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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과 주체(욥2;7-10) 191208 이근호

아빠와 함께 2019. 12. 9. 07:15
2019-12-08 15:01:30조회 : 18         
   운명과 주체 191208이름 : 이근호 (IP:119.18.87.190)   

운명과 주체(욥기 2:7-10)

음성 동영상 Youtube

 링크 : https://youtu.be/UcMbqSnTius, Hit:0
 이근호19-12-08 15:47 

운명과 주체

2019년 12월 8일                 본문 말씀: 욥기 2:7-10

(2:7)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소위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기본적으로 자기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백과 견줄 현상과 경험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따로 제공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건재함, 자신의 순결함이 곱게 유지했기에 그 대가로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체험과 경험은,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신앙고백마저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릴 정도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운명 속에 자신을 안주시키고 보호하려고 합니다. 그런 유형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아내가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걱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자기를 걱정합니다. 아내가 남편과 혼인한 것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남편의 순전함에 의해서 자기 남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혜택의 덕을 보자는 주의입니다. 즉 아내는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바라보며 산 사람이 아닙니다. 남편을 통해서, ‘남편의 하나님’을 이용해보자는 식입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주어진 가혹한 현실은 아내로 하여금 하나님을 욕하게 만듭니다. 본인이 직접 하나님에게 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남편을 통해서 욕하게 합니다. 이로서 욥은 누구의 남편도 아니요 그냥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도 아닙니다. 그냥 이상한 존재입니다. 그동안 걸쳐놓은 모든 관계들이 다 철거당합니다. 떠나갑니다.

자기에게 찾아든 운명을 전달한 각가지 연결망이 철수되면서 욥은 세상으로부터 ‘없는 존재’처럼 취급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낯선 존재가 되므로서 하늘의 사정과 땅의 시정을 연결하는 특수한 입장이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 하늘의 사정은 숨겨진 바 되며 관심 밖입니다. 그냥 땅에서 챙길 것 챙기고 하늘을 대고 “고맙습니다”하면 그만이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벌어지는 일이 욥을 통해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 있어 하늘의 운명의 지휘소 같은 곳입니다. 세상 되어지는 것을 땅에서는 다 알 수 없으나 어쨌든 하늘에서 정한 운명은 운명대로 차질없이 진행된다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 다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정작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되니 땅에서 이 생소한 적용에 대해서 욕을 하게 되고 강력한 저항성을 나타냅니다. 이 운명에 대한 저항심은 어디서 나올까요? 이게 바로 주체입니다. 즉 욥의 아내가 이해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하나님 우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우선’를 기반으로 해서 파생되어 나온 가짜 하나님이었던 겁니다.

‘하나님 주권사상’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대로 진행된다’는 이러한 말들이 결코 옳은 신앙고백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드들 자신의 주체 위주를 숨기면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신의 영광과 신의 위대함을 말해도 자기가 현재 배고프다면 모든 관심사는 자기에게 가 있게 마련입니다.

욥기의 진행사항이 이러합니다. 욥 홀로 운명에서 주체로 나아갑니다. 직접 악마가 욥의 신체를 건드렸을 때, 욥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가 됩니다. 운명이 떨어져 나가고 오직 인간은 주체로만 버티게 됨을 알려주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됩니다. 이 주체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모델로 찾지 않게 됩니다.

그동안 주체가 생각한 삶의 자리란 모든 것이 자기에게 긍정적이었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일어나도 죽음마저 돌진해서 극복하려는 시도를 인간을 보이게 됩니다. 인간 주체가 품고 있는 내용은 그동안 신의 운명에 현혹되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던 겁니다. 편하게 생각          해서, ‘내가 잘되기 위해서라도 순수하게 살면 된다’고 여긴 것이 경솔한 판단이었던 겁니다.

전도서에서 말하듯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지정할 수 없고 단지 허무로 갇혀 있는 양상이다는 것만 압니다. 너무 착하지도 말고 너무 악하지도 말고(전 7:16), 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서 허무가 거두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전 12:12) 인간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내막과 원인은 마지막 때에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밝혀집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인간이 제대로 원인이 밝혀서 수정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겨냥하라고 일어난 일이라는 겁니다. 참된 운명은 직접 하나님께서 개입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욥의 전개과정은,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할 때까지 욥의 친구들이 끊임없이 운명론자의 이론을 가지고 욥을 공격한다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미 욥은 주체로 서 있습니다. 주체란 곧 나의 일은 내가 결단하기 나름이다는 겁니다. 운명이란 내가 개척해 나간다는 겁니다. 누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편에서서 방어하고 변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알고 있는 운명으로서 이 인간의 주체감과 일치되지 않는 겁니다.

