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15:00:24 | 조회 : 46 | 하나만 주목191201 | 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 | | | 이근호
| 19-12-01 15:40 | 하나만 주목
2019년 12월 1일 본문 말씀: 욥기 2:1-6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2: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2:3)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2:4)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사단과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우리 인간에게 낯익는 대화 내용을 접해야 합니다. 평소에 우리 인간들의 마음이 악마로부터 주어졌고 이로 인하여 인간의 모든 마음이 악마의 통제를 받고 있는 상황인 것을 알아채려야 합니다. 악마가 인간들을 겁주고 있는 내용은 악마는 인간 전체에 차등없이 적용하려고 합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본인의 의지없이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인간들이 기억하고 예상할 수 있는 특수한 일은 다음 두 가지 경우 뿐입니다. 하나는 아주 잘 되는 기적이거나 아무나 아주 망해버리는 기적입니다. 즉 인간들은 실생활에서 늘 이 가지 경우를 잣대로 삼아 살피게 됩니다. 나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신으로부터 보호받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서 신으로부터 호감을 얻어 예상밖의 큰 이익이 있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이 두 가지 경우에 끼여서 살아갑니다. 두 가지 경우이니까 이것은 숫자로 하면 2가 됩니다. 인간은 2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악마는 인간을 줄곧 조정해왔습니다. 어느 인간도 예외에서 그렇게 되게 했습니다.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보통의 삶’이란 실은 이 2 사이에 끼여 있는 삶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아무리 지금껏 일이 잘 풀였다고 자부해도 ‘망했다’는 경우를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2를 보지 않고 1을 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그당시 여타의 사람들을 구별해서 생각하시는 겁니다.
모든 인간들은 조용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분란이 일어나지 않는 삶이기를 원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사는 방식 안에 묻힌 채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는 늘 놀랄 수밖에 없는 불안한 정서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대기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이점에 대해서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악마는 자신만만합니다.
자신이 온 인간 세계를 다 둘러보았다는 겁니다. 별 인간이 없다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서 특별남을 언급하십니다. 이로서 하나님과 욥 사이에는 유일한 1이 성립됩니다. 즉 욥과의 하나밖에 그 관계성을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키울 생각을 하십니다. 반복시킬 생각입니다.
악마는 이 1의 관계까지 훼손시킬 의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자신만만하게 욥을 악마에게 넘깁니다. 단 생명을 손대지 말라 고 합니다. 이는 욥의 존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욥이 보여줄 1의 기능성이 중요한 겁니다. 즉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과 욥과의 관계의 변동없음을 하나님께서 세상 원리로 적용시키시려고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찾아나오는 이유는 재수 좋아라고 나옵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무심코 살아가는 사고방식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1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그저 무탈하게 조용스레 흘러가기를 바라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심성을 염두에 두고 1의 특수성을 알리고자 예수님을 보내신 겁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자신이 죽어서 천국갈거냐 아니면 지옥갈거냐에 있습니다. 자기만의 특별함에만 치중해서 성경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3:47-50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대하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미래 운명을 걱정하고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의 2 사이에 끼어서 불안해 하는 자기 내면을 노출하는 겁니다. 참으로 욥처럼 하나님과 1의 관계에 있는 사람은, 이런 결정을 하시게 되는 그 1 되시는 분에 관심을 갖고 주목하게 됩니다.
즉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은 고기 되느냐가 아니라 좋고 나쁜 고기라고 판정을 내릴 결정권을 가진 분은 과연 누구신가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란 바로 그 분의 결정권을 펼칠 기능자로서 나타난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 바로 이 사실을 말해줍니다.
