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욥기 1장 13~19절(악마의 권세) 2019111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13~19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지금 이게 ‘아멘’할 상황의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새로움에는 항상 폭력이 유발됩니다. 그것은 이미 폭력이라는 요소로 꽉 잠겨있기 때문에 마치 장아찌 담는 것처럼 그 안에 모든 것이 폭력과 폭력 안에 쟁여 있는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사람을 끄집어낼 때는 그동안 어떤 폭력 안에 네가 길들여 있었는가를 주께서 핀셋으로 하나하나 끄집어내는 거죠.
사람이 힘을 의지한다는 것은 이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러한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하는 일원으로서 누구 폭력 쓰는 것을 욕할 입장이 못됩니다. 내 것 지킨다면 거침없이 폭력을 날릴 수 있는 그런 식의 속성으로 이 세상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 힘들을 의지한다는 것은, 폭력이 나쁘게 표현해서 그렇게 말하고 사실은 힘이거든요, 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나다움을 위해서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을 무기로 사용한 거예요.
그런데 그 무기가, 내가 의지하고 싶은 그 무기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약점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의지하고 싶은 무기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감으로써 우리는 “오~~안 되는데, 오~~그건 안 되는데, 오~~나는 그것 없이는 못 살겠습니다”라고 “오~~~”를 남발하게 돼요. “안돼~ 안돼~그건 안돼~”라는 식으로요.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무기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로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의 무기 가운데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나의 의’도 거기에 들어가 있어요. 나의 잘남과 나의 과시 같은 것들이 하나의 무기로 되어있는데 주께서 구원하시려면 그 무기들을 하나하나 다 치워야 하는 겁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숲을 가다가 나무가 갑자기 위로 무너졌다면 119 구급대들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그 사람 위에 나무들을 하나하나 걷어 내야 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우리가 아닌 그런 존재가 되고 말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하나하나 다 걷어 내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레절레 도리어 우리 신상에 손해가 된다고 여기면서 극구 우리는 말리죠. “하나님, 그렇게 나오시면 나는 죽어요. 내가 무슨 낙으로 사는데요. 그것 없으면 나는 사는 낙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제가 전에 안양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여자가 신을 믿는 이유는 자식 때문이라고 했죠. 오늘 본문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기 19절에 보면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라고 했어요. 자식마저 죽었어요. 처음부터 죽인 게 아니에요. 처음에는 소 죽였고요, 그다음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양을 죽였고, 그다음에 갈대아 사람이 와서 약대(낙타)를 죽였고 마지막에 자녀를 죽여버립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런 것들 안에서 얼마나 안일하게 살아왔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태평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에 너무 지킬 것이 많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아무 문제 없는 삶이라고 여겼거든요. 이런 것들을 거느리면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거라고 여기고 살았던 그 안일함.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둘 벗겨질 때, 비로소 우리가 생각하는 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내가 현저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죠, 자기가 아기를 낳기 전에는 어머님 은혜를 생각하고 부모님이 내 은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자식이 애를 먹이니까 자식이 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자식 때문에 인간도 아닌 내가 인간 되었다는 겁니다. 부모님이 잔소리한다고 인간 되는 거 아니고 내 자식이 몸이 아프다든지 내 자식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비로소 하나의 찬스(기회)를 갖게 된 거예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자식은 괜찮을 거라고 여겼던 그 자식이 내가 마지막 의지하고 싶은 내 삶의 무기처럼 된 거예요. 그런데 그 무기를 주께서 걷어 갈 때 내가 하나님을 입에 발리도록 이야기했지만 그건 하나에 이론에 지나지 않았고 실제로는 내가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우선 적으로 믿었다는 사실이 폭로 당하는 겁니다.