이 불일치성을 두고서 욥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몸의 고통은 필시 자신이 죽음으로 내려가는 줄 알았습니다. 즉 자신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에는 욥이 죽는 일은 없습니다. 악마에게 욥의 목숨을 건드리지 말라고 계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하는 것은 고통은, 그동안 지상에서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욥에게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욥이 하늘과 땅을 매개하는 특수한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9-10에 보면,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처음 인간들이 땅에 운명이라고 여겼던 것은 엉터리 운명론이었습니다. 욥은 특수자가 되어 하늘의 뜻이 유일하게 주어진 자가 되면서 욥은 인간 본연의 주체자로 버티고 있습니다. 이 주체자 처지에게 하나님의 개입이 주어지면 비로소 제대로 된 운명을 욥은 알게 됩니다. 여기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기 부인(否認)’이 실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억압인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 억압이란 주체자가 여전히 좋아 자아상을 유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자기를 자기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주체를 주님께서는 직접 관여해서 하늘의 뜻을 전달하는 매개자가 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낯섬이 우리의 낯섬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19-12-08 19:43 

8강-욥기 2장 7~10절(운명과 주체) 201912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2장 7~10절입니다. 구약성경 762페이지입니다.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욥과 아내의 대화, 사람 대 사람의 대화라고 눈에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과 사탄의 대화를 그들이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욥은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의해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을 못 했죠. 다만 원인도 모르겠고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자기 집안이 파탄 나고 자기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보통 기적이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는데 잘되는 기적이 있는 반면에 우리가 예상밖에 망해야 하는 기적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되는 기적을 기적이라고 보고 망해가는 것은 기적으로 안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바로 욥의 아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자기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기적이 일어남으로써 자기 옆에서 평생 같이 살았던 아내가 자기의 속마음을 유감없이 드러냈습니다. 감추지 못하고 드러낸 거예요.

그리고 같이 한평생 남편으로 살았는데 남편의 본심이 그대로 유감없이 드러났습니다. 이건 갈라서고 갈라서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욥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욥을 보고 욕하고 있는 아내인지 다른 아내를 얻었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하나님이 주신 시련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욥기 마지막에 보면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나았어요. 그러니까 원래 자식이 열 있었는데 다시 열이 채워졌단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욥아, 너 잘났다. 아내야, 너 못났다”가 아니라 욥과 그 아내를 통해서 우리가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 인간들의 알 수 없는 숨어 있으면서 온 세상을 운영하고있는 감추어진 그 세계를 어떤 역할극이라고 할까요, 자기 택한 백성을 통해서 숨겨진 진짜 비밀과 사실을 현상화 시키는 겁니다. 이 역사 속에서 드러내는 일을 하고 계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 위주죠.

간이 괴롭든 말든 인간이 힘들든 말든 상관없어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이라는 대리인을 통해서 드러나면 그만인 겁니다.

그리고 그 하늘나라에 사탄이 있거든요. 지금 아직도 사탄이 있는데 그 사탄의 생각도 같이 드러나야죠.

결국 우리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성도라고 하는 것은, 성도 아닌 사람은 그냥 무심코 살아가지만, 성

도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과 정반대가 되는 사탄의 생각까지 아울러서 깨닫게 되는 기회를 부여받는 겁니다.

물론 ‘아멘’으로 쉽게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만 본인은 힘들어요. 본인은 지금 죽을 지경이라니까요. 그냥 내버려 두면 좋겠는데 안 내버려 두시니까 이게 기적 받은 복일 수도 있는데 그 복이 과정에서 사람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욥에게 욥 주변에 있는 관계를 정리합니다. 삭제하고 철거해 나가죠. 오늘 본문에 있어서 아내를 철거해 버립니다.

그러면 그전까지 욥은 뭐냐 하면 아내와 잘 사는 남편으로서의 욥이었잖아요. 그런데 아내가 이렇게 욕을 하고 하나님께 욕하라고 남편 말과 떨어져서 가버리면 욥은 더 이상 남편도 아니요, 남자도 아니에요. 남자도 아니고 남편도 아니에요. 이것은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 중에 하나예요. 예수님이 누구냐고 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라고 전통적으로 신학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요.

