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오후설교

욥의 메시야성(엽1;6-8) 191103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4. 17:29
2019-11-03 15:05:42조회 : 34         
   욥의 메시야성 191103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욥의 메시야성(욥기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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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19-11-03 16:00 
욥의 메시야성 

2019년 11월 3일              본문 말씀: 욥기 1:6-8

(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성경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나는 장차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과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라는 질문 말입니다. 이 두 개의 질문이 충돌없이 답변을 얻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언급할 때는, 나의 실익은 포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칙과 현실 진행에 있어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로마서 11:36에 보면,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고로 주님이 하시는 일에 호명당하는 식으로 가담되고 쓰여질 뿐입니다.

주도권을 쥐고 현실을 개척할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 일은 그 인간 자신을 위해 일한 것밖에 안 됩니다. 피조물 주제에 단독적 가치를 손에 쥘 수는 없습니다. 즉 자신이 옳다고 여긴 일이라도 주님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그 인간에게 개입할 때, 가치 여부가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칭찬하시는 데, 욥이 단독적으로 완전한 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그의 내부에 먼저 관여하고 계시다는 조건 하에 완전의 의미가 앞으로 밝혀지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마태복음 16장에 좋은 예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먼저 나서서 예수님에 대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 여기에 대해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칭찬해 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런 좋은 대화가 오고갔으면 베드로의 그 다음 행보에 대해서 예수님의 신임이 유지되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태는 예상을 빗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받으심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니 베드로가 또다시 나섭니다. 우리가 있는 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 주님을 반응은 단호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즉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인간성을 보고 대화를 이어가신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베드로의 자질이나 능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베드로의 무엇을 보신 겁니까? 바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베드로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사용하실 때, 베드로가 보는 베드로를 잘라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베드로 입장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예수님을 보호하겠다고 나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건지면서 메시야적 요소를 드러내는 용도로 사용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를 사용하시되, 그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영광이나 가치로 돌려지지 않도록 철저하게 관리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욥을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 여기면서 연속성을 부여합니다.

즉 “나도 저 사람처럼 살면 하나님께 칭찬받겠구나”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과 인간, 인간 대 하나님의 관계를 불연속적으로 가져갑니다. 그것은 관계가 인간의 존재보다 우선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천사들의 할 일은 관계에 종사합니다. 끊어져 있는 인간 세상과 관계를 잇든지 아니면 끊게하든지 천사가 관여합니다.

특히 사단의 경우, 그로 천사 중 하나입니다. 그의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는 일을 합니다.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그 끊어진 상황을 인간들이 알지 못하도록 악마는 인간의 자체적은 존재의 가치를 극대화하고 확대시킵니다. 예를 들면, 수학에서 점이란 크기나 면적인 없고 위치만 표시합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래서 수학의 논리가 이어져 돌아갑니다. 인간을 점으로 본다면 인간 대 인간, 인간 대 하나님 사이에는 관계선만 드러납니다. 이 관계가 바로 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서, 주님, 곧 메시야의 활약으로 나타나는 그 관계선을 보여주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점을 가로 막기 위해 나서는데 그 방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없이도 인간 자체적으로도 충분하게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을 조장합니다. 점이라는 것이 크기나 면적이 없어야 하는데, 점 같은 인간 존재가 자체적으로 풍성한 고유의 세계를 형성하도록 악마가 나섭니다.