남들이 자기 걱정할 상황에서 세례요한 그저 자신은 ‘〜소리’라고 소개합니다. 즉 너희들은 자기 존재위주로 남들에게 보이는 식으로 자기를 평하지 말라는 겁니다. 세례요한 자신은 단지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소개하는 스피커에 불과하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이 예수님의 기능자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는 자기 운명을 자신이 개척해나가는 처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자기 권한을 접고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의 권한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1-12)
구원은 예수님의 고유권한입니다. 인간이 사정사정한다고 해서 천국가는 게 아닙니다. 이 기능성 존재가 곧 구원받은 자입니다. 마태복음 9:16-17에 보면,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즉 예수님의 관심사는 새포도주입니다. 복음입니다. 성도는 단지 담는 부대에 해당됩니다. 찢어지지 않는 부대를 위해서 성도는 2의 관계가 복음으로 인해 여지없이 찢어져야 마땅합니다. 2의 관계에서 욥처럼 1의 관계만 주목하는 것은 그 안에 십자가복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특수한 존재인 줄을 모르지만 성도는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에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일을 만드신 겁니다. 분란을 일으키신 겁니다. 스스로 일만 만들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주님 위주로 1의 관계만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고생담이 그대로 성도의 인생을 통해 터져나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늘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 | 이근호
| 19-12-01 21:45 | 7강-욥기 2장 1~6절(하나만 주목) 2019120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장 1~6절입니다. 구약성경 761페이지입니다.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오히려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켰느니라,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세상에 사람들이 참 많지요. 지금은 인구가 75억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그 75억의 사람들이 고만고만하고 서로 동일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들 생각이고요.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 가운데 꼭 집어서 한 사람에게 주목해 보라고 지금 사탄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 주목하라는 거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는데 그 주목하는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시는 한 사람에게 주목하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이게 안 돼요. 왜냐면 인간은 이미 악마의 마음을 담았기 때문에 오직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기 바빠서 자기 빼놓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에게 몰두한 만큼만 몰두할 그런 재주나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사탄이 말하기를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어디를 다녀왔느냐”라는 말에 사탄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여기저기’라는 말에 제가 생각나는 것이 대기업에 들어가 연봉 1억 넘게 받다가 사는 게 너무 지겹고 업무에 너무 치인다고 답답하다고 대기업 사표 내고 자기 가족 4명이 돈 5천만 원 목돈 쥐고 전 세계 여행 다니는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다녀봤자, 저기 아르헨티나 가고, 그리스에 가고, 아프리카에 가고, 러시아 가고, 중국에 가고, 북한에 가고 해봤자 거기는 자기가 자기에게만 주목하고 자기 가족에게만 주목할 뿐이에요.
하나님이 주목한 곳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다는 말이죠. 그거 다녀서 뭐 하는데? 자기 딴에는 세상에 대해 좀 알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알 수가 없어요. 주님이 주목하는 곳에 주목해야 하는데 주님이 주목하는 곳은 끊어져 있고, 다른 말로 자신은 자신이 평소에 주목한 것을 자기 자신을 질질 끌고 인도 갔다가 중국 갔다가 동네 돌아다녀 봐야 집에 오게 되면 피곤한 자기 몸 신체만 끌고 올 뿐입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하면 남들처럼 안 살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로 보는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주목한 사람을 보지 못하고 남들처럼 차이나게 개성 있게 살게 되면 자기만의 어떤 괜찮은 인생이 될까 그런 식으로 버티는 겁니다. 악마는 두루 다녔다고 하고 하나님은 한 사람만 유의하고 한 사람만 고집하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악마의 차이점이 나오죠. 그 한 사람에 대해서 악마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욥을 추천하니까 악마는 악마의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뭐냐 하면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라 하는 것은 자기 인간들이 바라고 있는 일이 잘될 때 그것을 기적으로 여긴다는 겁니다.
자기가 두루 돌아다녀 보니까 모든 인간을 다 살펴보니까 인간은 별거 없는 이유가 인간에게 기적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잘 되면 좋아하고 못되면 싫어하는 거 그게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한계였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악마는 어디에 주목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그 하나, 숫자로는 1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잘될까 못될까 하는 2의 관계, 잘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다는 2의 관계, 두 개의 결과를 놓고 늘 전재고 계산하고 고려하는 여기에 악마는 치중하는 겁니다.
“욥이 지금 잘 먹고 잘사니까 지금 하나님을 섬기지 만약에 잘못되면 하나님을 원망할 겁니다”라는 식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거예요. 악마의 관점은 뭐냐 하면 잘됐다, 못됐다는 두 가지 경우를 항상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뭐냐 하면 그건 네 생각이고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께서 욥에게 관련지었다는 그 관계성, 하나밖에 없는 그 관계성에 주목하라는 겁니다.
교회 다니다가 절에 다니면 관계가 어디냐 하면 교회 다니고 난 뒤에 종교를 바꾸고 난 뒤에 개종하고 난 뒤에 얼마나 잘 될까, 아니면 얼마나 못 될까 이렇게 그것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사탄의 마음과 동일한 마음이죠. 그러면 성경을 볼 때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내가 잘될까 못될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마치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는 이 대목을 보면서 나는 나쁜 쪽에 속하지 않고 좋은 쪽에 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그 모든 인간은 저절로 하기 마련입니다.