삼위일체 웨스트민스터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걸 제가 바꿔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아요. 왜냐 하면 인간들은 이미 범죄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이라고 하니까 범죄 한 제한적 한계가 있는 인간의 이성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이걸 결합하려고 하니까 온갖 잡생각이 나고 억지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차라리 하나님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라고 하면 되거든요. 이것을 좀 더 어렵게 하게 되면 ‘I am dead’(나는 죽었다)라는 말은 긍정이죠. ‘am’은 ‘있다’이니 긍정이거든요. ‘dead’는 ‘죽은’이라는 말이니 ‘나는 죽었다’가 되죠. ‘I am not dead’(나는 죽지 않았다). 긍정의 동사와 긍정의 서술어가 만나요. 그런데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말한다’라고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가 죽었으면 말을 못 하는데 죽었다는 것을 자기가 말한다고 할 때 도대체 어떻게 긍정과 죽었다는 부정이 같이 공존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나는 이미 전에 죽었다가 지금 살아있다”라고. 그러니까 죽어있는 채로 지금 살아있다고 이야기하니까. 그걸 지금 인간보고 믿으라고 한다면 인간이 그걸 믿을 수 있는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에 삭제가 필요하죠. 어떤 하나님의 추가되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욥처럼 잘라내고 깎아내는 과정이 필요한 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형상이 있더라도 성도에게 형상이 오더라도 그 형상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형상 본연의 것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부터 우리가 우리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평생동안 잘라내고 깎아내는 겁니다. 지금 그것을 대구 강의에서 몇 년째 하고 있어요. 다음 시간 되면 끝이 날 듯싶은데요. 그게 뭐냐 하면 ‘허무’라는 거예요.

공부를 해도 허무하고 내가 천 명의 여자를 가져도 허무하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착하게 살아도 허무하고. 그러니까 너무 착하려고 하지 말고 너무 나쁘려고 하지 말고 그것도 다 허무하다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절대 악이 있는데 이 절대 악은 어떤 것이냐 하면 보통 악을 저지를 때는 뭔가를 얻고자 해서 저지르거든요. 강도질하는 것은 돈을 뺏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데 인간의 더 깊은 내면을 보게 되면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악을 즐기는 악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본인도 해명이 안 될 정도입니다. ‘내가 왜 이러지’라고 하면서 계속 악을 저지른단 말이죠. 그게 전도서에서 이미 나온 거예요. “원인을 찾지 마라. 네가 그렇게 허무하게 된 것에 원인을 찾지 마라. 네가 원인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라고 해요. 찾을 수 없는데 결과적으로 무조건 허무라는 겁니다. 그럼 이유가 뭐냐. 이유도 묻지 마라. 허무인데. 그러니까 허무에 갇혀있는 거예요.

인간은 갇혀있는 꼴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이유는 이 세상 끝나게 되면 비로소 너가 허무해야 할 이유가 그때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바로 신약에 예수님이 오실 때죠. 모든 것이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십자가에 예수님 죽으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벌인 그러한 연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인간이 활동하는 무대가 아니고 주님이 홀로 일하시는 주님의 활동 무대였는데 인간은 자기 무대로 여긴 겁니다.

여기서 ‘욥은 훌륭하다. 욥은 대단하다’라는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욥을 잘라내는 그 과정에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 그러면 그 자르는 과정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욥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공히 해당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해당 되는 욥을 통해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사실들이 뭐냐 하면 행복이라 하는 것은 부도어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그 자체도 헛되고 헛되고 헛된 거예요. 그러면 욥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자기가 순전하기 때문에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걸 자꾸 팔다리 잘라내듯이 잘라 내버리니까 행복은 애초에 물 건너갔고요. 이제는 자기가 남자라는 것도 박탈당하고 아내가 없으니 남편도 아니에요. 그럼 자기는 뭐냐? 특수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특수한 존재. 성도가 특수한 존재예요.

긍정도 부정도 아니면서. 항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데 그 긍정을 긍정하지 못하도록 긍정하는 요소를 잘라냄으로써 “그렇다면 나는 죽어버릴까요?”라고 하면 죽는 것도 안 돼요.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악마에게 다른 것은 다 건드려도 목숨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 목숨 자체가 긍정이 되어버려요. 뭔가 죽이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안 죽이시는 거예요. 죽도록 안 죽이시는 겁니다. 죽도록 안 죽이세요. 죽을 때까지만. 죽지 못해 사는 거죠.

