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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징계(욥5;17-27) 200202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20. 2. 4. 08:22
2020-02-02 14:57:16조회 : 42         
   평안한 징계 200202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평안한 징계(욥기 5:17-27)

음성    동영상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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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20-02-02 15:54 
평온한  징계

2020년 2월 2일               본문 말씀 : 욥기 5:17-27

(5:17)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5: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5:20)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5:21)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5:22)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5:23)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5:24)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5:25)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 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5:26)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5:27)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욥의 친구가 과연 욥에게 충고할 입장이 될까요? 욥의 친구는, 자신이 망하지 않고 징계받지 않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즉 징계받지 않고 있는 자신들이 욥의 처지를 배제하고, 만약에 본인들이 징계를 받는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마음가짐을 갖추고 대비책이 서 있다는 식으로 욥에게 말합니다.

과연 징계가 왔을 때, 얼른 징계에서 벗어난다는 그 대비책이 진리겠습니까? 기껏 그들이 연구했다고 그 대책이 과연 하나님에게서 나온 대책일까요? 아닙니다. 애처부터 징계를 받을 때 그 징계로부터 ‘벗어나야 마땅하다’는 그 의식 자체가 문제입니다. 즉 ‘나는 안 망해야만 한다’는 의식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징계받는 것은 나’같은 경우는 나라는 인간에게는 부합되지 않을 것이다는 의식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된 겁니까? 바로 욥의 친구들은 이 사실을 파악할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욥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나는 징계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못했을 겁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잘 아는 사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유지되었음을 증명한다고 여깁니다.

욥도 막상 하나님으로부터 고난을 받아보니, 그전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좋은 관계’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쪽에서 시작한 ‘필연’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자기를 위한 필연을 그대로 하나님에게 강요한 경향이 있습니다. 촌에서 서울로 올라와 취직하게 위해 힘들게 살아가는 아들을 위해 시골에 있는 어머니가 성경귀절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하나는 욥 8:7의 말씀이고 또 다른 말씀은 이사야 41:10의 말씀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리고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문제는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고 이 말씀대로 자신들 나라에게 이루어지기를 학수고대했다는 점입니다. 출발점, 그리고 하나님의 필연을 생각하면서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필연’을 계속 엮어서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곧 하나님 생각이라고 여긴 겁니다.

그들 친구들은 곰곰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런데 본인들이 지금 징계 안 받고 있다는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욥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사람이란 이 세상 살아가는 것 자체가 징계요 고생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범죄한 인간의 운명이니까요. 인간이 벌을 안 받겠다는 것 자체가 망해야 될 이유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겁니다.

뭔 잘난 짓을 했다고 징계를 안 받는 겁니까? 본인들이 뭘 잘한 게 있다고 해서 나중에 창대해야 되고 하나님의 도움에 요청한 위치에 있단 말입니까? 시골에 있는 어미는, 서울로 취직하려 간 자기 아들이 마땅히 고생을 하지 않아야 될 존재로 여깁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망하는 자의 본심인 것을 그 어미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원칙, 하나님의 필연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나 아니고 다른 분으로부터 나옵니다. 즉 나는 필연 원칙의 진원지도 아니요 출발지점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말고 다른 분으로부터 나온 필연성에 대해서 신약에서는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이 내용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의 주장과 비교해 보세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에서 성도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몸이 죽게 되는 상황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겁니다. 징계 차원에서 죽는 게 아니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 사는데 얼마든지 어렵고 힘든고 몸 아프고 피곤하고 불편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결코 ‘두려워말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욥의 친구는, 자신들의 자신들이 욥같은 경우를 당할까봐 부들부들 떨어서 동정하듯이 욥에게 충고합니다. 즉 자신들의 하나님에게 죄지으면 욥처럼 얻어맞는 경우가 생기니 사전에 미리 조심하자는 겁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두려움이요 공포입니다. 불편함입니다. 원인이 바로 자신으로부터 필연, 곧 진리를 뽑아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자신을 특수한 개별자로 일방적으로 따로 분류해놓았기 때문입니다. 특수한 데서 보편적인 진리를 취득하려는 것을 ‘규정적 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원적 자기 반성이 없는 겁니다. 이러한 규정적 판단은 세상을 보면서 ‘품평회’를 하는 태도를 견지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어떻고 이 사람은 어떻다’는 겁니다. 그러나 진리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2:27-29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찾을 수 있는 원칙은 이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나타났는데 그 아기를 본 어떤 아저씨가 자신의 모든 인생의 난제나 궁금했던 것이 다 풀려버렀다고 선언하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필연을 시므온 자기 본인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 겁니다.

