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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인생(욥6;1-7) 200209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2. 10. 07:03
2020-02-09 14:56:37조회 : 31         
   억울한 인생 200209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억을한 인생(욥기 6:1-7)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qFKuzM7ZxpA, Hit:0
 이근호20-02-09 15:48 

억울한 인생


2020년 2월 9일                  본문 말씀: 욥기 6:1-7

(6:1)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6:2) 나의 분한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6: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6: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6:6)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6:7)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고생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 더 마음에 심란한 것은 고통의 원인과 이유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나라는 인생이 이 정도로 힘들어야 하는 납득될 만한 원인을 찾지를 못하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선과 악에 대한 감각 때문에 힘들 때면 자신이 행한 일 중에서 보다 착하고 선하다고 여긴 일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하지만 자기 착함에 미련을 두면 둘수록 오히려 고통은 가중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힘든 인생을 겪어야 인생이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세월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겁니다. 지금 욥은 욥의 친구들하고 상대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함께 하나님도 논하고 막힘없이 생각이 통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고난을 주니 졸지에 친구 네 명의 사이에 4가 아니라 3과 1로 분리되어 버렸습니다. 1이 된 욥은 3이 된 친구와 상대로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억울하다는 의식을 갖는 것은, 자기 인생을 독자적으로 구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책임지고 꾸려나간다”는 겁니다.

이렇게 개별성을 주장하게 되면,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그 일에 대해서 자기로서는 ‘책임 없다’고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억울하게 죽으신 일에 대해서도 본인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때는 자신이 아직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기 때문이랍니다.

과연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아담의 죄로부터 면제될 수 있을까요? 선악과 따먹은 그 현장에 없다고 해서 과연 아담의 후손은 영생을 가져야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장보존’을 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고 식구라 할지라도 살인사건 현장을 훼손할 수는 없습니다. 경찰관들이 가족들이 시신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말립니다. 현장이 보존되어야 범인을 잡을 수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 인간이 이처럼 전반적으로 고생시킨 범인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 범인의 사람이 되었고 생각하는 바가 그 범인과 한 통속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대표자를 내세웁니다. 장차 천국 입성에 성공하는 대표자말입니다. 욥이 자기 처지를 비관하고 불평하는데 있어 문제점은 바로 ‘홀로’ 고난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욥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자신이 최종 수호자로 자처하고 나섭니다. 욥이 이런 형편에서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이 죽는 겁니다. 즉 자신의 몸, 곧 육을 스스로 포기할테니 하나님에 의해서 데려가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욥은 자신의 마음가짐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기존의 욥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달라져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신의 허물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는 자신을 최종 마지노선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 뒤에 메시야가 있음을 아직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홀로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은 더 억울하신 분이 계십니다.

곧 예수님이십니다. 죄지은 자가 죄값을 치러는 것은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죄없으신 분이 죄있는 자의 운명에 합세해서 그들이 받을 저주를 홀로 받으신다는 것은 참 억울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대표자’는 그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현장 보존 차원에서 인간을 다루십니다.

아담 이후에 아담 후손들을 통해서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의도가 계속 현실적으로 살아있게 하십니다. 즉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게 책임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하나님에게는 불충한 행위가 되는지 모르지만 이미 독립적으로 살겠다는 야심가로 변한 인간에게는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태도는 모순이 아니라고 여기는 겁니다.

아담, 그리고 그 후손들은 자아를 지탱하는 최종 바닥으로 자신의 선함을 주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홀로 사는 게 아닙니다. ‘나의 바닥, 나의 바탕’ 자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다니엘 3:20-23에 보면,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왕의 명령이 엄하고 풀무가 심히 뜨거우므로 불꽃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붙든 사람을 태워 죽였고 이 세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된 채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떨어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다니엘 세 친구는 자신의 독립적 가치로서 자기를 받치지 않습니다. 이는 자신의 자신됨이 다른 근거와 바탕에서 나옴을 말하는 겁니다. 즉 자신이 자기 인생을 ‘나답게’ 살아갈 의사가 없음을 말하는 겁니다. 도대체 나 답다는 게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조차 낯설게 욥에게 일을 발생시키십니다.

