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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작용(욥1;20-22) 191124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24. 21:42
2019-11-24 15:01:10조회 : 19         
   악마의 작용 191124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악마의 작용(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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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11-24 15:57 
악마의 작용
  
2019년 11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1:20-22

(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을 통해서 왜 악마가 인간에 대해서 자신만만한지가 드러납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관계를 맺거나 나아고자 할 때에 악마층을 거치지 않고 성사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악마가 인간세계에 영향력이 없다고 한다면 인간은 자신이 마땅히 살아남을 토대가 마련됩니다.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욥을 시험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 토대가 순수한지를 검토하기 위해서입니다. 악마가 욥의 내부까지 침투하지 못하는 경우, 아직도 욥은 자신 몸을 처리할 여지가 있습니다. 욥은 악마가 자기에게 이렇게까지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늘의 상황은 다릅니다. 악마층이 인간 세계를 뒤덮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악마층이 이 세상을 덮고 있다면, 인간들이 이 지상에서 주장하는 정당한 토대가 확보되지를 않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 원망할 근거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는 자신감이 있었던 겁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자기 것이 당하면 원망하게 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이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어느 새 자기 곁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 곁에 아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자 사람들은 예수님의 신기한 기적에 매료되어 임금 삼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사람들로부터 멀리 하시려고 했습니다. 결국 예수님 좋다고 따라나선 그 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게 되고 심지어 12제자 마저 예수님을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같이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고 홀로 남는 것은 범죄한 인간의 처지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누구를 만난다는 것도 징벌 같은 것입니다. 타인은 나를 공격하고 이용하고 화풀이고 없애려고 합니다. 거기에 대해 인간은 자기를 지키려고 합니다. 형편이 난처하면 타인에 대한 미련도 없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접으려고 합니다. 욥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욥 1:20) 욥은 스스로 불명예스럽게 나옵니다. 전에 자기가 알고 있던 자신이 아니기를 시도합니다. 그리고 욥은 죽게 되는 날을 곧 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기가 없어지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에 부합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흙으로 인간을 만들고 하나님의 형상을 거기에다 실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형상과 인간의 몸이 부합되지 아니하면 인간의 몸을 부실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만큼은 손상을 당하지 않고 새로운 몸과 결합됩니다. 악마는 인간의 몸을 공략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전략에 해당됩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전략에 말려든 겁니다. 히브리서 9:27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판이란 악마의 노림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죽음을 허락하신 겁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악마를 대적해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단지 욥처럼 그동안 자아라고 여긴 것을 모두 자진해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욥은 그동안 자신이 아끼는 자들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떠나실 때에 함께했던 모든 자들을 잃은 것과 같습니다.

잃는다는 것은 범죄한 인간의 몸을 상실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박아넣으신 예수님을 드러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인간 창조의 핵심은 ‘하나님의 형상’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골 1:15)

예수님의 등장에는 필히 악마에 대한 승리가 필요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악마와 더불어 내기한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그저 자기에게 일어난 사태에 대해서 자신을 잃고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이러한 자아 상실과 병행해서 일어납니다.

사람은 늘 타인으로부터 검사당하면서 살아갑니다. 타인이 지정해준 그 단어에 부합되는 존재로 강요받습니다. 하지만 그런 타인이 사라진 마당에서 욥은 자신의 거울을 깹니다. 그 누구로부터도 평가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충분히 잃을 만큼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멸 시도가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오늘날에 신약에 와서 사정을 어떨까요? 누가복음 5:1-5에 보면,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제거할 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스스로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군대(많은) 귀신이 몸 안에 들어 있습니다. 몸에 귀신이 들어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귀신이 이 세상에서 거처할 곳을 반드시 찾는다는 말입니다. 악마가 보낸 귀신들이 인간들의 몸을 잡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그 어떤 거부할 능력도 없습니다. 인간의 생각이나 사고도 악마에게 붙잡혀 있는 상황입니다. 신약에서 해결은 예수님께서 직접 악마와 상대해서 그 사람을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겁니다. 즉 성도는 무엇을 믿는가 하며는, 자신이 이길 수 없는 대상을 예수님이 이미 승리케 하셨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만족 속에 자기에게 놓여 있음을 인정하는 겁니다.

