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강-여호수아 24장 29~33절(여호수아의 임종) 201910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29~33절입니다. 구약성경 358페이지입니다.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딤낫 세라는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이었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수아 말고 또 죽는 사람이 나옵니다. 33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하였더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그동안 가렸던 것이 주님의 약속과 주님의 언약을 가렸던 것이 일단 제거가 되는 겁니다.
안경이 침침할 때 닦잖아요. 찌꺼기나 먼지 같은 것을 닦아 내면 안경이 잘 보이지요. 인간이 나섰다가 빠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이 있을 때 예상 못 하고 예측 못 한 하나님의 약속이 또 하나 추가가 됩니다. 정리합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있을 때 약속이 아니고 그 사람이 죽은 그 빈자리에서 생각도 못 한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서 살아나죠.
예수님 살아있을 때 예수님 좋아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기분 나쁜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우리 장로님 지금 살아계시는데 혹시 듣다가 기분 나쁘시더라도 참아주세요. 복음을 위해서 희생하셔야 합니다. 장로님 살아계시는데 오늘 밤에 죽으신다면 장로님 계실 때보다도 죽으실 때 다시 한번 죽었다는 입장에서 ‘과연 복음이 뭐냐? 그분은 무엇 때문에 살았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나게 하는 거예요.
살아있는 것이 유리한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것이 불리한 겁니다. 오전에 이야기했듯이 장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죽인다는 말이 그게 통하는 거예요. 이걸 쉽게 이야기하면 장래에 오실 아담이 모든 아담 속에 사는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아담을 다 죽여 나가는 거예요.
없애면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속에 놓이게 함으로써 ‘살았다. 나는 살아있어. 구원해 주세요. 나는 꼭 살아야 합니다. 내 몸은 절대로 아프면 안 됩니다. 나는 건강해야 해요’라고 설쳐 대던 그 존재를 이제 거둬가고 제거함으로써 내가 살려고 했던 그것이 오히려 복음을 가리고 있던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이유가 죽이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그냥 태어났다가 죽어버리면 태어난 의의가 없겠죠. 태어난 인간을 죽임으로써 그 현장에서 인간들이 몰랐던 새로운 언약의 진척된 면이 나오게 하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 가인이 있고 아벨이 있을 때는 누가 봐도 형이 있고 동생 있고 끝이에요. 별 내용이 없어요.
그런데 형이 동생을 죽일 때 비로소 그 화투패를 들추는 것처럼 죽었을 때 그 죽음으로 하나님께서 비로소 가인에게 “네 동생 왜 죽이느냐? 왜 아벨을 죽이느냐?”라고 하시면서 등장하시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아무 소리 안 하다가.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아벨이 죽을 때 죽기 전에 미리 간섭하고 나서시지 왜 죽고 난 뒤에 그렇게 뒤늦게 와서 “귀한 동생 왜 죽였느냐?”라고 하시면 이미 죽은 동생은 손해이고 또는 억울하지 않을지 그런 생각이 들지요.
우리가 살아있는 것이 주님 앞에 억울한 일입니다. 우리가 제거되는 순간에 제거되게 하시면서, 매일같이 우리가 제거 되게 하시면서 우리가 어제 가렸던 것이 뭐며 내일 되면 오늘 우리가 가렸던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조금씩 들춰지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나라고 여겼던 것은 떠나야 하는 거예요. 참 섭섭한 이야기지만 내가 나로부터 개종 되어야 합니다.
내가 나로부터 개종 되어야 해요. 다른 종교를 가져야 해요. 내 종교는 죽여 없애는 종교로 탈바꿈되어야 합니다. 까멜리아 술집에 여자 주인이 있어요. 까멜리아 술집의 여자 주인 모르시죠? 저기 포항 근처에 있는데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공효진이라는 사람이 까멜리아 술집 주인공인데 그 사람이 어릴 때 그 엄마가 그 딸을 버렸거든요.