그게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운명이 되는 겁니다. 여기서 욥이 2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3장 4장 계속 이어지죠. 욥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삭제하고 끊어내는 특수한 존재로 만드시는 과정 속에서 욥이 몸부림칩니다. 몸부림치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주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평소에 자기를 생각하지 않는데 뭔가 외부에서 자기를 건드리게 되면 이건 본능적으로 나 지키는 것이 우선적인 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배고프다’라고 하면 배고픈데 교회 나올 수가 없죠. 그러면 우선 교회 나가려면 취직이 되어야 한다는 식이에요. 그런데 그것이 어떤 원칙에 어긋나냐 하면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을 때 그러한 모든 인간의 속성이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을 주께서는 다 치워버리셨어요. 무엇을 해도 만나는 오고 아무것도 안 해도 만나가 오는 것은 네가 생각하는 행복의 자리, 삶의 자리가 네 행함과 전혀 관계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광야라는 코스를 마련하신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고 오늘 욥에 관해서는 그렇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죠. 욥의 아내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이게 평소에 여러분들이 부부싸움 하면서 아내에게 많이 듣던 이야기예요. 또 남편에게 바가지 긁을 때 많이 했던 이야기인데 여기서 여러분들이 또 욥이라고 착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아내라고 여기세요. 이 아내의 말에 토 달수 있거든 달아보세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당신의 순전을 굳게 지키겠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해요. 이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시킨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님에게 욕하고 싶은 것을 당신은 아직도 나의 남편이니까 자기 대신 하나님 앞에 욕하고 죽으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아내는 남편과 결혼한 동시에 한 몸이 되기 때문에 남편 하는 일이 곧 자기 일이에요. 자기 자신에게 불행이 미쳤으니까 남편보고 나서서 자기 대신 욕해달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주체를 지키는 거니까 아내는 자기 몸을 지키고 싶으니까 남편이 나가라는 겁니다. 어떤 부부가 있는데 잠을 자는데 거실에서 뭔가 큰 소리가 났어요. 보통 남자 같으면 누가 나가야 합니까? 남자가 나가서 문 팍 열고 “누구야! 거기 누구야!”라고 해야 하는데 처음엔 남자가 먼저 나가는데 아내도 같이 나갔어요. 그런데 남편이 자기가 안 나가고 손가락으로 아내에게 나가라고 미는 거예요. MBC 유명한 아나운서가 그렇게 했다고 해요. 당신보고 나가라고 미는 거예요. 가정일은 당신 담당이라고 그러는 건지. 가보니까 도둑 든 것이 아니고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진 것 가지고 호들갑 떨었는데 그게 평소 본색이 드러난 거예요.

아내가 남편을 손가락으로 미는 것은 절대로 아내는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이 아멘 타이밍에서 전부다 아멘을 놓치네요. 아내는 절대로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그냥 방패막이라니까요. 나에게 흉한 일이 오지 않도록 당신이 앞에서 알아서 처리해 달라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나는 행복 보증 어음을 쥐고 있는데 이것이 부도 안 나도록 당신이 좀 지켜달라는 이야기예요. 아내의 본심이 우리의 본심이죠.

그런데 남편 말 보세요.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은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라고 해요. 이제 욥이 맞으려고 애를 썼어요. 이 말이 먹혀들어 가겠어요? 지금? 완전히 집안 거덜 나버렸는데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라고 욥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뒤에 아내가 입이 없어서 말을 못 하겠습니까? 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 들어있죠. 그러나 성경에는 안 나와 있죠.

그 가득 들어있는 말은 제가 대신 한다면 “그래, 너 복음 잘 안다. 그래, 너 성경 많이 안다. 아이고 너 잘났다”라는 이거죠. 그렇게 알면 뭐합니까? 사태가 해결 안 되는데. 말은 누가 못해요. 말하면 뭐합니까? 지금 사태가 약을 써도 못 고치는 재앙이 갑자기 왔는데 재앙을 해결해야지 그렇게 자기 변명적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지간히도 큰 위로가 되겠습니다.

