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한 하나님
2020년 2월 16일 본문 말씀: 욥기 6:8-13
(6:8)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6:9)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6:10)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6:11)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6:12)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6:13)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누구에게 반문한다는 것은 자기 내부에 들어있는 생각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중입니다. 즉 “너희들 보이에 이러이러한 생각들로 그동안 의기투합하고 서로 생각이 통한다고 생각했지 그지?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런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버릴거야. 이런저런 생각들로 장착했지만 내게 주어진 상황을 해결할 대책이 되지 못했어”라고 말하는 겁니다.
동시에 욥은 나름대로 자기 마음 정리에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멸하시려고 하는 것, 제가 잘 압니다. 예, 제가 각오하겠습니다. 죽으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욥이 마음을 정하면서 나름대로 지금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고통은 여전합니다.
욥은 이렇게 ‘무정한 고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자신 내부를 생중계합니다. 그러나 실은 욥이 마음에서 끄집어내어놓은 모든 것은 그동안 욥을 자신만만하게 스스로를 의인으로 장부하게 만든 농축된 죄들이었습니다. 과거 욥이 자신이 알던 그 죄의 기준으로서는 전혀 죄가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프게 하셔서 “아야!‘라고 비명 지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만 지금껏 본인이 알아왔던 기준에 준한 죄라면 욥은 여기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하나님의 건드림‘의 목적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반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접선할 수 있는 방도는 전혀 없습니다.
아프든지 말든지 하나님 쪽에서 먼저 건드려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고통이 되었던 아니면 멀쩡하게 사적인 일상생활을 유지하든 상관없이 이 하나님의 건드려주심에 대해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인간 쪽에서 의도를 가지고 시도한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그 어떤 흔적같은 것으로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분명 남들이나 겉으로 보기에 스스로 노력으로 자기 인생을 살지만 한결 같이 느끼는 점은 결코 내 뜻대로 사태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항상 명확해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쉬지 않고 기대를 갖고 목표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기대와 목표가 인간들에게 올무입니다. 사기를 당하게 합니다.
자기를 좋게 할 수 있는 권한이 인간에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목표를 갖고 그 목표달성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생활패턴으로 인해 놓치고 잃어버리는 것이 있음을 감지 못합니다. 스스로 설정한 목표로 인해 시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상 전부를 얻겠다고 설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만족스러운 자아상을 구축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이런 희망이 죄에 속게 합니다. 나를 완전케 하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가 못됩니다. 욥이 내놓은 각가지 제안들, 자신이 처한 곤궁에서 스스로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안들을 통해서 그동안 자신이 평소에 어떤 식으로 사전에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려고 했는지 그 아이디어들이 다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삶의 원칙들을 수립하는데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음으로 여겨 이득을 챙기려고 합니다. 자기 보호 본능이지요. 그렇게 보호하는 것을 사람들은 ‘선(善)’이라고 여깁니다. 이로서 인간은 선과 악을 판단내립니다. 고통받은 나 자신의 형편을 선이라고 여길 그 어떤 위인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욥은 자꾸만 옳다고 여겨지는 그동안의 원칙들을 계속 자기 입을 통해서 뽑아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는 정도까지 양보에 양보를 해 줄 의사가 있다는 겁니다. 자기 쪽에서 이렇게 나온다면 친히 고통을 내리시는 주님께서 무슨 반응이 있을 법도 하는데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 중에 고통만 가중시키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죽이시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무정하실까요? 아무런 감정도 보이시지 않으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사가 딴 데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 욥이 생각한 방식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신약에 와서 이 사실이 밝혀집니다. 세례 요한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요한복음 1:23에 보면,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마이크라고 비유해 봅시다. 그렇게 되면 마이크의 고유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마이크를 “탁탁” 치면 들리는 소리 말입니다. 또한 마이크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가 또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소리’와 ‘마이크’를 분리해 놓고서는 ‘소리’ 위주로 재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세례요한의 주장입니다. 욥이 신음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이는 ‘마이크 소리’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가 ‘마이크의 소리’로 변할 날이 옵니다. ‘마이크 속’에 들어계신 분을 알리기 위해 욥은 신음소리를 낼 수밖에 자는 다루어지는 겁니다.