즉 망해도 상관없이 주님께 감사하겠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망함에 대해서 의식하지 않게 하옵소서. 그것마저 주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한 일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1-24 19:19 
6강-욥기 1장 20~22절(악마의 작용) 201911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20~22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또 하늘 사이에 악마 층이 있습니다. 흐린 날 비행기 착륙할 때 보면 분명히 흐려서 땅이 안 보이는데 비행기가 착륙하기 위해서 구름을 뚫고 내려오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땅이 보이죠. 하늘과 땅 사이에 악마 층이 쫙 깔려있습니다. 그 악마 층이 깔려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마땅히 살 권리가 없음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악마 층이 없다고 보니까 마땅히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는 오늘 욥기에 보면 악마가 아주 자신만만한 겁니다. 인간은 악마 층을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없다. 따라서 인간은 가만히 놔둬도 ‘왜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왜 우리는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느냐’라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마음껏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에게 원망을 퍼붓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2절에 보면 하나님을 향하여 욥이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고 되어있어요. 이 세상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게 오히려, 원망하지 있는 인생이 오히려 희한하고 이상한 인생이에요. 사람은 건드리면 화내게 되어있거든요. 화를 안 낸다는 것이 도리어 ‘뭐지 이거. 저 사람 왜 화 안 내지? 나에게 화를 내야 하는데 왜 안 내지’라고 그렇게 낯선 사람으로 간주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①욥을 악마한테 붙잡히게 하고 나서 그다음에 악마가 한 것은 ②욥 옆에 모든 사람을 다 없애 버렸어요. 마치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실 때 5000명이 넘는 수천 명이 띠라 다닐 때 “우리에게 떡 주시는 저분을 우리의 임금 삼읍시다. 이번 대선에 나서세요”라는 식으로 쭉 따라다녔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기적을 줄 자로 알고 운집해 있었고 병 고쳤다고 할 때는 어떤 사람은 들어가기가 힘들어서 지붕을 뚫고 들어가기도 했어요. 그 많던 사람 다 어디 갔습니까? 모든 사람을 제거해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두고 결국은 예수님을 떠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 욥이 미리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 이유도 욥 근처 자식들 모두 죽어서 떠나고요, 결국은 친구들마저 다 떠날 거예요.

떠난다는 것이 참 힘 빠지고 원망할 만한 일이지만 여러분도 한번 인생을 살아 보세요. 오늘 아침에 어떤 분이 “목사님 사람 만나는 것이 징벌입니다”라고 하셔서 감동받았습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벌인 줄 몰랐다는 겁니다. 뭐 혼자 있어도 징벌이지요. 만날 때 뿐이겠습니까. 만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아픔을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다 떠나도록 하셨을 때 사람들은 분명히 내 사람이고 내 것인데 하나둘 뚝뚝 떨어져 나갈 때 그 사이에서 아파하게 되고 아픔을 통해서 하나님께 원망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에서는 욥 자신이 남아 있지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다 보게 되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만 남아 있게 되어있어요.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무엇이 추가되어야 완성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거기에 담겨야 보기에 심히 참된 인간이 되고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의 형상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소멸시키고 없애 버립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장례식이나, 나 죽을 때 장례식장에 사람 많이 와도 소용없죠. 뭐 올 사람도 없겠지만 와도 소용없잖아요.

결국 홀로 죽는 거예요. 하나님의 홀로 죽는다는 그 죽음 자체에서 욥을 통해서 보게 되면 죽음 자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유지되는지 아니면 없어졌는지를 보겠다는 겁니다. 그 심판이 히브리서 9장 27절에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제 식대로 해석하면 인간이 소실되고 소멸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거고 그 뒤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거죠.