그 말 듣고 아내가 “아이고, 내가 그걸 몰랐구나. 내가 죄인입니다”라고 할 줄 알았어요? 미쳤어요. 그렇게 말하게. 현실은 현실이고 이론은 이론인 거예요. 욥이 아주 생생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정의 일이 아니고 천상인 하늘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가정까지 응축되어서 집약되어서 욥에게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욥은 무엇을 공격받는가. 자기의 순전함과 자기의 운명 자기의 말로가 동일할 것이라고 여겼던 거, 다시 말해서 나의 수표가 보증 수표가 아니고 부도 수표가 된 거예요. 운명이라는 것은 없고 세상은 내가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주체의식이 여기서 싹트는 겁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냥 이론상 하나님이 도와준다가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서 창세 전부터 예정되었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내 모습이 아니고 어쩌면 그 이론, 그 성경에 나오는 그 이론을 이 숨겨진 주체가 이용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의 지식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뜯어내죠. 삭제시키죠. 이래도 하늘의 운명을 네가 기쁨으로 받겠느냐. 이래도. 네가 난국에 빠져도 이렇게 하겠느냐 할 때 결국 광야에서처럼 우리 일상에서처럼 자기 몸이 배고프거나 자기 모든 나 됨을 보장해줬던 그 모든 삶의 공간이 다 떨어져 나갔을 때 인간은 홀로 자기 주체의 절대적인 주체로 나서고 맙니다.

그러면 그동안 욥은 무엇에서 떨어져 나갔느냐. 남들 앞에 부러움을 사는 하나의 모델로의 기능은 끝났어요. ‘나는 저 사람 본받아야지’라는 자기 옆에 있는 아내로부터도 실망스러운 존재가 된 겁니다. 이 말은 아내 쪽에서 볼 때 자기 남편을 많이 존경했겠죠. 그러니까 실망도 컸고. 기대했고 그만큼 기대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거예요. 결국 아내가 우리의 보편적인 생각이라면 아내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고 되고 싶은 모델을 찾아 나서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라는 모델 찾기에 급급하면서 평소에 일상을 살고 있다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자기 남편이 자기의 유일한 모델로써 굉장히 감사히 여겼을 거예요. 그러니까 실망이 그만큼 크지요. 실망이 크다는 말은 결국은 남들이 나의 이용물이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이제 말씀을 좀 어렵게 한다면 2장 끝에부터 누가 오냐 하면 친구들이 옵니다. 친구들이 오면서 친구들은 아내 입장과 똑같아요. 이론상 하나님이죠. 욥이 끝날 때까지 주제를 제가 미리 말씀드릴게요.

욥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미리 말씀드린다면 욥의 세친구가 하는 이야기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은 하나님의 운명 속에 있다’라는 겁니다. 이 말이 본인들도 헛말인 줄 본인들이 몰라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있고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움직인다’라는 이것이 개떡같은 소리인 것을 본인들이 몰라요. 욥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냥 나 멀쩡하고 하나님 계신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건드려 줄 때 하나님을 알아요. 안 건드려 주게 되면 나는 그야말로 운명론자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줄을 저는 믿씁니다!’라고 ‘ㅆ’ 넣어가면서 ‘믿씁니다’하고 있다고요. 그 안에 숨어 들어가고 그 안에서 보호받으려고. 아내처럼 남편 그늘에 보호받아서 나만 살면 된다는 거죠.

그러나 헐벗은 존재가 되어야 해요.

그 모든 하나님이 주셨다는 내가 알고 있는 신학 체제, 복음 체제, 전부다가 뜯겨 나가야 해요.

내가 진정 어떤 존재인지를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는 보는 존재가 되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운명이라는 것은 다 헛소리에 불과하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개척해서

것만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으로

내 것으로 새롭게 구성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게 욥이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욥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순전한 거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잘 설명하는 거 소용없어요. 강의하고 설교하는 거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한 설교나 강의에 속아 넘어가지 마세요. 복음을 안다고 복음을 말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려야 해요. 우리 속에. 그러나 친구들은 욥 앞까지만 오고 속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하나님은 욥 속에까지 들어왔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그 영화가 희극이거든요. 희극이면서도 굉장히 비극적이에요. 어떤 사람이 음식을 먹다가 잘못해서 호루라기를 목에 삼켜버리고 말았어요. 호루라기를. 그래 놓고 어떤 가수가 독창회를 하는데 독창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무대 앞에서 독창하는 사람이 노래를 막 부르면 채플린 목에서는 ‘꺼꾹 꺼꾹’소리가 나는 거예요. 이거는 본인이 자기를 절제하려고 아무리 애써도 호루라기가 있어서 그 호루라기를 내가 조절할 수 없고 내가 누를 수 없는 거예요. 호루라기가 자꾸 소리를 내버리는 거예요. 내 말이 아니고 호루라기가 말을 해버리는 거예요.