신약 요한계시록 3:2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의 일곱 모두가 다 망한 교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망해버린 교회를 통해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는 소리가 들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구원되는 겁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성도의 자세는 자기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희망과 목표와 기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소원을 들어주시는 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찾을 때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5:3-5에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처지를 비관해서 통곡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의 관심사는 현 세계가 어떻게 흘러가는데 그 동력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서 웁니다. 자기 구원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 자리를 제대로 비우지 못해서 웁니다. 세상은 결코 인간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의 인간은 마치 검푸른 저주의 바다를 향해 다른 대안이 없이 배을 띄우는 진수식과 같습니다.
어떻게 살아도 저주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마저 주님께서 기획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대와 목표는 세상 유혹에 사기당하는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에게는 소용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18강-욥기 6장 8~13절(무정한 하나님) 20200216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6장 8~13절입니다. 구약성경 766페이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관대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관대 오히려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지혜가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자꾸 묻는 식으로 “~아니겠느냐”라고 합니다. 딱딱 끊어지지 않고 “~아니겠는가, ~하겠는가”라고 상대방에게 묻는 식으로 하는 이 모습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인데 현재 나의 처지와 어울리지 않고 같이 포섭이 불가능한 거, 그래서 쓰레기 분리수거 해서 바깥에 내놓듯이 그전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나에게 담아두기가 버거워서 하나둘씩 꺼내놓는 방식입니다.
“너희들이 생각하기는 내 안에 이런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지요. “아니거든.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 이것들 바깥에 끄집어 내놓거든”이라고 하면서 자꾸 묻는 거예요. “친구들아 너희들은 나와 이런저런 공통점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공통점 한번 꺼내봐? 꺼내 볼까? 이런 것들이 너희들 공통점이라고 여겼지? 나 지금은 아니거든”이라고 하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계시를 전달하는데 제대로 전달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욥을 구원하시는 과정 속에서 죄를 농축시킵니다. 죄를 농축시켜서 그 농축된 죄가 과거에 자아를 형성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그런 것들이 구성되면서 나는 이렇다고 여겼던 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찾아오심과 개입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런 것들을 갖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였어?’라고 하면서 그걸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학식이 이 정도고 믿음이 이 정도고 나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이 정도였어. 이건 죄일 수가 없어. 이건 정말 훌륭한 일이야’라고 하다가 ‘훌륭한 일이겠느냐?’라고 묻는 물음으로 끄집어내는 것은 나에게 건전하다고 여겼던 것이 죄로 드러나는 응축과정을 지금 욥은 생중계로 보여줍니다. 생중계로. 욥에서 타인에게 묻는 식으로 한다는 것은 정답을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직까지 나는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무슨 연유로 당하는지, 그 정답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이걸 현대식으로 바꾸면 내가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그 분명한 정답에 대해서 나는 확답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정답을 찾는 욥의 태도가 잘못이에요. 왜냐 하면 사람은 어떤 정답을 알게 되면 그 정답 가지고 자기 손으로 꾸려나가 보려고 합니다. ‘아, 이게 정답이지. 그다음 아이 키울 때 이렇게 해야지’라는 식으로 이 정답과 위배 되지 않는 방향으로 내가 인생을 정답대로 요새 말로 복음대로, 또는 주의 뜻대로 말씀대로 제대로 한번 살아봐야지 하는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기를 당하는 이유가 기대와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기대와 목표가 없으면 사기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만있으면 친구가 술 한잔 먹자고 해서 건드려 보거든요. 건드리면 나는 현재 어떤 기대와 목표가 없는데 친구 쪽에서 어떤 제안을 하게 되면 ‘한번 그렇게 해봐?’라는 새로운 기대와 목표로 귀가 솔깃해지거든요.
교인들이 목사에게 사기당하는 이유가 구원에 대해서 목표와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 안 받겠다고 버티면 아무 일 없을 것 가지고 ‘아이고, 천국 한번 가봐?’라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미 낚이신 겁니다. 낚인 거예요. “당신 이렇게 하면 천국 갑니다”라고 하면 벌써 그 말 던지는 것조차 그다음부터는 ‘그러면 천국을 위해서 내가 준비할 것이 뭐가 있느냐?’라고 되는 겁니다. 이미 그건 사기에 낚인 거예요.
