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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의 존재성(욥1;9-12) 191110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1. 11. 18:53
2019-11-10 14:53:22조회 : 37         
   사단의 존재성 191110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사단의 존재성(욥기 1:9-12)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1V2upWKtRCI, Hit:1
 이근호19-11-10 15:31 

사단의 존재성

2019년 11월 10일                    본문 말씀: 욥기 1:9-12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①사단은 ‘나는 없다’는 식으로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냅니다. 인간에게 있어 존재란 눈 앞에서 정기적으로 출현되는 대상을 말합니다. 즉 ‘보고 있는 나의 존재성’이 인정되는 조건 안에서만 그 대상의 ‘존재’도 인정해주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 존재성 조건 안에서 악마는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평소에 악마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세상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을 해야 자신의 삶을 수월하게 적응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②인간들은 부지런히 세상 변화를 측정하여 ‘원인-결과’라는 고리를 만들어 나갑니다. 개인들이 자기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지만 보다 더 길고 더 넓은 것까지 지혜를 모아서 질서를 차립니다. 질서를 구상합니다. 체제를 다듬고 개선시켜나갑니다. 왜 이런 짓을 할까요? 그것은 악마가 빠진 그 빈 자리에 인간의 지혜의 결과물로 메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을 몽땅 움직여나가는 그 원인의 자리에 인간들이 찾아낸 납득되는 원인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 입장에서 구태여 신에게 빌거나 신의 자비를 구하지 않고 자력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하고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을 악마가 원했던 바입니다. 그렇게 해서 ③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은 ‘권력’입니다. 인간에게 몸이 있고 비록 그 몸이 원하는 바가 있더라도 권력은 촘촘하게 더 세게 작용합니다.

1〜2cm 철사 하나가 새를 가두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철사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는 새를 멀리 날아가지 못하고 가두어두는 새장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비록 철사 사이에 허공들이 보인다 할지라도 새는 그곳으로 갈 수 없듯이 이 세상의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우겨도 세상은 내 마음대로 살 수없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도닦고 있다가 시내를 내려온 도인은 버스 탈 때부터 당황스럽게 될 것이다.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한 권력망으로 인간들을 가두어놓고 있습니다. 따라서 ④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그 권력이 나를 무엇이라 지정해준 그 신분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권력은 개인의 몸에 작용하고 이로 인해 개인의 몸을 비로소 ‘주체’ 곧 자아가 됩니다.

이런 주체들, 자아들이 이 세상을 각가지 계열과 노선을 만들어냅니다. 한국의 좌파는  NL
(National Liberation/자주파)계열과 PD(People's Democracy/평등파)계열이 있습니다.  NL계열은 북한과의 관계(통일)를 중요시하는 친북좌파(주사파=주체 사상파)로서 한국좌파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  NL계열이 통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반면, PD계열은 통일보다 노동자 농민이 행복한 평등사회를 위한 계급투쟁을 지향합니다. 한국의 보수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안고 가겠다는 파가 있고 박근혜 대통령을 버리고 가자는 파도 있습니다. 즉 ⑤인간의 사회는 인간 손으로 조성해 가면서 이상사회를 이 땅에 펼쳐보이자는 겁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겁니다.

⑥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각가지 계열과 노선들이 모두 악마가 조성한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⑦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악마에 의해서 만들어놓은 모든 노선과 계열을 자신이 다니게 되는 골목으로 만드시고 그 끝에 십자가로 마감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인간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식으로 살아 왔음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죽을 죄’기 뭔지를 모릅니다. ‘죽을 죄’는 예수님만이 아십니다. 인간들은 죽어가면서 ‘왜 죽어야 하는 지’를 모르고 죽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마땅히 죽을 자’임을 알리시면서 죽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예수님께서 악마가 깔아놓은 그 노선을 따라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그 어느 누구도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음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즉 그 어떤 인간도 십계명이나 십일조나 성전이나 예배당 사수하고 교회 운영해서 구원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원인 찾기’의 일환이기에 그 끝은 필히 십자가로 빠지게 됩니다. 