마태복음 10장 19~20절에 호루라기 이야기 나옵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나와요. 이게 바로 성도인데요, 성도 아닌 사람이 성경을 보면서 자기 부인을 할 때는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이걸 억압이라고 합니다.

자기 억압과 자기 부인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겸손해야 해, 나대면 안 돼, 오지랖 떨면 안 돼, 항상 침착해야 해, 점잖아야 해’라고 하는 거. 신학교 때 강사님으로 큰 교회 목사님들 오시거든요. 오실 때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어요. 전부 다 점잖고 인물 잘생기고 말을 해도 침착하게 하고 예의 바르게 해요. “부족합니다”라고 하면서 자기를 낮추고 발걸음도 경솔하게 움직이지 않고 쉽게 말해서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정치꾼들이 하는 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 하면 교인들이 그런 지도자를 원하기 때문에.

나대지 않고 까불대지 않고 자기가 가장 이상화시키는 거 있잖아요. 신앙인이라면, 우리보다 수준 높은 신앙인이라면 저런 모양새를 가지고 살 것이라고 모델 삼는 거예요. 지금 욥은 모델이 없어요. 일부러 하나님께서 모델을 다 없애 버립니다. 가장 싫어한 바 되는 모델이죠. 아내마저 버릴 정도로 모델 후보감도 안 돼요. 누가 그걸 자진해서 하겠습니까? 욥도 본인 인생이 싫은데요.

내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그동안 쌓아 놓은 모든 성경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지식도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게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 뿐이고 남아 있는 것은 몸이 아프다는 생생한 현실뿐이라는 거예요. 지금 이빨이 아픈데 무슨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형제 우애가 됩니까? 지금 이빨이 아픈데요. “집사님은 왜 인상을 그러고 있습니까? 내가 뭐라 했다고 인상을 그렇게 합니까?”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싫은 모양인데” “지금 이가 아파서...”

이렇게 몸이 아프고, 이가 아프고, 피곤하고, 감기 걸리면 모든 것이 짜증 투성인데 이건 내가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내 안에 호루라기가 하는 거잖아요.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렇게 본인 아닌 다른 본인, 천국 갈 진짜 모습을 우리 안에서 잉태하고 그걸 키워내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인간은 내가 장악하고 내가 남에게 관리해서 보이고 싶은 나를 조작해 낼 수 있죠. 욥은 그게 안 된다는 말이죠. 욥의 아내는 그게 되지만 욥은 그게 되질 않아요. 특수한 존재입니다.

그다음에 운명에서 주체로 바뀔 때는 이유를 몰라요. 욥 마지막에 이유를 압니다. 그때부터 뭐가 되느냐 하면 진짜 운명이 돼요. 낮 설교에서 언급한 법칙을 이야기하면 운명 1에서 운명 2로 가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던 운명은 다 헛소리고 세상에 어떤 것도 내가 되고 싶은 모델이 없음을 확정 지을 때 나오는 모델, 이 세상에는 마음 둘 곳 없다는 거.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라는 거.

그럴 때 비로소 내가 전에 알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바꾸기 위해서 성령을 호루라기처럼 집어넣는 어떤 눈으로부터 인기 얻거나 어떤 기대 상이 될 대상이 안 될 때 그게 주님이 함께 있는 주님의 운명을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이게 욥이 앞으로 전개되는 과정이에요.

다시 말씀드리면 억압이라 하는 것은 조작된 거지만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은 이미 주체를 거쳐 ‘아, 나라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라고 나오는 거. 지금까지는 내 몸이 아프고 내가 간지럽고 기왓장 가지고 긁고 있는 나에게 몰입했다면 주님 오셨을 때 그다음부터는 나는 정말 무지하다는 거, 내가 무지한 것이 아니고 무지가 곧 ‘나’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전에는 ‘저것을 안다’가 곧 나였는데 이제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아가는 것은 주님의 운명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거죠. 새로운 운명이 나를 반기고 영접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는 거,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몰라도 된다는 거, 그저 주님께서 뜻이 있어서 그렇게 했다는 그거, 주님 계시매 나도 그러해야 한다는 거, 주님 자신의 뜻에 불과하지 천국 가는 것은 내 뜻이 전혀 아니었음을 고백하는 거, 이게 욥의 앞으로 전개 과정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갖 거 다 알고 있는데 그게 화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감추고 살아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주 앞에 십자가 앞에 나올 때 정말 욥의 아내처럼 수시로 원망하고 수시로 하나님을 욕하고 불평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모습. 어쩌면 그 모습이 우리의 새로운 주체로 다가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