오히려 욥은 지금 반대예요. 낚인 것이 아니고 낚이기는커녕 어떤 목표와 기대는커녕 오히려 후벼 파고 있습니다. 건전하다고 여기는 것, 이 정도 하면 나는 나답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의 손길이 와서 하나둘 다 끄집어내요. 다 끄집어 내버리면 결국 자기에게는 남는 것이 없고 생중계 과정 속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는데 “하나님의 뜻은 나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9절에 보면 “이는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라고 나옵니다.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생중계하면서 ‘주님, 제가 주님 뜻 아는데 나를 없애려고 하시는 거죠? 내가 알아챘죠?’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말씀은 10절에 보면 “내가 도리어 위로를 받는데 그건 고통 가운데에서”가 아니라 고통 앞에 뭐가 나와요. “무정한 고통” 이 무정하다는 말이 뭐냐 하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어떤 냉혹하고 냉철한 차가운 상대를 향해서 애걸복걸하는 것처럼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요. 손톱도 안 들어간다는 말이 있죠.
손톱 끝도 안 들어가요.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자꾸 파내기만 하고 일체 그런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이 왜 그런 태도로 나서느냐 하면 그런 태도를 하나님이 보여야 인간은 또는 성도는 그때마다 어줍잖게 결론을 내려요. ‘하나님이 저를 죽이려고 작정을 하셨군요. 좋습니다. 죽지요’라고 자기 나름대로 어떤 결론 같은 것을 내립니다.
촌으로 와서 아이 두 명 낳고 이제 촌에 취직할 곳도 없고 희망도 안 보여서 서울로 가려고 맘을 먹는데 새로운 조건들이 들어오죠. 예를 들면 충남 청양군은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첫째 아이 백만 원, 둘째 아이 이백만 원, 셋째 아이 오백만 원, 넷째 아이 천만 원, 다섯째 이상은 이천만 원의 출산 장려금을 지급하고 셋째 이후 영유아 양육비 십만 원과 출산 축하금 오십만 원을 지급하고 출산용품도 지원한다는 겁니다.
이것 듣고 난 이후에 셋째부터 오백만 원입니다. 셋째로 마감할 거예요? 넷째가 천만 원인데? 넷째로 멈출 거예요? 다섯째가 이천만 원인데? 충남 청양군입니다. 저는 이런 걸 보면서 지방 의회 다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합니다. 투표로 하는 거 다 없애고, 지방 의회 다 없애고 무조건 나라에서 시장이고 뭐고 지명해서 공무원 해야한다는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가 주민들에게 부질없는 허구적인 마음을 부추기는 허풍을 늘어놓는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쓸데없는 짓거리.
돈에 유혹받아서 아기를 낳는다는 말이 얼마나 세속적입니까. 이처럼 바깥세상이라 하는 것은 기대하지 않아도 자꾸 어떤 기대감이 나오고 유혹받지 않더라도 자꾸 유혹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욥은 자신에게는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너에게 그것이 없을 수 있겠어?”라고 욥을 유혹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예 파내버리는 겁니다.
파내버리니까 오늘 본문에서 뭐냐 하면 ‘하나님은 너무 감정이 없고 정말 감정이 메마른 분입니다’라고 나온 거예요. 세상에 자기 백성이 이렇게 아파하고 온몸이 아프고 암초기인데 이상하게 온몸이 다 아프고 발바닥까지 다 아파요.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뭐 기도라도 할까요? 기도해도 소용없어요. 무정한 분이니까. 너무나 무정하고 냉혹한 분이니까요. 너무 쿨하신 분이에요. 완전히 돌아서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구분합시다. 마이크 소리와 마이크의 소리를 구분해야 해요. 그냥 지직거리는 것이 마이크 소리라면 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을 마이크의 소리라고 할 수 있어요. 세례요한과 오늘 본문 욥을 비교해 봅시다. 욥은 건드리니까 자꾸 자기 소리가 한없이 끝없이 계속 나와요. “하나님은 무정한 분이고 나를 죽이려고 작정하신 분이니 죽지 뭐. 죽지. 죽을게요”라고 일시적으로 자기 나름대로 결론을 맺지만, 그 결론이 아무짝도 소용이 없어요. 결론이.
성도가 인생을 너무 힘들게 살 때 늘 체험하는 체험이 그거잖아요. 너무 힘들고 대책이 없고 탈출구가 없을 때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이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죠? 내가 알아차렸죠? 그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순응하겠습니다’라는 나름 공손의 티를 아무리 갖추어도 그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 하면 그것이 생중계되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죄는 죄대로 파야 해요.