즉 모든 인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자신들도 필히 죽어 마땅한 존재로 드러나는 겁니다. 인간들이 악마를 상대해서 이겨서 구원받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없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악마를 만난 천사도 악마의 할 일에 대해서 주님께 일임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인간들은 철저하게 배제된 채, 악마와 하나님께서 쑥덕쑥덕해서 생긴 일입니다.

⑨그 어떤 원인을 자체적으로 찾을려고 하기 마세요. 차라리 미리 아세요. 모든 원인은 다 하나님께서 십자가 죽으심을 위한 노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되지 않음이 절대적 기준으로 확정되었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은 서로를 위로하고 용납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⑩하나님께서 지정해놓은 절대적 기준인 십자가는 그 어떤 경우에도 봐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 이후에 이 원리는 이 세상에 어떻게 ‘원인 없음’으로 작용합니까? 그것은 시간 자체를 증발해버리는 겁니다. TV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보통 시간이 빨리 가는 식으로 정리합니다.

‘3년 후’ 혹은 ‘7년 후’라고 자막이 나오지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이후는 종말입니다. 마지막 회입니다. 시간이나 인간의 자질을 묻지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천국 갈 자는 천국 보내고 지옥 갈 자를 지옥 보냅니다. 이유도 없습니다. 단지 십자가 기준으로 그렇게 결정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벌써 인간이 무엇이냐라는 것은 악마의 정복으로 영적 세상의 실정이 다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의 지혜는 이런 점에서 어리석은 것들이요 철저하게 악마의 밥입니다. 십자가를 알고 죽어도 상관없음을 아는 자만이 이 세상 악마의 권력에서 벗어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만 최종적이다 사실을 주저말고 자랑하며 존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1-10 20:13 
4강-욥기 1장 9~12절(사단의 존재성) 201911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장 9~12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신방을 갔는데 어떤 분이 참 중요한 질문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오기 전까지는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이었어요. 평소에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인데 수십 년 만에 이제야 저에게 들려오는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아 때, 모든 인류의 조상인 노아 때, 하나님께서 일을 일으켰고 노아 후손이 흩어지면서(창세기 11장) 노아가 있었던 이야기가 회자 된다고 하죠. 사람들 사이에 다 퍼지는 겁니다.

퍼지면서 신을 부정하지는 않고 신의 법에 위반되면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느 민족이든 다 있습니다. 그래서 노아 이야기는 모든 민족에게 노아 홍수 이야기가 그들의 신화에 기반이 되어있고 하나님 앞에, 신 앞에 바르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확대되어있는 겁니다. 욥 이야기가 언제 이야기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시대지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구체적인 계시를 욥에게 내린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네가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라고 지시를 하지만 욥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욥은 이방 사람이지만 아브라함은 셈족속이거든요. 1절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라고 나오거든요. 욥은 하나님의 약속계열과 다른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욥에게 주신 겁니다.

왜 제가 이 말을 하느냐 하면 이 욥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땅에서 인간이 성전을 짓는다든지 십일조를 한다든지 그런 이야기는 다 이스라엘계열에서 나온 거예요. 욥의 계열에서는 성전 짓고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고 하는 그런 구체적인 율법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거 없어도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인간은 구원되는 겁니다.

성전이라든지 교회라든지 십계명이라든지 율법이라든지 그런 거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율법 주시고 십계명 주시고 성전 지으라고 하시고 여러 가지 제사를 지키는 것은 뭐냐. 그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 되는 속에 있는 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인간이 뭔가 하고자 하는 일이 너 자신에게 전혀 소용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들에게 지시한 거예요.

지시를 해놓고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지시를 따랐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들이 몰랐던
 그들 자신도 몰랐던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파악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준 취지가 그런 겁니다.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해서 인간이 구원된다는 것은 이건 인간 입장에서 성립이 안 된다는 거죠. 죄인이 무슨 구원을 받습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내가 구원받겠다. 천국 가겠다. 죽어서 좋은 곳에 가겠다’라는 것은 아예 그러한 망상 같은 것은 접으라는 겁니다.