이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인간은 자기 즐거움과 자기 만족에 빠져 살게 됩니다. 인간의 이러한 행복추구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과 연속적 관계에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참된 성도라면 그 사람은 메시야와의 관계선만이 뚜렷하게 부각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중요한 바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 따라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갑자기 환경이 변하면서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초막을 지어드릴 테니 이 산 위에 같이 살자고 제안합니다. 갑자기 이 영광스러운 정경은 사라지고 구름 사이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너희들은 내 아들 말만 들으라”고 말입니다. 즉 제자들 자체적 가치가 묵살당하는 겁니다. 예수님 이용해서 뭔가 얻으려는 모든 계략은 다 깨어집니다. 열왕기상 22:22에 보면, 하늘과 땅의 연락망이 미가야 선지자에 주어집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 자리에 있는 400명 선지자 모두에게 악한 거짓말을 하는 영이 보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망 이외에 것에 관심 둔다면 이는 스스로 거짓된 사단의 제안에 속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이처럼 거짓말에 넘어가는 그런 속성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주님과 관련성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실감하셔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계신 메시야께서 원하시는대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1-03 21:23 
3강-욥기 1장 6~8절(욥이 메시아성) 20191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성경 전체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로마서 11장 36절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이는 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라는 이것이 정답입니다. 여기서 ‘주’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두 종류의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모든 것이 계약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씀에 의하면 시작하시는 것이 주님이고 마지막도 주님으로 마감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시작은 끝을 만나려고 진행 중이며 그 과정 속에 우리 인간이 놓여있습니다. 그 원동력, 다시 말해서 이 동력, 이 세상이 움직이고 이 세상 속에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그 힘이 어디서 오냐 하면 바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겁니다. 왜냐 하면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로부터 시작해서.

그러면 욥기를 보면서 이걸 뽑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욥이 얼마나 훌륭했는가, 얼마나 철저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욥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는가가 중요한 겁니다. 많은 사람이 욥기를 보지만 다가설 때 우리가 욥기를 보면서 묻는 질문 자체가 “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과 “주님은 어떤 분이 십니까?”라는 질문 자체가 이게 완전히 다릅니다.

모든 것이 주로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간다면 우리 관심사는 주님이 어떤 분이냐를 이야기해야 해요. 달리 말해서 ‘나를 통해서 주님은 어떤 식으로 나타내십니까?’라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저는 어떻게 돼요? 저의 미래는 어떻게 됩니까?’라는 것에 백날 관심을 두게 되면 여기서 성경해석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처음에 욥이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잘 되었잖아. 나는 욥처럼 되어야지. 나는 욥처럼 되어야지...’라는 그런 의도와 욕망과 목적을 가지고있다면 그건 지금 전혀 욥 속에서 자신의 절대성을 내 비춰 볼 뿐이지 예수그리스도는 여기서 나올 수가 없죠. 성경은 주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 분명히 요한복음 5장 39절에 그렇게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반칙을 범하는 것은 조금도 주저할 줄 모릅니다.

욥기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욥에서 욥을 뜯어내야 한다는 사실을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찾아오게 되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은 뜯어내고 하나님이 담아놓은 인간을, 거기에 없는 인간을 새로 만드는 작업을 하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왔을 때는 아브람을 뜯어냅니다. 뜯어내 보니까 거기에 아브라함이 생겼어요.

하나님이 밤중에 야곱에게 찾아오니까 야곱은 뜯겨 나가는데 야곱이 있던 그 현장에 이스라엘이라는 낯선 인물이 다시 생겨나는 겁니다. 형들을 통해서 요셉을 미워하게 해서 요셉을 죽도록 추방을 하니까 요셉이 간 자리에서 국무총리라는 상상도 못 한 다른 요셉이, 막내동생 요셉이 아닌 자기의 머리가 되는 새로운 요셉이 등장하는 거죠.

그것은 요셉이 훌륭하고 아브라함이 훌륭하다고 하시면 안 되고 어떤 분이 하늘에서 찾아왔을 때 그분이 담고 있는 그분의 특징과 속성과 영광과 풍요함이 찾아왔다는 그 이유 때문에, 접촉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교체가 일어나는 겁니다.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 인간의 자리에서 주님의 영광스러움과 그 거룩함과 완전한 의로움이 우리가 그동안 깔고 앉았던 이 자리를 치워버리니까 치워버리는 작업과 동반해서 그 작업이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욥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욥은 없다’라고. 욥은 없고 욥을 제치면서 거기서 예수그리스도가 욥의 모양새로 등장하는 거예요. 욥인데 그 욥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첨가되면 첨가될수록 욥의 모습을 통해서 장차 오실 예수님의 활동성이 거기서 번져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주님은 어떤 분이 십니까?’라는 질문에 답변이 되는 거예요.