시므온이 자기 지혜로 안 게 아닙니다. 성령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즉 성령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자기쪽에서 시작되는 필연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필연의 자신이 말려 들은 상태임을 자백합니다. 그동안 시므온은 자기 문제를 자기를 해결하고 미리 예상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불안과 공포와 미흡함에서 오는 초조감뿐입니다. 아무리 타인에게 잘 대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저 사람처럼 되지 않으려고 사전에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자기 눈에 세상을 살핀다는 것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28에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는 사도에게 있어 시험이란 바로 자기를 늘 비우면서 사는 그런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삶이 아니라 주님의 삶인 것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20-02-02 21:32 
16강-욥기 5장 17~27절(평안한 징계) 20200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5장 17~27절입니다. 구약성경 765페이지입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기근 때에 죽음에서, 전쟁 때에 칼 권세에서 너를 구속하실 터인즉, 네가 혀의 채찍을 피하여 숨을 수가 있고 멸망이 올 때에도 두려워 아니할 것이라, 네가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 아니할 것은, 밭에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친할 것임이라, 네가 네 장막의 평안함을 알고 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이며, 네 자손이 많아지며 네 후예가 땅에 풀같을 줄을 네가 알 것이라, 네가 장수하다가 무덤에 이르리니 곡식단이 그 기한에 운반되어 올리움 같으리라, 볼지어다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 너는 듣고 네게 유익된 줄 알지니라”

욥의 친구들 셋이 모여서 연구를 많이 한 거예요. 신학적인 논문을 제시한 겁니다. 욥의 고난에 대해서 이유와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을 아주 성심성의껏 진지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4장~5장에 걸쳐서 길게 욥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이야기하는 욥의 친구들이 자기가 망하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를 못하죠.

망하는 자리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징계를 논한다는 것은 나는 지금 안 망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 자랑질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망할 리가 있어? 나는 안 망해. 왜? 나는 하나님을 아니까’라는 주장을 하는 거예요. 27절에 보면 “우리의 연구한 바가 이 같으니”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이 아무리 연구해 봐야 육입니다. 육에서는 영의 세계에 나갈 수가 없어요. 강화유리에 부딪쳐 도로 튕겨 나가 버립니다.

출발점 자체가 나부터 출발하는 것이 잘못이에요. 그리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은 나부터 출발하는 거 외에는 달리 내놓을 수가 없어요. 모든 출발은 나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 이 친구들의 잘못은 욥과 본인들이 같을 것이라고, 지금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유대인들의 잘못은 예수님이나 자기나 다 같이 같은 인간 부류에 속한다고 여겼던 겁니다.

분리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다고 여긴 거예요. 하나님 계시고 지상에 인간 있고 지상의 인간은 모두 똑같다고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냐 하면 똑같지 않다는 거예요. 너희들의 아버지와 너희들이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아버지 하나님과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차이를 생산하는 쪽으로 말씀을 하기 때문에 해석을 할 때는 왜 우리는 예수님과 다른가부터 출발해야 그것이 해석돼요.

만약에 거기 해석이 안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철딱서니 없는 욥의 친구들과 똑같은 발언을 하게 됩니다. 이게 지금 욥의 친구들이 했다는 이야기를 감춰버리고, 엘리바스가 했다는 것을 감춰버리고 내용만 딱 따서 이 본문대로 하게 되면, 이 내용 그대로 설교를 하게 되면 아마 그날 은혜받았다고 난리도 아닐 겁니다. 시골에 있다가 서울 올라가서 취준생이 취업준비 한다고 이렇게 전세 한 1000에 월세 60만 원 정도 하는 겨우 몸 하나 들어가는 방 한 칸 얻어서 생활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찍었어요.