뒤늦게 자기는 즐길 것 다 즐기다가 늙어서 자기 딸과 살겠다고 왔습니다. 왔는데 그 드라마 대사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요양원에 가”라고 해요. 젊은 사람들은 이게 나중 이야기이기 때문에 별로 안 느껴지는데 정말 요양원에 갈 즈음에 계신 분들은 그 엄마가 뭐 자식에게 계란말이 해주고 요리도 해주고 잘 먹여서 딸과 좀 어떻게 같이 살아 보려고 하는데 공효진이가 하는 말이 “엄마는 요양원으로 가”라고 할 때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수십 년 만에 살려고 왔는데 가라는 거예요. 내게 더이상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 대사를 보면서 너무나 내가 느낀 것이 있어서 교회 이름을 ‘가!!’ 교회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가버리란 말이죠. 네가 얼쩡거리는 것이 교회에 방해되는 거예요. 다 가버리란 말이죠. 사람이 같이 있을 수 없을 때는 내 쪽에서 차버리는 법이거든요. 차이기 전에 “가라. 너 같은 거 필요 없다”라고 하죠.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한다고 했을 때 우리의 생각은 뭐냐 하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 엘르아살을 죽이고 여호수아를 죽일 때 뒤에 남겨놓은 게 있어요. 남겨놓은 게 뭐냐 하면 조금 어렵더라도 참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31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천천히 읽겠습니다,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라고 되어있어요.
여호와를 섬기는 조건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이 ‘아, 이 뜻이구나’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여호와를 섬깁니다. 말이 굉장히 앞뒤가 모순되죠.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버릴 수밖에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그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방식이에요. 그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얼른 보면 믿음 되게 좋아요.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 덕분에 우리는 천국 간다고 하면 믿음 되게 좋아 보입니다. 그러면 너는? “나는 멀쩡하지. 하나님 믿고 예수 믿고 하니까 나는 멀쩡하지”라고 하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죽음과 사망을 자신의 알갱이로 집어넣지 않는 상태에서 신의 존재로 신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공식을 끄집어낸 겁니다. 신의 존재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뭐냐 하면 네가 죄인이라는 의식으로 천국 갑니다. 왜?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죠. 모든 인간은 정신병자라고. 정신병자라고 들을 때 ‘그래, 너 잘났다’라고 할 것이 아니고 교회를 병원으로 여기시라는 말입니다. 교회를 병원으로.
나 멀쩡한데 교회 나왔다고 하지 마시고 ‘나는 문제 있습니다. 나는 정상이 아니에요. 멀쩡한 것이 아니에요’라고 여기시라는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그런 것이 뭐냐 하면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이 등치를 어떻게 포기를 못 해요. 사람에게 가장 진지한 것은 복음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고 강의도 아닙니다. 가장 진지한 것은 내가 아프다는 거예요.
뭐라고 뭐라고 해도, 이거 표준말이니 욕한다고 듣지 마시고, 저 안동 저쪽에서 쓰는 말로 뭐라고 씨부리싸도 뭐라고 짓거려도 귀에 들어오질 않아요. 그래서 당구공 위에 좁쌀 놓는 거라고 했거든요. 당구공 위에 좁쌀 놔도 좁쌀 옆으로 다 샙니다. 절대로 당구공 속에 안들어가요. 언제 내가 제일로 진지하냐 하면 내 치아가 아프고 내 몸이 아플 때 그것만큼 현실적이고 진지한 것은 없어요.
천하없어도 내 몸 아프면 사람은 바짝 긴장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 식구 아프다고 하면 제일 신경 쓰여요. 잠을 못 이룹니다. 뭐 밥을 먹어도 밥맛이 떨어져요. 누가 아프면. 내가 아프든지 나에게 소중한 누가 아프면. 그게 본인만의 유일한 현실이거든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아픈 것이 유일한 진리처럼 현실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신의 존재의 아픔을 전혀 남의 일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설교 핵심은 뭐냐 하면 어떻게 남인데 어떻게 내 일이 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남이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내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하죠. 백날 교회 나와도 당구공 위에 모래나 좁쌀 올려놓은 것처럼 다 새버려요. 몸이 아프면 ‘주여~’하면서 잘 나오죠. 새벽기도도 하고. 몸이 아플 때. 그러나 건강하면 그다음부터 빠이빠이죠.
그 방법을 지금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성도가 죽게 되면 성도가 죽는데 그냥 죽는 일이 없고 하나님의 언약에 부합 해서 죽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을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여호수아에게 남긴 그 언약의 말씀과 여호수아의 임종, 죽음이 결합이 되어서 죽게 됩니다. 그러면 집 정원에 잔디 물 주기 위해서 물구멍 하나 있는 호스로 주고 다닐 수도 있지만, 잔디 위에 긴 호스(Hose)를 깔아놓고 긴 호수에 세세하게 구멍을 다 뚫어요. 허리띠 구멍처럼 다 구멍을 내서 수돗물 틀게 되면 그 구멍마다 물이 다 새어 나오겠지요. 구멍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진척시키고 전개 시키면서 계속 죽는 사건을 구멍으로 남깁니다. 그러면 그 구멍 속에서 성도의 죽음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가 나오죠. 아까 말씀드린 거 다시 하면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신의 나라를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아야 천국에 간다고 했죠? 그 죄를 안다는 것은 죽어 마땅함을 아는 거거든요.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이상 절대로 자기를 죽어 마땅하다고 그걸 수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써요. 이게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에 말릴 수는 없어요. 그런데 그 선배 되는 사람들이 계속 죽어가면서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속성을 뿜어내면서 계속 호스를 통해서 죽음과 더불어서 언약이 계속 발전된 모습을 보이거든요.