그건 욥도 마찬가지예요. 비록 율법은 없지만 욥으로 하여금 욥이 구원받는데 어떤 인간이 할 도리라든지 인간이 뭘 했다는 것이 아무짝도 쓸모없다는 것을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욥은 나름대로 경건하게 살았다고 하지만 그 경건이 거룩이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이건 하나님과 사탄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오늘 본문 9~12절 이야기는 지금 욥은 전혀 생판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예요. 왜냐 하면 이 이야기는 인간은 빠지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악마와 둘만의 대화이기 때문에 인간들은 컨닝할 수도 없어요. 어떻게 엿들을 수도 없습니다. 인간은 배제해 놓고 하나님과 천사들끼리 속닥속닥해서 일을 벌인 거예요.

어떤 분은 생각하겠죠. ‘신이시여, 나는 왜 이렇게 잘 생겼습니까? 나는 왜 이렇게 참하게 생겼습니까?’ 그건 네가 잘해서가 아니라 이건 하나님과 악마가 속닥속닥해서 잘생긴 거예요. 이건 자기 자랑할 문제가 아니죠. 우리가 평소에 고맙다, 감사하다고 할 때 말을 유념해서 사용해야 해요.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이 내가 은근히 기대했는데 마침 이걸 주셨다는 식으로 되면 그건 제대로 고맙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예상 밖의 일이어야 해요. 예상 밖. ‘나는 왜 이리 잘생겼습니까?, 나는 왜 이리 공부를 잘합니까?’라고 하면 남들 보기엔 지금 잘난 척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은 아주 심각한 거죠. 예를 들면 ‘나는 원정도박이 왜 이리 재미있습니까?’라고 하면 이건 본인 잘못이 아니고 YG 사장 잘못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탄이 그렇게 의논해서 원정도박에 재미를 붙이게 하신 거예요. 그건. 그래서 그 사람이 지옥 가는 것도 주님 쪽에서 속닥속닥해서 지옥 보내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 것도 주님께서 속닥속닥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야기는 끝났어요. 우리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뭐 수능 잘 쳐서 대학가는 거랑 천국 가는 거랑 다릅니다. 대학 가는 것은 내신 성적이 반영되지만, 천국에는 내신 성적이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냥 속닥속닥 이에요. 속닥속닥. 자기들끼리 알아서 다 처리하고 끝나는 겁니다.

그리고 결론 난 것이 운명에 찾아들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아, 하나님이 홀로 결정했구나’라는 사실을 이미 결과적으로 알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사람이고 그 결과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 없이 ‘최선을 다해보자, 노력을 다해보자,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해보자’라고 하는 사람은 이제 지옥 가는 거죠. 제가 이 말씀 하는 것은 오늘 9절 때문입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하는데 이 까닭이 없다는 원이 없다는 사실을 사탄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겁니다. 까닭이 없다. 그러니까 사탄이 반대하고 나서는 말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사탄이 “원인 없이 구원되는 법은 없습니다”라고 나올 때 여기서 우리가 사탄이라는 말을 끊어 봅시다.

끊어 보게 되면 우리가 사탄이라는 말을 이렇게 할 때, 이 대목에 대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말씀을 대하면 강력한 반발이 우리에게 자연적으로 나와야 해요. 왜냐 하면 우리에게 평소에 우리 생활에는 사탄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없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성경 보면서 사탄 나왔다고 사탄에 대해서 뭐 아는 척하지 마세요. 평소에는 사탄이 없는 생활이 우리에게 딱 맞아요. 악마는 없는 겁니다. 왜? 우리는 이성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악마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우리 생각이 아니고 악마의 생각이에요.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 방법으로 활동합니다. 악마가 존재한다는 말은 지속적으로 우리 눈앞에 출석하는 것을 존재라고 하거든요. 우리 눈앞에 등장하는 것을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도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그러나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악마는 인간에게 말하기를 “나는 없는 거야”라고 하면 나타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악마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악마가 원하는 바입니다. 악마는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악마가 없다면 결국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 일어나는 모든 절차와 그 관계에 대해서 그 원인을 어디서 다 집어넣어야 하느냐 하면 인간이 갖고 있는 이성과 지혜로 다 끼워 맞춰야 해요. 모든 세상 돌아가는 것을. 질서를.

질서가 이런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그 원인과 결과를 인간 쪽에서 수고스럽게 다 집어넣어야 하는 거예요. 그 집어넣고 마련된 것이 뭐냐 하면 노선과 계열입니다. 노선과 계열. 보통 정치할 때 “너는 어느 노선이냐?”라고 하죠. 국가에도 ‘사회주의 노선’인지 ‘민주주의 노선’인지 이야기를 하는데 모든 각자 취향과 느낌대로 어떤 노선을 형성하기 마련입니다.