‘욥은 어떻게 돼요? 나는 어떻게 돼요?’라는 것이 아니라 ‘욥 안에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자기를 드러냅니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면 동일한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도 행할 수 있어야 해요. ‘주님 우리를 찾아와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합니까? 주님은 어떤 식으로 주님을 드러내려고 합니까?’라고 해야 하죠.

베드로에게 오늘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6장에 베드로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의외로 너무너무 쉬워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기를 이렇게 보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나서서 16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해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아주 칭찬하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칭찬을 했단 말이죠. 마치 욥기에서 욥이 행동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보면 “이 땅에서 욥처럼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 것과 유사합니다. 단정 지어 놓고 그렇게 베드로를 칭찬했을 때 베드로는 붕 떴겠죠.

그런데 오늘 오전 설교처럼 베드로가 한 마디 건네니까 예수께서 굉장히 섭섭한 이야기를 하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같은 인물 아닙니까? 베드로 그리고 베드로. 반석 그리고 반석. 같은 인물인데 그 괜찮은 고백했던 베드로와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지적받는 베드로 둘 중에 어느 것이 베드로냐는 거죠.

여기서 주관적인 베드로는 배척하고 주님이 보는 객관적 베드로를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겁니다. 이것은 욥도 마찬가지이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자꾸만 내 자신이 낯설어야 해요. 내가 나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해요. 지난 낮 설교에 좀 실례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굴 밝지 않은 사람과 상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도 역시 실례되는 말을 하겠습니다. 변화되지 않거든 상대하지 마세요.

남들이 변했다는 거 말고 뭔가 내가 나 아닌 것 같은 나, 내가 전에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전에는 날 지키고 자존심 지키고 남에게 안 지려고 하고 남에게 안 꿀리려고 하고 남에게 자꾸 과시하려고 하는데 이제 그게 다 부질없고 그게 굉장히 시시해져요. 온갖 드라마 다 본다고 할지라도 동백꽃 필 때고 뭐고 다 본다고 할지라도 재미가 없어요. 뭐 조국 씹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씹어도 껌이 딱딱해지니까 재미도 없고 모든 세상 사는 것이 시시해져요. 그쯤 되면 서서히 떠나시면 되는 겁니다. 재미없으니 못 살겠고 뭘 해도 재미가 없어요.

정말 나이답지 않게 꼭 어른 같은 사람들 있어요. 제가 솔다를 두고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만 같은 나이 또래인데 뭐 방탄 소년단 이야기하지도 않고 주님 이야기 막 하고. 방탄 소년단과 주님 중에 누가 더 셀까? 도대체 나이를 거꾸로 잠식하면서 먹고 있는지, 작년이 90인데 지금 스물다섯이 된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세월이 거꾸로 가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미래가 그 사람을 데려가는 느낌이 드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놀랍고 신기해요. 본인도 신기하고.

그렇다면 이 “주님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라고 할 때 시작과 끝이 서로 만날 때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지요. 욥은 정말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욥은 그냥 조용히 사는 사람이었어요. 하나님께 자신을 좀 건드려달라고 요청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욥 앞에 와서 섰고”라고 되어있어요.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이 창조하면서 창조의 아들들이니까 하나님의 피조물들이죠.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하니까 질문할 수 있죠. “천사들의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라고. 천사들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하면 복잡하니까 답변만으로 간단하게 때우겠습니다.