오늘날 취준생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인데 보니까 화장실 입구나 벽에 무엇이 붙어있느냐 하면 시골 어머니가 교회 권사쯤 되는 거 같은데 어머니가 어디 가더라도 말씀을 잊지 말라고 말씀을 붙여 놨는데 그 말씀 중에 욥기 8장 7절이 있었어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잘은 모르겠는데 만약 그 엄마가 교회 권사님이라면 그 다니는 교회에서 목사가 도대체 무슨 설교를 했을까요.

설교하기 이전에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위해서 설교하고 있는 중입니다. 욥의 친구와 똑같아요. 인간은 잠시도 자기 경계를 멈춘 적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욥기 5장 16절에 “소망이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17절에 “네가 아픈 것은 잠시 경책(징계)받는 것이다”라고 하고 19절에 “여섯 가지 환란이 있으나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고”라고 하고 20~23절 계속 보게 되면 “네가 기근에서 죽음에서 벗어나고, 전쟁에서도 벗어날 것이고, 네가 숨을 곳이 있을 것이고” 21절에 “네가 멸망 때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은 멸망 때도 너는 빠질 것이고”라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은 “들짐승이나 밭에 돌에도 전부 다 언약을 맺어서 네가 가는 곳마다 너를 지켜주리라”라고 그런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시골에 있는 엄마 권사님이 적어준 성경 구절은 딱 두 개예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또 하나는 이사야 41장 10절의 말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는 말씀이에요.

그걸 누가 믿었느냐 하면 예수님 죽였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유대인들이 그걸 믿었어요. 지금도 1948년 독립한 현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 41장을 믿고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우리도 평소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무슨 다른 대책이 있습니까?”라고 궁금해할 건데 다른 대책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보면 이거 듣기 싫더라도 해야겠어요.

대책이기 때문에 여러분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몸이 망가져도 괜찮다는 이야기예요. 네가 먹을 것이 없더라도 괜찮고 취직 안 되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정말 괜찮다. 괜찮아. 정말 너는 다행이야”라고 하려면 출발점이 절대로 나로부터 출발해서는 안 돼요. 예수님 십자가부터 출발해야 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나 말고 나 빼고 다른 분으로부터 출발해야 해요. 진리는 나에게서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나 빼놓고 나와요. 나는 진리에 걸칠 그런 자격도 권한도 없어요. 예수님으로부터 진리가 나오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외쳤던 말이 그 말이에요. “진리는 나에게 있고 길도 나에게 있고 생명도 나에게 있다”라는 말은 너는 생명도 없는 채로 태어났다는 거예요.

생명도 없는 채로 태어났으면 죽어야지 왜 자꾸 너를 지킨다는 그런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느냐는 거죠. 너는 길로 가더라도 강화유리에 튕겨 나와 버려요. 아무리 나로부터 시작한 그 어떤 노력도 결국은 천국에서 튕겨 나옵니다. 내가 나를 포기 못 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욥에게 잔소리하는 욥의 친구들이 본인의 자리가 망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본인이 몰라요. 그러면 하나님이 욥을 이렇게 아프게 한 것은 본인이 모르는 그 진리를 욥을 경유해서 욥에게 잔소리하는 너에게 잔소리 당하는 욥이 잔소리할 권한이 있다는 겁니다. 이 순간의 욥은 예수님 같아요. 성공했다는 의미가 너무 수상하기 짝이 없어요.

뉴스에 이런 기사가 났어요. 어떤 사람이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서 기름을 빼내려고 하는데 이 기사가 굉장히 중요하고 본문과 너무 관련이 있어서 이야기합니다. 송유관에서 기름을 빼내려고 굴을 뚫어 나가는데 송유관 근처 다 와서 암벽을 만났어요. 암벽이 있어서 송유관을 뚫지를 못했어요. 그러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그 도둑이 하는 말이 자기는 무죄라는 거예요. 왜 무죄냐 하면 송유관에 구멍을 못 뚫었으니까.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서 기름을 빼내야 도둑인데 못 빼냈으니까 자기는 죄가 없다고 이야기한 거예요. 가만 들어보니 좀 이상하죠. 뭔가 논리가 잘못된 느낌이 들고. 그냥 막연히 잘못된 거 같다고 하지 말고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생각하세요. 그게 뭐냐 하면 죄냐 죄가 아니냐 하는 것은 자기가 성공했냐 안 했냐 여부로 새로 정하자는 겁니다. 기름 빼내는 데 성공 못 했으니까 미수에 그쳤으니까 자기는 죄가 없다는 겁니다. 판사가 헷갈리겠어요.