이게 하나님의 형상 덩어리냐 아니냐를 그때 분간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 남으면 이것은 하나님의 원래 창조하신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형상 없으면 이건 지옥 갈 사람인 거죠. 이미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새로운 형상이 꽂아져야 하겠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속에 심어져야 하겠죠.

그러면 그 원칙은 뭐냐 하면 심어놓은 메시아 외에는 나머지는 다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후패해도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되는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 안에 꽂혀있기 때문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내 인생은 내 스토리는 날아가고 날아가면 날아갈수록 주님의 스토리로 변환되어있는 그런 모습, 주님께서 과거부터 손댔다는 그런 주님의 작품이 나올 때 그것이 드러날 때 그것이 성도의 삶이잖아요.

지금 욥이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악마야 칼을 휘둘러라. 네 맘대로 해봐라. 그 안에 욥이 들어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는지 악마 네가 확인해봐”라고 촉구하잖아요. 그처럼 오늘날 성도에게도 똑같은 원리가 작용 되는 겁니다. 친하고 가까이했고 그리워했고 특히 자식 같은 경우에는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하나둘 떨어져 나가고 결혼해서 떨어져 나가고 죽어서 떨어져 나가고 삐져서 떨어져 나갈 때 과연 우리가 원망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정말 원망이라는 그조차도 쪼개져서 나가게 되면 마지막에 남은 것은 오늘 본문 마지막에 21절에 보면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
 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시는 그 사건을 통해서 나타나는 표현이에요.

아버지께 찬송하는 거예요. 영광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은 철저하게 악마를 이용하는 겁니다. 악마야 다뤄라.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나올 거야. 포장지 뜯자. 그 안에 뭐 있는지 나올 거예요. 그 안에 예수님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예수님 십자가 안 나오고 딴 거 나오면 그거는 애초부터 글러 먹은 거고 구원 백성 아니죠. 지옥 갈 사람이죠.

그렇다면 이 말씀을 좀 더 난해하게 깊이 있게 해봅시다. 여기 20절에 보면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자기가 자신이 어떠하다는 검사받을 기준 자체를 본인이 없애버리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누구에게 검사받거든요. 부모는 자식을 늘 검사합니다. 숙제는 했는지 학교에서 뭐 배웠는지 숙제할 것은 했는지 게임은 너무 많이 하지 않는지 항상 검사하죠.

어른이 되면 서로가 서로를 검사합니다. 그러나 욥에서는 모든 게 다 떠나고 말았어요. 검사할 사람도 없어요. 옆에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욥은 뭐냐 하면 내가 전에 알던 나를 내 검사 기준으로 삼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려요.

뭐냐 하면 여기서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벌건 덩어리)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벌건 덩어리) 그리로 돌아가 올지라”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존재가 아니고 부재가 되어 버려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돼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렵게 말해서 뭐냐 하면 나를 평가할 언어가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사람은 언어에 미치거든요. 그런데 나를 묘사할 언어가 없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장로님이 기도하신 대로 강물 같고 바람 같은데 바람과 강물에 무슨 묘사 같은 것이 있습니까? 바람에게 화살을 쏘면 바람이 아프다고 합니까? 없잖아요. 우리는 내가 기준으로 삼는 내가 버티고 있다 보니까 세상의 온갖 화살을 다 받습니다. 요근래 뉴스를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 중에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지를 알게 되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지금 현재 가장 불쌍한 사람. 베트남 축구 감독 박항서.

연봉을 그 가난한 나라에서 1억 넘게 받아 챙겼으니 이제 월드컵 본선 들어가는 책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베트남 온 국민이 박항서를 검사합니다. 제대로 축구팀 부흥시키는가 보자는 거죠. 한국의 히딩크 되는지 보자는 거죠. 받은 돈이 있으니 검사하자는 거예요. 회사에서나 직장에서나 월급 많다고 좋아할 수가 없죠.