그렇게 되려면 여호수아나 엘르아살이나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서 적절한 때 타이밍 맞춰서 죽어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더 쉽게 예를 들게 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빈 통이든 꽉 찬 통이든 뭔가 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안중근 의사에 대해 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오류는 뭐냐 하면 본인을 통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의 양동이 같은 통으로 생각하고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 하면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그 통에 담은 거예요. 통에 밑바닥이 닫혀 있으면 계속 담을 것이 나와요. 그렇다면 평범한 엄마 아빠 이런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가정의 사람들은 “왜 삽니까?”라고 물으면 “나는 내 자식을 위해서 어떤 고생을 해도 살아남아야 합니다”라는 명분이 그 통속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 통속에.
어떤 아이가 내 자식인데 귀가 안 들려서 아빠는 떠나고 나와 아들과 둘 남았는데 내가 죽을까 생각하다가도 그 아이가 청각 장애가 있어서 자기 죽으면 저 아이는 못 살까 싶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아이 살리기 위해서 나는 어떤 짓이라도 다 했다고 방송에 나와서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나름대로 명분이에요.
여러분의 명분은 뭡니까? 저는 명분이 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라고 봅니다. 인간은 명분이 있으면 안 돼요. 저는 그것 때문에 안중근이 옳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면 통처럼 밑바닥이 있으면 안 된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긴 파이프를 가지고 톱으로 한 대목을 썰어버려요. 앞에 썰고 뒤에 썰면 이건 하나의 마디가 되는 거죠.
훤히 보여야 한다는 거죠. 통으로 되었다는 것은 뭔가로 꽉 차 있는 것이고 꽉 차 있는 이것을 전부 다 주변으로 내보내 버립니다. 그러면 텅텅 비겠죠. 비어버리면 그동안 내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내가 명분으로 여겼던 것은 주변으로 전부 다 물러가 있고 안에는 뻥 하니 뚫려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다 보이죠. 보인다는 말은 시작과 동시에 내 죽음이 다 보이는 거예요.
시작과 죽음이 어떤 망원경처럼 보인다면 그 주변에 테두리를 차지하는 이게 뭐냐 하면 빈 껍데기 같은 내 인생이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누가 통과하도록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니까요. 누가 통과하도록. 누가 통과하냐면 하나님의 죽으심이 통과하는 자리, 그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죽으심, 피가 통과함으로써 주변에 있는 나의 가치 나의 명분은 그 피의 가치에 비하면 이건 오히려 방해물이 될 뿐이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을 부각하는 겁니다.
처음에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꾸 살아있는 그 자체가 언약을 방해한다고요. 살아있기 때문에 툭툭 막히고 마는 겁니다. 지금 제가 우리보고 뭘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앙부를 비워두란 말은 여러분들이 그렇게 사시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도를 죽일 때 그냥 아무렇게나 죽이는 것이 아니고 구멍 뚫린 마디로 된 관을 만드는 작업이 하나님에 의해서 굉장히 분주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서 지금 여호수아의 죽음과 엘르아살의 죽음을 언급한 겁니다. 그럼 그다음 문제는 여호수아는 죽는 게 무슨 뜻으로 죽고 엘르아살이 죽는 것은 무슨 취지로 죽느냐 하면 여호수아는 왕의 입장, 지도자의 입장입니다. 그것은 바로 민수기 23장 21절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있도다”라고 되어있어요.
현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다르죠? 우리는 아무도 안 부르잖아요. 아플 때 119는 불러도 그 외에는 안 부르잖아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래서는 안 되고 항상 부를 분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분이 우리의 왕이라는 겁니다. 그 역할을 누가 해주냐 하면 여호수아가 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오늘 본문 33절에 나오는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은 뭐냐?
엘르아살은 백성을 대표합니다.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거든요. 이 거룩하다는 것이 개개인 불러내서 “너 행동 똑바로 했어? 안 했어?”를 따져서 그걸 모아서 거룩이라 하지 않습니다. 서울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죄를 모아서 죄가 나타나는 게 아니에요. 죄를 모으는 것을 집합한다고 해서 집체라고 하는데, 죄를 모아서 이런이런 죄를 다 모으니까 내가 죄인 되었다는 건 집체적으로 죄를 보는 건데 그건 죄를 잘못 본 거예요.