욥은 아직도 세례요한을 못 따라갔어요. 세례요한은 ‘내 인생 왜 이러지’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냥 자기 톡톡거리는 자기 소리는 없어요. 자기를 통해서 들어오는 주님의 소리만 마이크의 소리만 내보낼 뿐이지 나의 소리는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신음하는 소리도 안 돼요. 그냥 아프면 아픈 소리를 내 소리라고 여기지 말고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게 주님의 몸이니까 내 소리라고 하지 말고 주님의 신음하는 소리, 고난의 소리, 십자가 외침의 소리로 그렇게 받아들여야 해요. 마이크 소리가 아니고 마이크의 소리.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주님의 소리를 바깥으로 내질러야 하는 겁니다.
욥은 아직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욥은 뭔가 큰 변화를 겪어야 하고 자아 변화가 있어야 해요. 어떤 사람이 오랜만에 자기 고등학교 친구 만나서 자랑을 하는데 이렇게 자랑합니다. “너의 집에 금궤 있어? 우리 집에 금궤 있어. 너는 연로하신 부모님 효도 관광으로 크루즈 여행시켜드려 봤어? 나는 지금 우리 부모님 크루즈 여행시켜드려서 지금 요코하마에 한 달간 정박해 있어. 나 이 정도로 효자야”라고 자랑합니다. 지금 자기 아버지 신종코로나 걸려서 고립되어 있는데 그건 자랑이 될 수 없죠.
인간이 자랑이라고 분류해서 내놓고 나는 이건 약점이라고 내놓고 이건 톡톡거리는 자기 소리예요. 이건 자기 자랑밖에 되질 않습니다. 바로 이 과정을 우리 대신 욥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욥은 몸부림치고 있어요. 뭐라도 어떤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침묵이라. 하나님이 마스크 정도가 아니고 아예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 같아요. 하나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고통만 줘요. 고통만.
이걸 어떻게 대처해보려고 이런 아부, 저런 아부하는 거 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무정한 하나님, 무정하게 고통 주시는 하나님,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경험했습니다. “나의 아버지, 왜 응답이 없습니까.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추락하는 과정, 하나님의 형상이시나 십자가까지 추락하셔야 해요. 이미 정해진 코스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몰락해야 해요. 추락보다 더 심한 것이 몰락이잖아요.
몰락해서 십자가라는 그 자리가 유일하게 하나님 만남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욥은 이렇게 고통스럽지만 신약에서는 어떤 해결책이 있는가. 설교에서 해결책 없으면 안 되겠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라고 되어 있어요. 우리가 워낙 자기가 하나님에게 하소연하는 이야기로 24시간을 마냥 채우니까 두드리는 주님의 소리가 들릴 수가 없죠.
‘나에게 왜 그래요? 하나님, 저에게 왜 그러십니까’라고 자꾸 내 소리와 연루된 반응을 들으려고 나부터 먼저 질문 던지고 그에 대한 답변만 기다리니까 직접 주께서 두드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 거예요. 내가 살고자 하는 내 뜻에 내가 구축한 원칙과 질서의 법칙에 너무 몰입했어요. ‘나는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는 양보 없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살 거예요. 내가 사는 이 생활법칙에 하자 없습니다’라고 자꾸 그 노선을 유지하다 보니까 정작 예외로 두드리는 그 소리가 안 들리는 거예요.
‘나는 반듯합니다. 나는 문제 없습니다. 내가 봐도 나는 하자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나로하여금 이렇게 몰락시키고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라고 하는 거예요. 지금 주님이 두드리고 있는데.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는 전부 망한 교회예요. 망한 교회에게 들으라는 겁니다. 네가 망해야 들리는 소리라는 겁니다. 두드리는 소리가.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여기 사도 요한이 나오는데 그 사람이 웁니다. 자기 때문에 자기가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니에요.
이게 오늘 설교의 마지막 핵심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은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5장 3절부터 보면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사도 요한의 관심사는 자기가 어떻게 덜 고통 하느냐가 아니고, 귀양살이에서 어떻게 벗어나느냐, 내 팔자 왜 이러냐가 아닙니다. 이 진리가 무엇인지, 이 진리가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는지, 어떻게 해석하면 하나로 다 꿰이는지, 그리고 세상은 진리대로 움직이는데 이 세상 움직임을 어떻게 한꺼번에 알 수 있을까, 책의 내용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가 궁금해서 크게 울었더니만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라고 나왔어요.