그게 그 도둑놈 만의 주장이겠어요? 아니면 평소 우리의 주장일까요? 모든 출발을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이사하는데 왜 비가 오냐는 말이죠.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사하는데 비가 와서 이사를 못 했다는 겁니다. 진짜 주님 오면 멱살 쥐고 비 오는 아스팔트 바닥에 넘어뜨릴 태세입니다. 간이식당에서 노동자들이 술 먹고 고함치는 그런 소행을 벌입니다.

“부자 놈들은 주식 해서 잘 살고 우리는 이렇게 힘들어도 겨우 입에 풀칠만 겨우 하냐”라고 어디 화풀이할 때 없어서 공장식당에서 외칠 때 그게 진리일까요? 거기 현장에 만약 노동운동을 부추기는 좌파계열이 있다면 뭐라고 외치겠습니까? “그러니까 지상천국을 위해서 우리는 오직 혁명, 혁명에 나서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부치길 거예요. 혁명, 그 혁명이 누구를 위한 혁명이죠? 그 출발이 어디입니까? 본인에게서 본인을 위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침이슬 한번 부르고.

여기서 욥의 친구가 필연적인 원칙을 연구해서 이렇게 밝혀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이러한 벌을 받는다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원칙과 필연적 원칙에 위배 되는 것이 있기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징계를 주시는 것은 정신 차리라고 기회를 준 거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라. 네가 어디서 잘못했는지 생각해봐라”라고 욥의 친구가 욥에게 조언하는 대목이에요.

그런데 이 대목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욥이 이미 알고 있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우리 양심보고 매일같이 닦달 내면서 하는 논리가 이 필연이에요.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은 아무 문제 없다. 내가 살기 힘든 것은 나에게 문제 있지 하나님에게는 문제없다는 그 생각이 굉장히 건전해 보이죠? 건전해 보이냐고 제가 물었습니다. 상당히 순수해 보이죠? 그게 엉터리라는 생각은 못 해 봤습니까?

마태복음 10장 말씀에 의하면 그게 악마가 주는 두려움이라는 겁니다. 징계를 받는 것은 어떤 알 수 없는 소망을 위해 내가 소망 쪽으로 고개 돌리라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기회라는 그 바탕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왜 나는 매사에 겁이 나고 무서워하지?’라는 그런 자기 본심이 드러난 거예요. 자꾸 어려워지는데 쉽게 가겠습니다.

내가 누구를 동정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정받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동정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동정받을 만큼 완전히 인생을 바닥 친 것은 나보다 분명히 개판처럼 살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나는 저 사람에게 착한 일 함으로써 앞으로 개판같이 될 내 인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동정을 하고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도와주는 그놈이나 도움받는 그놈이나 둘 다 똑같은데 문제는 뭐냐 하면 도와줌으로써 아직 안 망했다고 생각하는 의식을 갖는 그 인간이 더 문제라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땅에 완전히 거지꼴로 왔잖아요. 이 도령도 아니고 진짜 거지꼴이 되었어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어서 예수님이 두려워한 것이 아니고 따르는 제자들이 두려워한 거예요. “예수님 이러다가 우리 죽겠습니다”라고. “너희는 아직도 나를 모르고 있느냐? 아직도. 너는 무엇을 무서워하느냐?”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필연을 원칙대로 원칙대로 원칙대로 했는데 삐거덕하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원칙대로 함으로써 자기가 미처 모르는 것은 잘라서 다 버린 거예요. 내가 버린 그것들이 오히려 내 옆을 떠나지 않고 딱 붙어서 나에게 위기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겁니다. 이런 게 있어요. 누가복음 2장 27~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참 이 말씀이 어려운 말씀인데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 사람이 훌륭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으로예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 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합니다.