천사의 하는 일은 모든 것을 존재를 없애버리고 관계를 만드는 일을 해요. 입자를 없애버리고 관계망만 형성하는 것이 천사들의 일입니다. 그 사람의 직업이 얼마고 한 달 수입이 얼마고 키가 몇 센티이고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를 전혀 묻지 않고 줄을 가지고 지도에 보면 서울 대구 이런 지점들을 실로 탱탱하게 연결하는 거죠. 마치 광역 001, 010 같은 기지 탑처럼 전파가 막히지 않고 똑바로 쫙 퍼져나가듯이 그걸 눈에 보이는 실로 표현한다면 실로 팽팽하게 이어주는 거죠.

주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는 그 사람이 갖고 있던 포인트에는 아무 내용이 없어요. 수학에서 점을 어떻게 묘사하느냐 하면 이건 일종의 인간이 지어낸 건데 크기도 없고 면적도 없지만 위치만 있다는 것이 ‘점’이에요. 크기도 없고 면적도 없는데 위치만 있다. 사실은 이건 인간이 만든 지어낸 거고 상상한 겁니다. 숫자에서 ‘0’이라 하는 것은 상상된 숫자예요.

‘0’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숫자라는 것은 뭔가 대비되는 물체가 있어 줘야 하나씩 이름을 붙이는 겁니다. 아담이 개를 보고 이름을 지어주고 소를 보고 이름을 지어주듯이 뭔가 대응체가 되는 게 있어야 언어를 붙이고 숫자를 붙이는데 ‘0’이라는 없기 때문에 숫자 자체가 없어야 하는데 인간은 ‘0’이라고 붙인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세계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세계입니다.

‘0’이 있음으로써 드디어 존재 1이라는 것은 ‘0’부터 시작하거든요. 1이 있다는 것은 ‘0’이 있고 ‘0’이 있음으로써 내가 없음을 통해서 내가 있음을 확인하니까 인간은 그 있음을 포기 못 하니까 그 있음을 극대화하고 무한대로 키워서 인간의 세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게 인간의 세계이고, 벌써 이상적으로 잘못된, 지식의 잘못된 시발점이 오류를 유발하고 있는 겁니다.

욥은 아무 죄가 없어요. 그냥 그야말로 하나님 말씀대로 순진하고 정직한 겁니다. 욥에게 잘못은 없는데 욥의 인생이 요란해진 것은 모든 것이 욥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이기 때문에 욥이 거기에 말려든 거예요. 우리는 고요하게 살고 싶어요. 우리는 무탈하게 살고 싶습니다. 뭐 요란 떨고 유명인사 되기도 싫어요. 휠체어 타고 검찰청 나가서 영장 받고 안 받고 그런 것도 하기 싫어요.

그냥 저 강원도 골짜기, 어느 팔공산 골짜기의 어느 도사 처럼 길도 없고 휴대폰도 안 터지고 아무도 안 찾으면 좋겠어요. 그냥 홀로 살다가 혼자 죽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 중은 뭘 모르냐 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주로부터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관계가 없어요. 실이 없어요. 관계가 끊어진 거예요.

내가 있기는 있는데 누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는가를 모르면서도 평생을 계속 세월 보내고 나이만 먹어 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 단풍놀이하는 사람들 다. 저들은 신났죠. 차 타고 단풍놀이 가고 다 좋은데 문제는 탱탱한 줄이 없다니까요. 관계가. 관계가 없으니까 그 대체로 뭘 하느냐 하면 그걸 위로 삼아서 자기의 점을 면적으로 공간으로 키우는 거예요.

‘나는 수입이 이렇고, 아파트가 어떻고, 내 자식은 어떻고’라고 자꾸 위치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그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거예요. 위치라는 것은 그 자체를 키우면 안 돼요. 위치라 하는 것은 대구, 서울, 부산은 지도상에서는 서울이 크나 대구가 크냐 하면 안 되고 지금 대구와 서울까지 연결선은 기차나 도로망이 어떻게 되어있느냐, 통신망은 어떻게 되어있느냐는 것만 보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관계만 생각하면 돼요. 딴 거 생각하지 마세요. 뭐 ‘밥을 굶습니다. 몸이 아픕니다’라는 생각하지 말라니까요. 그게 뭐냐 하면 그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했고 지난 수요일에 그걸 계약서라고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계약서대로 할 뿐이에요. 죽더라도 계약서대로고 나는 죽더라도 계약서대로 가고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이 잔을 할 수만 있거든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주님의 계약대로 하옵소서. 내가 죽든 말든 주님의 계약한 대로 창세 전 예정한 대로 가게 하옵소서.