여기 오늘 본문에서 욥에게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악마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를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첫 번째로는 그 악마가 소를 빼앗는데 옆 동네에서 스바 사람이 와서 납치하고 칼로 죽이는 이런 것까지 동원할 수 있도록 이미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권한을 일임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권한을 줬습니다. 세 번째로 갈대아 사람, 지금의 이란 이라크 사람이죠, 그 사람들이 와서 약대를 도둑질 하는 그것조차도 악마의 진두지휘 하에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19절에 보면 자연현상, 큰 태풍이 와서, 큰바람이 불어서 무너져서 목적을 가지고 욥의 자녀를 죽이는 그런 권세까지 이미 악마의 손에 넘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수로 이 악마를 이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악마에 길들여 있기 때문에 악마에 대해서 전혀 다른 악마상을 자꾸 생각하면서 그 악마가 요구하는 것을 피해 나가면 지금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악마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선악과 따먹을 때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서 여자가 따먹고 그다음 남자가 따먹고 그렇게 되었죠. 하나님께서는 이 책임을 역순을 시키십니다. 악마를 건드리고 그다음 아담과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악마를 건드릴 그 혜택을 그다음부터 인간에게 제공하는 식으로 인간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악마를 먼저 치고 나온다는 것은 인간은 악마의 물리침에 대해서 전혀 손 쓸 것도 없고, 손 쓸 재주도 없고, 그럴 힘도 없다는 뜻이에요. 악마를 이긴다는 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가르쳐준 거짓말입니다. 인간은 악마를 못 이겨요. 악마에 익숙해졌고 악마에 길들어졌고 악마가 시키는 대로 자아상이 형성되어 있는데 악마 없이 ‘나’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어떻게 악마를 이깁니까?
악마가 저질러 놓은 것을 여자의 아들이 해결해 버려요. 여자의 자손이 뱀의 자손을 이깁니다.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악마를 다룰 테니 너는 악마에게서 손 떼라는 말이죠. 쓸데없이 악마 이기려고 하지 말고.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동백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그놈을 보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악마를 보았다는 겁니다.
어느 자리에서 보았습니까? 도대체 어느 자리에서. 동백이라는 그 여자가 악마를 보았다는 것은 내 집안을 거덜 낼 그놈을 보았다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 악마를 보았다는 말은 그 주인공이 자기 삶의 조건으로 여겼던 그곳에서 악마를 보았다는 거예요. ‘내가 그냥 살도록 좀 놔두지 왜 자꾸 나를 힘들게 하냐? 내가 뭘 잘못했다고 힘들게 하냐?’라고 하는 거죠.
내가 사는 조건으로 삼았던 곳에서 악마는 뭐냐 하면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괴롭힌 놈은 무조건 악마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악마를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죠. 내가 사는 조건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내가 의지하고 싶은 거, 내가 기대고 싶은 것들을 주워 모아서 하나의 바구니 안에서 내가 포근히 보호받고 살고 싶은데 그것을 누가 해치니까 우리는 그 상대를 향하여 ‘나는 악마를 보았다. 까불이를 보았다’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진실로 내 삶의 조건이라고 여겼던 것은 그건 오해였습니다. 삶의 조건이 아니고 죽음의 조건이었어요. 거기서 안심 푹 놓고 악마가 나에게 선악이라는 주사액을 놔서 우리로 자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서히 지옥으로 미끄러지도록 참기름 발라놓고 순조롭게 부드럽게 지옥으로 그냥 모셔가기 위해서 그 죽음의 조건 안에 우리를 놨기 때문에 우리는 감을 잡지 못한 거예요.
시편 73편에도 그런 이야기 나오죠.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아무 탈이 없고 사는데 고민거리도 없고 늘 건강하면서 지옥 가더란 말이죠. 지옥 가는 사람이. 그런데 거기에 비해 천국 가는 사람은 우당탕탕 엉망진창이죠. 왜냐 하면 주께서 그동안 평생에 자기가 귀하다고 여겼던 그런 조건들, 삶의 조건이라는 것이 사실은 너의 목을 조르는 악마가 설치한 하나의 망이었다고 하시며 하나하나 거둬내니까, 그것 믿고 살아가는데 그것 믿고 살아가는 믿을 만한 것들이 하나하나 철거될 때 악마에 길들어진 우리의 악마적 본성이 가만히 있습니까? ‘난 저거 없이는 못삽니다. 이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나 어찌 살라고. 이러다가 나 죽겠습니다’라고 나오죠.
여러분들이 보듯이 성경에 천사와 악마와 하나님에게는 죽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해요. 죽음은 누구에게만 있느냐 하면 인간에게만 죽음이 있는 겁니다. 인간에게만.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해서 죽음이 찾아온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실험대상이 된 겁니다. ‘이렇게 하면 죽고 이렇게 하면 산다’라는 것을 시범 조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너무 장난꾸러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인간을 배제하고의 뜻이 아니라 인간에게 일을 벌여놓고 인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게 만들고 그 벌어진 일에 하나님이 위에서 그냥 쳐다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경로를 밟고 와요. 그 과정을 거쳐서 온다고요. 인간들이 힘들어하고 어려워할 때, 인간의 그 어려움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그 인간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주님께서 일부러 찾아와요.