월급 받은 만큼 검사하는 것이 많습니다. 공무원은 낮에 3시부터 6시까지 사우나 가는지 모르겠지만, 요새 공무원은 또 안 그러는데, 여하튼 일반 직장에서 돈 준 만큼 엄청나게 간섭 질이 많습니다. 아가씨가 부잣집에 시집갈 때 좋아들 하면 안 돼요. 재벌 집에 시집가는 거 좋아들 하면 안 됩니다. 현대그룹, 삼성그룹, 이런 재벌들의 눈들이 새 며느리에게 요구사항이 많겠습니까?

적게 벌고 적게 먹는 것이 낫다고 하지만 그건 말처럼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요. 세상 사는 게 욕심이 나기 마련이고요. 어쨌든 간에 지금 욥은 자기가 죽겠다는 거예요. 죽는다는 것이 뭐냐 하면 그동안 나를 묘사했고 나에게 이런 인간이라고 제공했던 그쪽의 거울을 깨버리는 거예요. 나를 비추며 나 어떤가를 비추던 그 거울을 망치로 깨버리는 거예요.

나는 죽었다고 처라. 나는 없다고 처라. 내가 머리 밀고 다 할게. 나는 지금 살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빨리 다시 죽음의 자리로 환원될 준비를 하겠다는 자세예요. 바람같죠. 그러니까 욥은 바람의 아들이죠. 이종범인가. 스스로 바람의 아들인 거죠. 그것을 저는 ‘음 소거’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자아 소거’. 음이 죽어버리는 거예요.

사람이 살게 되면 에너지가 작동되어 소리 소음이 나게 되어있어요. 물리적으로 에너지가 작동되면 다른 에너지가 영향을 받아 소리가 나요. 만약에 자기가 죽겠다고 하면 음 소거가 되죠. 따라서 절간의 특징이 조용하다는 거죠. 물론 그렇지 않은 절도 있지만. 그러나 그런 조용한 절간도 공통점이 있어요. 제가 지금까지 여행 삼아 수백 군데 절들을 돌아 다녀봤는데 평범한 길을 가다가 꼭 절 가까이 오게 되면 돌탑들이 나타나요. 이건 음 소거가 아닙니다. 자기 욕망이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그러면 저는 가다가 심술 나서 있는 돌 다 무너뜨리죠. 요즘은 안 그러지만. 나를 묘사할 단어의 부재. 내 쪽에서 그 단어의 부재를 장착하게 될 때 타인이 너는 이러해야 한다는 그 단어에 해당이 안 되어버리는 거죠. 죽은 놈에게 무슨 단어를 붙입니까. 이것이 바로 욥이 취할 태도였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욥처럼 되어야 합니까?”라고 하는데 이게 구약의 한계예요.

구약의 욥은 자기가 죽을 준비하면 그것이 자기 혼자 남았으니 그저 죽자고 하면 되지만, 마치 중들이 머리 깎고 아버지 자식 죽었다고 생각하고 잊으라고 하듯이, 그렇게 하면 문제 해결되겠는데 그게 바로 구약의 한계이고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러면 그 한계가 신약에 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가복음 5장 1절부터 9절에 보면 앞부분은 시간 관계상 간략하게 하고요.

1절에 보면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라고 나오는데 거라사 나오니까 제가 몇 년 전 이 동네 갔던 동영상 찍은 것이 십자가 마을에 있습니다. 거기에 밤낮으로 귀신들려 소리지르는 자가 나오는데 중요한 부분은 9절에 나옵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가로되 내 이름은 군대니”라고 나옵니다. 이름이 군대라고 해요. 원래 원어는 군단인데 그 당시 군단이 5천에서 팔천 명 돼요. 어떤 한국 해석에서는 2천 명이라고 하고.