마태복음 25장 32절에도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양은 천국 가고 염소는 지옥 간다는 말이죠. 이 말씀을 딱 듣게 되면 인간들은 겁이 나서 자기를 천국 가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시도할 거예요. 그 마음 자체가 악마의 마음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누가 심판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나중에 잘될까 못될까, 못될까 잘될까에 아주 노심초사 걱정과 염려를 그렇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고 악마의 관심사와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놀란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늘 놀랄 준비가 되어있어요. 경기 든다고 하죠. 깜짝깜짝 놀랄 마음 준비, 놀랄 여지를 가지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지난 욥기 1장을 보면서 우리 같으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하루아침에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리고 종들이 와서 그걸 보고 할 때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경기 납니다. 깜놀이죠. 깜짝 놀랄 일. 깜짝 놀라요. 놀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1장 20절에 보면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라고 하며 여호와와 나의 관계, 하나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 겁니다. 욥은.
그런데 악마는 흔들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흔들기. “너 하나에 주목하다가 너 망하면 어떻게 할래?”라고 인간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하나님이 누구냐는 관심 없고 단지 내가 하나님 덕분에 잘될까 못될까, 못될까 잘될까만을 생각하는 거예요. 잘되는 건 뭐고 못 되는 건 뭘 가지고 못 된다고 할까요? 하나님은 거기에 전혀 주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욥을 악마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하기위해서 악마의 마음을 갖고 있는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지경과 상황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감하게 욥을 몰아세웁니다. 악마보고 “네 맘대로 해라. 네 맘대로 해”라고 하시고 악마는 “내 맘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죠. 하나님은 “네 맘대로 해라. 그러나 나와 관계가 있는 한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마라”라고 하시죠.
자, 이 이야기가 욥기에 나오죠. 이 많은 상황이 욥에게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아요. 이 욥에게 일어나는 일. 그 당시 인구가 75억은 아니겠지만 대략 1억이라고 칠 때 욥 빼고 나머지 99,999,999명에게는 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은 대다수 사람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사는 지혜요 진리처럼 가슴에 와닿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분란을 일으킨 한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을 참조로 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오전 예배 마치고 같은 집사님들끼리 같은 교인들끼리 이야기할 때 이야기 내용이 어떤 내용인가요? 한 사람에 대한, 주께서 주목해서 분란을 일으킨 한 사람의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99,999,999명의 대다수 사람의 이야기인가요?
자식도 아니고 자슥 이야기, 직장 이야기, 사회 이야기, 정치 이야기 등 그들의 이야기는 항상 놀랄 수밖에 없는 여지를 줘요. 좌파 되면 나라 망한다는 깜놀 이야기, 경기 날 이야기, 우리나라 공산주의 되면 안 된다는 깜짝 놀랄 이야기, 내 자식이 몸이 아프면 안 된다는 깜짝 놀랄 이야기. 악마의 마음을 닮아서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 계신 건 좋은데 제발 내 인생 속에 들어와서 분란 일으키지 말아 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시키는 대로 다 할테니 남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하게 살게 해주세요’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시면 ‘제가 놀라잖아요. 저는 놀라는 인생, 경기 나는 인생 싫어요’라고 하죠. 보통 그런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욥을 볼 자격도 없어요. 욥을 볼 자격이 없어요. 어떤 총각이 한 아가씨에게 “너는 앞으로 어떻게 살래?”라고 물으면 “나는 욕심 없어요. 그냥 남들 살아가는 만큼 보통의 삶을 살려고 합니다”라고 해요.
보통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피나는 경쟁과 투쟁의 결과인지를 젊은 사람들은 몰라요. 죽지 못해 살아야 보통 사는 거예요. 목숨 걸고 살아야 보통 사는 거예요. ‘에이, 자살하지’라고 하는데 자살해서는 안 되고 자살 말고 어떤 다른 삶이 없을까를 생각하는 삶이 보통 삶이에요. 자살은 보통의 삶 속에 다 들어있어요. 항상 그게 담겨 있어요. 보통사람 안되면 언제든지 자살할 수 있는 번개탄 피울 가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삶이 허락받지 않는다면 살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 정도로 우리는 수억을 수백을 가져도 놀랄 수밖에 없는 여지가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마귀의 마음과 동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는 게 이렇게 힘드니까 교회 가서 예수나 믿고 이 고생 많은 세상 떠나더라도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서 죽어서는 천국 가야지. 지옥 가면 안 되니까. 이런 생각을 갖고있는 거예요.