찾아와서 그들이 겪었던 고민과 걱정과 괴로움을 몸소 다 체험하십니다. 그걸 체율 하신다고 하죠. 같이 공감한다는 뜻이에요. 인간은 어려울 때 원망을 하나님에게 해대는데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그걸 바꾸라는 겁니다. 공격 표적을. 나 하나님을 보고 욕할 것이 아니고 그동안 너희 조상 때부터 망쳐놓은 그 악마가 너를 그렇게 망쳤다는 겁니다.
삿대질할 대상을 네가 분간도 못 하냐는 겁니다. 도대체 누가 누구보고 욕하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망해야 하고 도대체 누가 우리의 적인지를 자기 적조차도 분간 못하는 자에게 그걸 바꿔치기하고 제대로 보게 하시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그 작업장을 만드시고 친히 그곳에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을 보면서 욥은 그렇게 생각했겠죠. 아직 까지는 안 죽었으니까 그다음 차례가 자신이라고. 얼마나 자기가 죽을까 봐 걱정했겠습니까. 그런데 욥을 결국 안 죽이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욥은 그 사실을 모르죠. 모든 것을 다 손대도 생명은 손대지 말라고 사전에 약속했단 말이죠. 그것은 욥에게 뭐냐 하면 죽어야 하는데 내가 왜 안 죽는지에 대한 신기함을 느껴야 해요. 우리가 만약에 욥이라면.
오늘 김장하다가 코에 고춧가루가 들어가 재채기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왜 아직까지 안 죽지. 안 죽는 것이 신기해야 해요. 조선 시대 평균 수명이 47세였습니다. 중세 때는 수명이 더 내려갔고요. 아이들 낳기만 하면 다 죽었으니까. 옛날에는 60되면 복 받았다고 하면서 축하 잔치까지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게 환갑 아닙니까? 옛날에 70까지 살면 하늘같이 봤어요. 저 사람은 무슨 천운을 타고나서 70까지 사느냐. 우리 할아버지도 64세에 돌아가셨어요. 저는 벌써 할아버지 수명의 바를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송해도 90까지 살잖아요. 소주까지 먹어가면서.
도대체 이게 사태가 보통 사태가 아닙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악마의 포로수용소 기간을 늘리신 거예요. 늘리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선악을 아는 것, 다시 말해서 의학과 과학의 발달,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게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 것 같아서 그냥 병원에 가니까 병원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코 줄 꼽으세요”라고 해서, 자기는 안 꼽으려고 했는데 엄마가 뭣도 모르고 “꼽지”라고 해서 어떤 사람 지금 10년째 가고 있습니다. 줄 꼽고 10년째인데 한 달에 400만원.
부모 죽고 난 후에 남은 돈 가지고 호의호식하며 해외여행 가려고 했는데 계획 다 깨졌어요. 어떤 사람은 월 300만 원, 어떤 사람은 월 190만 원, 진짜 누구 말대로 “이게 뭡니까?” 이게 뭐예요. 이게. 지금은 못 빼죠. 지금 빼면 병원에서 “당신 집으로 데려가세요”라고 하니까. 지금은 못 빼는 거예요. 잔꾀, 꼼수 쓰다가 걸려든 거예요. 그 자본이라는 거, 그 돈에, 그 병원이라는 자본주의 돈에 속아 넘어간 거예요.
자본주의는 사람을 사람으로 안 보거든요. 돈 나오는 구석으로 보지.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갚는 것이 아니고 말 한마디에 있는 돈 다 날리게 생겼어요. 지금. 십 년째 간다고 하니까 계산하기도 골치 아파요. 선악을 따먹는 그것이 지식이거든요. 그 지식이 사람 잡은 거예요. 지식이. 몰라도 되는데 몰라도 영생 주잖아요. 몰라도 되는데 인간이 자기 지식 가지고 악마와 싸우면 싸울수록 점점 더 깊숙이 일이 더 꼬이게 되어있다고요.
몸부림치면 점점 더 일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것처럼 아는 것으로 인하여 계속 내가 안다고 하는 그 순간 내가 새롭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 숙제처럼 현장에서 한 개를 아는데 열 개가 모르는 것이 새로 나오는 거예요. 그게 과학의 세계예요. ‘이쯤 알았으면 됐지’라고 생각하는데 거기 가보면 새로운 의문점이 수백 개씩 다시 사격장에 사격판 튀어나오는 것처럼 다 튀어나와요.