여러 가지 노선들이 있는데 한국의 좌파는 NL (National Liberation/자주파) 계열과
PD(People's Democracy/평등파) 계열이 있습니다. NL 계열은 북한과의 관계(통일)를 중요시하는 친북좌파(주사파=주체사상파)로서 한국 좌파운동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 NL 계열이 통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반면, PD 계열은 통일보다 노동자와 농민이 행복한 평등사회를 위한 계급투쟁을 지향합니다. 계열들이 자기들끼리 지금 복잡합니다.

한국의 보수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을 안고 가겠다는 파가 있고 박근혜 대통령을 버리고 가자는 파도 있습니다. 그런 계열들을 연결이 되어있는데 그 계열의 끝이 뭐냐 하면 악마는 없다는 것에 공통적으로 모이게 되는 거예요. 악마는 없다. 즉 인간의 사회는 인간 손으로 조성해 가면서 이상사회를 이 땅에 펼쳐 보이자는 겁니다. 다른 대안이 없는 겁니다.

제가 예를 들면 철사 하나가 있고 새가 있다면 새는 1~2cm 철사 하나를 무서워하고 갇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1~2cm 철사 하나 정도야 거뜬히 피해서 창공을 향해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사 하나가 아니고 만약에 50개쯤 해서 촘촘하게 망을 만들었다면 분명히 허공은 보이는데 막상 새들이 날아서 올라가려면 날개가 그 촘촘한 철사 망에 다 걸려서 갇히게 되죠. 분명히 철사는 가늘고 철사와 철사 사이에 허공은 넓어 보이는데 날려면 방해가 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의 몸이라는 것은요 분명히 돌아보게 되면 뭐든지 내 맘대로 할 것 같은데 촘촘한 권력 망이 철사 망처럼 꽉 짜여 있어요. 하고 싶다고 맘대로 못 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지리산에서 도 닦고 나오고 깊은 산에서 도 닦고 나온 사람들이 가장 크게 실수하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버스 탈 때, 카드가 없다는 사실이에요. 세속을 떠나서 산속에 있다 보니 자기는 이 자유로움을 맘대로 한다고 버스를 타는데 동전 내려고 한다고요. 옛날처럼.

시대에 따라서 권력의 구조형태가 다 다른 것을 모르고 말이죠. 앞으로 노인들 은행가는 것도 이제는 힘들어져요. 은행이 점점 없어지는 추세예요. 은행 거래도 돈거래도 못 할 것 같아요. 이제는 전부다 모바일로 하니까. 촘촘한 권력 망에 의해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뭔가 갇혀 있는 겁니다. 권력이 몸에 작용하게 되면 나오는 것이 주체입니다. 자아라고 하는 주체. 이게 공식이에요.

권력이 우리 몸을 감싸게 되면 ‘나’라는 것은 ‘나’가 아니고 그냥 권력 안에 일부 부속품이 된다는 원리입니다. 이건 공항 수속 밟을 때 철저하게 느끼죠. 바로 몇 미터 안 되는데 나가려고 하면 못 나가게 해요. 줄 서야 하고 차례 되면 기계로 온몸을 위아래로 조사 다 해야 하고. 이게 뭐냐 하면 권력 망이거든요. 어느 것 하나 자유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 권력 망에 있을 때 어떤 인간도 그 권력을 악마가 줬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해요. 이건 우리가 공동체로써 편리하게 살기 위한 사회적 협약과 계약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근대의 법 이론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걸 사회 계약설이라고 하는 거예요. 좋은 것이 좋다고 서로 협의해서 이렇게 만들어 놨다는 거예요. 그 권력이 악마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인간은 생각 못 합니다.


그래서 욥도 마찬가지예요. 이유도 없이 된통 당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욥에게 하도록 사탄에게 허락을 하느냐하면 여러 번 말씀드렸던 건데 다시 말씀드립니다. 인간이 만든, 악마가 짜놓은 권력 망의 노선과 계열을 따라가게 되면 그 끝에 뭐가 보이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사탄을 그렇게 활용하신 거예요.