사도 요한이 쓴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면 누가 요한계시록을 볼 자세가 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도 요한과 똑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나를 힘들게 했다, 아프게 했다, 두고 봐라’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느냐는 다른 어떤 원인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바로 신약시대에 예수그리스도가 하실 일을 적어놓은 이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보셔야 우리가 뭐가 되느냐 하면 말씀의 사람이 돼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말씀의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 안에는 사랑과 생명의 법이 있어요. 그런데 말씀의 사람이 되지 않고 바깥에 나와버리면 율법으로 계속 공격 타켓이 되어버려요. 아무리 잘해도 저주가 계속 주어져 버려요. 그래서는 안 돼. 더 해야 해. 더. 계속 내가 나를 분석하고 조사하고 탐색하고 쫓기게 된다고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라고 나오는 순간 그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저주하고 징벌하는 하나의 내가 나를 공격하는 타켓이 되어버린다고요. 자기면역체제가 완전히 무너져버려요. 관심사가 내가 아니고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말씀은 어떻게 진행되는지와 관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 사귈 때도 좀 자기 수준 알고 사람 사귀어야 하거든요. 백화점 가서 물건 사는데 꼭 갈 때는 돈 맞춰서 사려고 하죠. 그런데 그 옆에 물건 보게 되면 빚내서라도 사고 싶은 물건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에요. 물론 그래야 또 장사가 되니까 이해는 되는데 사람도 물품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을 제대로 알고 사귀어야 하는 겁니다. 세상을 알고 사귀어야 해요.
세상이 뭔지 알려드립니다. 세상은 뭐냐. 여러분들에게 너무 참혹하게 들리더라도 할 수 없어요. 이야기해야 하겠어요. 세상은 뭐냐. 아이가 태어났지요? 이건 배 진수식 하는 거예요. 태어나게 되면 바다가 무슨 바다냐 하면 저주의 검은 잉크 물로 출렁거리는 바다예요. 전부 다 저주밖에 없어요.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은 그 아이라는 배가 만들어져서 그 망망한 저주의 바다, 파도가 출렁거리는 바다로 띄워 보내는 그게 세상살이고 인생살이입니다. 끝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 육신의 몸을 가지고 세상에서 그렇게 일평생을 보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막상 인간은 이 사실을 모르고 이 세상에 살다 보니까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는 거예요. 물론 다른 사람은 고생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서 물어보세요. 본인이 고생 안 하는지. 세상에 어떤 인간도 나 고생 안 한다는 사람 없어요. 나름대로 얼마나 고생하는지 몰라요.
심지어 삼성그룹의 이재용도 지금 얼마나 고생이 되었으면 프로포폴 맞는다고 그러고 있어요. 수면을 위한 마약까지 정기적으로 맞아야 할 정도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그런 회사는 줘도 안 갖습니다. 줄 사람도 없지만. 세상에 고생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철없는 사람은 경우 수가 두세 가지밖에 없어요. 먹고 싶다. 먹는다. 그것밖에 없어요. 공부하게 되면 낫겠지 하는 데 아니에요. 공부하게 되면 고려할 변수나 경우 수가 더 많아져서 골치 더 아파요. 공부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서에 나와요.
책을 더 많이 본다고 해서 더 편하게 사는 그런 거 없습니다. 돈을 더 가진다고 행복한 거 없어요. 전도서에 나와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왜냐 하면 이 바다가 전부 다 시커멓다고요. 저주로 가득 찼어요. 중요한 것은 이게 왜 저주 인가를 세례요한처럼 주께서 하신 모든 해답을 진리를 우리를 통해서 이렇게 발산하면 되는 겁니다. 더는 욕심 내지 맙시다. 그래야 사기를 안 당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이 세상과 강제 결별시키지 아니하면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이 어떤 낙이 있고 희망이 있는 줄 알고 나의 목표와 의미가 이 세상에 박혀 있는 줄 알고 꽉 붙잡고 새로운 시도를 또 해봅니다. 저희가 미리 알게 하옵소서. 말씀이 전하는 그 모든 걸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통과해야 할 지역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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