것에 도취 되어 버리라는 거죠. “주여, 때려주옵소서”라고. 그러나 사람은 마귀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복수심으로 발생 됩니다.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라는 동화가 있거든요. 어릴 때 아주 재미나게 봤는데 엄마 염소가 바깥에 외출하면서 염소 새끼들에게 당부했어요. “너희들이 늑대가 올 때 조심해라. 엄마 목소리 아니거든 문 열어주지 마라. 엄마 손인지 만져 보고 아니거든 문 열어주지 마라”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엄마 간 틈을 노리고 있다가 늑대가 갔어요. 그리고 목소리를 엄마처럼 변조했어요. 그래서 염소 새끼들이 열어주려고 하니까 다른 연장자 되는 염소가 손에 털을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 또 손에 밀가루 묻혀서 엄마 손처럼 만들어서 보여주니까 문 열어 줘서 염소 새끼들을 다 잡아먹었거든요. 이게 동화의 끝이 아닙니다.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다 잡아먹고 배불러서 누워있는데 엄마가 왔어요. 이건 정말 19금 동화인 것 같아요.

엄마 염소가 새끼들 들어있는 늑대의 배를 엽기적으로 갈라요. 가르고 염소 새끼들 다 끄집어내고 그다음에 빈 늑대 배속에 돌멩이를 가져다가 채워서 늑대가 무거워서 물에 빠져 죽었다는 동화예요. 아주 잔인하죠. 원래 백설 공주도 원작은 잔인한데 내용을 바꿔놓아서 아이들이 보는데요. 이게 뭐냐 하면 내 자식 건드리고 내 것 건드리면 하나님이라도 죽여 버린다는 인간의 악마적 본성을 그대로 동화라고 묘사한 거예요.

이 땅에서 우리의 육이 있는 한, 평생 갑니다. 연세 많아도 소용없어요. 평생 가요.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것은 평생 가는 거예요. 구약이라는 것은 우리가 육이 있는 한 없어지지 않아요. 우리 몸이 구약적 몸이에요. ‘하나님, 이 정도로 충성을 다했으면 복을 줘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따지기를 원하는 요소가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죠. 그건 우리가 악마적 속성에서 정신 바짝 차리고 살기 때문에 문제예요.

그러나 신약은 “정신 차리지 마라. 네 정신 차려 봐야 마귀의 정신 차리기밖에 안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냥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도취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본인이 이렇다 저렇다 판정 내리지 마세요.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판정 내리지 마세요.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뭘 안다고 판정내립니까? 하나의 변수가 수천 수백 개의 변수로 주어졌는데 판정내리면 안 되거든요.

코로나 환자 31번이 돌아다니는 것을 아무리 해도 몰라요. 31번 환자. 요새는 인간이 숫자 헤아림으로 다 해버려요. 19번, 31번, 여러분은 몇 번이에요? 54번, 62번, 그 사람이 어디 가서 뭘 하든지 그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서 어떤 인간도 그 사람이 나쁜 짓해서 코로나 걸린다는 판정을 다른 사람이 함부로 내리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죄인인데 포행자 거든요. 율법대로 산다고요?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을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들어 버렸는데요? 그래도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행함말고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 있었던 사랑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은혜받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은혜를 은혜 되게하기 위해서 우리를 철저한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시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가 죄인으로 살면 모든 게 감사하고 모든 게 고마울 뿐이지 나 건드리면 죽여 버린다는 그런 복수심은 우리가 너무 우리 속에 있는 마귀의 속성을 무시해서 그렇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욥이 고난받을 때 욥은 아직 구약적 사람이라서 성경 내용에 보면 “하나님 저를 죽여주세요”라고 하죠. 이게 믿음이 아니에요. 죽여달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같잖죠. “죽이든 살리든 내 맘대로 하지 네가 죽여 달라할 권한도 없다”라고 하십니다. 그저 하나님이 고통 주시면 여러분들이 인생 사는 것이 힘들면, 요즘 얼마나 힘들고 마스크 쓰려니 숨도 막히고, 힘들면 그 힘든 자체를 즐기세요.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 생각해서 그것에 도취 되고 내 생각은 거둡시다. 내 생각은 삭제시키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우리가 그동안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이제 바닥부터 새로 시작하게 해주셔서 잃어버린 첫사랑을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죄인 임에도 불구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창세 전의 사랑만 증거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