인간이 모든 계열과 노선을 만들어 놨지만, 그 만들어진 계열과 노선은 악마가 만들어 놨고 악마가 만들어 놓은 노선과 계열인 그 고속도로와 간선도로 따라서 누가 오시는가 하면 장차 하나님이 그 노선 따라오셔서 그 최후의 마지막 모습이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으심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악마를 이용해서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사는 골목 골목길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인간은 그걸 못 빠져 나와요. 왜? 권력이 있기 때문에. 권력이라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이런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몸이 있더라도 몸이 있는데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그건 옆에 있는 권력자가 “너는 이정도야.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내가 지금 공부를 하는데 어느정도 실력이 되고 수준이 되는지 모르잖아요. 이럴 때는 수능을 치는 거예요.

수능을 치면서 전교 백분율 나누면 전교 25등이고 25% 안에 속한다고 딱 정해주는 겁니다. 그렇게 전교 뒤에서 25등 한 성적 가지고 서울대 가서 “원서 내러 왔는데 되겠습니까?”라고 하면 “수능 몇 점인데?”라고 하면 “400점 만점에 120점입니다”라고 대답하면 “너는 너의 주제를 아나?”라고 되묻겠죠. 서울대학은 권력 단체예요. 그 아이는 서울에 있는 대학은 전부 못 들어가요. 왜냐 하면 그 하나하나가 전부 다 권력 단체거든요. 회사도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내 몸은 배고픔을 이야기하고 내 몸은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싶은데 그거는 어디까지나 사적인 너의 주장에 불과하고 남들이 너를 어떻게 지정해 줬는지 그 증명서를 갖고 오라는 거죠. 그 증명서를. 그 증명서는 내 뜻이 아니에요. 그 원인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악마입니다. 그래서 악마는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권력은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가차 없이 악마를 모르니까 이성적으로 따져보니까 그렇게 말하는 거죠.

권력은 인간에게서 나온다고 어설픈 변명을 하는데 주님께서 오셔서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인간들아. 모든 권력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악마와 의논해서 나온 거야”라고 제시한 거예요. 그리고 악마의 존재 이유는 예수님이 그 악마의 힘에 의해서 죽어서 다시 부활 되기 위해 악마를 이용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지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이 어리석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욥은 까닭없이 당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지만 인간은 그렇게 자신들이 살 때 악마의 말을 듣고 산다고 생각 안 하지만 세상에 있는 어떤 원인 질서를 찾아서 계열과 노선을 따라가다가 정작 이것도 저것도 안 될 때는 모든 걸 포기하는 죽음 앞에서는 “몰라, 몰라, 권력은 저리 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래”라고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암 4기 말기쯤 되면 강아지 구충제 먹는 거예요. 펜벤다졸. 한국 의약회에서 제발 먹지 말라고 해도, 병이 악화되고 간장이 나빠진다고 해도 이미 나빠질 대로 다 나빠져서 병원 의사도 손들어 버렸는데 뭐가 걸려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마당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강아지 있는 거 다 뺏어 먹고 직구 하고. 국내에 있는 강아지 구충제는 완전히 다 동났어요. 1~2만 원 하던 것이 4만 원까지 올라가고 난리예요.

직구 해서 먹겠다는데 본인이 먹겠다는데 개그맨도 나았다는데 뭐라고 해요. 강아지 먹는 거 먹으면 해롭다고 해도 더이상은 자기에게 해롭다는 말을 하지 말란 말이죠. 그 암 4기에서 우리가 배울 게 뭐가 있겠어요. 이걸 배우는 겁니다. 악마에게서 이기는 방법을. 바로 내가 이미 죽은 인간이라는 것을 미리 챙기는 겁니다. 그동안 얼마나 권력에 타인에 호되게 시달렸습니까?

인간은 악마와 함께 있으면서 뭘 모릅니까? 죽을 죄를 몰라요. 죽을 죄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께서 죽을 죄 알려 준다고 십자가 지신 겁니다. 예수님이 먼저 죽어버렸거든요. 그 십자가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죄예요. 죽을 죄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지시한 사항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죽을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지시할 사항을 제대로 직시하는 대표자가 누구냐 하면 그게 악마인 겁니다.