새로운 인류상을 욥에게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 ‘새로운 인류상’이란 기존의 아담의 성품으로 자신 존재의 바탕으로 갖추는 것을 용납하시지 않는 겁니다. 새로운 대표자이신 예수님의 심정을 욥에게 집어넣으신 겁니다. 그것은 바로 개인적으로 따져서 자신이 고생해야 하는 이유가 아예 없게 하시는 겁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 속에서 자신의 바탕이 되시는 분과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마치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 바탕이 되시는 분이 신약 때에 예수님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의 성도는 새로운 바탕을 갖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6-7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처럼 아담에 뿌리를 내리다가 아담계열에서 뿌리채 뽑힌 자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을 두고서 너무 억울해하거나 서러워 말아야 합니다. 독자적으로, 독립적으로 나만의 인생을 살겠다는 그 심보 자체가 선악과 따먹은 심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박힐 때 합세한 그 심보입니다.

욥은 자아를 감아 둘러싼 아담의 속성을 뜯겨져 나가면서 많은 고통과 더불어 인생 실패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인생 베테랑이란 반복되는 실패를 즐기는 겁니다. 성공은 유혹이니까요. 세상 성공에 입맛 다시지 않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로운 뿌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2-09 20:14 
17강-욥기 6장 1~7절(억울한 인생) 20200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6장 1~7절입니다. 구약성경 766페이지입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분함을 달아 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런 것을 만지기도 내 마음이 싫어하나니 못된 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욥이 자기 자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욥이 억울하다는 이 고백은 오늘날 평소 일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고 마음속에 담아둔 속마음이 이 마음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는 것이 대게 억울하지 않습니까? 왜냐 하면 산다는 자체가 힘들기 때문에 그래요. 심지어 쉬는 것도 힘들어요. 크루즈여행하는 것도 힘들어요. 혹시 중국에 들르지 않을까 해서 힘들어요.

내가 한국 땅에 있다가 미국이나 유럽이나 베트남 어떤 다른 나라로 옮겨가도 힘들어요. 옮겨가는 과정부터 비행기 타고 하는 수속부터 힘들어요. 힘들다는 말은 억울하다는 겁니다. 내가 선악과 구경도 못했고 예수님 죽이는데 거기에 의기투합한 적도 없어요. 내가 저지른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처벌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되게 억울하지요. 억울하다는 말은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 인생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 그 이유를 모르니까 더욱더 억울해요. 이유를 모르니까. 그래서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자 예수님을 믿고자 해도 억울한 것은 억울한 거고 인생 힘든 것은 힘든 거고 그걸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이춘재라는 사람이 화성 연쇄살인 사건으로 복역하고 있는데 자기가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였다고 해서 이름은 밝히지 않은 윤씨라는 사람이 20년을 복역하고 있습니다. 대게 억울하겠죠.

만약에 무죄로 밝혀지면 나라 보상금이 17억 정도 된다고 합니다. 17억 가지고 늙어빠진 이 몸을 청춘으로 돌릴 수는 없고 억울하죠. 인간의 신세가 꼭 이 윤씨 같아요.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 모든 처벌은 우리가 다 받고 있고 이럴 때 뭔가 해답이라도 왜 그래야 하는지 그 해답에 대해서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욥을 택하사 인간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고 억울한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 상황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수사극 같은데 보면 살인사건 같은 게 일어나서 경찰들이 수사할 때 가족들이 뒤늦게 소식 듣고 와서 자기 식구 죽었다고 막 달려들죠. 그렇게 달려들 때 누가 말리느냐 하면 초짜 경찰관들이 말려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리잖아요. 가족이라고 해도. 자기 부모라도 그 살인 현장을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현장이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장보존.

그래서 욥기를 통해서 처음에 인간이 말썽을 일으키는 처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현장을 주님께서 욥 안에 보존시키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이 접근하게 할 수가 없어요.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욥에게 발산되는 그 낯선 고백들이 욥의 친구들과 욥과 거리를 떨어지게 만들죠. 창세기 3장에 아담에게 있었던 일을 사람들은 “그때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모르겠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다. 나와 무관하다. 그거 내 책임 아니다”라고 누구든지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미 그때 그 시절의 사건 현장은 사라졌으니까요.