모든 것이 주로부터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거. 그래서 오늘 본문의 욥을 이렇게 축소합시다. 쫙 줄입시다. 점으로 봅시다. 욥이 어떠냐 대단하냐를 우리가 묻지 맙시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욥은 경외하고 대단하다고 한 것은 우리가 욥을 보면서 ‘얼마나 대단하길래 복 받았느냐’라는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보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욥이 대단하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고생할 정도로 그리고 벌 받을 정도로 그렇게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욥을 통해서 보여주기 위함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그 대행체로 욥을 줬잖아요. 그러면 하나님 보시기에 욥은 정직하고 순전한 거예요. 마치 욥 안에 누가 들어있기 때문에? 장차 오실 메시아가 들어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보고 껍데기에 불과한 욥을 그렇게 지칭해 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보자, 욥이 얼마나 대단한가. 욥은 이렇게 대단한데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했지? 에이~이건 욥이 완전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욥이 완전하지 않은데 오늘 본문에서 욥이 “완전하고 순전하고 정직하다”라고 하니까 이걸 하나님의 말씀이 엉터리라고, 못 믿겠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정직하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직접 나서서 나무라고. 정직한데 왜 나무라시는 겁니까? 그렇게 나무라실 것 같으면 1장 8절에서 정직하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죠. 우리가 욥이 진짜 정직하고 하자 없는 인물인 줄 착각했잖아요”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욥을 보지 말고 욥 안에 같이 중첩된 메시아를 보라는 거예요.

그러면 욥은 뭐냐 하면 그냥 점이죠. 점.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다루어지는,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하나의 대상체에 불과한 겁니다. 철도라는 언약을 연결하기 위해서 그냥 점찍어 놓은 거예요. 욥도 마찬가지고 저희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태어나서 어느 고등학교 나오고 어떻게 살았고’라는 건 필요없어요. 그냥 점이에요. 점. 죽을 때까지 그냥 점 찍어 놓은 거예요.

예레미야도 그렇고 아브라함도 그렇고 이삭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요셉도 그렇고 그냥 점찍어 놓은 거예요. 점.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당부한 것이 있어요. 구름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제자들은 여기가 좋으니 여기서 살자고 했단 말이죠. 그들은 관계가 아니고 우리 세 명과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이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으니 같이 살겠다는 거예요.

제가 또 변화산 가봤잖아요. 별로 뭐 좋은지 모르겠어요. 여기 앞산보다도 못한 거 같아요. 아무튼 거기서 살자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각자 각자 덩치가 있는 거예요. 점으로 보지 않고 관계로 보지 않고 이 덩치, 존재라는 덩치가 아까운 거예요. 이거 수호해주시고 이거 잘 보전해 달라고 지금 주님 좋은 분 만났으니까 뭐 갈 것도 없이 여기서 손잡고 행복하게 살자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으라”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이미 관계가 끊어졌다는 거죠. 무관계. 관계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 피아노와 다른 악기의 차이점이 뭐냐고 할 때 피아노는 양털로 감싸인 해머(망치)가 탱탱한 줄을 때림으로써 소리가 나는 악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피아노 내부에 줄들이 촘촘하게 많이 있기는 있지만 나란히 있는 줄들끼리는 절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바이올린은 연속적으로 음을 내지만 피아노는 한음 한음 다 쳐야 해요. 그래서 라흐마니노프라는 고집 센 작곡가는 피아노 치는 사람에게 악보에 연결음을 만들어서 이것도 칠 수 있으면 쳐보라고 약을 올리는 겁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심술궂은 작곡가들이 있어요. 그런데 조성진이는 그걸 또 친다고요. 뒤에 떨리는 음을 계산해서 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욥을 두게 되면 이건 불연속성이에요. 연속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연속적이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이 연속적이 아니고 독자적으로 정직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불연속이에요. 불연속이 될 때,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서 의도적으로 이 땅에서는 연속적인 존재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가위로 끊어 버렸어요. 십자가에서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거든요. 끊어 놓았단 말이죠.