유다서 1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이라고 되어있어요. 이거는 인간이 악마를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마인 너를 처리하기를 바란다고 했어요. 그 정도로 악마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존재하는 인간이 악마를 다룰 수 있는 어떤 역량이나 재주는 없어요. 그냥 당하기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대처하느냐. 인간 본인도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거예요. 내가 이미 죽었다고 보게 되면 비로소 악마에게서 벗어 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방법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줌으로써 그걸 활용하신 거예요. 어떻게 활용하시는가? 보통 드라마 같은 거 보게 되면 마지막 회에 시간이 빨리 가요.

태양의 계절 마지막 회는 시간이 갑자기 3년 후딱 지나가 버리고요. 수상한 장모는 7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어요. 이 이야기가 재밌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 이후는요,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리는 거예요.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질 때 고린도 후서 5장에 보면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 십자가 지심으로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 되어있다고요.

죽은 것이라. 모든 권력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악마가 잡으려고 해도 참기름 발라서 쑥쑥 다 빠져버리는 거예요. 악마가 성도를 어떻게 갖고 놀 수가 없어요. 왜? 주님이 선수 쳐서 악마가 죽이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죽여버렸거든요.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다른 것은 다 손대도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죽이지 말라는 것은 욥이 안 죽는다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에 자기 백성 욥을 죽일 때는 주님의 자기 뜻을 담아서 죽이는 거예요. 왜? 그래야 주님의 손으로 죽인 자가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 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영생 되기 때문에. 지금 주님이 우리를 쑤시는 것은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쑤시는 거예요. 여러분들 오뎅을 손으로 집어서 막 먹습니까? 작대기로 쑤셔서 먹잖아요. 쑤셔서 먹잖아요.

주께서는 십자가로 쑤셔서 십자가에 꽂힌 채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의 양식이 되는 겁니다. 기쁘시게 하는 양식이 되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오뎅입니다. 이걸 종말이라고 하는데 드라마 마지막 회에서 인류의 드라마 마지막 회에 들어가서 이건 뭐 생년월일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데요. 후딱 지나가요. 7년 후에 그들은 유학 갔다 왔다고 하면서 후딱 끝나요. 나쁜 짓 하던 사람은 7년 후에 출소해서 두부 먹고 있고.

마지막 모습은 뭐를 빨리빨리 수습하기에 바빠요. 성경은 뭐라고 하느냐. “그래서 저 인간은 지옥 갔고, 그래서 저 인간은 천국 갔다. 끝!!” 아주 주님이 바빠요. 분류하고 처리하느라. 천당! 지옥! 지옥! 천당! 분류하시느라 바빠요. 언제 우리가 뭐 했고 뭐 했던 거 신경 쓸 시간도 없어요. 빨리빨리 천국 가고 지옥 가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결정하는 기준은 우리 인간끼리는 위로가 되고 도와주면 되지만 인간끼리는 되지만, 주님에게서 나오는 절대적인 십자가 기준은요 절대 이것은 양보 없습니다. 일절 봐주는 거 없습니다. ‘우리 딸이니까 남편이니까 아내니까, 주여, 십자가 몰라도 복음은 좀 봐주세요’라고 하는 이런 거 없습니다. 일절 없어요. 봐주기 없어요.

따라서 여러분들 성도입니까? 봐주지 맙시다. 진짜 구원의 기준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양보하지 않는 기준. 그거 지켜야 하지 자기 자존심이나 지키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는 욥처럼 당해야죠. 욥은 지금 누구에게 당하는지도 몰라요. 그냥 아파요. 꼭 우리 같아요. 그냥 아파요. 눈도 침침하고. 원인은 저기 속닥속닥에서 왔기 때문에 괜히 ‘내 탓이요, 내 탓이요’라고 하지 마세요.

네 탓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냥 네 인생 그렇게 살라고 그냥 일방적으로 쑤셔 넣은 거예요. 그러나 결국 마지막은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그 모든 계열과 노선은 십자가에 다 꽂히고요, 십자가에 꽂히면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부활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원인 없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히려 원인을 찾는 그것이 악마의 술책인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사오니 내 탓으로 살지 말고 십자가를 위한 작업인 것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