그런데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현장이 보존되는 겁니다. 아담이 저지른 일이 아담의 후손들도 같이 거기에 마땅히 연루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같이 관계지어졌다는 겁니다. 왜? 아담과 한통속이니까. 아담과 한통속이에요. 아담은 아담이고 너는 너라는 이런 아담이라는 개체와 나라는 개체를 분리시키는 그것은 그동안 이 세상 신인 악마에 의해서 우리가 그렇게 곡해해 온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통해서 욥을 둘러싸고 있는 나는 개체이고 나는 개별성이니까 나 하는 행동에 대해서만 책임지지 내가 행동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내가 처벌받거나 내가 책임질 이유 없다는 자아성을 주님께서는 증발시켜 버립니다. 자기 속에 있던 나를 구성했던 것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부합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거덜 내는 거예요.

인간은 사는 게 의미가 아니고 사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목적은 처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예요. 처음에. 더 나아가서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그 점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밝혀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그동안 어설프게 걸치고 있는 나의 나다움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전부 다 걷어 내는 겁니다. 그 작업을 하는 거예요.

설교를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는 것이 힘들어요. 그래서 굉장히 억울한 느낌이 듭니다. 억울한 느낌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나는 하나의 독자적인 개체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에만 책임져야 하는데 나는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살 이유를 모르겠다. 그만큼 내가 나쁜 짓을 했다는 감이 오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러한 생각으로 덧입혀진 그 생각을 주께서는 하나둘 벗겨내고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게 되면 ‘아, 맞아. 예수님 죽이는 데 우리가 가담되어 있었구나. 우리 조상이 선악과 따먹을 때 나도 그 안에서 이미 따먹으라고 부추겼구나’라고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 하는 이야기에서 히브리서 7장 5절에 보면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 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대목이 굉장히 어려운 대목인데 이걸 어린아이에게는 안되고 어른들에게는 먹을 양식이라고 하면서 설명한 것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 안에 레위가 들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칠 때 이미 레위인이 십일조 드린 게 되어요. 아브라함의 자식의 자식의 자식이 레위 거든요. 계통이. 실 다발이 있으면 실을 하나씩 뽑아낸단 말이죠. 실의 원형은 있고 실이 한 가닥씩 뽑혀 나온 것이 열두지파가 되는 겁니다. 레위 지파도 그중 하나고.

아브라함이 원래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할 때 뒤에 후손 레위가 “나는 그 현장에 없었어요. 나에게 책임 묻지 마세요.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그걸 이렇게 조상이 하는 일속에 우리가 담겨 있도록 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분하고 억울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그게 오히려 복음으로 당연스럽게 여겨야 해요.

왜냐 하면 아담 하나가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후손들이 다 범죄자 취급을 받을 때 우리는 굉장히 억울함이 들지만 이미 결과적으로 말해서 성령이 와서 예수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아무런 한 것 없이 죄만 지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이유 때문에 졸지에 의가 된다는 이 혜택을 생각해 볼 때 ‘내가 아담 안에 있지 않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고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개인의 문제에 대해서 개인 문제로 여기고 다루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표자 중심으로 일해요.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아요. 이것은 아브라함 빼놓고 다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냐 착실하냐 훌륭하냐는 그런 것은 주님의 계획안에 아예 없어요. 개별자가 아니라 어디에 종속된 대표자를 통해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기쁜 소식 아닙니까? 이게 기쁜 소식이거든요. 내가 저지른 일을 내가 한 번 수습해 보세요. 언제 어느 세월에 다 수습해서 언제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완벽한 의인으로서 평가받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고 있을 수도 없고 그걸 기대하지도 마세요. 좀 뻔뻔스러워야 해요. 우리가. 예수님 덕분에 큰소리칠 때는 쳐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아담 때문에 일어난 상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벗겨낸다고 하는데 이 벗겨낸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죄가 아니라고 여긴 것이 라고 드러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겁니다. 문제는 앞서서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잔소리한다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욥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답답하죠. 왜냐하면 그야말로 요새 신약시대로 한다면 죽 은자가 감히 산 자에게 훈계하는 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죽은 자가 산 자에게 훈계하는 꼴.