“종을 평안히 놔 주시는군요”라는 이 대목에서 뭐가 어려우냐 하면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은 것을 보고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성전에 가서 그걸 본 것과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종을 평안히 놔줬다는 그런 고백이 여기서 이 대목에서 왜 나오냐는 말이죠. 도대체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엮였기에 어떤 여자가 자기 아기 안고 있는데 그걸 보면서 자기 수십 년 동안의 모든 고민과 문제점과 모든 난제, 불안과 공포가 어떻게 한꺼번에 다 없어집니까? 부러워 죽겠죠? 부럽지 않습니까?

앞으로 어떤 바이러스가 오든지 중국에서 우환 폐렴과 관계없이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나는 왜 이리 편하냐는 말이죠. 누구 때문에? 아기 예수 때문에. 그러면 여기서 규정할 것은 아기 예수 때문에, 아기 예수가 어떠했기에 여기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해도 상관없이 편안하다는 공식이 성립되어야 해요. 이런 공식이 성립되어 내 안에 들어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맨날 욥의 친구처럼 그렇게 됩니다.

불안불안 떨면서 지금 사는 것이 편안하니까 지금 내가 잘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죠. 실제는 그것이 망하는 길인지도 모르고요. 그냥 혹시 주께서 벌 내릴까 싶어서 사전조치 한다고 “주께서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감사 하고 고맙다고 하는데 그 음성이 왜 이리 떨리는지 벌벌 떨면서 하는 거예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우리 아이들 감기 걸리기만 해봐라”라고 자꾸 뭔가 노력해요. 노력한단 말이죠.

노력하지 마세요. 노력한다는 자체가 지금 수상한 거예요. 마음이 안 편해서 노력하는 거예요. 안 편해서. 로마서 8장 28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면서 이 구절이요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할 때 뜻대로라는 말을 할 때 벌벌 떨면서 이야기를 할 대목입니까? 이게 벌벌 떨면서 이야기할 구절이에요?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은 아기 예수를 보면서 “아, 이제 심심해서 근심할 것 좀 찾아보려고 해도 근심할 것이 없네”라고 이렇게 돼야죠. 남 탓할 것이 없단 말이죠. 자 그러면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서 뭐가 문제냐 하면 욥의 친구가 뭐가 문제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품평회를 한 거예요. 품평회. 품평회라 하는 것은 사과나 어떤 상품 왔을 때 이 물건 괜찮고 저 물건 나쁘고 이런 거 하는 게 품평회거든요.

욥의 친구는 자기가 필연 있다는 자기가 하나님 안다는 이게 자신에게 사단난 거예요. 자기가 품평회 할 자격도 권한도 없습니다. 이걸 어렵게 이야기하면 특수에서 보편으로 인간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 특수에서 보편으로. 나에게는 내가 특수한 존재거든요. 이 세상 어떤 것과도 안 바꿔요. 열 명과도 안 바꾸고 천명과도 안 바꿔요. 나는 백만 명과도 안 바꿔요.

나는 특별한 존재, 특수한 존재예요. 특수한 존재를 유지하면서 보편적인 안목을 얻고자 한다면 이건 엉터리입니다. 거짓말이에요. 그걸 가지고 규정적 판단이라고 하는데 내가 남을 규정하는 거예요. 품평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품평회 하는 기준 가지고 누구 품평회를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품평회 하는 거예요. ‘나 지금 정상이다. 괜찮지? 어 아프네. 이거 비정상이야’라고 자기 자신을 판단해 버려요. 그러니까 이건 항상 벌벌 떨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마태복음 10장에 그런 말씀 나오거든요. 마태복음 10장 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이 고난받는 것을 미리 이야기해요. “너희를 넘겨 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평가하지 말라) 그때 무슨 말 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출발을 성령을 우리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평소대로 하면 출발을 나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내가 잘 되면 지금 하나님 말씀 잘 지킨 것이고 못 되면 내가 지금 죄짓는 거라고 생각하는 그것부터가 내가 지금 죄짓는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내가 지금 내 안에 뭐가 없는 현상이냐면 성령이 없기 때문에 그런 발상을 하는 거예요. 성령이 없기 때문에. 필연이 내 바깥에서 다른 분에게서 온다고요. 다른 분의 여파로 지금의 내가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내가 좀 어렵게 될 때 이것을 오히려 당연시해야 해요. 내가 어렵고 힘든 것을 당연시해야 하지 여기서 내 죄를 찾는다고 분석해 나가면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전히 내 문제를 내가 시도하려고 하는 오늘 본문 욥의 친구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어요. 욥 친구의 말과 유사한 말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할 때 사람들은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가 힘들 때 그걸 시험이라고 하거든요.