관심사가 자기는 이 땅에서 인생 조졌지만 죽어서는 그래도 호강해야 한다는 거예요. 호강이냐 아니면 망함이냐는 둘 중 하나만 생각하는 거예요. 둘 중 하나만. “교회 왜 옵니까?” “구원받으려고요”라고 하거든요. “구원 안 받으면 어떡하냐?” “구원 안 받으면 내가 놀라잖아요”라고 하죠. 왜 놀랍니까? 우리는 어떤 것에 항상 두 가지 경우가 있다는 것이 나를 심하게 흔들리게 만들기 때문에.
두 가지 다를 하려고 하면 다리가 갈라져요. 찢어진다고요. 처음부터 관계가 두 가지가 되면 안 됩니다. 이건 천국도 못가고 지옥 갈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둘이 아니고 하나를 보여주면서 그 하나님과 나의 하나의 관계가 어떻게 둘이라는 결과를 낳았는지를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기능적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욥이에요. 하나인데 지옥가는 사람은 우리를 두 가지 관점에서 우리를 평가하는 중입니다. “너 예수 믿고 난 뒤에 잘되는지 보자”라고 나온단 말이죠. 잘 된다는 말은 무엇을 염두에 두느냐 하면 너는 못 될 수 있는데 나 같으면 그 못 되는 경우를 생각해서 교회 다니겠다고 우리를 평하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을 평할 때 그들은 깜짝 놀랄 만한 여지를 가지고 성도를 그렇게 평하는 거예요. ‘너라고 별거 있냐? 너도 나처럼 똑같은 인간 아니냐’라고 지금 악마가 욥에게 그런 식으로 시험들 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욥은 지금 하나입니다. 둘이 아니고 하나예요. 깜짝 놀랄 일도 없어요. 다만 중요한 것은 욥에게 낯선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분란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가만히 있는 나에게. 정말 욥은 가만히 있었어요. 제가 욥을 대신해서 말씀드릴게요. 욥은 그냥 살았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욥처럼 순전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 없다고. 순전하고 바르게 살면 세상 적인 관점에서는 건드리지 말아야죠.
최순실이 한번 봅시다. 최순실은 그냥 보통의 삶을 사신 나이 많은 여성분이에요. 아무것도 한 것도 없어요. 그저 박근혜 대통령 알고 있는 사이라는 거, 연설 좀 대신 써줬다는 거, 그리고 재벌 좀 건들었다는 것이 자기로서는 보통 삶이에요. 보통 삶. 99,999,999명의 모든 인간은 자기가 보기에 분란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보통 삶을 살고 있어요. 뭐 별다른 일 하는 거 없어요. 그냥 딸 표창장 좀 위조했어요. 인맥 사용해서 부산 대학교 좀 집어넣고 뭐 별다른 일 아니에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그쪽 동네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요. 그쪽 동네에서는 펀드 넣어서 돈 벌고 다 그렇게 산다고요.
세상에 어느 바보가 스스로 분란을 일으킬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조국 입장에서는 세상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실력 없으면 실력 없는 대로 살고 실력 있으면 실력대로 살고,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아. 나 욕하지 마. 나는 분란 없이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어. 위층에서 시끄럽다고 성질난다고 망치 들고 패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살았어요. 뭐 아무 이상 없어요.
지금 문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순진하게 사는, 믿음으로 사는 욥을 먼저 망치 들고 팼다는 거예요. 중간에 마귀를 보내든 말든 하나님께서 먼저 분란을 일으킨 거예요. 도대체 인간의 깜짝 놀랄 두려운 마음, 공포스러운 마음이 어떤 하나의 계통에서 둘로 나뉘었는지를 하나의 계통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이 누구 중심이냐? 욥 중심이 아니다. 욥 중심이 아니라면 누구 중심이냐? 99,999,999명 가운데 어떤 누구도 중심이 아니거든요. 주께서는 이 세상에는 중심이 있다고 하시는데 너희들 각자 중심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중심은 따로 있어.” 따로 있는 하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난데없이 하나님께서 욥에게 사건을 일으킨 거예요. 분란을 일으킨 겁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억울해 죽어요. 평범하게 잘 사는 사람 주께서 먼저 건드린 겁니다. 친구들 나오고 사탄 나오죠. “꼴 좋다. 네가 하나님 믿는다고 해놓고 결과가 좋은 쪽 기적이 아니라 나쁜 쪽 기적이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뭔가 잘못된 거야”라는 식으로 욥을 지적할 때 그 지적하는 친구들 의식이 바로 99,999,999명의 모든 인간이 악마의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티를 내는 거예요.