전도서에서 오죽 하나님께서 알았으면 제발 좀 공부 많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그렇게 당부했겠습니까? 공부해도 소용없고 무식해도 소용없고 세상은 그냥 헛된 것이고 살 만큼 살면 살아있을 동안에 맛있는 거나 먹고 그냥 살다 죽으라고 했겠어요. 이게 전도서에서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이건 징벌의 표상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이게 정상이 아닙니다. 그럼 정상이 아닌 데서 나오는 어떤 구원의 아이디어도 이건 거짓말이에요. ‘내가 이러면 구원받겠지. 내가 저러면 구원받겠지’라고 하는 거 다 부질없어요. 성령 안 받은 사람은요 마치 자기 자아 위에 뚜껑 기왓장 같은 것이 있어서 30년 신학 공부, 30년 설교 들은 거, 30년 자기 체험한 거, 먼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어도 그 기왓장을 뚫고 가지 못해서 그 딴것들이 무게만 나가지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 신학이, 교리가, 체험이... 아무 소용없어요.
후~하고 불어버리면 도로 생생한 ‘나 잘났다’만 당장에 튀어나와요. 백날 배워봐야 자기의 마음속까지 파고 들어가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방법은 뭐라는 말입니까?’라고 물으신다면 하나님은 이렇게 합니다. “악마야, 그 사람 놔줘라”라고 하면 끝나는 문제예요. 그게 마태복음 12장 29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여기에 보면 “강한 자”라고 나와요. 우리는 악마의 세계, 이 세상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지를 우리는 악마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소소한 자기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나 강한지를 몰라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지를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소 날렸죠, 양 날렸죠, 낙타 날렸죠, 그리고 자식까지 다 날렸잖아요.
이정도 센 상대를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이긴단 말입니까? 상대하지 마세요. 주님께서 다 계획이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악마에게 고개 숙이고 악마에게 꼼짝 못 하고 벌벌 떨면서 살아가게 하셨고 그것조차도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어떤 계획? 주님이 “네가 벌벌 떠는 그 현장에 내가 경유 하고 내가 찾아와서 데려갈게”라고 하세요.
이건 너의 싸움이 아니고 주님과 악마의 싸움인 것을 이젠 너희가 알고 그 선에서 네가 너에게 손을 떼면 되는 거예요. 살 만큼 살다가 손을 떼면 되는 거예요. 코 줄 같은 거 꼽지 마시고요. 하루하루 사는 것이 신기해야 합니다. 내 계획대로 더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과정 속에서 과연 주님이 나를 찾아 왔는지 안 찾아 왔는지 내가 어떻게 확정합니까?
“좀 찾아 왔으면 좋겠는데 그걸 어떻게 확정합니까?”라고 질문 하신다면 거기에 대해서 제가 답변할 것은 바로 내가 의지했던 무기들이 하나씩 무장해제당한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둘씩 다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물론 누가 망하고 누가 죽고 그런 극단적인 것까지 갈 것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어도 내가 그렇게 의미를 두었던 의미가 다 시시해지고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거예요.
뭘 하나 해도 깜짝깜짝 놀라지 않는 겁니다. 여기 욥의 태도를 한번 보세요. 모든 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졌는데 소 죽었지요, 양 죽었지요, 낙타 죽었지요, 요새 같으면 기업이 10개 다 무너지는 것과 똑같은 건데요, 그리고 자식 열 명 다 죽었잖아요. 자식 죽으면 우리 같으면 아마 기절할 겁니다. 정신 나갈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유명한 말씀인, 물론 자칫하면 이론이 될 뿐인데요,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다”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한날에 죽거든요. 그 뜻은 뭐냐 하면 그 사람들은 원래부터 죽은 자였어요.
죽은 자를 하루하루 목숨 연장해 준 거예요. 왜? 예수님의 자기 경로와 자기의 과정을 깔아놓는 징검돌로 사용하기 위해서. 주님은 지금 악마와의 싸움에서 악마의 현존과 존재를 자꾸 들춰내는 거예요. 내가 구원받았나를 생각하지 말고 악마는 지금 나를 쥐고 있느냐 아니면 주님이 쥐고 있느냐에 대한 증거를 우리가 내뱉어 보면 돼요.