내가 아는 죄를 다 끌어모은다고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인간은 죄인이에요. 그걸 집체가 아니고 총체라 하는 겁니다. 다윗이 간음을 범했고 다윗이 살인을 했으니까 다윗은 간음죄 더하기 살인죄 해서 죄인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보지 않고 자신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반드시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 거예요.
주께서 나로하여금 죄짓는 기능을 하게 하신 것에 대해서 다윗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죄짓고 나중에 늙어 죽는 것이 아니고 다윗은 죽기로 되어있는데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언약 안에 들어 있는 죄가 무엇인가를 그걸 기능을 하면서 자기의 평생 가운데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엘르아살의 존재 이유입니다.
엘르아살은 백성들이 총체적으로 죄인이에요. 죄인인데 하나님께서 엘르아살에게 제사장이니까 거룩이라는 직분을 유발하고 생산하는 기능을 하는 직분을 엘르아살에게 부여했습니다. 부여했으면 다시 정리해 봅시다. 여호수아는 왕 같은 존재로서 등장합니다. 물론 죽지요. 왕 같은 존재가 죽는다는 말은 여호수아의 언약 속에 왕 같은 요소가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다음 엘르아살이 죽는다는 말은 뭐냐 하면 제사장이니까 제사니까 희생이에요. 딱 두 개입니다. 왕 같은 분이 대신 희생하는 거예요. 이것이 언약에 좀 더 윤곽이 드러나는 그 기능을 투톱을 내세워서 이스라엘 속에 구체와 시키는 겁니다. 제가 아침에 구체화라 이야기했죠. 힌두교 이슬람교 전부 다 구체화 아니에요. 진짜 구체화는 어떤 분이 죽었는데 그분이 왕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왕을 부르지 아니하면 그것은 민수기 23장 21절에 의하면 그건 이스라엘이 아니란 거죠. ‘대단한 왕이다’라고 부르면 안 되고 제사장으로 죽었던 어린양이 되셨던 분이 왕이에요. 다른 왕은 없습니다. 다른 왕을 하나님이 주신 적이 없어요. 그렇다면 제3의 요소가 뭐냐? 이스라엘 백성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오늘 본문 31절에 나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여호수아는 죽고 그 생존했던 장로들은 뭘 깨닫느냐 하면 여호수아라는 왕 같은 그 기능과 엘르아살이라는 그 제사장 기능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계속 나타나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실패자이고 우리 스스로 단독적으로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 힘으로서는 그분들이 주신 언약 아니면 우리는 구제될 가능성이 전무 하고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방식입니다.
이제 결론합니다.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잘 아실 거예요. 그 의미를 오늘 여호수아를 끝내면서 다시 한번 분석해 봅시다. 우리만 있다 하지 말고 그냥 죄인들이 있다고 하고 그다음에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위대하신 주님 소원대로 이루어주시는 주님이 아니고 이미 우리 속에 들어오실 때 우리 죄를 아시고 들어왔고 우리 손으로 구원되지 못하는 것을 뻔히 다 통찰하시고 감안하시고 들어오신 거예요.
그러면 왕을 언제 불러야 합니까? 주님을 언제 불러야 하겠죠? 바로 우리가 나밖에 모르고 나 힘든 거 나 어려운 거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닦달하고 ‘주여, 이렇게 가혹한 인생을 주시면 나는 예수 못 믿습니다’라고 따지면서 덤벼들고 세상 좋아서 세상으로 나갈 때 다시 한번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으심, 주님의 임종을 반복해서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죠. 반복해서 알려주는 거.
내가 뭔가 주님과 더불어 있다고 여겼는데 다시 헤헤거리면서 자신은 주님 믿고 이런 이익을 얻었다고 여겼고 그것이 바로 내가 구원받는 이유이고 자신은 구원받은 것이 맞다고 자부할 때 다시 새로운 앙상블, 연합과 조합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죽으심을 또다시 우리에게 깨닫게 해서 바로 너 스스로 선다는 것은 예수님을 왕을 부르지 않는 태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죠.
날마다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왕을 부르기 위한 사태이고 사건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우리가 있지 내 인생 편하려고 행복하려고 주님 계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를 마감하면서 또다시 우리가 주님 십자가 앞에서 불신자이며 죄인이고 환자의 입장에 서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주께서 이것을 쓰시기 위해서 주께서 죄인으로 불렀다는 사실에 또한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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