5천도 많지만 2천도 많잖아요.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천이라는 그 많은 귀신이 그 좁은 몸 안에 다 들어갑니까? 어디 닭장입니까? 귀신들 비좁아서 서로 싸울 것 같아요. 2천이나 5천 하지 말고 그냥 많은 귀신이라고 합시다. 그 많은 귀신이 어떻게 몸통 하나 안에 다 들어가느냔 말이죠. 욥에서는 마귀가 뭘 쳐버렸느냐 하면 몸도 쳤지만, 이쪽에 다른 소유한 것들도 쳤어요.

마치 욥이 ‘나는 저 정도다’라고 하는 그 거울을 깨듯이 주변의 자기 거울은 깨졌지만, 몸속까지 악마는 들어오지 않았던 겁니다. ①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몸속까지 악마가 들어와요. 구약 같으면 우리가 머리 깎고 절에 가면 되는데 지금 그런 문제가 아니고 신약은 더 깊이 있게 그 내용을 파헤칩니다. “네 몸 안에 귀신 들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군대 귀신 들었다”라는 겁니다. 이거 어떻게 처리할 겁니까?

자, 1번 과학적으로 처리한다. 그런데 과학적 요소에서는 몸 안에 수천 명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물론 박테리아나 기생충은 그러겠지만 몸 안에 귀신 들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어요. 몸 안에 귀신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이 두뇌 조직이 잘못되어서 망상을 일으켜서 귀신도 없는데 악마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혼자 착각하는 그런 경우로 설명하고 약 지어주고 집에 가라고 하지만, 과학에서 영적 존재는 없는 거예요.

그리고 과학은 죽는 이유도 못 밝힙니다. 더구나 죽고 난 뒤에 심판이 있으리라는 것은 과학자들은 밝혀낼 수가 없죠. 과학자들은 어떤 약을 줘서 약이 일종에 마취제 환각제 비슷한 것을 줘서 귀신들려도 한순간만큼은 즐겁고 기쁘게 하는 일종에 악마의 약이죠. 마약을 줘서 기쁘게 되면 마치 증세가 호전된 것처럼 여길 수가 있어요.

그러나 진짜 그 사람 속에 있는 악마를 누가 끄집어냅니까? 끄집어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끄집어내지 않는다는 말은 악마가 바깥에서 멈춘 것이 아니고 안으로 이미 들어왔다는 거죠. 들어 온 거죠. 들어오게 되면 마가복음 9장 4절에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라고 되어있어요. 악마가 힘이 더 센 거예요. 악이.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도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②“나는 선을 원하지만 내 속의 악이 오히려 선을 이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악마를 이길 재간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인간이 공부하고 정신 차리고 이성적으로 마음을 다잡고 도 닦는다고 악마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은 공기가 오염되었다는 말을 하는데 공기가 오염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신이 오염되었어요. 정신 자체가. 그럼 신약의 이 문제를 악마를 어떻게 끄집어낼 거냐. 모든 인간은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담은 악마를 못 이기기 때문에 악마는 아담의 자손은 하나하나를 이기게 되어있어요. 이미 우리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스스로 제어할 수있는 힘은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문제를 던질 테니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컵을 주고 거기에 물을 부어요. 그리고 누가 물 달라할 때 컵 빼고 물만 주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세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보면 그 악독한 사채업자가 살점을 도려서 가져간다고 하니까 판사가 하는 말이 살은 가져가도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하라고 하니 그 업주가 포기하고 가죠.

하나님은 컵을 줬어요. 제가 설교 처음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컵에 담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을 때 그리고 그 형상을 되찾아 올 때 그 담은 몸도 물을 담은 컵이라는 이유 때문에 물 따로 컵 따로 아닌 것처럼 형상이 뭘 장악하느냐 하면 컵을 장악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 물을 달라고 할 때 컵도 도로 가져가신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귀신이 들렸을 때, 어떤 사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귀신들렸는데, 귀신 들렸을 때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윤리적이고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성숙과 상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 중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의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이게 바로 ‘내 안에 악마 있다’라는 뜻이에요.