주께서 그렇게 내뱉게 하는 거예요. 전에는 혼쭐나고 번개탄 피워놓고 자살하고 싶은 이런 거 있잖아요. 이거 없으면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악마에게 꽉 약점이 잡혔다는 거예요. 약점이 없어야 위협도 없는 거고 겁박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살려고 하다 보니까 스스로 약점을 자꾸 쌓아 놓고 자꾸 그것을 촉구하고 있어요. 자꾸 자기에게 그걸 끌어모으고 있다고요.
이거는 마치 뭐냐 하면 세상 속에 또 자기만의 어떤 아지트, 소굴을 만들어서 ‘이 세상은 든든하니까 나도 든든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안산홍 집단에서 돈 모아서 벙커 만들겠다고 생수와 기관총 구하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전부 다 핵전쟁 일어나니까 살고 싶은 사람은 자기들에게 돈 내라고 하는 거죠. 연합해서 벙커 해가지고 자기들은 따로 3차 대전 대비하자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시나리오니 미리 우리 교주가 알아차려서 자기들이 이런 대비를 한다고 하는데 그 시나리오 소용없어요.
요한계시록 8장 7~12절에 보니까 그 단단한 이 세상이라는 악마의 모든 무기가 첫째 천사, 둘째 천사, 셋째 천사를 통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나를 더이상 가릴 수 있는 태산이라든지 벙커라든지 어떠한 장치도 일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이 힘드니까 ‘아이고, 우리 식구만 살면 되지’라고 하면서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가서 홀로 살려고 자꾸 애쓰는데 그렇게 홀로 살면 복음이 안 들립니다. 그건 하나의 복음 이론이 돼요.
누가 와서 뜯어줘야 하지 자꾸 도피하고 피하고 안 뜯기려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약점만 더 생긴다니까요. 지금 미국에서 히트 치는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보게 되면 집안에 두 개의 집이 또 있어요. 제가 십자가 마을에 줄거리 올려놨는데 하나는 집안에 또 하나의 집인 벙커가 있는데 집주인은 몰랐죠. 자기 집 지하 벙커에 누가 또 한 살림 차렸을 거라고 생각 못 했죠.
이 자본주의 사회가 소위 대기업 안에 빌어먹고 사는 수많은 작은 소굴들, 이름하여 기생충들, 우리는 다 기생충 같은 존재란 말이죠. 또 하나의 집은 뭐냐 하면 뜰에 훤히 보이는 곳에 있어요. 일리노이주 문양을 한 텐트를 치고 자기 아들이 인디언 놀이를 하고 있어요. 아들이야 어차피 식구니까 그런 줄 하는데 텐트 놀이하다가 사람 죽고 난리 나거든요.
그러니까 집이라는 이 자체가 하나 안에 있으면서 각자 각자 분리한다는 되지도 않는 착각에 빠져있어요. 여기까지는 내 것이고 여기까지는 네 것이고. 마귀가 그런 분리나 경계선을 침범 못 할 그런 마귀가 아니에요. 어떤 재산을 모아도 어떤 나만의 세계라도 전쟁 터지면 다 내놓아야 합니다. 다 내놓아야 해요. 이 세상에 피할 곳 없습니다.
안 피하면 돼요. 어차피 전쟁은 우리 소관 아니고 주님이 다 이기고 승리한 거예요. 우리는 자유롭게 살면서 승리를 만끽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숨도 주님을 증거 하는 목숨이기 때문에 오래 살려고 하지 말고 주님 증거 하는 기능이 마감되는 그날이 우리의 배터리 다 된 날이에요.
‘주님, 오늘까지 살더라도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주께서 그 감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 이어져 가게 하시는 거예요. 그 사람의 본질은 그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이 폭로됩니다. 평소에 감사하면 자던 잠에 가던지 암에 걸려 죽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늘 모든 일에 범사에 이미 나와 내 인생은 관련 없고 “악마야, 그 사람 놔줘”라고 말씀하시며 이미 강한 자를 결박해서 주님의 소유가 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천국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살아 보려고 각가지 힘 있다는 무기는 다 집어 들었는데 주께서 하나하나 걷어 낼 때, 우리는 경기하면서 깜짝깜짝 놀라 수밖에 없습니다. 주여, 모든 것이 걷어지고 삼층천에 계시는 주님의 얼굴만 볼 수 있는 스데반 집사처럼 성령에 충만해서 주님 보는 날만 기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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