그런데 무슨 생각을 못 하느냐 하면 내가 무탈하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할 때 이게 시험이라는 생각을 사람들이 못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시험이에요. 주님 덕분에 사는데, 그 이야기를 내 속에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지금 남에게 이야기하라고 우리로하여금 지금 원치 않는 환경으로 몰아넣는데 자꾸 출발을 나부터 출발하니까 내가 이렇게 문제없으니까 나는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자꾸 남에게 자기 자랑하면서 살고 있는 거예요. 자기 자랑하면서.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면 그런 말씀은 또 기피 하게 된다고요. 잘 살아야지 내 몸이 죽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내가 못 버틸까 봐 두려워하고 있는 거예요. 출발점이 나부터 출발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김민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작곡가고 가수고 작사가이고 하죠. 20대에 젊은 사람들에게 우상이었습니다. 아침이슬도 그 사람이 지은 노래 중 하나예요. 지금까지 유명하죠. 그 사람이 지은 노래 가운데 무슨 노래가 있느냐 하면 ‘봉우리’라는 노래가 있어요. 봉우리. 봉우리 가사를 보면 좀 철이 난 가사를 지었어요. 내가 목표로 삼고 성취하고자 하는 그 높은 고지가 나중에 돌아보니 뒷동네 고개마루였다.

나는 그것만 쟁취하게 되면 세상 더한 소망 없다고 만족할 만하고 진짜 성공한 자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도달해 보니까 비로소 더 높은 봉우리가 더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뒷집 고개마루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결국 이건 뭐냐 하면 고개마루 넘어서 큰 봉우리를 잡으라는 뜻이 아니고 고개마루를 인생의 목표로 아주 거창하게 삶의 살고 죽는 절대적 목표점으로 여겼던 너 자신에게 너 자신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뭔가 쟁취하겠다는 그 자체가 네가 인생 잘못 살고 있는 거예요. 아침에 말씀드린 데로 하자면 나를 비우지 않은 사람이 망하는 사람이에요. 나를 비우지 않은 사람이 망한 자라고요. 자기 안에 자기가 꽉 차 있으면서 남 간섭질 하지 마세요. ‘나’라는 이런 입지, 이거는 내가 형성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욥이 가만히 앉아서 아파하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다 전하고 있어요.

“너 조심해서 살았지? 나도 너만큼 조심했어. 그런데 너는 지금 내 형편 이해 안 되지? 해석 안 되지? 설명 안 되지? 해석 안 되지? 너에게 문제 있는 거야. 지금 내가 처한 이 고난을 네가 설명 안 된다면 너는 출발점이 너 자신에게서 출발했다는 잘못된 사고관이라는 것을 네가 알아라” 이게 바로 욥은 그 당시 십자가, 그 당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십자가 있다는 말은 사도의 살아감과 똑같아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이건 아기 예수만 생각하게 되면 고난 가운데서도 “주여, 이 종을 편안히 놔 주시는군요”라고 하죠. 나를 지적하려고 오신 예수님 생각하게 되면 지적할 거리가 계속 나온다는 그 자체가 오히려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이제는 품평회 열지 마시고, 나 지적하지 마시고, 예수님 알았다면 더이상 얻을 것 없습니다.

다 된 거예요. 최종 결정 난 거예요. 이미 우리 팔자 운명은 확정된 겁니다. 합격통지서 흔들면서 아플 땐 아파하면서 합격통지서 흔들면서 가난하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욥이 고난받는 이유에 대해 우리는 기껏해야 욥 친구들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자기 편하니까 자기는 괜찮고 남은 아프니까 벌 받는다고 오해하는 우리가 자기를 비우지 못한 그것이 차라리 죄인이고 망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