끊어 놓은 이유가 뭐냐 하면 그다음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작업을 누가 하느냐 하면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영들, 하나님의 아들들, 천사들이 연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천사가 인물이 얼마나 잘 생겼느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천사가 하는 일은 관계, 철도 공사하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천사는 끊어진 것을 어떻게 이어지게 하느냐가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관계에 관한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천사들 중에 누가 있느냐. 악마가 있지요. “그럼 목사님, 사탄이 하는 일은 뭡니까?”라고 물으시면 그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을 사탄이 해요. 그래서 지금 이 말은 왜 중요하냐면 ‘한평생 살면서 나는 이 만큼 재산 모았고 몸도 건강했는데 갑자기 몸이 아프고 있는 돈도 다 날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좀 도와주소서. 악마 보내지 말고 천사 보내서 내가 가지고 있던 이 부풀어진 나의 영역을 만회하게 해주소서’라고 했을 때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악마는 잘못된 악마예요.

거지 나사로가 죽을 때 부자 됐습니까? 아니죠. 가진 재산 없었죠. 없었는데 그 관계성 하나 때문에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떵떵거리며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악마를 가지고 관계성을 생각해야 하는데 나의 몸 아픈 거 도와달라고 하면 악마가 도와주죠. 왜? 악마가 내가 생각했던 행복이라는 것을 보장함으로써 여전히 악마 입장에서의 관계성은 쑥 들어가 버린 거예요. 진짜 중요한 예수님의 피가 계속 공급되는 그 관계성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독자적으로 네가 나처럼 홀로 잘먹고 잘살면 이게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저의 해석이 무리한 해석이 아니고 열왕기상 22장 22절에 보면 나옵니다. 미가야라는 선지자가 나오는데 미가야 선지자가 그때 아합왕과 연합군 왕이 선지자를 불러놓고 이번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지 실패할지 선지자에게 물어봅니다. 물어보는데 거기 보면 많은 대부분의 선지자가 하는 말이 “승리하게 됩니다”라고 했어요. 왜냐 하면 월급 받고 있거든요.

그 당시 선지자는 오늘날 독일처럼 독일 목사들처럼 월급 받아요. 월급 받기 때문에 나라에서 공무원이 자기의 왕이 승리할 거냐고 물어보면 승리할 거라고 이야기해야죠. 심지어 열왕기상 22장 11절에 보면 오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 하고”라고 하면서 구체적인 모형까지 만들어서 승리에 대한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키는 그런 아부를 떨지요.

그런데 다 승리한다고 그렇게 했는데 단 한사람 미가야한테 찾아간다고 하니까 말립니다. “그 사람에게 가봐야 부정적인 이야기밖에 안 하니까 물어보지 마세요”라고 하니까 그래도 물어보겠다고 하면서 물어보니까 19절~22절에서 자기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하늘의 천상회의를 가봤는데 만군이 그 좌우편에 계시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꼬 하시니”라고 할 때 한 영이 악마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가로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 모든 선지자의 입에 있겠나이다”라고 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조금 어렵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평소에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 안 해요. 어려울 때, 다급할 때,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나’라는 이 덩어리가 연속적으로 더 잘되고 성공하기를 원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선지자에게 묻기를 하죠. 이 땅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 땅의 연속성을 주장하니까 거짓 선지자 하는 말이 “왕의 뜻이 잘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합니다. 왜? 왕이 연속적으로 풍성하게 부흥되고 잘 될 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원하는 바입니다”라고 할 때, 하늘의 악마가 하는 말이 그게 바로 악마가 찾아와서 거짓말을 당신뿐만 아니고 당신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모든 주위 사람들과 친구들에게 똑같은 거짓말의 영을 부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왔다는 겁니다.