성화 많이 되었다는 말은 절에 돌탑 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아침에 일어나 성경 두 장 보고 돌탑 하나 쌓고 기도하고 돌탑 두 개 더 쌓고 헌금하고 돌탑 다섯 개 더 올리고 하는데 나중에 와르르 다 무너질 것들이에요. 악마의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내가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우리 이름을 높이는 거죠. 바벨탑 쌓듯이.

우리는 악마의 본성 때문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자꾸 생각해요. 사실은 그게 점점 더 소멸되는 순간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쪼개려고 하는데 우리는 덕지덕지 갖다가 붙이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잘남을 더욱더 완고하게 방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수집해서 집어넣습니다. 나는 교회 12년 다녔고, 십일조 할 만큼 했고, 새벽기도 새벽 제단 나왔고, 어떤 사람은 안 나온다고 욕하던데 지금은 안 나오고 하는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모든 그러한 요소들을 자기를 방어하는 갑옷처럼 여기는 거예요. 주께서는 벗기시는데 우리는 입으려고 하는 거예요. 안 들키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찾아옵니다. 찾아올 때 정말 고맙게도요 내가 마중 나온 게 아니고 여기 마중 나온 게 누구냐 하면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귀신(마귀)이 마중 나왔어요. “예수여, 왜 벌써 왔습니까? 아직 우리를 멸할 때가 안 되었는데”라고 하면서. 마가복음 5장에도 있고 마태복음 8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어요.

귀신이 “지금 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우리가 나갈 곳이 없잖아요”라고 해서 이 악마는 항상 노림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의 몸에 들어오는 그 악마의 속성은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악마는 항상 인간 속에서 운전대를 잡아요. 인간을 조수석으로 밀어 넣어 버리고 자기가 운전해 가는 거예요. 인생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죽는 것은 마땅하고 나중에는 심판이 있는 거예요. “악마 새끼 여기 앉아 있네”라고 하시며 끄집어내는 거예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로마서 4장에 의하면 “악마는 내 힘으로 나가지 않았고 주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들어오셔서 악마를 묶었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예수님이 이미 악마를 묶어놓으신 것을 그리고 승리하신 것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이에요. 내가 승리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승리한 것의 결과물인 내가 여기 존재한다는 고백이에요.

물 달라할 때 “컵도 주님 것입니다. 가져가세요”라는 뜻인 거죠. 그동안 물은 악마였습니다. 악마를 주님께서 처리할 때 컵도 이미 주님이 처리한 것을 드러내고 증거 하는 컵으로써 이 땅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약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돼지에게 들어갔는데 그 귀신이 돼지에게 들어갔거든요. 들어가니까 인간은 수명이 있어서 80~90세까지 오래 살지만, 돼지는 수명이 짧은 것인지 돼지에게 들어가니까 이 돼지가 미쳐서 이것이 살길인지 죽을 길인지 분간도 안 하고 자기가 바다 사는 물고기도 아닌데 전부 다 동일한 정신, 정신 오염이죠,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전부 다 어디로 빠지는가 하면 바다로 빠지는 겁니다. 꼭 서초동 광화문 태극기 시위하는 것처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악마는 없다. 우리 힘으로 정권을 쟁취하자’라는 식과 똑같은 거예요. 그게 마귀들린 소리예요.

‘우리가 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께서 주신 것도 감사하다. 왜냐 하면 우리는 물컵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라는 의식이 없어요.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죽습니다. 근데 죽을 때 죽더라도 뭔가 벗겨지는 체험을 해야 해요. ‘아, 내 더러운 것이 주님의 새로움으로 인하여 바깥에 있을 수 없어서 이런 귀신같은 요소들이 점점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욥의 다음 이야기에 이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일인데 자꾸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이고 했다고 주장하는 반대되는 현상을 보였습니다. 욥처럼 모든 것을 꿇어앉아 주께 영광 돌리고 원망하지 않아야 하는데 우리는 건드렸다 하면 원망 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그런 모습인 것을 이제는 신약시대에서 주께서 이미 조치했기에 이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