지옥 가는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에게 훈계할 쨉이 됩니까? 목사는 복음을 모른다. 그런데 집사는 복음을 안다. 목사 지가 뭔데 집사에게 훈계합니까? 훈계받을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이렇게 하세요. “목사님, 불신자라면 제발 불신자답게 구세요. 자꾸 신자에게 훈계하지 말고. 당신은 교회만 믿잖아. 교회만. 교회부흥만 믿고 당신 입지만 생각하잖아. 당신은 복음을 가리고 예수님을 가리기 위해서 이 교회 당회장으로 세웠다”라고 그런 소리를 못 합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거든요. 교회 등록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성만찬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어요. 하늘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아요. 성령이 주는 화평과 평강의 완료 상태예요. 완료. 완료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 결과물에게 “여러분 구원받아 봅시다”라고 떼쓰고 애쓰고 몸부림치고 부르짖고 하는 그쪽이 훈계할 위치가 됩니까? 안되지요.

그러면 그 교회 다니지 말고 나와야 하냐고 하면 그 문제와는 또 달라요. 이게 뭐냐 하면 교회를 한번 다녀봐야 교회가 세상 압축판이고 교회 다니다 보면 내가 그동안 구원받으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교회 가보면 알아요. 일부러 그것 때문에 돈 주고 교회 갈 필요는 없지만.

툐요일 9시에 황금연못이라는 프로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나이 60세 이상의 노인들만 모여서 토크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어떤 사람은 80되고, 어떤 사람은 70, 어떤 사람은 60대 후반 된 사람들이 쭉 이야기하는데 자기는 자기가 평생동안 돈 벌어 줬기 때문에 아내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밥 달라고 말할 권한이 있다는 거예요. 나는 돈 벌어줬으니까 너는 밥해줄 책임 있다는 거예요.

제가 그 프로를 보면서 화가 나는 것은 제가 지금껏 살아 보니까 밥하는 분이 주로 아내잖아요. 그 밥에 맞는 입맛은 주로 누구냐 하면 아내가 혼자 자취할 때 자기 입맛에 맞는 것을 만들어요. 그러면 남편은 어떤 마음가짐이냐 하면 밥 달라고 하면 안 돼요. “혼자 자취하는데 밥 좀 얻어먹을 수 있어요?”라고 묻는 마음가짐으로 사셔야 가정이 편안합니다. 졸혼 당하지 않고 편안해요. 당신 혼자 자취하는데 혹시 반찬 남은 거 있거든 좀 줘. 그런 마음 자세여야 해요. 밥 달라고 삼식이처럼 가지 말고. 얻어먹는 식이 돼야 해요.

왜냐 하면 여자는 밥할 때 자기만 챙겨요. 아담의 후손이니까.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자기에게 맞는 밥을 하는데 자꾸 남자가 옆에서 밥 달라고 하니까 짜증 나는 거예요. 앞으로 결혼할 남자들 줄 긋고 주의 깊게 생각하세요. 항상 남에게 얻어먹는다는 마음가짐이 가정에 평화를 보장해 줍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거. 아무튼 이랬던 사람이 자기가 황금연못에 나와서 변했다는 거예요. 변용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당연히 돈 벌어줬으니까 밥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아내에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오히려 내가 밥을 얻어먹을 대상이 있다는 것으로 바뀔 때 이게 변용이거든요.

주님께서는 욥에게 다가가서 욥으로 하여금 바뀌게 하는 거예요. 욥을 변용시키는 거예요.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안 바뀌어요. 이걸 어렵게 설명하겠습니다. 욥이 1이라면 친구는 3이에요. 1과 3일 붙입니다. 붙여놓고 욥이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네 번째 친구가 등장합니다. 그러면 1과 3이 아니고 1과 1이 돼요. 여기서 욥은 내가 뭔가 잘못된 사고방식에 휩싸여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1과 1이 아니라 욥이 0 이 되고 1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1의 1 됨을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이 깎여 나가야 하고 없어질 때 비로소 내가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장차 오실 메시야와 함께 이 고난을 받는 겁니다. 나는 죄로 누적이 된 채 고난을 받지만 그래서 할 말이 많지만, 예수님은 죄도 없는 채 욥의 자리에 들어와서 내 자리에 들어와 버렸어요.