“절에 가다가 교회에 가니까 네가 지금 몸이 아프잖아. 그러니까 너는 지금 종교 잘못 바꾼 거야. 그냥 절에 다니지 교회는 왜 나와?”라고 지적질 하는 그 무서움, 본인들의 무서움과 두려움을 그대로 상대방에게 같은 원칙을 적용하는 겁니다. 이제 욥이 메시아의 표상 상징인 것을 이해하시겠죠? 아버지는 하늘에 있는 아들을 그냥 가만히 두지 않고 이 죄 많은 지상에 내려보냈어요.
예수님은 그냥 하늘에 살아도 되는 분인데 그냥 지상에 내려왔다고요. 내려와서 온갖 험한 일 다 겪고 고생 다 하시고 사람들이 가장 기피 하는 일,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임을 당하셨어요. 모든 인간이 싫어하는 일이에요. 왜? 다 벌거벗겨 져서 매달리는 그 자체가 그들은 자존심이 상한 거예요.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더니 꼴 좋다”라는 말을 로마 군병들에게 듣고 뺨까지 맞고 옷도 뺏기고 그렇게 당했어요.
어느 누구도 갈 수 없는 길을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하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인간들이 감추고 있는 분란을, 분란의 중심을 예수님을 통해서 일으켜 버린 거예요. 그걸 믿는 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겁니다. 예수 믿는 거. 평소에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안 당하려고 험한 꼴 안 당하려고 얼마나 악마에게 조마조마 마음을 사로잡혔습니까. 벌벌벌 떨면서. 그래서 악마는 그런 인간 상대할 필요도 없죠. 상대하나 안 하나 자기 마음 가지고 졸개 노릇하는데 뭘 건드리겠어요.
문제는 하나님이 지목하는 한 사람에게 사탄이 시비를 거는 겁니다. 99,999,999명 빼놓고 단 한 사람에게.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씀은 뭐냐 하면 그 한 분을 찾아야 해요. 그 한 분을 찾아야 해요. ‘나를 그냥 보통사람, 평범한 사람으로 살게 하시고 건드리지 마세요. 나 겁나요’라는 식으로 살 게 아니고 그 한 사람을 주목하는 게, 이것이 제가 아까 기도했던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내가 잘될까 못될까 하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주목하고 거기에 관심 두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나를 믿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중심이 한 분 되시는 그분에게 일어나는 일을 믿는 것이 신앙이에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에요. 신약에 보면 마태복음에서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지금까지 들었던 설교를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정리하며 이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9장 16-17“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두 개의 결과가 아니라 한 분에게 일어난 일에 두 개의 과정을 설명하는 거예요. 관계는 2가 아니고 1입니다.
1인데 전과 후를 설명해 주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설명하는 거예요. 한 분의 이야기입니다. 한 분의 이야기인데 여기서 두 개의 결과가 나왔어요. 뭐냐 하면 누가 천국 가고 누가 지옥 가느냐. 누가 좋은 고기고 누가 나쁜 고기냐는 것은 본인들이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한 분에게 일어난 일의 결과로써 우리가 천국 가기도 하고 지옥 가기도 하는 거예요.
이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부대가 있는데 이 부대는 좋은 포도주를 담아보면 이것이 찢어진다는 거예요. 그 부대가 누구겠습니까? 찢어지는 부대가 누구겠어요? 바로 99,999,999명에 해당하는 우리보고 그냥 보통 삶으로 만족하는 우리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찢어져라, 인간아. 찢어져. 정말 예수님이 네 속에 들어왔다면 네가 지금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어디를 가? 미쳤어? 천국을 누구 맘대로 넣어줘.
이게 찢어져야 해요. 찢어지고 새로운 부대로 우리가 달라져야 하는 겁니다. 둘을 바라보면서. 다시 말해서 내가 잘될까 못될까, 내가 천국 갈까 아니면 지옥 갈까 깜짝 놀라는 마음, 두근 두근 하는 마음으로 벌벌 떨고 항상 공포에 떨고 있는 이 부대, 이 부대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가서 같이 죽자고 하시는 거예요. 어설픈 부대 가지고 뭘 담아? 복음을 담아? 십자가 복음 못 담아! 찢어버리는 거예요.