미가야 하는 말이 “내가 천상회의를 가보니까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당신이 승리한다는 그 자체가 거짓말이었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하는 자체가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자신이 성공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바로 우리가 거짓말을 요청한 거예요. 하나의 위치로 끝나야 하는데 그게 아니고 관계보다도 독자적으로 내가 잘 될까 할 때 이미 거기에서 악마가 개입한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자신만만한 겁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욥을 칭찬하지만 내가 두루 다녀보니까 모든 인간들은 자기 잘 되고 자기 것 풍성하고 소유 많으니까 하나님 생각 전혀 생각 안 하는 것이 내가 현장 목격한 결론이 그거였다는 거예요. 이 악마의 말을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하죠. 그래야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죠.

사도행전에 그런 이야기 나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니까 어떤 집사 아들도 따라서 자기들도 그렇게 유명인사 되어 보려고 시도하다가 “귀신아 물러가라”라고 하니까 오히려 귀신이 “이게 어디서,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가 말하느냐”라고 오히려 귀신이 그 사람을 구박하는 경우가 생기잖아요.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에요. 그래서 두루 다니는 거죠. 이미 자기 땅으로 접수했으니까. 두루 다니며 모든 인간을 거짓말만 좋아하는 인간으로 색깔을 전부 다 변하게 시켰어요. 물론 욥은 순진해요. 하나님보다 순진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서 순진해요. “목사님, 욥도 마찬가지로 죄인 아닙니까?”라고 하는데 욥이 죄인이라고 하지 말고 조건을 달아요.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욥은 죄인의 역할을 담당했어야 하는 거예요.

베드로가 구원받았지요. 베드로가 지옥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베드로 입에서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라는 사탄의 말이 나와야 예수그리스도가 살아요. 주님은 살고 우리는 죽고. 주님은 성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실패하고. 우리가 달리 실패하겠습니까? 우리가 너무 부푸니까 실패하죠.

우리는 애초부터 위치에 불과한데 너무 우리는 그동안 거짓말하는 영에 너무 길들어지다 보니까 갑자기 나만 잘 되면 된다고 너무 허풍을 떨어서 그렇죠. 허풍 떠는 것을 원래 자리로 돌이키는데 이게 뭐가 실패예요. 하지만 세상적으로 보면 실패잖아요. 실패라는 점이 될 때 우리는 그때 안보이든 관계가 보인다고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할 때 사도 바울이 자기 월급 자랑합니까? 자기 건강자랑 합니까? 이 세상 어떤 것도 그리스도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뭘 자랑해요? 그래서 내가 잘났다고 그 자랑하는 거예요? 실력 있다고 그 자랑하는 거예요? 아닙니다. 관계. 나는 그 포인트고 팽팽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나를 사용했다는 그것만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욥에 대해서 너무 비난하지 맙시다. “에이 이렇게 말하더니 나중에 결국 원망하고”라고 비난하지 맙시다. 다만 욥에게 찾아올 것은 모든 게 죽고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그 작업에 욥이 거기에 말려드는 거, 말려들어서 예수그리스도가 욥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이고 악마든 천사든 그들의 관심은 거짓말 같으면 우리 혼자 살아도 잘 되겠지만 하나님이 지시하면 ‘네가 관계 이어진 자냐? 연속되느냐? 아니면 불연속이고 끊어진 자냐?’ 끊어지면 지옥 가고 연결되면 천국 가죠. 그것만이 천사가 하는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리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던 건 천사요, 요한 계시록에서 이 세상을 불바다 만드는 것도 천사요,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지시이고 예수그리스도 중심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한 것이라면 저희들도 천사와 같이 주님의 약속, 계약만 증거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