그런데 욥은 누구에게 닦달 내느냐 하면 상상하는 하나님에게 자꾸 닦달 내는 거예요. 상상한 하나님은 욥의 친구나 본인이 미리 공유한 하나님이에요. 같이 통한다고 했던 친구 사이일 때 아는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이제야 와서 자신에게 일어난 그 변화 변용으로 이해하면 옛날에 내가 건강할 때는 충분히 해명 가능하고 그 하나님이 납득이 되었는데 지금 욥의 친구들은 납득 된다고 우기지만 욥의 입장에서는 납득 되지 않는 새로운 하나님 상으로 지금 나도 달라지고 병행해서 하나님도 같이 병행해서 달라지는 겁니다.

이걸 더 어렵게 해서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죄를 증식을 따라서 추적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역사죠. 인간에게 죄를 발생시켜 놓고 발생시킨 죄의 경로를 추적해 들어가는 거예요. 추적해서 죄의 원인이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담에게 있었다는 거, 그리고 아담과 함께 그 현장에 있었던 악한 악마와 한통속이 되었던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밝혀내십니다.

욥은 그 십자가 노선을 형성하는 주님이 추적하면서 새롭게 생겨나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겁니다. 욥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하나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우리는 억울합니다. 사는 게 힘듭니다. 힘들고 아프고 억울하고 몸살 날 때 우리는 불평하지 않을 수 없죠. ‘왜 저를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라고. 하나님께서는 울산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좌로나 우로나 할 때 좌와 우를 가름하는 새로운 기준이 없는 데서 돌발적으로 생기죠. 돌발적으로 생긴 것이 뭐냐 하면 율법을 받아들이고 율법이 받게 된 나 자신의 자리가 좌나 우를 나누는 새로운 기준점으로 드러나요.

그 기준점은 욥과 똑같아요. ‘억울하다. 분하다. 내가 이 정도까지 고생할 정도로 나쁜 짓을 한 기억이 나질 않는데 왜 나는 사는 것이 힘드냐’라고 하며 어떤 예상된 삶을 그려봐도 그려 보았자 이미 시근이 나서 그려봤자 이 세상에는 어떤 답이 없다는 것을 미리 안다는 그 자체가 힘들어요. 세상은 어떤 보람이 있어야 하는데 ‘참, 베트남 놀러 가면 얼마나 좋겠나’라고 철없을 땐 그런 생각 하다가 나이 60세 되어서 여행 제법 다녀 본 사람에게는 베트남 간다는 생각만으로 ‘덥다. 너무 덥다’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살면서 자연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 중 하나가 눈 내리는 거예요. 이런 시가 있습니다. 눈 내리는 모습을 보고 이런 시를 지었는데 참 잘 지었어요.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라고 해놓고 ‘아무 의미도 없을 때까지’라고 마무리해요.

눈 내리는 거 가만히 지켜보세요. 처음에는 눈 온다면 기쁘죠. 또 오고 2시간째, 3시간째 오면 모든 대지를 덮어 버리죠. 눈 내리는 거 쳐다보고 있으면 나도 같이 내리는 거 같아요. 의미가 없어요. 이걸 오늘 설교에서 저는 인간에게 바닥이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이 고난을 주니까 작용 반작용의 물리적 법칙에 의해서 욥은 자동으로 반발력이 발생 되게 되어 있어요. 물리학에 보면 모든 작용하는 힘에는 반작용하는 힘이 같이 있다고 되어 있어요. 뉴턴의 제3 법칙인 작용 반작용의 법칙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뭔가 힘이 왔을 때 반발하겠다는 것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바닥으로 여기는 거예요. “더이상 오면 안 돼요. 스톱. 선 넘어오지 마세요. 이것부터는 내 영역이고 내 자리고 내 바운더리니까 들어오지 마세요. 여기까지는 내가 감당하지 당신이 간섭할 곳 아닙니다. 당신 손 뗄 자리입니다”라고 했을 때 여러분 다니엘 세친구 생각해 보세요.