십자가가 먼저 와서 나의 이 악마에 속해서 벌벌 떠는, 내 생각만 하는, 내 입장만 생각하는, 나에게만 관심 있는 이걸 찢어버려 놓으면 포도주가 쏟아지겠죠. 그렇게 나오고 난 뒤에 포도주가 새로운 부대, 새로운 새 마음, 새로운 육체, 새로운 주님의 영광, 새로운 형상으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거예요. 우리 좋으라고요? 우리 천당 가라고? 아니에요. 그 포도주의 귀함을 보이는 새로운 기능자로 보이기 위해서 우리를 옛 부대로 규정해 주시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 썩어빠진 부대에 복음이 담기느냐. 너는 너만 챙기는 인간인데 그게 담기겠어?” 안 담기죠.
제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만약에 제 아들이 ‘건우’라고 하면 지금 결혼식 일주일 남았는데 마음속에 벌벌 떨어요. 날씨 좋아야 할 건데, 아무 일 없이 무탈해야 할 건데, 주례가 와서 깽판 치면 안 되는데, 잘돼야 될텐데, 못되면 안 될텐데, 잘되어야 할텐데. 왜 순간순간 인간들은 옛 부대에 하나가 아니라 둘이 있어요. 둘을 계속해서 마귀가 흔들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여, 나중에 잘될까 못될까, 못될까 잘될까에 아주 노심초사 걱정과 염려를 그렇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걱정과 염려를 하고 있고 악마의 관심사와 동일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놀란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늘 놀랄 준비가 되어있어요. 경기 든다고 하죠. 깜짝깜짝 놀랄 마음 준비, 놀랄 여지를 가지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3장의 이 본문은 지난 금요일에 정춘자 권사님 신방 가서 했던 그 말씀이에요. 세례요한 나오는 부분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마이크다. 나 보고 누구냐고 어떤 사람이냐고 나에게 묻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인간의 개념을 가지고 나에게 개념 적용하지 마. 그냥 인간 없다고 생각하고 그냥 마이크야. 스피커야” 광야에 외치는 스피커가 세례요한이거든요.
세례요한이 외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내 뒤에 누가 오신다는 겁니다. 2가 아니고 1이에요. “그리고 이 바리새인들아, 너희들은 자신들이 천국 가야 하고 지옥 가면 안 된다고 하면서 2를 생각하는데, 너희들이 구원받으려고 나오느냐. 이 독사의 자식(새끼)들아. 누가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너희들이 구원을 받아? 너희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차라리 이 돌멩이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시작점을 내가 천국 가고 싶다는 것이 시작점이 아니고 한 분, 오실 한 분, 그 한 분이 시작점이 되어서 천국이고 지옥이고 결정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까 기적이 나와요. 기적은 내가 잘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그분이 일하시는 것이 기적이에요.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분, 한 분 되는 그분 마음대로다. 이게 바로 새로운 새 포도주예요. “예, 그러셔도 됩니다. 마땅합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 제기할 수 없습니다”라는 이런 이야기가 하나에 대한 모양새가 오늘 본문 욥에서 구약에서 미리 우리에게 욥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탄아, 세상의 모든 사람 봤지? 전부 다 잘될까 못될까 벌벌 떨었지? 그 벌벌 떠는 악마의 무기, 그 무기를 욥에게 적용시켜 봐라. 욥이 둘 가지고 벌벌 떠는지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지 사탄 네 맘대로 해봐라”라고 하십니다. 지금도 사탄은 이 땅을 지배하고 이 세상 신으로서 이 땅을 주무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어요. 정말 우리는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의 용도 기능을 어떤 현장에서든 어떤 공간에서든 어떤 시간에든 주께서 그것을 적용시킬 때 우리는 하나를, 주께서 하시는 것을 도리어 기뻐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탄의 술책과 사탄의 계획을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지 몰랐습니다. 내달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종교 바꾸고 교회 바꿔서 만사형통할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부대요, 복음을 쏟아 버리는 거짓된 악마의 마음을 알았사오니 오직 주님 하나에서만 모든 것이 결정되고 끝났다는 사실을 기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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