다니엘 세친구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닥이 없었습니다. 제가 울산강의에서 첫 번째 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신앙이 없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신앙이 없더라. 바닥이 없어야 하는데 어느새 자아라는 바닥이 생겨서 강하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더 밀치면 더 무너뜨리면 저는 진짜 죽습니다. 저는 하나님 못 믿겠어요”라는 식으로 욥이 불평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겸손 하라고 자책하면서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여기에 6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라고 합니다. 상당히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죠. 계란 흰자위를 먹을 때 소금을 쳐서 먹은 모양이죠. 소금 안 친 흰자가 무슨 맛이 있겠느냐는 말은 몸이 너무 아프니까 입맛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모든 좋은 음식들이 못된 식물이라고 하는 것은 먹기 싫어하는 먹는 것조차도 거부하고싶은 음식물이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기가 불평하는 이유가 있답니다. 여기 5절에 보면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다시 말해서 자기가 지금 울고 싶고 아픈데, 아픈 이유를 몰라서 지금 미치겠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다음 시간에 하겠지만 욥기 9절에 보면 이게 죽고 싶다는 뜻이에요. 욥이 말하는 바닥은 뭐냐 하면 이미 내가 태어났잖아요. 이 몸둥이가 태어났잖아요.

왜 자기 몸을 괴롭히느냐는 겁니다. 이럴 것 같으면 저를 빨리 죽여 주옵소서. 암에 걸리든지 뭐 하든지 빨리 자기를 죽여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바닥이에요. 자기 체면이라는 바닥. 자기가 재료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계속 1로 버티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7절에 신약에 와서 이런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되어 있어요.

신약에서의 바닥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에 뿌리를 박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너무 수고하신 거예요. 아담에서 몽땅 뿌리 뽑히고 뿌리 뽑힌 그 뿌리를 예수님의 자기 피에 용서하는 피에 박아 넣는 겁니다. 아담에 뿌리 박힐 때는 자기 인간들은 개별자고 독자적 존재라는 거예요. 내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아담의 죄는 내가 편성 안 했고 예수님 십자가 사건 벌어질 때 나는 동의 안 했다고 우기는 거예요.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십자가 죽게 된 원인이고 아담이 선악과 따먹은 원인이에요.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신 인간의 근원이 뭐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에 뿌리를 박는 거예요. 이게. 그래서 제가 아침 설교에서 그렇게 말씀드린 거예요. 이게 해답이에요. 우리가 해답이에요. 나 구원받은 게 해답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복음에 뿌리가 박혀 있는 이 지경까지 오도록 주께서 하시는데 그 과정을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반발과 반항심이 나에게 삼겹살처럼 이렇게 겹겹이 쌓였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스스로 알아야 해요. 그러면 스스로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진정한 베테랑이 되는 겁니다. 베테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 실수를 즐길 수 있어야 해요. 베테랑은요 성공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성공은 흥치뿡입니다. 성공한들 뭐가 있겠어요. 실패를 반복하는 그 자체가 즐겁고 재미있을 때 그게 제대로 천사같이 사는 베테랑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목사님, 뭐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제가 뭐 실패한 거 없는데요”라고 하시면 결혼한 것도 실패예요. 이 남자 이 여자 만난 것도 실패고,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은 실패가 뭐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 그쪽으로 몰아세운 겁니다. 그리고 그 실패 중에 가장 실패는 내가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아담의 실패를 대신해서 표면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패작을 보여주는데 아담이 했던 그 유혹의 선악과를 우리는 같이 따먹고 있고 악마처럼 독립하겠다는 하나님 필요 없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십자가 유발한 바리새인 하는 사고방식을 우리는 매일같이 발산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실패자가 어디 있습니까? 이 실패자를 이제는 즐기세요. 이게 들통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는데 베테랑이 되게 하옵소서. 성공이 오히려 악마의 유혹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하루하루 실패해도 마땅한데 살아있는 이것이 주님의 돌보심이고 길들이심이고 인도하심이고 십자가 길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